제144화. 대격변 (2)
<사람을 공격했습니다. ‘살인 유희’가 발동합니다!>
검을 손바닥에 꽂아 넣자 피가 쏟아지며 민첩성과 공격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주는 스킬이 발동되었다. 사윤의 동공이 확장됐다. 시야가 넓어지고 피부로 와 닿는 공기의 흐름이 달라졌다.
사윤은 검을 휘둘렀다.
쾌속.
형체가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휘둘러진 검이 몬스터들을 도륙 냈다. 서리를 두른 검의 움직임은 눈으로 감지할 수 없었다.
오로지 감.
그것만이 서리 단약을 먹고, SS급의 민첩성을 최대한 끌어 올린 사윤의 공격에 반응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신속하게 움직인 검은 눈 깜짝할 사이 적의 목을 노렸고 헉, 숨을 들이켜는 사이 그 목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데구루루. 떨어진 목이 바닥을 나뒹군다. 그것이 헌터들의 발에, 몬스터들의 뜀박질에 이리저리 치여 멀리 굴러갈 즈음에는 세 개의 목이 추가로 떨어졌다.
방심하는 순간 목숨을 내놓는 거나 마찬가지다.
눈앞의 적이 여태껏 상대했던 적과는 다르다는 걸 자각한 몬스터들이 사윤에게 대응하기 위해 한데 모이기 시작했다. 밀집하는 녀석에 사윤이 조소를 흘렸다.
뭉치면 강해지는 줄 아나 보지.
아니다.
센 놈은 그냥 센 거다.
뭉치지 않아도 혼자서 고고히.
혼자 있을 때 강한 놈이 원래 제대로 된 강자인 법이었다.
사윤은 검을 틀어쥐어 전투에 변주를 넣었다.
이전이 그저 한없이 재빠른 검이었다면 이번에는 한없이 무거웠다.
일도일 뿐인데도 사윤이 쥔 봄의 여명이 마치 거대한 대도라도 되는 듯 무겁게 휘둘러져 몬스터들을 찍어 눌렀다.
―끄그극!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는 것은 검이다. 끝이 첨예하고 날카로워 무엇이듯 벨 것 같은, 흉포한 서리의 기운을 머금은 역설적인 봄의 여명인데 사윤의 검 아래에 깔린 몬스터들은 마치 거대한 쇳덩이에 짓눌리기라도 한 것처럼 으깨져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 무거웠던 검은 이제 다시 가볍게, 물 흐르듯이 부드럽게 몬스터 사이를 파고들었다.
검에서 흘러나온 서리의 기운이 마치 눈보라처럼 허공에 휘몰아쳤다. 검을 사선으로 내리그었다가 이어지는 공격을 받아 쳐 내며 몸을 회전시킨다. 중간에 내뻗은 발이 몬스터의 복부를 가격했고 그 발이 다시 땅을 디뎠을 때 검은 몬스터들의 머리 위에 있었다.
서걱!
아래로 그어 내리는 일격에 놈들이 반으로 갈라진다. 그것이 신호탄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살귀라도 된 양 웃은 사윤이 전장 한복판에서 춤을 췄다. 어깨에 아슬하게 걸치고 있던 코트가 그 격동적인 움직임을 감당하지 못하고 기어이 떨어져 눈보라에 휘날렸다.
아래로 찍어 누른 검은 다시 위로 들어 올려서, 내려찍기를 할 것 같은 자세로 검을 흘려 흉곽 옆쪽을 강타한다. 검 끝에서 나온 포악한 백광은 몬스터들의 날개를 찢어발겼고 놈들에게서 흘러나오는 피는 사윤의 전투광 특성을 더욱 활발히 해 주었다.
그쯤 되니 전장은 무대 같았다.
사윤의 전투를 위해 만들어진 무대.
오랜 시간 랭크 다운으로 몸에 익은 실력보다 처참한 수준의 전투를 치러야 했던 사윤은 이 자리에서 그 분을 풀겠다는 듯 재빠르고 민첩하게 움직였다.
그 움직임은 소란스러웠으나 사윤의 주변은 결코 소란스럽지 않았다.
물론 이곳은 전장이다. 수백의 몬스터들이 있었고 수십의 헌터들이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들이 내지르는 비명, 고함 등이 곳곳에서 넘쳐났지만 사윤의 반경으론 없었다.
사윤이 발을 딛고 있는 그 공간에는 비명도 고함도 없었다. 몬스터들의 울음도 없고 오로지 절삭음과 폭음, 타격음만이 들릴 뿐이었다.
그렇기에 사윤은 웃고 있었으나 그가 있는 자리는 한없이 시리고 차가웠다. 발을 내뻗으면 죽는 사신의 영역처럼.
이제 사윤을 마주한 몬스터들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어 댔다. 흥에 겨운 사윤이 저도 모르게 발동한 공포 유발 스킬이 안 그래도 전세에 분위기가 압도당해 있던 놈들을 더욱 공포에 몰아넣은 것이다.
콰가가가!
그러거나 말거나 사윤은 얼어붙은 놈들을 수월히 처치했다.
시스템창이 뜬 건 그때였다.
<검의 극의를 깨달았습니다. 새로운 스킬이 생성됩니다.>
[일도계양단(SS+)]
쾌, 중, 유, 변, 환. 다섯 가지 검법의 극의를 깨달은 자는 검으로 세계의 경계마저 구분하니!
-일격의 검술로 공간을 분리시킵니다.
-분리된 공간은 10분 뒤 재결합되며 일도계양단은 사용 후 72시간 동안 재사용이 불가합니다.
<세계를 구분 짓는 것은 본디 신의 몫! 인간의 일신으로 불가능한 업적을 달성합니다. 새로운 칭호와 특전이 부여됩니다.>
[권위를 탐하는 자(SSS)]
[기적을 읊는 자(SSS)]
S가 참 많이도 떴다.
사윤은 새로 생긴 스킬 설명창을 힐끗 보았다가 창을 껐다. 새 스킬이 생긴 건 좋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슬슬 막아 두었던 게이트가 깨질 조짐이 보였으니까.
15분 정도 지났나.
그 15분 사이 사윤은 마치 몬스터들의 재난이라도 된 것처럼 적들을 휩쓸고 다녔지만, 아직 부족했다. 사윤이 처치한 적은 전체의 3할밖에 되지 않았고 게이트가 다시 열리면 그 숫자는 고스란히 복구될 거였다. 아무리 사윤과 헌터들이 힘을 합쳐 반이나 되는 적을 처치했다 해도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생각보다 화력이 약했다.
솔직히 말해서 제가 3할을 처치한다면 남은 헌터들이 5할은 처치할 줄 알았다. 그리하여 도합 8할의 적을 상대해 승기를 완전히 가져올 줄 알았는데 막상 까 보니 6할을 겨우 넘는 수준에 불과했다.
헌터들이 약한 것은 아니다. 그저 이 게이트가 이례적인 거였다.
S급 몬스터를 이렇게 많이 토해 내는 게이트라니 듣도 보도 못했다.
만약 화합의 축제가 열리지 않았을 때 이 게이트가 열렸으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만으로도 아찔하다.
지금이야 정상급 헌터들이 막아서고 있지만, 축제가 열리지 않았다면 A급 몇 명에 S급 한두 명이서 막다가 순식간에 사망했을 터다.
사윤은 바닥을 잠시 바라보았다.
이미 열이 넘은 헌터가 사망했고 스무 명 이상이 치명상을 입었다. 상황이 안 좋은 만큼 다른 헌터들이 전투가 막 시작되었을 때보다 더 강한 화력을 보여 줄 것이란 기대를 품긴 어려웠다.
이렇게 되면 자신이 더 날뛰는 수밖에 없다.
방어를 버린다.
판단을 내린 사윤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어 혀를 찼다.
공세에 치중하기 위해 있는 특전이란 특전은 전부 써 방어력을 공격력으로 치환해 버리면 일격만 허용해도 치명상이었다. 최악의 경우는 사망으로 직결될 테고 그렇다면 상위 헌터들이 모두 있는 이 자리에서 냅다 제 자살 쇼를 보여 주는 꼴이었다.
패를 드러낼 수는 없지.
적당한 조력자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사윤은 고개를 돌렸다.
마침 꽤 괜찮은 인물이 있었다.
공격에 맞지 않도록 도와줄 조력자로 안성맞춤인 이가.
홀 전체를 둘러본 사윤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너도 왔겠지.
“그레이나!”
미래시를 가진 미국의 그레이나. 미국이 금이야 옥이야 다루고 있어 개인 활동이 거의 불가능하지만 상위 헌터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그라면 분명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가둔 감옥 같은 보호 숙소에서 탈출해 이번 축제에도 참여했을 것이다.
“히익!”
아니나 다를까 이름을 크게 부르니 어디선가 기겁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들은 적 있는 목소리다. 사윤은 소리가 난 곳을 파악하고 재희에게 달려갔다.
“이재희, 그리폰 두고 시로 타고 빠져. 위험하다.”
“후방으로 빠지라는 겁니까?”
“어.”
“음, 어째 그 말이 라이까지 내놓으라는 말처럼 들리는데요.”
정답이다.
라이가 있는 이재희라면 후방으로 빠지지 않아도 충분히 활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력 소환수를 뺏긴 상황이라면 후방에서 전투에 가담하는 게 낫다.
그 사실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되묻는 이에 사윤은 숨을 들이켰다.
남의 소환수를 당당히 내놓으라 하는 제 꼴이 조금 우스울 수도 있겠지만 뭐 어떡할까. 단순히 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그리폰과 라이를 맡기자니 손해였다.
그러니 뭐 별수 없다.
더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사람에게 잠시 양도해야지.
크고 화려한 희생만이 어디 대를 위한 희생이겠는가. 희생은 이런 사소한 곳에서도 끊임없이 일어났다.
다행히 이재희는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위인이었다. 그는 별말 없이 라이의 등에서 내려와 시로의 등을 타고 빠졌다. 이전에 성장 물약을 먹여 시로를 S급까지 올려 둔 게 선견지명이었다.
사윤은 곧바로 라이를 타고 그리폰의 발을 붙잡았다.
“라이, 전광석화.”
컹!
펜리르의 몸에 빛이 깃드는가 싶더니 거대한 늑대가 빠르게 공간을 가르며 사윤이 명한 곳으로 내달렸다. 갸갸갸갹! A급의 몸으로 그 속도를 강제로 따라가게 된 그리폰이 연이라도 된 것처럼 펄럭거리며 난동을 부렸다. 아랑곳하지 않은 사윤은 헌터들 사이, 무너진 건물의 잔해 아래에 숨어 있는 금발의 여인을 발견했다.
“그레이나.”
잔해를 발로 차 치우며 그 이름을 부르자 숨어 있던 여인이 혀를 차며 사윤을 올려다보았다.
“권사윤.”
“얘 타고 미래 좀 봐 줘라. 대충 나 공격 안 맞게 신호만 주면 돼.”
“무슨 미친 소리야? 미래라는 게 내가 보고 싶다고 해서 그냥 볼 수 있는 건 줄 알아? 그건….”
“그래, 계시처럼 내려오는 거겠지. 근데 너 미래시만 있는 거 아니잖니.”
“…….”
“있잖아. 일보 예지.”
여인이 정곡을 찔린 것처럼 움찔거렸다. 사윤은 그레이나를 들어 올려 그리폰 위에 태웠다.
“야!”
당황한 여인이 소리쳤다. 사윤이 짜증스러운 눈으로 흘겨보자 날카로웠던 눈빛이 조금은 얌전해졌다.
“마력 많이 들어.”
“포션은 폼으로 뒀니. 이거 써. 너 다 줄 테니까.”
사윤은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대량으로 꺼내 그레이나에게 건네주었다. 어떠한 핑계로도 빠져나갈 수 없는 덫에 걸렸다는 걸 자각한 그레이나가 한숨을 내쉬며 그리폰의 털을 붙잡았다.
“협회에서 네게 따로 예지 비용을 청구할 거다.”
“내가 너네 협회보다 돈 많을 텐데 뭘 걱정해? 어지간한 공격은 내가 알아서 피할 테니까 넌 분 단위로 스킬 써서 위험한 공격이 올 것 같으면 신호 줘.”
“분 단위? 그렇게 쓰면 아무리 포션이 많아도 못 버텨! 내 몸이 먼저 망가진다고!”
“그거 몇 달이면 회복되잖아. 여기서 떼죽음당하는 것보단 나을 텐데.”
사윤이 얼음이 떨어져 슬슬 열리고 있는 게이트를 향해 눈짓했다.
“최정상이라는 헌터 다섯 중 두 명은 화합의 축제에 불참했고 나머지 두 명은 저기서 고군분투하고 있지. 나 말고 저거 막을 수 있는 놈이 여기 있을 것 같아?”
“…….”
“네 잘난 미래시를 써서 확인해 보든지.”
그 말이 결정타였다.
“…신사다운 면모라곤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없어.”
투덜거린 그레이나가 결국 그리폰 위에 올라타 눈을 감았다.
“저런, 또라이에게 그런 걸 기대하면 안 되지.”
낮은 목소리로 핀잔한 사윤은 예지를 시작하는 그레이나를 보다 방어력을 떨어트리고 민첩성과 공격력을 올려 주는 스킬과 특전을 모두 사용했다.
이제 방어력은 제로다.
헌터가 아닌 일반인보다 못한 수준이었다.
적들은 모두 S급이었으니 한 대만 맞아도 골로 가기 딱 좋은 상태였지만 사윤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라이!”
여러 게이트에서 호흡을 맞춰 온 펜리르가 귀신같이 신호를 알아듣고 땅 위를 내달렸다.
“4시 방향에서 기습!”
전투에서 적의 다음 행동을 예측할 수 있는 일보 예지를 사용한 그레이나가 하늘에서 경고했다. 비행 능력이 좋은 그리폰이 몬스터들을 피해 재빠르게 비행하며 그레이나가 정상적으로 사윤을 서포트할 수 있도록 돕고 있었다.
인간 옵저버가 따로 없다.
피식 웃은 사윤은 곧바로 몸을 돌려 달려드는 적을 쳐 내고 얼음이 무너져 쏟아지는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크아아아아!
튀어나온 몬스터들이 포효한다.
적자생존과 방어력 치환 스킬들의 남은 시간은 10분, 서리 단약의 유지 시간은 이제 40분이었다.
쿵쿵!
이 와중에도 서리 단약의 기운이 몸 안에서 날뛰고 있었기에 질끈 눈을 감았다 뜬 사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입가에서 차가운 서리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10분 안에 모든 걸 끝낸다.
결심한 사윤의 눈동자가 푸른빛으로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