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2화. 전야제 (1)
번쩍!
사윤은 평소보다 몸이 가볍다는 걸 느끼며 눈을 떴다. 그러곤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과 눈앞이 보임에 실망했다.
실패한 건가.
설마 다시 눈을 뜨는 날이 올 줄이야.
이번에야말로 될 줄 알았다. 근거 없는 확신이긴 했지만 여태껏 시도해 본 방법 중 가장 강한 확신이 들었고 그 어느 때보다 예감이 좋았었다. 그런데 역시는 역시인 모양이다. 고작해야 게이트 리셋 같은 거로는 이 지긋지긋한 고리를 끊어 낼 수 없는 듯했다.
그래, 저를 10년이 넘도록 옭아매고 있는 운명이 어디 쉽게 떨어지겠나.
수요 없는 공급이 따로 없었다. 신물이 나 한숨을 내쉰 사윤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뭐야?”
왜 여기 있지?
그럴 리가 없길 바랐지만 만약 눈을 뜨게 된다면 게이트 안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정신을 차린 자신은 게이트 안도, 환상 극장 게이트 입구 구역도 아닌 영 엉뚱한 곳에 와 있었다. 꽤 먼 거리에 위치한 자신의 방에 누워 있는 것이다.
…누군가 옮겨 준 건가?
의문을 느끼며 주변을 살폈지만 제 방에 있는 사람은 저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문을 살폈지만 누군가 들어온 흔적도 나간 흔적도 없었다. 꼭 자신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라도 한 것 같은 상황이었다.
아, 설마.
사윤은 이런 기이한 현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존재가 딱 하나라는 걸 깨닫고 눈썹 사이를 모았다.
시스템.
그것이 게이트 리셋으로부터 자신을 살리기 위해 제 몸을 회복시킴과 동시에 게이트에서 방으로 이동시킨 모양이었다. 강제 텔레포트라니. 꽤 충격적인 장면이었지만 초보자 게이트에도 막 들여보내는 능력을 가진 놈인데 이 정도도 못 할까.
하, 헛숨을 흘린 사윤은 핸드폰을 찾았다.
혹 자신이 회귀한 것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놓지 못한 탓이었다.
몸을 되살리면서 시간을 하루쯤 되돌려 이 방에 있도록 만든 걸지 누가 안단 말인가. 물론 그랬다면 곁에 이재희가 있어야 했지만, 시스템이라면 무슨 변수를 만들어 내도 이상하지 않았다.
가령 ‘당신은 24시간을 회귀했습니다, 회귀된 세상에서 달라진 점을 찾아 오류를 해결하세요!’ 같은 문구를 띄우며 이재희를 찾으라고 하는 개고생 퀘스트를 내거나, 게이트 리셋으로 죽으려 했으니 처벌이 있다는 말과 함께 저 혼자 있는 세계에 잠시 가둬 놨다는 말을 남겨도 이상하지 않다는 얘기였다.
그렇기에 곧바로 핸드폰부터 찾은 사윤은 격한 전투로 액정이 다 나간 와중에도 용케 켜지는 화면을 확인했다.
날짜는 하루가 바뀌어 있었고 시간은 새벽이다. 즉 게이트에 뛰어들고 네다섯 시간 정도밖에 안 지났다는 소리다.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한 사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확인했다.
어디 한 군데 부러진 곳 없이 멀끔했다. 물론 옷이야 피투성이긴 했지만 게이트 포화를 일으키겠단 계획을 세운 순간부터 한 번 입고 말 생각이었으니 딱히 상관은 없었다.
내상도 외상도 전부 치료된 걸 확인하고 나서야 되살아났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 사윤은 혀를 차며 벽에 머리를 기댔다.
“게이트 리셋도 안 되는군.”
될 줄 알았는데 최악의 방향으로 안 됐다. 그냥 회복만 시키는 게 아니라 회복 후 강제로 텔레포트를 시키다니. 다음에는 어디로 텔레포트시킬지 예상이 안 가 재차 시도하기도 꺼려졌다.
이런 식으로 압박을 준단 말이지.
이를 으득 간 사윤이 머리를 헝클였다. 자신만 피해를 본다면 한 번 더 도전하겠는데 다음에 떨어질 곳이 어디냐에 따라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었으니 함부로 행동하질 못하겠다. 사윤이 느끼기에 지금 비교적 온건하게 제 방으로 옮겨 준 건 일종의 경고 같았다.
내가 이렇게 널 게이트에서 쉬이 빼낼 능력을 갖고 있으니 허튼짓하지 말고 시키는 일이라 하라는.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왔다. 갈수록 악독해지기만 한다고 생각한 사윤은 머리 처박고 고민해 봐야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몸을 바로 세웠다.
일단 죽는 건 실패했겠다, 지금 할 일은 명확했다.
이재희 찾으러 가야지.
어쩌다 보니 일 시켜 놓고 자리에서 튄 개쓰레기 놈이 돼 있었다. 이재희가 제 길드원이 아닌 각자의 목표를 위해 합심하기로 한 동등한 협력자인 만큼 얼렁뚱땅 넘길 수는 없었다. 이 상황을 수습하고 그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줘야 할 필요성을 느낀 사윤은 경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람의 위치를 파악하는 건 그에게 묻는 것만큼 빠른 게 없었다.
-뭐야, 형님. 살아 있었네?
이 새끼는 왜 갈수록 싸가지 없어지지?
그래도 제가 한건주를 놓치고 난 후 잠시 넋이 나가 있을 때는 친절했는데 며칠 됐다고 다시 싸가지 없는 새끼로 변했다. 사윤은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야?”
-이재희가 형님이 리셋되는 게이트 안으로 뛰어들었다면서 찾아오겠다고 환상 극장 게이트 클리어하러 갔다던데.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뭐?”
그건 사윤이 묻고 싶은 말이었다. 대체 이재희가 자신이 리셋된 게이트 안으로 뛰어든 일은 어떻게 알고 있으며, 저를 찾겠다고 리셋이 완료된 게이트를 공략하는 건 또 뭐란 말인가. 황당해하고 있자 핸드폰 너머로 잠시 정적이 이어지더니 이내 경진의 떨떠름한 음성이 돌아왔다.
-형님 설마 이재희 거기다 버리고 온 거?
“…버린 건 아니고.”
-대충 비슷하다는 거네.
반박할 순 없었다. 어쨌든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사윤이 대답하지 않고 있자 경진이 표정이 보이는 듯한 경멸의 목소리를 흘렸다.
-진짜 최악이다, 형님. 그렇게 살지 말라니까. 아아! 그렇다고 살지 말라는 소리는 아니고 인성 좀 고쳐 써먹자는 거지. 사람 고쳐 쓰는 건 아니라지만.
이 새끼는 뭐라는 거야?
평소처럼 싸가지 없는 단답남이 차라리 나았다. 말 많은 싸가지 없는 헛소리남은 최악인 듯해 인상을 찌푸린 사윤은 샛길로 빠지는 중인 통화의 방향을 붙잡았다.
“그럼 이재희가 지금 게이트 공략 중이라는 거지.”
-어, 한 시간 전에 들어갔다니까 곧 나올걸?
그럼 자신이 가는 것보다 그가 던전 공략을 마친 후 길드로 복귀하는 게 빨랐다.
“애들 보내서 이재희한테 나 여기 있다고 말해 둬.”
-데리러 안 가?
“걔가 오는 게 빠르니까.”
-이야, 형님 똥개 훈련 잘 시키네.
“뭐라 했냐.”
-운영 팀 애들 보고 바리케이드 근처 애들한테 전화 돌리라 하면 되는 거지?
하여간 말 돌리는 거 하나는 수준급이었다. 사윤은 제 밑에서 일하면서 이상한 회피 능력만 늘어나는 듯한 경진에 핸드폰 화면을 미심쩍게 바라보다 그러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용건이 끝났으니 바로 전화를 끊을 줄 알았던 경진은 웬일인지 통화를 끊지 않고 잠시 뜸을 들였다.
뭐지?
설마 연봉 협상 건인가.
슬슬 그럴 때가 됐긴 했다. 안 그래도 경진은 밤쥐에서 가장 많은 연봉을 받고 있는데 여기서 더 올리려는 건가 싶어 사윤은 고민했다. 돈이야 문제는 없었지만 올려 달라 한다고 너무 쉽게 턱턱 올려 주면 쉬워 보이지 않는가. 안 그래도 경진의 연봉은 두 해 전에 한 번 올려 줬는데. 경진의 연봉이 올라가면 그 아래 것들도 은근히 연봉 협상을 바랄 것이었고 그렇게 한 명 두 명 올려 주다 보면 결국 밤쥐 길드원 전체 연봉이 올라갈 거였다.
이미 두 번의 연봉 협상에서 겪어 본 적 있는 일이었기에 사윤은 남아 있는 길드 자금을 확인했다. 한동안 길드가 정체되어 있었고 자신도 ‘차이나 넘버 식스’로 활동 안 한 지 꽤 돼 조금 아슬아슬했다. 한두 놈 하면 티도 안 날 길드 자금이었지만 밤쥐 길드원 전체의 연봉을 올리면 얘기가 달라졌으니 말이다.
반년만 미루면 안 되나?
상대는 경진이다. 가장 돈에 미친 놈이었기에 어떻게 잘 구슬려 돌릴지 고민하던 때였다.
-그….
경진이 입을 열었다. 고민할 시간은 사치라는 걸 깨달은 사윤이 재빨리 대답했다.
-몸은 좀 어때?
“야 나중으로 미루자!”
-……?
반 박자 차이로 내뱉은 대답에 경진이 침묵했다. 사윤은 조금 뒤에야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눈을 슴벅거렸다. 대화를 이어 간 건 머쓱한 기색의 경진이었다.
-지금 바쁘면 뭐, 나중에 대화하고. 아무튼 또 헛짓거리할 생각이면 미리 말해 둬.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도와줄 테니까.
나직이 덧붙인 경진이 통화를 끊었다. 사윤은 통화 종료 화면을 멍하게 바라봤다가 고개를 비틀었다.
뭐지?
틀림없이 연봉 협상일 줄 알았는데 대뜸 자신을 걱정하다니. 심지어 경진은 길드를 다시 굴리기 위해 종식만큼이나 뼈 빠지게 일하는 중이었다. 평소의 그였다면 안 그래도 일이 많아 뒤지겠는데 일감을 더 얹어 주냐며 소리쳤을 텐데 몸은 괜찮냐고? 그가 왜 이런 기특한 짓을 한단 말인가.
잠시 상황 파악을 마친 사윤은 경진에게 문자 하나를 보냈다.
[누군지 몰라도 경진이인 척 속이면 내가 모를 줄 알았냐]
[ㅅㅂ ㅗ]
이윽고 돌아온 경진의 답장은 사윤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럼 그렇지. 경진이 맞았다. 아무래도 조금 전에는 경진이 뭘 잘못 먹은 모양이었다.
그리 생각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 쪽이 아니었다. 들린 건 침대 근처였기에 고개를 돌리자 커다란 창문에 그리폰이 붙어 있는 게 보였다.
뚝! 뚝! 뚝!
놈이 뾰족한 부리로 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사윤은 난데없는 그리폰의 등장에 창문 근처로 가까이 다가갔다. 문을 열자 커튼이 펄럭거리며 젖혀져, 커튼에 가려져 있던 상대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재희였다.
빨리도 왔네.
아무래도 게이트에서 나와 소식을 듣자마자 그리폰을 타고 전속력으로 날아온 모양이었다.
이거 기사도 나겠는데.
그리폰을 타고 하늘길을 주행했다면 분명히 사람들 눈에 띄었으리라. 사윤은 해가 뜨고 나면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할 게 분명한 이재희를 보며 한숨을 삼켰다.
그래, 궁금한 게 많은 눈이니 일단 설명부터 해 줘야 했다.
“들어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