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1화. 전야제 (10)
비행기가 제주 공항에 도착한 건 밤 9시쯤이었다. 연말인데 시간까지 늦어 괜찮은 숙박업소를 잡기엔 힘들 거라고 중얼거리는 재희에 사윤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을 뭐라고 이해한 건지 갈색의 머리카락을 정돈한 남자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미리 예약해 두신 겁니까?”
질문 한번 단순하다. 사윤은 품 안에서 주최로부터 전달받은 초대장을 꺼내 흔들었다.
“재희야. 나랑 왔는데 숙박업소를 왜 잡니.”
“바닥에서 노숙할 거 아니면 잡아야죠.”
“…….”
너무나도 진지한 반박에 일순 말문이 막혔다. 농담으로 한 말인지 진담인 건지 모르겠어, 황당한 눈빛을 던진 사윤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화합의 축제에 온 건데 숙소를 잡긴 왜 잡는단 말인가.
“네가 내 동반인인 걸 자랑스럽게 여길 때가 왔다, 재희야.”
“글쎄요. 종식 씨가 한 말을 들으면 딱히 자랑스럽지는….”
“나 S급 됐다, 재희야.”
“…….”
사윤은 자신이 꽤 긴 시간 동안 랭크 다운된 상태로 지내 잠시 제 원래 등급을 잊은 듯한 남자에게 친절히 현실을 알려 주었다. 그에 약 석 달 전 어느 밤을 떠올린 남자가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사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 알아서 사려야지.
S급이 된 자신의 실력은 이재희와 견주었을 때 결코 밀리지 않았다. 그를 압도했으면 압도했지. 이미 그를 암살하려 했던 밤에 증명되지 않았던가.
사윤은 오랜만에 힘으로 타인을 찍어 누를 수 있는 상황을 만끽했다. 기분이 좋아져 몇 번 허밍음을 흘리니 이재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숙소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
그제야 사윤은 잠시 경로를 이탈했던 화제를 되찾아 왔다.
“초대장이 금색이면 주최 측에서 알아서 받들러 오거든.”
화합의 축제 초대장은 세 가지 색으로 등급이 나뉜다. 길드에 속하지 않은 실력자들이 받는 황동색, 길드에 속한 실력자들이 받는 은색, 길드장이나 협회장 같은 고위 권위를 가진 각성자들이 받는 금색.
화합의 축제에 초대받을 만한 길드의 길드장이라면 단연 실력이 좋고 유명한 이들뿐이었다. 그러니 주최 측에서도 그들을 초대하고 최대한 대우해 주려 한다. 그중 하나가 금색 초대장을 받은 이들이 축제 장소에 도착할 경우 직접 안내하고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도와주는 서비스였다.
그러니 숙소를 예약할 필요는 없었다. 주최 측에서 머물 곳을 마련해 줄 테니 말이다.
그 점을 설명하자 재희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윤은 고양이 앞에서 장난감을 흔들듯 초대장을 좌우로 팔랑거렸다.
주최 측에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안내원이 다가왔다.
“초대장을 보여 주십시오.”
그에 사윤은 제 이름이 박힌 초대장을 안내원에게 건넸다. 위조된 게 아닌지 꼼꼼히 확인한 이가 고개를 숙였다.
“숙소로 모시겠습니다.”
그가 차로 걸어가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금색 초대장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주최 측이 지정한 호화 호텔에 묵게 된다는 설명을 재희에게 덧붙인 사윤은 먼저 차에 올라타 멀뚱히 서 있는 남자를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아까부터 왜 그렇게 촌티를 내?”
제주도 처음 와 본 사람처럼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고 안내원이 타고 온 차를 빤히 살피는 게 영락없이 상경한 시골 청년 같은 모습이었다. 기가 차서 묻자 재희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대우는 낯설군요.”
“밤쥐에 가입하면 자주 받을 텐데. 가입할래?”
너 정도면 간부 자리 내어 줄 수 있어.
농담 삼아 말하자 피식 웃은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조금 끌리지만 사양하겠습니다. 밤쥐가 범죄 길드를 벗어난다면 생각해 보도록 하죠.”
“저런. 평생 생각도 못 해 보겠어.”
사윤은 벌써 세 번째쯤 거절당한 제안에 웃었다. 자신의 길드 가입 제안을 이렇게까지 거절하고도 멀쩡히 살아 있는 건 이재희뿐일 거였다.
“3층 중 원하는 곳에 편히 머무르시면 됩니다. 층 전체를 비워 두었으니 로비나 타 장소로 이동하지 않는 한 층 내에서 다른 참여자분들과 마찰은 없을 겁니다.”
부드러운 운전 실력으로 사윤과 재희를 숙소에까지 데려다준 안내원이 설명을 보탰다. 그가 건네주는 마스터키를 받은 사윤은 고개를 끄덕이고 3층으로 올라갔다.
“축제는 이틀 뒤 시작이니까 오늘은 그냥 자고, 본격적으로 둘러보는 건 내일이 될 거다. 전야제가 따로 있거든.”
“전야제요.”
“그래. 보통 전야제 때 1차 경매가 이루어지고 경매가 끝나면 화합 대련이 있지. 말이 화합 대련이고 사실은 못 본 시간 동안 서로가 얼마나 성장한 건지 가늠하기 위한 전투니까 잘 봐 둬. 랭커들 대련을 그렇게 쉽게 볼 수 있는 건 아니거든.”
사윤은 충고하며 들고 있던 두 개의 키 중 하나를 재희에게 건넸다. 엘리베이터와 가까운 곳이 편했기에 내리자마자 보이는 방을 선택하고 알아서 고르라 하자 이재희가 옆방을 골랐다.
“전야제가 끝나고 자정부터 본격적인 축제가 시작되니까 오늘 푹 자 둬라. 졸린 눈으로 돌아다녔다간 얕잡혀 시비 걸리기 십상이거든. 축제에 처음 참석한 경우는 더 그렇지. 아, 라이 데리고 다니면 좋긴 할 거다.”
소환수에 미친 새끼가 한 명 있거든.
사윤은 4년 전 축제에서 본 여인을 떠올리고 중얼거렸다. 소환수만 보면 눈 휙 돌아가서 소환사에게 잘 대해 주는 그 성격이 여전하다면 축제가 처음인 이재희에게 많은 도움이 될 거였다.
연이은 충고를 귀담아들은 남자가 참고하겠다 대답하고 방문을 열었다. 평소 그의 생활 패턴을 생각해 보면 슬슬 휴식을 취할 시간이었다.
“그럼 쉬어라. 뭔 일 있으면 연락하고.”
“네.”
담담한 대답에 만족한 사윤은 재희가 먼저 방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나서야 제 방 문도 열었다.
“확실히 오랜만에 오는 축제라서 그런지 생각나는 얼굴들이 많네.”
지금쯤 다 도착해 있을 시간이라 기억에 남는 헌터들을 떠올려 본 사윤은 작은 신음을 내며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보고 눕는데 뭔가 허전하다. 텅 빈 침대를 툭툭 매만지다가 라이가 없다는 걸 깨달은 사윤은 벌떡 일어나 재희의 방 문을 열었다.
“……!”
남의 방인데도 불구하고 스스럼없이 벌컥벌컥 열어 대는 사윤에 짐을 정리하고 있던 남자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뭡니까?”
“라이.”
“아.”
제주 공항에서부터 라이는 잠시 소환 해제당한 상태였다. 제주도가 관광지다 보니 공항에 사람이 많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불쌍하게도 소환 해제당한 제 소환수를 돌려받을 때가 돼 당당히 요구하자 잠시 고민하는 듯했던 남자가 이내 소환진을 그렸다.
“라이가 제 기력을 꽤 잡아먹는 건 알고 계시죠?”
“어. 애초에 너도 그 점 감안하고 붙인 거잖아. 반쯤 감시 명목으로 붙였던 거면서 왜 이제 와서 생색이야?”
“그냥 말해 본 거였습니다.”
말했다가 본전도 못 뽑은 남자가 소환진을 완성했다.
캉!
얼마 지나지 않아 라이가 재소환됐다. 사윤은 곧장 제게 달려드는 펜리르를 번쩍 안아 들었다.
“어째 사윤 씨가 더 주인 같아졌군요.”
누가 보면 10년은 떨어졌다가 상봉하는 듯한 장면에 재희가 떨떠름해했다. 약 두 달 가까이 매일같이 잠들었던 정을 무시하지 말라며 핀잔한 사윤은 커다란 소환수를 안아 든 채 방으로 돌아갔다. 조금 성장한 라이는 처음 봤을 때보다 더 커졌지만 사윤도 S급이 된 상황이다. 새끼 펜리르의 무게 정도는 기꺼이 감당할 수 있었다.
붕붕!
그게 즐거운 건지 펜리르의 꼬리가 마구 흔들려 사윤의 허벅지를 탁탁 때렸다.
“아파, 인마.”
컹!
“핥지 말고.”
캉!
“어휴 시팔, 그래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라.”
탁탁 때리고 찹찹 핥고 난리도 아니었다. 말린다고 듣는 녀석이 아니었기에 자유롭게 풀어 준 사윤은 펜리르를 쓰다듬다 느릿하게 잠을 청했다. S급이 되어 마음이 편안해져서인지 꽤 숙면을 취한 밤이었다.
* * *
“슬슬 나가자, 재희야.”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느긋하게 잤다가 늦은 오후가 돼서야 느릿느릿 씻고 나갈 채비를 한 사윤은 저녁을 먹고 난 뒤 재희를 불렀다. 그에 서류 몇 장을 손에 든 남자가 그것을 돌돌 말고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건 또 뭐야.”
“종식 씨가 알려 준 주의 사항 좀 적어 뒀습니다. 전야제가 곧 시작이라고 했으니 사고 치실 것 같아서요.”
대답이 꽤 태연했다. 사윤은 기가 막혔지만 솔직히 오랜만에 온 축제에서 시비가 안 걸릴 자신이 없었기에 따로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변명은 했다.
“말해 두는데 내가 시비를 거는 게 아니라 그 새끼들이 시비를 거는 거다, 재희야.”
“뒤통수는 먼저 치셨겠죠.”
“그건 뭐 맞은 놈들이 잘못한 거 아닌가?”
“…….”
재희가 고개를 저었다. 펜리르가 그를 위로해 주기라도 하듯 재희의 손을 핥는 걸 본 사윤은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튼 내가 먼저 시비 건 것만 아니라는 걸 알아 둬라.”
“그렇게까지 말하시는 걸 보니 들어가면 무슨 일이 생기겠군요.”
역시 이재희는 예리했다. 사윤은 천기를 꿰뚫는 스킬로 미래를 본 건가 싶어 짧게 놀랐다가 마저 걸음을 옮겼다. 재희의 말이 사실이 된 건 사윤이 그와 함께 경매 전 기념 파티가 벌어지고 있는 홀에 들어섰을 때였다.
“권사윤!”
서툰 한국말로 사윤의 이름을 외친 누군가가 멀리서부터 섬전처럼 달려와 사윤의 멱살을 낚아챘다. 불길이 이글거리는 것 같은 금안을 마주한 사윤이 제 멱을 낚아챈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누구더라.”
정말로 기억이 안 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니 사윤의 멱살을 쥔 이가 기가 찬 듯 헛숨을 흘렸다.
“헤리스의 단도.”
그가 으드득 이를 갈며 얘기했다. 아! 그제야 어렴풋한 기억이 떠오른 사윤이 환히 웃었다.
“잘 지냈니? 얼굴이 아스팔트 바닥에 갈린 것처럼 생긴 걸 보면 영 못 지낸 것 같은데.”
사윤의 주 무기인 헤리스의 단도. 그것의 원래 주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