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9화. 전야제 (8)
“음.”
물음에 침묵하고 있던 재희가 낮은 허밍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가 테이블에 놓인 서류 몇 장을 펄럭거리더니 이내 맑은 눈으로 사윤을 돌아보았다.
“딱히 실수라고 할 정도로 거창한 건 없는 것 같은데요.”
“…뭐?”
사윤은 뜻밖의 말을 들어 고개를 들었다. 놀람으로 인해 독기가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조금 순해 보이는 눈동자를 마주한 재희가 피식 웃었다.
“그도 그럴 게 제가 보기엔 사윤 씨가 말한 모든 문제가 어떤 실수에서가 아니라 건주 씨랑 사윤 씨의 성향 차이에서 비롯된 것 같거든요. 물론 첫 만남에 납치해서 고문 별장으로 데려간 건 그리 현명한 선택이 아닌 것 같았지만….”
역시 거기서부터 문제였나.
사윤은 동의해 고개를 끄덕였다. 납치까지는 어떻게 잘 꼬드겨 넘길 수 있었는데 고문 별장은 무리였다. 종식을 탓할 생각을 하고 있으니 재희가 말을 이었다.
“그런 일이 있어도 결과적으로 게이트 안에선 잘 지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늘 싸우기만 한 것도 아니고 비교적 평화로운 시간도 보냈다고 했죠. 그렇다면 실수라고 할 정도로 거창한 건 애초에 없었고, 그나마 있던 사소한 마찰조차 지낸 시간에 의해 희석됐다고 봐야 합니다. 한마디로 조금의 다툼이 있었다 해도 그건 시간이 용납할 수 있는 범위 내였다는 거죠.”
“음.”
“그러니 사윤 씨가 물을 건 어디서부터 실수한 건지가 아닙니다.”
재희가 단호한 목소리로 충고했다.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던지자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그가 한 번 더 음, 하고 목을 울렸다.
“한마디로 사윤 씨는 사윤 씨의 실수로 건주 씨를 놓치게 된 게 아니라는 소리죠. 그저, 성향의 차이일 뿐이었지. 그러니 사윤 씨는 무엇을 실수했느냐가 아닌, 건주 씨와 무엇이 맞지 않아 그분을 도망치게 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반대로 건주 씨의 무엇이 사윤 씨랑 맞지 않아 도망치도록 군 건지도 생각해 봐야 하고요.”
사윤은 깔끔하게 맺어진 말에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이건 꽤 흥미로운 해석이었다.
그간 밤쥐의 간부들도, 사윤 자신도 건주의 도망이 어떤 실수의 여파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윤은 그 이유로 노아의 죽음을 꼽았고 밤쥐 간부들은 사윤이 지나치게 건주를 굴려 먹은 것을 꼽았다. 그런데 그 일을 곁에서 지켜보지 않은 이재희는 실수가 아닌 성향 차이를 이유로 들었다.
“실수해서 그를 놓친 게 아니라, 성향 차이 때문에 떠나보내게 된 거라고….”
재희의 말을 곱씹기 위해 읊조린 사윤은 숨을 들이켰다.
무엇이 맞지 않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선 건주와의 첫 만남부터 돌이켜 봐야 했다. 솔직히 첫 만남은 사윤의 입장에서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는데 최초의 거북함을 느낀 건 역시….
환영회의 밤.
그날 밤 한건주가 자신을 떠보며 제 속을 캐내려 했을 때다.
그게 왜 거북했냐고 물으면, 들키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
자신의 속내를, 그리고 자신의 상황을.
지독한 시스템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인 한건주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
들키면 일을 그르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제 사정을 안 한건주가 어떻게 나올지 몰랐고 그가 자신을 배신해 시스템이 그를 처단하라는 퀘스트라도 내리면 어떡하나 걱정스러웠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제 손으로 희망을 끊어 내야 되지 않는가.
사윤은 다 견뎌도 그것만큼은 못 견딜 것 같았다. 사람이 살려면 숨구멍은 있어야 하는데 거기까지 틀어막으면 어떻게 산단 말인가.
그래서 최선을 다해 숨겼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감정은 필드 내에서까지 쭉 이어졌다.
한건주는 몇 번이고 자신에 대해 캐내려 들었지만, 그때마다 일부러 대답을 회피했다. 때론 거짓을 뱉었고 때론 대답 자체를 얼버무렸다. 한건주가 그에 대해 불만을 갖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당시 B급이었던 그가 무얼 할 수 있겠는가. 그는 한숨을 내쉬며 답답해하는 것 말고 별 대처를 하지 않았다. 사윤은 그것이 다행이라 여겼다.
그것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제가 잘못 생각했어요. 당신은 딱 그 정도의 사람인데. 어쩌면 당신한테도 무슨 사연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어.’
그날의 일로 이어진 것이다.
사윤은 그간 있던 일의 연결 고리를 하나씩 짚어 봤다.
좁게 막혀 있던 시야가 탁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알리고 싶지 않아 솔직히 말할 수 없었으니 오해가 빚어졌고 오해로 인해 마찰이 일어났다. 그리고 한건주는 그 오해를 일부러 발생시켰다.
마지막 날 보여 줬지 않은가.
그간 보여 준 몇몇 행동이 제 속내를 떠보기 위해 취한 것이라는 걸.
“…왜 그랬을까.”
사윤은 서류를 내려놓고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재희는 사윤이 마음껏 생각할 때까지 기다려 주겠다는 듯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눈꺼풀이 감기고 계곡에서의 날이 그려진다.
한건주는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왜 제 속내를 파고들려 했고, 왜 그렇게까지 자신을 떠봤을까.
고민을 이어 간 사윤이 손을 까딱였다. 그건 사윤이 건주를 대상으로 시도한 최초의 이해였다.
그 사실을 자각하자마자 사윤은 반사적으로 건주의 목소리를 떠올리게 됐다.
‘그러니 이해해 봐요.’
“하.”
참지 못한 웃음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이쯤 되니 한건주란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고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확실히 궁금해졌다.
“그래, 네 말도 얼추 맞는 것 같네.”
사윤은 생각의 연속 속에서 재희의 말을 인정했다.
자신이 실수했기에 한건주가 떠난 것이 아니다. 말했으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하는 의문은 사윤이 습관적으로 생각하곤 하는 가정이었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시간을 되돌려도 자신은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여전히 말하지 못할 거였고 여전히 솔직하지 못할 거였다.
그건 불가항력이다.
한건주를 믿을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만큼 제 시스템을 불신했으니까.
그리고 그만큼, 간절했으니까.
만에 하나라도 저항하는 자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건주를 죽일 만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선택지가 없어 내린 선택도 실수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그러니 그 일은 실수가 아니다. 사윤은 그제야 답답했던 속이 확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석 달이 훌쩍 넘은 지금이 돼서야 건주가 한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그가 한 이해해 보란 말은, 그 자신을 이해해 보라는 소리였다.
그가 저를 이해하기 위해 수십 번 떠봤던 것처럼.
“간도 큰 새끼.”
사윤은 솔직한 평을 내렸다. 모든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서 오랜만에 내린 담백한 평가였다. 역시 한건주는 간이 배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 누가 저를 두고 그런 계획을 세울 수 있단 말인가.
쯧.
혀를 찬 사윤이 의자에 파묻었던 몸을 바로 일으켰다. 이해해 보라 했으니 이해하기 위해 머리 좀 굴려 보면 된다. 그건 그렇게 해결하면 됐는데 동등하자는 얘기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가 추구하는 동등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정보량의 동등인 건지, 관계의 동등인 건지. 혹은 등급의 동등인 건지.
그건 한건주가 얘기한 대로 그를 이해해 봐야 알 수 있을 듯해 한숨을 내쉬니 재희가 웃으며 서류를 집어 들었다.
“해결됐나 보네요.”
사윤은 담백하게 상황을 정리하는 그를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넌 어떻게 알았냐.”
“어떤 걸요.”
“내가 실수한 게 아니라는 거.”
“음. 글쎄요. 조금 더 살아 보면 사윤 씨도 알게 될 거예요.”
헛소리한다.
내 나이가 너랑 비슷할 거라니까 그러네.
사윤은 속으로 중얼거렸다가 서류를 매만졌다. 탁했던 시야가 명료해진 느낌은 들었는데 앞으로 정확히 무얼 하며 한건주를 이해해 볼지는 감이 안 잡혔다. 그런 제 고민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이재희가 입을 열었다.
“길을 찾지 못했으면 조금 천천히 가죠.”
“…무슨 말이야?”
“앞으로 무엇을 할지 뚜렷한 계획이 없으면 랭크업을 천천히 하자는 얘기예요. 지금 사윤 씨가 가진 가장 뚜렷한 목표가 등급 복구잖아요. 그 목표가 있는 한 정체돼 있거나 길을 잃는 느낌이 들지 않을 테니 새로운 목표가 번듯하게 세워질 때까지 랭크업은 조금 천천히 합시다. 그동안 다른 것들도 좀 해 보고요.”
일리 있는 말이다. 한두 번 느낀 것이 아니긴 했지만 이재희는 말을 꽤 청산유수로 잘했다.
그러니 말싸움을 하면 번번이 지지.
원래 또라이랑은 대화가 통하지 않는 법이었는데 신념이 있는 또라이의 경우 그 정도가 더 심했고 신념이 있는데 논리까지 겸한 또라이면 더 그랬다.
사윤은 여태 재희와 나눴던 대화를 곱씹어 보곤 작게 웃었다가 보고 있던 서류를 넘겼다.
“그렇게 하든지.”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급할 건 없었다.
당장 S급 게이트에 들어가야 하는 퀘스트가 열린 것도 아니었고 랭크업 퀘스트 기간도 꽤 넉넉히 남았으니까.
오랜만에 느껴 보는 여유에 느릿하게 웃은 사윤은 그날 종일 길드 업무를 보고 다음 날은 재희에 제안을 따라 푹 쉬었다.
그다음 날부턴 오전에는 게이트에 가고 오후에는 라이와 놀아 주는 시간을 가졌다. 물론 주말에는 푹 쉬었고 말이다.
그렇게 한 달의 시간을 보냈다.
조급해하지 않고 천천히 시간을 보낸 끝에 S급이 되기까지 10퍼센트의 진행도만 남겨 둔 사윤은 닫힌 재희의 방 문을 벌컥 열고 씨익 웃었다.
“가자, 재희야! 이틀 뒤 축제란다.”
외침에 늦잠을 자던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축제요?”
“그래.”
사윤은 쾌활히 웃으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