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6화. 전야제 (5)
첫째 날은 게이트 세 개에서 끝냈지만 사윤의 게이트 클리어 강행군은 그날 이후로 더 거침없이 이어졌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랭크 하락으로 과보호에 들어간 밤쥐 간부들이 A급 이상의 게이트를 못 들어가게 감시하고 있어 S급 미만의 게이트만 돌아야 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등급이 오를수록 랭크업에 필요한 경험치가 많아져 웬만한 양으로는 랭크업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올라갈 때마다 두세 배의 경험이 필요하다면 B+급에서 A급까지는 여섯 개에서 아홉 개의 A급 게이트를, A급에서 A+급까지는 열두 개에서 열여덟 개의 A급 게이트를 클리어해야 했다. 그것도 그냥 클리어하는 게 아닌 중복되지 않은 다양한 던전에 들어가서, 다양한 방식으로. 그래야만 여러 경험을 쌓아 등급을 올릴 수 있었다.
이래서 필드가 좋았다.
필드는 게이트 내 영역이 워낙 넓고 그 안에 던전까지 있어 여러모로 경험치를 쌓기 최적의 장소였다. 한 가지 방법으로만 클리어하려 해도 나오는 몬스터가 많으니 상대에 따라, 그리고 상황에 따라 가장 최적의 방법을 찾아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 치트키가 막혔으니.
간부들의 입장도 이해 가지 않는 건 아니다. 필드에 들어갔다가 그 사달이 나 한건주도 도망치고 자신도 한 번 무너졌으니 여러모로 내키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노아.
사윤에게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다시 들어가면, 널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사윤은 필드에 들어갔다가 리플레이 던전을 찾겠다고 필드 안을 헤매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노아를 보고 멀쩡히 돌아올 자신도 없었다.
최초 발견자 혜택이 노아를 처단하는 루트 제공이었다면 다음 입장 때부턴 그 방법을 사용할 수 없을 거다. 즉 다시 들어가게 될 경우 던전 웨이브를 100회 견뎌 내는 미친 짓을 해야 한다는 소리인데 솔직히 무리였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지금 같은 시기에 노아를 생각하며 웨이브를 버티긴 힘들 것 같았다.
그러니 A급 게이트를 밤이고 낮이고 도는 것 외엔 등급을 빠르게 올릴 방법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랭크를 떨어트릴 때는 마이너스 등급까지 쳐서 느릿하게 떨어트린 시스템이 등급 업 때는 플러스와 정상 등급만 카운트해 준다는 사실이었다. C급까지 떨어졌다가 B-, B, B+를 밟으며 차근차근 올라가는 것만큼 최악은 없었다. 그것을 면한 건 다행이라 한숨을 내쉰 사윤은 재희와 함께 나흘 연속으로 게이트를 돌아 마침내 A급까지 오른 제 등급을 확인했다.
돌연 새로운 알림창이 뜬 건 그때였다.
<‘상쾌 발랄한 인류의 악을 위하여!’ 퀘스트 완료! 보상으로 1,000카르마가 지급됩니다. (b ᵔ▽ᵔ)b>
“게이트 열 개 깬 지가 언젠데….”
하도 늦게 나와 퀘스트가 있다는 사실마저 잊고 있었다. 시스템이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이틀이나 늦게 준 적은 처음이라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고 있으니 뒤따라 게이트에서 나온 재희가 사윤의 어깨를 툭 쳤다.
“뭘 그리 빤히 보고 있습니까?”
귀신 같은 자식.
어떻게 알고 온 건지 시스템이 나타났을 때 딱 온다. 사윤은 오소소 소름이 옅게 돋은 팔을 쓸어내리고 제 시스템창을 가리켰다.
“천기를 꿰뚫을 줄 알면 이것도 보이냐?”
“네?”
“됐다. 네 반응을 보니 안 보이는 모양이네.”
아무리 천기를 본다고 해도 남의 시스템창까지 엿보는 건 무리인 모양이다. 그런 제 반응에 무언가를 눈치챈 건지 가까이 다가와 고개를 숙인 이가 이내 웃었다. 천둥이 친 날 봤던 그 미소였다.
“시스템입니까?”
사윤은 이재희가 지어 보이는 저 광기 어린 웃음에 가끔 섬뜩함을 느꼈다.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관심을 보였다.
“뭐라고 왔습니까?”
“별건 아니고 퀘스트 보상.”
“퀘스트?”
“게이트 열 개 클리어하라는 퀘스트가 있어서. 근데 이틀이나 늦게 주더라.”
“시스템이 퀘스트 보상을 늦게 준다고요?”
이재희가 놀라 되물었다.
사윤만이 시스템 지령을 따라 퀘스트를 수행하고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헌터가 시스템 퀘스트를 진행하고 있었고 그에 따른 각종 보상을 받으며 헌터 생활을 이어 나갔다. 그러한 시스템이 보상을 늦게 준다는 말은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밤쥐 길드장인 자신이 듣지 못했으니 당연히 이재희도 들어 본 적 없을 것이다.
사윤은 처음 일어난 상황에 눈을 가늘게 떴다.
“무언가 수상하지 않니.”
“확실히 그렇네요. 제가 사윤 씨의 시스템창을 볼 수 있으면 가장 수월할 텐데. 그 점이 아쉽게 됐군요.”
“불만 있으면 네 시스템창한테 한번 따져 보든지.”
“따진다고 뭘 주나요?”
“주긴 주던데.”
“……?”
물론 사윤의 시스템창은 따지고 들면 엿을 줬다.
시스템과의 소통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같겠지만 가끔 그럴 때가 있었다. 가령 ‘빌런 짓 관두고 숲 아래에 생매장당하면 강제 집행도 안 통하지 않을까.’라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으면 어디 한번 해 보라는 듯이 강제 집행이 달린 새로운 퀘스트를 부여한다거나, 경매장에 나온 아이템을 탐내고 있으면 경매장 아이템을 바꿔치기해 악당다움을 증명하라는 퀘스트를 내린다거나 하는 일이.
그래서 사윤은 매번은 아니고 어쩌다 한두 번쯤은 시스템과 대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매일같이 시스템 욕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듣게 된다면 반성 좀 하라고.
생각난 김에 오늘 치 시스템 욕을 해야겠다.
보상창을 노려보며 쉼 없이 욕설을 중얼거리고 있으니 재희가 질린 표정으로 물러섰다. 사윤은 총 10분간 시스템을 욕하고 나서야 상쾌해진 얼굴로 몸을 틀었다.
“이만 가자.”
“게이트로요?”
“아니. A급까지 올렸으니 오늘은 여기서―.”
어?
말을 하다 말고 사윤의 몸이 휘청거렸다.
“사윤 씨!”
꼭 다리에 힘이 풀리기라도 한 것처럼 고꾸라지는 사윤에 곁에서 걷고 있던 재희가 잡아 줬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평소의 사윤이었다면 벌써 욕을 하면서 일어났어야 했는데 붙들린 사내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사윤 씨?”
재희가 점점 무거워지는 사윤을 지탱하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이 들리지 않아 사윤의 상태를 확인한 남자는 죽은 듯 쓰러진 상대에 잠시 말을 멈추었다.
쿵쿵.
맥을 짚어 보니 맥박은 정상적이었다. 호흡도 안정적이고 특별히 다친 구석도 없어 보였다. 오늘 하루 간의 전투를 곱씹어 본 재희는 딱히 독이나 저주를 쓰는 상대가 없었음을 확인하고 안심했다. 무엇보다 사윤은 반쪽짜리 신념을 주 무기로 쓰고 있었기에 저주나 독에 당했다 하더라도 무기의 힘을 통해 저항할 수 있었다.
이렇게 갑자기 쓰러질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니 지금 사윤이 쓰러진 건.
“과로인가. …아니면 과부하거나.”
쓰러진 사윤을 안아 들어 라이의 등에 태운 재희가 중얼거렸다. 사윤과 함께 게이트를 공략한 지도 어느덧 5일째다. 그 닷새 동안 사윤이 휴식을 취하는 모습을 보인 건 숙면할 때뿐이었다. 그마저도 첫날과 둘째 날을 제외하곤 제대로 자지 못한 건지, 라이가 들려주는 보고에 의하면 새벽마다 깨 테라스를 서성인다고 했다.
그런 상태로 쉬지 않고 게이트를 공략해 대니 몸이 축날 만도 하다. 당장 오늘도 그랬다.
세 개의 게이트를 클리어했을 때 재희는 돌아가자고 했지만 사윤은 반대했다. 두 곳만 더 돌면 A급이 될 수 있을 것 같으니 조금만 더 고생하자며.
타인의 시선으로 봤을 때 그의 ‘조금’은 결코 ‘조금’에서 그치지 않았다. 조금 더 고생하자고 하면 무리했고, 조금 더 일하자고 하면 밤을 새웠다. 그게 어딜 봐서 조금인가?
그래서 하루 쉬고 가는 게 나을 거라고 했더니 사윤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으로 이리 말했다.
‘등급 상승되면 피로도도 회복되는데 굳이? 그냥 바로 가지.’
과연 일 중독자다운 발언이었다. 그때부터 무슨 사달이 날까 불안 불안 했는데 기어코 이리 쓰러졌다. 등급이 상승되면 피로도도 회복된다더니 그 회복을 기절시켜 시킬 줄은 사윤도 몰랐을 것이다.
정확히는 한계치까지 쌓인 피로도가 단번에 회복돼 몸의 긴장이 풀려 잠든 거로 보였지만.
“컨디션 조절은 기본 중의 기본인데. 쓸데없는 잡기만 배우고 정작 중요한 걸 할 줄 모르는군.”
혀를 찬 재희가 사윤의 얼굴을 살폈다. 죽은 듯 잠든 얼굴은 사윤이 유일하게 편안해 보일 때였다.
마음이 불편해진 남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윤은 보고 있으면 불나방 같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었다. 지옥 불에 몸을 내던지는 불나방.
조금 특이한 점이 있다면 그것이 지옥 불임을 알면서도 몸을 내던진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곁엔 그의 생각을 이해하면서도 조금 더 정상적으로 사고하고, 그와 안정적으로 정서적 교류를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곁을 지키고 필요할 때 등을 맞대면서 그를 멈춰 세울 수 있는 그런 사람 말이다.
사람은 그러한 버팀목이 하나쯤은 있어야 살아갈 수 있었다.
자신은 세계를 구하는 데 미쳐 있었으니 탈락이었고 그나마 비슷한 상대는 종식이란 사내였으나 너무나도 분명한 군신 관계로 보였기에 미스였다.
서로가 편하게 대할 수 있어야 하니까.
“마땅한 사람이 없군.”
어떻게 살아왔으면 주변에 사람이 이리도 없냐고 핀잔하듯 중얼거리자 라이가 컹 짖었다. 동의의 뜻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재희가 시로를 소환했다. 두 소환수가 각각 한 명의 인간을 태우고 밤쥐 길드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본 밤쥐 길드원들이 경악하며 재희를 ‘형님을 이긴 유일한 사내’, ‘세계 최강의 남자’, ‘전설의 소환사’ 쯤으로 여기기 시작한 건 재희 본인만 모르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