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0화. 전야제 (9)
헌터 업계에는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축제가 있다. 무슨 축제냐 하면 전 세계 헌터 중 상위에 속하는 실력자들이 모여서 여는 화합의 축제였다.
게이트가 생겨나고 2년이 지났을 때 처음으로 열린 화합의 축제는 전 세계 상위 헌터끼리 단합하고 서로를 의지해 게이트를 비롯한 각종 재난을 이겨 내자는 의미로 개최됐는데 시간이 꽤 흐른 지금은 의미가 퇴색돼 상위 헌터끼리의 친목 다짐과 공식 경매에 나오지 않는 높은 등급 아이템의 수급처로 변모했다.
상위 헌터만 초대되는 만큼 사윤도 이 축제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밤쥐가 이름을 알리고 범죄 길드로서 위치를 공고히 하기 시작한 4년 전으로, 범죄 길드의 수장인 자신이 초대된 것만 봐도 화합의 축제가 얼마나 초기의 의미를 잃었는지 알 만했다.
뭐, 축제를 주도했던 길드의 길드장이 죽어 바뀌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오늘 출발해야 하니까 일어나서 준비해, 재희야. 네 귀염둥이 라이를 고생시키고 싶으면 좀 더 뭉그적거리든가.”
4년 전에 겪은 축제가 그다지 재미있지 않아 재작년 축제엔 참석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데리고 갈 사람이 있어 참석하기로 했다. 원래였다면 건주를 데리고 갈 계획이었지만 그가 도망쳤으니 아쉬운 대로 재희라도 데리고 가야지 뭐 어쩌겠는가.
초대장을 받은 헌터당 1인의 동반인을 데려갈 수 있었으므로 이재희도 화합의 축제에 들어갈 수 있었다. 제겐 지루하다지만 처음 축제에 가 보는 헌터들에겐 다른 나라의 헌터를 만나고 친분을 맺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니 데려가서 나쁠 건 없을 터였다.
“무슨 축제인지 말도 안 해 주고….”
졸린지 하품을 쩍 한 남자가 그리 중얼거리더니 이내 느릿하게 화장실로 들어갔다. 캉! 라이가 그가 들어간 화장실 문 앞에서 꼬리를 흔들었다. 펜리르도 갯과인 건지 외출 나가는 건 기가 막히게 알았다.
복슬복슬한 털을 쓰다듬고 있으니 씻고 나온 재희가 머리를 말리고 옷을 갈아입었다. 사윤은 그래서 무슨 축제냐고 재차 묻는 그에게 화합의 축제에 대해 알려 주었다.
“그런 거라면 S급이 되고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다른 헌터들이 사윤 씨가 약해진 걸 알아볼 텐데요.”
“그래서 지금 출발하는 거잖니. 가는 길에 게이트 들렀다가 저녁쯤 제주도로 갈 거야.”
“제주도요?”
“어. 이번에는 거기서 열리거든.”
참고로 재작년에는 중국에서 열렸다. 사윤이 재작년 축제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였다.
미공략 게이트를 의뢰받을 때 사용한 차이나 넘버 식스 활동명을 들키면 꽤 곤란했으니까.
“게이트는 어디 가는데요?”
“S급까지 남은 진행도가 10퍼센트니까 A급 두 곳 들르면 될 것 같더라고. 하나는 내가 골라 뒀으니 남은 하나는 네가 골라라. 참고로 난 헤르덴의 신전 골랐다.”
서류를 건네주며 말하자 이재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인천에 있는 게이트를 골랐다. 사윤이 고른 게이트와 차로 20분 거리 떨어진 곳에 열린 게이트였다.
동선 좋고.
만족한 사윤은 재희를 데리고 종식이 운전하는 차에 올랐다. 사윤이 게이트 공략 속도를 늦추면서 길드 업무를 꽤 봐 뒀기에 종식 역시 사윤의 운전기사를 자처할 만큼 꽤 여유로워졌다. 물론 이번 일정을 위해 경진과 찬희가 두 배로 일하게 됐지만, 그들이 다녀오라고 했으니 집 나간 양심의 흔적이 가슴 아파할 일은 없었다.
“재희 씨는 화합의 축제에 처음 가시는 겁니까?”
“예. 종식 씨는 가 본 적 있나요?”
“4년 전에 형님 동반인으로 함께 참석했습니다. 충고를 드리자면 형님의 곁에 너무 붙어 있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이 새끼가?
자신이 버젓이 뒷좌석에 있는데 말을 함부로 한다. 눈을 가늘게 뜬 사윤이 종식의 뒤통수를 훑었다.
“종식아, 나 듣고 있는데.”
“아니, 그렇잖습니까…. 제가 그때 형님 옆에 있다가 얼마나 많은 시비를―!”
콰앙!
음, 조용해졌군.
사윤은 오랜만에 종식이 앉은 운전석을 발로 차고 개운한 표정을 지었다. A급의 힘이었기에 S급 때보단 덜한 충격이었지만 딸꾹질한 종식이 운전대를 바짝 쥐었다. 재희가 그런 사윤을 돌아보았다가 종식의 어깨를 토닥였다.
“고생하시는군요.”
“재희 씨라도 알아줘서 다행입니다.”
얘네 이제 두어 번 보는 거 아닌가.
사윤은 꽤 친근해 보이는 둘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제 볼을 핥는 라이를 쓰다듬었다.
뭐, 좋은 게 좋은 일이다.
* * *
<‘진정한 인류의 악을 위한 벌크 업 퀘스트!’ 달성! 보상으로 1,000카르마를 지급합니다.>
-현재 보유 카르마: 182,300
[성실한 인류의 악(SS+)]
-C급부터 다시 시작해 S급이 된 당신의 성실함에 신이 아량을 베풉니다. ‘인류의 악’ 전용 퀘스트 시 지급되는 카르마 두 배 적립.
이름만 보고 또 개 같은 특전을 준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꽤 쓸 만한 걸 줬다. 사윤은 두 개의 A급 게이트를 클리어하기 무섭게 뜬 시스템창을 치우고 손에 든 칼을 돌렸다가 빠르게 내던졌다.
콰드드득!
서리의 기운을 품은 단검이 날아가 몬스터에게 처박히니 몬스터를 비롯한 일대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확실하다.
등급만 S급이 아닌 실제 힘도 S급일 때로 돌아온 걸 확인한 사윤은 형체 없는 단검 스킬을 통해 무기를 회수하고 웃었다. 게이트 클리어 보상을 모두 재희에게 넘기고 게이트를 빠져나오니 기다리고 있던 종식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식으로 웃지 마시라니까요.”
기쁜 나머지 또 사악하게 웃었나 보다. 사윤은 입꼬리를 매만졌다가 감격을 참지 못하고 한 번 더 웃었다.
“어떡하지, 종식아. 오늘 기분이 너무 좋은데.”
얼마 만에 돌아온 힘인지 모르겠다. 숨을 들이켜니 공기도 상쾌하다. 그리 중얼거리고 있자 종식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 근처에 공장 있는데요.”
사윤은 필요 없는 말을 해 대는 종식의 목소리를 거부하기로 했다.
“S급으로 돌아왔네요.”
“그래.”
제 등급이 오른 게 이재희의 눈에도 보이는 모양이었다. 사윤은 자신을. 정확히는 제 머리 위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남자를 관찰했다.
보아하니 천기를 읽는 스킬로 또 뭔가를 확인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진행도가 올랐는데.”
“뭐?”
“…아닙니다. 그럼 차로 돌아가죠.”
저게 자기 할 말만 하고 남의 차에 막 들어간다. 사윤은 괘씸한 남자의 뒤통수를 바라봤다가 S급이 된 기념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이재희가 제 등급 상승에 50퍼센트 정도 기여했으니 그 정도 아량은 베풀어도 괜찮았다.
“바로 공항으로 가실 겁니까?”
“어. 예약해 둔 거 있으니 지금 가면 얼추 시간대 맞을 거다.”
경진이 예약해 둔 비행기가 자신과 재희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돈 뒀다가 뭐 하는가. 이럴 때 써먹어야지.
느긋하게 몸을 늘어트리고 있자 빠르게 굴러간 차가 사윤과 재희를 공항에 데려다 놓았다.
“수행원은 필요 없으십니까? 제가 따라갈까요?”
비행기에 올라타는데 종식이 물었다. 사윤은 불안해 보이는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뭘 걱정하니, 종식아. 나 이제 S급이야.”
C급일 때랑은 달랐다. 그 사실을 짚어 주며 안심시키자 종식이 사윤의 손을 내리고 불신의 눈빛을 던졌다.
“그래서 걱정하는 겁니다. 또 무슨 사고를 치시려고.”
“…….”
“재희 씨, 형님 좀 부탁하겠습니다. 알고 계시다시피 형님이 다혈질적인 부분이 있는데 곁에서 지켜보시다가 너무 간다 싶으면 좀 말려 주시고….”
종식이 재희에게 당부 사항을 늘어놓았다. 주로 제가 사고를 치면 어떻게 대처하면 되는지, 다른 나라 길드장을 두들겨 패면 그 수행 비서에게 어떻게 배상하겠다 얘기하는지 등이 담긴 내용이었다. 사윤은 기가 막혀 종식을 바라보았다.
무슨 자신을 폭탄 취급 하고 있지 않은가?
기분이 별로라 인상을 찡그리는데도 종식은 꿋꿋했다. 밤쥐 길드를 위해 사윤의 눈빛을 죄 견뎌 내고 설명을 마친 종식은 허리를 숙이며 재희와 사윤을 배웅했다.
“그럼 다녀오십시오.”
그의 배웅을 받고 사윤은 재희와 함께 비행기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한적하고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넓었다.
아주 많이.
꼭 비행기 내부 공간을 전부 합쳐 두기라도 한 것처럼.
“개조했어요?”
“어. 공항마다 한 대씩 뒀지.”
사윤은 뿌듯한 얼굴로 자랑했다. 멋지다고 칭찬해 준 재희는 비행기의 자리 하나를 차지했다. 사윤을 위한 비행기였기에 비행기 내부에는 벨트 등의 안전장치가 없었다.
S급 정도 되면 웬만한 사고로 죽지 않기에 가능한 설계였다.
“그런데 다른 길드장들이랑은 사이가 안 좋습니까?”
비행기에 나란히 누워 있으니 재희가 문득 말을 걸었다. 조금 전 종식의 충고를 곱씹다가 던진 질문 같아 고민한 사윤은 어깨를 으쓱였다.
“사이가 안 좋은 게 아니라 걔네가 날 일방적으로 싫어하는 거지.”
“뒤통수를 치셨나 봅니다.”
“…….”
스킬을 쓴 건가?
사윤은 제가 설명하지 않았는데도 자신의 행적을 알고 있는 재희에 놀랐다가 이내 킬킬 웃었다.
“맞은 놈이 잘못한 거지, 그게 내 죄겠니.”
당당한 발언에 남자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사윤은 그것이 즐거워 또 웃다가 축제에 가면 만날 얼굴들을 떠올렸다.
오랜만에 보겠네.
자신만 보면 발작하듯 짖어 대는 남자의 얼굴이 유난히 선명하게 떠올라 입꼬리가 올라갔다. 남이 제게 뒤통수 맞고 역정 내는 걸 구경하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없었기에 사윤은 벌써 즐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