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16/17)
  • 02.

    “벌써 2주째라고. 보통 심각한 게 아니라니까.”

    - 보통 안 심각하다니까요. 내가 매일 이블 이사님을 옆에서 모시는데 심각한지 아닌지 모르겠어?

    “매일이라 봤자 일주일에 4일, 많아야 5일이면서. 나야말로 이블 님과 체체 님을 매일 보는 사람이야.”

    - 대화는 내가 더 많이 할걸요. 아버지가 하는 대화는 뭐 식사하시겠냐, 후식 드시겠냐, 야식 드시겠냐. 이런 것밖에 없겠지. 나는 가끔 이사님이랑 센터의 향후 비전에 대해서도 얘기하거든요.

    “지금 누가 더 많이 대화하나 자랑하자는 게 아니다. 두 분이 2주째 싸우고 계신데 너는 자랑이 하고 싶냐.”

    힙스는 아직도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아들이 답답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2주 전에 이블과 체체가 다퉜고, 아직도 화해를 하지 않았다. 지금 이 사안보다 심각한 일이 세상에 존재할까? 이블과 체체가 세상에 특별한 의미를 지닌 상사라는 것을 떠나서, 그냥 옆집 청년들이라고 해도 그렇게 꿀 떨어지는 연인이 2주나 다퉜으면 걱정할 것이다.

    - 아니, 내가 자랑을 하는 게 아니라. 아버지가 너무 사서 걱정한다는 거죠.

    하지만 제임스도 아버지에게서 마냥 꾸지람 듣기에는 억울한 면이 있었다.

    - 회사에서 두 분이 얼마나 눈꼴시게 꼭 붙어 있는지 알아요? 분명 이블 님은 집무실로 들어가고, 체체 씨는 작업실로 들어가는 걸 확인했는데, 나중에 가 보면 어느샌가 집무실이든 작업실이든 둘이 꼭 끌어안고 연애질을 하고 있다니까. 이걸 싸운 거라고 할 수 있냐고요.

    “하지만….”

    - 저택에서 꽃놀이도 했다면서요. 이블 님이 흐드러지게 핀 매화 가지 위에 염력으로 체체 씨 앉혀 놓고 영상도 찍었다며. 체체 씨는 이블 님 머리 위에 매화꽃으로 화관 장식도 만들어 주고. 잘 웃지 않으시는 체체 씨가 꺄르르 웃었다고 아버지가 자랑했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 말씀해 보세요, 아버지. 이블 님이 전에 싸웠을 때처럼 체체 씨한테 직접 말 안 하고 전달해 달라고 했어요?

    “…아니.”

    - 그럼 단식 투쟁했어요?

    “오늘도 야식에 순후주스까지 챙겨 드셨다.”

    - 둘이 다른 방에서 주무세요?

    “이블 님의 방에서 함께 주무시지….”

    - 이거 봐요. 우리가 걱정할 일 아니라니까.

    힙스는 점점 아들에게 말려들었다. 그는 애써 두 분의 싸운 흔적을 되새겼다.

    “하지만 저택에 들어오실 때 체체 님이 두 발로 걸어오시더구나.”

    - 뭐요?

    “본래는 늘 이블 님에게 안겨서 왔단 말이다.”

    제임스는 잠깐 말이 없다가 다시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 그러니까 나는 지금 두 분이 싸우지 않았다고 말하는 건 아니에요. 싸우긴 싸웠는데, 우리가 신경 쓸 만큼 심각하게 싸우진 않았다는 거지.

    “2주나 되었는데?”

    - 2주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2개월은 싸우는 커플도 있는데요. 아버지랑 어머니는 2년간 헤어진 적도 있다면서요.

    “으음.”

    - 아버지, 나이도 들었는데 그만 신경 쓰시고 얼른 잠이나 주무세요. 저는 제트시티 주식장 열려서 들어가 봐야 해요.

    제임스가 해외 주식을 해야 한다며 전화 끊기를 종용했다. 결국 소득 없이 전화를 끊은 힙스가 침대에 누우며 골똘히 생각했다.

    이것, 참….

    싸운 건지, 싸웠다 화해한 건지, 화해했다가 또 싸운 건지.

    대화를 들어 보면(“나는 분명 안 된다고 했어.”, “저는 포기 못 합니다. 분명히 제가 튼튼하다는 걸 인정하시게 될 거예요.”, “그래. 누가 이기나 보자고.” 싸운 건 맞는데…. 그 대화를 서로 끌어안은 채 했던 걸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오랫동안 고민하던 힙스는 결국 아들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심각한 상황은 아닐 거라고.

    만약 두 사람이 섹스를 하지 않는 상태라는 걸 알았다면 당장에 전 저택 사용인들을 소집해 비상 회의를 열었겠지만, 욕탕에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이블이 축 늘어진 체체를 엄청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안고 나오니 그쪽으로는 전혀 상상하지 못하는 힙스였다.

    그 시각, 이블은 제품에서 새근새근 자는 뱁새 요정을 내려다보며 평생 부를 일 없다고 생각한 알시티 국가를 속으로 삼창 중이었다.

    삽입만 빼고 물고 빨고 만지고를 다해서 망정이지 모든 성행위를 금지당했다면 이블은 진즉 체체에게 백기를 들었을 터였다.

    이렇게 이쁘게 잘 자는 모습을 보면 귀엽고 사랑스러우면서도 원망이 들었다.

    ‘지금 남친은 욕구 불만으로 불면증이 생겼는데 잠이 와? 이게 뭐가 나를 위해서야. 미치겠네. 속눈썹 존나 길어. 오므린 입술 귀여워. 볼 말랑말랑 따끈따끈해.’

    이블의 꼿꼿이 선 성기가 체체의 배를 찔렀다. 끌어안고 잘 때마다 늘 이랬다. 체체는 처음엔 이블의 시도 때도 없는 발기를 의식하더니 이제는 익숙해져서 이렇게 잘만 잤다.

    이블은 혹시나 해서 손을 밑으로 가져가 체체의 성기를 만졌다.

    말랑거렸다.

    하아….

    이블이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체체가 모셔너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도 체력 차이가 컸겠지만….

    잘 자는 체체가 원망스러워 체체의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체체가 으응, 하며 더욱 품으로 파고들었다. 이블은 화들짝 놀라며 체체를 토닥이면서 다시 한번 국가를 완창했다.

    ***

    체체는 속으로 타르 국가를 불렀다. 타르가 아타스로 바뀌면서 국가도 바뀌었지만 체체의 국가는 여전히 이전 타르 국가였다.

    체체가 아침부터 국가를 완창한 이유는 하나였다. 오늘 센터에 막 도착했을 때 이블이 체체를 엘리베이터에 밀어 넣고는 말했다.

    “나 201층까지 계단으로 올라갈게.”

    “왜 엘리베이터 이용 안 하시고요?”

    “발정이 너무 심하게 나서 가라앉혀야겠어. 너 안고 올라가면 가라앉긴커녕 계단에서 널 덮칠 것 같아서 따로 가려는 거니까 얌전히 엘리베이터 타.”

    “…….”

    그 말 때문에 체체도 발정이 나 버렸다.

    삽입 섹스를 안 한 지 벌써 보름째다. 체체는 이블이 얼른 백기를 들기를 바랐다. 평생 참기만 한 사람이라 그런지(이 부분에서 세상 사람들은 반박하고 싶겠지만 체체가 보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체체의 예상보다 더욱 잘 견디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슬슬 이블의 인내심이 소진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싸움의 주제는 처음엔 ‘이블의 것을 끝까지 다 넣겠다’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내가 튼튼하다는 걸 인정해라’가 되었다. 체체는 끝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특히 잘 때마다 이블의 것이 딱딱하게 찔러 오는 걸 보면…. 아니, 그걸 ‘찌른다’고 표현해도 되는 걸까? 이블의 것은 뾰족하거나 날카롭지 않았다. 오히려 묵직하고 굵직한….

    “…….”

    체체가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손바닥으로 뺨을 몇 번 때려서 정신을 차리고 싶었으나 그러면 이블이 놀라서 벽을 뚫고 달려올지도 모르므로 그냥 마른세수만 했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10시 20분이었다. 출근 후 1시간 20분이나 이블 생각을 하면서 보낸 것이다.

    정신 차려야겠다는 생각에 일단 세공 장갑부터 꼈다. 뱁새 그림이 그려지지 않은 무난한 디자인의 장갑이었다. 뱁새 그림이 없는 도구를 찾느라 정말 힘들었다. 장갑은 왼손에만 끼고, 오른손으로는 노트북을 켜서 인터넷에 들어갔다.

    이번에 작업해야 하는 루젬의 의뢰처는 국제 평화 문화 협회로, 주제는 휴머니즘. 인간애, 인류애였다.

    같은 주제로 매년 열린다고 해서 체체는 역대 전시회 출품작들을 알아보기로 했다.

    모든 예술 작품이 실물로 보는 것과 영상이나 이미지로 보는 것에 큰 차이가 있지만, 루젬은 큰 차이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다른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할 만큼 달랐다. 루젬에는 감정을 건드리는 소울 오러가 담기고, 오러는 디지털상으로는 전달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체체도 그 사실을 알지만 일단은 자료조사 차원에서 어떤 종류의 루젬이 나왔나 살펴봤다.

    주제가 주제라서인지 사람이 많이 등장했다. 사람들. 가족, 연인, 친구. 도시 속의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공원에서 한가롭게 책을 보는 사람들.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엉엉 우는 아기와 쩔쩔매는 어린 부부에게 노부부가 다가와 능숙하게 아기를 달래는 모습이 담겨 있기도 했고, 지친 퇴근길에 잠깐 멈춰 서서 노을 지는 자줏빛 하늘을 바라보는 직장인의 모습이 담겨 있기도 했다.

    일상에서의 사소한 휴머니즘이 아니라 웅장하고 거룩한 일화를 담아 놓은 루젬도 많았다. 전쟁 중에 종자를 적군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센터를 지키다가 식량이 다 떨어졌는데도 그곳에 있던 종자를 단 하나도 먹지 않고 아사한 과학자들의 얘기 같은.

    잠시 손을 놓고는 따뜻하고, 감동적이고, 평화롭고, 인류애 넘치는 일화를 생각해 봤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야기들이 하나도 없었다.

    어느 로봇이 마을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 주고 영원히 작동을 멈추는 것 정도가 체체가 생각하는 평화로울 법한’ 이야기였다.

    그게 아니라면….

    사람들이 모조리 떠나 버린 황량하고 황폐한 마을에서 다시 눈을 뜨는 로봇이라든가.

    그런 게 정말 아름답고 따뜻하고 인류애 넘치는 이야기 같았다.

    체체는 자신의 개념이 보편적인 개념과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으므로 일화를 담기보다는 역시 사람을 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이블 엔덤.

    처음 주제를 들었을 때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이블을 담는다고 생각하자 좌르륵 펼쳐졌다.

    일상 속의 사소한 휴머니즘이라면 오늘 아침 이블이 체체의 밥그릇에 고기를 세 점 연달아 놓아 준 게 생각났고.

    장엄하고 거룩한 휴머니즘이라면 새카만 재가 가득한 하늘, 뜨거운 용암이 흐르는 검은 땅. 그 위에 서 있는 어린 소년이 떠올랐다.

    상상하고 나자 이블을 담고 싶은 마음이 선명해졌다.

    체체는 고민에 빠졌다.

    현재 이블과는 나름대로… 싸운 상태다. 그래서 만약 ‘이블 님을 루젬에 넣어도 되나요?’ 물어본다면 이블은 싫어도 그러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런 것에서마저 마찰을 빚기는 싫을 테니까.

    그런 건 싫었다.

    지금도 체체는 이블에게 자기주장을 강요하고 있는 셈이었기 때문에…. 이블의 자유를 위해 이블의 자유를 억압하는 상황에서 그에게 부담을 더하고 싶지 않았다.

    체체는 이블이 아닌 다른 사람을 떠올렸다.

    존 게일은 어떨까?

    그는 지금도 분쟁 지역에서 전쟁 피해자들을 돕고 있다. 얼마 전에는 큰 부상을 입었다가 겨우 회복했다고 들었다. 모셔너라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만약 특정 사람을 루젬에 담는다고 하면 이블이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 체체는 공공 의뢰를 하면서 특정인을 루젬에 담은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체체 또한 이블이 자신의 처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역시 이블 님을 담고 싶어.’

    한번 마음을 품으니 욕심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블에게 말해 볼까, 고민하는 그때였다. 방음이 튼튼하게 되어 있음에도 복도가 쿵쿵쿵쿵 울리더니 벌컥 문이 열렸다.

    “체체!”

    체체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그가 신이 난 표정으로 체체를 불렀다.

    “뭐 하고 있었어? 귀엽다. 일했어?”

    “네. 이블 님. 무슨 일이세요?”

    “얼른 일루 와 봐. 내 집무실에 보여 줄 거 있어. 빨리, 빨리.”

    체체가 장갑을 벗고 일어났다. 그 움직임이 너무 느긋했는지 이블이 넓은 보폭으로 다가와 체체를 안아 들었다.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 체체는 아무렇지 않게 이블의 목에 팔을 감고 단단한 팔뚝에 엉덩이를 비비며 편한 자세를 취했다.

    “뭔데 그러세요?”

    “하, 완전 미쳤어. 너도 보면 놀랄걸. 장난 아니야.”

    이블이 호들갑을 떨면서 빠르게 집무실로 이동했다.

    집무실 문은 열려 있었고, 아무도, 아무것도 없었다. 평상시와 같은 집무실이었다. 이블이 체체를 안아 든 채 난초 앞으로 걸었다.

    이제는 가끔 제임스가 쉬는 날이면 체체와 이블이 잎사귀의 먼지를 닦아 주고는 하는 그 난초.

    체체는 기다란 잎새 사이에 조그맣게 피어 있는 하얀 꽃을 발견했다.

    “지도 봄이 오는 걸 알고 또 피었어. 존나 기특하고 이쁘지 않냐. 꽃향기도 엄청 좋아. 옆에 서 봐. 사진 찍어 줄게.”

    이블이 무척 신나는 말투도 재잘대더니 체체를 난초 옆에 내려놨다. 이블은 입꼬리가 귀에 걸린 채로 웃고 있었다. 찰칵, 찰칵 쏟아지는 셔터음을 들으며 체체는 처음 이 꽃을 봤을 때를 떠올렸다.

    작업실에서 일하고 있는데 이블이 당장 집무실로 오라고 전화를 해 왔다. 그래서 갔더니 그는 온갖 거드름을 피우고는 작고 하얀 꽃을 보여 줬다. 초록색 긴 이파리들 속에 숨어 피어 있던 그 꽃은 정말 예뻤지만, 체체가 보기에는 이블의 소년 같은 천진난만한 미소가 더 예뻤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눈부신 얼굴이었다.

    그리고 작년보다 올해가 더 눈부셨다.

    아마 올해보다 내년이 더 예쁘겠지.

    이런 게 아름다운 이야기다.

    이런 게 체체가 생각하는 ‘휴머니즘’이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빠르게 뛰는 심장과는 달리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체체의 박동을 느낀 이블이 의아한 얼굴로 핸드폰을 내리고 체체를 바라봤다. 체체는 충동적으로 말했다.

    “이블 님을 세공하고 싶어요.”

    ***

    체체는 저택 정원의 루젬 작업실에서 멍하니 가공 전의 원석을 바라봤다.

    평화로워야 할 주말 오전이지만 마음이 심란하기만 했다. 곁에 이블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갑작스러운 재난 사고로 파견 요청을 받고 두 시간 거리의 도시에 가 있었다. 해 뜰 때쯤 긴급 연락을 받고 떠났으니 빨리 끝난다면 점심 식사는 같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블이 이렇게 급히 파견 나갈 때면 저택에 혼자 남은 체체는 늘 루젬 작업실로 향했다. 가만히 있으면 인터넷 뉴스나 새로고침 하면서 안 좋은 쪽으로 빠지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체체는 어지러운 걱정들을 떨쳐 내기 위해 작업실로 도망쳤다.

    그러나 다른 때와는 다르게 작업해야 할 주제가 바로 이블이기에 이번엔 떨쳐 내기가 쉽지 않았다.

    ‘이블 님을 세공하고 싶어요.’

    어제 그렇게 말했을 때 이블은 가장 먼저… 환히 웃었다.

    체체는 언제나 생각했다. 이블은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아마도 이블 또한 체체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만….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이블 님은 이렇게 행동하실 거야.

    그 예측의 성공률은 70%에 불과했다.

    이번에도 체체의 예측은 실패했다.

    체체가 만들 루젬은 클라이언트인 국제 평화 문화 협회에 귀속된다. 불특정 다수 앞에 공개적으로 전시될 것이며 그 기한도 협회가 정한다. 보석의 내구력이 다할 때까지 전시될지도 몰랐다.

    당연히 이블이 싫어할 거라고 생각했다. 체체는 이블을 사랑하고, 체체의 감정이 담긴 이블의 모습이 루젬에 담긴다는 건 남들 앞에 이블의 내밀한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과 같았다. 거절하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장 거절하면 실망할까 봐 머뭇거리다가 결국 어쩔 수 없이 수락하지 않을까, 하고.

    그러나 이블의 반응은 예상과는 달랐다.

    ‘하, 드디어!’

    이블은 환호하면서 체체를 와락 끌어안았다.

    ‘언젠간 이런 날이 올 거라 생각했지. 세공사들은 다 자기 루젬에 연인을 담고 싶어 한다더라고! 내 뱁새가 언제 말해 오려나 기다리고 있었어.’

    ‘저 뱁새 아닙니다.’

    ‘내 튼튼한 남자 친구가 언제 말해 오려나 목 빠지게 기다렸단 말이야!’

    이블이 체체를 안아 들고 빙글빙글 돌았다. 그렇게 좋아할 줄은 몰라서 체체는 조금 얼떨떨했다.

    루젬 세공사 체체의 뮤즈가 되고 싶다는 꿈을 이룬 이블은 어제 내내 기분이 좋았다. 저택에 돌아와서도 헤벌쭉 웃고 다닌 탓에 힙스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체체에게 넌지시 물어 오기도 했다.

    ‘이제 그 길고 긴 애정 싸움은 끝난 겁니까?’

    ‘아뇨. 진행 중이에요.’

    ‘정말 모르겠군요….’

    힙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둘을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아무튼 체체는 이블이 루젬의 주제가 되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해 준 덕에 마음이 편했다. 고마운 마음도 있어서 어제는 잠깐 이블의 유혹에 패배할 뻔했다. 허리께를 지분거리는 이블의 손가락을 꼭 붙잡으며 ‘끝까지 다 넣을 거 아니면 그냥 얌전히 주무세요.’라고 말하기까지 조금 힘들었다.

    사실 체체로서도 이 갈등이 보름이나 가리라는 건 예상하지 못했다.

    이블이 워낙 성욕이 넘치고 정력적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이블의 참을성도 한계에 다다랐겠지만 체체도 슬슬 한계였기에… 빠른 시일 내에 삽입 섹스를 해야 한다.

    특히 오늘처럼 이블이 갑작스러운 재난으로 장시간 자리를 비웠다가 만나는 날은 절대로 손만 붙잡고 잘 수는 없다….

    ‘점심에는 오시겠지.’

    체체는 이블을 생각하며 엔드스틱을 쥐었다. 루젬에 어떤 이블의 모습을 새길지는 이미 정했다. 모든 의뢰에 최선을 다해야 마땅하고, 지금까지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고 여겼는데, 이블을 담는다고 생각하니까 평소보다 더욱 공들여 원석 가공을 하게 되었다.

    지잉, 지잉.

    체체는 핸드폰 진동에 흠칫 놀라며 고글을 벗었다. 핸드폰 화면에 이블의 이름이 떠 있었다. 시간은 12시 정각이었다. 세공에 집중하니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이블 님.”

    - 어, 체체. 밥 먹고 있어?

    “아니요. 이블 님은요?”

    - 씨발, 왜 밥 안 먹고 있어? 저택 새끼들이 밥 안 줘?

    “이블 님이랑 같이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 나 아직 못 가게 됐어. 얼른 밥 달라고 해. 아니, 내가 힙스한테 전화할게.

    이블이 툭 전화를 끊었다. 이 말은 재난 사고 수습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는 뜻이었다. 체체는 조금 실망했고, 더 걱정스러워졌다.

    잠시 기다리니 노크 소리가 들렸다. 힙스와 사용인들이 침울한 얼굴로 식사를 작업대에 세팅하고는 맛있게 드시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이번엔 체체가 이블에게 전화를 걸었다.

    - 응. 힙스 왔어?

    “차려 주고 가셨습니다. 이블 님은 식사하셨어요?”

    - 이제 먹으려고. 같이 먹을래?

    “네.”

    - 야! 나 밥 줘! 체체, 영상 통화 할게.

    “네.”

    이블과 체체는 작은 화면을 공유하며 함께 점심 식사를 했다.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엔덤 가문의 막내이자 현존 유일 SSS급 멀티 유저, 모두가 오만하고 독선적이라고 말하는 이블의 점심 식사는 재가 묻은 샌드위치였다. 이블은 본인이 먹고 있는 맛없는 샌드위치가 체체의 감수성을 자극한다는 걸 잘 알았다.

    - 이것 봐. 나 이렇게 말라비틀어진 샌드위치 먹어. 아침밥도 안 줬으면서 이걸 처먹으라고 줬어. 양상추 시든 거 보이지? 나 너무 배고프고 힘들어. 맛대가리도 없어서 더 짜증 나.

    “아침밥도 안 줬나요? 집사님이 도시락 싸 주시지 않았나요?”

    - 기껏해야 3단밖에 안 되는 도시락은 비행기 안에서 이미 다 먹었지. 입가심거리도 안 돼. 체체, 나 너무 피곤하고 지쳤어….

    “오시면 제가 씻겨 드릴게요.”

    - 응. 그리고?

    “저녁밥도 먹여 드리겠습니다.”

    - 응응. 그리고?

    “…….”

    - …….

    이블이 ‘또’를 원하는 눈빛으로 체체를 바라봤다.

    “전부 넣으실 거면 해요.”

    - 하아아아아….

    이블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 진짜 독하고 튼튼한 뱁새야. 사람이 피곤하고 지쳤다는 데도 그러냐. 계속 그러면 내 루젬 취소할 거야.

    “이미 작업 들어가서 취소 안 됩니다.”

    - 내 거 작업 들어갔어? 보여 줘!

    체체가 핸드폰을 돌려 세공 중이던 원석을 비추었다.

    - 밝은 하늘색이네? 그게 나랑 어울리나?

    “실제로 보면 다른 색상입니다. 그리고 이블 님은 안 어울리는 색상이 없으세요.”

    - 그렇긴 해. 그런데 너 나 나오자마자 작업실 들어갔지? 보나 마나 뻔하지. 내가 다시 자라고 했잖아. 언제쯤 말 들을래? 설마 지금까지 계속 앉아만 있었던 거야? 너는 약…. 튼튼하지만 약해서 중간중간 스트레칭해 줘야 돼. 너무너무 사랑하는 나를 최대한 공들여 표현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오러 담느라 건강 해치면 강제 휴직시킬 거니까 밥 다 먹으면 엔드스틱 내려놓고 정원 산책해! 힙스한테 확인할 거야!

    “네. 언제쯤 끝나세요?”

    - 저녁 전에는 들어갈 거야. 여기 일 다 안 끝나도 그냥 가기로 했어. 저녁은 같이 먹자.

    “네. 조심하세요.”

    - 응. 꼭 산책하고. 50분 앉아 있고 10분 스트레칭하고, 간식도 챙겨 먹어.

    “네.”

    - 중간중간 사진이랑 영상도 찍어서 줘. 처음으로 나 담는 거니까 과정을 남겨야 해.

    “네.”

    이블은 먹는 내내 잔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체체는 어느샌가 웃고 있었다.

    통화를 마친 후 체체는 저택으로 돌아가 카메라를 가지고 돌아왔다. 일단 기록해 놓으면 나중에 즐겁게 되새길 추억이 된다는 걸 체체도 알았다. 게다가 이블 성격에…. 지금 안달이 났을 거다.

    처음으로 자기를 루젬에 담는데 직접 구경하지 못해서 얼마나 짜증 나고 화나고 억울할까.

    이블은 재난 현장에 가지 않고 작업하는 체체 옆에서 신나게 구경할 수도 있었다. 그래도 이블에게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좋은 구경을 놓치는 걸 감수하고 그곳에 갔다.

    체체는 삼각대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자신이 작업하는 모습이 모두 들어오게 담았다.

    이블이 하는 말은 최대한 지키고 싶지만 50분 작업, 10분 휴식은 들어주지 못할 것 같았다.

    체체의 가슴 속에 이 루젬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

    정신없이 세공하던 체체는 바깥이 시끄러워졌음을 알고 작업을 멈췄다. 이블이 온 모양이다.

    본래 돌아오기 한 시간 전부터 ‘나 이제 출발해. 너무 피곤해. 속 메스꺼워. 가면 안아 줘. 칭찬 100개 준비해 놔. 쓰다듬고 많이 칭찬해 줘.’와 같이 유난을 떠는 이블이지만 가끔 이렇게 체체가 한창 작업에 집중하고 있을 것 같으면 귀신같이 알고 연락 없이 돌아오고는 했다.

    체체는 빠르게 고글을 벗고 엔드스틱과 장갑을 내던지듯 내려놨다. 작업실 문을 열자마자 마침 이쪽으로 오고 있는 이블과 마주쳤다.

    “이블 님.”

    “체체. 잘 있었어?”

    이블이 체체의 이름을 부르며 팔을 뻗었다. 체체는 이블에게 안길 준비를 했다.

    “…….”

    문득 이블이 그 자세로 가만히 멈췄다.

    “……?”

    체체가 고개를 갸웃하며 이블을 올려다봤다. 이미 이블의 목에 팔을 감기 위해 손을 살포시 어깨에 올려놓은 상태였다. 이블이 부들부들 떨었다.

    “씨발, 이게 말이 돼? 미쳤어….”

    체체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이블이 무슨 말을 하는지 나름대로 추측했다.

    “제가 존나 귀여우신가요?”

    “하…. 응. 너무 귀여워.”

    이블이 거의 오열하듯 말하며 체체를 품에 안았다.

    체체는 이블의 품 안에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찬 공기와 더불어 매캐한 냄새가 났다. 재난 현장에 다녀올 때마다 대부분 이런 냄새를 묻히고 돌아왔다. 이 냄새를 맡을 때마다 체체는 속이 상했다.

    “체체…. 있잖아.”

    이블 또한 체체의 체향을 맡으려는 듯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서는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 할래?”

    “끝까지 넣으실 거면요.”

    “나 너무 피곤하고 힘들어….”

    “참지 않고 끝까지 넣으실 거면 하고 안 그러면 좀 더 참으세요.”

    “그 말이 너무 모순적이란 생각 안 들어?”

    “들어요.”

    “다시 얘기할 기회를 줄게.”

    “끝까지 넣으시겠….”

    체체는 문장을 맺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대신 이블의 단단한 팔을 툭툭 두드리자 이블이 틈을 벌려 줬다. 상체만 살짝 떨어져서 얼굴을 마주 보니 이블의 얼굴은 기대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체체는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특히 이런 힘든 일을 하고 들어왔을 때는 그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끝나면 영원히 이블 안에서 자신은 ‘작고 약한 뱁새 요정’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이제 끝까지 넣느냐 안 넣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인식을 바꾸는 게 우선이었다.

    “이블 님.”

    “응.”

    “…….”

    마음으로는 이미 답을 정했으면서도 얼굴을 보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잠시간 서로의 눈을 보며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그들 주위는 평화로운 고요로 가득 찼으나 그들 뒤쪽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저기, 집사님. 어차피 우리 존재도 잊고 계신데 이만 빠지죠.’

    ‘조금만 더 보겠네. 이제야 장기간의 싸움이 끝날 타이밍인데 놓칠 수 없어.’

    ‘미쳤어요? 분명 나중에 우릴 다 해고해 버릴 거라고요.’

    ‘이 기나긴 전쟁의 마지막을 직접 볼 수만 있다면….’

    ‘안 그러던 분이 왜 이러실까. 여러분, 다 같이 끌어냅시다.’

    수행원들이 힙스를 끌고 가고 나서야 이제 정말로 고요해졌다. 이블과 체체도 그 소란을 알았으나 상관하지 않았다.

    감정을 실은 소울 오러가 전달되는 느낌은 특별했다. 아주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물결이 조심스럽게 감정을 건드려 오는 기분. 가끔은 거센 파도처럼 온몸을 흠뻑 젖게 하고, 가끔은 봄볕 아래 내리는 이슬비처럼 설렘을 느끼게 한다. 체체는 이블과 소울 오러를 주고받을 때마다 말로 표현하지 못할 충만한 희열이 차올랐다. 그리고 이블 역시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블이 체체의 턱을 부드럽게 붙잡아 들었다.

    “너는 약하지 않아. 네가 튼튼한 사람이라는 것쯤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어.”

    “…….”

    “이렇게 감정 섞는 것도 존나 쾌감 미칠 것 같긴 한데 역시 몸도 섞고 싶어. 네 안에 넣지 않고는 못 참겠어.”

    “…….”

    “하자.”

    끝까지 넣겠다는 소리였다. 체체가 너무 반가운 나머지 정색하고 급하게 대답했다.

    “당장 씻으러 가죠.”

    “욕망 체체야. 잠깐 기다려.”

    이블이 웃으며 체체의 얼굴을 감싸고 이마를 맞댔다. 키 차이가 많이 나서 상체를 꽤 숙여야 했다.

    “오늘은 말고 나중에 하자. 나도 마음의 준비를 좀 해야 해.”

    “…….”

    “며칠만 시간을 주면 빨리 다잡을게.”

    달래듯이 키스하자 체체의 작은 입술이 미소를 그렸다.

    “알겠어요. 그리고… 감사합니다, 이블 님.”

    “고맙단 인사 하지 마. 솔직히 내가 더 고마워해야 하는 일인데 기분 이상하네.”

    이블이 그답지 않게 민망해했고 체체는 이번엔 소리 내서 웃었다. 둘은 다시 서로를 한 치의 틈도 없이 끌어안았다.

    ***

    일요일 아침. 체체는 가슴 위에 올려진 이블의 묵직한 팔을 두 손으로 붙잡아 올리고, 하체를 옭아매고 있는 이블의 다리를 힘겹게 빼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간밤에 이상한 꿈을 꿨다.

    황량한 숲에 이블이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두 손을 배에 얌전히 포갠 채 잠든 모습을 보고 체체는 이것이 꿈임을 알았다. 깨울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키스하자는 생각에 입을 맞추니 이블이 반짝 눈을 떴다. 이블은 새빨간 눈으로 ‘날 구하러 온 거야?’라고 물었다. 체체는 그에게 되물었다. ‘제가 당신을 구했나요?’ 이블은 대답했다. ‘응. 네가 날 구했어.’

    그러곤 잠에서 깼다. 잠시 꿈을 되새기던 체체는 이블에게 한 번 더 키스했다.

    “으음….”

    이블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가 좋은 꿈을 꾸고 있다면 좋겠다.

    체체는 사랑하는 사람이 편히 자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키스도 하고 싶었고 세공도 하고 싶어졌다. 키스를 더 하면 그가 잠에서 깰 것 같고. 세공은…. 토요일에도 작업해 놓고 일요일에도 일하면 이블이 싫어할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얼른 세공을 완성해 자신의 시선에서의 이블의 모습을 모두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결국 체체가 슬금슬금 몸을 일으키자 옆에서 쓰읍, 하는 소리와 함께 굵직한 팔이 체체를 다시 눕혔다. 이블이 꿈에서와 같은 붉은 눈으로 체체에게 가볍게 키스하고는 짐짓 위협하는 말투로 물었다.

    “꾸물꾸물 뭐하나 가만뒀더니 감히 일하러 가려고 했어?”

    “조금만 하겠습니다.”

    “조금만 얼마나?”

    “세 시간만요.”

    “이 대범한 뱁…. 남자 보게. 3분도 허락 안 해 줄 판인데 세 시간을 부른단 말이야?”

    “두 시간 삼십 분만요.”

    “너 내가 아주 우습지?”

    “두 시간만 할게요.”

    이블이 피식 웃고는 체체를 끌어안고 뽀뽀를 퍼부었다.

    결국 체체는 오전 중 한 시간의 작업을 허락받았다. 당연히 이블도 희희낙락 작업실에 따라와서는 체체에게 고글과 장갑, 엔드스틱을 골라 줬다.

    “장갑은 이거, 엔드스틱은 이 주황색. 움직일 때 잔상이 남아서 이쁘더라. 고글은 아 씨, 이 하늘색 렌즈 존나 귀엽겠다.”

    “이블 님, 고글만 착용할게요. 골라 주신 장갑은 표면이 까칠한 원석을 세공할 때 착용하는 용도고, 엔드스틱은 환상술 주입 단계에서 필요합니다.”

    “정말이야? 그냥 보송보송한 연분홍 장갑과 요정 날개가 달린 엔드스틱이 싫은 게 아니고?”

    “…….”

    이블도 루젬 세공사의 연인으로서 고글, 장갑, 엔드스틱이 원석 종류와 세공 단계에 따라 다양하게 나뉜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냥 요즘 자기는 군인 출신 튼튼한 남자라는 걸 강조하는 체체를 놀리기 위해서 물었는데 체체가 입술을 오므리고 대답하지 않았다.

    정말 엄청나게 귀여웠던 나머지 이블은 또 체체를 끌어안고 한참 동안 키스를 퍼부은 후에 놔주었다.

    “나는 고글 뭐 할까? 골라 줘.”

    “잠시만요.”

    체체가 수납장 앞에서 고민하더니 반투명한 보라색 고글을 꺼냈다.

    이블은 처음 체체가 파편이 튈 수도 있으니 고글을 착용하라며 내밀었을 때는 당황했다.

    얘는 내가 파편을 끌어모아서 눈에 들이부어도 안 다친다는 걸 모르나?

    그러나 지금은 당당하게 고글을 골라 달라고 하고 있었다.

    “앞치마도.”

    “네.”

    체체가 이블 사이즈의 앞치마를 골라 와 직접 허리끈을 묶었다. 이블은 그동안 가만히 있지 않고 체체의 보드라운 은색 머리칼에 코를 박고 키스를 해 댔다.

    잠시 후 체체가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하고 작업을 시작했다.

    오늘은 이블이 기대하는 본격적인 환상술 주입은 없으나 이블은 전용 안락의자에 앉아 더없이 흥미로운 시선으로 체체를 구경했다.

    원석을 장비에 고정해 살살 돌려 가면서 깎는 모습이 아주 능숙했다.

    ‘이걸 루젬이라고 부르나요?’

    원석과 루젬, 홀리아젬을 구분하지도 못하고 그렇게 묻던 난민은 이제 수백 개의 원석 쇼케이스를 가진 루젬 세공사가 되었다.

    체체가 만든 홀리아젬은 아무리 예술 작품이 취향을 탄다지만 도저히 ‘퀄리티가 낮다’라는 표현은 할 수 없었으므로, 일부 사람들은 ‘장비발이다’라고 뭉개거나 ‘체체는 이름만 붙인 거고 실제 세공사는 따로 있다더라’ 등의 루머를 퍼뜨리고는 했다. 그러나 그것도 체체가 세공 과정을 실시간 영상으로 공개하면서 사라졌다.

    영상에서 체체는 엔드스틱을 단 한 가지만 사용했다. 보통 프로 세공사는 하나의 홀리아젬을 완성하는데 엔드스틱을 열 개 이상 사용했고, 시중에서 취미용으로 저렴하게 판매하는 루젬 세공 세트에도 세 개가 들어 있다. 그런데 체체는 원석 세공용 엔드스틱 하나로 홀리아젬을 완성하는 과정을 실시간 스트리밍한 것이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실력이었다.

    물론 체체도 처음부터 잘한 것은 아니라 첫 작은 어설픈 면도 있었다. 한때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기도 했고. 그러나 현재는 젊은 세공사 중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닌 세공사를 말하라고 하면 누구나가 첫 번째로 꼽을 세공사로 성장했다.

    그런 체체가 공공 의뢰만 받는 것에 우려를 표하는 이들이 많았다. 루젬 업계는 작품의 공개 범위가 좁고 한정적일수록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업계였기에, 체체의 세공사로서의 미래를 위해서는 이제부터라도 공공 의뢰를 줄이고 개인 의뢰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평론가도 있었다.

    그 평론가는 세공사 체체의 팬이라서 목숨을 걸고 그런 글을 쓴 것이다.

    왜냐하면 이블 엔덤이 체체의 개인 의뢰를 금지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이블도 그 평론을 읽었다. 그러나 이블은 여전히, 그리고 영원히 체체의 작품을 어떤 개인이 소유하게 할 마음이 없었다. 이게 체체의 세공사로서의 창창한 미래를 짓밟는 일이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어차피 체체가 원하는 건 세공사로서의 창창한 미래가 아니라 이블의 옆에 있어도 된다는 자격이라는 걸 저번에 싸웠을 때 확인했다. 지금은 오히려 이블이 체체의 곁에 있어도 되는 자격을 얻기 위해 현대판 12 과업이라도 해야 할 판이라 체체의 명성은 딱 이 정도가 좋았다.

    “한 시간 끝났어.”

    시계 한 번 안 보고 체체만 쳐다보고 있던 이블이 갑자기 엔드스틱을 빼앗아 갔다. 체체는 부질없는 걸 알면서 시간을 확인했는데 정말 딱 한 시간 하고도 3초가 지나고 있었다.

    체체는 고글을 벗고는 풍성한 속눈썹과 커다란 금색 눈을 깜박이며 이블을 올려다봤다.

    “조금만 더 하면 안 될까요?”

    “조금만 얼마나?”

    “세 시간만 더 하겠습니다.”

    “너 진짜. 아까 내가 힌트 줬잖아. 이럴 때는 ‘3분만요’ 하고서 3분 지날 때마다 늘려 나가야지.”

    “3분만 하겠습니다.”

    “양심 없는 체체.”

    이블은 양심 없는 뱁새에게서 장갑과 고글까지 벗겨 냈다. 그래도 체체는 의자에서 일어날 생각을 안 했다. 대개는 이블이 그만하라면 깔끔하게 놓는 편이지만 가끔 이렇게 창작 열정이 넘칠 때는 꾸물거릴 때가 있었다. 그리고 이럴 때 이블이 취하는 대처법도 정해져 있었다.

    “내가 오랜만에 떼를 써 줘야겠어?”

    이블이 작업대 위에 걸터앉았다.

    체체는 저번에 이블이 이제 그만 작업하고 자기랑 놀아 달라고 작업대에 드러누워 생떼를 부렸던 걸 기억했다.

    “…….”

    체체는 입이 조금 튀어나왔지만 더는 고집 부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블이 얼른 내려와 심통 난 연인을 품에 안아 들었다. 체체가 이블의 어깨에 손을 살포시 얹고 미련 가득한 눈길로 작업대 위를 바라봤다. 잔인한 폭군 이블 데빌은 주저 없이 작업실을 나와 오러로 문을 닫아 버렸다. 이제 여름이 오려는지 따뜻한 햇살이 둘의 머리 위로 내려왔다.

    “네가 존나 귀엽더라도 초과 근무는 양보 못 해.”

    “왜요? 제가 귀엽고 작고 약한 뱁새 요정이라서요?”

    “무슨 소리야. 네가 뱁새인 거랑 초과 근무랑은 상관없어. 나는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말하는 거야. 그리고 누가 너보고 약하대. 그런 말 한 사람 있으면 나한테 일러. 아주 혼을 내 줄 테니까.”

    “이블 님이요.”

    “봐주자. 애인이잖아.”

    “네.”

    “우리 쇼핑몰 갈래?”

    갑작스러운 말에 체체가 이블을 쳐다봤다.

    이블이 짧게 웃었다.

    “내가 쭉 보니까… 여기도 뱁새 그림, 저기도 뱁새 그림. 뱁새 천지인데 네가 그 많은 것 중에서 뱁새 아닌 거 힘겹게 찾아서 쓰더라고. 뭔가 가슴이 찌릿찌릿하더라. 이런 감정을 뭐라고 해야 하나. 나한텐 양심이 없으니 양심이 찔린 것도 아닐 텐데 말이야. 그래서 너랑 루젬 쇼핑몰에 가야겠다는 결정을 내렸지.”

    “이블 님이 왜 양심이 없으세요. 분명 있습니다.”

    체체가 조금 발끈해서 말했다. 이블은 이번엔 오래 웃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그럼요. 이블 님은 양심 있으세요. 악마도 아닙니다. 누가 이블 님에게 악마라고 하면 저한테 이르세요.”

    “네가 아주 혼을 내 주게?”

    “네.”

    “든든한 뱁…. 남자네.”

    “뱁새라고 하셔도 돼요.”

    “뭐? 그렇게 질겁을 하더니 웬 심경의 변화야.”

    “이제 끝까지 넣어 주시기로 했으니까 괜찮습니다.”

    이블은 기가 막혀서 잠깐 말문이 막혔다. 잠시 후 체체의 작은 코에 제 코를 툭 부딪치고는 가볍게 타박했다.

    “이 조그만 머릿속에 섹스 생각밖에 없지, 아주.”

    “네. 지금은요.”

    “훌륭한 뱁새.”

    힙스에게 쇼핑몰로 갈 차를 준비시키고 방으로 돌아온 둘은 사이좋게 서로의 몸매를 감상하며 옷을 갈아입었다.

    방을 나가며 이블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너는 내가 아까 양심 없는 체체라고 할 때는 가만히 있어 놓고 왜 내가 나 양심 없다니까 발끈하냐.”

    “저한테 양심 없다고 하면 누가 봐도 농담이니까요.”

    “…….”

    “하지만 이블 님은 누가 봐도-.”

    이블이 체체의 입술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그대로 안은 채 방으로 돌아가서 다시 나오기까지는 30분이 걸렸다.

    ***

    이블과 체체는 주기적으로 루젬 세공 전문 쇼핑센터에 방문한다. 대부분 주문 제작 후 배송으로 받기에 주기적이라 해 봤자 3개월에 한 번이고, 아직 네 번밖에 방문하지 않았지만 워낙 돈을 많이 써서 바로 VVIP가 되었다. 사실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구경만 하고 가도 쇼핑몰은 둘을 VVIP로 올릴 터였다. 방문하는 것만으로도 큰 홍보가 되니까.

    “저기 좀 봐. 이블 엔덤이랑 체체….”

    “미쳤어? 조용히 말해.”

    “설마 들렸을까.”

    “너는 모셔너 청력이 우리랑 같은 줄 아냐. 그냥 조용히 닥치고 있어.”

    이블과 체체를 발견한 방문객들이 수군수군 떠들어 댔다. 어디 나갈 때마다 항시 겪는 일이라 둘은 그런 반응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온 만큼 쇼핑도 간단히 끝내고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으니….

    이블과 체체 때문에 알시티에는 뱁새가 대유행 중이었고, 쇼핑몰에도 온갖 군데에 뱁새 장식, 뱁새 문양, 뱁새 그림이 가득했다. 들어가는 매장마다 색깔과 크기만 달랐지 전부 오목눈이들이었다.

    이블은 존나 귀엽다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체체는 조금 식은 눈으로 매장을 나갔다. 그렇게 몇 번 반복하자 이블도 슬슬 오늘 살 수는 있을까 싶어졌다.

    다음 매장에 들어갔을 때도 매장 점원은 당연히 뱁새 고글을 추천하려고 했으나 이블이 먼저 선수 쳤다.

    “뱁새 말고 튼튼한 남자다운 거 내놔. 군인 출신이 쓸 법한 멋있고 건강하고 남성미 넘치는 스타일.”

    “네…!”

    점원은 하마터면 반문할 뻔했지만 다행히 물음표가 아닌 느낌표로 말끝을 맺었다. 돌아서는 얼굴에는 의문이 가득했으나 우선 그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이것저것 꺼냈다.

    “…….”

    밀리터리 디자인의 세공 용품들을 앞에 둔 이블의 표정은 ‘시큰둥’ 그 자체였다. 이블은 손도 대기 싫은 듯 오러로 고글 하나를 집어 들어 체체의 얼굴에 대 봤다.

    “후우….”

    거의 지하에서부터 끌어 올린 깊은 한숨이었다.

    장갑과 엔드스틱, 앞치마까지 차례차례 체체에게 대 본 이블의 표정은 갈수록 험악해졌다.

    “이딴 것도 사는 사람이 있냐? 씨발. 병신 같네.”

    분명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취향일 디자인을 사정없이 후려친 이블이 체체를 데리고 옆 매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남성적이고 건강미 넘치는 것을 요구했다.

    매장 직원들을 차례차례 공포에 떨게 만들던 이블은 마침내 마지막 매장에서 수염 난 근육 남성 그림이 그려진 앞치마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직원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지만 체체는 평온했다. 이블이 체체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체체. 이건 진짜 아니야. 아무리 네가 원해도 안 돼!”

    “…….”

    “네가 바라는 게 저딴 거야? 진짜로? 네 예쁜 손에 이런 촌스러운 디자인의 엔드스틱을 쥐고, 이 예쁜 몸에 저딴 근육맨 그림이 그려진 앞치마를 걸치겠다고? 나는 절대 용납 못 해! 용서할 수 없어!”

    체체는 잔뜩 흥분한 이블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저는 아무 무늬 없는 무난한 디자인이면 됩니다.”

    “역시 그렇지? 너도 무난한 뱁새 디자인이 좋지?”

    “…저는 그냥 단색으로만 이루어진 디자인이어도.”

    “뭐? 갈색이나 흰색 등 한 가지 색으로만 이루어진 뱁새가 좋다고?”

    “…아무 그림이 없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뱁새 그림 말이야?”

    “…네. 뱁새 사러 가요.”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이블로 인해 체체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다시 뱁새 세공 용품들을 구경해야만 했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화산 같던 이블은 자는 뱁새, 앉아 있는 뱁새, 노래하는 뱁새 등 여러 뱁새 용품들을 보는 동안 점점 수그러들었다.

    결국엔 신상 뱁새 세공 용품을 한가득 사서 저택으로 주문하며 쇼핑이 끝났다.

    이때쯤 이블은 완전히 평화를 되찾아서 체체를 끌어안고 헤벌쭉 웃고 있었다.

    “집에 가자마자 새로 산 앞치마 입어 보자. 허리끈에 뱁새 날개가 달렸대. 진짜 귀여울 거야.”

    “이블 님도 새로 산 새빨간 색의 앞치마 걸쳐 보세요. 붉은 눈과 정말 잘 어울릴 거예요.”

    체체도 이블에게 어울릴 용품들을 함께 쇼핑하며 나름대로 만족했다.

    비록 무난한 디자인의 용품들은 들이지 못했지만…. 싫어하는 디자인을 수십 개나 구경한 것으로도 이블로서는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 것이다. 애초에 체체는 뱁새를 싫어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작고 동그랗고 귀여운 새를 좋아했기 때문에 이것으로 되었다 싶었다.

    “같이 입고 사진 찍자. 근데 너 너무 거하게 쓴 거 아냐? 아직 8일인데 앞으로는 어떻게 나한테 선물해 주게? 설마 이번 달 선물은 이걸로 끝이야…?”

    꽤 고액의 연봉을 받고 있는 체체는 나름대로 소비 계획을 세우고 그에 맞춰 생활했다. 월급의 50%는 저축, 20%는 기부와 후원. 나머지 30%는 모두 이블에게 썼다.

    맛있는 밥을 사 준다거나 깜짝 선물을 준다거나…. 어울릴 것 같은 의류나 가방, 신발 등이 나오면 주저하지 않고 긁었다. 오늘처럼 쇼핑몰에서 ‘제가 사 드릴게요. 원하는 거 고르세요.’ 할 때도 있었다. 이블은 처음엔 체체가 사 준다고 하면 그저 좋아서 이거 고르고 저거 골랐는데, 어느 날부터 가격을 확인하게 되었다.

    정확히는 체체가 가계부를 쓰다가 작게 한숨 쉬는 걸 본 날부터였다….

    너무 귀여운데 안쓰럽고 깨물어 주고 싶고 당장 안고 싶고 기특하고 근데 안쓰럽고….

    “괜찮습니다. 저번 달 인센티브가 남았거든요. 더 고르셔도 돼요.”

    “인센티브 저금 안 했어? 너 본래 여윳돈 생기면 바로 은행에 넣잖아.”

    “돈을 얻는 대로 전부 은행에 넣으면 오히려 탈력감이 심해진다고 합니다. 내가 번 돈을 적절하게 소비했을 때의 성취감이 주어져야 장기적으로 성실하게 돈을 모을 수 있다고 해요.”

    이블이 헤벌쭉 웃었다.

    “체체 똑 부러지네. 나중에 나 파산하면 체체 저금 까먹으면서 살아야겠다.”

    “네. 그러시면 돼요.”

    실현 가능성 없는 소리지만 체체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쇼핑이 끝날 무렵, 방문객 수가 아까보다 세 배는 많아졌다. 다들 이블과 체체 주위에는 다가오지 못해서 둘의 반경 10m 내외로 텅 비어 있었으나 그만큼 다른 곳들은 밀도가 높아졌다. 이블과 체체는 밥을 먹고 돌아갈까 아니면 돌아가서 밥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먹고 돌아가기로 하고 쇼핑몰에서 좀 더 시간을 보냈다.

    “여기서 루젬 전시회도 한대. 보고 식당 가면 딱 되겠는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나는 너만 옆에 있으면 항상 괜찮아.”

    두 사람은 마침 쇼핑몰 탑 층에서 한다는 루젬 개인 전시회를 보러 갔다. 유료 전시회여서 티켓을 구매해야 했다. 이블과 체체가 티켓 구입처로 다가오자 직원이 얼른 말했다.

    “어, 어른 하나, 요정 하나 맞으시죠?”

    “씨발, 네가 뭔데 체체 보고 요정이래. 너 얘가 요정으로 보여? 어? 작고 까맣고 귀여운 뱁새 요정으로 보이냐고!”

    직원이 고개를 끄덕여야 하나 저어야 하나 울먹이면서 고민할 때였다.

    “이블 님, 그러지 마세요.”

    “하지만 이 새끼가 너한테 요정이라고 하잖아. 나도 겨우겨우 뱁새라고 말하는 판국에….”

    “이블 님을 말한 걸 수도 있습니다.”

    “…….”

    이블조차 예상하지 못했는지 눈을 끔벅였다.

    “이블 님이야말로 요정 나라에서 지구를 구하러 온 요정이시니까요. 그렇죠?”

    체체가 직원에게 동의를 구했다. 직원은 영문은 모르겠지만 일단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그럼요. 이블 엔덤 님은 요정이시죠. 천사시고요. 절경이고요. 제가 말한 ‘요정 하나’는 이블 엔덤 님이셨습니다. 그렇고 말고요….”

    “어른 하나, 요정 하나 부탁합니다.”

    “네….”

    직원이 거의 울면서 표를 끊어 줬다.

    이블이 그답지 않게 뚝딱거리며 체체를 따라왔다.

    “미치겠다. 내가 말문이 막히는 건 정말 흔치 않은 일이란 말이야.”

    “자주 막히시지 않나요?”

    “네 앞에서만 이렇거든. 씨.”

    이블이 욕을 하면서 걸음을 멈추자 체체가 무슨 일인가 하여 이블을 올려다봤다. 이블은 체체를 품에 끌어안았다. 지켜보던 이들은 생각했다.

    ‘거의 삼 보 일 포옹이로군….’

    이블이 중얼거렸다.

    “체체, 존나 좋아….”

    “…저도요. 이블 님.”

    이블 데빌의 사랑꾼 모습을 실물로 감상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물론 두 사람은 직원의 시선엔 신경 쓰지 않고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다가 전시장으로 들어갔다.

    루젬 전시회는 크게 세 종류가 있다. 협회나 정부에서 공공 목적으로 다양한 세공사들에게 작품을 의뢰해 여는 전시회, 개인 수집가가 자신이 소유한 작품들을 자랑하기 위해 여는 전시회, 개인 세공사가 작품을 판매하기 위해 여는 전시회.

    오늘의 전시회는 마지막 세 번째에 속했다. 작년 어워드에서 수상한 알시티인 세공사의 개인 작품이 총 열세 점 전시되어 있었는데, 지금이 전시일 막바지라서인지 이미 모든 작품이 판매 완료된 상태였다.

    체체의 허리께를 지분거리며 체체의 속도에 맞춰 구경하던 이블이 혀를 찼다.

    “참 나. 이런 것들도 홀리아젬이라고 내놨네.”

    “취향에 안 맞으세요?”

    “응. 네 것에 비하면 너무 유치하고, 얄팍하고, 납작하고, 나태해. 이런 걸 돈 주고 사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돼. 분명 가족이거나 지인의 바이럴 마케팅 일환일 거야.”

    이블이 세공사 상처 주는 데에 가장 효율적인 평가 4종 세트를 내뱉으며 작품 구매자들의 취향을 맹렬히 비난했다.

    체체는 처음엔 이블이 다른 루젬을 평가할 때 하는 말들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입력했었다. 언젠가 이블의 취향에 딱 들어맞는 루젬을 만들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이젠 그냥 흘려들었다. 왜냐하면 이블은 체체의 작품 말고는 다 이렇게 비난을 퍼부었기 때문이었다.

    “빨리 집에 가서 네 루젬 보고 눈이랑 뇌 씻고 싶다. 네 루젬은 정말 감동적이고 웅장해. 사람을 막 벅차오르게 하고 경건한 마음이 들게 만들어. 나 같은 사람을 감동하게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 근데 네 작품은 그래.”

    체체는 언젠가 한번 이블 몰래 다른 이름으로 루젬을 만들어서 이블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그가 어떤 평을 내릴지 궁금했다. 만약 맹비난을 했다가 세공사가 체체라는 걸 알게 되면 얼마나 당황해할지…. 상상만 해도 귀여웠다.

    “세상 모든 루젬 없어지고 네 루젬만 남았으면 좋겠…. 왜 웃어?”

    “귀여우셔서요.”

    “갑자기 내가 귀엽다고?”

    “갑자기는 아닙니다. 항상 귀여우시니까요.”

    이블이 헤벌쭉 웃으며 체체를 끌어안았다.

    “너도 항상 귀여워. 체체 너무 좋아.”

    “저도요, 이블 님.”

    전시회 구경하는 척 둘을 구경하던 이들이 스르르 멀어졌다.

    힙스에게 외식을 하고 가기로 했다는 비보를 전하고 쇼핑몰 내부의 고급 식당으로 들어갔다. 이블은 메뉴판에 있는 코스 메뉴 외에도 모든 식사 메뉴를 전부 시키고 한마디 덧붙였다.

    “뱁새가 먹을 거니까 너무 뜨겁거나 맵지 않게 내와.”

    “…네, 알겠습니다.”

    경치 좋은 창가 테이블을 배정받은 둘은 오랜만에 와인도 기울이며 데이트를 즐겼다. 대화하다 보니 차차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놓을 자리가 부족해서 테이블을 한 개 더 붙였다.

    어느 정도 배를 채운 이블이 본론에 들어갔다.

    “우리 오늘 분위기 좋았다. 그치?”

    “네, 좋았어요.”

    “오늘 할까.”

    “네, 좋습니다.”

    이블이 테이블 한가운데에서 무드를 책임지고 있는 노란 꽃을 한 번 쳐다봤다가 체체 옆으로 의자를 끌어 앉았다.

    “체체. 사람은 정말 쉽게 죽어.”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 무르익은 분위기에서 갑자기 무슨 무서운 소리냐고 기겁하겠지만 체체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냥 가만히 이블을 바라봤다.

    “내가 영상 하나를 봤는데. 정말 무서운 영상이었거든. 너무 무서운 나머지 평생 잊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핸드폰에 저장해 놨어. 한번 볼래?”

    “네.”

    체체는 혹시 이블이 스너프 필름이라도 본 건가 싶어 조금 걱정하며 핸드폰 화면을 쳐다봤다.

    “…….”

    어떤 난민 소년의 영상이었다.

    구타르 시절,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아무런 보호 장비 없이 여기저기 찢어지고 헤진 얇은 천 옷만 입고 뛰쳐나가 부상당한 군인을 힘겹게 부축하는 소년.

    아주 오래전도 아니었는데 체체는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너무 무섭지 않아?”

    “…….”

    “이 공포스러운 영상이 인터넷에는 ‘인류애 잃을 때 보는 감동적인 영상’이라는 제목으로 올라와 있더라고. ‘feat.체체’까지 달아 놓고. 씨발, 내가 싸패가 아니라 인간들이 싸패 같아. 안 그래?”

    체체가 핸드폰을 집어 가 테이블 위에 엎었다. 그러곤 이블의 손을 잡으며 시선을 마주쳤다. 서늘한 기운을 담고 있던 붉은 눈은 체체와 마주치자 천천히 따뜻해졌다.

    “나는 너무 무서워. 사람이 쉽게 죽는 약한 존재라는 게…. 네가 사람이라는 게.”

    “…….”

    “너 계단 내려오다가 삐끗해서 굴러떨어질 뻔했을 때도 나 너무 놀랐단 말이야.”

    “제가 그런 적이 있어요?”

    “있어! 왜 기억을 못 해?”

    이블이 버럭 화를 냈다. 하지만 체체는 정말 기억이 안 났다. 아마도 삐끗하는 순간 이블이 빛의 속도로 날아와서 자신을 잡아 줬기 때문일 것이다. 삐끗해서 넘어지려는 걸 스스로 의식하지도 못할 만큼 빠르게.

    “나 진짜 기절하는 줄 알았어. 네가 그 높은 계단에서 휘청하는데…. 순간 목뒤에 누가 칼을 댄 것처럼 서늘해지고 심장이 쿵 내려앉고 눈앞이 캄캄해지고…. 지구도 좀 멸망시키고 싶어지고….”

    “그래도 절 구해 주셨네요.”

    체체가 좋은 말을 하며 이블을 달랬지만 이블은 오히려 입을 삐죽 내밀었다.

    “네가 그때 왜 삐끗했는지 알아?”

    “왜 삐끗했나요?”

    “전날 좀 심하게 했거든.”

    “…….”

    “내가 너무 흥분했었어. 네가 이제 그만하자고, 힘들다고. 아프다고도 말했는데 무시했어. 너 결국 정신 놓고 몸이 축 늘어져서 움직이지도 않는데 나는 완전 미쳐서 계속 박아 댔지.”

    체체는 어느 날을 말하는 건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세 달 전인가. 이블과 이틀 만에 만났을 때를 말하는 것이다. 해저 화산이 터질 기미가 보여서 이블과 모셔너들이 잠수함을 타고 바다 밑 깊숙한 곳까지 갔다가 49시간 만에 돌아왔다. 핸드폰이 통하지 않았던지라 체체도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다. 이블이 돌아온 후에는 체체도 이블도 서로한테 껌딱지처럼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날은 그럴 만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정말 숨넘어갈 지경이었다면 이블 님은 멈추셨을 거예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좀 자신 없다.”

    모든 이가 두려워하는 오만한 폭군은 그의 작은 뱁새 앞에서는 늘 솔직하게 작아졌다.

    “널 다치게 할까 봐 너무 걱정돼. 끝까지 넣는다고 네 몸이 크게 상하진 않겠지. 하지만 내가 네 안에 전부 들어간 게 너무 좋아서 이성을 잃고 날뛰면 어떡해? 지금까지 내가 해 먹은 침대 프레임만 다섯 개야. 네 뼈가 원목 프레임보다 강해?”

    “하지만 이블 님은 제 뼈를 해 먹으신 적은 없잖아요.”

    “아직은 없지. 아직은….”

    “이번에 제 뼈를 부러뜨리시면 저도 다시는 끝까지 넣어 달라고 안 하겠습니다.”

    “이미 뼈가 부러진 마당에 다음번에 끝까지 넣고 안 넣고가 뭐가 중요한데? 체체, 지금 우선순위가 뭔지 모르지.”

    “아주 잘 알고 있어요.”

    이블도, 체체도 각자만의 확고한 우선순위가 있었다. 다만 그것이 서로 다를 뿐이었다. 이블은 체체의 안전, 체체는 이블의 자유. 그러나 그 순위를 매긴 이유는 결국 같았다.

    바로 상대에 대한 사랑이었다.

    “…….”

    체체는 말없이 이블을 바라봤다. 인형처럼 풍성한 속눈썹과 신비로운 금색 눈이 이블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후 이블이 말했다.

    “암호를 정해 놓자.”

    “암호요?”

    “네가 ‘싫어’, ‘힘들어요’, ‘그만’ 해도 나는 계속 박을 거잖아. 이번엔 위험할 수 있으니까 정말 힘들어서 멈추길 바랄 때 특정 단어를 말해. 그럼 내가 멈출게.”

    “아, 세이프 워드….”

    “세이프 워드? 이런 전문 용어도 있어? 참 나. 성욕에 미친 인간들 끝내주는 섹스 한번 하겠다고 별걸 다 만드네. 그래서 우린 뭐로 할까? 내가 완전 성욕이고 뭐고 팍 식을 것 같은 걸로 해야 돼.”

    체체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죽을 것 같다고 할까요?”

    “너 본래도 그 말 자주 해. ‘이블 님, 제발 그만. 죽을 것 같아요.’”

    “아프다고 하면요?”

    “그 말도 자주 하잖아. 아프다고 해도 절대 멈추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으면서.”

    “그랬죠….”

    체체가 주위를 둘러보며 뭐가 좋을지를 생각했다. 테이블 위에 가득한 빈 그릇과 서너 조각 남은 빵. 따끈따끈한 음식을 서빙 중인 웨이터….

    “배가 고파요, 는 어떤가요?”

    이블이 턱을 쓸며 중얼거렸다.

    “체체 배고프면 밥 먹어야지…. 그래. 좋은 것 같다. 그걸로 하자.”

    “네. 그럼 일어날까요.”

    “응.”

    두 사람이 거사를 위해 일어났다. 끝내주는 섹스 한번 하겠다고 세이프 워드까지 정하고 일어나는 둘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서, 둘의 머릿속이 음란함으로 가득 찼다는 걸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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