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3화. 대격변 (1)
혼란 속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선택했다.
도망칠지, 맞서 싸울지.
홀에 있던 모두가 헌터였으니 대부분 맞서 싸우는 걸 택했으나 그들의 자부심과 용기는 얼마 가지 않아 휘발되었다. 베어 내고 처치해도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들의 압도적인 머릿수에 기가 질린 것이다.
“크어억!”
팔이 잘린 누군가 벽에 처박혔고 또 누군가는 심장이 꿰뚫려 죽었다. 제정신으로 싸웠다면 그리 허망하게 당하지 않았을 텐데 방심이 큰 피해를 불러와 생긴 일이었다.
시에에엑!
날개 달린 것들이 공중을 가득 채웠다. 그러고도 모자라 일체의 여백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양 하늘에 열린 게이트에서 수백 마리씩 더 내려왔다. 눈앞이 몬스터 무리로 인해 캄캄했다. 적어도 천 마리 이상은 보이는 크고 작은 몬스터들은 모두 S급 이상이었다.
재앙이다.
이건 재앙이라 칭할 수밖에 없었다.
“시발.”
상황을 판단한 사윤은 제일 먼저 보호 및 치료에 특화된 서포터 헌터를 찾았다. 다행히 이 방면으로 뛰어난 헌터 한 명을 알고 있었다.
“송양!”
많은 인파 속이었지만 그를 찾는 건 쉬웠다. 겁에 질린 송양은 분명 홀 밖으로 도망치려 할 테니 나가는 문을 확인하면 되었다. 사윤은 때마침 문 앞에서 인파에 치이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동양인치고 피부가 창백할 정도로 허옇고 다크서클이 가득 내려와 있는 비실비실하게 생긴 남자. 누가 봐도 송양이었다.
남자를 발견한 사윤은 허공답보를 이용해 공중을 걸어 인파 사이에서 그를 빼냈다.
“으아아아악!”
“몬스터 아니니까 정신 차려라.”
“미친, 사윤?”
“그래 미친 사윤이다. 정신 들었으면 배리어부터 쳐. 일반 시민까지 무덤 친구로 삼고 싶지 않으면.”
“배리어?”
송양이 기함하며 되물었다. 재희 곁으로 돌아온 사윤은 짐짝처럼 들고 온 남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저 새끼들 여기서 나가면 어떻게 될지 감이 안 와? 게이트까지 합쳐서 배리어 쳐. 날개 달린 놈들이니까 바다 건너가기라도 하면 골치 아프다.”
제주도 내에서까진 여기 모인 헌터들이 이 악물고 해결할 수 있는 스케일이었다. 그러나 놈들이 비행해 바다를 건너가 버리면 그때부턴 사안이 커진다. 끔찍한 피해가 닥칠 거기에 경고하자 송양이 입을 뻐끔거리다 기겁했다.
“너 설마, 싸우게?”
“그럼 가오 없이 도망치냐? 이딴 것도 S급이라고 각성을 처해서.”
신랄한 비판에도 송양은 화를 내거나 억울해하지 않았다. 그런 말 하나하나에 상처받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욕을 들어 먹었다. 주로 사윤에게 말이다.
“너 저 규모 안 보여? 전부 S급이야. 여기 모인 사람이 아무리 강해도 다 못 막는다고!”
“그럼 이대로 손 놓고 있게? 싸우는 사람들은 대가리가 비어서 싸우냐?”
도망친 헌터들은 전체 인원의 3할이었다. 물론 현재 진행형으로 도망치고 있는 헌터가 1할쯤 더 되었지만 그걸 감안하고서라도 절반이 넘는 헌터들이 싸우고 있었다.
힘을 가지고 있으니 그만한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알고 있었다. 여기서 막지 못하면 피해가 더 커진다는 걸.
그러니 여기서 막는 게 가장 베스트 선택지였다.
“끄아아악!”
그러나 사명감과 실력이 반드시 비례되는 것은 아니다. 용감하다고 죽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 와중에도 헌터들의 수는 빠르게 줄고 있었다. 실력이 좋다지만 한 번에 수십 마리나 되는 S급 몬스터들에게 둘러싸이는 경험은 사윤만큼 미공략 게이트를 공략한 게 아니고서야 좀처럼 겪어 볼 수 없는 일이었다.
필사적으로 싸우다가 죽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덜 희생시키려면 놈들이 도망갈 수 있는 통로를 막고 자신이 날뛰는 수밖에 없었다.
저는 죽지 않았으니까.
몇 번이고 무리해서 싸울 수 있는 거다.
“밤쥐가 언제부터 세계를 위했다고. 말하는 것만 보면 아주….”
“송양.”
사윤은 한시가 급한데 질질 끄는 남자에 인상을 찌푸렸다. 확! 멱살을 잡아채자 안 그래도 허여멀겋던 송양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셋 셀 때까지 배리어 준비해. 하나, 둘….”
“알겠어! 알겠다고!”
사윤이 그를 몬스터에게 내던질 자세를 취하자 비명을 지르듯 대꾸한 송양이 이내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그가 두 손을 바닥에 겹쳤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시발 내가 조금 더 빨리 도망갔어야 했는데….”
“저승으로 도망가고 싶은 거 아니면 빨리 하지?”
“할 거니까 좀 기다려.”
혀를 찬 남자가 곧 낮은 신음을 흘렸다. 그가 입을 벌리자 강하게 씹은 혀에서 흘러나온 피가 후두둑 바닥에 떨어졌다. 남자의 손바닥이 그 위를 덮는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그가 이내 눈을 감았다.
“혈벽.”
낮은 중얼거림에 남자의 손 밑에서부터 붉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기운은 이내 바닥을 휘감고 홀 전체를 뒤덮어 하늘까지 치솟았다. 불과 1분도 안 되는 시간 만에 게이트가 있는 곳까지 기운을 뿜어낸 남자가 눈을 뜨자, 홀을 감싼 적색의 기운은 고스란히 딱딱한 벽이 되었다.
“몇 분 버틸 수 있어.”
“충격에 따라 30분에서 한 시간. 중간에 내가 공격받으면 해제되고.”
“호위 붙여 줄 테니까 배리어나 잘 치고 있어.”
사윤은 리안에게 송양의 호위를 부탁했다. 몬스터가 공격해 오자마자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전투에 임했던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고 사윤의 명을 따랐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어릴 적 구해 준 것에 대한 충성심은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배리어가 쳐졌으니 당장 시급한 건 해결되었다. 사윤은 밖으로 나갈 통로가 막혀 홀 안을 바삐 돌아다니는 비행형 몬스터들에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간만에 골치 아프네.”
웬만하면 안 먹고 싶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선택지가 없었다. 인벤토리를 연 사윤은 게이트 보상으로 수령한 이후로 한 번 먹고 봉인해 두다시피 했던 약을 꺼냈다.
[서리 단약(SS+)]
-유일무이한 단약. 냉기 저항력을 높여 주고 서리의 능력치를 100% 상승시킨다.
주의: 단약 복용 후 한 시간 내에 화염단을 섭취하지 않을 경우 심장이 얼어붙습니다.
서리 스킬을 획득하면서 함께 얻은 단약으로 먹어 보니 부작용이 생각보다 심해 아낀다는 명목으로 섭취를 기피했던 약이다. 먹는 순간부터 손발이 저릿하게 시려 오는 건 물론이고 심장 뛰는 소리가 귓가에 들릴 정도로 심장이 크고 빠르게 뛰어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찼다. 복용 후 한 시간이 지나면 극심한 오한을 느끼다가 심장이 얼어붙어 죽어야 했다. 그런 약이니 먹고 싶을 리가 있겠나.
물론 사윤은 시스템 덕분에 죽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한기와 뼛속이 에이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장담컨대 웬만한 고문보다 서리 단약을 복용하는 게 더 효과가 좋을 터였다.
꺼림칙한 눈으로 잠시 약을 내려다본 사윤은 한숨을 내쉬고 단약 하나를 꺼내 입에 넣었다. 목울대를 한 번 움직여 삼키자마자 곧바로 강한 한기가 몸속을 파고들었다.
한 시간.
그 안에 승부를 봐야 했기에 사윤은 검을 바꿔 들었다.
딱 보기에도 인외 몬스터였으니 헤리스의 단도보다 더 적절한 것이 있었다.
“재희 넌 어쩔래. 소환진 그릴 때까지 지켜 줘?”
옆에서 어느덧 라이에 올라탄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기를 봄의 여명으로 바꾸면서 묻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소환진은 따로 그리지 않아도 됩니다.”
“라이 혼자로는 부족할 텐데.”
“압니다. 라이 혼자 싸우도록 할 생각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런 경우를 대비해 몸에 새겨 둔 소환진이 있습니다.”
“뭐?”
사윤은 제가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돌렸다가 이재희의 말이 농담 따위가 아님을 깨달았다. 옷을 걷은 재희의 팔에는 총 네 개의 소환진이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다.
“뭐, 조금의 통증 정도는 감당해야겠지만 그걸 감수하고도 급할 때 사용하기에는 꽤 괜찮은 방법이죠.”
부연 설명을 덧붙인 남자가 소환진 위로 손을 가져다 댔다. 빛이 번뜩이고 콰드드득 살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소환수들이 나왔다.
그리폰과 구미호, 은빛 늑대.
그들을 소환한 남자가 피 흐르는 팔을 축 늘어트린 채 라이의 털을 쓰다듬었다.
“가장 강해 보이는 놈들부터 처리해 줘.”
캉!
부탁에 펜리르가 용감하게 짖었다. 사윤은 그 모습을 보다 봄의 여명을 한 바퀴 돌렸다.
저 미친놈이 저렇게까지 하는데 자신도 한바탕 놀음을 보여 줘야 할 때 아닌가.
마침 서리 단약의 기운도 온몸에 퍼진 참이었다. 사윤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목청껏 외쳤다.
“살고 싶은 놈들은 알아서 냉기 저항 아티팩트 챙겨!”
화합의 축제까지 올 실력이면 사윤을 모르는 이는 거의 드물었다. 그 경고가 쩌렁쩌렁 홀 안을 울리자 싸우고 있던 헌터들이 다급히 냉기 저항 아이템을 착용했다. 그러다 몬스터에게 얻어맞아 날아간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사윤은 잠시간 뜸을 들였다가 쓸 수 있는 능력의 최대치로 서리 기운을 해방시켰다.
<스킬 ‘서리’가 일대를 장악합니다!>
서리의 기운이 일정치 이상 개방되면 뜨는 알림창과 함께 사윤의 발밑을 시작으로 홀 전체가 삽시간 만에 얼어붙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리의 기운은 더욱더 뻗어 나가 혈벽을 타고 올라가 게이트까지 닿았다.
<스킬 ‘서리’의 힘이 한계치에 도달했습니다. 특수 효과 ‘서리 지대’가 발동합니다!>
새로운 알림창과 함께 차갑다 못해 뼈가 시린 한기가 홀 안에 들이닥쳤다.
휘이이잉!
눈보라가 시작된다. 사윤의 전투 스타일을 닮아 잔혹하고 야비하기 짝이 없는 거친 눈발이 아군이며 적군을 가리지 않고 홀을 뒤덮어 생명체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그로 인해 전투가 한 템포 늦춰졌다.
쩌저저적.
서리의 기운이 게이트 포화로 몬스터를 쏟아 내고 있는 게이트를 단단히 얼렸다. 강제적으로 게이트 포화 현상을 중단시킨 힘에 지켜보고 있던 헌터들이 입을 떡 벌렸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힘이었다.
임시방편이라 오래는 못 가겠군.
사윤은 조금씩 금이 가는 게이트 위 얼음을 확인하고 한 발, 걸음을 떼었다. 뒷발이 앞으로 나가며 얼어붙은 땅을 짓밟았다.
<당신의 기운이 일대를 짓누릅니다! 스킬, ‘영역 선포’가 발동합니다.>
<서리 지대에 당신의 영역이 선포됩니다.>
<30분간 특전, ‘적자생존’이 활성화됩니다. 당신의 기운에 저항력을 갖추지 못한 모든 생명체의 능력치가 10% 감소합니다.>
대체로 통하는 논리가 있다.
날개 달린 것들은 추위에 약하다는 것 말이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곳에서 비행형 몬스터들이 무사할 순 없었다. 적자생존이 활성화되는 것과 동시에 비행하던 S급 몬스터들이 휘청거렸다. 사윤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봄의 여명을 휘둘렀다.
콰가가각!
서리의 기운을 머금은 여명의 힘이 백광의 검기를 자아냈다. 그것이 바닥의 얼음을 깨부수며 거대한 반원을 그려 몬스터들을 향해 날아갔다.
키에에엑!
비명을 지르며 수백의 몬스터들이 추락했다. 비행형이지만 두 다리로 이족 보행을 할 줄 아는 놈들이었기에 사윤은 땅을 박차고 놈들에게 달려들었다. 하늘을 날 줄 아는 것들은 땅에 떨어졌을 때 한없이 약해진다. 그러니 지금이 전세를 바꿀 기회였다.
쿵쿵! 심장이 긴장에 의해서인지 서리 단약에 의해서인지 모르게 빠른 속도로 뛰어 사윤의 흥분감을 고조시켰다.
“유지 시간 한 시간이다. 냉기 저항 포션 똑바로 챙겨 먹고 싸워!”
사윤이 홀이 뒤흔들리도록 목청껏 외쳤다. 예술적이라고 해도 좋을 광경에 얼이 빠져 있던 헌터들이 정신 차리고 각자의 무기를 들고 전투를 재시작했다.
역공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