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129)화 (129/266)

제129화. 환상 극장 (6)

일이 상당히 골치 아프게 됐다.

게이트 포화에서 언노운이 튀어나올 줄이야.

10년이 넘는 헌터 생활을 하면서 온갖 게이트 포화를 다 겪어 본 사윤이었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겪은 적 있었으면 경각심을 가져 이딴 식의 게이트 공략을 벌이지 않았겠지.

언노운이 나타난 것 자체는 어떻게든 해낼 수 있다. 조금 전 시스템 알림창을 받아 B급이 된 걸 확인했으니까. B급의 몸으로 언노운을 죽이는 건 어불성설이었지만 적어도 시간을 끌고 이재희를 비롯한 다른 각성자들이 놈을 죽이도록 유도하는 것쯤은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언노운 처치 자체는 걱정이 안 된다.

이곳은 밤쥐의 게이트 구역이고, 주변에는 제 길드원들이 잔뜩 있었으니까. 아무리 S급 각성자 둘이 붙어도 못 이길 언노운이라지만 자신이 아티팩트를 지원해 주고 밤쥐 길드원들이 달려든다면 못 이길 상대는 아니었다.

그러나 언노운의 무서운 점은 고작 강하다는 것 따위가 아니었다. 놈의 진짜 문제는 죽어도 계속 살아나는 데 있었다.

언노운.

등급으로 따지자면 S급 이상의 능력치를 가진 게이트 오류. 그런 놈이 세상 밖으로 풀려난다면 도시 하나쯤 궤멸하는 건 일도 아닐 거였다.

아니, 도시 하나에서 그치기나 할까?

놈은 죽어도 계속 살아나는 불사신에 가까운 존재인데.

대한민국 자체가 멸망할 거였다.

저 하얀 사신에 의해서.

미래가 예상돼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거 진정한 인류의 악은 왜 만들었냐. 그냥 언노운 몇 마리 세상 밖으로 풀어 두면 알아서 세계가 멸망할 것 같은데.

“사윤 씨. 저건….”

“그래, 언노운이다.”

너도 본 적 있다며.

입술을 씹으며 말을 뱉어 낸 사윤이 인벤토리를 빠르게 훑었다. 언노운을 상대하는 데 가장 뛰어난 무기는 역시 봄의 여명이었으니 무기를 바꿔 들고 망토 하나도 걸쳤다.

[흑주술사의 망토(S+)]

-고대의 흑주술사는 모든 물리 공격으로부터 면역되고자 했다. 이 망토는 그의 수십 년의 연구가 담긴 회심의 역작이다.

-배리어 사용 시 10초간 무적 상태. 하루 10회 제한.

-착용 시 모든 물리 공격의 피해를 50% 감소.

-B급만 착용 가능합니다.

흑주술사의 망토. 성능만 두고 보면 사기적이기 이를 데 없는 망토였지만 빌어먹을 착용 랭크 제한 때문에 A급이 되고 나서부턴 사용한 적이 없던 망토였다.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성능인 만큼 경매장에 내놓으면 벼락부자가 될 수 있겠지만 자신이 미쳤다고 이 망토를 팔겠는가.

S급도 상대하기 꺼려지는 성가신 B급이 탄생할 수도 있는데.

남 주기엔 심히 아깝고 내가 쓸 수는 없어 계륵 같다고 생각했던 망토. 이제는 쓸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해 아쉬워하며 인벤토리에 처박았던 그 망토를 몇 년 만에 꺼내 입게 된 사윤은 여명이란 이름에 어울리는 광휘를 뿜어내는 검을 움켜쥐고 언노운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게이트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녀석이 낫을 고쳐 쥔다.

얼굴이 마주쳤고 대치는 짧았다. 녀석은 곧바로 목표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목표물이 누구인지는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다. 조금 전 검은 낫이 노리던 상대는 부정할 여지도 없이 자신이었으니까.

“라이!”

언노운을 피해 몸을 구르며 고함치자 이재희의 소환수가 이번만 협력하겠다는 듯 단숨에 사윤을 태우고 내달렸다.

탓!

단단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다리가 있는 힘껏 땅을 박차자 몸이 붕 떠올랐다. 비상이라고 해도 좋을 점프력이다. 일순 환한 달 위로 펜리르와 함께 모습이 겹쳐진 사윤은 과연 SS급이라 할 만한 라이의 털을 쓰다듬었다.

아무리 자신이 뛰어나다 해도 B급인 만큼 움직임에 한계가 있었는데, 라이의 도움을 받으면 그 약점도 메울 수 있었다. 인외에 한하여 150퍼센트의 공격력을 발휘하는 봄의 여명을 들고도 부족한 전투력은 쓸 수 있는 버프를 다 써서 채우면 된다.

그리하면 B급의 몸으로도 충분히 언노운과 대치할 수 있으리라.

계획을 세운 사윤이 들고 있던 단도로 가차 없이 제 손을 내리찍었다.

아니, 정확히는 내리찍으려고 했다.

불시에 튀어나온 손 하나가 제 손목을 붙잡아 저지하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드디어 미쳤습니까?”

어느덧 마루를 타고 곁에 온 이재희가 사윤의 손목을 움켜쥐고 일갈했다. 드물게도 언성을 높이는 이에 사윤은 인상을 찌푸리며 이재희의 손을 쳐 냈다.

예민하게 반응하기는.

“모르면 가만히 보고 있어, 재희야. 여기서 저 괴물을 나만큼 잘 상대하는 놈은 없을 테니까.”

그 어디를 가도 자신만큼 언노운을 자주 상대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죽으면 끝인 남들과 달리 자신은 게이트에서 언노운을 만났다가 죽으면 그 자리에서 다시 살아나 놈과 싸워야 했으니 말이다.

진저리 나게 붙어 봤고 무승부도 여러 번 냈었다. 전과 달리 이번에는 지켜야 할 상대도 없었다.

B급인 한건주가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자신이 지켜 줘야 할 대상이 된 것도 아니다. 등급이 떨어졌어도 자신은 여전히 권사윤이었다.

서걱!

기어이 봄의 여명이 사윤의 손바닥을 찢었다. 옆에 있던 이재희가 기함했으나 사윤은 아랑곳하지 않고 와이어를 꺼내 제 피를 먹였다.

<사람을 공격했습니다. 살인 유희가 발동합니다.>

기다렸던 알림창이 뜨고 사윤의 일신에 빛이 깃들었다. 신체 능력이 상승된 게 느껴진다. 살인 유희가 발동하면 방어력이 낮아졌지만 흑주술사의 망토를 착용한 이상 그런 건 의미 없었다.

탓, 탓, 탓!

자신이 신체 강화를 하고 있는 와중에도 펜리르 라이는 이리저리 날쌔게 뛰어다니며 언노운의 추적을 피하고 있었다. 쾅, 쾅 쾅! 언노운의 낫은 펜리르의 꼬리에도 닿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고 확신한 사윤은 이재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잘 들어, 이재희. 넌 가서 은둔자를 불러와. 녀석에게 언노운이 게이트 포화에 휘말려 세상 밖으로 나왔다고 하면 알아서 이해할 거다.”

S급 랭커 은둔자.

어디서 뭘 하다 온 녀석인지 밤쥐도 알아내지 못할 정도로 철저하게 신상을 감추고 활동하는 한국의 헌터였다.

언노운을 처치하려면 녀석이 갖고 있는 아이템인 ‘무한’이 필요했다.

대상이 무엇이든 24시간 동안 가둘 수 있는 아이템.

귀속 아이템이라 죽여서 빼앗을 수도 없어 입맛만 다시고 있던 그 아이템이라면 게이트 밖으로 튀어나와 날뛰는 언노운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은둔자라면 암살자 길드의 수장 아닙니까?”

“맞아. 놈들의 본거지가 이 근처거든. 구룡 길드 건물 뒤에 망한 교회가 하나 있을 텐데 거기 지하가 놈들의 본거지다. 거기서 밤쥐 길드장이 은둔자를 찾는다고 말하면 들여보내 줄 거야.”

마침 근처에 은둔자네 길드가 있었으니 찾아서 데려오는 것쯤은 쉬우리라. 이재희의 소환수는 웬만한 이동 수단보다 빠르니 제 길드원들이 은둔자를 부르러 가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녀석을 데려올 수 있을 거였다.

물론 가장 베스트는 자신들이 가지 않고 그들이 직접 지원 오는 거였지만, 안타깝게도 연락할 만한 수단이 없었다.

그러게 시발, 핸드폰 좀 진작에 사라니까.

빌어먹을 컨셉을 지키겠다고 모든 연락망을 파기하고 지하에 서식하고 있으니 그가 필요할 때면 이렇게 직접 찾아가야 했다. 괴상한 데다 엉덩이까지 무거운 놈이라며 중얼거린 사윤이 갑자기 가속을 시작한 언노운에 라이의 털을 꽉 잡았다.

“놈이 빨라졌다. 더 빠르게 움직여야 해.”

컹!

라이가 대답하듯 짖으며 이전보다 한층 더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그러나 언노운의 속도도 비슷하게 올라가 극적인 효과를 보진 못했다. 예상한 일이었기에 입술을 씹은 사윤이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를 돌아보았다. 언노운은 전투가 길어질수록 상대에 대해 학습하는 녀석이었으니 오래 끌면 불리해지는 건 자신이었다.

“은둔자 녀석에게 큐브를 가져오라고 하면 놈이 다 알아서 할 거야! 설명 들었으면 빨리 가!”

“제가 가 버리면 소환수들의 힘이 약해질 겁니다.”

소환수들은 소환사와 영혼이 묶여 있기 때문에 주인과 거리가 가까울수록 제힘을 발휘하는 놈들이었다. 이재희가 멀리 떨어지면 최악의 경우 전력의 50퍼센트밖에 낼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물불 가릴 처지인가.

어떻게든 이재희를 보내 은둔자를 불러와야 하는데.

“상관없으니까 빨리 가. 네가 늦게 갈수록 저놈이 날뛰어 댈 거니까.”

1초씩 늦을 때마다 사람 송장 하나 추가된다고 생각해라.

지금이야 녀석이 제게 집착하고 있어 바리케이드 영역을 벗어나지 않았지만, 저를 향한 어그로가 혹여나 풀리기라도 하면 그때부터 재앙이었다.

놈의 어그로를 계속 유지하려면 유효타를 먹일 필요가 있었기에 사윤이 라이의 등 위에서 상체를 숙였다.

“저기 코너에서 돌아 역습한다. 알아들었어?”

컹!

“그럼, 전광석화를 써서 움직여!”

캉!

짖음과 함께 라이의 몸이 번쩍 빛났다! 순식간에 1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이동한 사윤은 어느덧 콩알만 해진 이재희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30분 내로 안 돌아오면 너도 죽고 여기 있는 사람들도 다 뒈지는 줄 알아!”

살벌한 경고를 날리자 그제야 아주 작게 보이는 사람이 소환수를 타고 움직였다. 사윤은 암살자 길드를 향해 내달리는 남자의 뒷모습을 짧게 살폈다가 코앞까지 닥친 코너에 라이의 털을 붙잡았다.

컹!

신호를 눈치챈 라이가 양쪽 벽을 번갈아 타고 오르며 하늘로 치솟았다. 뒤쫓아 오던 언노운이 코너를 돌자 사라진 적에 일순 당황한다. 그 방심을 놓치지 않은 사윤이 라이의 등을 밟고 뛰어올라 왼손에는 봄의 여명을, 오른손에는 헤리스의 단도를 쥐고 힘을 실었다.

물론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조금 전 제 피를 먹여 언노운의 팔도 무리 없이 자를 수 있도록 예리하게 만들어 둔 와이어가 골목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무려 맹독을 발라 둔 채로 말이다. 그 효과는 언노운이 자신을 발견해 몸을 트는 즉시 나타났다.

서거걱!

날카로운 와이어가 단숨에 언노운의 팔과 다리, 몸통을 향해 파고들었다.

<저주, 속임수 등으로 상대에게 첫 번째 상해를 입혔습니다. 특전, ‘더티 플레이’가 활성화됩니다.>

기습 시 공격력을 10퍼센트 더 상승시켜 주는, 더럽게 싸울수록 토큰이 쌓이는 특전의 알림음을 들은 사윤은 두 개의 검을 쥐고 와이어에 구속된 언노운을 향해 하강했다.

번쩍! 헤리스의 단도가 달빛을 머금어 예기를 자랑한다.

“라이, 다리 쪽을 물어뜯어!”

목청껏 외친 사윤은 언노운의 머리에 두 개의 검을 내리꽂으며 시동어를 읊었다.

콰아아앙!

봄의 여명과 헤리스의 참회 두 공격이 쌓여 폭발적인 굉음을 내었다. 강력한 폭발의 여파를 견디지 못한 B급의 신체가 바람에 휩쓸려 튕겨 나갔다. 땅을 구르고 일어선 사윤은 잿빛 구름 속에서 언노운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는 걸 확인하며 웃었다.

시발. 아픈 티라도 좀 내든가.

와이어와 라이에게 다리 하나, 제 공격에 머리가 반쯤 터져 나갔는데도 굳건히 서 있는 언노운이 몸을 오싹하게 만든다.

앞으로 이재희가 올 때까지 28분쯤 남았나.

벽을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선 사윤이 제 곁으로 온 라이 위에 탑승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래, 어디 한번 붙어 보자고.

B급의 역습이다. 빌어먹을 오류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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