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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131)화 (131/266)

제131화. 환상 극장 (8)

게이트가 터지든 말든 공통적으로 작용되는 현상이 있다.

게이트 리셋.

일회적인 게이트가 아니라면 공략 완료된 게이트는 차후 공략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게이트 자체에서 모든 걸 리셋시킨다. 안에서 죽어 나간 몬스터도, 전투 중 훼손당한 게이트 내부의 환경도 말이다.

게이트 포화가 일어나도 포화 현상이 해결되면 이 게이트 리셋은 정상 작동 된다. 그 말은 즉 곧 닫힐 것처럼 일렁거리고 있는 환상 극장의 게이트도 리셋 현상을 겪을 거란 얘기다.

리셋 현상에 휩쓸리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도 그럴 게 던전이 리셋될 때까지 그 안에 남아 있는 사람은 보통 없었으니까. 있다 해도 시체라서 게이트 밖으로 나갈 여력이 안 되니 리셋 현상을 겪으면 어떻게 되는지 전해 줄 수 없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 분명한 건, 시체가 남아 있는 게이트라 해도 리셋 현상이 일어나고 난 뒤 다시 들어가 보면 그 시신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깔끔히 지워진 것이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사람은?

숨이 붙어 있는 사람도 리셋 현상에 휘말리면 깔끔히 지워질 수 있을까.

떠오른 의문에 사윤이 숨을 들이켰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상 현상을 눈치챈 듯 라이가 컹컹 짖어 댔지만 사윤의 시야에는 게이트와 언노운밖에 보이지 않았고 들리는 건 제 심장 소리뿐이었다.

호흡이 가팔라진다. 자신이 흥분했음을 깨달은 사윤은 아래에서 위로 치고 올라오는 낫을 피해 몸을 움직이며 게이트와 얼마 남지 않은 거리를 살폈다.

역시 게이트 리셋에 맡겨 보는 것이 최선인 듯했다.

이재희가 올 때까지 버틸 수야 있겠지만 너무 많은 힘을 소진해야 했다. 죽는 건 괜찮았으나 이번처럼 언노운과 동시에 사망하지 않는 한 제가 죽고 부활할 시간에 놈은 바깥으로 빠져나갈 터였다. 그렇게 되면 여태껏 버틴 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지금의 전투는 변수가 너무 많았다.

이미 절반의 시간을 버텼기에 내릴 수 있는 판단이었다. 절반을 겪어 본 결과 남은 전투가 결코 쉽지 않을 거라 판정되었으니.

그리고 무엇보다.

어쩌면, 해결책이 되어 줄지도 몰랐다.

게이트 리셋이 자신의 지긋지긋했던 삶을 끊어 낼 수 있는 방법이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구태여 성향 보유자를 찾지 않아도, 퀘스트를 깨지 않아도 완전한 죽음을 얻게 될지 몰랐다.

사윤은 시스템을 얻고 난 이후로 놈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시도를 해 봤다. 자살도 그랬고, 진정한 인류의 선을 찾아보겠다고 날뛰었던 일도 그랬으며 모두에게 죽어 본 일도 그랬다.

한건주를 찾는 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모든 게 실패로 돌아간 지금, 또 하나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 유혹은 사윤이 놓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게이트 리셋에 휩쓸리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어쩌면 게이트 아래에서 영원히 살아야 할 수도 있었고 의식 불명으로 게이트 안을 떠돌게 될 수도 있었으며 게이트 그 자체가 되어 버릴지도 몰랐다.

그러나 어느 쪽이 됐든, 시스템에게 휘둘리진 않을 것이다.

그놈의 빌어먹을 인류의 악이라는 칭호가 따라붙지 않을 거였고 강제성이 짙은 퀘스트에 목이 조이지 않을 거였다. 그리하여 얻게 된 자유도 자유라면 자유다. 판단을 마친 사윤은 인벤토리에서 아끼고 아껴 두었던 아이템 하나를 꺼내 들었다.

레이노 박사의 치환 포션.

게이트가 열린 지 10년이 지났건만 단 한 번밖에 나온 적 없던 매물이다. 세상에 단 한 병만 있었고 사윤이 3년 전 경매에서 재산의 반을 쏟아부어 얻어 냈다.

포션이라 소비형 아이템인데도 불구하고 그만큼의 돈을 바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치환 능력.

모든 스탯을 하나의 스탯으로 일시적 치환해 주는 게 이 포션의 힘이었다. 지금 상황에 딱 맞는 거였기에 사윤은 망설임 없이 포션을 들이켰다.

캉!

라이가 짖는다. 녹색 포션을 전부 마시고 언노운을 향해 빈 병을 집어 던진 사윤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유리 파편을 보고 웃었다.

“덤벼 보든가.”

도발하자 언노운이 반응했다. 사윤은 본능적으로 저를 태우고 피하려는 라이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수고했다, 멍멍아.”

이재희의 소환수는 제 몫을 충분히 해내 줬다. 칭찬을 아끼지 않은 사윤은 달려드는 언노운을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수 없다는 게 더 정확했다.

모든 스탯이 힘 스탯으로 바뀌었으니까.

그 결과.

‘근력: L급’

비록 일시적이지만 지금의 사윤은 그 누구보다도 강한 힘을 지닌 헌터가 되었다. 눈앞의 언노운보다도 말이다.

콰아앙!

녀석의 낫이 사윤의 손에 붙들렸다. 언노운이 제 무기를 회수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 끌어당겼으나 사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캉캉!

라이가 이 낯선 상황에 당황한 듯 짖어 댔다. 사윤은 그런 소환수를 한 손으로 들어 멀리 날려 주었다.

혹시 모를 파장에 휩쓸리지 말라고.

깨갱!

허공으로 붕 치솟은 라이가 공중에서 개헤엄을 쳐 대며 사윤을 바라보았다. 놈과 눈이 마주친다. 가볍게 웃어 보인 사윤이 언노운의 낫과 녀석의 남은 팔을 붙잡고 힘으로 밀어 내었다.

끼기기긱.

거대한 덩치를 지닌 놈이 밀려나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한 탓에 놈의 발바닥이 지지직 끌려 듣기 싫은 소음이 퍼졌다. 그러나 놈이 발버둥 치든 말든 힘의 차이는 압도적이었다. 언노운은 착실히 밀리고 있었고 게이트와의 거리는 열 보도 채 남지 않을 만큼 가까워졌다.

‘29초.’

사윤은 공중에 뜬 치환 포션의 지속 시간 알림창을 확인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30초도 채 남지 않았다니. 1분간 치환시켜 주는 거였나.

포션을 마시기 전 시스템의 아이템 설명창에는 ‘모든 스탯을 지정한 스탯으로 일시적 치환시킨다.’라고만 적혀 있었다.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라 얼얼한 속을 달랜 사윤이 검은 낫을 놓았다. 낫을 되찾은 언노운이 도로 공격하려 들었지만 사윤이 놈의 양팔을 붙잡아 실패했다.

그 상태로 사윤은 내달렸다.

‘27초.’

30초로도 충분하다.

자신은 놈과 싸워서 결판을 내려는 게 아닌, 함께 죽어 보자고 게이트로 달려드는 거였으니까.

캉!

눈이 휘둥그렇게 커진 라이가 바리케이드 밖으로 넘어가다가 말고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짖었다. 어어, 그래 고맙다. 사윤은 대충 받아치고 일렁거리는 게이트를 향해 뛰어들었다. 처음으로 게이트 밖으로 나와 본 녀석이 돌아가지 않으려고 발악을 해 댔지만 헛수고였다.

“같이 가야지.”

씩 웃은 사윤이 놈을 강하게 끌어당긴 채 게이트로 뛰어들었다. 빛을 내뿜고 있던 환상 극장의 게이트가 언노운과 함께 사윤을 집어삼켰다.

우우우우웅!

진동한 게이트가 강하게 출렁거린다. 그러곤 열린 적도 없었다는 듯 칠흑색을 머금으며 검게 닫혔다. 게이트 포화의 끝을 알리는 모습이었다.

* * *

사윤은 언노운과 함께 환상 극장의 게이트 안쪽을 뒹굴었다. 게이트로 들어서자마자 무형의 힘이 언노운과 사윤을 동시에 날려 보냈다. 끝도 없이 날아간 사윤은 바닥을 수십 번이나 구르며 피를 토했다. 엉망이 된 건 맞은편에 있는 언노운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거리가 너무 멀어진 탓에 녀석이 아주 작은 점처럼 보였지만 만신창이가 되었다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놈이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건 사윤도 마찬가지였다.

온몸의 뼈가 조금 전의 충격으로 부러진 상태였다. 강제로 맞춰 볼 만한 수준이 아니었기에 피를 토한 사윤은 감당하지 못할 충격을 받아 낸 몸이 망가져 죽음이 닥쳐오는 걸 느끼며 숨을 들이켰다.

서서히 눈앞이 검게 변한다.

부활까지 걸리는 시간이 얼마나 됐더라.

머릿속으로 생각해 본 사윤은 이내 흐려지는 의식에 순응했다.

다시 눈을 뜨는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게이트 안으로 들어선 B급 헌터의 심장이 멈췄다.

화아아아악!

동시에 게이트 안쪽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게이트 리셋의 전조 증상이었다.

온 게이트가 마치 파도처럼 출렁거리면서 들썩이기 시작한 그 순간.

<‘팔실로의 인연 페어링’이 재연결되었습니다!>

죽기 직전의 사윤의 앞에, 의식이 끊어진 사윤은 볼 수 없는 푸른 안내창이 떠올랐다. 직후 사윤의 앞쪽 게이트 공간이 일렁거리는가 싶더니 꼭 에러가 난 것처럼 지지직 노이즈가 끼고 공간이 갈라섰다.

사선으로 갈라진 공간이 벌어진다. 꼭 누군가가 억지로 벌리는 듯 쭈욱 찢어진 공간 속에서 상처투성이 남자가 튀어나왔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쓰러진 사윤을 확인한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사람이….”

할 말이 많은 듯 입을 달싹인 이가 눈빛을 가라앉히곤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은 아니지. 낮게 중얼거린 그가 자리에 쪼그려 앉아 사윤의 몸을 안아 들었다. 투둑, 그의 팔뚝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그는 사윤을 안아 든 채 자신이 튀어나온 공간을 노려보았다.

“출구 열어.”

“열라면 열어. 이거 때문에 퀘스트 진행 중에 갑자기 날 빼낸 거 아니야.”

“할 수 있잖아. 리스크는 네가 짊어지든가.”

그는 꼭 미친 사람처럼 혼잣말을 해 댔다. 얼핏 보면 열린 공간에 대고 말하는 것 같기도 했고 말이다.

남자의 연이은 혼잣말에 갈라진 게이트의 공간이 불시에 닫히더니 이내 새롭게 열렸다. 반투명한 출구에 비치는 풍경은 사윤의 방이었다. 그 모습에 잠시 입을 다문 남자가 품에 안긴 사윤을 힐끔 살핀 뒤 발을 옮겼다.

우웅.

남자가 출구로 들어서자 갑작스럽게 생겼던 게이트 안의 또 다른 공간이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잘게 떨린 뒤 고요히 닫혔다.

콰르르릉!

직후 환상 극장 게이트 내부가 폭풍에 휩쓸리기라도 한 것처럼 좌우로 거칠게 흔들렸다.

리셋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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