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0화. 환상 극장 (7)
쐐애애액!
은빛의 와이어가 공간을 갈랐다. 라이를 탑승한 채로 사용했기에 전광석화의 힘을 업은 와이어는 본래 등급보다 한 단계 더 뛰어난 효과를 발휘했다.
은빛 실이 빛을 받아 번뜩일 때마다 전장에서는 피가 튀었다. 언노운의 팔과 손가락이 공중에 치솟는 건 순식간이었다.
진작 와이어를 써 볼 걸 그랬군.
언노운과의 전투에서 와이어가 이렇게 효과적일 줄은 몰랐다. 사윤은 봄의 여명도 없을 적 처맞고 구르는 등 몸으로 때우며 언노운을 상대했던 기억을 떠올리고 아쉬움을 삼켰다. 미리 알았다면 더 편히 전투할 수 있었겠지만 지나간 일은 과거에 두는 것이 옳다.
무엇보다.
콰아아앙!
구르면서 전투하는 건 지금도 여전하니 말이다.
깨갱!
라이가 사윤과 함께 바닥을 구르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저 무식한 새끼. 사윤은 부러진 발목을 움켜쥐었다.
언노운의 전투는 야만적이고 폭력적이다. 놈과의 전투가 까다로운 이유는 녀석이 고통을 느낄 줄 몰라 망설임 없이 돌진한다는 데 있었다. 그래서 까다로웠고 그래서 놈은 더 거침없을 수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세상에 팔이 잘렸다고 그 팔을 집어 던져 무기로 쓰는 몬스터가 어디 있단 말인가.
다른 때였다면 언노운의 행동을 미리 눈치챈 라이가 민첩하게 피했을 테지만 전광석화를 연이어 사용한 펜리르는 상당히 지쳐 있는 상태였다. 체력이 떨어진 바람에 감각이 둔해져 기습에도 늦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보다 한 박자 늦은 반응.
그 반응이 자신과 라이 모두 언노운의 팔에 얻어맞고 날아가는 결과를 초래했다.
바닥을 구른 몸은 쇠몽둥이에 두들겨 맞기라도 한 것처럼 욱신거리고 얼얼했다. 통증 속에서 고개를 내린 사윤이 부러진 발목의 상태를 확인했다. 심한 정도는 아니다. 이 정도는 자신도 알아서 치료할 수 있었기에 손에 힘을 주어 강제로 맞췄다.
뿌드득.
뼈가 맞춰지는 소리가 들린다. 도핑하듯 포션을 꺼내 마시자 발목뼈가 빠르게 붙는 게 느껴졌다.
여기까지는 안정적이었는데 문제가 있다면 자신이 회복 타임을 가진 만큼 언노운 역시 몸을 회복하는 중이라는 거였다. 기껏 잘라 낸 녀석의 팔다리가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B급인 자신의 다리가 회복되는 것보다 추정 S급인 놈의 몸이 낫는 게 더 빠를 것이라 판단한 사윤은 주변을 살폈다.
자신이 다시 일어나 전투할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을 벌어 줄 존재가 필요했다.
헥헥.
그러나 라이는 옆으로 엎어진 채 밭은 숨을 고르고 있었다. 큰 부상을 입었다기보단 그냥 힘을 소진해 휴식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보였다.
하필이면 지금.
타이밍이 안 좋았으나 이해 못 할 상태는 아니었다. 라이는 충분히 탈진할 만할 정도로 움직였다.
게이트 포화를 처리한다고 뛰어다닌 시간만 해도 놀라운데 언노운까지 상대했으니 말이다.
그것도 10분씩이나.
그래, 어느덧 10분을 버텼다.
그 10분간 사윤은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독, 기습, 암기, 저주 등 사람을 상대로는 쉬이 꺼낼 수 없는 비겁한 방식을 모두 사용했으며, 인벤토리에 잠들어 있던 S급 아이템들에게도 언노운의 피를 한 바가지씩 먹여 주었다. 다른 놈들이라면 진작 꼬리 말고 도망치거나 난도질당해 사망했거나 할 테지만 아직 언노운과의 전투는 한창이었다.
녀석은 팔다리가 몇백 번 날아가든 기어코 재생해서 덤벼들 불사신이었으니.
한계가 찾아온다면 마지막 10분일 거라 생각했는데 10분 만에 모든 힘을 소진할 줄은 몰랐다. 한 번 더 펜리르를 살펴본 사윤은 하는 수 없이 기습을 위해 놔두었던 와이어를 이용해 언노운의 접근을 막았다.
서거걱!
콰앙!
은빛 와이어가 언노운의 발목을 잘라 내자,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던 녀석이 그대로 무너져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언노운에게 이동 수단은 두 다리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펄럭!
녀석의 등 뒤로 새하얀 날개가 돋아났다. 핀치에 몰려도 날개를 꺼내지 않아 혹시라도 날지 못하는 놈은 아닌지 기대했는데 희망 고문에 불과했나 보다.
제겐 최악의 타이밍이었고 언노운에겐 최적의 상황이었다. 사윤은 날아드는 이레귤러를 봄의 여명으로 막아 내었다.
카가가각!
낫과 칼이 부딪쳐 날카로운 소음을 낸다. 앉아 있는 채로 날아온 언노운의 공격을 전부 받아 내는 것은 무모한 짓을 넘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허리까지 비틀어 공격을 흘린 사윤이 제 위를 선점한 언노운의 복부를 걷어찼다.
화륵!
사윤의 발이 닿은 곳에 불길이 일었다. 처음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윤의 목을 노리던 언노운이었지만, 그 불길이 점점 커져 제 몸을 전부 감싸자 이변을 눈치채고 물러났다.
“콜록콜록!”
불길이 번지는 속도가 조금만 늦었으면 언노운의 손에 목이 부러졌으리라. 사윤은 커다란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목을 움켜쥐며 연신 기침을 뱉어 댔다. 그때까지도 언노운의 몸은 불타오르고 있었다.
S급 아이템. 염제의 걸음.
신발에 걸린 특수 능력을 발동시키면 10분간 신발 밑창이 닿는 곳에 불길을 만들어 내 도트 데미지를 입히는 아이템이었다. 등급 값을 하는 효과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난 사윤이 라이를 살폈다. 옆으로 엎어져 있던 소환수는 이제 엎드린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회복할 시간을 주면 도로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나 버텨야 할까.
2분? 5분?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었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으니까.
“들어와, 오류 새끼야.”
다리가 전부 나은 사윤이 칼끝을 언노운에게 겨눴다.
3차전이다.
통보처럼 읊조린 말에 언노운이 달려들었다.
카가가강!
충돌음이 들리며 검과 낫 사이에 스파크가 튀었다. 무기는 부족함이 없었지만. 신체 스탯이 부족했다. 사윤은 지금으로선 제 힘이 너무도 밀린다는 걸 순순히 인정하고 정면 승부가 아닌 다른 방법을 택했다.
힘이 부족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건주에게 설명해 준 적이 있었다.
나보다 피지컬적으로 모든 면이 뛰어난 적을 만난다면 취할 수 있는 수단은 하나다.
상대의 힘을 이용해 공격하는 것.
“흡!”
이를 악문 사윤이 허리까지 젖히며 언노운의 공격을 받아 내었다가 그대로 반동을 주어 쳐 냈다. 동시에 두 손으로 들고 있던 봄의 여명을 왼손으로 옮기고 잠시 수납해 놨던 헤리스의 단도를 오른손에 쥐어 휘둘렀다. 꼭 검무라도 추듯 사윤의 몸이 반원을 그렸다. 내리찍은 힘이 강한 만큼 튕겨 나온 힘도 강한 탓에, 역으로 타격을 입은 언노운의 틈을 날카로운 단도가 공략했다.
푸슈슛!
언노운의 몸에서 불길한 피가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 피가 얼굴에 튀든 머리카락을 적시든 신경 쓰지 않은 사윤이 집요한 눈동자를 빛내며 놈의 심장부를 파고들었다.
서리.
랭크가 떨어졌긴 했어도 사윤의 전매특허 스킬이다. 일말의 지체도 없이 그 스킬을 꺼내 들자, 두 검에 시린 기운이 스며들면서 딛고 있던 땅이 얼었다. 비틀! 예고되지 않은 상황에 언노운이 휘청거렸다. 사윤은 얼음 바닥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두 개의 검을 합쳐 양손으로 쥐곤 체중을 실었다.
푸욱!
조금 전 봄의 여명을 휘둘렀을 때부터 서리를 사용하고 두 개의 검을 놈의 심장에 박아 넣는 그 모든 움직임이 하나의 동작처럼 보일 정도로 매끄럽게 이어지는 연계에 언노운은 제 심장을 내주었다. 봄의 여명이 놈의 심장을 꿰뚫었다. 사윤의 입에서 작은 숨이 흘러나온 그때.
휘익!
고통을 느끼지 않는 언노운이 죽는 순간까지도 목표물을 포기하지 않고 낫을 휘둘렀다.
제기랄.
조금 전의 일격에 온 힘을 쏟은 사윤은 그것을 피할 재주가 없었다. 어린 펜리르는 아직 회복 상태에 있기에 도움을 바랄 순 없었다.
끈질긴 새끼.
결국 사윤은 욕을 짓씹으며 시동어를 읊었다.
“헤리스의 참회.”
콰아아아앙!
폭발이 일어난다. 그리고 동시에 언노운의 낫이 사윤의 머리부터 내리찍었다.
잠깐의 암전이 찾아온다. 불사(不死)의 운명을 가진 두 존재는 사이좋게 나란히 죽었다가 나란히 부활했다.
타아앙!
먼저 움직인 것은 언노운이고 한 박자 늦게 일어나 공격을 막아 낸 것은 사윤이었다.
키기기기긱!
두 무구에서 스파크가 섬광처럼 튀며 광기가 깃든 사윤과 언노운의 표정을 비췄다. 둘 중 누구도 물러서지 않았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도, 고통을 꺼리는 이도 없었다.
4차전이다.
새롭게 시작된 전투에 사윤은 언노운의 낫을 쳐 내고 이어지는 공격을 피해 놈의 머리 위로 뛰어오르며 남은 시간을 헤아렸다.
이재희가 오기까지는 대략 14분.
컹!
때마침 기특한 소환수가 기운을 차렸다.
“라이!”
외침에 소환수가 달려와 사윤을 태웠다. 백색의 광선이 공간을 가르는가 싶더니 사윤은 어느덧 언노운의 뒤로 이동해 있었다.
게이트와 자신 사이에 언노운을 가둔 사윤이 웃었다. 불현듯 한 가지 가설이 사윤의 뇌리를 스쳐 지나간 건 그때였다.
굳이 시간을 끌어야 하는가?
검을 휘두르려던 사윤의 시선이 게이트에 닿았다.
내가 이 자식과 함께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는 건 안 되나?
뜻밖의 발상에 사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