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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142)화 (142/266)

제142화. 전야제 (11)

“잘 지냈냐고?”

사윤의 멱살을 쥔 남자가 기가 막힌다는 듯 되물었다. 눈빛이며 손등에 선 핏줄이며 외형적으로 살기등등하지 않은 것이 없었지만 그래 봐야 독일 헌터다. 서툰 한국어 발음으로 내뱉는 협박은 우스꽝스러움을 면치 못했다.

“네놈이 내 단도를 훔쳐 갔다. 내가 본 손해가 얼만진 아나?”

“저런, 말은 제대로 해야지 가이데르.”

“도미니크다!”

이를 간 남자가 정정했다. 다 틀렸군. 사윤은 성심성의껏 찍었음에도 한 음절도 맞히지 못함에 유감을 표했다.

흔한 이름인데 왜 못 외웠지.

“아, 너무 흔해서 기억 안 났나?”

“…….”

“너처럼 생겼으면 외울 만도 한데.”

아무리 도미니크가 흔한 이름이었다 한들 저 얼굴은 쉬이 잊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이가 몇 살이라고 했더라. 스물여섯? 스물일곱? 그 정도밖에 안 됐는데 수북한 얼굴 수염이 안쓰러울 지경이다. 얼굴은 또 얼마나 노안인지. 하긴 서양인들이 빨리 성장하고 빨리 늙는다는 얘기는 들었다. 그렇지만 내가 아는 서른 살 서양인은 멀끔히 잘생겼는데.

상념에 빠져 있자 기어코 빠득, 하고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도미니크의 치아 일부가 짓씹는 힘을 견디지 못해 깨지는 소리였다.

“2년 전 일을 결판내지.”

밀치듯 사윤을 놓은 그가 허리춤에 찬 검을 빼 들었다. 오. 사윤은 광택이 좋은 그 검을 탐스럽게 응시했다.

“못 본 사이 좋은 게 생겼네?”

“넌 내 이름도 기억 못 하면서 무기는 기억하나?”

“무기는 당연히 기억해야지. 언제 어디서 내 손에 들어올지 모르는데.”

능청스럽게 대꾸하며 재희를 힐끗거렸다. 자신이 시비를 건 게 아닌, 도미니크 쪽에서 먼저 도발해 왔음을 증명하기 위한 눈짓이었는데 사윤과 눈이 마주친 남자는 한숨만 내쉴 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종내 시선을 피하기까지 하는 모습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무시하는 건가?

아니, 무시는 아니다. 이건 못 본 척해 줄 테니 알아서 처리하라는 뜻이다.

제멋대로 해석한 사윤은 웃으며 헤리스의 단도를 꺼내 들었다. 그걸 확인한 도미니크의 눈이 분노로 일렁거렸다.

“헤리스의 단도!”

“잘 알아보네? 네 손으로 양도해 준 건데도 배가 좀 아팠나 봐.”

“양도한 적 없다. 네 놈이 가져간 거지!”

소리친 남자의 신형이 일순 사라졌다.

콰아아앙!

그와 사윤이 충돌했다. 단도를 역수로 쥐어 공격을 막은 사윤은 남자와 검을 맞댄 채로 입을 열었다.

“헤리스의 참회.”

퍼어엉!

곧바로 폭음과 함께 잿빛의 연기가 시야를 방해했다. 의도한 짓이었다.

사윤은 연기 속에서 은신을 사용해 움직였다. 잿빛 속을 파고들고 그 안에서 찬란한 금안을 찾아낸다. 주변이 어두울 때 더 튀는 눈동자였기에, 폭발에 대응해 뒤로 물러난 도미니크의 위치를 알아차리는 건 누워서 떡 먹기였다.

쇄액!

공간을 가른 단도의 끝이 사내의 얼굴로 향했다. 팔을 크게 휘둘러 가속력을 더한 순간이었다.

채애앵!

강한 힘을 받아 최고 속력으로 날아온 철검 하나가 도미니크와 사윤의 사이를 갈랐다. 역수로 쥔 단도는 아쉽게 철검을 내리찍었다. 방어 타이밍이 조금만 늦었더라도 남자의 한쪽 눈을 실명시킬 수 있었던 사윤이 혀를 찼다.

이빨을 드러내면 살려 두지 않는 게 사윤의 스타일이었다. 마침 화합의 축제라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도 많겠다. 본보기로 한 놈 보내려고 했는데 예상보다 일찍 관리자들이 와 버렸다.

“화합의 축제입니다. 적당히 하십시오.”

보랏빛 머리카락을 포니테일로 높게 묶은 여인이 사윤과 도미니크를 응시하며 경고했다. 손에는 날리지 않은 또 하나의 철검이 들린 채다.

관리자.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강한 헌터들을 한데 불러 모은 자리인 만큼 화합의 축제에서는 매번 크고 작은 사고가 일어났다. 그것들을 최소화하기 위해 축제에 참여한 길드장들 중 몇몇이 관리자를 자원하곤 했는데 이번 해에는 라이언 쪽이 자원했나 보다.

아는 얼굴이었기에 사윤은 짧게 고민했다. 러시아 헌터들과 쓸데없이 적대 관계를 빚을 필요는 없었다. 안 그래도 2년 전까지 러시아와 프랑스 쪽 범죄 길드를 잡아 서열 정리를 했던 사윤이었기에 이 이상 마찰은 위험했다. 아무리 범죄 길드를 소탕한 거라 해도 각 나라 헌터들 사이에선 일종의 연대감이 있었기에, 저 새끼한테 우리 나라 헌터가 계속 털렸다고? 따위의 적대감을 심어 줘 봤자 손해만 봤다.

무엇보다 축제에선 세 번의 경고를 들을 경우 퇴장당한다. 기껏 이재희를 데려왔는데 모양새 빠지게 경고 먹고 쫓겨날 순 없지 않은가.

“운이 좋네, 막시밀리안.”

사윤은 들고 있던 단도를 도로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도미니크라고 몇 번을 정정해야 하지?”

이름이 잘못 불린 남자 역시 이를 갈다 납검했다. 또 틀렸군. 사윤은 역시 도미니크는 너무 흔한 이름이라 기억이 안 나는 것 같다는 판단을 하고 라이언 길드 측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못 본 사이 꽤 많이 컸다. 문득 그와의 첫 만남 때가 떠올라 눈이 휘도록 웃자 시선을 마주한 여인이 경계하듯 검을 움켜쥐었다.

거참 섭섭하다.

누가 보면 제가 도미니크가 아닌 그를 공격한 줄 알 터였다.

“안녕, 리안.”

“줄여 부르지 마십시오.”

“한국어 많이 늘었네?”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내 덕이지.”

사윤은 ‘때문’이란 탓하는 말을 태연히 제 덕으로 고치곤 웃었다. 특유의 킬킬거리는 웃음을 흘리자 여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 재수 없는 웃음은 여전하시군요.”

“네가 좋아하는 웃음이지.”

능청스러운 대꾸에는 화도 안 난다는 듯 한숨이 돌아왔다. 사윤은 낮게 웃으며 전투로 힘이 들어갔던 몸을 가볍게 풀었다.

라이언 길드의 길드장 미샤 리안.

그는 3년 전 사윤이 타국 범죄 길드와 서열 싸움을 할 때 사윤에게 구해졌던 슬럼가의 어린 소녀였다. 지금은 시간이 흘러 열여덟 살이 됐지만 말이다.

저 나이에 러시아 1위를 찍고 길드장을 먹다니.

러시아 헌터계의 미래는 밝다 못해 눈부셨다. 그에 비하면 한국 헌터계의 미래는 암담할 지경이었다.

사윤은 잠시 이한을 제외한 국내의 다른 랭커들을 떠올렸다. 리안에 비할 만큼 나이가 어린 헌터는 없었고 있다 해도 활동을 멈춘 지 꽤 오래된 이들이었다. 이게 다 윗대 꼰대들을 제대로 족쳐 놓지 못한 탓이다.

그들이 자꾸 협회 안과 길드 안으로 인재를 숨기려 들고 그 안에서 제대로 된 대우도 하지 않고 학대에 가까운 업무를 부여하니 자꾸만 인재가 해외로 나도는 것 아니겠나.

물론 사윤도 밤쥐 길드원들을 지독하게 부려 먹었지만, 최소한 그만큼의 대우는 해 줬다. 그들이 편히 쉴 수 있는 숙소를 기본적으로 제공해 줬고 억대 연봉과 성과급까지 심심찮게 넣어 줬다. 그러다 가끔 A급 아이템 서너 개를 던져 주기도 하면서 그들의 헌터 생활을 연명시켰다. 그러니 밤쥐 길드원들이 죽겠다 죽겠다 하면서도 죽지 않고 끈질기게 버티고 있는 거였다.

딱히 애국심이 뛰어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속한 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못하면 짜증이 나는 법이었다. 혀를 찬 사윤은 리안과 나이가 비슷한 사람 중 그와 비견될 만한 인재가 누구 있을지 생각하다가 쓴웃음을 삼켰다.

한건주 정도면 대볼 만하겠어.

S급이 된 한건주라면 충분히 내세울 만했다. 그가 전용 스킬까지 모두 개방했다면 국내 랭킹도 바뀌게 되리라.

아직은 먼 이야기 같았기에 고개를 저은 사윤은 제 곁에서 10미터가량 멀찍이 떨어져 있는 재희를 곁으로 불렀다.

“슬슬 그것 좀 건네주지?”

“아.”

리안이 품을 뒤져 팔찌 두 개를 건네주었다. 통역 아티팩트였다.

다양한 나라의 헌터들이 모이는 자리인 만큼 통역기는 필수다. 사윤은 그걸 다가온 재희에게 건네주고 제 앞의 두 헌터에게 재희를 소개시켰다.

“S급 소환사.”

캉!

“그리고 새끼 펜리르.”

설명은 간단했다. S급 소환사라는 말에 관심을 보이던 두 헌터들은 라이를 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펜리르 자체가 쉽게 볼 수 없는 편인데 어린 펜리르는 그보다 더 희귀한 것이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재희입니다.”

그는 지나치게 간략한 사윤의 소개에도 별다른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 고개 한 번 까딱이는 것으로 인사를 끝냈다. 두 명의 헌터가 당혹스러움을 티 냈다. 어떻게 반응하면 될지 모르겠다는 듯 굴던 두 사람이 이내 손을 뻗고 각자의 이름을 밝혔지만, 이재희는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다.

대신 그는 파티가 열리는 홀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여러 헌터를 주시했다. 사윤은 그가 하고 있는 짓을 눈치채고 피식 웃었다.

“그렇게 음침해서 어떡하니, 재희야.”

“사윤 씨처럼 사고 치는 것보다 얌전하지 않습니까.”

천기를 꿰뚫는 눈으로 남의 정보를 열심히 살펴보고 있을 텐데 말은 잘했다. 사윤은 내친김에 저도 천재의 눈을 써 보자 싶어 알고 있던 몇몇에게 스킬을 사용했다. 놀랄 만한 발전을 이룬 이가 있는가 하면 전보다 퇴보한 헌터들도 있었다.

주로 자기 자리에서 안주하면 저렇게 퇴보한다.

강해지는 데 영 욕심이 없다며 중얼거린 사윤은 라이를 매만졌다. 워낙 적대하고 있는 헌터들이 많은 탓에 도미니크 이후로도 시비가 안 걸려 온 건 아니었으나 라이를 곁에 두고 관리자인 리안까지 곁을 지키고 있으니 함부로 시비를 거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이성을 갖춘 놈들 한해서였다.

복수심이든 열등감이든 일단 뭐에 미쳐 있는 놈들은 그런 이성이 없었기에 기어코 리안을 뚫고 제게까지 도달했다. 사윤은 공격을 가한 헌터 셋의 팔을 순식간에 절단 냈다. 숨통을 끊으려고 할 때 어김없이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안 됩니다.”

“경고입니다.”

재희와 리안이었다. 사윤은 조금 억울해져 피 흐르는 단도를 털었다.

“아니, 시비는 쟤가 먼저 걸었는데 정당방위 아니야?”

“경고입니다.”

“내가 널 그렇게 키운 적이 없는데 야박하게 구네, 리안.”

“애초에 키운 적이 없지 않습니까. 범죄 길드에 던져두고 갔지.”

“널 수장으로 만들고 던져 줬잖아. 그게 라이언의 기반이 됐을 텐데?”

반박하지 못한 여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사윤은 키득거리다 어린애 놀리면 좋냐는 이재희의 핀잔에 눈썹을 좁혔다. 대화에 어울리지 못한 건 헌터들의 잘린 팔을 창백하게 바라본 도미니크뿐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직도 정신 차리지 못한 헌터 한 명이 추가로 사윤에게 달려들고 늦게 입장한 사윤과 재희의 배 속에 와인이 들어갈 때쯤 본격적인 전야제의 시작을 알리는 경매의 신호탄이 터졌다.

“돈 없으면 말해. 사 줄 테니까.”

사윤은 재희를 툭 치고 얘기했다. 남자가 괜찮다고 대답한 그 순간이었다.

드드드드.

경매를 기다렸던 헌터들의 함성이 홀을 채웠을 때 투둑, 투둑. 천장에서 먼지가 떨어졌다. 진동을 동반한 그 사태는 이윽고 붕괴로 이어졌다.

파티장의 천장이 훅 하고 꺼지더니 꼭 무언가에 빨려 들기라도 하는 것처럼 뜯겨 나가기 시작했다.

“뭐, 뭐야?”

“시발 또 어떤 새끼가 스킬 썼냐?”

“미친 이딴 게 스킬로 될 리가….”

헌터들이 당황한다.

오싹!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위기감에 눈을 가늘게 뜬 사윤은 곧바로 재희의 어깨를 잡아 제 등 뒤로 밀어 넣었다.

콰드드드득!

기어이 천장 전체가 뜯겨 하늘로 올라갔다. 원치 않게 보게 된 하늘의 풍경에 자리에 있던 모두가 일순 할 말을 잃었다.

“이런 씨발….”

누군가의 욕설이 정적이 깔린 공간에 흘렀다.

그걸 시작으로 모든 헌터가 당황하며 자리를 피하거나 자신들의 무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하늘에 게이트가 열렸다.

―크르르르르륵!

그것도 게이트가 포화된 상태로.

―키에에에엑!

“으아아악!”

“시발, 튀지 마! 죽여!”

“미친 이것들 S급이잖아!”

온갖 고급진 장식품과 조명으로 휘황찬란하던 파티장 안으로 몬스터들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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