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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123)화 (123/266)

제123화. 천기누설 (6)

“왜 그렇게 빤히 봅니까?”

“그냥.”

아무래도 계속 쳐다보는 게 조금 부담스러웠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신경 쓰였던 거거나. 고개를 갸웃 기울이면서 묻는 이에게 단조로운 어조로 대꾸한 사윤은 한 박자 늦게 재희의 의문을 풀어 주었다.

“이래 보여도 S급이었으니 A급 게이트 클리어하는 것쯤은 문제없어. 그리고 너도 같이 가잖아. S급 끌고 들어가면서 A급 미만 게이트를 들어가는 건 사치가 아니라 멍청한 짓이지.”

“음, 높게 평가해 주는 건 감사합니다만 제가 그렇게 전투 특화된 각성자는 아니라서요 사윤 씨를 지키면서 전투하는 건 무리인데요.”

“누가 지켜 달래? 그리고 너 전투 특화 아닌 것쯤은 알아. 너 소환사잖아.”

“그것까지 아나요? 신기하네.”

“네 집에 소환진이 그렇게 덕지덕지 붙어 있었는데 모를 리가 있겠냐.”

“아, 맞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전에 집에 들어오신 적 있었죠? 요즘 생각할 게 많아서 까먹었네요.”

“…….”

태평한 목소리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댄다. 깜빡할 게 따로 있지. 어떻게 자신이 그를 죽이려고 침입한 사건마저 까먹는단 말인가. 사윤은 황당해 입을 벌린 채 그를 응시했다. 자신의 어처구니없는 심정을 알기는 하는 건지 이재희의 시선은 어느새 파일철에 콕 박혀 있었다. 누가 탐구하는 데 미쳐 있는 인간 아니랄까 봐 읽을거리를 던져 주니 아주 환장을 했다.

팔랑, 서류 한 장이 가볍게 넘어갔다. 잠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윤은 진리에 미친 또라이랑 무슨 대화를 하나 싶어 한숨을 내쉬었다.

뭐, 따지고 보면 죽이려고 한 상대랑 나란히 앉아 있는 지금 꼴이 더 우습긴 하지.

상식적인 면에서 따지고 보면 그게 훨씬 특이하긴 했다. 애초에 저와 이재희의 관계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였기에 이상한 점 몇 개쯤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 사윤은 차창 밖의 풍경을 멍하니 응시했다. 파일철에 집중하느라 말이 없던 이재희가 입을 연 건 10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정말로 A급 게이트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어이구.”

실컷 있다가 묻는 게 그거냐.

사윤은 이제 이재희에게 학을 떼게 되었다. 저 물음을 던질 거면 아까 한창 그 화제가 이어지고 있을 때 더 물어보든가 했어야지 파일철에 정신 팔려 10분이나 침묵해 놓곤 저러고 있다. 아주아주 독보적인 캐릭터였다.

사윤은 제가 지금 저깟 서류 몇 장에 밀린 건가 싶어 파일철을 게슴츠레 뜬 눈으로 훑어보았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게이트에 가짜로 들어가리?”

“위험할 겁니다.”

“왜, 천기를 꿰뚫어 보는 네 눈이 게이트에서 내가 죽기라도 한대?”

하도 말리길래 겁먹었나 싶어 비꼬듯이 뱉은 말이었는데 대답이 돌아오질 않았다. 뜻밖의 상황이다. 설마 싶어 입을 달싹거린 사윤이 재희를 바라보았다.

“…진짜냐?”

“음.”

“뜸 들이지 말고 똑바로 말해. 아, 아니다. 천기누설이면 쓰지 마라.”

피 토하고 쓰러지는 건 한 번 보는 거로 족했다. 시답지 않은 건으로 그의 수명을 빼앗을 생각은 없어서 단호히 덧붙이자 한 번 피식 웃은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요.”

“…….”

다른 사람이 한 말이었으면 그냥 웃어넘길 텐데 행운 스탯이 월등히 높은 천안의 보유자가 한 말이니 우스갯소리로 치부할 수 없었다. 저 이재희가 이렇게까지 얘기하는 걸 보면 제가 가려는 게이트에서 뭔 일이 일어나긴 일어나려는 모양이다. 잠시 고민하던 사윤은 이내 입꼬리에 호선을 그렸다.

무슨 특별한 일이 일어난다면 더더욱 들어가 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럼 더 가 봐야지. 네가 그렇게 느낄 정도면 예삿일은 아닐 텐데 내 길드가 보유한 게이트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정도는 알아 둬야 할 거 아니야. 네 감이 얼마나 좋은지 알아볼 겸 가 보는 것도 괜찮겠는데.”

A급 게이트에서 S급과 함께 있는 거니 별일이야 있겠나 싶었지만 깜짝 놀랄 만큼 기이한 일이 일어나도 꽤 즐거울 것 같았다. 불길한 예감이 든다는 말에도 몸을 사리긴커녕 오히려 즐겁다는 듯 얘기하자 파일철을 덮은 남자가 사윤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겉가죽을 뚫고 속까지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도 여러 번 받다 보니 어느 정도 적응하게 됐다. 덤덤한 태도로 그를 마주하고 있으니 이재희의 입에서 얕은 숨이 흘러나왔다.

“무모한 편이시군요.”

“너만 할까.”

수명을 두 번씩이나 끌어 써서 천기누설을 사용했으면서 사돈 남 말했다.

“정말로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괜찮아. 안 죽어.”

“그 말이 남자가 빨리 죽는 이유 1위라더군요.”

“뭐라는 거야?”

엉뚱한 대화였다. 갑자기 왜 헛소리를 하는지 몰라 눈썹 사이를 좁히자 이재희가 눈을 한 번 감았다 뜨곤 허리를 반듯하게 세웠다.

“뭐 그런 성격이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고 제 쪽에서 먼저 도와드리기로 했으니 도와드리겠습니다. 사윤 씨가 말했던 것처럼 꽤 재밌는 일이 일어날 것 같기도 하고요.”

“위험할 거라면서 이젠 또 재미있는 일이냐?”

“어디까지나 사윤 씨를 기준으로 했을 때 위험한 거지 저를 기준으로 했을 땐 괜찮습니다. 전 S급이니까요.”

그리고 위기란 게 그렇게 쉽게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요.

잔잔하게 이어진 음성을 듣고 있으니 순간 속이 꼬였다. 뭐 위기란 게 그렇게 쉽게 찾아오는 건 아니라고? 배알이 뒤틀리는 감각에 인상을 쓴 사윤이 이재희의 상태창을 띄웠다가 이죽거렸다.

만물의 사랑을 받으시는데 어련하실까.

만물의 사랑도 받고 신한테 관심도 받고 흐름을 비트는 자로 이 판 저 판 다 뒤집고 다녔을 텐데 위기란 걸 겪어 봤을 리가 있나. 아마 이재희의 인생에서는 자신이 가장 큰 위기였을 것이다. 경진이 조사해 온 이재희 보고서에서도 특별한 과거 행적이 없었기에 그리 짐작한 사윤은 비틀린 심정으로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각성 때부터 S급으로 시작해 그간 헌터 생활이 꽤 즐거웠을 거다. 어딜 가든 떠받들어 주는 사람밖에 없었을 거고 만물의 사랑을 받는 만큼 어딜 가든 호의적인 환경만 맞이했을 것이다. 그렇게 꿀 빨며 살아왔으니 이참에 어디 걸어 다니는 재앙과 함께하며 인생 밸런스 패치 좀 받아 봐라 싶었다.

행운 스탯이 높아 보이던 그 한건주마저 자신과 함께하며 별별 일을 다 겪었다. 이재희라고 별다를 것 같진 않았기에 히죽거리며 웃고 있으니 이재희가 영문도 모르고 따라서 싱긋 웃었다.

“넌 이참에 위기란 게 뭔지 겪어 보게 될 거다.”

“네?”

“기대하라고.”

종식이 봤다면 이마를 짚을 정도로 사악하게 웃은 사윤이 이재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시답지 않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벌써 게이트에 도착한 건지 차가 정차했다.

“내려.”

그래도 저를 위해서 친히 고생해 준다 했으니 이 정도 에스코트는 해 줄 수 있어 먼저 차에서 내려 문을 열어 주자 이재희가 느릿하게 땅을 디뎠다. 게이트 앞까지 데려다준 길드원이 복귀할 때 불러 달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고 그 대신 게이트를 관리하던 길드원들이 사윤을 보필하기 위해 근처로 다가왔다. 하여간 한건주 때문에 길드원들의 과보호가 늘어서는. 잠시도 저를 혼자 두지 않으려는 이들에 질린 표정을 지은 사윤이 손을 휘저어 그들을 물렸다.

“길드원들이 사윤 씨를 많이 좋아하나 봅니다.”

“왜, 부럽냐? 너도 들어오든가.”

“착하게만 살아서 범죄 길드에 들어가기에는 아직 많이 부족하군요.”

“재수 없기는.”

말을 해도 저런 식으로 한다. 그것도 웃으면서 말해 인상을 쓴 사윤은 문득 이전부터 물어보려 했던 것이 생각나 눈앞의 남자를 불러 세웠다.

“아 맞다, 전에 물어보려다 잊었는데.”

“네.”

“네 스킬에는 내 상태창이 어떻게 보이냐.”

“…….”

훅 들어온 물음에 이재희가 드물게도 말을 잃었다. 사윤은 팔짱을 끼고 게이트 근처에 놓인 컨테이너 박스에 기댄 채로 대답을 기다렸다.

천재의 눈에는 상대의 상태창이 모조리 보인다.

그렇다면 천기를 꿰뚫어 보는 저 눈에는 뭐가 보일지 궁금했다.

그저 꿰뚫어 보는 자였다면 천재의 눈의 하위 버전일 터였지만 이재희는 별장에서 스킬이 한 단계 성장했다. 이젠 단순히 꿰뚫어 보는 자가 아니었기에 묻자 침음을 흘리던 남자가 눈동자를 살짝 휘어 웃어 보였다. 단정하지만 어딘가 애매하고 불편한 웃음이다. 이재희는 대답을 피하고 싶을 때 저렇게 웃는 모양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전 상태창을 보는 게 아닙니다. 본질을 보는 거지.”

“그게 그거지. 그래서 네가 본 그 본질이 뭐냐고.”

“그러게요.”

“뭐?”

대답을 내놓으라 했더니 회피성이 짙은 답만 돌아왔다. 눈꼬리를 사납게 올리자 이재희가 어깨를 으쓱였다.

“비밀로 하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그렇게 가까운 건 아닌데 이 정도는 비밀로 해야죠. 제 밑천을 다 드러낼 순 없으니까요.”

“…….”

말은 번지르르했으나 실제 이유는 그런 게 아닐 것이다. 사윤이 보기에 적어도 이재희는 최후의 한 수를 숨기기 위해 패를 감추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천기누설을 얻은 즉시 피를 토해 가며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그가 대답을 숨긴 이유는 둘 중 하나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에 대해 세밀히 적혀 있는 것이거나, 천기누설이거나.

주어진 단서라곤 그의 표정밖에 없었기에 눈을 가늘게 뜨며 얼굴 근육 하나하나를 섬세히 관찰하자 이재희는 예의 그 웃는 얼굴로 사윤을 응수했다. 몇 분간 그런 대치가 이어졌다. 아무리 살펴봐도 더는 얻을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인정한 사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는 그렇게 다 알려 주려고 하더니 오늘은 아주 기를 쓰고 다 숨기려 드네.”

“동맹을 이어 가기 위해선 드러내기만 해선 안 되니까요.”

“혀에 기름칠은 잘 됐지, 아주.”

쯧, 혀를 차며 타박한 사윤이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이재희의 눈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는 건 텄으니 이제 게이트에 들어가 볼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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