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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137)화 (137/266)

제137화. 전야제 (6)

“…최근 이딴 식으로 눈을 뜨는 일이 잦아진 것 같은데.”

누군가 명치를 짓누르는 것 같은 압박감에 눈을 뜬 사윤은 정신을 잃은 사이 방으로 옮겨진 상황이 익숙해 헛웃음을 흘렸다. 배가 떨리는 진동에 고개를 든 라이가 반갑다는 듯 컹, 짖었으나 사윤은 그를 만져 주지 않았다. 그러기엔 제 위에 올라탄 라이의 덩치가 너무 컸다.

“넌 네 덩치도 생각 안 하고 올라타지.”

컹!

“짖지 말고. 펜리르가 왜 위엄도 없게 개처럼 짖어 대.”

어리더라도 펜리르는 펜리르인 법이다. 최상급 소환수답게 짖을 때의 라이는 섬뜩한 이빨이 드러나 위협적이었으나 사윤에겐 그저 어린 강아지로 보일 뿐이었다. 어리다고 하기엔 사윤보다 덩치가 크긴 했지만 그건 펜리르 종족 특성이니 넘겼다.

아무튼 똑바로 서면 키가 자신을 훌쩍 뛰어넘는 소환수가 배 위에 올라타 있으니 무겁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나마 자신이 A급이 되어 이만큼 버틴 거지, B급이었으면 눈을 뜨기 전에 피부터 토할 뻔했다. 인상을 쓰며 내려가라고 침대를 두드리자 답지 않게 낑낑거린 라이가 침대로 내려와 볼을 핥았다.

“그래서,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아니.”

쭉쭉. 라이의 꼬리를 잡아당기듯 쓸어 주며 묻자 펜리르가 또다시 컹! 짖었다. 그와 동시에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일어났네요.”

“어째 이 상황도 지나치게 자주 겪는 것 같은데.”

“네?”

“아무것도 아니다.”

지독한 데자뷔가 느껴져 중얼거린 사윤이 펜리르를 반쯤 안아 든 채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침대 머리에 기대앉은 사윤은 곰곰이 최근 기억을 더듬었다.

“A급이 되고 게이트 빠져나온 것까지밖에 생각 안 나는데.”

“그 뒤로 쓰러지셨으니 기억이 없을 겁니다.”

“어쩐지 아무 생각도 안 들더라.”

태연하게 받아친 사윤은 조금 뒤에야 대화가 이상했음을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뭐, 쓰러져?”

“하도 덤덤히 대답하시길래 자주 있는 일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네요. 다행입니다.”

다행일 상황이냐?

사윤은 죽으면 죽었지 쓰러진 적은 좀처럼 없었다. S급이 되고 나선 단 한 번도 없었다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지금은 A급이었지만.

그래서 쓰러진 건가?

이런 상황이 낯설어 당황하고 있으니 재희가 물컵을 건넸다.

“돌아가자고 말하던 도중에 쓰러지셨습니다. 피로도가 회복되면서 몸의 긴장이 풀린 거라고 판단해 일단 눕혀 봤는데 좀 어때요.”

“상태는 멀쩡한데.”

“그럼 다행이네요. 이번에 무리하면 안 된다는 걸 겪었으니 앞으로 일정 좀 조율하죠. 하루에 게이트는 최대 세 곳만 돌고 일주일에 이틀은 쉽시다. 제가 아무리 사윤 씨를 도와드린다고 했어도 이렇게 막노동 수준으로 게이트를 돌 생각은 없어요.”

“이틀은 너무 많은데.”

“대한민국에 주말은 이틀인데 뭐가 많습니까? 이 정도 휴일도 많다고 하는 걸 보니 밑에 있는 직원들 사정이 알 만하네요.”

그 직원들은 피곤함을 느낄 새도 없이 일하고 있다. 일하다 피곤해지면 책상에 머리 박고 기절한다. 그럼 대기하고 있던 처리반이 나타나 소파로 끌고 가 눕혀 주는데, 그러다 눈을 뜨면 다시 일하는 것이다. 그렇게 대답하려니 정말로 악덕 길드장이 된 것 같아 사윤은 다른 변명을 찾았다.

“돈 많이 받잖아.”

“많이 버는 건 좋지만 금전이 삶의 행복을 결정짓진 않죠.”

“하지만 삶의 질을 올릴 순 있지.”

“그건 동의합니다만 행복은 그것보다 근원적인 거니까요. 돈이 많다고 해서 사윤 씨가 행복하진 않잖아요.”

“야, 내가 다른 사람이랑….”

“안 같죠. 처한 상황이 다르니까. 그 상황이 행복을 좌우하는 겁니다. 돈이 아니라.”

이 자식은 뭐 이리 말을 잘해?

하는 족족 맞는 말이라 뭐라 부정하기 어려웠다. 사윤은 원치 않게 입을 다물게 돼 미간을 좁혔다가 휴일에 대해 도로 말을 얹었다.

“하루. 거기까진 배려해 줄게.”

“생각해 보니 일주일이 7일인데 2일을 쉴 필요가 있나요? 사흘 쉬죠.”

“하루.”

“딱 절반씩 일하고 쉬는 건 어떻습니까? 사흘하고도 반나절. 이런 식으로요.”

“그런 식으로 할 거면 서로 반보씩 양보해서 토요일 오전까지만 게이트 도는 거로 하지?”

“좋네요. 그렇게 하죠.”

“…….”

뭐 이런 자식이 다 있나.

사윤은 입을 벙긋거리다 헛숨을 흘렸다. 한 방 먹은 기분이었다. 아니, 기분이 아니라 그냥 한 방 먹었다. 방금 막 자다 깬 사람한테 이런 펀치를 날리는 건 반칙 아닌가?

몹시도 억울했지만 어디 항의할 사람이 없었다.

황금 같은 일주일 중 하루하고도 반나절이나 뺏기다니. 오매불망 자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S급의 울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해 마음이 아팠다.

그런 말로 이재희를 한 번 더 설득해 봤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이재희는 지독한 새끼였다.

“나한테 이렇게까지 뜯어먹는 건 너밖에 없을 거다.”

“그런 사람이 저 하나라도 있어서 다행입니다.”

“…대체.”

대체 머리에 뭐가 들어 있는 거냐.

사윤은 진심으로 이재희의 머리 뚜껑을 한번 열어 보고 싶었다. 대화를 나눌수록 무슨 성격인지 모르겠어 혼란한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으니 탁자 위에 놓아둔 핸드폰이 징징 울렸다. 확인해 보니 옌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슬슬 갈 때가 되긴 했지.

연락을 받아 대충 씻고 나갈 준비를 하니 어느덧 시로와 마루까지 소환해 TV를 보고 있던 재희가 설마 하는 시선을 던졌다.

“게이트 갑니까?”

“아니. 사무실.”

“사무실?”

“그래. 일 봐야지.”

A급도 됐겠다. 길드 일을 너무 오래 손에 놓고 있었으니 한번 살펴볼 때가 됐다. 마침 종식도 상황이 잘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으니 말이다.

공략 휴식을 권고받은 지금 처리해야지 또 언제 시간을 내겠는가.

타이밍 좋게 도착한 연락이라고 생각한 사윤은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부탁해 둔 서류를 책상에 올려 뒀어용♡]

좋은 타이밍과 별개로 저 역겨운 하트는 좀 빼 줬으면 했다.

사윤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옌의 문자를 지우고 저를 빤히 보고 있는 재희를 향해 피식 웃었다.

“심심하면 따라와서 일하든가.”

반쯤 농담조로 얘기한 말이었는데 이재희는 정말로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것도 모자라 엘리베이터까지 따라 타 사람을 당황스럽게 했다.

“아깐 쉬고 싶다며. 쉬겠다고 휴일로 협상까지 했으면서 무슨 바람이야?”

“딱히 일을 도와주겠다는 건 아닙니다. 그냥 사윤 씨 사무실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따라온 거죠. 범죄 길드 1위의 사무실인데 솔직히 궁금하잖아요.”

“아….”

그놈의 호기심.

장담컨대 이재희에게서 호기심을 뺀다면 시체만 남을 것이다. 사윤은 의도하지 않은 얼굴로 일하러 가는 사람 골리는 듯한 남자를 흘겨봤다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오랜만에 찾는 자신의 집무실에는 서류를 정리하러 온 종식이 먼저 들어와 있었다.

“형님? 나오셔도 괜찮은 겁니까?”

“그럼 뭐, 나오지 말까?”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쓰러지셨다는 얘기를 들어서 말입니다.”

“그게 네 귀에도 들어갔다고?”

“애들이 말해 주던데, 아닙니까?”

이어진 대화에 사윤은 재희를 돌아봤다. 어젯밤 쓰러진 자신을 챙긴 건 그였으니 저를 끌고 길드에 들어온 것도 이재희였을 거다. 대체 뭘 어떻게 들어왔길래 소문까지 퍼진 건지 캐물어 본 사윤은 자신이 라이의 등에 업혀 왔다는 말에 이마를 턱 짚었다.

“미치겠네. 그 커다란 녀석 등에 날 태우고 정문으로 들어왔다고.”

“예.”

“그것도 빨래 더미처럼 널어서.”

“아무래도 그 자세가 최선이었어서.”

“하.”

이건 뭐, 그냥 쓰러진 니들 보스 좀 보라고 대놓고 전시하며 들어온 수준이다. 그 행동에 악의가 없었을 거란 점이 제일 열받아 관자놀이를 꾹 누른 사윤은 한숨을 내쉬며 책상으로 향했다.

“그렇게 들고 오면 안 되는 겁니까?”

“안 되는 건 아니지. 네가 내 체면을 중시하지 않는다면 전혀.”

“저런. 체면이 상하는군요. 다음부턴 주의하도록 하죠.”

“그래, 아주 꽹과리도 치면서 들어와라.”

“하나 살까요?”

“…….”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별을 못 하겠다. 어깨를 움찔거리며 고개를 든 사윤은 눈이 마주치자 피식 웃는 남자에 한숨을 내쉬었다. 장난으로 한 말인 것 같았는데 전혀 안심이 되질 않았다.

자신이 잘못 판단했다.

이재희는 그냥 게이트 보상 상자를 까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더 나은 듯했다.

“아, 형님. 그때 합병했던 용호 길드 지분 인수로 세실에서 제안이 들어왔는데….”

“거절해.”

“네.”

미간을 좁히며 어느새 착석한 종식과 서류를 보고 있으니, 사무실을 둘러보던 재희도 소파에 앉아 서류 한 더미를 집어 들었다. 사윤이 할 짓 없으면 이거나 보라며 장난식으로 내놓은 것들이었다.

“뭐 해?”

“심심해서요.”

“할 짓 없어?”

“아무래도.”

그가 주변을 쭉 둘러봤다가 대답했다. 뭐, 일손이 늘어나면 길드장만 배부른 법이다. 게이트 서류 검토를 함께 한 것으로 그의 일머리가 아주 나쁘진 않다는 걸 알고 있던 사윤은 종식에게 재희가 봐도 되는 서류와 봐선 안 될 서류를 나누게 하곤 중요한 안건들을 마저 해결했다.

그렇게 얼마간 사무실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이어졌을까.

“그래서 어떤 사람이었어요?”

별안간 재희가 생뚱맞은 질문을 던졌다. 사윤은 랭크 좀 내려갔다고 작게 쓰인 글씨가 흐릿하게 보여 썼던 안경을 벗고 눈두덩이를 매만졌다.

“뭐가 어떤 사람이야.”

“한건주라는 분 말입니다. 전에 이 길드에 있었다면서요?”

“…….”

그 순간 모든 소리가 일시에 끊어졌다. 서류가 넘어가는 소리도, 펜이 사각거리는 소리도. 정적만 감도는 사무실에서 종식이 입을 달싹였다. 마치 이름이 나와선 안 될 사람의 이름이 불린 것처럼 행동하는 그에 사윤이 들고 있던 서류를 놓았다.

“네가 그 이름을 어떻게 알아.”

시선을 흘기면서 말하니 재희가 어깨를 으쓱였다.

“길드원들이 저 두고 그렇게 말하더군요. 한건주 녀석 도망가고 새로 온 예쁜이냐고. 물론 전 예쁜이가 아니니 그런 건 아니라고 대답해 줬습니다. 따지고 보자면 전 예쁜이보단 잘생이 같은 게 더 어울리니까요.”

이재희가 자기 얼굴을 매만졌다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사윤은 슬슬 두통이 오는 듯해 기가 찬 얼굴로 웃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저거 또 멀쩡한 얼굴로 헛소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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