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127)화 (127/266)

제127화. 환상 극장 (4)

2천의 몬스터 무리가 천 마리 이하로 줄어들었을 때쯤, 게이트에선 또 한 번 대량의 몬스터 무리가 쏟아져 나왔다. 시야가 새까맣게 변할 정도로 많은 숫자에 기가 질린다. 평범한 각성자였으면 이쯤에서 도망쳐도 이해 가능할 숫자였다.

인해 전술이 따로 없다. 아니, 이런 경우에는 몬해 전술이라 해야 하나?

컹!

기껏 절반으로 줄여 둔 몬스터들이 세포 분열 하듯 도로 늘어나자 전세가 약간 기울었다. 용맹하게 전투를 이어 가던 소환수들이 지친 기색을 드러낸 탓이다.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였던 그 펜리르조차 중간중간 신음을 흘리는 일이 잦아졌고, 주기적으로 우는 소리를 내었다. 시로라 불렸던 구미호 소환수는 꼬리를 축 늘어트리고 이재희에게 애교를 부리기까지 했다.

더는 싸우기 싫다는 뜻이다.

나약하기는.

말도 안 되는 등급과 스킬을 가진 소환수들을 보며 감탄했던 것도 잠시, 한 시간도 안 됐는데 힘이 빠진 소환수들을 속으로 질타한 사윤이 상황을 살폈다. 서늘한 눈길이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전투지 곳곳에 닿는다. 게이트에서 추가로 나오는 몬스터들은 더 없었지만 소환수들이 생각보다 이르게 지쳐 버려 상황이 좋지 않았다. 몬스터들이 승기를 잡았다는 듯 저들끼리 왁자하게 떠들어 대며 서로의 사기를 올려 대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날뛰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재희는 소환수를 다루고 보조하는 것만으로도 벅차 보였고 무엇보다 날뛰는 것에 어울리는 스킬을 보유하지 않았다.

반면에 사윤에게는 있었다.

[시산혈해(SS)]

검이 하늘을 가르자 피가 바다가 되고 시신이 산을 이뤘으니!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 공격력 20% 상승. 적을 쓰러트릴 때마다 하나의 토큰을 획득. 백 개의 토큰이 쌓일 시 ‘대폭발’ 사용 가능.

필드에서 사윤은 잃고만 있지 않았다. 한건주가 그곳에서 폭발적인 성장을 이뤘던 것처럼 사윤 역시 성장했다. 수십 번의 몬스터 웨이브를 겪으면서 난전에 딱 어울리는 스킬도 얻었고 말이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쓰기 딱 좋은 스킬이다. 빠르게 판단을 내린 사윤은 라이의 등을 두어 번 토닥이고 펜리르의 등 위에서 내려왔다.

“사윤 씨?”

갑작스러운 사윤의 행동에 소환수를 살피고 있던 재희가 그를 불렀다. 사윤은 대답하는 대신 자신의 시야 한편을 채우고 있는 퀘스트창을 바라보았다.

‘등급 상승까지 진행도 62%.’

30퍼센트로 와서 62퍼센트까지 올랐다. 이번 게이트에서 B 등급이 되는 건 확정 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럴 때 소환수 버스만 타고 있으면 쓰나. 어떻게든 경험치를 얻어먹어야지.

쭈욱 하고 찌뿌둥한 몸을 스트레칭한 사윤이 무기를 바꿔 들었다. 여태껏 사용한 단도가 아닌 와이어였다.

그러고 보니 쟤도 와이어를 쓸 줄 알았지.

이재희와의 첫 만남이 떠올라 중얼거린 사윤이 은빛 와이어에 손을 가져다 댔다. 힘을 주어 누르자 와이어가 살을 파고들며 상처를 내었다. 붉은 피가 뚝뚝, 와이어를 타고 흐른다. 이재희가 놀라 사윤을 다시 불렀지만 사윤은 제 피를 머금고 단단해진 와이어를 보며 웃을 뿐이었다.

절삭력을 확인하기 위해 주변을 살피자 마침 딱 좋은 것이 있었다.

켕?

라이가 다 잡아 두었던 몬스터 한 마리를 채 간 사윤이 팽팽하게 만든 와이어 위로 몬스터를 놓았다. 서걱! 몬스터의 목이 단숨에 날아간다. 꿉꿉하기 짝이 없는 초록색 피가 아래로 주륵 흘러내렸다.

“쓸 만하네.”

역시 인생은 템빨이지.

그래, 재능빨 운빨이 없으면 뭐 어떤가. 자신에게는 그간 쌓아 올린 재력이 만들어 낸 템빨이 있었다. S급 아이템을 들고 싸우는 C급은 처음 볼 거라며 킬킬거리고 있으니 머리 위로 누군가의 턱이 닿았다.

라이의 턱이었다.

복슬복슬하군.

백색의 털에 머리가 반쯤 파묻힌 채로 있던 사윤이 이성을 되찾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재희가 황당한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습니까?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언제는 제정신이었니.”

“그것도 그렇군요. 그래서, 갑자기 왜 내려간 겁니까?”

위험하니까 올라오세요.

이재희가 덧붙였다. 사윤은 코웃음을 치며 라이의 턱 밑에서 빠져나왔다.

“재희야.”

“말해요.”

“도와.”

“…도우라고요?”

멍하게 되물은 남자가 눈을 슴벅거렸다. 저를 향한 눈동자가 지금도 충분히 돕고 있는 거 아니냐고 말하는 듯해 사윤이 혀를 찼다.

이래서 안 굴러 본 것들이란.

“네가 다 해치우면 난 뭐로 랭크업 하냐? 잘 보고 있다가 적당할 때 도와주라고. 걔네 둘 나한테 붙여 주고.”

사윤이 시로랑 마루를 가리켰다. 그제야 말뜻을 알아들은 남자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두 소환수를 어르고 달래 사윤에게 붙여 주었다. 물론 그들이 협조적이진 않았다.

이미 한 번 날려 버린 전적이 있는데 어디 순순히 따라와 주겠는가.

깨갱! 캥! 켕!

재희가 달랬는데도 불구하고 가기 싫다는 의사 표시가 분명했다.

‘현재 상태: 주인님은 배신자야! 나를 버렸어요! 슬퍼요!’

‘현재 상태: 나 시로. 불쌍한 네 살인데 이렇게 노동력 착취를 당해도 되나? 부당함을 느끼는 중.’

슬쩍 확인해 본 상태창 역시 황당해 팔짱을 낀 사윤은 상전이 따로 없는 두 소환수를 못마땅하게 응시하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저 정도 나이에 저 정도 등급이면 어디 가서 상전 취급 받을 만하지. 당장 사윤만 해도 자신이 평범한 헌터였다면 두 소환수를 등에 업고 평생 절이나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어지간한 자리에선 옥이야 금이야 귀하게 다뤄질 것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곳은 어지간한 자리가 아니었다.

“소환수면 소환수답게 굴어야지.”

…켕?

고운 털을 살살 쓰다듬으면서 중얼거린 말에 두 마리의 소환수가 귀를 쫑긋 세웠다. 사윤은 친절하기 이루 말할 데가 없는 선한 미소를 지어 보인 채 말을 이었다.

“착각하지 말라는 소리야.”

여긴 등급 높다고 상전 대우 해 주는 곳이 아니었다.

등급이 높아? 실력이 좋아?

그럼 굴러야지!

“가라, 소환수 1호!”

깨갱!

게이트 포화 첫 시작 때가 그랬듯, 한 번 더 은빛 늑대가 사윤의 손길에 의해 날아올랐다. 하늘을 나는 기분이 어떠냐며 신이 나 던진 물음에 이재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그 와중에 개헤엄을 치듯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던 은빛 늑대는 바닥이 가까워질 때쯤 제 할 일을 깨닫고 피어를 쏘아 보냈다.

전장의 피어가 발동하자 몬스터들이 주춤거린다.

“라이!”

사윤이 펜리르의 이름을 부르자, 눈치 빠른 재희가 제 소환수를 달래 함께 피어를 사용하게 했다.

두 소환수의 피어가 합쳐진다. 고막이 떨어져 나갈 만큼 크게 울리는 하울링에 환히 웃은 사윤이 마저 남은 구미호 소환수를 바라보았다.

끼잉?

여우 소환수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양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다 내숭이다. 상태창에서 살려 달라는 문구를 확인한 사윤은 인자한 웃음으로 여우의 꼬리를 붙잡았다.

“버프 좀 줄래?”

어투만 놓고 보면 다정했으나 행동이 그렇지 못했다. 겁이 많은 소환수가 덜덜거리며 피어를 사용했다.

‘현재 상태: 고작 C급에게 공포심을 느끼다니! 창피해서 여우 굴을 파고 싶어요!’

함께 변화한 상태 문구도 아주 마음에 들었다. A급에게 공포심을 심어 주는 C급이라니 제법 만족스러운 일화 아닌가. 구미호 시로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자 시로의 피어가 사윤의 몸을 감쌌다. 답답했던 C급의 신체가 버프를 받아 순간적으로 B급에 근사하게 올라간 것이 느껴졌다. 무거운 족쇄를 푼 기분이라 잘했다고 칭찬한 사윤이 땅을 박찼다.

휙!

사윤의 몸이 공중으로 붕 날아올랐다가 굳어 있는 몬스터 무리 정중앙에 착지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B급 정도의 신체에, S급의 기술을 보유하고서 두 번의 디버프가 중복돼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A급 몬스터들을 압도하지 못하면 길드장 작위를 반납해야 했다.

팅!

작동 버튼을 누르자 와이어가 기분 좋은 울림을 내며 한 번 튕겨졌다. 사윤은 은빛 늑대와 구미호 둘을 향해 소리쳤다.

“따라와!”

컹!

겁에 질려서 그런 건지, 이재희의 명을 따로 받아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이번에는 반응이 즉각적이었다. 두 네발짐승이 동시에 땅을 박차 사윤의 곁으로 달려왔고 사윤은 그들이 여는 길을 타고 몬스터들을 공격했다. 삽시간 만에 수십의 몬스터 머리가 허공으로 치솟는다. 두 마리의 소환수들을 마치 호위기사처럼 데리고 다니며 전투를 치르는 사윤의 손속에는 자비가 없었고, 미친놈처럼 웃으며 다니면서 전투를 치르는 사윤의 모습을 본 재희는 한숨을 쉬었다.

흘러내린 갈색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남자가 라이의 털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배우지 마렴.”

컹!

어린 펜리르가 순진하게 대답했다. 재희는 어느덧 저만치 앞서간 사윤을 지켜보다, 사윤의 머리 위로 뜬 정보창을 확인했다.

천기를 읽을 줄 알게 되면서 재희가 볼 수 있게 된 사윤의 정보창은 다음과 같았다.

<천기가 ‘권사윤’의 진실을 꿰뚫어 봅니다.>

권사윤. C+급(S급), 진정한 인류의 악, 저항하는 자(개화 전), ???(개화 전)

그리고.

‘오류 진행도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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