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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128)화 (128/266)

제128화. 환상 극장 (5)

저 오류가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는 천기를 꿰뚫어 보는 제 능력으로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절대로 정상적인 정보창이 아니라는 거였다.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오류라는 단어조차 볼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사윤의 정보창에는 오류를 비롯해 처음 보는 수상하고 이상한 문구들이 많았다.

당장 이것들만 봐도 그랬다.

[진정한 인류의 악]

-시스템이 지정한 악으로서의 삶을 진행 중입니다. 천재天災의 운명이 삶에 개입합니다. 운명 개입력 상급. ‘어쩌면 내가 신의 후예?’, ‘악신을 따르는 자’, ‘인류 최악의 천재天災’, ‘강제 집행’, ‘가장 불행할 당신에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인류의 악이라는 명부터 심상치 않더라니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말 그대로 심상치 않았고 세계의 비밀에 가까워 보였다. 자세한 건 제한이 걸려 알 수 없었지만 보이는 것만으로도 추측할 수 있는 사실이란 게 세상에는 있지 않은가.

그것이 재희가 사윤의 곁에 머물기로 결심한 이유였다.

재희가 보기에 사윤은 이 세계가 기이하게 변한 것에 대한 가장 많은 단서를 쥐고 있는 사람이자, 현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키였다.

물론 당장 진정한 인류의 악이라는 정보만 보면 사태를 해결하긴커녕 세상을 멸망시킬 사람쯤으로 보이긴 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그가 세상을 바꿀 키라고 생각한 이유는 따로 있었으니까.

[저항하는 자(개화 전)]

-주어진 운명과 삶은 그를 뒤흔들 수 없습니다. 규칙에 저항합니다. 운명 개입력 ?급. ‘신들이 주시하는 자’ 외 미공개 3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개화 전이라 뜨긴 했지만 음울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사윤의 정보창 중에서 유일하게 희망차 보이는 문구였다.

‘주어진 운명과 삶은 그를 뒤흔들 수 없습니다.’라니. 소름이 돋을 정도로 사윤과 잘 어울리는 설명 아닌가.

이 성향만 무사히 개화한다면 사윤은 진정한 인류의 악이라는 불길하기 짝이 없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였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개화할 수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었지만.

방법을 안다면 도와줄 텐데 그럴 수 없었다. 아무리 천기를 꿰뚫는 눈이라고 해도 시스템이 제게 모든 것을 보여 주진 않은 탓이었다. 그 점은 아쉬웠지만 사윤에게 그 잔인한 운명에서 벗어날 해결책이 있는 것만으로도 최악의 상황은 면한 셈이었다.

그래, 진정한 인류의 악 따위보단 저항하는 자가 훨씬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저기 좀 봐라.

이 놀랍도록 위험하고 잔인한 전장에 망설임 없이 뛰어드는 저 겁 없는 사람이 어디 시스템에게 무력하게 휘둘릴 것 같은 사람인가.

재희는 피식 웃으며 멀리서 날뛰고 있는 사윤을 살짝 보았다가 정보창에 손을 올렸다. ‘신들이 주시하는 자’를 클릭해 봤지만 시스템창에 변화는 없었다. 한 번 세부 카테고리에 들어가면 그 안에서 추가로 세부적인 정보를 확인하는 건 불가능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이미 진정한 인류의 악에서 한 번 확인해 봤지만 저항하는 자 정보창에서도 똑같았다. 아쉬운 일이라 창을 내리고 다시 기본 정보창을 살폈다가 ‘진정한 인류의 악’에 들어갔다.

사윤은 제 상태창을 볼 수 있는 특별한 스킬을 가진 모양이지만 자신이 볼 수 있는 건 그저 진실뿐이었다. 그렇기에 사윤이 어떤 스킬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악신을 따르는 자’, ‘인류 최악의 천재天災’, ‘강제 집행’, ‘가장 불행할 당신에게’.

적어도 스킬인지 칭호인지 특전인지 알 수 없는 저 네 가지 이름이 모두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스킬이라기엔 말도 안 된다는 것과 지나치게 불길한 기운을 품고 있는 게 이상하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때쯤 재희는 한 번 더 전투 중인 사윤을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시간이 조금 더 걸릴 듯했으니 두 마리의 소환수를 추가로 붙여 줘야 할 듯했다. 사윤에게서 떨어진 곳에서 몬스터를 정리하고 있던 제 소환수를 부른 재희가 그들을 사윤의 쪽으로 붙여 주곤 불길하기 짝이 없는 이름들을 재차 확인했다.

강제 집행과 가장 불행할 당신에게라니.

둘 모두 마음에 걸리는 문장이었다.

대체 무슨 스킬입니까?

묻고 싶지만 알려 주지 않을 거란 걸 알기에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어디서 이런 사람이 나타난 건지.

사윤은 재희가 살면서 봐 온 사람 중 가장 기구한 사람이었다. 특이점이란 특이점은 모두 모아 놓은 정보창 하며 게이트에서 봤던 그것에 오류 진행도까지.

혹시 저항한다는 운명이 이런 박복한 운명을 말하는 것인가.

잠시 생각하다가 다른 하나의 성향을 확인했다. 물음표로 이루어진 개화 전 성향. 아무것도 볼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정보 한 줄 정도는 공개해 주었다.

[???(개화 전)]

-정해진 것은 그 무엇도 없습니다.

이름조차 공개되지 않은 개화 전 성향이라서 그런 걸까. 고작 그 한 줄이 전부였지만 재희에겐 한 줄에 불과한 그 문구가 가장 강렬하게 다가왔다.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라.

여러모로 흥미로운 말이다. 역시 곁에 두고 관찰할 보람이 있는 상대라고 생각한 재희는 어느덧 게이트 입구까지 가 버린 사윤에 헛웃음을 흘렸다.

소환수 두 마리 붙여 줬다고 속도가 두 배나 빨라질 줄은 몰랐다.

누가 저 모습을 보고 C급 헌터라고 생각할까.

등급은 낮아졌어도 전투 스타일이며 기세며 영락없이 S급이었다. 재희는 슬슬 버프가 떨어졌을 거라 생각하며 라이의 털을 쓰다듬었다.

“라이. 가서 도와줘.”

컹!

대답보단 물음에 가까운 짖음이었다. 꼭 ‘주인님은요?’ 하고 묻듯이 저를 돌아보는 소환수에 그의 부드러운 얼굴을 쓸어 주었다.

“확인할 게 남았거든.”

캉!

이번에는 위험하다는 듯한 걱정인 것 같았다. 자신이 가면 저를 누가 지키냐는 표정인데 걱정도 팔자다.

제 소환수가 어디 다섯이 끝이었나.

일곱 마리.

자신과 영혼 계약으로 맺어진 A급 이상의 소환수는 총 일곱 마리였다. 여차하면 소환수 한 마리를 더 부르면 되는 일이었기에 털을 쓰다듬자 낑 하고 우는 소리를 낸 라이가 몸을 엎드려 재희를 내려 주고 사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우우우우!

따로 얘기하지도 않았는데 본능적으로 펜리르의 피어를 쏘고 보는 게 전투 본능이 뛰어난 펜리르 신수다웠다. 재희는 멀어지는 소환수의 등을 바라보다가 확인하지 않은 나머지 하나의 정보를 눌러 보았다.

‘오류 진행도 12.4%’

기대 없이 눌렀고 역시나 특별한 것은 볼 수 없었다.

[오류 진행도]

-시스템이 오류를 계산합니다.

그게 전부였다. 무엇 때문에 일어난 오류인지, 오류라는 게 정확히 뭔지, 100퍼센트가 채워지면 어떻게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만났던 존재를 다시 보면 뭔가를 알 수 있을 듯도 한데.

게이트에서 만났던 거대한 하얀 존재. 언노운이라고도 불리는 그것들을 다시 만난다면 새로운 걸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전에 만났을 때 자신은 단순히 꿰뚫어 보는 자였지만 이번에는 천기를 꿰뚫는 자였으니 무언가 다른 정보를 볼 수 있을 게 분명했다.

당장 언노운을 만날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아쉬움을 삼키고 있자 멀리서 사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슬슬 마무리 준비해!”

전투가 얼추 끝난 모양이었다. 마침 그의 정보창을 뜯어보는 작업도 끝났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재희가 손가락을 물어 피로 소환진을 그리고 계약한 소환수 한 마리를 더 불러냈다.

퓨퓨!

불려 나온 소환수가 귀엽게 울부짖었다. 생김새가 제법 귀여웠지만 덩치는 성인 남성의 세 배 정도였다.

이래 보여도 A+급인 소환수, 그리폰이었다.

아직 새끼긴 했지만 충분히 강한 소환수의 등에 올라탄 재희가 사윤의 쪽으로 날아가길 요청하며 아래를 살폈다. 몬스터 사체로 가득한 곳은 몬스터들을 위해 지어진 무덤이라고 해도 믿길 정도였다.

두 시간 정도인가.

수천 마리의 몬스터를 죽이는 데 걸린 시간이다. 아무리 A급 게이트고 제 소환수들이 많이 도와줬다지만 경이로운 속도였다. 감탄을 한 번 삼킨 재희가 그리폰에게 남아 있는 몬스터들을 공격할 것을 명했다.

콰아아앙!

저건 또 뭐야?

마무리할 준비를 하라 했더니 이재희가 웬 하늘을 나는 짐승을 타고 날아오고 있었다. 비행하는 와중에도 중간중간 몬스터를 발견하고 하강했다가 다시 날아오르는 기이한 새를 본 사윤은 또다시 배가 콕콕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설마 저거 여섯 번째 소환수냐?

인생 진짜 비겁하게 산다. 소환사면 다인가? 정정당당하게 헌터로서 살아 줬으면 한다.

얄밉다 못해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어 속으로 비꼰 사윤이 제 곁에 있는 두 마리의 소환수를 매만졌다. 그래, 좋게 생각하자. 남의 소환수이긴 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제 버스 기사이지 않은가.

부드러운 털을 한 번에 쓸어내린 사윤이 와이어를 잡아당기곤 남은 몬스터의 숫자를 확인했다.

이백 마리 남짓이다.

이 정도 수는 몰이사냥을 하면 금방 끝낼 수 있었다.

“저기 있는 몬스터들을 여기로 몰고 와. 할 수 있지?”

은빛 늑대를 쓰다듬으면서 말하자 늑대가 켕 하고 짖었다. 비웃는 건지 싫다는 대답인 건지 모르겠다. 뭐 거절하면 다시 던져 줄 생각이었기에 손을 한 번 까딱거리자 귀를 움찔 떤 늑대가 얼마 지나지 않아 켁 숨을 내쉬며 몬스터 무리를 향해 달려갔다.

저거 지금 한숨 내쉰 거냐?

사윤은 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는데도 믿기지 않는 광경에 기가 차 허리를 짚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루가 몬스터들을 잔뜩 몰고 왔다.

“시로, 매혹이다!”

구미호 소환수가 매혹을 사용해 딱 알맞은 타이밍에 녀석들을 방심시켰다. 사윤은 몬스터들이 넋이 나간 틈을 노려 거미줄처럼 진을 쳐 두었던 와이어를 잡아당겼다.

카드드드득!

와이어가 조여들면서 몬스터의 살을 파고드는가 싶더니.

푸슉!

이내 수십 마리의 몬스터가 죽었다.

“시로, 마루! 잔당 처리해! 너네 둘도 같이 하고!”

사윤은 와이어에 걸리지 않은 몬스터들의 처리를 소환수들에게 맡기며 또 다른 구역에 걸린 몬스터 집단을 처리했다. 그렇게 두세 번쯤 반복하고 나니 마침내 모든 몬스터가 숨이 끊어져 바닥을 굴러다녔다.

시체로 만들어진 산이 따로 없다. 사윤은 정리된 상황을 확인하고 가빠진 호흡을 고르며 게이트를 살폈다.

“더 안 나오나?”

이미 생각한 것보다 많은 무리의 몬스터가 나왔다. 더 나오면 기겁할 일이었지만 혹시 모르니 꼼꼼하게 살폈다. 몇 번 게이트 앞을 왔다 갔다 하며 기운을 탐지해도 특별히 느껴지는 것은 없었다. 게이트 역시 곧 닫힐 듯 일렁거렸기에 공략이 끝났음을 확신한 사윤이 등을 돌린 그 순간이었다.

“사윤 씨!”

드물게도 이재희가 고함을 쳤다.

오싹!

강한 살기가 전신을 훑고 지나가 일순 굳은 사윤은 재빨리 몸을 틀어 뒤를 살폈다.

휘익!

거대한 낫이 사윤의 목을 향해 내리꽂히고 있었다.

이런 시팔.

기겁한 사윤이 바닥을 굴렀다. 낫의 끝자락이 사윤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고 등급이 떨어진 몸은 그 정도를 못 견디고 많은 양의 피를 쏟아 냈다.

쾅!

거대한 낫이 바닥에 꽂히며 먼지구름을 만들었다. 공격은 한 번에서 그치지 않았다. 넘어진 틈을 노려 다시금 이어지는 공격에 황급히 일어나려 했던 사윤이 무리한 탓에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걸 느끼며 욕을 삼켰다.

아무래도 엿 된 것 같다.

그리 생각하는 순간 ‘왕!’ 하고 개 짖는 소리가 들리더니 무언가가 섬전처럼 움직여 사윤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콰앙! 낫은 또다시 사윤을 놓치고 애꿎은 땅을 내리찍었다. 사윤은 턱으로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닦아 내고 고개를 틀었다.

컹!

‘현재 상태: 내가 당신을 구했어요! 나한테 감사하세요!’

펜리르 라이. 이재희의 자랑스러운 소환수가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자신을 입에 물고 있었다. 사윤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라이의 턱을 쓰다듬었다. 이제 그만 내려 달라는 신호였다.

침착한 라이는 돌발 행동을 하지 않고 얌전히 사윤을 내려 주었고 그런 사윤의 곁으로 재희가 다가왔다.

“괜찮습니까?”

놀란 목소리다. 사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이딴 거로 죽으면 헌터 때려치워야지. 그보다….”

말을 흐린 사윤이 게이트를 확인했다. 백색의 게이트가 공간이 왜곡되기라도 한 것처럼 기이하게 꿀렁거리며 한 존재를 토해 내고 있었다.

불쑥! 낫을 쥐고 있는 거대한 손이 먼저 공간을 빠져나왔다. 그 뒤로는 성인 남자만 한 머리가 빠져나왔고 그 이후로 팔, 몸통, 다리가 나와 놈의 정체를 드러냈다.

온몸이 새하얗기 짝이 없는데 검은 낫을 다루는 인간 형태의 게이트 오류.

언노운.

놈이 게이트 포화를 타고 세상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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