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1화. 천기누설 (4)
이재희는 조금 전의 대화로 속내를 전부 드러내고 나서야 탐색하는 눈빛을 거뒀다. 더는 관찰할 필요가 없다고 느껴서 그런 건지, 협력하기로 했으니 신뢰를 주기 위해 그런 건지는 모르겠으나 피부를 찌르던 S급의 기세가 사라진 것만으로도 사윤은 숨통이 트였다.
불편해서 죽는 줄 알았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노골적으로 관찰당한 게 얼마 만이더라.
밤쥐의 수장이라고 하면 누구든 사윤에게 흥미를 보였고, 사윤의 실력을 가늠하기 위해 탐색하는 시선을 던졌다. 길드 활동을 위해 외출하면 으레 겪는 일이었지만 사윤은 개의치 않았다. 그런 놈들은 보통 살기 몇 번 쏘아 보내면 꼬리 말고 조용해졌으니까.
그러나 이재희는 달랐다. 자신이 C급이 되어 위협의 효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배제하고서도 그는 살기가 통하지 않는 미친놈이었다. 제 눈으로 똑똑히 봤지 않은가. 그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고 천둥이 칠 때조차 환히 웃었다. 신념 하나를 위해 수명까지 바쳐 스킬을 쓰는 녀석이었다. 그런 놈이 살기 좀 보낸다고 주눅 들 것 같진 않았다. 즉 이재희는 자신이 S급인 상태 그대로 있었다 해도 지금처럼 관찰해 댈 녀석이었다.
어디서 이런 놈이 나타난 건지. 종식이 알면 또 기겁할 게 눈에 선했다. 이런 미친놈인 줄은 몰랐다고 길길이 날뛰겠지. 아마 경진은 어디서 미친놈들만 주워 오는 거냐고 이죽댈 거였고 옌은 신기한 놈이 왔다며 재밌어할 터였다.
그러고 보니 옌과 죽이 잘 맞을 것 같긴 한데.
위협 속에서도 싱긋 웃는 꼴이 옌과 꽤 비슷하다고 생각한 사윤은 위협을 느껴 꺼낸 단도를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하급 포션 하나를 재희에게 던졌다. S급이라 저 정도 상처는 금방 낫겠지만 그렇다고 계속 피를 흘리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미관상 좋지 않은 건 둘째 치고 침대 시트에 묻으면 종식이 화를 내었다. 과로에 시달려 예민해진 종식의 화는 아무리 사윤이라고 해도 달갑지 않았다.
달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으니까.
“그래서, 앞으로 뭘 할 생각인데?”
“저한테 묻는 말입니까?”
“그럼 여기에 너 말고 누가 있는데.”
“음.”
하급 포션을 로션처럼 손에 묻혀 목에 펴 바르던 남자가 사윤과 시선을 맞추곤 피식 웃었다.
“사윤 씨 편한 대로 하죠.”
“뭐?”
“사윤 씨랑 함께 다니기로 했으니까 사윤 씨한테 맞춰 움직이겠습니다. 안 되나요?”
“넌 일정 같은 것도 없냐.”
“그런 게 있었다면 사윤 씨를 따라오지 않았겠죠.”
듣다 보니 맞는 말이었다. 어쩐지 너무 순순히 따라오더라니 설마 무계획으로 움직이고 있을 줄이야. 생긴 것과 반대로 노는 녀석이다. 얼굴만 봐선 초 단위로 계획을 세우고 다닐 것처럼 고지식하고 단정하게 생겼는데 실제 성격은 제법 호쾌했고 즉흥적이었다.
“포항에서는 뻔질나게 게이트 들어가는 것 같더니 그 일은 끝났고?”
“언노운 때문에 들어가 본 거라서요. 몇 번을 들어가도 다시 나오지 않길래 다른 던전에 들어가 볼까 싶습니다.”
“그래?”
“네.”
“흠.”
이것 봐라.
그를 뒷조사했다는 티를 내면 조금이라도 움찔거릴 줄 알았는데 이재희는 그저 태연했다. 태연하다 못해 아주 여유로웠고 침착했다. 뒷조사를 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태도에 사윤은 헛웃음을 흘렸다. 누구랑은 아주 딴판이다. 제가 납치해서 데려온 녀석은 뒷조사했다는 걸 알아차리자마자 질겁했는데 말이다. 헌터 판에서 몇 년 더 굴러 본 사람은 다르다는 건가. 아니면 이재희가 특이한 걸까.
아마 둘 다겠지.
생각을 하다 말고 또 건주를 떠올렸다는 걸 자각한 사윤이 인상을 찌푸렸다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요컨대 게이트에 들어가야 한다는 거네.”
“필수적인 건 아니니 사윤 씨 편한 대로 하시죠.”
“그럼 가자고.”
“……?”
이재희의 얼굴 위로 의문이 떠올랐다. 수상쩍게 속내를 숨기거나 저를 탐색하는 것보단 저 맹한 얼굴이 훨씬 보기 편하다고 생각한 사윤이 주머니에 쑤셔 넣어 둔 자동차 차 키를 손에 쥐었다.
“뭘 그렇게 멀뚱히 있어? 게이트 가야 한다며.”
“지금 출발하겠다고요?”
“문제 있어?”
“으음….”
침음을 흘린 남자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사윤은 어둠이 깔린 창문 밖 풍경에 그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을 눈치챘다. 시간이 늦었고 피곤하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다음에 가자는 말이었다.
이걸 어쩔까.
장단을 맞춰 줄지 제 템포대로 움직일지 고민이었다. 동등한 관계라면 여기서 한발 물러나는 편이 맞을 거였다. 이재희는 제 일정대로 움직이겠다고 이미 한 번 양보했으니까.
아니, 그걸 양보로 봐야 옳은가?
머릿속이 잠시 소란스러웠다. 여러 번 고민하던 사윤은 이내 혀를 차고 이재희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렇게 보니 제법 빈약해 보이긴 했다. 하긴 소환사니까 근육 같은 게 없을 만도 하지. 사무직인 경진의 옆에 세워 놔도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았다.
“약하기는.”
“네?”
“됐다, 쉬어라.”
아무래도 소환사인 만큼 이재희는 체력이 약할 터였다. 하루 사이 일어난 일이 많았으니 쉴 시간이 필요할 거라 판단한 사윤은 그의 어깨를 밀었다. 등급 차이가 꽤 컸으니 마음만 먹으면 안 밀려날 수 있을 텐데 이재희는 순순히 밀려나 침대에 주저앉았다. 사윤은 얼이 빠진 그의 어깨를 한 번 토닥이고 걸음을 돌렸다.
“오늘은 거기서 자고 내일부턴 네 방 하나 만들어 줄 테니 거기서 지내.”
“사윤 씨는 안 주무십니까?”
“나야 내 방으로 가서 쉬어야지.”
사실 재희가 있는 곳이 제 방이긴 했지만 뭐 어떤가. 한 번 내준 침대 두 번이라고 못 내줄 건 없었다. 기껏 생긴 협력자인 만큼 넓은 아량을 베풀기로 한 사윤은 소환사라 연약한 이재희를 두고 방을 빠져나왔다. 등 뒤로 얼결에 C급의 걱정을 받은 S급이 황당하다는 시선을 던졌지만 안타깝게도 등급이 떨어진 사윤은 그 시선을 눈치챌 수 없었다.
“어, 종식아. 네 방 좀 비워 둬라.”
방을 빠져나오자마자 종식에게 전화를 건 사윤은 일방적인 통보를 내렸다. 늦은 시간까지 서류를 보느라 잔뜩 지쳐 있던 종식이 난데없는 명령에 당황했다.
-방이요? 형님 방 놔두고 왜 제 방을 비웁니까?
“네 방이 이 건물에서 두 번째로 좋잖아.”
첫 번째는 자신의 방이었는데 이재희에게 줘 버렸으니 아쉬운 대로 두 번째라도 차지해야 했다. 당당히 말하자 한숨을 내쉰 종식이 소파에서 잘 테니 들어오라 대답했다. 충직한 부하를 소파 밖으로 쫓아낼 만큼 인정이 없진 않아 그 선에서 타협한 사윤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려다 말고 시스템창을 불러왔다.
새로 뜬 팝업창은 없었다. 저항하는 자 활성화 퀘스트도 여전히 동결된 채다. 할 수만 있다면 시스템창을 양손으로 쥐고 동결 좀 풀라고 호통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흐름을 비트는 자를 만나고 그와 협력을 했는데 왜 동결을 안 풀어 준단 말인가.
처음부터 이재희를 만났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랬다면.
“꼴사납게 무슨.”
의미 없는 상정이다. 일어나지 않을 일을 생각해 봤자 뭐가 바뀌나 싶어 고개를 저은 사윤은 핸드폰을 매만지다 경진에게 연락을 넣었다. 한건주를 추적하는 일은 어떻게 됐느냐고 묻자 진전이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 새끼는 진짜 어디로 튄 거야?
설마 아직도 게이트에 들어가 있는 건가.
게이트에서 나왔다면 어떻게든 밤쥐의 추적에 걸렸을 것이다. 그만큼 밤쥐의 정보 팀이 한건주의 행방 수색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건 자신과 갈라섰을 때 들어간 게이트에 아직까지 머무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
대체 어떤 게이트길래.
공중에서 나타나는 게이트는 듣도 보도 못했다. 설마 S급 게이트에 홀로 들어가 콱 죽어 버린 건가? 문득 떠오른 불길한 생각에 사윤은 퀘스트창을 바라보았다. 퀘스트가 동결되었다는 게 한건주가 죽어서 동결된 거면 어쩌나 싶었다.
그럼 자신은 저항하는 자를 활성화할 방법도 잃고 한건주도 잃게 된다. 뒤통수 맞은 일을 복수할 기회도 잃고, 모든 걸 바로잡을 기회도 잃게 된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게 왜 도망을 쳐서는.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닌데 불길한 생각이 자꾸만 들어 머리를 헝클인 사윤이 건주의 얼굴을 떠올렸다.
시팔 그 까다로운 새끼.
한건주는 곁에 있으나 없으나 한결같이 까다로웠다. 아주 제 신경을 자극하는 것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수준이라 한숨을 내쉰 사윤이 눈을 감았다. 머리가 지글지글 끓는 느낌이다. 온몸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아 엘리베이터에 올라 차가운 벽면에 머리를 기대고 있으니 문득 어느 날 보았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노아.’
작은 소년의 이름을 부른 남자가 소년을 품에 안고 기쁜 듯 웃는다. 천진난만하기 짝이 없는 소년은 남자의 볼을 붙잡고 쭉 늘어트렸다가 꼬집기도 하며 장난을 쳤고 남자는 그 모든 행위를 기껍게 받아들이면서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편안하고 기분 좋은 광경이었다. 두 꼬맹이가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고 있는 그 장면을 침대에 앉아 지켜보고 있는 이가 있었다. 어떨 때는 코웃음을 치고 어떨 때는 헛웃음을 흘리기도 하면서 말이다.
자신이었다.
필드에서 있던 일이라 한순간 숨을 참았던 사윤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때 한건주와 노아를 보며 제가 무슨 감정을 느꼈더라.
아마도 즐거웠던 것 같다.
“…….”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려 현실을 마주한다. 보이는 거라곤 엘리베이터 벽밖에 없어 혼자임을 자각한 사윤이 팔짱을 낀 채 입술을 짓씹었다.
뭐? 게이트에 들어가서 죽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 한건주다. 겁도 없이 이무기한테 몸통 박치기를 하고 제게도 따박따박 대들며 몇 번의 몬스터 웨이브를 겪고 폭발적으로 성장한, 최종적으로 A급이 되어 제 곁을 떠난 그 한건주였다.
죽었을 리가 없다.
시팔 죽었기만 해 봐라.
죽어도 제 손에 죽어야지 몬스터 따위에게 죽어선 안 되는 놈이었다. 만일 헛짓거리를 하다 저세상으로 떠났다면 지옥에서도 편치 못하게 해 주리라 다짐한 사윤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곧바로 종식의 방으로 향하려는데 어디선가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목덜미를 훑고 가는 차가운 공기에 고개를 돌리자 복도에 난 창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윤은 홀린 듯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휘영청 떠오른 달은 꼭 필드에서 보았던 보름달과 똑같이 생겨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