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화. 환상 극장 (2)
―그어어어!
단순하기 짝이 없는 몬스터들은 사윤이 내던진 소환수에게 곧바로 정신이 팔렸다. 한마디로 놈이 선두로 달리던 몬스터 집단의 어그로를 끌었다는 소리다.
크르르, 컹!
땅에 닿기 직전 몸을 돌려 무사히 착지한 이재희의 소환수는 꼬리를 사납게 치켜세우며 저를 둘러싼 몬스터들을 경계했다. 키에에에엑! 몬스터 하나가 겁도 없이 경계 태세의 소환수에게 달려든다. 아우우우! 늑대 소환수가 하울링을 시작했다.
지이이이잉.
녀석의 하울링에 온 땅이 진동하는가 싶더니 달려들던 몬스터들이 주춤거렸다. 상급 소환수 중에서도 특급들만 사용한다는 ‘전장의 피어’를 쓸 줄 아는 녀석인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운빨 망겜.
색이 백색에 가까울수록 등급이 높고 희귀한 소환수다. 그런데 이재희의 이 늑대 소환수는 은빛 털을 가진 데다 전장의 피어까지 사용할 줄 알았다. 어지간한 운이 아니고서야 얻을 수 없는 소환수였기에 배알이 꼴렸던 사윤은 포악한 기세가 사라진 몬스터들을 돌아보았다.
전장의 피어.
피어 범위 내 적 방어력을 10퍼센트 이상 낮추고 사기를 저하시키며 이동 속도를 느리게 만드는 디버프 계열의 소환수 스킬이었다. 한마디로 전장의 피어 효과가 돌 동안 이 구역에 있는 몬스터들은 때릴 때 데미지가 10퍼센트씩이나 더 들어가는 느린 과녁이란 소리였다. 적당한 타이밍에 들어온 디버프라 생각한 사윤은 공격을 시작하기 위해 땅을 박찼다.
그런 뒤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왜 내 속도도 느려진 것 같지.
C급이 되었다는 걸 감안하고도 평소보다 몸이 느렸다. 심지어 건주의 도망 이후로 드러누었다가 처음으로 공략한 게이트 때보다 더 느렸다. 의문을 표하고 있자 사윤을 확인한 늑대 소환수가 사납게 컹컹 짖었다. 한 템포 늦게 상황을 파악한 사윤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저 정신 나간 광견이 자신까지 적으로 간주하고 피어를 사용한 모양이었다.
“거, 사람이 한 번 집어 던질 수도 있지 쪼잔하기는.”
얼결에 몬스터들과 함께 디버프를 받게 된 사윤은 혀를 차고 달리던 경로를 틀어 재희의 곁으로 돌아갔다. 먼저 집어 던진 한 놈이 정신을 못 차리니 전력을 추가로 지원해야지 뭐 어쩌겠는가. 안 그래도 2천을 상대로 한 마리만 집어 던진 건 너무 정이 없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순식간에 소환진 근처에 도착한 사윤은 여우 형태를 한 소환수를 붙잡았다. 깨갱! 조금 전 사윤에게 붙잡혔던 늑대의 말로를 본 여우 소환수가 우는 소리를 내며 발톱을 땅에 박고 버텼다. 아주 끌려가지 않으려고 별 발악을 다 떨었다.
전투용 소환수면서 왜 이래?
“쉬이, 착하지.”
살살 여우를 달래며 꼬리를 잡아 들자 방관하고 있던 재희가 사윤의 팔을 붙들었다.
“설마 그 아이도 집어 던질 생각입니까?”
“아, 이제야 정신이 드냐? 난 또. 게이트 포화 시작됐는데도 가만히 있길래 넋 빠진 줄 알았지.”
“제가 물어본 건 그런 게 아니라…!”
으랏차!
“…….”
재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윤은 손에 들린 소환수를 집어 던졌다. 켕! 기어코 사윤에 의해 던져진 소환수가 억울하다는 듯 공중에서 울부짖었다.
케겍!
곧 목이 졸리는 듯한 소리를 내며 허공에서 몸부림친 소환수가 이내 공중제비를 돌곤 무사히 몬스터 사이에 내려앉았다.
아으으으으!
이를 으득 간 여우 소환수가 이전의 소환수가 그랬듯 꼬리를 바짝 세우며 피어를 쏘아 보냈다. 진짜 운빨 망겜이다. 늑대는 디버프 계열이더니 여우는 아군 버프 계열 스킬을 사용하고 있었다.
“적재적소에 버프를 쓸 술 아는군.”
이재희가 확실히 S급 소환사긴 S급 소환사인 모양이다. 두 마리 다 탐이 날 정도로 똑똑한 소환수였다.
아니, 제게 디버프를 건 늑대 소환수는 빼고 말이다.
커겅, 컹!
와우우우!
본격적인 전투에 들어간 소환수들은 단숨에 몬스터들의 목을 물어뜯었고 발톱으로 놈들의 살갗을 찢었다. 원치 않게 집어 던져졌어도 사냥 본능은 충실한 이들에 사윤 역시 달떠서 전장으로 달려들었다.
“정신 차렸으면 너도 좀 도와라, 재희야. 네 소환수들만 고생시키지 말고 말이야!”
엄밀히 말하자면 자신이 고생시킨 거긴 했지만 그런 사소한 건 넘어가기로 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언제인데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재희를 향해 가벼운 타박을 남긴 사윤은 두 마리의 소환수 뒤로 이동하곤 인벤토리에서 밧줄을 꺼냈다. 평범한 밧줄 같아 보여도 죄인의 밧줄이라고 해서 B급 아이템이다. 한번 묶은 건 시전자가 아닌 이상 풀리지 않기 때문에 지금 같은 상황에서 쓰기 딱 좋았다.
사윤은 밧줄에 단도를 매달고 쥐불놀이하듯 붕붕 돌렸다.
쉬익!
밧줄의 끝을 잡고 단도를 내던지자 소환수에게 정신이 팔려 있던 이레귤러의 목에 날카로운 단도가 처박혔다. 크어어억! 기습당한 놈이 비명을 내지르다 절명했다. 사윤은 팔을 당겨 검을 회수하고 다음 표적을 향해 다시 집어 던졌다.
푸욱, 푹!
백발백중, 원콤맨이다.
맞히는 족족 몬스터가 쓰러졌기에 피 묻은 얼굴을 닦은 사윤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자신의 등급이야 C급이지만 제 아이템들은 여전히 S급이었다. 탱커가 있어 어그로를 대신 끌어 줄 경우 A급 한두 마리 정도 처치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그것도 초당으로 견주어 봤을 때 말이다.
―키에엑!
―컥!
―그걱!
있는 힘껏 밧줄을 돌리자 순식간에 몬스터 셋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때 최고 딜량이 사윤에게로 옮겨지면서 몬스터들 역시 소환수가 아닌 사윤을 경계했다. 어그로가 넘어온 것이다.
“쯧, 두 마리가 아니라 세 마리를 데려왔어야 했는데.”
뒤에서 죽을 만한 놈들만 골라 빠르게 처치하다 보니 예상보다 한참은 빨리 어그로가 넘어왔다. 소환수가 제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물량 공세로 밀고 들어와 저를 향해 달려드는 몬스터들에 땅을 구른 사윤은 흙먼지를 털 시간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달렸다. 한복판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사방이 적이었다. 이를 악물며 앞에서 달려드는 몬스터 수십을 상대하고 있으니 별안간 어깨에서 격통이 느껴졌다.
“커헉!”
울컥, 뒤이어 사윤이 피를 통했다. 몬스터 한 놈이 사윤의 어깨를 꿰뚫기 무섭게 다른 놈마저 사윤의 복부를 향해 날카로운 낫을 박은 탓이었다.
시팔 저 낫은 어디서 나온 거야.
22종의 영화에서 몬스터들이 튀어나오다 보니 별의별 몬스터들이 다 있었다. 사윤은 인상을 쓰며 몸을 뒤틀고 무기를 바꾸었다. 사방에서 몬스터들이 달려드는 그 순간, 사윤의 검이 향한 곳은 몬스터들의 몸이 아닌 땅바닥이었다.
콱! 땅에 칼을 박은 사윤이 핏물을 뱉어 내며 시동어를 읊었다.
“헤리스의 참회.”
드드드드드.
콘크리트로 메워진 바닥이 진동했다. 그런 뒤 수많은 몬스터가 사윤에게 닿기 일보 직전일 때 콰아아앙! 폭발했다.
굉음과 함께 폭발한 땅에, 콘크리트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몬스터들의 몸에 꽂혔다. 접근하던 몬스터들의 대부분이 쓰러지거나 밀려났고, 서 있는 몬스터들은 몇 되지 않았다. 문제였다면 폭발 현장의 중심에 있던 사윤의 몸 상태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라는 거였다.
S급일 때는 백날 헤리스의 단도를 써도 상처 하나 입지 않았는데 C급이 되니 사정이 달랐다. 울컥 피를 토한 사윤은 비틀거리며 바닥에 박아 넣은 단도를 빼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법 많은 수를 처치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반경 10미터 내에 있는 몬스터만 백 마리가 넘었다.
제기랄 숫자는 빌어먹게 많아서.
게이트 포화가 시작됨과 동시에 약 오백 마리의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꾸준히 쏟아져 나와 어느덧 바리케이드 안에는 2천이 넘는 몬스터가 있었다. 경악할 만한 점은 아직 그 행렬이 끊이질 않았다는 거다.
환상 극장 게이트가 여전히 열려 있었으니 말이다.
10분 내로 수를 줄이지 못하면 바리케이드가 뚫린다.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두긴 했지만, 가오 없게 실패했다는 소리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길드장이 이런 간단한 공략도 실패하면 사퇴해야 했다. 피를 닦아 내며 몸에 처박힌 낫을 빼낸 사윤이 가장 가까이에 있던 몬스터를 향해 달려들었다.
덥석!
내뻗은 손이 순식간에 붙들려 저지당했다. 빠드드득 손목이 부러지는 건지, 섬뜩한 소리가 들렸으나 당황하지 않은 사윤은 저를 내던지려는 몬스터의 힘을 역이용했다. 집어 던지려는 놈을 반대로 끌어당기면서 거리를 좁혔다. 푸욱! 방심한 틈을 노린 공격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놈의 급소를 가격하는 데 성공했다.
―그에엑!
몬스터가 힘을 잃으며 사윤의 쪽으로 엎어졌다. 3미터도 넘는 체구의 몬스터라 기겁한 사윤이 놈에게 깔리지 않기 위해 다급히 몸을 빼내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빌어먹을 개새끼!”
디버프 때문에 예상했던 것보다 몸의 반응이 느렸다. 그놈의 이동 속도 저하로 재 뒀던 타이밍에 몸이 움직이지 않아 이를 악물던 순간이었다.
캥!
강아지 짖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누군가 사윤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대롱대롱, 몸이 공중에 뜬 사윤은 고개를 돌려 상황을 파악했다. 백색의 거대한 늑대가 사윤의 목덜미를 낚아채 아프지 않게 물고 있었다.
“목숨이 여러 개도 아니고. 이 상황에서 그렇게 날뛰면 어떡합니까? 뒤에 타요.”
이어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사윤은 백색 소환수의 등 위에 올라타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이재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