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임 6권 (외전)
01.
체체는 반짝 눈을 떴다. 상체가 답답한 느낌에 내려다보니 이블의 굵은 팔이 가슴부터 허리까지 대각선으로 올라와 있었다. 늘 있는 일이었다. 체체의 아침은 허리를 휘감고 있는 굵은 팔을 치우거나, 다리에 얽혀 있는 단단한 허벅지를 치우거나, 아직도 들어 있는 이블의 커다란 것을 슬금슬금 빼는 것으로 시작하고는 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이블의 팔을 치우지 않고 그냥 뒀다.
“…….”
간밤에 일어난 일을 떠올리자 체체는 심란해졌다.
고민이 생겼다. 누구한테도 상담할 수 없는 고민이었다. 그 내용이 너무 사적이고 음란하고 방탕한 데다가, 사실 그런 종류가 아니었더라도 누구에게도 상담할 수 없었다. 고민의 원인이 바로 이블 엔덤이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이블이 참지 않는다고 말한다. 안 참고 살아도 되니까 부럽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러나 체체가 생각하기에 이블은 보통 사람들의 수천 배로 참고 견디고 있었다. 그에게 이 세상은 혐오스러운 동시에 유리로 만들어진 구슬처럼 연약해서 무엇이든 ‘마음껏’ 하기 어려웠을 테니까.
체체는 이블이 적어도 자신 앞에서만은 참고 견디지 않아도 되기를 바랐다. 참아야 한다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아주 조금은 자유롭기를 소망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체체의 바람과 정반대로 진행되어 갔다.
이블은 오히려 체체를 대할 때 남들에게 하는 것보다 좀 더 조심했다. 남들 앞에서는 일상 용어처럼 내뱉는 ‘병신’, ‘거지새끼’ 등의 욕설을 체체 앞에서는 ‘멍청이’로 통일했고, ‘말대꾸하면 죽여 버린다’는 협박은 ‘말대꾸하면 키스할 거야’가 되었다. 한번은 목을 잘근잘근 씹어 먹고 싶다고 하길래 목덜미를 내어 주자 간지러운 감촉만 느껴질 정도로 이만 살짝 대고 만 적도 있었다.
‘이블 님은 욕을 너무 많이 하십니다.’
체체는 예전 이블에게 그렇게 말했던 걸 후회했다. 그러나 체체의 심성으로는 앞으로 누구에게건 자유롭게 쌍욕을 하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혼자만의 딜레마에 갇혀 있던 체체가 ‘이건 아닌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결정적 사건은 바로 어젯밤 일어났다.
이블과 한창 즐거운 섹스를 하던 중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블 님. 그거… 뭐예요?’
‘뭐…. 내 좆…?’
‘…….’
‘이게 왜?’
이블이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되묻고는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체체는 팔꿈치를 세워 힘들게 상체를 일으킨 뒤 접합부를 바라봤다.
이블의 것이 다 들어오지 않았다.
무려 손가락 두세 마디 정도가 밖에 나와 있었다.
다 들어오지 않은 성기의 뿌리 부분.
뭐가 문제냐는 듯한 이블의 여상한 태도.
체체는 빠듯하게 안쪽을 채운 것에 헐떡이면서도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계속… 끝까지 넣지 않았었나요?’
‘응.’
‘…….’
‘네가 이렇게 작은데 어떻게 다 넣냐. 내가 참아야지.’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였다. 체체가 막 뭐라 말하려는 찰나 이블의 뜨겁고 커다란 손이 다시 체체의 가슴을 부드럽게 밀어서 눕혔다. 그 후로는 커다란 몸 아래에서 흔들리느라 그것에 대해 다시 말할 정신이 없었다.
“…….”
체체는 자신의 상체를 대각선으로 가로질러서 끌어안은 단단한 팔과 쿨쿨 자고 있는 이 팔의 주인을 바라봤다.
뜨거운 밤을 보내고 그 상대의 품에서 눈을 뜬 지도 1년이 되었는데… 이제야 깨달았다.
이블이 한 번도 끝까지 넣은 적이 없다는 것을.
내내 참고 있었다는 걸.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너무 놀랐다.
지금까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이유는 이블과 할 때마다 항상 더는 들어올 수 없는 곳까지 꿰뚫리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블이 몸을 쑥 밀어 넣으면 배 속이 뜨겁게 가득 차오르고, 뺄 때는 온몸이 다 딸려 나가는 듯한 무서운 착각까지 드는데 어떻게 일부만 들어왔다는 생각을 하겠는가? 당연히 뿌리까지 모두 들어온 줄 알지….
이블도 항상 만족스러워 보여서 참고 있다는 생각을 못 했다.
연인으로서 실격이라는 자괴감이 들었다.
이블은 나를 위해 참고, 참고, 또 참는데 나는 그를 위해 참고 있는 게 하나라도 있나?
먹먹한 마음에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 작은 한숨에 옆에서 자고 있던 이가 예민하게 반응했다.
“체체.”
이블이 허스키한 목소리로 체체를 부르고는 몸을 일으켰다. 잠에서 막 깼다고는 믿기 어려운 선명한 붉은 눈이 체체를 집요하게 살폈다.
“너 지금 한숨 쉬었어?”
“아니요.”
“아니긴, 씨발. 한숨 쉬었잖아. 뭐야. 왜 그러는데. 안 좋은 꿈 꿨어? 요정들이 자기네 나라로 돌아오라고 해? 왜 한숨 쉬었어.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용서해 줄게. 나 빡치기 전에 대답해.”
“이블 님.”
“응.”
“제게 끝까지 넣으셔도 돼요.”
체체의 당돌한 말에 이블이 눈을 끔벅였다.
“참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게 전부 넣으세요.”
이블은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가 곧 바람 빠진 웃음을 짓고는 다갈색 뺨에 키스했다.
“그것 때문에 한숨 쉬어서 나 놀라게 한 거야? 마음은 알겠지만 넌 너무 작은 뱁새라서 안 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잠이나 더 자.”
다섯 살짜리 어린애가 하는 ‘저 핸드폰도 안 터지는 오지에 배낭여행 좀 하고 오겠습니다’라는 말이라도 들은 듯 완전히 허무맹랑한 이야기 취급이었다.
“저는 튼튼합니다.”
“알아. 하지만 안 돼.”
“이블 님을 전부 갖고 싶어요.”
“내가 좋아할 법한 말로 유혹하려는 거 뻔히 보이거든.”
“유혹에 넘어가 주시면 안 되나요?”
“체체.”
이블이 체체의 뜨끈하고 말랑한 볼을 손가락으로 간지럽혔다.
“진정하고 침착하게 생각을 해 보란 말이야. 네 구멍 너는 본 적이 없겠지만 한 시간을 풀어도 이만해.”
이블이 엄지와 검지를 틈도 없이 꼭 붙였다. 체체는 그래도 좀 틈을 벌려야 하지 않나 싶었지만 이블은 단호했다.
“이렇게 쪼그맣게 다물려 있는데, 내 걸 봐 봐.”
이블이 체체의 손을 가져다 자신의 중심부에 갖다 댔다. 체체가 흠칫 놀랐으나 다행히 옷을 사이에 두고 만졌다. 아침부터 웅장하게 기립해 있는 그것은 손에 다 안 잡힐 만큼 커다랬다. 이블은 체체의 손을 다시 떼서 꼭 맞잡고 손가락 마디마디에 입을 맞췄다.
“너는 이미 뱁새한테는 부담스러운 크기를 받고 있어. 내가 만족 못 하는 것도 아니고 존나 개만족하다 못해 복상사할까 봐 걱정될 정도인데 턱도 없는 욕심 내지 말고 잠이나 자.”
“턱도 없지 않은-.”
“안 잘 거면 키스나 하든가.”
이블이 체체의 요망한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체체가 붙잡히지 않은 한쪽 팔을 이블의 목에 감았다. 이블은 웃으며 체체의 몸 위로 올라왔다.
이블의 키는 195cm, 체체의 키는 168cm로 키 차이만 27cm에 몸무게는 40kg 넘게 차이 나는 체격이었으나 체체는 몸 위에 이블이 엎드려 있어도 무겁게 느끼지 않았다. 이블이 부담이 안 가도록 오러를 사용하거나 본인의 완력으로 지탱하기 때문인데, 이전까지는 이런 배려가 고마웠으나 현재는 아니었다. 이마저도 이블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게 아닌가 하는 노파심이 들었기에.
그렇게 체체에게 고민이 생겼다.
연인이 나를 너무 사랑하고, 내가 연인을 너무 사랑해서 생긴 고민.
타르의 독립에 대해 고민하던 시절에 비하면 한가하게 들릴지 몰라도 체체에게는 결코 더 가볍다고는 할 수 없는 문제였다.
***
매년 봄마다 알시티 서부 지역에는 건조 주의보가 내린다. 눈이 녹기 전부터 산불과 화재를 조심하라고 온갖 매체를 통해 경고를 해도 반드시 산불과 화재가 일어난다. 이는 시민 의식이 부족한 게 주요 원인이었다. 알시티인들은 너무 안전하게 잘 살다 보니 나태해진 면이 있었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매년 1월부터 4월까지를 ‘화재 방지 특별 기간’으로 지정하고 각 관공서에서 시민 특별 교육을 실시했다. 그러나 나태한 알시티인들이 그런 교육에 참가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민주주의 자유 국가에서 강제할 수도 없었고. 방법을 강구하던 공무원들은 좋은 방법을 떠올렸다.
타르의 어린 영웅, S급 소울 오러 유저.
이블 엔덤이 푹 빠져 있는 연인, 체체.
엔덤 가문이 이블의 악랄함을 상쇄하기 위해 영웅 체체를 불러왔듯이, 알시티에서는 알시티인들의 나태함을 상쇄하기 위해 성실한 체체의 도움을 받기로 한 것이다.
체체의 성실함은 굉장히 유명했다.
루젬 세공사가 된 후 공공 기관의 의뢰만 받고 있는데, 한 달에 최대 다섯 개까지 작업하면서도 단 한 번도 마감 날짜를 어긴 적이 없었다. 많은 루젬 세공사가 ‘이날까지 하면 좋고 안 되면 말고’라는 수식어를 자기들 멋대로 마감 날짜 앞에 붙이는 것과는 달리 체체는 늘 마감 날짜를 지켰다. 가끔은 마감날 며칠 전에 미리 납품하기도 했다.
그런 성실함이 업계를 넘어서 전 세계에 자자했는데, 소문이 이렇게 널리 퍼진 이유는 당연히 이블 엔덤의 팔불출급 칭찬 때문이었다. 재난 현장 인터뷰는 일절 하지 않는 이블이 갑자기 카메라 앞에 쑥 들어와 내 뱁새가 얼마나 성실한지 아느냐며 일장 칭찬을 한 에피소드는 아주 유명했다. 그렇게 알려지기 시작한 체체의 성실함에 여러 공공 기관 관련인들이 증언을 덧붙이면서 지금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서부 지역 공무원들은 화재 대비 교육에 체체를 초청해서 나태한 시민들에게 성실함 강의를 하게 하자는 목적으로 센터에 공문을 보냈다. 그러나 이블의 귀에 들어가지도 않고 비서실 선에서 퇴짜맞았다.
공무원들은 이번에는 다른 방향으로 다시 도전했다. 서부 지역 화재 대비 교육 일환으로 루젬 전시회를 열 예정인데 체체 세공사님에게 의뢰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덤으로 전시 일정 중 하루 체체가 방문했으면 좋겠다는 문장을 덧붙인 공문서를 오러 센터에 보냈고, 그 공문서는 무사히 비서실을 통과해 이블에게 전달되었다. 체체에게 오러 세공 의뢰가 오면 무조건 자신에게 전달하라는 이블의 지시가 있었던 탓이다.
“서부 지역 중 잉데아에서 전시회를 연대. 전용기로 가도 편도로만 세 시간 걸리는 곳이야.”
이블은 공문을 발견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체체를 호출했고, 지금 체체는 이블의 무릎 위에 앉아 설명을 들었다. 이블은 동물이 주인에게 치대듯 체체에게 머리를 비비면서 말했다.
“마감도 짧아. 전시회 개관일이 일주일 후라 사흘 안에는 만들어야 해. 건방진 새끼들. 어떡할까? 거절할까?”
“제가 가면 이블 님도 같이 가실 거죠?”
“당연하지. 널 세 시간 걸리는 곳에 두고 내가 어떻게 맘 편하게 있겠냐.”
“생각해 볼게요.”
“그래. 보류해 놓을 테니까 결정하면 말해.”
이블이 태블릿을 몇 번 조작했다. 그렇게 둘의 공적인 업무는 끝났지만 체체는 이블의 무릎 위에서 내려올 생각을 안 했고, 이블도 체체를 주물럭거리면서 업무를 진행했다. 어차피 곧 점심시간이라서 지금 헤어져 봤자 30분 후면 다시 만나야 했다
체체는 이블의 품 안에서 이블이 조작하는 태블릿 화면을 빤히 바라봤다. 체체가 흥미를 갖자 이블은 체체가 편하게 보도록 태블릿 각도를 조절했다.
이블은 오러 유저 파견 요청이 들어오면 내용을 확인하여 보류·거절·수락하고 수락 후에는 적절한 오러 유저를 배정하는 업무를 하고 있었다. 오전 내로 배정 업무를 마치면 오후에는 파견 업무가 기다리고 있다.
빠른 속도로 채워지는 일정표를 보던 체체가 말했다.
“이블 님, 오늘부터 매일매일 나가시네요.”
“그렇게 됐어. 씨발, 뭔 놈의 쥐똥만 한 행성에 일이 이렇게 많이 터지냐. 사람 귀찮게.”
홍수, 지진, 산사태, 화재 등 SSS급 오러 유저를 필요로 하는 큰 규모의 자연재해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이블이 없었다면 사이비 종교들이 성행하고 지구 멸망설이 크게 유행하며 세상엔 큰 혼란이 닥쳤겠지만, 진도 9의 지진도 그의 손짓 한 번이면 안정을 찾으니 사람들은 재난을 재난이라 느끼지도 않으며 일상생활을 해 나갔다.
개중에는 사람의 실수로 일어나는 재난도 있었다. 사람이 조심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사고에 이블이 직접 나가서 수습해 줘야 하는 일들.
바로 이 서부 지역의 산불 같은….
체체도 알시티 서부 지역에서 봄마다 화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들은 제아무리 크게 불이 일어날지언정 이블 엔덤이 오면 해결될 것을 믿고 나태해진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블 님, 저 잉데아 루젬 수락하겠습니다.”
이블이 멈칫하며 체체를 쳐다봤다.
“갑자기? 왜. 생각해 본다며.”
“그 일을 수락하면 이블 님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
“이블 님의 피로를 덜어 드리고 싶어요.”
체체는 항상 솔직하다. 그래서 그의 연인은 항상 생각지도 못한 때에 일격을 받고 가슴을 쥐어 잡은 채 쓰러져야만 했다.
씨발 존나 귀여워…. 유언처럼 간신히 내뱉은 이블이 태블릿을 내던지고 가슴을 뜯었다. 대화하다가 갑자기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 체체는 금색 눈을 깜빡이며 이블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잠시 후 이블이 칭얼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체체. 심장에 직격타를 당한 연인이 가슴을 쥐어뜯고 있잖아. 인공호흡이나 심폐 소생술 안 해 줘?”
“안 해도 다시 살아나시잖아요.”
“앞으로 계속 쓰러져 있으면 해 주겠다는 뜻으로 알아듣겠어.”
“그러지 마세요.”
체체가 이블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이블이 가슴을 쥐어뜯으면서 쓰러져 있으면 심장에 위험해서 안 된다. 연기여도 철렁할 테니까.
그 말은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이블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소울 오러 유저인 둘은 서로의 감정에 보통의 연인보다 더 예민하게 감응하기 때문에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대화를 하고는 했다.
반드시 목소리를 내서 전달해야 하는 말. 굳이 소리 내지 않고 마음으로 전달해도 되는 말. 이블과 체체의 성격상 서로 다른 기준을 갖고 있었지만 서로에게 맞춰 가며 섞이는 중이었다.
“…이블 님. 그런데 정말 제게 끝까지 안 넣으실 건가요?”
이 대화의 흐름에서 체체의 질문은 뜬금없지 않았다.
왜냐하면 체체는 이블의 허벅지 위에 앉아 있고, 이블의 성기가 체체의 엉덩이 아래에서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 넣을 거야. 이 욕망 체체야. 너 아침부터 그 생각뿐이지?”
“저는 튼튼합니다.”
“튼튼하면 뭘 해. 뱁새인데. 너랑 내 사이즈 차이를 생각하란 말이야. 그리고 나는 끝까지 다 안 넣어도 존나 만족하고 있다니까? 하아. 왜 그렇게 많이 해도 안 질리고 오히려 더 미칠 것 같지. 몸에 마약이라도 처발랐…. 아니, 그러니까, 진짜 발랐다는 게 아니라. 그냥 그만큼 중독적이란 거지.”
“지금도 그렇게 좋은데 끝까지 넣으면 더 좋을 겁니다.”
“자꾸 왜 그래. 너 설마… 지금 불만족스러워?”
이블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나 체체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음흉하게 눈매를 접으며 웃었다.
“그럴 리가 없지. 그건 절대로 불만족했을 때 나오는 반응이 아니야.”
“…….”
“너는 네 얼굴 못 봐서 안타깝다. 네 안쪽 깊은 곳에 네가 무지 좋아하는 부분이 있거든? 거기 꾸욱 누르면 네가 엄청나게 조이면서 다리를 막 바르르 떨어. 그리고 네 얼굴은 홍조로 따끈따끈해지고, 꽉 깨문 입술에서는 새된 신음이 흘러나오는데…. 그런데 입술 깨무는 버릇은 어떻게 고쳐야 하지? 오늘은 내 손가락 물고 있을래? 아, 그나저나 너도 갈 때 네 표정이 어떤지 궁금하지? 네가 정 보고 싶다면 이번엔 거울 앞에서 해도 돼. 욕실에 커다란 거울 두고 그 앞에서 하는 거야. 씨발, 미쳤어. 당장 거울 설치하라고 해야겠어. 체체가 원한다니까 어쩔 수 없지.”
이블이 급히 핸드폰을 꺼냈다. 체체는 전화 너머에서 힙스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대충 예상이 갔지만 가만히 놔뒀다.
이블의 음담패설은 수치심을 주기 위해 내뱉는 음담패설이 아니었다. 그냥 정말 그때의 체체가 예쁘고, 자기가 그 얼굴을 거울을 통해 보고 싶어서… 순수하게 제안하는 것이다.
이블은 처음부터 이랬다. 처음 몸을 섞을 때부터 이런 식이었다. 네 구멍이 말도 안 되게 좁은데 어떻게 내 것을 넣겠느냐, 네 내벽 존나 쫀득쫀득하다, 내 것을 물고 놔주질 않는다, 젖꼭지가 바짝 서 있다… 그런 음담을 술술 이어 갈 때는 순간적으로 ‘내게 수치심을 주려는 의도인가?’ 했는데 곧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냥 솔직할 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는 처음에도 참으려고 했지.
지금으로선 상상도 안 되지만, 처음엔 아예 섹스를 포기하려고 했었다.
체체는 이블과의 첫 관계를 떠올렸다.
***
‘체체.’
‘네.’
‘난 못 하겠어. 도저히 들어갈 것 같지가 않아. 씨발, 섹스가 꼭 좆을 넣어야 하는 거면 그냥 네가 나한테 넣든가. 나는 못 해. 안 해. 몰라!’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서로의 옷을 벗기고, 쪽쪽 물고 빨고 주물주물 맘껏 만지기까지 했다. 젤 한 통을 다 써서 구멍도 눅진눅진하게 풀었고, 길고 긴 전회가 끝났으니 성기를 구멍에 밀어 넣기만 하는 된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에 이블이 파업을 선언했다.
체체는 당황해서 몸을 일으켰다. 이블에게서 전해지는 감정이 정말로 당황스럽다 못해 황당했다. 정말로 겁을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진짜 아니야. 생각해 봐. 볼펜 심 구멍에 야구 방망이를 넣을 수 있어?’
‘…이블 님이 야구 방망이 정도는 아닙니다.’
‘내 것 크기가 존나 볼펜만 하다고 해도 바늘구멍에 볼펜을 넣을 수는 없잖아! 바늘이 망가져 버릴 거야!’
‘안 망가져요.’
‘체체, 이런 미친 짓은 그만하자. 그냥 비비기만 해도 좋은데 굳이 넣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이블은 자신의 꼿꼿이 선 커다란 성기와 체체의 꽉 다물린 앙증맞은 그곳을 번갈아 보면서 무릎걸음으로 슬금슬금 물러갔다. 이러다가 침대에서 내려갈 판이라 체체가 얼른 이블의 팔을 붙잡았다.
‘이블 님.’
‘뱁새계 쓰지 마. 이름 부르지 마. 나 쳐다보지 마.’
‘누우세요.’
‘이것 봐. 너 지금 손도 작아서 내 팔뚝도 다 못 감싸는데.’
‘침대에 누워요, 이블 님.’
체체가 잔뜩 겁먹은 이블의 팔을 끌어당겼다. 이블이 인형처럼 순순히 딸려 왔다. 체체는 이블을 자신이 누워 있던 곳으로 살짝 밀었다. 종잇장처럼 팔랑팔랑 힘없이 누워 버린 이블이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체체를 올려다봤다.
‘나한테 넣게?’
‘아니요. 누워 계시면 제가 이블 님의 것을 제 안에 넣겠습니다.’
‘……! ……! ……!’
이블이 소리 없는 아우성을 쳤다. 흔들리는 동공과 뻐끔거리는 입술을 보며 체체가 다리를 벌리고 이블의 위에 올라갔다. 탄탄한 가슴을 양손으로 짚자 이블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마주 본 자세가 되었다. 체체의 손은 여전히 이블의 가슴에 머물러 있었다. 엉덩이 골을 넘어 등허리 선까지 묵직하고 커다란 것이 비벼졌다.
이블은 덜덜 떨며 체체의 어깨를 붙잡았다. 솜사탕이 내려앉는 듯한 약한 힘이었다.
‘야. 진짜 할 거야? 하, 하지 마.’
‘가만히 계세요.’
‘나,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괜찮습니다. 긴장 푸세요.’
이블의 몸은 뜨겁고 딱딱했다. 체체가 긴장 풀라는 의미에서 어깨며 팔뚝, 허리 등을 토닥였지만 건드린 부위마다 도리어 딱딱해졌다. 체체는 꼼질꼼질 허리를 움직여 자세를 바꿨다. 이번에는 이블의 성기를 제 앞쪽에 두고 앉았다. 이블의 음모는 그의 머리 색보다 조금 더 짙은 색이었다. 그리고 성기는 그의 몸만큼이나 굵고 길고 단단하며 뜨거웠다. 잔뜩 흥분한 탓에 핏줄까지 불거져 있으니 확실히 체체의 것에 비하면 흉측할 정도의 모습이긴 했다.
‘이, 이것 봐. 배꼽보다 높잖아. 내가 안 된다고 했지.”
위협적인 성기가 몸의 주인이 말할 때마다 끄떡끄떡하며 체체의 아랫배를 때렸다. 안 된다는 말과는 달리 몸은 솔직한 이블이었다.
체체는 손을 뒤로 가져가서 이 거대한 것을 품을 안쪽을 확인했다. 손가락 두 개를 넣자 어렵지 않게 들어갔다. 젤 한 통을 다 쓴 덕분에 충분히 풀려 있었다. 체체가 한 손으로 이블의 성기 기둥을 쥐고 다른 손으로는 이블의 단단한 복근을 짚었다. 이블이 바동거렸다. 진심으로 저항했다면 체체는 이미 날아가 벽에 부딪혔겠지만 다행히 제 위에 올라탄 게 뱁새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서 아주 미약한 바동거림이었다.
‘너, 너 뭐 하려는 거야.’
‘이제 넣겠습니다. 저 다치게 하기 싫으시면 가만히 계세요.’
‘아, 안 돼. 하지 마. 읏.’
체체가 이블의 성기 위에 천천히 내려앉았다.
‘하… 읏.’
한 번에 다 넣으려는 마음은 애초에 갖지도 않았지만 생각보다 더 버거운 굵기에 체체가 미간을 찌푸렸다.
‘흐읏. 너무….’
‘…….’
‘정말… 크네요….’
‘…….’
‘뜨겁고….’
이블은 아무 말이 없었다.
체체는 이블이 굳어 버린 걸 다행으로 여기며 허리에 힘을 주고 성기 위에 앉았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포기하고 벅찬 숨을 토해 내며 다시 허리를 들어야만 했다.
‘하아….’
귀두만 삼켰는데도 정말 안 되나 싶을 정도로 빠듯했다. 손으로 만져 본 바 아직 들어갈 길이가 한참이었는데 벌써 이렇게 꽉 들어차다니….
체체가 이블을 바라봤다. 살짝 풀린 붉은 눈과 마주치자 체체는 아랫입술을 물었다. 역시 이대로는 포기할 수 없다. 이블을 안에 들이고 말 것이다. 재차 비좁은 틈에 거대한 성기를 끼워 넣었다. 으읏, 잇새로 신음을 흘리며 끄트머리를 삼킨 그때 침대 시트만 뜯고 있던 이블이 체체를 끌어안았다.
‘내가… 할게.’
낮게 속삭인 이블이 체체를 안은 채 그대로 자세를 바꿨다. 끄트머리가 여전히 삽입된 상태였기에 체체는 흐읏 신음을 내뱉었다.
체체가 밑에 눕고 이블이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자세가 되었다.
위에서 바라보면 이블의 몸에 가려 체체는 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다갈색 다리와 이블의 어깨에 얹힌 손만 언뜻 비칠 뿐이었다.
‘아프면 말해.’
이블이 체체의 비좁은 구멍에 커다란 페니스를 천천히 밀어 넣었다.
체체의 안은 뜨겁고 좁았다. 성기에 달라붙는 내벽은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원망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한 손으로 체체의 옆구리를 손에 쥐자 상체의 대부분이 손에 감겼다. 새빨간 눈이 신음하며 허리를 뒤트는 체체를 담았다.
이블은 좀 더 안으로 파고들었다.
‘윽.’
너무 깊숙이 들어갔는지 체체가 다급하게 이블의 팔뚝을 붙들었다.
‘왜? 아파? 그만할까?’
‘읏, 괜찮…. 계속해 주…세요.’
‘알았어.’
체체는 조금 아픈 것 같긴 했지만 이 정도 왔으면 이제는 멈출 수 없었다.
이블은 체체의 얼굴을 진득하게 응시하면서 천천히 삽입을 계속했다. 기둥 중간의 가장 굵은 부분을 밀어 넣을 때쯤 체체가 미간을 좁히며 작게 도리질 쳤다. 찌푸린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억지로 넣으면 더 들어갈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이블은 여기까진가 보다, 하고 멈췄다. 이블이 작게 숨을 내뱉고는 고개를 들었다. 어디까지 들어갔나 체체의 아랫배를 살피던 눈이 커졌다.
‘아윽!’
천천히 들어왔던 게 일순간 내벽을 긁으며 단번에 빠져나가자 체체가 비명 같은 신음을 내질렀다.
체체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이블을 올려다봤다.
‘왜…?’
이블도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대답했다.
‘네, 네 배가 부풀었어.’
‘…….’
‘아랫배가 내 걸로… 부풀었는데. 어떡해?’
‘괜찮아요…. 그런 건….’
‘하지만 볼록하게 튀어나왔었는데. 씨발…. 아플 것 같았는데.’
순간 수치심을 주려는 말인가 했지만 이블의 정말 겁먹은 듯한 표정을 보고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체체는 조용히 속삭였다.
‘저는 좋았어요….’
이블이 믿기지 않는 눈초리로 체체를 쳐다봤다. 심지어 원망도 담겨 있었다…. 핏줄이 불거진 성기는 여전히 흉흉하게 곧추서 있는데 표정만큼은 상처받은 여린 연인이었다.
체체는 한숨을 삼키고는 납작한 아랫배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아프지도 않았고 오히려 만족했는데요….’
‘…….’
‘어차피 이젠 그만둘 수 없잖아요. 이블 님.’
‘응….’
너무 놀라긴 했으나 그만둘 마음은 없었던 이블이 다시 제 성기를 붙잡아 체체의 엉덩이 사이에 맞췄다.
좁은 입구에 비하면 너무 큰 것을 천천히 욱여넣었다. 체체의 안은 여전히 뜨겁고 좁았다. 길을 만들어 내며 파고들자 납작했던 아랫배가 부풀어 올랐다. 이블은 혼미해지는 정신을 붙잡았다. 체체는 이제 진짜 한계인 것 같은데 이블의 성기는 아직 남아 있었다. 이블은 체체의 좋았다는 말을 믿고 더 밀고 들어갔다. 그러자 방금 전보다 더 깊숙한 곳에 닿은 느낌이 이블과 체체 둘에게 동시에 들었다.
‘흐윽.’
체체의 신음이 높아졌다. 체체가 하으,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괜찮아? 어때?’
‘읏, 아파….’
‘너 지금 아프다고 했어?’
‘흣…. 아악!’
이블이 갑자기 성기를 쑥 빼는 바람에 체체가 파드닥거렸다. 물기 어린 금색 눈이 지금 또 뭐 하는 짓이냐는 원망을 담고 이블을 올려다봤다. 그러나 이블은 체체보다도 놀란 표정이었다. 거의 울상을 짓고 있었다.
‘네가 아프다고 했어!’
‘…이블 님.’
‘아프다고 했단 말이야! 이럴 줄 알았어. 아플 줄 알았어. 그래서 내가 안 된다고 했잖아!’
‘이제부터 제가 아프다고 하는 말은… 정말 좋다는 뜻으로 해석하시면 됩니다.’
‘뭐…?’
‘그리고… 하다 보면 제가 그만하라거나 안 된다고 할 때가 있는데 그것도 좋아서 하는 말이니까 무시하시면 돼요.’
이블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잘 이해가 안 돼.’
‘하다 보면… 알게 되실 거예요.’
‘그럼 지금도 좋았어?’
‘네, 이블 님은요?’
‘나도 존나 좋았어.’
‘그럼 계속해요. 제발… 이번엔 갑자기 빼지 말고….’
‘응.’
그렇게 이블이 다시 삽입을 시작했다. 지금까지처럼 천천히 해 주지는 않았다. 체체의 ‘좋았다’는 말을 너무 믿은 이블이 방금 들어갔던 부분까지 단숨에 침범해 들어왔다.
‘흐윽…!’
체체는 아랫배를 버겁게 채우는 크기에 급히 말했다.
‘잠, 깐 가만히,’
‘…….’
그러자 이블이 그대로 멈췄다. 망부석이 된 것처럼 일시 정지 해 준 덕분에 체체는 이블의 크기에 적응할 시간을 얻었다. 다만 내벽의 깊숙한 안쪽을 거대한 것에 짓눌린 상태로 있자 적응을 넘어서 오히려 간지러운 열기가 퍼져 나가고 발끝부터 저릿저릿한 감각이 피어올랐다.
‘으응….’
‘체체. 나 움직여?’
체체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블이 몸을 조금 뒤로 뺐다가 다시 퍽! 하고 박아 넣었다. 체체의 내벽이 경련했다. 조금 뺐다가 강하게 박으면 체체가 좋아한다는 걸 학습한 이블이 허리를 뒤로 물렸다. 체체가 긴장했다. 이블은 체체의 긴장을 실망시키지 않고 퍼억! 세게 쳐올렸다. 아윽! 체체가 허리를 튕겼다.
‘자, 잠깐. 이, 이블…. 흑.’
‘하, 체체. 네 안 너무 좋아. 미칠 것 같아. 이렇게 움직이면 되는 거지?’
‘네, 조금만 약하게….’
‘약하게.’
‘익숙해지게….’
‘익숙해지게. 알겠어.’
‘…아윽!’
이블이 체체의 말을 무시하고 허리를 거세게 움직였다. 체체의 좁은 안쪽에 꽉 들어찬 흉기가 각도를 바꿔 가며 안을 찔렀다. 퍼억, 퍼억. 그 속도는 빠르지 않았으나 체체가 버티기에는 힘이 너무 강했다. 게다가 한 번 강하게 박을 때마다 더 안쪽을 파고드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악, 아윽, 읏, 흑. 체체가 도리질 치며 신음했다. 이블은 허리를 쉴 새 없이 움직이면서 체체를 바라봤다. 헝클어진 회색 머리칼과 발개진 얼굴, 젖은 눈가. 늘 담담하고 무심하던 체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달뜬 신음까지.
이블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한계까지 벌어진 아래에 깊게 파고들었다가 단숨에 선단까지 뽑고, 다시 강하게 박아 넣었다. 퍽, 퍽 하는 외설스러운 소리에 점점 물기가 섞이기 시작했다. 이블이 다른 손으로 체체의 젖은 눈가를 어루만졌다. 손길은 다정했으나 허리 아래는 거칠고 잔혹했다.
‘으…. 읏. 아!’
허리를 움직이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체체는 이제 이블과 시선을 섞을 생각도 못 하고 강한 힘에 흔들리기만 했다. 이블이 힘껏 박을 때마다 체체의 작은 엉덩이가 짓뭉개졌다. 커다란 몸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양다리가 허공에서 힘없이 흔들렸다. 이블의 어깨를 붙들었던 손이 침대 위로 털썩 떨어졌다.
퍽, 퍼억, 퍽! 이블은 거세게 안을 드나들면서도 체체와 더 닿고 싶어서 체체를 끌어안기 위해 상체를 눕혔다. 연결 부위가 더욱 깊어지자 체체의 신음도 더욱 높아졌다. 이블은 체체의 양팔을 상체에 붙인 채 옭아매고 허리를 위에서 아래로 거의 직각으로 박았다. 얕게 박는 것도 아니고 끝까지 뺐다가 처박는데 그 속도 또한 체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처음엔 간지러웠던 수준의 쾌감이 이제는 뜨거울 지경이 되어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지배했다. 눈앞이 흐릿하고 머릿속이 번쩍번쩍했다.
‘아, 흐으. 아아….’
체체가 몸을 바르르 떨었다. 이블의 복부에 비벼진 성기가 흰 정액을 내뿜고 있었다.
이블은 놀랍게도 체체가 사정 중이라는 걸 알았을 텐데도 허리를 움직였다. 멈춰 줘야 한다는 기본 상식이 없는 듯했다. 체체는 말도 안 되는 쾌감에 휩싸여 입술을 뻐끔거렸다. 그걸 어떻게 이해했는지 이블이 체체의 뒤통수를 감싸고 입술을 겹쳐 왔다. 두툼한 혀가 작은 입 안을 파고들었다.
‘흡…. 으읍….’
체체는 혀의 자유마저도 빼앗긴 채 거칠게 흔들렸다. 이제는 퍼억, 퍽이 아니라 쾅, 쾅! 이었다. 한참 동안 체체의 입 안에 머물렀던 혀가 드디어 빠져 나가고 동시에 체체의 몸이 위로 들렸다. 이블은 양 무릎을 세우고 반쯤 허공에 들린 체체의 허리를 양손에 쥔 채 움직였다. 체체는 허공에서 흔들리는데도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다만 그 대체 언제 사정할지 몰라 불안했다.
‘이, 흐윽. 읏. 이블 님…!’
‘흐…. 어, 체체.’
‘천천히…. 아윽!’
‘천천히, 하고, 있는데.’
씨발, 욕이 들려왔다. 이블은 전혀 속도를 늦춰 주지 않았다. 그때 이블이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기에 체체가 얼른 이블을 밀어 내려고 해 봤지만, 이블이 체체의 양 팔목을 붙든 채 힘껏 박아서 실패로 돌아갔다.
계속되는 허리 운동에 대체 언제까지라는 의문이 생겼다가도 강렬한 쾌감에 흐려졌다.
퍼억, 퍽. 거센 마찰음에 체체의 신음은 “흐읏, 읏.”에서 “윽, 허윽.”으로 변해 갔다. 신음 사이에 “그만.”이라는 단어도 섞였지만 이블은 무시했다.
한참을 허공에서 흔들리다가 다시 침대에 누워서 박히고, 어느새 처음과 마찬가지로 이블의 위에 앉은 채 흔들렸다가 나중에는 양 발목을 이블의 어깨에 걸친 채 뚫리고 있었다.
마침내 이블이 체체의 안쪽 깊은 곳에 사정했을 때, 체체는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쾌감도 이쯤 되면 고통이었다. 온몸이 경련으로 파르르 떨리고 뜨거운 열감 때문에 눈빛은 흐리멍덩했다.
‘하…. 씨발. 존나 좋아.’
이블이 체체의 위에 엎드렸다. 여전히 성기를 결합한 채여서 체체는 압박감에 으윽, 신음을 내뱉었다. 그 신음이 사랑스럽다는 듯이 이블이 체체의 얼굴을 붙잡고 진한 키스를 했다. 체체는 도리질 치지도 못했다.
잠시 후 점차 강해지는 압박감과 이물감에 체체가 이블을 밀어 냈다. 아래에 들어와 있는 성기가 방금 사정했음에도 바로 단단해지고 있었다. 약간의 공포를 느끼며 바르작거리는 체체를 이블이 한 손으로 꾹 누른 채 속삭였다.
‘체체, 어땠어?’
체체는 이블을 올려다봤다. 붉은 눈에는 욕망이 가득했다.
‘좋았어? 아프진 않았어?’
‘네, 좋았습니다….’
‘그만하라고 했던 거 계속하라는 뜻 맞지?’
‘네.’
‘너 젖꼭지가 바짝 서 있어.’
‘…….’
‘어디 멍 들었는지 보자.’
이블이 체체의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어서 위로 올렸다. 어디 멍 들었는지의 ‘어디’는 손자국이 붉게 남았을 옆구리나 허벅지, 발목 등이 아니라 바로 아직도 자신을 품고 있는 회음부였다.
‘완전 꽉 물고 있는 것 좀 봐. 진짜 귀엽고 쫀득쫀득해.’
방금 전 젖꼭지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수치심을 주려는 의도는 아닌 듯했다. 솔직한 감상일 뿐이었다.
이블의 눈이 희번덕 빛났다.
‘언제 또 할까? 지금 계속할까? 난 또 하고 싶은데. 네가 힘들면 참아도 돼. 근데 너 할 수 있을 것 같아. 넌 용맹하잖아. 하지만 참으라면 참을 수 있긴 해.’
‘이블-.’
‘하지만 너도 진짜 좋았지? 한번 해 봤으니까 나 이번엔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참으라면 참을 건데 네가 하고 싶을까 봐 말하는 거야. 근데 진짜 네 좁고 뜨거운 안쪽에 사정하는 느낌 너무 좋았어. 살면서 처음 느껴 보는 감각이야. 아, 또 하고 싶다. 하지만 네가 무리라면 안 해도 돼.’
체체는 가만히 이블의 붉게 빛나는 눈을 올려다봤다.
SSS 오러 유저인 그는 방금 그렇게 흉포하게 날뛰었어도 힘들어하기는커녕 이제야 좀 살맛 난다는 얼굴이었다. 사실은 허락 따위 없이 계속 이 행위를 지속하고 싶을 것이다. 사정을 봐주지 않고 마음껏 움직이고 싶겠지. 그러나 자신의 욕심을 펼치는 대신 의향을 물어 오고 있었다.
체체는 진심으로 거부하면 이블이 바로 멈출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체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해도 된다고.
적어도, 이런 부분에서라도 그가 참아야 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
체체는 엔드스틱을 손에 쥔 채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그의 앞에는 가공되다 만 루젬 원석이 놓여 있었다. 일을 앞에 두고 딴생각을 하는 건 아주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이전에 딴생각을 한 건 이블과 잠깐 다퉜을 때였고, 지금 딴생각을 하는 이유는 이블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푸른 하늘과 하얀 뭉게구름을 바라보면서 떠올리기에는 너무 난잡한 그림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1년 동안 이블과 수없이 많은 밤을 보냈으면서 끝까지 다 넣지 않았다는 것을 모른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안쪽을 가득 메우는 버거운 크기. 그렇게 많이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압박감. 당연히 전부 들어섰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이블은 말로는 대단히 만족했다, 복상사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어쩌면 그동안 만족하지 못했던 건지도 모른다.
체체의 눈빛이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그의 곁에 있기에는 자신이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곧 고개를 저었다.
나는 좋았는데 너는 어땠냐, 또 하고 싶은데 언제 하면 되냐며 상기된 표정으로 속사포로 늘어놓던 귀여운 말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분명 이블도 자신과의 관계에서 만족하고 있다.
체체 또한 지금까지는 만족했다. 아니, 만족하다 못해 가끔은 정신이 나갈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젠 아니다. 이블이 참고 있다는 사실을 안 이상 체체에게 만족이란 없었다.
어떡해야 전부 넣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턱을 괴다가 손에 엔드스틱이 있는 걸 발견했다.
그제야 현재 시각이 평일 오후 두 시, 한창 업무 시간이라는 걸 깨닫고 화들짝 놀랐다.
이블과 점심 식사를 하고 헤어져 작업실로 들어왔을 때가 한 시니까, 무려 한 시간이나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평범한 직장인에게는 일상이지만 체체에게는 아주 드문 일이었다.
체체는 일단 이블에 대한 고민은 뒤로 미루고 눈앞의 과제부터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화재와 산불은 사람만 조심하면 충분히 막을 수 있다.’
이게 체체가 만들어야 할 루젬의 의도와 목적이었다.
체체는 원석 가공을 마저 마친 후 마무리 작업대에 올려놓고 노트북을 켰다. 루젬을 만들 때는 관련 분야 공부부터 시작했다. 처음 세공을 시작할 때는 멋모르고 무작정 만들기만 했는데, 언젠가 한번 여유 시간에 배경을 공부하고 작업에 들어가 보았더니 훨씬 수월하면서도 양질의 작품이 나왔다. 그 후로 이 방식은 체체의 루틴이 되었다.
보통은 먼저 공부하고 세세하게 구상해 놓은 후 세공 작업에 들어가지만 이번엔 기한이 사흘밖에 없으므로 우선 가공이 빨리 되는 원석을 골라 마무리 작업하는 시간에 구성하는 쪽을 택했다.
인터넷에 접속한 다음 관련 이슈, 논문들을 검색하고 수집했다. 그 수집한 자료는 이제는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더 잘 다루는 프로그램을 이용해 체계적으로 정리한 뒤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 갔다.
이번 전시회가 성황리에 끝나서 사람들이 변했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나태하지 않아야 이블이 나태할 수가 있다.
그가 권태로운 건 원하지 않는다. 그 사람에게 권태와 무료는 독이나 다름없으니까. 화산이 폭발한 현장에서도 무료함을 느끼는 사람이 아닌가.
그러나 이블이 사람들의 부주의함 때문에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하는 건 더더욱 원하지 않았다. 세상 그 누가 원치 않는 일을 안 하고도 살 수 있겠냐만, 자신이 할 수 있는 한에서는 최대한 연인의 ‘자유’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체체였다.
종이에 펜으로 여러 구도를 그리고 메모하며 한참을 생각하던 체체가 드디어 원석 보관함을 열었다. 열두 종류의 원석이 보관된 보관함에서 표면이 까칠한 녹색 원석을 꺼내 받침대 위에 잘 고정하고, 세공 전용 장갑을 착용한 뒤 엔드스틱을 집어 들었다.
“…….”
이제 진짜로 집중해서 작업을 시작해야 하는데….
체체의 시야에 엔드스틱 끝부분이 걸렸다.
정확히는 끝부분에 그려진 작고 귀여운 뱁새 그림이.
이 엔드스틱은 이블이 직접 주문 제작한 것이었다. 체체는 엔드스틱을 쥔 손을 내려다봤다. 세공 전용 장갑 또한 이블이 주문 제작했고… 손등에 포동포동한 뱁새가 그려져 있었다.
“…….”
그대로 작업대의 수납함을 열었다. 값비싼 장갑들에 다 하나같이 뱁새 그림이 있었다. 동그랗게 앉아 있는 뱁새, 포르르 날아가는 뱁새, 지저귀는 뱁새, 하늘을 올려다보는 뱁새, 갈색 뱁새들 사이에 간혹 있는 하얀 오목눈이까지…. 전부 이블이 주문해서 체체에게 준 것이었다.
이뿐만인가? 엔드스틱도 뱁새 그림이 한가득했고 작업용 앞치마에도 뱁새 그림이 있다. 심지어 저택으로 돌아가면 카펫 무늬부터 커튼 무늬까지 전부 다 뱁새다.
‘마음은 알겠지만 넌 너무 작은 뱁새라서 안 돼.’
‘튼튼하면 뭘 해. 뱁새인데.’
체체는 번개 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 이게 문제였다.
이블이 자신을 뱁새라고 표현하는 것. 물론 정말로 체체를 인간이 아니라 붉은머리오목눈이라는 조류라고 여기는 건 아니지만, 그만큼 연약하고 작은 새에 비유하는 것.
내 뱁새, 내 작은 뱁새, 내 아기 뱁새, 뱁새 요정….
체체는 그 모든 걸 이블의 애정 어린 애칭이라고 생각하며 방치했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말에는 힘이 있다.
그냥 평범한 탈타르인을 ‘난민’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탈타르인은 난민이 된다. 그 난민을 ‘뱁새’라고 부르면서 체체는 이블의 작고 약한 새가 되었다.
나는 진짜 뱁새가 아닌데. 절대로 여리거나 약하지 않은데. 체체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 더 큰 건장한 군인들 대여섯 명을 소울 오러를 사용하지 않고서도 제압했을 정도로 체술이 뛰어난 군인이자 용병이었다.
물론 이블에 비하면 부족할지 몰라도…. 수년을 군인으로 살아온 체체였다.
이블에게 그 사실을 주지시켜야만 했다.
***
이블과 체체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순후주스를 마시면서 저택 정원을 거닐었다. 겨울에 매화나무 열두 그루를 담벼락 안쪽에 심었는데, 황량한 풍경에 걸맞게 볼품없던 가지들이 봄이 오면서 하나둘씩 연두색 이파리들을 매달더니 이제는 꽃봉오리를 맺을 준비까지 하기 시작했다.
“일주일만 있으면 꽃이 필 거야. 그때 꽃놀이하자.”
“꽃놀이는 어떻게 하는 건가요?”
“그냥 꽃 아래에서 순후주스 마시면서 꽃 구경하고 사진 찍다가 뽀뽀하면 돼.”
“재밌겠네요.”
“그렇지? 나도 처음이야. 존나 기대된다.”
이블과 체체는 매화나무 근처 벤치에 앉았다. 한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 넓은 정원을 바라보던 체체는 새삼 처음 저택에 왔을 때와 많은 게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황량하다고 표현하기가 미안한 곳이 되었다.
정원에는 루젬 작업실에 이어 나무로 지어진 오두막과 지붕이 없는 커다란 평상 마루가 생겼다. 산책로를 따라 매화나무 외에도 참나무, 소나무 그리고 몇 가지 관상수도 심었는데 어디서 그 소문을 들었는지 산책하다 보면 뱁새와 참새, 박새 등 작은 새들을 비롯해 다람쥐와 청설모 같은 작은 동물들을 꼭 한 번은 발견했다.
이블이 물소리가 시끄럽다며 없애 버린 구덩이도 지금은 면적을 넓히고 물을 채워서 커다란 연못이 되었다. 투명한 물 아래에서 알록달록하고 예쁜 물고기들이 헤엄치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커다란 새들도 찾아왔다. 한번은 부리가 굉장히 크고 길쭉한 하얀 새도 발견했는데, 그걸 보고 이블이 체체를 꼭 끌어안으며 이런 말을 했다.
‘쟤는 뱁새도 먹게 생겼다. 조심해.’
진지한 표정을 떠올리던 체체가 웃자 이블이 체체를 돌아봤다.
“왜? 뭐 재밌는 거 생각났어?”
체체는 언제나 솔직했으므로 순순히 대답했다.
“이블 님이 귀여우셔서요. 뱁새는 제가 아니라 이블 님한테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이블 님은 하얀 오목눈이 쪽이지만요.”
“…하.”
체체를 빤히 보던 이블이 와락 끌어안고 얼굴 여기저기에 입맞춤했다.
“그거 알아? 너 가끔은 너무 귀여워서 먹고 싶을 때도 있어. 만약 내가 너한테 이를 들이밀면 있는 힘껏 도망가야 해. 그래 봤자 금방 잡히겠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마음껏 드세요.”
“이러고 있다. 어휴.”
이블이 체체의 뺨에 손가락을 대고 오므렸다. 도톰하고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볼살은 정말 먹음직스러웠다. 하지만 이블은 체체를 먹지 않고 체체의 무릎 위에 드러누워 버렸다.
노을빛을 머금은 붉은 눈이 체체를 올려다봤다. 먹고 싶다는 말과 달리 포만감으로 가득한 얼굴을 보며 체체가 이블의 내려온 앞머리를 사르륵 쓸어 넘겼다.
“이블 님. 염력 쓰지 마세요.”
“뭐?”
“지금 오러 쓰고 계시잖아요. 오러 쓰지 마시고 편히 머리를 눕히세요.”
“너 뼈 부러져.”
“안 부러집니다. 저는 튼튼해요.”
진지한 체체의 목소리에 이블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체체는 평소와 같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이블 님께서 어떤 병을 앓고 계신 것 같아요.”
“병? 혹시 상사병은 아니지? 그건 짝사랑할 때 앓는 병인데.”
“내새끼조그매병이란 게 있대요.”
“그게 뭔데? 처음 들어.”
체체는 이블에게 인터넷에서 찾아본 병의 증상을 설명했다. 상대를 너무 귀여워하다 보니 마냥 조그맣고 아담하고 아기처럼 보이는 증상. 이블이 푸하하 소리 내서 웃었다.
“존나 웃긴다. 걱정하지 마. 나는 그따위로 객관성과 이성을 잃어버린 팔불출 같은 병 따위는 앓고 있지 않으니까. 나는 네 정확한 사이즈를 알고 있어. SSS급 모셔너는 한번 눈으로 훑는 것만으로도 무게를 바로 측정하거든.”
“제 몸무게가 몇인 것 같으세요?”
“9g이잖아. 정확하지.”
“…….”
이블이 체체의 납작한 아랫배를 주물렀다.
“요즘 살쪘나. 10g?”
“…지금 제가 입고 있는 옷은요?”
“2.4kg.”
“이 순후주스는요?”
“500g.”
“제가 들고 있는 핸드폰은요?”
“280g.”
“저는…?”
“체체 9g.”
“…….”
“체체 9g. 9g 체체. 체체는 9g.”
이블은 체체의 이름을 부를 때 음률을 담아서 부를 때가 있는데, 지금이 그러했다. 콧노래를 부르며 체체의 아랫배에 코를 박고 비비는 이블의 머리칼을 체체가 부드럽게 쓸었다. 그러면서도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래도 이블 님께서 그 병을 심각하게 앓고 계신 것 같습니다.”
이블이 고개를 들었다.
“너 SSS 모셔너 눈대중 무시해?”
“저는 뱁새가 아니고 군인 출신의 튼튼한 남자입니다.”
“튼튼한 남자.”
“네. 당장에 이 저택의 노유저 경비원들 정도는 오러를 사용하지 않고도 제압할 수도 있어요. 이블 님이 보시기엔 연약해 보이겠지만 저는 이블 님 생각보다 건강하고 튼튼합니다.”
이블이 체체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감정을 담은 오러가 둘의 주위에 넘실거렸다. 속눈썹이 그늘을 만들어 은은한 기운을 띄는 금색 눈을 들여다본 이블이 씨익 미소 지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내 걸 끝까지 넣어 달라는 거지?”
“…네.”
“내 뱁새, 아침부터 밤까지 완전 음란한 생각에 빠져 있었네. 음란 뱁새. 야한 뱁새.”
“…….”
“방탕 뱁새. 욕망 뱁새.”
뱁새가 아니라고, 튼튼한 남자라고 정정해도 음란 뱁새라며 멜로디를 붙여서 놀리던 이블이 문득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얍.”
이블이 체체의 중심을 바지째로 앙 입에 물었다.
“오늘은 내가 입으로 해 줄게. 우리 튼튼한 체체 거.”
입에 바지를 문 채 물어서 발음이 좋지 않았지만 체체는 충분히 알아들었다.
“그러고 나서 저한테 끝까지 넣으실 건가요?”
“그건 안 되지. 대신 입으로 해 준다니까?”
“그게 어떻게 대신이 될 수 있나요. 교환 가치가 같지 않아서 교환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너한테 끝까지 넣는 것만 빼면 다 할 수 있어. 다른 건 뭘 원해?”
잠시 생각하던 체체가 말했다.
“그럼 제가 이블 님에게 입으로 해 드릴게요. 목구멍까지 넣어 주세요.”
“…….”
구강성교는 본래도 가끔 했었다. 항상 체체가 먼저 시작했다. 대뜸 이블 앞에 무릎 꿇고 앉거나, 마주 안은 상태에서 불시에 손을 뻗거나…. 커다란 기둥을 손에 쥐고 아이스크림을 녹여 먹듯이 빨고 핥다가 쿠퍼액이 나오면 입 안에 끄트머리만 집어넣고 쪽쪽 빨아 먹었다. 체체는 뭐든 다 작아서 끄트머리만 넣어도 볼이 볼록 튀어나오는데 이블은 그때마다 체체의 뒤통수에 손을 얹고 누르지 않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해야만 했다.
그 장면을 떠올린 이블의 중심이 단번에 꼿꼿이 일어났다.
일단 지금 체체의 말뜻은…. 그러니까 목구멍까지 넣으라는 건 늘 해 오던 ‘끄트머리만 입에 머금는’ 섹스를 뜻하는 게 아닐 터이므로 이블은 애써 냉정한 표정을 지었다.
“네 입에 내 걸 다 넣으면 기도 막혀서 큰일 날 수도 있어. 모셔너도 기도가 막히면 숨 못 쉬거든. 절대 안 돼.”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면 되는 게 뭔가요?”
“네 몸에 해가 안 되는 건 다 되지.”
“저는 이블 님이 참고 견디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블이 벌떡 일어났다.
“씨발, 나도 참고 견디는 거 존나 싫어하거든. 내 성격 모르냐? 난 싫어하는 건 절대 안 해! 이게 무슨 뜻이겠어? 끝까지 안 넣어도 싫지 않다는 거야. 싫기는커녕, 씨, 너랑 할 때마다 나 좋아 죽는 거 너도 알잖아.”
“끝까지 넣으면 그것보다 더 좋을 겁니다. 한번 느껴 보고 싶지 않으세요?”
“그럼 뭐 해. 네가 아프거나 다치면 내 쾌감이 얼마나 개쩔든 그게 무슨 소용인데?”
“그러니까 저는 안 다친다고요.”
체체가 조금 목소리를 높였다. 아침부터 같은 얘기를 반복하니 체체도 흥분한 것이다.
“일단 한번 해 보고 말씀하세요. 제가 다치는지, 안 다치는지.”
“안 해봐도 알 수 있어. 너 같은 작은 뱁새는.”
“저 뱁새 아닙니다!”
“…….”
체체가 허스키한 보이스로 낮고 강하게 말하자 이블은 놀라서 입을 닫았다.
체체의 고운 미간은 찌푸려졌고, 올려다보는 금빛 눈엔 서러움과 원망이 담겼다. 작은 입술의 양 끝은 살짝 아래로 내려와 ‘^’ 모양이 되었으며 턱에는 작은 호두가 생겨 있었다. 양손은 주먹을 꽉 쥔 채였다.
체체의 감정이 넘실넘실 밀려들어 왔다.
자신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 이블에 대한 서운함이었다.
이블은 놀라는 한편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흥분한 체체를 보는 건 정말 희귀한 일인데, 다른 것도 아니고 ‘나를 위한 마음’에 흥분했다는 게 아주 만족스럽고 사랑스러웠다.
이 상황에서 웃으면 안 되는 걸 알아서 참아 보려고 했지만 콧구멍이 벌름벌름하고 양 볼이 씰룩씰룩해서 누가 봐도 ‘웃음을 참으려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열심히 애쓰고 있는 이블을 빤히 보던 체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블 님.”
“응응. 아 씨, 왜 자꾸 웃음이 나오지. 미쳤나 봐. 사람들이 괜히 나를 싸패라고 부르는 게 아니라니까.”
“의견이 합치되기 전까지 섹스 안 하겠습니다.”
“…뭐?”
이블이 눈을 크게 떴다.
체체가 총총총 저택으로 걸어갔다.
“야, 그게 무슨 개…. 소리야. 섹스를 안 하겠다니?”
“…….”
이블이 허겁지겁 체체를 따라가서 가로막고 서자 체체가 아무렇지 않게 옆으로 피해서 다시 걸었다. 그 뒤를 졸졸 뒤따르며 이블이 말을 붙였다.
“농담이지? 그냥 협박인 거지? 너 섹스 완전 좋아하잖아. 음란 뱁새잖아!”
뱁새라는 단어에 체체가 찌릿, 하고 이블을 잠깐 흘겼다.
“저는 음란하지만 뱁새가 아니라서 섹스 안 할게요.”
“어? 아. 그래, 알았어. 너 뱁새 아니야. 튼튼한 사람이야. 그럼 섹스할 거지?”
“끝까지 다 넣으실 건가요?”
“아니, 그건 안 된다니까. 너 같은 작은 뱁새한테….”
“…….”
“아오, 씨발.”
이블이 제 입을 손바닥으로 퍽퍽 치고는 체체의 눈치를 보며 걸었다.
오늘 밤에 체체의 안에 박고 흔들지 못한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기운이 없어졌다. 체체가 원망스러웠다.
‘참느라 얼마나 힘든데 그것도 몰라 주고.’
바로 그 ‘참느라 얼마나 힘든데’ 때문에 체체가 강경하고 나오는 것을 알면서도 원망스러웠다.
두 사람이 저택에 다다르자 마침 저택을 나오고 있던 힙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체체가 두 발로 걷고 있다니…. 산책을 마친 후에는 항상 이블의 품에 안겨서 와야 하는데…!
“두 분, 싸우셨군요…!”
이블이 평범한 사람 같은 행동을 하면 무조건 반가워하는 힙스가 저도 모르게 반갑게 외쳤다. 이블이 그를 홱 노려봤다.
“지금 누구 보고 싸웠대. 이제 나이도 들었으니 그만 죽고 싶어? 평생 병마와 싸우게 해 줄까?”
“죄송합니다. 그럼 이만….”
힙스가 서둘러 인사하고 저택 문을 닫고 나갔다.
이블은 체체를 쳐다봤다.
“우리 싸운 거야?”
체체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화해하자.”
“네.”
“그럼 오늘 할 거지?”
“아니요.”
“화해했잖아!”
“그거랑은 다릅니다.”
“하, 진짜.”
이블이 체체를 끌어안고 부드러운 잿빛 머리에 얼굴을 비볐다.
“왜 내 맘을 몰라 주냐. 난 널 생각해서 그런 건데.”
“왜 제 마음을 몰라 주세요…. 전 이블 님을 생각해서 그런 건데.”
“…….”
체체가 이블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말도 잘하는 내 뱁새. 앙칼진 뱁새. 용맹한 뱁새.
이블은 이제 체체 앞에서 함부로 꺼내지 못하게 된 뱁새 단어를 속으로 실컷 내뱉으며 체체의 정수리에 키스했다. 체체가 허리를 끌어안아 왔다. 체체도 섰고, 이블도 섰다. 하지만 이블은 자신이 다 벗고 유혹해도 체체가 전혀 아랑곳하지 않을 거란 걸 알았다. 체체는 그런 단호하고 강인한 뱁새다.
저번에 다퉜을 때는 결국 이블의 뜻대로 되었다. 체체는 개인 의뢰도 받고 싶어 했지만 결국 이블이 원하는 대로 공공 의뢰만 받고 있다.
이번에는 어떻게 될까? 이블은 어쩐지 앞날이 보이는 것 같았다. 결국 체체에게 지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 또한 체체에게 전부 넣기를 원하니까.
***
이블과 체체가 탄 전용기가 알시티 서부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인 잉데아의 이착륙장에 착륙했다. 제임스가 창밖을 어딘가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가운데 서 계신 분이 잉데아 시장이십니다. 30분 전부터 와 있었다고 하는군요.”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블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아침부터 기분이 저조하다는 티를 내었기에 제임스는 시장의 옆에 있는 전시회 총괄과 잉데아 센터 지점장에 대해서는 설명하기를 그만뒀다.
이블은 시장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체체의 옆에 달라붙었다.
“체체, 저 시장이란 놈 얼굴에 기름기 도는 거 봐. ‘나 엄청 부패한 정치인이에요’라고 써 있어. 내가 한번 발로 차서 굴려 볼까? 돈 떨어지나 안 떨어지나.”
저게 무슨 소리야. 제임스는 기겁하며 체체를 쳐다봤다.
“…….”
그런데 체체가 입술을 오물거리더니 그냥 닫아 버렸다. 본래 이럴 때는 ‘이블 님.’ 하고 이름을 불러서 자제시켜야 하는데.
‘아직도 화해를 안 하셨군.’
두 사람이 싸움인 듯 싸움 아닌 싸움 같은 싸움을 한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평상시처럼 달라붙은 채 다니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둘이 싸웠다는 걸 몰랐다. 측근들만 미묘한 차이를 느끼며 조마조마해할 뿐. 대체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 그 이유를 힙스를 비롯한 저택 사람들도, 제임스를 비롯한 비서진도 몰랐다.
제임스는 일주일이나 이어진 이 원인 모를 싸움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기를 바랐다. 예전엔 이블의 기분에 따라 주식장이 흔들릴 때마다 큰돈을 벌었기에 환영할 일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그냥 안정적인 매매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블과 체체가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다가 이제 좀 평범하게 연애하고 평범한 연인처럼 사랑싸움을 좀 하겠다는데 굳이 온 세상에 알려질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결정적인 문제는 둘의 싸움으로 제임스의 고생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이블은 어린애처럼 체체를 자극하겠다고 ‘나쁜 짓’을 해 대고, 체체는 신경 쓰고 있으면서도 아닌 척 방관하니 이블의 나쁜 짓에 대한 수습은 제임스가 할 수밖에 없었다.
정중하게 인사해 오는 잉데아 시장과 마주했을 때 제임스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이블의 발차기를 막겠다고 각오했다. 그러나 다행히 이블은 시장을 발로 차지 않았다. 역시 그냥 체체의 관심을 끌겠다고 흉악한 발언을 한 모양이었다.
점심시간에 맞춰서 도착했기 때문에 근처 호텔에서 오찬을 한 뒤 전시회장으로 향했다. 전시회장 근처에는 이블과 체체의 머리털 끄트머리라도 보겠다고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이동해야 했는데, 이블은 그 와중에도 체체의 머리털 끄트머리도 보여 주지 않겠다는 듯 품 안에 꼭 가두고 걷는 심술궂은 행동을 선보였다. 그러나 구경꾼들은 오히려 그 모습에 환호했다.
인원 제한을 둔 내부는 확실히 바깥보다는 쾌적했다.
상당히 급히 열린 전시회지만 공들여 준비한 것처럼 깔끔하게 잘 꾸며져 있었다. 특히 로비에 이번 전시에 참여하는 세공사들의 사진이 붙어 있었는데, 그중에서 체체의 사진이 가장 컸다. 다른 이들의 다섯 배는 되는 크기였다. 체체가 가장 데뷔가 늦은 신인인데도 그러했다.
“체체 사진 잘 나왔네. 만약 세상에 체체 같은 얼굴만 있었으면 사진사라는 직업은 존재하지 않았을 거야. 언제 어디서 찍든 저렇게 예쁘게 잘 나오니까. 어떻게 생각해, 시장?”
“아, 예…. 그, 그렇…죠. 사진사는 없었을…. 네….”
“뭐야. 왜 더듬어? 설마 내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냐?”
“아뇨! 너무나 옳은 말씀이십니다. 체체 세공사님의 미모가 세상을 평화롭게 만듭니다!”
“왜 이렇게 크게 말해. 그리고 씨발, 얘 이름 발음할 때 선 넘는 애정이 엿보이는데. 너 얘한테 관심 있어?”
“그럴 리가….”
“뭐? 관심이 없다고? 사람이면 어떻게 세상에서 가장 예쁜 애한테 관심이 없을 수가 있는데?”
이건 그냥 시비였다. 시장과 수행원들이 전시회 관계자들이 죄다 체체를 힐끔거렸다. 체체는 이번에는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거부하지 않았다.
“이블 님. 그만하세요. 다들 당황하셨잖아요.”
“왜 당황하지. 내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고.”
“당황할 만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예쁜 분은 이블 님이신데 자꾸 저라고 하시니까요. 그렇죠, 시장님?”
이번에야말로 가장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체체의 표정이 조금의 장난도 섞이지 않은 듯 진지해서 시장은 더 버벅거리며 대답했다.
그렇게 주위 사람들 괴롭히면서 애정을 확인하는 둘의 뒤로 제임스는 핸드폰을 들어 전시회장 내부 사진을 촬영했다. 저 둘의 애정 행각이야 이제 익숙해졌고, 분명히 나중에 이블이 로비에 걸린 커다란 사진을 보내라고 할 터이기 때문이었다.
루젬 전시장으로 들어서기 전 사진 전시장을 지나야 했다. 역대 봄마다 일어난 치명적인 화재 사건들이 정리된 사진전이었다. 이블은 한 톨도 관심이 없었지만 체체가 관심을 보여서 천천히 걸었다.
보고 싶은 건 자유롭게 보라고 하고 싶었지만, 오랫동안 눈길을 받지 못하자 또 어린애처럼 질투심이 샘솟은 이블이 체체의 손에서 팸플릿을 가져갔다. 질투한다고 뭐 눈을 가리지도 못하고 옆에서 깨작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시큰둥하게 팸플릿을 후루룩 넘기던 이블이 말했다.
“외국 센터에도 의뢰했어? 예산을 꽤 많이 썼네?”
“예. 작년에 정말 큰 산불이 일어났어서…. 그때 모션 오러 유저만 열 분이 오셨습니다. 올해에는 산불 없이 조용히 지나가자는 뜻에서 체체 세공사님을 포함해 총 21명의 저명한 세공사님들을 모셨습니다. 엘렌 님, 꾸밀린 님, 표드 님…. 어워드 수상자들만 아홉 분입니다.”
시장이 말한 엘렌, 꾸밀린, 표드는 모두 유명한 세공사들로 체체의 한참 선배들이었다. 루젬 세공 업계에는 대회나 시상식이 많은데, 보통 ‘어워드’라고 하면 연말에 크게 여는 시상식을 말한다.
체체는 저 유명한 세공사들과 함께 작년 어워드 수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블은 이 사실을 얘기하지 않고 지나칠 수가 없었다.
“체체도 작년 어워드에서 상 받았어.”
“예, 공공 의뢰 작품으로 어워드에서 신인상을 수상하셨죠.”
“신인상은 살면서 단 한 번만 받는 상이야. 한번 놓치면 영원히 받을 수 없어. 그런데 체체는 받았어. 뭐 당연한 결과지만. 심사위원들도 눈이 있으면 체체한테 상 줘야지. 참고로 나는 절대로 입김 넣은 적 없어. 오히려 체체가 상 받지 않기를 바랐거든? 내 체체 더 유명해지는 거 싫었단 말이야. 오히려 상 주지 말라고 로비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냉큼 상을 줘 버린 거지. 하, 씨. 쟤가 만든 게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 지들 주제에 알아 가지고. 하긴 생각을 하는 동물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네…. 너무나 옳으신 말씀….”
“야, 시장. 체체가 상 받은 루젬 무슨 내용이었는지 읊어 봐.”
갑작스러운 테스트였다.
“에어컨을 1도 줄이면 멸종 직전의 동물들이 100종 살아난다는 아름답고 교훈적인 내용이었습니다.”
“흠.”
잉데아 시장이 이블의 깜짝 테스트를 무사통과했고, 다행히 아무 일 없이 관람을 계속 진행할 수 있었다.
전시장 내부는 총 7관으로 구성되었고, 한 관에 세 개의 홀리아젬이 전시되어 있었다. 방문객들은 아름답고 신비로운 홀리아젬 대신 죄다 이블과 체체만 쳐다보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의 시선엔 이골이 난 둘이기에 쏟아지는 시선쯤은 가뿐히 무시했다.
“이블 님.”
체체가 이블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져간 팸플릿을 다시 달라는 것이었다.
“하나하나 다 구경할 거야?”
“네.”
“그럼 그 시간 동안 나는 뭐 하라고. 옆에서 네 예쁜 얼굴만 쳐다보고 있으라고? 내가 그걸로 만족할 것 같아?”
“네.”
“…….”
이블이 체체에게 팸플릿을 돌려줬다. 체체가 팸플릿 첫 페이지를 펼치고 첫 번째 홀리아젬을 터치해 작동시켰다. 울창한 숲이 펼쳐졌다.
이블은 숲이 나오든 바다가 나오든 관심 없고 체체 것만 보고 얼른 집에 돌아가고 싶었지만…. 어쩌겠는가. 얘 눈이 이렇게 반짝반짝한데.
체체는 루젬 세공에 열정적이었다. 늘 담담하고 무심한 애가 눈을 반짝이며 얘기하는 주제는 딱 두 가지였다. 이블과 관련된 것. 루젬과 관련된 것. 이블은 처음에는 체체가 작업실에 처박혀 있으면 작업대 위를 뒹굴면서 떼를 쓰기도 했지만…. 이제는 나름대로 마음을 넓게 먹고 체체의 일을 응원하고 있었다.
너른 마음의 이블이 체체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체체는 루젬을 구경하면서 자연스럽게 기대왔다.
히이익,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퍼져 나왔다.
“맙소사. 꼭 진짜 연인 같다.”
“세상에…. 진짜 연인 맞긴 한데 꼭 진짜 연애하는 것 같다….”
“와, 둘 다 잘생겼고 예뻐. 그런데 꼭 진짜 사귀는 것 같다….”
여기저기서 속닥거리며 사진과 동영상 촬영을 해 댔다.
여행도 잘 가지 않고 저택 내부에서 주로 데이트를 즐기는 두 사람의 거의 유일한 공개 야외 데이트는 전시회 관람이었다. 그동안은 제임스가 둘의 원활한 데이트를 위해 미리미리 대관을 했기에, 이렇게 많은 방문객 앞에서 촬영을 허용하고 전시회 데이트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제임스는 이블이 화를 낼까 봐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이블은 완전히 사람들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고 늘 하던 전시회 데이트처럼 체체를 꼭 안은 채 조잘조잘했다.
“체체, 이건 너무 자극적이지 않아? 작은 화재가 도시를 멸망시키다니 아무리 사람들에게 경고하기 위함이라고 해도 나는 이런 건 협박처럼 느껴져서 싫더라.”
협박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 바로 이블 엔덤이었다.
“다 재미없다. 빨리 보고 나가자. 아, 잠깐. 포토 존이네. 저기 서 봐. 사진 찍어 줄게.”
빨리 나가자면서 관마다 있는 포토 존에서 꼭 체체 사진을 찍었다.
“야. 네 거가 제일 멋있고 잘 만들었어. 네가 내 남친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그래. 내가 얼마나 냉철한 사람인지 알지? 냉철하게 죄다 쓰레기고 네 것만 존나 작품이야. 저 사람들도 네 루젬 보면서 기운 빠졌겠다. 압도적인 예술성에 더는 세공 못 하겠다고 때려치우는 거 아냐? 그렇게 세상엔 루젬 세공사가 너 혼자 남아 버리는 거지. 그러니까 좀 덜 열심히 작업해.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한테 기회를 좀 주란 말이야. 알았어?”
칭찬도 저 정도면 조롱이 아닐까?
그러다가 어떤 구경꾼이 조금 큰 소리라도 내면 이블이 바로 고개를 홱 돌려서 붉은 눈을 부라렸다.
“씨발, 누가 전시회장에서 소음을 내? 우리 구경 방해하면 다 죽여 버-.”
“이블 님. 하지 마세요.”
“하지만 저 새끼가 먼저.”
“이블 님.”
“웅. 알았어.”
이블이 체체의 정수리에 볼을 비비적비비적했다. 지켜보는 이들은 안도해야 할지 기겁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블 데빌이 ‘사랑꾼’이라는 별명을 얻기는 했지만 아직 많은 이에게는 안하무인 폭군이었다. 까칠하기만 할 것 같은 냉미남이 저보다 한참 작고 예쁜 체체를 품에 안고서 그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발언과 행동을 해 대는데, 그런 말도 안 되는 행동에 체체는 익숙하다는 듯 네, 대답하거나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 할 일(루젬 구경)을 할 뿐이었다. 이블도 놀랍지만 체체한테도 놀랐다.
‘내가 이블체체 데이트 실제로 봤는데, 이블이 체체한테 혼자 엄청 치대고 체체는 무덤덤하더라. 꼭 산책 나와서 잔뜩 신이 난 악마견이랑 목줄 꼭 붙잡고 통제하는 주인 같았어.’
이런 목격담을 인터넷에 올리면 누가 믿을까?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믿기 어려운데.
아무튼 이블이 정말 말랑말랑한 사랑꾼이 된 거라면 여러모로 세상엔 이득이었다.
사람들을 여러모로 놀라게 하면서 마지막 관에 도착했다. 드디어 체체의 홀리아젬을 감상할 순서가 되자 이블의 뒤에 들뜬 꼬리가 비치는 듯했다. 물론 그 꼬리는 강아지 꼬리는 아니고 악마 꼬리였다.
“이블 님은 이미 보셨잖아요.”
“네 건 보고 또 봐도 좋아.”
체체의 홀리아젬은 관람객의 참여를 유도하는 형식이었다. 누군가 무신경하게 버린 담배꽁초가 무시무시한 산불로 번져 가는데, 이때 관람객이 담배꽁초들을 전부 밟아 꺼야지만 산불이 꺼진다.
그저 보이는 수준을 넘어서 노유저의 행위로 달라지는 환상술을 할 줄 아는 세공사는 흔치 않았다. 체체가 어워드에서 신인상을 받은 이유였다.
이블은 체체의 루젬 덕분에 올해는 큰 화재 없이 지나갈 거라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모든 관람이 끝나자 한 시간이 조금 넘게 지나 있었다.
전시회장을 나서며 시장이 말했다.
“체체 님을 시작으로 다른 세공사님들이 차례로 방문하셔서 설명회와 사인회를 가질 예정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공사님들의 루젬으로 많은 깨달음을 얻어 이번 봄은 산불이나 화재 사고 없이 무사히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네. 저 또한 바랍니다.”
체체의 목적은 화재가 없어져 이블이 파견 올 일도 없게 하는 것이므로 진지하게 끄덕였다.
그러나 이블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체체한테도 설명회랑 사인회 하라고 압박한 거야, 지금?”
“네? 아, 아닙니다. 전혀…. 절대…. 안 하셔도 됩니다.”
“뭐야. 씨발, 체체 홀리아젬 설명은 듣고 싶지 않다는 거야? 체체 사인받기 싫어? 어떻게 체체 사인이 받기 싫을 수가 있어?”
“아뇨, 그, 받고 싶습니다. 사실 정말 사인받고 싶습니다.”
“이것 봐. 역시 애한테 사인회 해 달라고 부담 주는 것 맞잖아. 이럴 줄 알았어. 인간은 다 똑같아. 처음엔 방문만 해 달라고 했으면서 점점 원하는 게 많아지지.”
뭐 어쩌라는 거야.
짧은 시간 동안 계속 반복되는 이 상황에 사람들은 동시에 생각했다.
역시 이블은 이블이다. 절대로 말랑말랑 사랑꾼이 될 수 없다….
그런 결론을 내리자 아까 체체의 루젬을 칭찬하던 발언들이 다르게 해석되었다.
‘체체가 이런 루젬까지 선보였는데 불내면 다 죽여 버린다. 알아서 해라.’
서부 지역 사람들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절박한 의미로, 반드시 올봄에는 화재를 일으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
잉데아에 온 김에 근처의 유명한 관광지에 들렀다가 이착륙장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제임스가 운전석 옆에 앉지 않고 이블, 체체와 동승했다. 업무 처리할 것이 있어서였다. 이블과 제임스가 업무 얘기를 하는 동안 체체는 전시회 도록을 펼쳤다. 그러나 집중이 안 되어 책을 덮고 핸드폰을 꺼냈다.
촬영이 자유로웠으니 기사가 잔뜩 올라왔을 것이다. 예상대로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에 ‘이블♥체체 전시회 데이트’라는 헤드라인이 크게 떠 있었다.
체체는 좋게 쓰인 기사들을 몇 개 읽다가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들어갔다.
이번에도 예상대로 전시회 방문객들의 목격담이 올라와 있었다.
- 이블이랑 뱁새 완전 그거 아니냐ㅋㅋㅋ지랄견과 견주
- 근데 ㄹㅇ잘 어울리긴 하더라 둘다 같은장르의 미남과미인 느낌?
- 이블 무서워..ㅠ 사랑꾼이면 멀 해 뱁새 한정인데 ㅠ
- 체체는 이블이 그렇게 요정이라고 불러 대는 이유가 있었음을,,,
- 이블네 요정 걍 인형임ㅋㅋ 어른 하나 요정 하나 <-딱 이거였닼ㅋㅋㅋ
작년 겨울에 이블과 체체는 놀이공원 데이트를 시도했었다.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평범한 연인처럼 데이트해 보자 해서 대관도 하지 않고 인원 제한만 두고 갔는데….
성큼성큼 매표소로 향한 이블이 당당하게 외쳤다.
‘어른 하나. 요정 하나.’
결국 놀이공원에서는 회전목마 하나 타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매표소에서 ‘어른 하나. 요정 하나.’를 외친 일은 이제 전 세계에 모르는 이가 없는 일화가 되었다. 그 후로 놀이공원마다 ‘요정’ 티켓을 만들었다고 한다.
인터넷을 보면서 체체는 다시금 깨달았다.
이블로 인해 사람들도 저를 ‘뱁새’, ‘요정’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수년을 구른 23살 남자를….
체체는 지금까지 별칭이 많았다. 희망, 영웅, 난민, 배신자…. 그 모든 무겁고 삭막한 별칭들을 뒤로 하고 이제 가장 경각심 드는 별칭은 ‘뱁새’와 ‘요정’이 되었다.
- 근데 난 뱁새 때문에 아타스 애들은 다 그렇게 이쁜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더라,, 먼가 아타스 애들은 좀 깡마른? 느낌? 뱁새는 이쁘게 마른?st고,, 이거 보면 차이 극명함
(영상)
영상을 재생하자 소리가 나왔다. 이블이 체체를 쳐다봤다.
“죄송합니다.”
“아냐, 소리 줄이지 마. 일 끝났어. 뭐 보게?”
물론 일은 아직 안 끝났지만 이블이 제임스를 내팽개치고 체체에게 달라붙었다.
짧은 영상에는 오러로 볼을 만들어서 가지고 놀고 있는 소년이 담겨 있었다. 피부색은 까맣고, 머리 색은 회색에 눈은 노란빛이 돌았다. 글쓴이의 말대로 깡마른 체격이었다.
└아ㅠ 영상 보는데 뭔가 찡하다ㅠ 저 소년에게도 꿈꿀 자격은 있는 거겠죠ㅠ
└오,, 머야 오러 되게 잘 다룬다 최소 B등급 같은데
└이렇게 재능 있는데도 그 재능을 펼치지 못하고 저물어 버리는 애들이 얼마나 많을지ㅠㅠ
└배부르고 등 따신 곳에서 게으르게 사는 사람들은 이 영상 보고 반성하자
체체는 댓글을 읽다가 사람들이 전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댓글을 작성했다.
└영상 속 소년은 억대 연봉을 받는 현직 오러볼 리그 선수 체체 에일입니다.
정정 글 아래로도 계속해서 댓글이 달렸다.
└올해 본 영상 중 가장 맘 아프다ㅠㅠ
└와 공 튕기는거봐; 어떻게 후원못하나?
└근데 아타스인들은 기본적으로 마름<이 디폴트 같음 비만 유전자가 없는 느낌? 부럽다
└너무 즐거워하는 표정이라서 더 찡하네ㅠㅠ
“그냥 포기해. 인간이 뱁…. 요정이 하는 말을 어떻게 알아듣겠냐.”
이블이 체체의 손에서 핸드폰을 가져갔다. 체체가 한숨을 속으로 삼키곤 말했다.
“이블 님. 저는 요정이 아닙니다.”
이블이 뚱한 표정을 지었다.
“뱁새 아니면 됐지 요정도 아니어야 해?”
“네. 저는 군인 출신 튼튼한 남자니까요.”
“요정은 군인이 될 수 없다는 거야? 체체 언제부터 그렇게 선입관과 편견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어? 전 세계 군인을 꿈꾸는 요정들이 슬퍼하는 소리가 안 들려?”
“안 들립니다. 이블 님이야말로 편견에 가득 차 있어요. 작고 예쁘다고 다 약하고 여린 요정이 아닙니다.”
“당연히 작고 예쁘다고 다 약한 건 아니지. 너는 내가 본 사람 중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야. 하지만 그거랑 네 몸이 튼튼한 거랑은 별개의 문제란 말이야.”
이블이 체체를 인형 안듯이 달랑 안아 들어 제 무릎 위에 앉혔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이제 그만 포기해. 벌써 일주일이나 되었는데 너도 슬슬 힘들지 않아?”
“저는 더 참을 수 있어요.”
“하, 씨. 내 체체는 왜 S급 소울 오러 유저라서 이렇게 강인한 거야.”
이블이 투덜거리며 체체를 꼬옥 끌어안았다.
“저는 튼튼합니다…. 이블 님이 포기하세요.”
체체가 조그맣게 속삭이며 이블에게 머리를 포갰다.
둘은 벌써 일주일째 섹스를 하지 않았다. 다만 넣고 흔들지 않았다 뿐이지 키스부터 페팅까지 할 건 다 하기 때문에 금욕 중인 것은 아니었다. 욕구를 어느 정도 채워서 그런지 아직도 이 싸움의 승자가 가려지지 않았다.
‘저게 무슨 대화야? 뭐가 슬슬 힘들다는 거고 뭘 더 참을 수 있다는 건데. 대체 뭣 때문에 싸우신 거지?’
꼭 끌어안은 연인의 맞은편에는 여전히 제임스가 동승 중이었다. 이블과 체체는 그의 존재를 잊은 듯했지만….
일주일이나 가는 걸 보면 심각한 주제인 것 같은데 저렇게 꼭 끌어안고 있는 걸 보면 싸우긴 했나 싶었다.
오로지 둘의 싸움이 주식 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만 고민하던 제임스도 이제는 싸움의 이유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머리를 흔들고는 창밖을 바라봤다.
‘됐다. 연인 간의 애정 싸움을 내가 알아서 뭐 해. 빨리 집에나 가자….’
제임스는 이대로 저택으로 돌아갈 때까지 둘에게서 잊히고 싶었다. 늘 그렇지만 상사의 무관심은 언제나 환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