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들이 불그스름하게 물들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계절, 가을. 이블과 체체는 처음으로 단풍 여행이란 것을 했다. 알시티에서 가장 가을 풍경이 좋다는 산으로 가서 단풍을 배경 삼아 사진도 잔뜩 찍고, 호수도 구경하고, 별장에서 하룻밤도 보냈다. 아침 햇살을 맞으며 침대에 나란히 누워 찍은 사진들을 알콩달콩 구경할 때, 이블에게 긴급 전화가 왔다.
알시티와 멀리 떨어진 곳 ‘말라’라는 나라에서 진도 9.6의 지진이 발생했다는 소식이었다. 하필 역사적 가치가 깊은 유적지 근처라서 이블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블은 바로 달려가지는 않고 체체를 헬기에 태워 저택에 돌려보낸 뒤 말라로 향했다.
혼자 저택에 도착한 체체는 TV에 이블 생중계 화면을 띄워 놓은 뒤 차근차근 짐을 풀었다.
새빨갛게 물든 단풍잎을 입에 문 이블의 사진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이건 액자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데스크톱으로 공유했다. 집에 대형 액자 사이즈도 출력 가능한 포토 프린터가 있어서 곧바로 출력하고 코팅까지 순식간에 한 뒤 액자 틀에 끼웠다. 체체는 그것을 2층 왼쪽 방에다가 걸었다. 이블과 체체가 요즘 사진에 빠져 있다 보니 아예 액자방이 새로 생겼다.
액자방 한가운데에 걸린 사진은 <물 위를 걷는 체체>였다. 여름이 끝나 갈 무렵 뒤쪽 정원에 작은 호수를 만들었는데, 이블이 체체를 염력으로 들어서 호수 한가운데에 살포시 내려놓은 뒤 사진을 수십 장 찍은 적이 있었다. 그때 찍은 사진은 아주 큰 액자에 걸렸고, 이블이 직접 제목을 붙였다.
체체는 이번 단풍잎 사진 아래쪽에 제목을 지었다. <빨간 단풍과 이블> 체체의 네이밍 센스는 아주 정직한 편이었다.
한참 사진 구경에 빠졌을 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복도로 나가니 힙스가 인자하게 미소지었다.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이블의 저택까지 찾아올 사람은 흔치 않았다. 그것도 미리 약속하지도 않고 올 만한 사람은 ‘그들’밖에 없었다.
체체는 중앙 저택을 나와 동쪽 별관으로 향했다. 체체의 예상은 반만 맞았다. 찾아온 이는 이블의 모친인 제니스 한 명이었다.
“체체 씨,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제니스는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표정이 펴졌다. 이블이 자리를 비웠다는 걸 알면서도 초조해하고 긴장하던 그때와는 다른 편안한 태도였다.
“안녕하세요.”
“두 분 떨어져 있는 시간 잡기가 정말 어렵더군요. 서너 번 저택까지 왔다가 뒤돌아섰어요.”
“이블 님이 계실 때 오셔도 됩니다. 뭐라고 하지 않으실 거예요.”
“알아요. 안 그래도 이블 형 누나들과 함께 오려고 얘기하고 있어요. 이왕 모이는 거 온 가족이 다 같이 모여야지요.”
체체는 아직 이블의 가족을 모두 보지 못했다. 이블은 4형제 중 막내고 위로 형 하나와 누나 둘이 있다는데 그들의 얼굴은 사진으로 접한 게 전부였다. 듣기로는 형제들이 이블을 상당히 두려워한다니까 반드시 ‘온 가족이 다 같이’ 모여야 한다는 건 물귀신 작전의 일환인 모양이었다.
제니스는 우선 가을이란 추수의 계절이다, 뒤뜰의 호수를 구경해도 되느냐, 요즘 이블이 정말 천사 같더라 등의 이야기를 한 후에 본론으로 들어갔다.
“곧 아타스에서 정식으로 초청을 해 올 거예요.”
체체의 눈이 커졌다.
아타스, 아직은 낯선 그 나라의 이전 이름은 타르였다.
체체가 ‘아타스’라는 이름을 보는 경우는 세공실의 원석 케이스에 붙은 라벨을 볼 때 말고는 없었다.
아타스는 체체가 이전에 예상한 대로 수많은 개발 도상국이 그러하듯 원석 산지를 개발하며 돈을 벌었다. 오러 센터에 납품되는 원석 중에서도 아타스 산지 원석이 있었다. 체체가 입김을 넣지 않아도 이블이 알아서 수입한 것이었다.
아타스의 대통령이 된 사밀라는 아직까지 체체를 초청하지 않았다. 체체가 알시티에 정착할 거라고 밝히고 나서 아타스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배신감에 치를 떠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여전히 인기 있는 위인이었고 아직도 많은 사람이 체체가 아타스로 돌아오기를 원했다. 이블의 연인이 되었으니 가능성이 희박한 걸 알면서도 아타스 국민들은 체체가 영구적으로 귀환하여 새롭게 태어난 타르의 일원이 되기를 염원했다. 그러나 사밀라는 개인적으로도 체체가 탐탁지 않았을뿐더러 체체를 향한 국민들의 호감을 질투해서 일부러 초청하지 않은 것이다.
사실 아타스 국민들이 체체의 방문을 너무나 원했기 때문에, 심지어는 정부 청사 앞에서 체체를 초청해 달라며 단체 시위행진을 할 정도로 원하기 때문에 결국 사밀라가 패배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블은 한 달 전, 체체더러 아타스에게 가길 원하냐며 물어본 적이 있었다.
‘야, 너 아타스에 가고 싶어?’
‘초청이 왔습니까?’
‘아니, 씨발. 정식으로 초청 안 왔어. 배은망덕한 쓰레기들. 너는 그 쓰레기 나라 평화를 위해서 혼자 좆 빠지게 고생하고 희생했는데, 네 덕분에 편하게 정권 잡았으면서 견제나 처하느라 초청하지도 않아. 개짜증 나. 하지만 그래도 네가 향수병인가 뭔가 걸려서 죽을 것 같으면 한번 방문하려고. 가고 싶어?’
가기 싫어서 아주 죽상을 하고서는 매우 이해심 넘치는 연인인 척 묻는 말에 체체는 고개를 저었다.
아타스에서 부르기 전까지는 갈 생각이 없었다. 자신의 정권이 안정되었다고 생각하면 사밀라가 먼저 연락해 올 것이다. 그 대답에 이블은 퍽 만족스러워했다.
체체는 족히 일 년은 지나야 아타스에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밀라 정권이 벌써 안정을 찾았나요?”
“안정을 찾기 위해서 체체 씨를 초청하려는 거죠.”
체체에 대한 사감이 어떻든 간에 임기 내 한번은 불러야만 한다. 부르는 시기가 늦어질수록 국민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나올 것이고, 내부에서도 사밀라의 권력을 의심하는 자들이 생길 터였다.
“아마 다음 달 초가 될 걸로 예상해요. 늦어도 다음 달 중에는 초청이 올 거고요.”
“예, 일정은 언제든 상관없습니다. 본론을 말씀하세요.”
“…알고 있겠지만 현재 아타스에서는 체체 씨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에요.”
제니스는 ‘알고 있겠지만’이라는 가정을 달았지만 체체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존 게일이 입을 다물면 체체는 아타스의 속사정을 알 방법이 없었다. 속으로는 놀랐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이 워낙 무심하고 건조해서 제니스는 체체가 놀랐다는 사실을 모르고 말을 이어 갔다.
“역시 알았군요. 체체 씨가 아타스 내에서 워낙 국민적인 영웅인 탓에, 새 정권이 조금이라도 체체 씨의 명성을 떨어뜨리려고 한다는 걸.”
다행히 제니스가 부연 설명을 해 줬다.
“특히 음해 세력이 주로 인터넷상으로 공작을 펼친다는 것도 이미 알겠네요. 가장 큰 먹잇감은 체체 씨가 알시티에 정착하기로 했다는 사실이죠. 그들은 탈타르한 것과 알시티에서 살기로 한 것을 두고 ‘배신’이라고 말해요. 멍청한, 아니, 죄송해요. 일부 아타스인들은 거기에 넘어가서 체체를 배신자라고 부르고요.”
“틀린 말은 아닙니다.”
“네, 틀린 말은 아니죠.”
제니스가 조금 열 받은 듯 빠른 어조로 말했다.
“체체 씨를 배신자라고 욕하는 그 사람들이 체체 씨와 똑같은 상황에서 탈타르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만약 그들이 정말로 같은 상황에서 타르에 대한 같잖은 의리를 지킨다면 욕할 자격이 있다고 인정할게요. 과연 그런 사람이 있기는 할는지 모르겠지만요.”
제니스의 얼굴이 흥분으로 붉어졌다. 체체에 대한 비난 여론 이야기였지만 정작 체체는 강 건너 불 보듯 했고 제니스만 씩씩 콧김을 뿜어 댔다.
“2년 전 탈타르보다는 모든 일이 끝나고도 알시티에 남았다는 게 화가 났을 거예요. 이해합니다.”
“그래요. 우리 남편도 그렇게 말하더군요. 체체 씨는 다 이해할 테니 당신이 열 받을 필요 없다고. 하지만 짜증 나는 걸 어떡해요?”
제니스는 손부채질을 하면서 열을 식혔다. 그래도 화가 안 가라앉는지 벌떡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원을 그리며 내부를 돌았다. 체체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블은 정말 이분의 친아들이 맞다고.
체체는 얌전히 제니스의 흥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 자신보다 훨씬 어린 애는 차분한데 혼자 망아지처럼 날뛰었다는 게 새삼 부끄러워진 제니스가 자리에 앉았다.
“체체 씨는 정말 마음이 넓군요!”
제니스는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뾰족하게 말해 놓고서는 곧바로 주위를 살폈다.
체체가 가만히 미소 지었다.
“이블 님은 멀리 계시니 걱정 마시고 얘기하세요.”
제니스가 무안한 듯 헛기침했다.
“아무튼,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이번 아타스 방문 때 이블도 같이 갈 텐데 그때 이블의 화를 잘 달래 주라는 거예요. 지금이야 아타스 내에서 어떤 비열한 작업이 이뤄지는지 모르지만 곧 이블도 그 사실을 알게 될 거고 그러면 아타스는 건국에서 망국까지 최단기 세계 기록을 갖게 되겠죠.”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제니스는 결국 이 말을 전하러 온 것이다. 연인의 평판이 음해당하는 것을 안 이블이 자제력을 잃고 흥분할 경우 옆에서 말려 달라고.
“이블 님께는 잘 말씀드릴게요. 우려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
제니스가 탐탁지 않다는 시선으로 체체를 봤다. 삐죽이는 입술마저 이블과 닮았다. 엄연히 말하면 이블이 그녀를 닮은 거겠지만, 이미 세계가 이블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체체에게는 제니스가 이블을 닮은 것처럼 보였다.
***
제니스가 떠나고 체체도 나갈 채비를 했다. 이블이 재난 발생 지역으로 향할 때 주로 사용하는 교통수단은 헬리콥터나 전용 제트기인데, 이번에는 제트기를 타고 돌아올 예정이었다. 체체는 이블이 땅에 내려오자마자 처음으로 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블 님이 오시려면 아직 한참 남았는데 저녁 식사 하고 나가시죠.”
“오시면 같이 먹겠습니다.”
“…도시락이라도 가지고 가세요. 안 그러면 저희가 혼납니다.”
“예, 감사합니다.”
힙스가 사정사정해서 체체를 붙잡은 뒤 서둘러 만든 도시락을 손에 쥐여 주었다. 그 도시락 통은 커다란 체격에 무뚝뚝한 얼굴의 가드 한 명이 들었다. 비슷한 인상의 가드가 네 명 더 있었다. 체체는 총 다섯 명의 가드와 함께 저택을 나와 알시티 대통령 차량보다 훨씬 튼튼한 방탄 차량을 타고 활주로에 도착했다.
이블은 세 시간 후쯤 도착 예정이었다. 체체는 이젠 익숙한 활주로 옆 대기실에 들어갔다.
예전에는 툭하면 기자들이 몰려 들어와 인터뷰하겠다고 마이크와 카메라를 들이밀고는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체체는 이블의 입김이 들어갔겠거니 했다.
대기실에 앉아 이블을 기다리며 알시티어로 된 책을 읽던 체체가 한 시간 만에 책을 덮었다. 도저히 집중이 안 돼서 한 시간 동안 삼백팔십오 페이지밖에 읽지 못했다. 체체는 핸드폰을 들었다. 생중계 화면에는 이블이 콩처럼 아주 작게 출연했다.
아타스에서는 짧게 머무는 게 좋겠지. 그에게는 무척 시끄럽고 더러운 곳일 테니까.
체체는 아타스에서의 일정을 머릿속으로 그려 봤다. 우선 그를 자신의 옛날 집이 있던 곳으로 데리고 가고 싶다. 거리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함께 구경하고, 원석 산지에도 들러서 아주 커다란 보석을 사 오고 싶다. 맛있는 아타스 음식도 먹고….
가장 중요한 건 존 게일을 소개하는 일이다. 존 게일은 아타스와 자신의 은인이나 다름없고 이블은 살아가는 이유나 다름없기 때문에 서로를 꼭 소개해 주고 싶었다.
체체도 이블의 유일한 친구와 인사를 나눴다. 레오 다비즈는 이블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직접 소개해 준 사람이었다. 그때 레오는 전설 속 위인을 만난 사람처럼 얼어붙었고, 인사를 나누는 것도 송구스러워했다. 이블의 유일한 친구를 소개받으며 체체는 아주 묘한 감정이 들었다.
잠시 고민하던 체체는 아타스의 가장 큰 뉴스 사이트로 들어갔다. 자신에게 따라오는 비판과 비난이 어느 정도인지를 미리 알아 놔야 이블을 말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체체는 자신의 이름을 검색하고 글을 하나 클릭했다.
체체 그냥 오지 말라고 해 | ||
부자 나라 부자 애인 좋다고 떠난 배신자 붙잡고 제발 와 달라고 오매불망 진짜 우리나라 사람들 너무 호구 같아. | ||
댓글 | ||
└그냥 돈 좋아서 떠난 사람이 아니라 타르의 어린 영웅이잖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