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4화. 전야제 (3)
똑똑.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라고 생각한 사윤은 감기려는 눈을 뜨려다 몰려오는 졸음을 못 이기고 잠든 라이를 껴안았다. 푹신푹신한 털에 몸을 파묻고 있으니 노곤해진다. 라이의 체온으로 몸이 데워져 눈을 감은 사윤은 침대를 더듬어 구석으로 몰린 이불을 끌어온 뒤 손을 휘저었다.
스르르륵.
침대 아래에서 똬리를 트고 있던 뱀이 사윤의 의사에 반응해 몸을 움직였다. 굳게 닫힌 방문 앞까지 기어간 녀석이 몸을 배배 꼬았다가 용수철처럼 높이 튀어 올라 방문 손잡이에 매달렸다.
스르륵.
손잡이에 몸을 꼬며 무게 중심을 옮기자, 은빛 손잡이가 기울어지며 달칵 문이 열렸다. 열린 문 틈으로 베이지색 슬리퍼 하나가 빼꼼 고개를 들이밀었다.
“일어났습….”
방 안으로 들어오려던 남자가 잠시 멈칫거렸다. 사윤이 직접 문을 열어 준 거라 생각했는데 정작 방문 앞엔 누구도 서 있지 않아 놀란 것이다. 침대에 웅크려 있는 사윤과 라이를 발견한 남자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문 주변을 이리저리 훑어보던 이는 마침내 손잡이에 매달려 있는 뱀을 발견했다.
“아.”
그의 입에서 감탄 같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영리한 뱀이네요.”
슥슥. 이재희가 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자, 그 음성을 들은 사윤이 라이에게 파묻히다시피 한 채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두통 한번 장난 없네.
술도 안 마셨는데 꼭 숙취에 시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가 징징 울렸다. 게이트 리셋에 휘말린 여파가 뒤늦게 오는 건가 싶어 인상을 쓴 사윤은 어느덧 재희의 어깨에 걸쳐진 제 뱀을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넌 왜 거기 있냐.
스스슷.
눈으로 묻자 뱀이 꼬리를 치켜세웠다가 좌우로 흔들며 대답했다. 대충 재희가 좋다는 뜻이었다.
만물에게 사랑받는 자가 이런 의미였나.
웬만해선 사람을 좋다고 평가하지 않는 자신의 뱀들이 이재희에게는 꼬리를 흔들며 한두 마리씩 슬금슬금 몰려들고 있었다. 과연 만물이라는 명사가 붙을 만하다며 감탄한 사윤은 웃으며 뱀을 쓰다듬는 남자를 응시했다.
미소 봐라. 웃을 때랑 정색할 때랑 인상이 천지 차이네.
제 뱀들이 꼭 만물에게 사랑받는 자라는 특전 때문에 이재희에게 호감을 보이는 건 아닌 듯했다. 새끼 때부터 제 얼굴을 보고 자라, 낯(짝)을 가린다는 평이 길드원 사이에서 자자한 녀석들 아니던가. 필시 저 얼굴이 마음에 들었으리라.
애완 뱀들의 성향을 모르지 않았던 사윤은 피식 웃으며 뒤늦은 대답을 뱉었다.
“기특한 놈들이긴 하지.”
잠긴 목소리로 대답하자 이재희가 느지막이 움직여 물병을 건네주었다. 그를 제 방에서 재운 건 하룻밤뿐이었는데 그사이 냉장고 위치까지 파악한 건지,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가져다주는 게 집주인처럼 아주 자연스러웠다.
사윤은 일어나기 싫게 만드는 푹신한 라이의 털과 물을 두고 저울질하다 몸을 일으켰다.
오늘따라 유난히 몸이 노곤해 움직이기 싫었으나 몸이 내지르는 소리를 따라 버리면 정신이 무너지는 법이다. 사윤은 강인한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는 의견을 전적으로 맹신하는 입장으로서 잠기운을 떨쳐 내고 물을 들이켰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 배 속의 열기를 식히고 나서야 차츰차츰 정신이 들었다.
“그래서, 무슨 용건이야?”
아침부터 저를 찾아온 거면 용건이 있을 터였다. 물을 반병쯤 비우며 물으니 이재희가 눈을 깜빡거렸다.
“딱히 용건이 있어 온 건 아닙니다만.”
뭐야?
하마터면 제 성질대로 ‘뭐야 이 새끼?’ 하고 반문할 뻔했다. 사윤은 이재희가 한발만 빨리 말했어도 뱉을 뻔했던 물을 무사히 삼키고 물병의 뚜껑을 닫았다. 침대에 앉아 올려다본 이재희는 평소와 다를 거 없이 멀쩡한 인상이었다.
그런데 왜 헛소리를 하지?
의문을 품었다가 이내 납득했다.
이재희는 평소에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시죠. 이 건물 자체가 제게 낯서니 그나마 익숙한 사윤 씨라도 찾아온 겁니다.”
“그래, 그래.”
“사람이 말하면 제대로 들으시고요.”
“어어.”
사윤은 쏟아지는 변명과 핀잔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도로 침대에 누웠다. 어린 펜리르는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푹 잠들어 있었다.
소환수가 이렇게까지 잠을 오래 자나?
오르락내리락하는 말랑한 배만 아니었어도 죽은 줄 착각했을 것이다. 콕. 검은 코를 누르자 끄응 하고 앓아 댄다. 그 모습이 우스워 낄낄거리고 있으니 이재희가 질 나쁜 사람이라도 보는 양 사윤을 내려다보았다. 그에 사윤은 큼 하고 목을 가다듬고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8시밖에 안 됐다. 다른 때였다면 슬슬 움직이자고 했을 시간대였지만 오늘은 지나치게 피곤해 점심까지는 쉬고 싶었다.
라이의 꼬리 위로 발을 얹어 까딱거리고 있으니 문득 까먹고 있던 것 하나가 떠올랐다.
“언노운에 대한 정보는 좀 얻었나?”
밥은 먹었냐는 투로 묻자 이재희가 고개를 저었다.
“자세히 살필 시간이 안 됐지 않습니까. 소득이 아예 없진 않은데 그다지 쓸 만하지 않아요. 조금 더 생각해 봐야 알 것 같고.”
“무슨 정보를 알아냈는데.”
“조금 더 생각해 봐야 알 것 같다는 제 말은 귓등으로 들으셨습니까?”
“뭐, 간단하게라도 알려 줄 수 있는 거니까.”
일부러 가볍게 얘기했지만 이재희는 완강했다. 섣부르게 판단할 수도 있으니 홀로 생각해 보고 결론을 내린 뒤 알려 주겠다고 하는 이에 쩝 입맛을 다신 사윤이 이재희 쪽으로 고개를 돌려 누웠다.
이럴 때는 그가 밤쥐 길드원이 아닌 게 아쉬웠다.
제 길드원이었으면 혼자 생각하는 거고 뭐고 일단 보고부터 하라며 멱살을 잡았을 텐데, 이재희에겐 그럴 수 없었으니까.
이렇게 된 거, 확 가입해 보라고 해 봐?
“싫습니다.”
“나 아직 아무런 말도 안 했는데, 재희야.”
“사윤 씨 표정을 보니까 길드에 들어오라는 말을 할 것 같아서요. 말했지 않습니까. 범죄 길드에 들어가기에는 제법 선량한 삶을 살아 악행이 부족하다고요.”
거 절대로 부서지지 않는 방패가 따로 없었다. 사윤은 시도해 보기도 전에 실패한 길드 영입 제안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어차피 그와는 협력 관계였기에 길드장급으로 대우해 줄 게 아니라면 길드 영입 제안을 해 봤자 무쓸모였다. 그가 길드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동등한 지금의 관계가 상명하복의 관계가 될 테니까.
‘그러니 이해해 봐요.’
빌어먹을. 또 생각나네.
이젠 동등이란 단어만 생각해도 반사적으로 한건주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는 여전히 궁금해 눈살을 찌푸리던 사윤은 ‘사윤 씨?’ 하고 제 이름을 부르는 이재희에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언노운 건은 말하든 말든 네 마음대로 해라. 맞다, 종식이가 너 언제까지 여기에 있냐고 물어보던데.”
“불편하면 나갈까요?”
“나가라는 말은 아니고. 일정 확인하려고 물어본 거일 테니 나중에 만나면 말해 줘라.”
“전 종식이란 사람을 모릅니다만.”
“몰라?”
“네.”
사윤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자신은 그가 종식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지 모르겠다.
한건주와 착각했나?
그러고 보니 이재희는 확실히 종식과 만난 적이 없었다. 최근 들어 그가 바빠졌던 탓에 건주가 있을 때랑은 달리 늘 제 곁에 붙어 있지 않은 까닭이었다. 잠시 말을 잃은 채 입가를 매만지던 사윤은 이내 머리카락을 탈탈 털었다.
“헷갈렸나 보네. 다음에 소개해 줄 테니 기억해 둬.”
“그러죠.”
“그래서 길드에는 언제까지 있을 건데? 근처에 따로 집 구할 거면 말하고. 그 정도는 구해 줄 수 있으니까.”
“으음….”
이재희가 시선을 오른쪽 아래에 두고 침음을 흘렸다. 생각에 잠긴 그를 기다려 준 사윤은 울리는 핸드폰에 문자를 확인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종식의 문자였다.
[이재희 씨는 언제까지 머무른답니까?]
마침 잘됐네.
“지금 문자 왔는데 네가 답장해라.”
휙 던진 핸드폰을 이재희가 허공에서 낚아챘다. 종식의 문자를 확인한 그가 입을 열었다.
“사윤 씨가 시스템에서 벗어날 때까지 여기 있을 생각인데 뭐라고 답장할까요.”
“네가 살 곳은 따로 안 구하고?”
“굳이 그래야 합니까?”
“뭐, 여기가 편하면 그렇게 하든가.”
“편한 건 아니지만 꼭 집을 구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앞으로 얼굴 자주 봐야 할 텐데 거리가 멀어지면 번거롭기만 하니.”
일리 있는 말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사윤은 이재희가 건넨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얼마나 걸릴 것 같냐?”
“사윤 씨가 시스템에게 벗어날 때까지요?”
“네가 나에 대한 정보를 다 캐낼 때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냐고.”
물음을 고쳐 주자 그가 침묵했다. 사윤은 조금 어이없단 눈으로 재희의 표정을 살폈다.
“지금 너한테 제일 급한 건 나한테서 신과 시스템에 관한 정보를 빼내는 거잖아. 그거 끝나면 집 구해서 살 것 같은데. 아니야?”
고개를 삐딱 기울이면서 묻자 남자가 살짝 웃었다.
“눈치가 빠르시네요.”
“찔린 척이라도 해라.”
“찔려야 합니까? 제가 사윤 씨를 도울 거란 사실은 변함이 없을 텐데. 단지 그게 가까이서인지 멀리서인지 차이일 뿐이죠.”
“그런 놈이 뭐 시스템에서 벗어날 때까지 길드에 남겠다고 말해?”
“말은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니까요. 사윤 씨가 했던 대로 얘기하면 기분이 상하지 않습니까.”
“…허이구.”
말은 잘한다. 달변가가 따로 없다며 혀를 찬 사윤은 종식의 문자에 답장을 보냈다.
[한 반년 정도.]
대충 보낸 답장에 대한 반응은 바로 왔다.
[반년이나요?]
요새 문자는 음성 지원도 되나. 글자만 읽었을 뿐인데 놀란 종식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더불어 종식의 경악한 표정까지도 말이다. 사윤은 무어라 대꾸해 주는 대신 고개를 돌려 어느덧 깬 라이의 털을 정돈해 주고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대충 반년으로 말해 뒀는데 더 걸릴 거면 정정해.”
“반년이면 얼추 적당한 것 같네요. 더 걸릴 거면 그때 가서 수정하죠.”
“그러든가. 그럼 아침 챙겨 먹고 슬슬 가 볼까.”
“어디를요?”
어디긴 어디야, 게이트지.
B급이 되었다면 이제 A급을 바라볼 차례였다. 사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세수하고 나와 서랍에 넣어 두었던 서류 뭉치를 꺼내 탁, 하고 올려 두자 관심을 보이며 다가온 이재희가 맨 위의 서류를 확인했다. 밤쥐가 보유한 게이트 자료였다.
“더 안 쉬고 바로 출발할 생각입니까?”
“충분히 쉬었어. 그리고 아침 먹으면서 게이트 고르고 갈 거니 바로는 아니고.”
“일중독이군요.”
“개미처럼 일해야 태산 같은 돈이 쌓이는 거 아니겠냐.”
비록 지금은 돈 벌러 가는 게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것이 길드 초기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사윤의 지론이었다. 종식에게 전화해 밥 좀 보내 달라고 부탁한 사윤은 책상 위에 쌓인 서류를 허밍하며 살폈다. 그 모습을 본 재희가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일하다 과로사한다고 조언하며 말이다.
걱정은 고마웠지만 아쉽게도 사윤은 과로로 죽어 본 적이 없었다.
“사람은 그리 쉽게 죽지 않는단다, 재희야.”
“무슨….”
반박하려던 남자는 곧이어 쿵 소리를 내며 제 앞으로 옮겨진 거대한 서류 더미에 입을 다물었다. 그가 의문스러운 눈으로 저를 응시하자 사윤은 부드러운 눈웃음으로 화답해 주었다.
“밥값해야지, 재희야. 공짜로 숙식할 생각은 아니잖아.”
“비용이라면 내도록 하죠.”
“돈은 괜찮으니 그거나 봐. 마침 할 짓 없었다며.”
이제 일 생겼으니 다행이네.
킬킬거리며 덧붙인 말에 재희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안타깝게도 서류에 시선을 둔 사윤은 보지 못한 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