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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135)화 (135/266)

제135화. 전야제 (4)

아침을 먹으며 11시까지 게이트 관련 서류를 본 사윤은 다음으로 갈 A급 게이트 세 곳을 추려 내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뿌드득. 장기간 한 자세로 앉아 있던 탓에 좌우로 돌린 허리에서 뼈 소리가 났다. 사윤은 하마터면 스트레칭하다가 삐끗할 뻔한 허리를 매만지며 끙 소리를 내었다.

“슬슬 늙었나. 몸이 예전 같지가 않아.”

전에는 사흘 밤낮으로 일에 매진했어도 멀쩡했는데 그거 몇 시간 앉아 있었다고 온몸이 뻐근했다. 뭉친 목을 주무르며 중얼거리자, 착실히 서류를 보고 있던 재희가 미간을 좁혔다.

“퍽도 늙었겠습니다.”

“아. 연장자 앞에서 할 말은 아니었나?”

“사윤 씨.”

“듣고 있으니 말해.”

“하.”

그가 머리가 울린다는 듯 한숨을 내쉬어 사윤은 호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자신은 남들이 저렇게 질색하는 걸 봐야 기운이 나는 듯했다.

사실 연장자도 아니긴 하지만.

강제 집행과 죽음으로 회귀한 시간을 생각해 보면 이재희와 자신의 나이는 얼추 비슷할 것이었다.

그러나 뭐, 그게 중요한가?

어차피 자신은 나이 상관없이 반말하고 있는데.

유교 국가에서 상당히 자유로운 마인드를 소유한 사윤이었다.

“이제 출발하는 겁니까?”

“그래, 갈 곳이 많으니까 빠릿빠릿하게 움직이자고.”

사윤은 제 몫의 서류 작업을 끝내고 일어서는 재희를 챙겨 게이트로 향했다.

첫 번째 게이트는 신수의 숲이었다.

난이도만 따지자면 A+급 정도 됐으나 소환사와 함께 들어갈 경우 신수들의 호감을 사 클리어하기 쉬워졌다. 듣자 하니 던전을 클리어할 때 소환사가 포함되어 있다면 일정 확률로 소환수를 한 단계 즉시 성장시킬 수 있는 물약을 줘 소환사들 사이에서는 필수 게이트라고 했다.

그래서 퀘스트도 해치울 겸, 이재희를 위할 겸 가장 첫 번째 코스로 골랐다. 이 게이트의 의외였던 점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쉽게 클리어됐다는 사실이었다.

소환사가 동행할 경우 난이도가 하락한다는 소문이 참이었던 건지, 확실히 이재희가 나설 때마다 몬스터들이 약해졌다. 그 결과 신수의 숲 게이트는 다른 A급 게이트보다 빠르게 공략되었다.

“나왔냐?”

사윤은 게이트 클리어 보상 상자 주변을 서성이며 물었다. 상자가 두 개였는데 첫 번째 상자는 사윤이 열었다가 하급 물약 포션이 나와 던져 버렸다.

A급 게이트인데 하급 포션이 나오는 게 말이 되나.

화를 못 참고 성을 냈던 사윤은 제 운을 탓해야지 뭘 탓하나 싶어 이를 아득바득 갈다가 남은 상자를 재희에게 넘겼다.

그것마저 자신이 까 버리면 웬 괴상한 것이 나올 것 같던 탓이었다.

신들이 보장하는 타고난 운을 가진 사람은 어떤 보상을 받나 싶어 기웃거리고 있으니 정신 사나우니 가만히 있으라고 얘기한 재희가 보상을 개봉했다.

화아아악!

찬란한 빛이 번뜩인다. 시야를 가린 빛이 사라지자 상자에는 두 개의 포션이 놓여 있었다.

하나는 황금빛 포션이었다. 사윤도 처음 보는 형태라 정보를 확인하니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소환수의 등급을 한 단계 즉시 성장시키는 포션이었다.

“…허.”

나머지 하나는 상급 회복 포션이었다. 같은 게이트를 클리어하고 같이 보상을 받았는데 그 내용물 차이가 이렇게 심해도 되는 건가? 틱틱 머릿속 신경이 끊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또 한 번 시스템을 향한 분노가 치미는 것도 잠시, 이내 사윤은 게이트를 깨러 갈 때마다 이재희를 데리고 다니며 그에게 상자깡을 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저런 손이 있다면 써먹어야지, 아끼고 있는 놈이 멍청한 거였다.

길드원으로 안 들인다고 했을 뿐이지, 게이트를 같이 클리어하는 것쯤은 되는 거 아니겠는가?

즐거워서 웃고 있으니 재희가 즉시 포션을 따 시로에게 먹였다. 왜 펜리르에게 먹이지 않고 구미호 소환수에게 먹인 거냐 물어보니 S급 미만의 소환수에게만 사용할 수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즉시 성장 포션을 먹은 시로는 꼬리가 늘더니 S급이 되었다.

‘현재 상태: 나, 시로. 네 살에 S급이 된 영재 구미호. 이렇게 잘나도 되는 건가? 정정당당하게 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자신감 넘치는 시로의 상태창을 본 사윤은 또다시 배가 아파 복통을 호소해야만 했다.

* * *

“이번에는 네가 두 개 다 까라.”

두 번째 A급 게이트, ‘비탄의 서’ 공략을 끝낸 사윤은 피 묻은 단도를 털어 내며 상자를 향해 턱짓했다. 얼굴에 튄 몬스터의 피를 닦고 있던 재희가 상자 하나를 가져가며 염려를 표했다.

“정말로 제가 열어도 되는 겁니까? 거래 불가 귀속 아이템이 나오면 제게 귀속될 텐데요.”

“내가 까면 그 거래 불가 귀속 아이템도 안 나올 것 같으니 네가 까라고. 누구 놀리니, 재희야.”

“그런 건 아닙니다.”

시팔. 대답은 또 착실하게 해서 기분 나빴다. 사윤은 인상을 찡그리며 얼른 열어 보라고 재촉했다. 그런 사윤의 기대가 부담스러워 심호흡한 재희가 상자 두 개를 열자 두 상자 모두 금빛을 내뿜더니 비탄의 서에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아이템을 뱉어 놓았다.

“미친, 반쪽짜리 신념이 나온다고?”

사윤은 믿기지 않아 재희를 밀쳐 내고 상자 속을 확인했다.

[반쪽짜리 신념(S+)]

-알반 왕국의 기사단장 메르한은 흑마법사 바르칼을 처단하기로 마음먹었다. 모두의 비웃음에 조각나 버린 그의 신념 절반은 당신에게 꺾이지 않는 용기를 제공할 것이다.

-메르한의 기합 사용 시 모든 상태 이상에 10분간 저항 (1일 1회 제한)

-어둠 속성 상대 시 공격력 100% 상승

-저주, 속임수 등 흑마법을 연상시키는 술수에 당할 경우 방어력 10% 상승

-적을 처치할 때마다 체력 5% 회복

진짜다. 진짜로 반쪽짜리 신념이었다.

사윤은 기뻤다. 어느 정도로 기뻤냐면, 곁에 있던 재희가 눈치 빠르게 도망가지만 않았어도 그를 냅다 들어 안아 하늘 구경을 시켜 줄 수 있을 정도로 기뻤다.

반쪽짜리 신념.

공식으로 국내 길드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대한의 이한이 가지고 있는 무기였다. 그가 최초로 발견한 무기는 3년 전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처음으로 발견된 S+ 등급의 무기였고 아이템 효과가 사기적인 까닭이었다.

3년이 지난 지금 와서 살펴봐도 웬만한 SS급보다 좋은 성능이다. 그런 아이템이 3년도 전에 나왔으니 얼마나 반응이 뜨거웠겠는가.

사방에서 쇄도하는 어디서 구했냐는 질문에 이한은 여유롭게 웃으면서 딱 한마디만 했다.

‘비탄의 서에서 구했습니다. 아무래도 이게 최고 등급 아이템인 것 같더군요.’

그 말에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까지도 비탄의 서를 공략하기 위해 몰려왔다. 게이트 앞은 항상 사람들로 붐볐고 24시간 내내 쉴 틈 없이 돌아갔다.

그러나 그때 비탄의 서를 공략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 중 그 누구도 반쪽짜리 신념을 얻지 못했다. 자그마치 2년 동안이나.

사윤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사윤은 게이트 공략을 시도하기 전, 이한에게 먼저 무기를 뺏으려 했다가 길드 연합에 걸려 어쩔 수 없이 게이트를 공략하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해야 했다. 그리고 남들이 다 포기할 때까지 비탄의 서를 공략했다. 모두가 포기하고 돌아간 마지막 1년째까지.

하지만 반쪽짜리 신념은 찾지 못했고 사윤은 이한을 사기꾼 취급 했다. 이한이 억울해하든 말든 자신이 3년이나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못 찾았으므로 그는 사기꾼이었다.

그렇게 맹비난하며 살다, 이재희의 행운 스탯을 보고 혹시 몰라서 데려온 건데 정말로 이걸 얻어 낼 줄이야.

이 기특한 금손을 어쩌면 좋을까!

드디어 이한만이 가지고 있다던 반쪽짜리 신념이 손에 들어왔다. 기쁨을 참지 못하고 무기를 들어 칼날에 입을 맞추고 곧장 검무를 춰 보기도 한 사윤은 흥분감에 홍조가 오른 채로 고개를 돌렸다.

“재희야!”

역시 그를 한 번 꽈악 안아 줘야겠다 생각하며 뒤를 돌았는데 근처에 아무도 없었다. 당황해서 주위를 살피자 제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이재희가 미친놈 보듯 저를 보고 있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음. 자신이 생각보다 많이 흥분했나 보다.

그제야 진정한 사윤은 멋쩍게 아이템을 챙기고 재희에게 다가갔다.

“……세리머니는 끝났습니까?”

“뭐, 보다시피.”

“그렇군요. 제 곁엔 안 와 주셨으면 합니다.”

거절당했다.

사윤은 미친놈에게 갱생 불가 또라이 취급 받은 게 억울해 입을 열었다가 반쪽짜리 신념을 얻어다 줬으니 한 번은 참고 넘어가기로 했다.

무려 반쪽짜리 신념이었으니까.

얼마 만에 이렇게 풍족한 기분을 느껴 보는가.

밤쥐가 범죄 길드에서 명실상부한 1위를 차지하고 나서부터는 부족함도, 풍족함도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 무기를 얻어도 예전만큼 기쁘지 않았는데 지금은 막 각성한 시절. 음, 그때는 이런 게 기쁘지 않았으니까 넘어가고. 그래, 한 3, 4년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회춘을 해도 이보다 기쁘진 않을 것이다. 사윤은 떨떠름해하는 재희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다음 게이트를 클리어하러 갔다.

마지막 세 번째 게이트는 ‘울고 있는 크레이아 석상’이었는데 사윤이 고른 게이트답게 평범하지 않았다. 애초에 12인 이상의 다인원으로 클리어하길 권장하는 게이트였지만 사윤은 재희와 함께 단둘이서 공략 시도를 했고, 클리어했다.

인원수가 적은 만큼 얻게 된 보상 역시 풍족했다.

그렇게 마지막 게이트까지 성공적으로 돌자 사윤은 등급이 올랐다.

B+.

그냥 B급에서 B+급으로.

S급 하나만 돌면 A급이 될 것 같은데.

목표로 했던 등급을 이뤘으나 세 게이트 모두 공략이 빨리 끝나 시간이 애매하게 붕 떠 버렸다. 이렇게 된 거 확 A급을 만들고 갈지 고민하고 있으니 이재희가 툭 사윤의 어깨를 쳤다.

“무리하지 말고 들어가죠. 내일도 시간이 있지 않습니까.”

“흠. 그럴까?”

다른 사람이 그리 말했다면 내일과 오늘이 같냐고 비꼬았을 테지만 재희가 말했으므로 사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순응했다.

그도 그럴 게 다른 누구도 아닌 반쪽짜리 신념을 구해다 준 이재희였으니까!

사윤에게 매일같이 갈굼당하는 밤쥐 길드원들이 알면 피눈물을 흘리며 비탄의 서로 달려갈 법한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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