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화. 천기누설 (5)
기껏 종식을 소파로 내쫓고 침대까지 차지한 보람이 없게도 양질의 수면을 취하지 못했다. 사윤은 피로가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힘겹게 눈을 떴다. 일어나기 싫다. 이런 감정을 얼마 만에 느낀 건지 모르겠다.
마음만 같아선 이대로 침대와 한 몸이 돼 한 달 정도 누워 있고 싶었지만, 그건 며칠 전에 했으니 관두기로 했다.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게이트도 돌아야 했고 이재희의 실력도 확인해야 했으며, 밀린 퀘스트도 깨야 했다. 몸은 하나인데 해야 할 건 너무 많다. 당최 시스템은 저를 쉬게 두질 않는다며 앓는 소리를 내다 끙, 하고 몸을 일으키자 소파에 널브러진 종식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큰 덩치를 소파에 잘도 욱여넣고 잔다. 한쪽 다리를 팔걸이 밖으로 빼고 한쪽 손으로 등받이를 끌어안고 자는 게 아주 진기명기라 짤막하게 감탄한 사윤은 뻐근한 목을 돌리며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이른 아침이었다. 눈을 붙인 시간이 새벽이었으니 그다지 오래 잔 편은 아니었다.
어쩐지 더럽게 피곤하더라.
눈을 붙인 것도 늦은 시간이었는데 눈을 감자마자 바로 잠들지도 못했다. 어째서인지 잠이 안 와 몇 번 뒤척거리다가 겨우 잠들었고 그마저도 중간중간 깨 거의 선잠 수준으로 잤으니 입이 쩍 벌어지게 하품이 나오는 것도 이해가 갔다. 생리적으로 고인 눈물을 훔치며 화장실에서 씻고 나와 머리를 털었다. 물소리에 깬 건지 샤워하러 들어갈 때와 달리 소파에 반듯하게 앉아 있는 종식이 사윤을 맞으러 일어났다가 짧게 경악했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뭐가.”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만.”
“피곤한 거야 매일 피곤하지. 몸은 아주 멀쩡해.”
“멀쩡한데 얼굴이 왜….”
여상한 대꾸에 한쪽 눈썹을 꿈틀거린 종식이 체념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반응에 거울을 확인한 사윤은 꽤 오랜만에 제 얼굴을 보고 놀랐다. 거울에 아주 피곤에 절어 있는 인간이 서 있었다.
3일 밤을 새운 회사원도 저보다는 생기 있어 보일 거라 칙칙한 볼을 매만졌다. 혈색이 옅은 거야 늘 그랬지만 오늘은 옅다 못해 무슨 중질지처럼 칙칙하고 창백해 보였다.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놀라울 정도로 짙었고 입술은 각질이 다 일어나 까칠까칠했다. 아무리 피곤하다지만 고작 하루 잠 못 잤다고 이렇게까지 개판이 되다니. 평상시 제 모습과는 너무 딴판이라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보며 어이없어하고 있으니 종식이 담요 하나를 가져와 사윤에게 덮어 주었다.
“또 잠 못 주무십니까? 각성자용 수면제라도 처방해 드릴까요?”
“됐어. 어차피 S급이라 통하지도… 아.”
습관적으로 거절하던 사윤은 뒤늦게야 자신이 C등급으로 하락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였나 보다. 어쩐지 S급일 때랑은 얼굴이 판이하더라니 등급이 떨어져서 이렇게 급격히 티가 난 모양이었다. S급일 때는 워낙 체력이 좋고 몸의 스탯이 받쳐 줘 스트레스받아 며칠을 밤을 새워도 멀쩡했는데 C급으로 떨어졌다고 이렇게 티가 날 줄은 몰랐다.
“C급 별로네.”
새삼스럽게 깨달은 단점이다. 불만스러운 얼굴로 저랭크의 번거로움과 구차함에 대한 감상을 얘기하고 있으니 냉녹차를 타 온 종식이 사윤에게 잔을 건넸다.
“아침에는 차게 타지 말라니까.”
인상을 쓰면서도 능숙하게 녹차를 받아 들고 원샷하는 사이 종식이 화장실로 들어가 세수를 마쳤다. 젖은 얼굴을 수건으로 꾹꾹 누르며 닦은 남자가 사윤의 머리에 걸쳐 있던 수건을 함께 회수해 세탁실에 던져 넣었다.
“형님은 얼른 등급부터 올리셔야겠습니다. C급인데도 S급처럼 구시니까 제 심장이 남아나지 않는다고요. 그러다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할 겁니까? 필요하다면 제가 도와드릴 테니 랭크업부터 하시죠.”
“아, 그거 괜찮아.”
“네?”
“네가 안 도와줘도 괜찮다고. 너 일 많잖아. 가서 일해.”
“하지만 저 데리고 가시면 쓸모가….”
형님 저랑 게이트 안 들어가신 지 1년이 넘었습니다. 이럴 때라도 절 써먹으셔야지 제가 이래 보여도 나름 S급인데…. 종식이 아쉬운 건지 서운한 목소리로 꿍얼거렸다. 사윤은 조금 황당한 표정으로 일 중독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맡고 있는 일이 몇 개인데 제 랭크업까지 도와준단 말인가. 아무리 종식이 유능하고 여러 일을 동시에 처리하는 데 도가 텄다지만 이 이상 일을 맡기는 건 무리였다.
울다가 사표라도 던지면 그건 누가 책임진단 말인가.
그럴 일은 없겠지만 염려가 되는 건 사실이다. 물론 그 사표의 책임은 종식이 목숨 걸고 져야 하겠지만 말이다.
“됐으니까 넌 네 볼일 봐.”
“그럼 다른 애들이라도 붙여 드릴까요?”
“혼자가 편해. 웬만한 애들은 성에 안 차고. 그리고 랭크업 도와줄 사람은 이미 구했다.”
“네?”
언제요?
자연스럽게 드라이기를 들고 와 사윤을 앞에 앉혀 둔 종식이 눈을 깜빡였다. 위이잉. 드라이기의 소음이 간극을 메운다. 그가 제 머리를 말리든 망치든 마음대로 하라고 놔둔 사윤은 눈동자를 굴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따라간 종식이 굳게 닫힌 문을 응시했다가 아, 하고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이재희입니까?”
“그래.”
랭크업을 도와주다 못해 버스까지 태워다 줄 인재였다. S급 소환사 버스는 또 처음 타 보는 거였기에 흐흐 웃자 흠잡을 구석 없이 완벽한 악당처럼 웃는 자신들의 수장을 바라본 종식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구미호처럼 웃지 말라고 했더니 이젠 악당처럼 웃으시고….”
“뭐라 했냐?”
“새로 산 드라이기가 꽤 괜찮습니다. 이거로 다 바꿀까요?”
“쫄기는.”
순진하고 맹하고 또 충직하고. 생긴 것과 하는 행동만 보면 어디 협회에서 일할 것처럼 생겼는데 범죄 조직의 간부라니 역시 인생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머리가 얼추 말라 자리에서 일어나자 종식이 배웅과 나갈 채비를 돕기 위해 사윤을 따라왔다. 아직 아침 7시다. 그는 조금 더 쉬어도 될 시간이었기에 됐다고 손을 저은 사윤이 종식의 어깨를 밀어내고 방을 빠져나왔다.
하여간 저게 집사인지 간부인지 비서인지 모르겠다. 따지고 보자면 그 세 가지 일을 전부 하고 있는 것 같아 종식의 방을 힐끗거린 사윤이 제 방으로 향했다. 느껴지는 인기척은 없다. 아니, 어쩌면 C급이 된 상태라 못 느끼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문을 두드릴까 고민하다가 어차피 제 방인데 싶어 거침없이 열고 들어가자 침대에 앉아 햇살을 받고 있던 남자가 사윤을 돌아보았다.
“일어나 있었네.”
한건주라면 늘어지게 자고 있을 시간이었는데 이재희는 아침잠이 없는 듯했다. 신발을 신은 채로 안으로 들어가면서 말하자 이재희가 고개를 살짝 까닥거리며 웃었다. 아침이라서 그런 건지, 햇살이 환해서 그런 건지 다른 때보다 이재희의 머리카락이 유난히 밝아 보였다.
“잘 잤어요?”
“그럭저럭. 너는.”
“덕분에 잘 잤죠.”
목소리가 듣기 좋을 정도로 편안한 걸 보니 확실히 저와 달리 숙면을 취한 모양이었다. 사윤은 하룻밤 사이 달라진 건 없는지 이재희의 상태창을 한 번 더 살핀 다음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그럼 게이트 가자.”
“……?”
방에 들어온 지 1분도 되지 않아 나가자고 말하는 사윤에 재희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윤은 얼떨떨하게 앉아 있는 남자의 팔뚝을 붙잡고 일으켰다.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자 이재희가 느릿느릿 따라오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아침부터 게이트에?”
“게이트 가는 데 밤이고 낮이 어디 있어.”
“그건 또 그렇네요.”
잠시 생각하는 듯했던 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순순히 끌려왔다. 참 희한하기 짝이 없는 남자였다.
* * *
“그런데 어디 게이트 가는 겁니까?”
“참 일찍도 물어본다.”
준비시키고 나온 지가 언젠데 이제야 물어본다. 사윤은 목적지도 모르고 남의 길드 차에 막 올라탄 남자를 희한하게 바라보았다. 이건 뭐 실력에 자신이 있어서 이렇게까지 무방비한 건지, 아니면 모든 걸 꿰뚫어 보기 때문에 경각심이 없는 건지. 어느 쪽이든 황당하게 느껴지긴 매한가지다. 막말로 제가 미공략 게이트에라도 끌고 가면 어쩌려고 저렇게 막 따라왔나 싶었다.
“그것도 모르면서 따라왔냐.”
“일정을 함께하기로 했으니 어디든 따라갈 생각이었어서요.”
“…….”
음, 역시 또라이다. 멀쩡하게 생긴 얼굴로 툭툭 뱉어 대는 말이 영 심상치 않아 한순간 할 말을 잃었던 사윤이 혀를 차며 손에 들고 있던 파일철을 넘겨주었다. 밤쥐가 보유한 게이트 중 사윤이 퀘스트를 클리어하기 위해 물색해 둔 열 개의 게이트 목록이었다.
“거기서 가고 싶은 데 골라 봐. 전부 가겠다는 건 아닌데 어느 정도 일정을 짤 때 고려는 해 볼 테니까. 그래도 협력하는 거니까 너한테 선택권은 줘야 할 거 아니야.”
인심 썼다는 듯 말하자 이재희가 파일철을 열어 그 안의 서류를 살폈다.
“흠. 이번에 갈 게이트는 어딘데요?”
“환상 극장.”
“환상 극장이면 A급일 텐데?”
파일철을 둘러보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사윤은 대수롭지 않은 어투로 받아쳤다.
“그래, A급이지.”
“사윤 씨 등급이….”
말을 흐린 남자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사윤을 쳐다보았다. 운전석에 있던 길드원이 신경 쓰였던 건지, 끝까지 말하지 못하고 흐지부지 끝맺긴 했지만 그가 내뱉으려 했던 말이 무엇인지 얼추 짐작이 갔다. C급이 왜 A급 게이트를 클리어하려 드냐는 말이겠지.
그 모습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해 사윤은 입을 다물었다. 닮은 점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점은 제법 닮은 것 같았다.
아닌가.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의문을 가질 만한 구석인가?
하긴 두 단계 이상 차이 나는 게이트를 공략하겠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긴 하다. 하지만 제가 어디 보통 각성자던가. 그냥 C급도 아니고 미공략 게이트 클리어를 밥 먹듯 하던 S급이었다. 대충 경력직 C급 뭐 그런 거였으니 A급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물론 폐인 생활을 관둔 지 얼마 되지 않아 지금은 하급 게이트 두 개 클리어한 게 고작이긴 하지만 뭐, 조금 무리하면 어떤가. 어차피 저야 죽지 않는 존재였고 이재희는 제 정체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니 게이트 안에서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을 거였다. 건주의 앞에서야 관계를 신경 쓴다고, 자살 쇼를 못 보여 줬지만 이재희에겐 그렇게 꺼릴 게 없었다.
시스템에 휘둘리는 것까지 다 알고 있는 마당에 시스템에 의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것까지 알게 되면 오히려 더 흥미로워하지 않을까.
어젯밤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기에 사윤은 턱을 매만지는 남자를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문득 이재희가 선한 사람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만치 신념에 미친 또라이인데 괴상한 신념을 가진 악인이기까지 해 봐라. 세상은 엿 됐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