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화. 환상 극장 (3)
크르르르.
사윤을 입에 문 채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낸 소환수가 홱 고개를 젖혔다. 그 움직임을 따라 위로 붕 떴던 사윤은 제 손목을 붙드는 재희의 도움을 받아 하얀 늑대의 등에 올라탈 수 있었다.
이왕 태우러 올 거면 조금 더 빨리 태우러 오든가. 괜히 두 발로 뛴다고 고생했다. 혀를 차며 자세를 바로잡은 사윤은 고개를 들고 주변을 살폈다. 백색 소환수의 덩치가 얼마나 큰지 성인 남성 두 명이 올라타도 등의 공간이 넉넉하게 남았다.
역시 탐이 난단 말이야.
게이트 내에서 타고 다닐 것으로 이만한 게 없었다. 남의 소환수를 길들일 수 있는지 잠시 고민해 봤다가 소환사와 소환수는 영혼으로 묶여 있는 계약 관계라는 걸 깨닫고 이내 포기했다. 혀를 한 번 차는 것으로 아쉬움을 표한 사윤은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 피투성이가 된 상처 부위에 쏟아부었다. 따끔한 통증이 밀려와 눈썹이 자꾸만 움찔거렸다.
“괜찮습니까?”
“괜찮아 보이니?”
“딱히 그런 것 같진 않군요. 포션 줄까요?”
“됐어. 그런 건 많으니까. 그보다 지원이 왜 이리 늦어? 기다리고 있었는데 한참은 안 오길래 죽은 줄 알았잖아. 느려 터져 가지곤.”
이쯤 되면 오겠거니 했는데 생각보다 이재희의 행동이 늦었다. S급 헌터라면 게이트 경험이 적지도 않을 텐데 왜 그리 넋을 놓고 있었냐는 뜻으로 그를 핀잔하자 사윤의 상태를 확인한 재희가 피식 웃었다.
“혼자서 뛰어다니신 모습을 보면 제 지원을 그리 기다린 것 같진 않던데요.”
“내가 기다렸다고 한 거면 기다린 거지.”
단조롭게 대꾸하곤 꿰뚫린 어깨에 붕대를 둘렀다. 포션을 뿌려 두긴 했지만 제 등급보다 상급 몬스터에게 받은 상처라 하급 포션으론 빠르게 회복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런 자질구레한 상처에 상등급 포션을 쓸 순 없었으니 적당한 포션을 쓰고 상처가 회복될 때까지 붕대를 매 둬야지 어쩔 수 있나.
역시 쓰레기 같은 몸이다.
하루빨리 등급을 복구시키겠다며 혀를 차고 있으니 사윤이 홀로 매느라 조금은 느슨한 붕대의 매듭을 도로 매 준 재희가 백색 소환수의 털을 쓰다듬었다.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자신의 소환수를 향한 애정이 가득 담긴 손길이었다.
소환수와 소환사는 계약의 형태지만 애착 관계라더니 확실히 저 모습을 보니 그 말이 실감이 나는 것 같긴 했다.
“속도 올릴 거니까 꽉 잡아요. 지금 사윤 씨 등급으로 라이 위에서 떨어지면 즉사니까요.”
“예, 예.”
즉사는 무슨.
소환수 위에서 떨어졌다고 죽는 각성자는 못 봤다. 그렇게 죽을 거였으면 필드에서 제가 골백번은 더 죽었겠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내뱉지 않은 사윤은 라이라고 불린 늑대 소환수의 몸을 꽉 붙들었다. 머리부터 목 부분까지 라이를 곱게 쓰다듬고 있던 재희가 상체를 낮췄다.
“라이.”
컹!
“가서 시로랑 마루와 합류할 수 있겠어?”
왕!
“그래, 착하다. 그럼….”
최고 속력으로 달려 줘.
털을 한 번 쓰다듬은 남자가 상체를 바짝 낮추고 속삭이자 꼬리와 목을 바짝 치켜세우고 하울링한 백색 소환수, 라이가 땅을 박찼다. 그 순간 사윤은 왜 이재희가 꽉 잡으라고 경고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미친.
말 그대로 미친 속도였다. 라이는 거리가 꽤 됐는데도 불구하고 눈 깜짝할 사이 사윤이 던져두었던 두 마리 소환수 곁에 도착했다. 경이로운 속도였기에 감탄한 사윤은 저도 모르게 라이의 몸을 꽉 붙들고 있던 손이 아주 미약하게 떨리는 걸 확인했다. 조금 전 라이의 속도가 C급의 몸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속도였단 소리다.
만약 사윤이 S급이었던 적이 없었다면, 나가떨어졌을 게 분명했다. 입술을 뻐끔거리던 사윤은 혹시나 싶어 라이를 향해 천재의 눈을 사용했다. 소환수여서 될까 싶었는데.
<펜리르, ‘라이’의 상태창을 확인합니다.>
됐다.
아니, 그것보다 펜리르라고?
사윤은 틀림없이 늑대인 줄 알았던 소환수를 다시 보았다. 펜리르라니. 자신이 아는 그 펜리르란 말인가.
소환수에 등급이 있다면 펜리르는 모든 소환수의 정점이었다. 이게 정말로 게임 같은 거였다면 아마 전설급 칭호가 붙을 정도로 희귀했고, 뛰어났다. 워낙 개체가 적고 다루기 까다로운 데다 소환사를 직접 고르는 종족이었기에 천억을 줘도 구할 수 없는 소환수다. 이런 걸 대체 어디서 주워 왔나 싶어 경악한 눈으로 재희를 살피던 사윤은 일단 궁금했던 상태창부터 확인했다.
<펜리르 ‘라이’의 상태창>
이름: 라이
나이: 3세
종족: 펜리르
성별: 수컷
등급: SS급(성장 가능)
소환사: 현재 소환사 ‘이재희’에게 영혼이 종속되어 있습니다.
스킬: 펜리르의 피어(SSS), 전광석화(S), 물어뜯기(AA), 그림자 환영(SS+), 땅파기(A), 도주(S)
현재 상태: ‘몬스터가 너무 많아서 무섭지만 주인님과 함께라면 이겨 낼 수 있어요!’
“시발.”
“네?”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욕설에 이재희가 뒤를 돌아보았다. 사윤은 혼잣말이었다며 앞이나 보라는 뜻으로 손을 휘젓고는 다시 한번 어린 펜리르의 상태창을 바라보았다.
“…….”
하얀 손이 눈을 벅벅 비볐다. 볼을 쭈욱 늘여 보기도 했고 짝 때려 보기도 했다.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들에 이재희가 다시 한번 뒤를 돌아봤지만, 사윤은 그와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성질이 나서 앞을 보라 타박했다.
시팔 진짜.
배알이 꼴리다 못해 온몸의 창자가 뒤틀려서 죽을 것 같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왜 이리 사기적인 스킬들만 가지고 있고 사기적인 소환수를 데리고 다닌단 말인가.
빌어먹을 운빨 좆망겜.
소환수가 펜리르였다는 것도 충분히 놀라운데 상태창은 정말로 억 소리 나게 놀라웠다. 이재희나 한건주의 상태창을 봤을 때보다 더한 수준이었다.
일단 첫 번째로 저 등급.
보통 S급이 최대라고 알고 있는데 어떻게 SS급 성장 가능 등급이 뜰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펜리르라지만, 소환수들은 몬스터와 아이템 사이쯤으로 취급된다지만 솔직히 사기 아닌가? 그냥 SS급도 아니고 성장 가능이다. 잘만 키우면 SSS급이 될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여기서 사윤은 한 번 뒷목 잡고 넘어갈 뻔했는데 더 기가 막힌 건 펜리르의 스킬창이었다.
[펜리르의 피어(SSS)]
펜리르의 위엄을 보여 주겠다!
-하울링 시 반경 1km 범위 내 모든 적을 스턴시키고 소환사가 아군으로 간주한 일행의 공격력을 10% 상승. 스턴 효과는 최대 1분간, 공격력 버프는 10분간 지속되며 피어 범위 안에 든 모든 적은 사망 직전까지 상태 이상 ‘공포’에 빠져 움직임이 둔해집니다. (범위를 벗어날 경우 상태 이상 해제)
[전광석화(S)]
어린 펜리르라도 충분히 빠르게 움직일 수 있어요!
-스킬 시전 시 10분간 속도 100% 상승 (펜리르가 성장할 때마다 함께 성장합니다.)
[그림자 환영(SS+)]
찬란한 백색에는 때론 어둠이 깃들어 있는 법이죠!
-시전 시 그림자 환영을 만들어 냅니다. 환영은 펜리르 본체의 80% 전력을 지니며 10분간 유지됩니다.
이런 식이다.
다른 것도 아니라, 소환수의 스킬창이.
저 백색 펜리르 한 마리가 어지간한 헌터들보다 강할 거라 속이 쓰렸던 사윤은 설마 싶어 다른 두 마리의 소환수도 살펴보았다.
<은빛 늑대 ‘마루’의 상태창>
이름: 마루
나이: 4세
종족: 은빛 늑대
성별: 수컷
등급: S급(성장 가능)
소환사: 현재 소환사 ‘이재희’에게 영혼이 종속되어 있습니다.
스킬: 전장의 피어(SS), 금광불괴(S), 물어뜯기(A), 굴 파기(S+), 자체 회복(A)
현재 상태: ‘주인님 그 기분 나쁜 인간 곁에서 떨어지세요! 저 사람 날 집어 던졌어요!’
<구미호 ‘시로’의 상태창>
이름: 시로
나이: 4세
종족: 구미호 (현재 꼬리 두 개 등급입니다)
성별: 수컷
등급: A급(성장 가능)
소환사: 현재 소환사 ‘이재희’에게 영혼이 종속되어 있습니다.
스킬: 낙원의 피어(S), 매혹(A), 물어뜯기(A), 꼬리 조르기(A), 위험 감지(A)
현재 상태: ‘나 시로. 창창한 네 살인데 이렇게 죽나? 몬스터가 너무 많아요!’
“죽일까?”
“네?”
이런, 이번에도 참지 못한 질투심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나 보다. 사윤은 저를 돌아보는 이재희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갑자기 살기 어린 시선을 받게 된 남자가 어리둥절한 시선을 던졌지만 알 게 뭔가. 진짜 배 아파 죽겠다.
그러는 사이 이재희는 나머지 두 마리의 소환수도 제 곁으로 불러들여 전투를 이어 나갔다. 소환수가 뛰어난 것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 소환사 자체가 능력이 좋아야 뛰어난 소환수도 제 능력을 발휘했다. 그런 면에서 따지고 보았을 때 이재희는 분명 S급이 맞았다.
시로랑 마루라 불렸던 두 소환수의 움직임이 독단으로 움직였을 때보다 훨씬 뛰어났으니까.
한마디로 이재희는 재능충에 운도 좋으면서 소환수까지 타고났다는 소리였다. 나머지 두 마리의 소환수 등급도 모두 A급 이상임을 확인한 사윤은 그만 복부를 움켜쥔 채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자신은 한 번 날뛴 것 말고 뭘 하지도 않았는데 이재희가 제대로 나서니 순식간에 몬스터 무리가 절반으로 줄었다. 다섯 마리의 소환수가 쉼 없이 날뛰고 이재희가 적재적소에 지원을 하니 혼자서도 아주 일인 군단을 자처할 만한 수준이 되었다.
이상하다.
분명 바라고 바랐던 버스인데.
꿀 빨고 있었는데 자꾸만 속이 쓰리다.
사윤은 배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신물을 삼키며 라이의 등을 움켜쥐었다. 라이가 놀라 펄쩍 뛰었다가 재희의 손길을 받곤 얌전해져 다시 전투를 이어 갔다. 주인님과 함께라면 이겨 낼 수 있다더니, 정말로 모든 몬스터를 다 이기고 있었다.
아 진짜.
나도 소환사나 할걸.
사윤은 어째서인지 길드에 있는 제 뱀들이 보고 싶어져 인상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