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2화 (13/17)

“자라니까 하여튼 말 존나 안 들어….”

이블과의 첫 만남을 회상하던 체체가 반짝 눈을 떴다.

새로 낸 창으로부터 햇살은 따사롭게 비춰 오고, 이불은 너무나 푹신하고, 이블은 너무 당연한 듯이 토닥이며 재우려고 해서 하마터면 체체도 속을 뻔했다. 하지만 오늘은 어제까지와 같은 한가로운 날이 아니다. 체체가 손가락을 꼽아 가며 기다린 날이었다. 센터로 복귀하는 날.

어느새 납치 사건 이후로 세 달이 지났다.

삼 개월간 세상은 크게 바뀌었다.

우선 타르는 사밀라가 완전히 정권을 잡아 국명을 ‘아타스’로 바꾸고 새로운 나라로 도약했다.

존 게일은 그런 타르에 머물면서 사밀라를 도왔다. 체체와는 삼 개월 동안 딱 두 번밖에 통화하지 못했을 정도로 바빴다. 타르에 어느 정도 새로운 체제가 자리 잡으면 다른 분쟁 지역으로 떠날 예정이라고 했다.

빌라인 제라도는 삼 개월 만에 강대국이라는 지위를 내려놓아야만 할 정도로 경제가 무너졌다. 알시티와 더불어 많은 나라가 국교를 끊었기 때문이다. 납치 사건을 모의했던 자들을 모두 숙청하고, 다시는 타르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국제회의에 맹세해 몇몇 국가가 수교를 재개했으나 이미 늦었다. 앞으로는 쇠락의 길만 걷게 될 터였다.

원자력 발전소 해체 작업은 장기전으로 돌입했지만 앞으로는 기계 드론과 다른 오러 유저들이 맡게 되었다. 이블은 현대 인류로서는 해결 불가능한 문제만 처리해 준 후 해체 작업에서 손을 뗐다. 그 이유는 저택에서 근신 중인 체체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말로 쉬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성실하게 재난 사고에 출동해서 이블 엔젤이라는 별명도 새로 생겼다. 체체도 이블이 왜 그렇게 성실하게 나가는지는 몰랐지만 그 덕에 재난 사고의 피해는 전년 대비 삼 할이나 줄었다.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체체도 얼른 제가 사회에 도움을 줄 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한 달까지는 휴양이고 요양이었으나 한 달이 지나고 나니 다시 죄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온 것이다.

체체가 국제적인 납치극을 벌이고 허가받지 않고 오러를 사용해도 처벌받지 않은 이유는 이블이라는 존재 덕분이었지만, 사실 이블이 아니었어도 몇 년씩 징역을 산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을 터다.

체체는 오러 유저 보호법 적용 대상이었다. 모든 법보다 상위에 있는 법이 체체를 보호했다. 그건 즉 체체가 앞으로 계속 오러 유저로서 활동해야만 한다는 뜻이었다. 체체가 오러 유저로서 세상에 이바지하는 크기가 아주 클 것으로 예측되기 때문에 그 법의 보호 대상이 되었으므로.

그 사실을 아는 체체는 삼 개월의 요양 기간이 끝나면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겠다고 다짐했다.

“일어나세요.”

“자자니까, 좀.”

“잠 다 깨신 거 압니다.”

체체가 이블의 팔뚝을 살포시 건드렸다. 간질거리는 감촉에 이블이 한쪽 눈만 떴다. 졸음기는 전혀 없었다.

“너 진짜 인간 아닌 거 티 낸다. 어제 늦게 잠들었는데 어떻게 딱 일어났어?”

“TV가 항상 같은 시간에 켜지게끔 맞춰 놨으니까요.”

“아, 그래서 켜진 거구나. 그 방법은 또 어떻게 알았냐.”

“아주 쉽습니다. 이블 님도 하실 수 있어요.”

“그래, 장하다. 내 뱁새 다 컸네. TV 켤 줄도 모르던 게 삼 개월 동안 아주 큰 성장을 했어.”

이블이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웃었다. 체체는 본래 켜는 것 정도는 알았다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쉬고 싶으면 더 쉬어도 되는데. 삼 개월 진짜 짧지? 휴가 때 늦잠 안 잔 거 좀 후회돼?”

“너무 게으르게 보내서 후회됩니다.”

“……네가 게을렀다고?”

체체는 저택에서 쉬는 동안 전자 기기를 보통 수준으로 다루게 되었다. 이블은 원자력 발전소 해체 작업에서 손을 떼고도 각종 재난과 사건 사고 때문에 자리를 비우는 날이 더러 있었다.

저택에서 나가지 못하는 체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적었다. 고작해야 저택을 탐험하는 것과 루젬을 세공하는 것. 그리고 테니스와 배드민턴 등의 체력 단련, 요리와 제과 제빵, 각종 컴퓨터 프로그램과 어학 공부, 각종 시사 이슈 학습, 재테크 공부, 부동산 공부, 세계사와 세계 지리 공부 정도 말고는 없었다. 그렇게 한가하게 낮을 보내 놓고 밤에는 또 이블과….

“예…. 정말 게으르고 방탕한 생활이었습니다.”

체체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블은 참 귀엽지만 착잡하다는 표정으로 체체를 바라봤다. 귀엽지만 착잡한 건지 착잡하지만 귀여운 건지 마음이 복잡했는데, 방탕한 밤들을 떠올리는지 다갈색 뺨이 발그레해진 체체는 어쨌든 사랑스러웠다.

이블은 체체를 가볍게 들어 자신의 위에 앉히고는 한 팔로 허리를 끌어안았다. 체체는 키스가 퍼부어지리라는 걸 알고 눈을 감았다. 눈꺼풀과 코, 이마, 뺨, 입술에 키스가 쏟아졌다. 이블은 그대로 일어났다.

“몸은 괜찮아? 아프면 쉬어도 되는데.”

“이블 님, 일부러 어제 심하게 하신 거죠.”

“뭔 개소리야. 내가 진짜 심하게 했으면 넌 지금 일어나지도 못했어.”

이블은 능글맞게 웃으며 체체의 맨어깨에 키스했다.

“아직도 한밤중일걸.”

“…….”

맞는 말이기에 체체는 잠자코 있었다.

함께 욕탕에 들어간 후에도 이블은 계속 손장난을 치며 유혹해 댔다. 하지만 체체는 출근을 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기에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결국 이블은 반쯤 삐져 툴툴거리면서, 체체는 건조하게 이블을 달래면서 출근길에 올랐다.

***

“오랜만입니다, 체체 님.”

센터에 도착하니 제임스가 세상에 찌든 얼굴로 주차장까지 마중 나왔다.

제임스는 삼 개월 동안 이블의 허락을 받고 딱 한 번 저택에 방문했다. 납치 사건으로 인해 잔뜩 삐진 힙스와 달리(참고로 힙스의 화는 한 달은 지나서야 풀렸다) 제임스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다 이해한다며 고생 많았다고 체체를 위로해 왔다. 다만 앞으로 또 그런 일을 벌일 계획이라면 시기만 살짝 찔러 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꾸 자기 앞머리를 쓸거나 안경테를 고쳐 잡는 행동을 반복했다. 체체도 눈치가 없지 않기에 그에게 물었다.

‘실장님, 못 보던 시계네요.’

‘아, 이거 말입니까? 별거 아닙니다. 고작 이억 오천만 다알 정도… 금 파니까 이 정도 나오더군요.’

‘금이요….’

‘예, 그러니까 앞으로 또 가출하실 거면 꼭 시기만 알려 주십시오. 이유나 장소 다 필요 없으니 날짜만요. 믿습니다, 체체 님.’

못 보던 사이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이 되어 버린 제임스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그래서 마지막 인상은 무척 좋지 않았는데, 오늘의 제임스는 ‘좋은 세상 다 끝났다’라는 직장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체체 님의 세공실은 201층으로 위치가 바뀌었습니다.”

그 말에 체체의 시선이 이블에게 향했다. 이블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 박자 늦게.

“뭐? 내 집무실이 있는 층이잖아. 정말 우연의 일치다. 난 진짜 까맣게 몰랐지 뭐야.”

“…….”

어찌 됐든 이블과 가까이 있는 건 체체도 원하는 바였다. 그리고 시치미 떼는 이블은 무척 귀여웠다.

201층에서 이블은 집무실로, 체체는 복도 끝의 세공실로 들어갔다.

세공실은 체체의 기억과 똑같은 모습이었는데, 상상만 하다 정작 실제로 오니 너무 낯설었다. 방법을 아예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저택에 있을 때도 하루에 한 시간씩은 꼭 세공을 했는데도 막상 자리에 앉으니 머릿속에 든 것들이 싹 날아간 느낌이었다.

몇 번 해 보지도 않고 그 사달이 일어나 오래 쉬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엔드스틱을 만지작거리는 그때 누군가 세공실 문을 노크했다. 들어온 사람은 제임스였다.

“오늘부터 하시게 될 의뢰입니다. 내용은 의뢰인께서 미리 정해 두셨고 샘플 동영상도 보내 줬습니다. 원석 종류도 골라 두셨다고 합니다. 파일은 이쪽에….”

제임스의 말을 잠자코 듣던 체체는 내용 전달이 끝난 뒤 핸드폰을 꺼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예.”

체체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힐끗 화면을 본 제임스는 [내남친❤]이라는 명칭을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

[내남친❤]은 신나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 응, 왜. 나 보고 싶어서 못 견디겠어? 지금 갈까? 아니면 네가 올래? 역시 자리가 가까우니까 좋지?

“이블 님, 이제 저한테 의뢰하지 마세요.”

- …….

제임스는 정말 기절한 뻔했다.

대체 어떻게 알았지?

“저는 진짜 일을 하고 싶습니다.”

- …….

이블은 한참 침묵하더니 기어들어 가는 개미만 한 소리로 ‘알았어…’라고 말했다. 이제 이블에게 결재 서류를 들고 가야 하는 제임스로서는 청천벽력같은 상황이었다.

“실장님, 곧 다른 의뢰가 들어오면 전해 주세요.”

“…예….”

“감사합니다.”

아, 거 좀 그냥 받지, 좀.

제임스는 체체가 아무 말도 없이 자진 납치를 당했을 때보다 더 답답했지만 그대로 다시 나갔다.

지금 바로 이블에게 가면 화풀이 대상이 될 것 같아서, 알시티 국가를 속으로 네 번 반복해서 부른 뒤 집무실로 향했다. 의외로 이블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그저 너무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싱글벙글 웃었다.

“걔는 진짜 대단해. 안 그러냐? 눈치 빠르고 똑똑해. 내가 의뢰했다는 걸 어떻게 알았냔 말이야.”

“정말 놀랐습니다. 저는 티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똑똑해.”

박수갈채라도 날릴 기세였다. 이블은 의자를 빙그르르 돌리면서 즐거워했다.

제임스는 이블이 결재한 서류를 가지고 돌아가야 했으므로 소파에 슬쩍 앉았다. 예상치 못했지만 이 악마천사 - 새로 생긴 별명이었다 - 의 기분이 좋다는 건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제임스는 금방 이 소굴을 나갈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리고 진짜 성실해. 평생 탱자탱자 놀아도 누구 하나 뭐라 하는 사람 없을 텐데 굳이 오러 유저의 일을 하겠다잖아. 저런 애가 세상에 또 어디 있겠어.”

“…맞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똑똑하고 착하고 성실한데 예쁘기까지 하냐. 쟤한테 단점이 있긴 할까.”

“없습니다. 당연히 없겠죠….”

“장난해?”

제임스는 정답을 얘기했는데 이블이 돌연 정색했다. 이블은 날카롭게 제임스를 쏘아봤다.

“세상에 단점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너 씨발, 체체가 사람이 아닌 뱁새 요정이라서 이 세상을 날아가 버리기라도 한다는 거야, 지금? 네 머리도 날려 줄까?”

“죄, 죄송합니다.”

제임스는 어리둥절한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사과했다. 내용을 보면 지금 장난치고 있는 게 이블인가 싶은데 표정과 목소리는 너무나 진지했다.

“정신 좀 차려. 걔가 아무리 요정 같아도 사람이란 말이야. 자꾸 요정이라고 했다가 진짜 요정 되어 버리면 어쩌려고 그런 말을 해. 기분 좆같이 만드네 진짜.”

이블은 체체가 진짜 뱁새 요정이라서 요정 세상으로 훌쩍 날아가 버릴까 봐 늘 노심초사했던 것처럼 예민하게 굴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야!? 앞으로 말조심해. 어디서 요정 새끼들이 훔쳐 듣다가 체체라는 이쁘고 사랑스러운 애가 잃어버린 자기 동족인가 보다 하고 납치해 버릴지도 모르니까. 자기네들이랑 겉모습도 큰 차이 안 나서 우리가 인간이라고 아무리 주장해도 소용없을 거야. 체체 없어지면 너도 죽고 내가 지구상 인간들 다 죽여 버린다.”

“예, 조심하겠습니다….”

대체 어디까지가 진심일까. 다 죽여 버리겠다는 무시무시한 협박의 진심 여부보다 체체가 요정이라며 떠는 주접이 진심인지 아닌지가 더 궁금했다. 계속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듣다 보니 이제 무섭지도 않고 그냥… 헛웃음만 나왔다.

단점이 있다고 말했으면, 머리를 날려 버렸을 거면서….

“걘 진짜 왜 그렇게 귀엽게 태어나서 사람 걱정하게 만들어.”

이블은 씩씩거리면서 체체가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를 토해 냈다. 이 점도 귀엽고 저런 모습도 귀엽고 그런 행동도 귀엽고. 주접떠는 이블에게 제임스가 물었다.

“이사님의 말씀이 모두 맞습니다만 저는 체체 님의 단점이 무엇인지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알려 주시겠습니까.”

“그따위 병신 같은 질문을….”

이블은 말을 하다 말았다. 제임스는 그 이유를 몰랐지만, 이블이 문장을 끝맺지 못한 이유는 ‘병신’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체체 앞에서 욕을 자제하기 시작하면서 가끔씩 다른 사람 앞에서도 말이 안 나올 때가 있었다.

그 이유를 모르는 제임스는 가만히 대답을 기다렸다.

“체체 단점은 말이야.”

“예.”

너무 귀엽다.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문제다.

이 정도 대답을 기다리던 제임스는 잠시 기다려도 뒷말이 들려오질 않아 이상하게 생각하며 이블을 바라봤다. 이블은 하얀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이블이 두 번이나 말을 하다 만다고?

그러나 곧 놀랄 것도 없음을 알았다. 이블은 누구의 앞에서건 하려던 말을 그만둘 수 있었고, 누군가의 질문에 대해 얼마든지 대답하지 않을 수 있었다. 지금은 체체에 대해 이야기했기에 대화가 길어진 것뿐. 그의 별명 뒤에 천사가 붙었다 해도 이블은 이블이다. 본래 그런 사람이었다.

“…….”

이블이 갑자기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생긴듯이 씩 웃었다. 제임스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이블이 벌떡 일어나자 제임스도 벌떡 일어났다. 무형의 힘에 의해 문이 열리고 이블은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

제임스는 여름을 맞아 한창 싱그러운 난초를 잠깐 쓰다듬으며 심신의 안정을 찾고는 이블의 뒤를 따랐다.

***

센터 내 이블의 비서는 제임스, 줄리아, 베라, 세븐 총 네 명이다. 제임스를 제외한 세 명은 지금으로부터 칠 년 전, 열다섯 살인 이블이 첫 임무를 맡았을 때 이블의 비서로 배정되었으며, 아직까지 한 명도 그만두지 않았다. 물론 중간중간 때려치운 전적은 다 보유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다시 돌아왔다. 그들의 이블에 대한 충성심과 금전적 욕심은 제임스와 겨룰 만했다.

그들은 오늘 삼 개월, 정확히는 삼 개월하고도 보름 만에 복귀한 체체로 인해 제법 바빴다. 여기저기서 체체를 찾는 전화가 왔고 세공 의뢰가 쏟아졌다. 본래 루젬 세공 의뢰는 루젬 세공 팀에서 전담했는데 체체만은 예외적으로 그들이 맡은 것이다.

“죄송합니다만 체체 유저는 당분간 세공 의뢰를 받지 않습니다.”

“인터뷰 안 해요. 기자 회견도 예정 없습니다.”

“파견 요청은 긴급한 사항이 아니라면 전자 문서와 팩스를 이용해 주세요.”

그들은 기계적으로 답변했다. 곧 체체 전담 비서실도 만들어질 예정이니 그때까지만 참으면 됐다.

“네, 이블 고문 이사님 비서실입니다. …아, 네. 체체 유저는 당분간… 아!”

작년에 체체를 위해 만들어졌던 데스크에 앉아 기계적으로 전화를 받던 줄리아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모두의 시선이 줄리아에게 향했다.

“세공 의뢰 당분간 안 받습니다. 네, 안 받아요. …네, 감사합니다.”

줄리아는 잔뜩 인상 쓴 채 모니터를 쳐다보며 전화를 끊었다.

“아, 씨. 망했다.”

“왜요? 무슨 일인데요?”

“아니, 갑자기 스파크가 파지직 하더니 갑자기 화면이 꺼져 가지고.”

동료들이 줄리아의 주위로 모였다. 모니터에는 어떤 프로그램이 떠 있었다.

“데이터 날아갔나 봐요. 아, 난리 났네. 수식 하나도 기억 안 나는데.”

“앱이랑 연동 안 해 놨어요?”

“나중에 하려고 했지. 싹 다 지워진 건 아닌데 중간중간이 비었어요.”

“인터넷 검색하면 다 나오잖아요.”

“이걸 언제 다 검색하고 있어….”

줄리아가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자료 입력이야 다시 하면 되는 거고 대부분 자동 연산이라 수동 입력할 양 자체는 적었다. 문제는 이 프로그램에 적용했던 자동 연산을 해 줄 수식이 중간중간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엑셀이나 워드 같은 기본 프로그램보다 적어도 다섯 단계 위의 숙련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이었다. 줄리아와 비서들도 이 자격증을 따는 데 몹시 애먹었었다.

“왜 갑자기 스파크가 일어난 거지. 큰일 났다, 진짜.”

“사람을 불러야 하나… 일단 전산부에 연락해 보죠.”

한데 모여 심각하게 말하던 그때였다.

쾅! 큰 소리와 함께 비서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이블 엔덤이 등장했다. 그는 깜짝 놀란 비서들을 향해 아주 신난 얼굴로, 경쾌하게 말했다.

“체체한테 물어봐.”

체체?

“체체 유저 님 말씀인가요?”

줄리아는 생각도 못 한 이름에 자기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그러나 이블은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진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 네가 생각하는 걔. 무식한 타르 피난민 출신 오러 유저.”

“…예, 모셔 오겠습니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이블이 신이 난 소년 같은 얼굴로 저러니 일단은 말을 따라야 했다.

베라가 나가서 체체를 데리고 왔는데, 그동안 비서들은 설마 하는 마음이었다.

체체에게 물어보라니.

에이, 체체가 무슨….

설마… 그 아이디 입력하는 방법조차 모르고, 자판 위치도 제대로 모르던 난민이 이런 어려운 프로그램을 다룰 수 있다고…?

다들 그런 생각이었고 비웃음을 감추기 위해 입가를 만졌다.

체체는 세공실에서 연습 삼아 샘플을 만지고 있다가 불려 왔다.

“이블 님.”

체체는 이블에게 먼저 인사하고 그다음 비서들에게 고개를 꾸벅했다. 비서들은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상황 설명을 했다. 갑자기 스파크가 튀더니 컴퓨터가 재부팅되고 프로그램 수식이 일부 날아갔다…. 줄리아는 설명하면서 조금 이상한 점을 느꼈다.

왜 다른 사람들 컴퓨터는 멀쩡하고 내 것만 스파크가 튀었지? 게다가 수식과 양식만 싹 날아간 점도 이상하다. 그리고 때마침 이블이 발랄하게 쳐들어온 것도.

“프로그램은 누기s 301ver입니다….”

줄리아는 수상쩍어하면서 설명을 끝마쳤다.

고도의 능력치가 요구되는 프로그램이다. 옛날의 체체라면 프로그램의 이름을 듣고 ‘그게 뭔가요?’ 했을 만한. 그러나 체체는 그게 무엇이냐고 묻지 않았다.

이블이 표정 변화 없는 체체에게 부드럽게 물었다.

“복구할 수 있겠어?”

“한번 보겠습니다.”

체체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마우스와 키보드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 자세는 아직까지 조금 어색했으나, 한번 모니터를 훑은 후 타자를 쳐 내려가는 손길은 막힘 없이 부드러웠다.

순식간에 모든 걸 마친 체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린 시간은 단 오 분이었다.

줄리아의 고개가 삐걱거리며 체체를 따라갔다. 비서들은 모두 굳어 있었다. 제임스까지 입을 벌린 채 멍해졌다.

체체는 무심한 얼굴이었다.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는지 다 느꼈을 테지만 그들의 반응에 뻐기거나 흡족해하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 한 거야? 개쩐다, 진짜. 타다다닥 하더니 순식간에 해 버리네. 정규 수업도 안 받은 애가 여기 명문대 나온 사람들까지 다 발라 버리는구만.”

“그러지 마세요.”

“왜. 내 말이 맞잖아. 너는 세상에서 나 빼고 제일 똑똑한 애야. 거기에 성실하기까지 해. 인간들은 널 따라올 수가 없어. 난 알고 있었어.”

오히려 이블이 아주 콧대가 하늘까지 닿을 것처럼 뻐겨 댔다. ‘명문대 나온 사람들’은 목까지 시뻘게졌다.

부동산 등기부 등본이나 근저당권 같은 단어를 몰라서 사기를 당하고 로그인하는 데도 애먹어 업무를 할당받지 못했던 체체와 숙련자도 다루기 어려운 프로그램을 능숙하게 다루는 체체는 동일인물이었다. 이들은 자신이 게으름을 피우는 동안 난민이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무시했다.

작고 무식한 난민을 비웃는 건 쉬운 일이었다. 타자도 칠 줄 모르는 가여운 난민을 ‘배려’하는 것도 아주 쉬웠다. 그러나 그 무식한 난민이 나보다 뛰어난 능력을 보였을 때 인정하고 칭찬하는 건 아주 어려웠다.

체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세공실로 돌아갔지만 비서들은 한동안 부끄러움에 빠져 있어야만 했다.

***

“어떻게 알았어?”

둘이서만 함께하는 식사 시간이었다. 메인 요리를 다 먹고 디저트가 나올 때쯤 이블이 물었다. 주어도 목적어도 없었으나 체체는 이블이 무엇을 물은 건지 바로 알았다.

“궁금해하지 않으셔서 알게 됐습니다.”

이블은 루젬 세공 의뢰가 자신이 내놓은 의뢰라는 걸 어떻게 아느냐 물었다.

“제가 만든 홀리아젬을 보고 싶어 하지 않으셨잖아요.”

“야, 너 너무 자신감 넘친다. 내가 네가 만든 걸 안 보고 싶어 할 수도 있지. 나라고 뭐 네 거 하나하나 다 알고 싶고 다 보고 싶어 하는 줄 아냐?”

“네.”

“…….”

“첫 번째와 두 번째 의뢰가 이블 님이었죠?”

체체가 옅게 웃었다. 이블은 뚱하니 입을 내밀었다가 미니 토마토 하나를 포크로 찍어서 체체의 입술에 쏙 집어넣었다. 이블은 삐진 척하고 싶었지만 미니 토마토를 오물거리는 체체를 보고 있자니 도저히 화가 나지 않았다. 너무 귀여워서 손가락이 자꾸만 움찔거렸다.

“그래, 나다. 나면 어쩔 건데.”

“제게 진짜 일을 주세요.”

“받고 있잖아. 씨, 나도 공짜로 의뢰 준 거 아니고 내 돈 다 내고 정식으로 의뢰 요청서도 작성했거든?”

“공공 기관과 이사님 의뢰 말고도요. 다른 세공사들은 개인 작업을 받잖아요. 저도 받고 싶습니다.”

체체가 당돌하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해 왔다.

사실 이블은 마음의 준비를 했다. 오전에 자신이 준 의뢰를 체체가 돌려보냈을 때부터 이런 부탁이 오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응수할 수가 없었다. 이블은 정말 이것만은 절대로 싫었던 것이다.

체체가 만든 홀리아젬을 자신이 아닌 어떤 한 개인이 소장하는 것만은.

이 감정을 뻔히 알면서 가당찮은 요구를 하는 뱁새에게 이블은 서운하기도 했다.

“너 그렇게….”

이블은 퉁명스럽게 투덜대려다가 체체의 귀여운 얼굴을 보고는 마음을 바꿨다.

부드럽게. 부드럽게 대해야지.

이블은 벌떡 일어나 체체의 옆자리로 옮겼다. 허리를 끌어안았는데 체체가 아주 빳빳하게 반응해 왔다.

‘부드럽게.’

이블은 스스로에게 되풀이하며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기다리면 천천히 의뢰가 올 거야. 너무 초조해하지 마. 나중엔 일 좀 그만 달라고 애원할걸.”

“저는 놀고 싶지 않습니다.”

“알아. 내가 병, 아무튼, 내가 모르겠어? 널 삼 개월간 봐 왔는데… 일하고 싶어 가지고 아주 창밖에 뿌려진 찹쌀을 쳐다보기만 해야 하는 뱁새처럼 굴었잖아.”

이블은 체체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동그란 이마와 가지런한 눈썹에는 흉터가 있었다. 이블은 체체가 자는 동안 세포를 조작해 체체의 몸에 가득한 흉터를 없애 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동안 파괴하는 것만 해 봤지만 만약 시도한다면 가능할 것 같았다.

아직까지도 고민 중이었다. 체체가 원할지 원하지 않을지도 모르겠고,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또 체체가 ‘이블 님은 제 흉터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군요’라고 말할까 봐 무섭기도 했다.

“안 그래도 곧 정부에서 떼거리로 루젬을 의뢰해 올 거야. 네가 자꾸 이렇게 굴면 확 다 너한테 줘 버리는 수가 있어.”

이블은 체체의 말랑말랑한 뺨에 손을 가져다 댔다. 하지만 체체는 여느 때처럼 기대 오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루젬 의뢰도 하고 싶습니다.”

“야.”

이블은 이것만은 단호했다. 그는 체체를 끌어안아 자신의 무릎 위로 올렸다.

“입장 바꿔서 생각해 봐. 내가 만든 홀리아젬을 어떤 사람이 소유하고 독점하는 거야. 그럼 네 기분이 어떻겠어? 존나 좆같겠지. 그럼 내 기분은 어떻겠어.”

“나쁘지 않습니다. 그 사람에겐 이블 님의 홀리아젬이 필요한 이유가 있겠죠.”

“…그래, 넌 그랬지….”

하긴 이런 비유가 통할 애가 아니었다. 이블은 체체를 꼬옥 끌어안고서 작은 얼굴에 자기 얼굴을 비볐다.

“난 싫어.”

“…….”

“오늘이 오는 것도 싫었어. 내 침대 위 말고는 어디도 못 가게 하고 싶어. 네가 열심히 만든 루젬을 누군가 소유한다고 생각하면 존나 열 받아. 너는 내 거잖아. 너의 모든 건 내 거야. 조금이라도 남과 나누는 건 절대 싫어.”

이블은 디저트 접시를 염력으로 들어 올렸다. 미니 토마토를 또 먹일까 하다가 숟가락으로 푸딩을 조금 퍼서 내밀었는데 체체의 입술이 열리지 않았다. 이블은 체체의 단호한 시선을 마주하면서 자신도 짐짓 무서운 호랑이처럼 표정을 굳혔지만 속으로는 조금 겁먹었다.

체체는 무섭다. 저렇게 빤히 쳐다보면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그냥 무조건 미안해해야 할 것 같다. 본인도 자기의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을 아는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절묘한 각도로 고개를 기울이면서 풍성한 속눈썹을 깜박거릴 수가 있을까.

하지만 이블도 양보 못 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렇게 뱁새계 쓰면서 귀여워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이블은 언뜻 엄격하고 무겁고 위엄 있는 척 목소리를 깔면서 말했다. 숟가락에는 살구색의 푸딩을 올려놓고 체체의 입술을 찔러 댔다.

“네 죄책감 덜 수 있는 다른 일 줄 테니까 좀 처먹어.”

“죄책감 없습니다망….”

“그래, 그래. 어구. 잘 먹는다, 내 뱁새.”

체체가 잠깐 입술을 벌린 사이 이블이 쏙 푸딩을 밀어 넣었다. 그 바람에 발음이 새어 버렸다. 체체는 우물우물 푸딩을 삼켰다. 내 품에 안겨서 주는 대로 음식을 먹는 모습이 모이 먹는 작은 새 같아서 너무 귀엽고 심장이 떨렸다.

그렇게 한 세 번 정도 받아먹은 체체가 배부르다며 그 이상은 거부했다.

“이제 약 먹자.”

체체는 아직도 약을 먹었다. 올해 초보다는 양이 많이 줄어서 약은 딱 두 개였다. 하나는 정신 치료용 캡슐 약이고, 하나는 체력을 보하는 탕약으로 굉장히 썼기 때문에 이블이 미리 달콤한 걸 많이 먹인 것이다.

체체는 캡슐을 삼키고 탕약도 마치 쓴맛을 못 느끼는 사람처럼 한 번에 들이켰다. 누가 보면 생수인 줄 알겠지만 사실 굉장히 많이 쓴 약이었다.

이블은 미간 한번 찌푸리지 않은 체체에게 바로 푸딩을 내밀었다.

“많이 쓰지? 그래도 먹어야 돼. 넌 체력이 너무 약하단 말이야. 나 사리 나올 것 같으니까 당분간은 계속 먹어. 써도 참아.”

“…….”

“많이 써? 괜찮아?”

이블은 체체를 품에 안고 조막만 한 얼굴의 이곳저곳을 만지작거렸다. 무릎 위에 올려놔도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너무 귀엽고 작은 이 녀석이 밤마다 날 감당하느라 많이 힘들겠구나 하는 짠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쓴 것도 매일 마셔야 하고 말이다. 너무 사랑스러운 나머지 이블은 체체의 발그스름한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대 버렸다.

“…….”

깃털 같은 가벼운 입맞춤 후 이블이 체체의 금색 눈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별로 안 쓰네. 달달하다.”

“…….”

겨우 입술만 살짝 비비고서 쓰지 않다고 말하는 이블을 가만히 쳐다보던 체체가 갑자기 이블의 목 부분을 붙잡고는 자신 쪽으로 당겼다. 이블이 불가항력적으로 끌려갔다.

이번 입맞춤은 먼젓번보다 깊었고 길었다.

체체가 입을 열었다.

“이 정도는 되어야 맛을 느끼죠.”

“…그러게.”

이블의 붉은 눈이 체체의 촉촉한 입술과 붉어진 뺨, 그리고 진한 금색의 눈을 훑었다. 이블은 체체를 안아 들고 일어서며 농도 짙은 뜨거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오늘은… 이만 퇴근하자. 안 된다고 하지 마.”

“…….”

낮게 내리깐 음성 뒤에 따라오는 말은 없었다. 그 성실하던 체체는 아무 말도 없이 고이 품에 안겼다.

***

출근 첫날 멋대로 퇴근해 버린 이블과 체체는 다음 날 당당하게 지각했다. 체체는 누가 봐도 아주 뜨거운 밤을 보낸 사람처럼 잘 걷지도 못하고 끙끙 앓더니 결국 오전에 조퇴했다. 이블은 실실 웃는 얼굴로 체체를 데려다주겠다며 함께 사라져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대놓고 지각하고 조퇴해도 둘을 타박할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며칠 또 성실하게 다니는 듯하다가, 주말을 보낸 후 월요일에는 사이좋게 무단결근했다.

체체가 조련사 역할을 잘하는 건지 아니면 같이 땡땡이를 치는 건지 사람들에게 의구심이 생길 무렵 센터 근방 쇼핑몰에 가스 누출로 인한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 많은 이들의 예상대로 이블이 현장에 직접 행차했다. 다만 많은 이들의 예상외로 체체와 함께가 아니었다.

체체가 삼 개월 근신 명령을 받은 동안 이블은 이블 엔젤이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로 오러 유저로서 많은 일을 했다. 얼마나 많냐면 오러 유저의 평균 업무량만큼이었다. 정말 대형 재난 사고가 아닌 이상 움직이지 않던 그가 보통의 오러 유저처럼 활동한 것이다.

그게 얼마나 큰 영향을 줬는지 이월부터 사월, 삼 개월간 재난 사고로 사망한 사망자 수가 작년까지의 연평균에 비해 삼 할이나 하락했다. 혹자는 이블이 예전부터 계속 올해처럼 나서 줬다면 수많은 이들이 안타깝게 떠나지 않았을 거라며 아쉬움을 표했지만, 그런 반응보다는 이블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보고 좋아하는 시선이 더 많았다.

이블이 그렇게 착한 일을 하는 건 전부 체체 때문이었다. 이블의 저의는 어린애도 눈치챌 만큼 노골적이고 투명했다. 다만 체체 혼자 눈치를 못 챘다.

그는 화재를 진압하거나 건물 자재를 옮기면서 자신을 촬영하는 드론을 굉장히 의식했다. 멋있는 각도로 몸을 비틀고 땀을 훔치거나(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맑고 깨끗했다) 렌즈를 바라보며 근사한 웃음을 짓거나(이때 시청 중이던 이들 중 많은 사람이 두려움에 경기를 일으켰다) 인터뷰할 때면 ‘칭찬 준비해 놔, 귀여운 뱁새야’라며 전 세계에 염장을 지르고는 했다. 이로 인해 이블에게는 ‘사랑꾼’이라는 별명도 생겼다.

이제 체체의 근신이 풀리고 외부 활동이 가능해졌으니 당연히 사람들은 이번 사고에 이블이 그의 소중한 사람과 함께 재난 현장에 나타날 줄 알았다. 그러나 이블은 혼자 등장했고 여느 때처럼 순식간에 일을 해결했다. 모두가 그 이유를 궁금해했다.

저렇게 대중에게 자기 모습을 드러내고 과시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왜 연인을 데려오지 않았지?

모두의 궁금증을 대신하여 제임스가 물었다. 물론 이블이 아니라 체체에게. 함께 생중계 영상을 보면서 왜 함께 가지 않았느냐고 넌지시 묻자 체체가 대답했다.

“벌입니다.”

“벌이요?”

“네, 한번 위험에 빠졌던 벌로 당분간은 위험한 곳에 절 데리고 가지 않을 거라고 하셨어요.”

위험한 곳에 데리고 가지 않는다는 게 어떻게 벌일 수가 있는지.

범인인 제임스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아무튼 오전에 일어난 가스 폭발 사건을 멋지게 해결한 이블은 바로 센터로 복귀해 체체의 세공실로 달려갔다.

“체체.”

요즘 이블은 체체의 이름을 부를 때 음률을 담기도 했다. 밝고 경쾌하게 그리고 사랑을 가득 담아서.

체체는 엔드스틱을 내려놓고 이블에게 다가갔다.

“이블 님, 다친 곳은 없으세요?”

“없어. 힘들고 피곤해. 가스 냄새 존나 역겨워.”

“고생하셨습니다.”

이블은 체체를 달랑 들어 안아 세공실에 마련된 긴 소파에 조심스레 앉혔다. 그리고 체체의 허리를 끌어안고 커다란 몸을 비볐다. 마치 체체의 체취로 가스 냄새를 지우려고 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이블이 일을 하고 돌아오면 항상 이런 식으로 굴어서 체체도 익숙해졌다.

이블의 몸은 무척 단단하고 크다. 그리고 따뜻하다. 체체는 이블의 찬란한 금색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창을 통해 비치는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이 났다. 이블이 체체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꿍얼거렸다.

“나 요즘 너무 열심히 일하는 것 같아.”

“이제 조금 쉬세요.”

“…그래야지. 그런데 너 지금 세공하고 있었어?”

이블의 눈매가 날카롭게 테이블 위를 훑었다. 체체는 원석 하나를 가공하던 중이었다.

“너 아직 일 없잖아.”

체체는 아직 세공 의뢰를 받지 못했다. 재출근한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센터 고문 이사가 아직 업무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출근은 하지만 일은 없는 상태였다.

“그냥 만지고 있었습니다. 이러다가 까먹을 것 같아서요.”

“금방 일 줄게. 초조해하지 마.”

“…….”

“일단은 놀고먹어. 집 세공실에서 연습하면서.”

“천천히 주셔도 됩니다. 안 주셔도 되고요.”

다소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하는 말에 이블은 본능적으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일을 안 줘도 된다고 하는 체체는 자신보다 많이 먹는 체체만큼이나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다. 이블이 슬쩍 떨어져 체체의 표정을 살폈다.

체체가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갔다.

“센터는 퇴사하면 되니까요.”

“뭐…?”

“퇴사하면 되니까요.”

“뭐….”

이블이 너무 놀라서 소리를 꽥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퇴사?”

체체와 조금 거리를 벌린 이블은 자신이 들은 게 진짜인지 믿기 힘들어 눈을 크게 떴다.

“퇴사라고 했어?”

“네.”

“어떻게? 계약이, 전속 계약인데. 너는 내 비서인데. 내 비서잖아.”

“이블 님이 일을 가시면 저는 혼자 아무것도 안 하고 세공실에서 가만히 있는 시간이 많잖아요. 이블 님을 기다리는 동안 심심해서 계약서를 찾아봤습니다. 비서 계약이 이번 달로 끝이 나더라고요.”

“이번 달이….”

이블은 너무 당황하고 어이없어서 이번 달이 몇 월인지도 까먹었다. 한여름이니 칠월이나 팔월쯤이었다.

“비서 계약이 일 년짜리 계약이었어?”

“네.”

“오러 유저 계약서 따로 작성했잖아.”

“오러 유저 계약서 세공사 부분에는 센터가 연속 삼십 일 동안 임무를 할당하지 않을 경우 세공사 측이 해지를 요구할 수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허….”

체체는 예쁘고 사랑스러운 얼굴로 이블을 올려다봤다. 이블이 스스로 팔뚝을 쓸면서 소스라쳤다.

“진짜 무섭다. 무서운 뱁새야. 소름이 돋네. 와, 씨발… 누가 전쟁터에서 안 굴렀다고 할까 봐.”

“전쟁터와 무슨 상관인가요.”

“이러다 사람도 죽이겠다. 어? 사람도 죽이고는 이블 님이 저한테 일 안 줘서 죽였습니다, 하겠어.”

이블은 등골이 서늘하다면서 가만히 있질 못하고 세공실을 왔다 갔다 했다. 정신 사납게 구는 이블의 동선을 체체의 시선이 가만히 따라갔다.

이블은 처음엔 당황하고 배신감도 느꼈다가 이제는 분노가 차오르는 것 같았다.

그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온갖 욕을 쏟아부으면서도 언제나 말을 들어줬다. 체체는 이번에도 이블이 내 말을 들어줄 거라 생각하고 가만히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안 좋은 느낌이 들었다.

이블은 인상을 썼고 눈빛의 온도가 매우 낮았다. 꽉 다운 입매는 매우 단호했다. 손가락으로 팔뚝을 두드리며 고민하던 이블이 체체의 앞에 섰다. 체체는 앉아 있고 이블은 서 있다 보니 높이 차이가 상당해 체체는 목이 아플 정도로 고개를 들어야 했다.

그때 이블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눈높이가 얼추 맞았다. 이블은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듯이 말했다.

“알겠어.”

“…….”

“네가 무슨 말 하는지 알아. 너는 그냥 다른 세공사들이랑 동일한 업무를 하고 싶은 거야. 그렇지?”

내용만 들으면 체체를 이해한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여름 바람에 나부끼는 커튼 같던 평소 목소리와는 달리 몹시 가시가 돋았다. 만약 목소리에도 명암과 색이 있다면 이 목소리는 아주 어두운 검은색일 것이다.

“하나 분명히 말해 두겠는데.”

이블의 붉은 눈이 체체의 금안을 들여다봤다. 이블이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는 게 느껴졌다.

“너는 절대 평범한 생활을 못 해.”

“…….”

“연애를 얘기하는 게 아니야. 평범한 생활 말이야. 일단 나와 연인인 것부터가 평범과는 거리가 멀지. 너도 알잖아.”

눈빛과 목소리, 제스처 하나하나에 냉정함이 묻어 있었다. 그러나 체체의 손등을 덮어 오는 커다란 손은 따뜻했다. 이블은 체체에게 아무리 차갑게 굴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부드럽고 따뜻해졌다.

화가 났고, 화를 내고 있는데도.

체체의 손이 떨린다는 것을 알면 결국 잡아 줄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세상에 도움을 주고 싶으면 그냥 내 옆에 붙어 있을 궁리나 해. 그게 바로 너만이 가진 능력이니까.”

이블의 목소리는 좀 전보다는 퍽 너그러워졌다. 하지만 그건 체체나 그렇게 느꼈고,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무척 살벌하다고 생각할 터였다.

“이블 님.”

“뭐. 불만 말할 거면 그냥 닥쳐.”

“…….”

체체는 이블이 다정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그의 다정함을 이용하려고 했다.

이블에게서는 석유 냄새가 났다.

그는 가스 폭발 사고를 마무리하고 방금 돌아온 참이었다. 굳이 그가 나서지 않아도 되는 작은 일에 선뜻 나서고 돌아온 그에게 자신은 일을 안 주면 센터를 그만둔다는 협박이나 했다는 게 부끄러웠다.

칭찬을 해 주기로 했는데….

이런 식으로 그의 다정함을 이용한 게 벌써 몇 번째인가.

하지만 체체에게도 물러설 수 없는 부분은 있었다.

체체는 이블의 커다란 손아귀에서 자신의 손을 빼냈다. 이블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너….”

이블은 분명 그치고는 크게 양보했고, 최선을 다해 설득하려는 중이다. 그걸 알면서도 외면하는 건 체체로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

이블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체체가 움찔했다. 이블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체체를 기다려 줬다. 체체는 입술을 깨물고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망설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블은 그대로 세공실을 나가 버렸다.

***

이블이 완전히 삐졌다.

체체한테서 내쳐진 후 싸늘한 얼굴로 세공실을 박차고 나간 이블은 퇴근 시간까지 연락이 없었다. 체체는 원석 세공을 좀 하려고 했지만 손에 잡히지 않아서 결국 아무것도 못 한 채 세공실을 나왔다.

가방을 챙기고 평소처럼 이블의 집무실에 갔는데, 마침 이블이 나왔다. 이블은 체체를 보더니 샐쭉하게 입술을 내밀고는 뒤따라오는 제임스에게 말했다.

“야, 체체한테 저녁 혼자 먹으라고 전해.”

“…….”

“…….”

제임스와 체체 둘 다 할 말을 잃었다.

“오늘 집에 안 들어갈 거라고도 전해 줘. 저녁도 안 먹을 거고 내일 아침도 굶을 거라고.”

“…….”

“뭐 해. 벙어리야?”

“체, 체체 씨. 이블 이사님께서 오늘 저녁 식사를 안 하신다고 합니다. 다른 곳에서 취침하실 거고요.”

“내일 아침도 안 먹을 거야.”

“내, 내일 아침 식사도 굶으신답니다.”

제임스는 눈에 물음표를 가득 단 채 주저리주저리 이블의 말을 전했다.

아침만 해도 서로 물고 빨고 아주 염병천병이던 사람들이 갑자기 왜 이러나 싶었던 것이다. 이블이 세 살짜리나 할 법한 말을 할 때는 체체도 잠깐 놀랐지만 곧 표정을 수습하고 건조하게 물었다.

“이블 님, 지금 가출하시겠다는 겁니까?”

“야, 체체한테 가출이 아니라 나 화 풀릴 때까지 외박할 건데 뭐 불만 있냐고 전해.”

“체체 씨, 이사님께서 화 풀리실 때까지 외박할 건데 불만 있냐십니다.”

“병원에서 외박하실 건가요?”

“야, 체체한테 내 친구가 하는 클럽에서 외박할 거라고 전해.”

“…체체 씨, 이사님께서는 레오 다비즈 씨의 클럽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밤을 보낸다고 합니다.”

제임스의 폭탄발언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이블이었다.

“씨발, 죽을래?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

잘생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이블은 매우 당황하면서 빠르게 다가오더니 제임스와 체체를 번갈아 봤다. 얼른 번복하라는 뜻이었다. 체체의 동그랗고 커다란 호박색 눈이 지금은 뭔가를 가늠하듯 가늘게 뜨여 있었다. 제임스는 체체가 저런 표정을 짓는 걸 처음 봤는데, 그건 이블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이블이 경기를 일으켰다.

“미쳤나 진짜. 난 절대 그렇게 말 안 했는데!”

“방금 클럽에서 외박하신다고….”

“그냥 외박하겠다고 했지 갑자기 다른 사람이 왜 나와. 난 쟤 말고는 다 벌레로 보이는데 내가 벌레랑 그 짓거리 하는 변태로 보이냐? 존나 역겨워. 빨리 당장 제대로 전달해.”

195cm에 온몸이 근육으로 이루어진 남자가 자신보다 한참 작은 뱁새의 앞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주절주절했다.

“클럽은 본래 그런 곳 아닙니까?”

체체가 무심하게 물었다. 여전히 표정을 풀지 않았다. 건조하면서도 서늘한 눈빛에 이블이 제임스의 어깨를 쳤다. 제임스는 어깨가 빠지는 줄 알았지만 분위기를 살피느라 비명을 참았다.

“야, 그 클럽은 그런 곳 아니야. 빨리 잘못 전했다고 말해. 뭐 하는 거야? 네가 멋대로 와전했잖아. 하지도 않은 말 하고. 씨발, 빨리, 아, 체체 표정 좀 보라고!”

이블이 굉장히 쩔쩔맸다. 제임스는 분명히 지금 이블을 무서워해야 하는 상황인데 무섭지 않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체체 씨, 죄송합니다. 이블 이사님이 가시는 클럽은 그런 곳이 아니라고 합니다.”

“엄청 건전한 곳이라고 말해.”

“엄청 건전한 곳이라고 합니다.”

“그럼 절 데리고 가실 수 있습니까?”

“…….”

이블이 대답하지 못하자 체체가 다시 눈을 가늘게 떴다. 예쁜 입술이 단호하게 다물어졌다. 어깨까지 들썩이면서 놀란 이블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

“미친 존나 날카로워.”

저걸 지금 혼잣말이라고 하는 거야…?

지금 비서실에서 열심히 컴퓨터 프로그램 공부를 할 비서들에게도 다 들릴 만큼 큰 혼잣말이었다. 너무나 날카로운 면모를 뽐내는 체체에게 다시 홀딱 반해 버린 듯했다.

“건전한 곳이면 절 왜 못 데리갑니까?”

그 와중에 체체가 다시 한번 물었다. ‘데려갑니까’가 아니라 ‘데리갑니까’였다.

“예전에 외박을 해 왔을 때도 그 클럽이었던 것입니까.”

표정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체체는 흥분한 게 분명했다. 알시티어가 갑자기 서툴어졌기 때문이다. 제임스가 봐 왔던 모습 중에 가장 격정적(?)이었으니 아마 이블에게는 더욱더 벅차게 와닿았을 것이다.

“야.”

잠깐의 적막 후에 이블이 제임스를 툭 쳤다.

“쟤한테 전해 줘. 나 오늘 그냥 집에 들어갈 거라고.”

“이사님께서 클럽에 가지 않고 집에 들어가신답니다.”

“네.”

서늘하게 굳었던 체체의 표정이 다시 무심하게 돌아왔고 다행히 대치가 일단락되었다. 제임스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둘에게 깍듯이 인사한 뒤 곧바로 비서실로 뛰어 들어가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켜며 속을 달랬다.

저 초딩 폭군이야 원래 저 모양인 걸 알았지만 어른스러운 체체까지도 연애를 하니 유치한 짓을 하는구나. 보기 좋은 것과 별개로 토는 나왔다….

***

체체 납치 사건 이후 이블은 체체가 타고 다닐, 탈 확률이 있는 교통수단을 모조리 개량했다. 체체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초능력자를 협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앞으로 빌라인 제라도 같은 곳이 또 나타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블이 만약 예전처럼 두려운 폭군으로만 남는다면 체체를 감히 납치할 멍청한 곳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 이블에게는 이블 엔젤이라는 수식어도 생겼고, 초딩 같지만 사실 사랑꾼이라는 이미지도 붙어 다녔다. 멍청한 인간들은 이미지가 좋은 사람을 얕보는 경향이 있었고, 그걸 아는 이블은 체체의 안전을 위해 많은 것을 바꿨다.

우선 그는 오러 유저와 어댑터, 노유저 가드를 수십 명이나 고용해 저택을 지키게 했다. 출퇴근 차량 또한 대통령 차량과 같은 옵션으로 주문 제작했으며 전용기에는 미사일을 달았다. 잠수함도 새로 구매했다.

그래도 불안해서 재난 사고 현장에 갈 때 외에는 웬만하면 체체와 단 일 분도 떨어지지 않았다. 클럽에서 외박을 하겠다느니 큰소리쳤지만 그는 결국 저택 주위를 맴돌았을 것이다.

차량을 바꾸면서 더 넓어진 내부에는 두 사람이 누울 만한 공간이 있었는데, 이블은 일부러 자리 가운데에 애매하게 누워서 체체를 눕지 못하게 했다. 좌석에 가만히 앉은 체체를 뚱하게 보던 이블이 벽면의 운전기사 호출 버튼을 눌렀다.

“야, 체체한테 나 집에는 들어가도 저녁은 안 먹을 거라고 전해.”

- …예.

제임스로부터 ‘도련님이 체체한테 일방적으로 삐진 상태’라는 걸 미리 들은 운전기사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차내에 알렸다.

- 체체 님, 이블 이사님께서 당신 얼굴 보면 밥맛 떨어지기 때문에 저녁 식사를 굶을 거라고 전달해 달라십니다.

“…….”

체체가 이블을 쳐다봤다.

이블이 입을 쩍 벌리고 날뛰었다.

“미… 미친 거 아냐 진짜, 씨발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 난 존나 체체랑 같이 밥 먹는 시간만 기대하면서 사는데! 환장하겠다. 다들 정신병 생긴 거야? 지들이 기자야, 네티즌이야. 왜 이렇게 말을 와전해 대. 아주 미쳐 돌아가고 있어.”

이블은 쉬지 않고 속사포처럼 해명했다. 꾸지람을 들은 운전기사는 풀이 죽었고 이블은 씩씩거렸으며 체체는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난 밥은 안 먹을 거지만 절대 밥맛 떨어진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얼굴 존나 귀엽고 예뻐.”

이블은 체체의 눈치를 보며 혼자 아주 큰 소리로 말했다. 버튼도 누르지 않았으면서 운전기사에게 말 거는 척이었다.

체체는 창밖을 바라봤다.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조각조각 떠다녔다. 창문을 열면 분명 따스한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알시티는 사계절이 아주 뚜렷했다.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고, 가을은 시원하고 봄은 따뜻하다. 타르와는 전혀 다른 더위였다. 타르는 비가 내리지 않아 건조하지만 알시티는 며칠씩 폭우가 쏟아져 찐득찐득하고 습한 날씨가 이어질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알시티인들은 차라리 건조한 게 낫다며 불평하기도 했는데, 하루 종일 에어컨 덕분에 최적의 온도와 습도 속에서 살아가는 체체로서는 뭐가 더 나은지 객관적으로 비교하기 어려웠다.

에어컨은 지구에 이렇게 많은 자연재해가 발생하게 된 주요 원인으로 꼽히기 때문에 수많은 개량을 거쳐 과거보다 많이 나아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안 좋은 건 분명했다. 때문에 센터에서도 웬만큼 폭염이 아닌 이상 틀지 않는데, 이블은 봄이 지나자마자 저택에서, 차에서, 집무실에서 펑펑 틀어 댔다.

‘야, 됐어. 그냥 써. 에어컨이 지구 나쁘게 만드는 것보다 내가 지구 도와주는 게 훨씬 커. 지구도 내가 더워서 짜증 내는 것보다는 틀길 바랄 거야.’

에어컨의 세기를 줄이자고 말하니 그렇게 당당하게 나와서 체체도 설득당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더 날씨가 좋았다. 체체는 단식 투쟁을 선언하고 씩씩대는 이블의 옆에 꼼지락거리며 누웠다. 두 자리를 모두 차지하고 누웠던 이블이 거대한 몸을 슬금슬금 옆으로 비켰다.

“아, 씨. 좁은데 왜 올라와. 야, 체체한테 올라오지 말라고 해.”

이블이 다시 벨을 누르며 운전기사에게 명령했다. 운전기사는 다시 목을 가다듬었다.

- 체체 님, 이사님께서 같은 공기를 마시는 것도 싫으니 옆에 눕지 말라고.

“아, 닥쳐 씨발 닥쳐! 너네 단체로 작정했지? 다 잘라 버릴 거야! 다 사표 내!”

이블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동안 체체는 아랑곳 않고 이블의 옆구리를 모두 차지했다. 이블이 양보한 공간이 그가 누운 공간보다 넓었다. 맹수는 버럭버럭 포효하면서도 자신보다 한참 작은 뱁새가 꼼질꼼질 품에 기어들어 올 수 있도록 움직였다.

체체는 이블의 옷자락을 살짝 붙잡았다. 창을 통해 비치는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눈을 감았다. 이블의 목청이 줄어들었다. 체체는 자신의 뺨을 쓰다듬는 손길을 느꼈다. 단단하고 따뜻했다. 다정함이 서린 손길이었다.

***

“오셨습니까. 식사부터 준비할까요?”

“아니, 오늘 굶을 거야.”

보통 이블은 집에 오자마자 먹을 것부터 찾는데 오늘은 달랐다. 단호한 말투에 힙스는 놀라지도 않았다. 이미 제임스로부터 이블의 심기에 대해 전해 들은 상태였다.

“예, 오늘 식사는 준비하지 않겠습니다.”

이블이 멈칫하더니 힙스를 노려봤다.

“체체는 먹여야지.”

“…네, 체체 님 식사는 준비하겠습니다.”

“체체한테 전해. 밥 남기면.”

“예.”

이미 오늘의 소문을 들은 힙스는 두근두근 기대하며 이블을 바라봤다. 자신도 이블과 체체의 사랑싸움 속 피해자가 된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그러나 이블이 말을 잇지 않고 눈살을 찌푸려서 다시 물었다.

“식사를 남기면, 뭐라고 전달해 드릴까요?”

“…됐어. 어차피 또 와전할 거지.”

“와전이라니요. 그대로 잘 전달하겠습니다.”

“닥쳐.”

앞서 두 번의 경험으로 모든 인간을 불신하게 된 이블이 차갑게 잘랐다. 힙스는 제임스와 운전기사도 어울렸다는 알콩달콩 사랑싸움에 못 끼게 되어 몹시 상심했다.

중앙 저택에 가까워질 때쯤 문이 저절로 열렸다. 힙스는 요즘 이블에게 문을 열어 주는 일조차 할 수 없었다. 이블은 염력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다가 멈춰 섰다.

“야, 너 내 말 체체한테 그대로 전달해.”

“예.”

역시 말하지 않고는 못 견디겠나 보다. 힙스의 마음이 설레 왔다.

“밥 남기면 조리사들 다 갈아 버린다고 해.”

“…예.”

힙스가 떨리는 눈으로 체체를 바라봤다. 올려다봐야만 했다.

이블이 체체를 소중히 안아 들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출근하기 시작한 이후로 체체는 중앙 저택의 현관을 자신의 발로 밟은 적이 없었다. 항상 이블에게 안긴 채 들어왔고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이블은 체체를 단단하게 감싸 안았고 체체는 이블의 목에 팔을 둘렀다. 서로 고개만 돌리면 입술이 닿을 것 같은 자세였다.

힙스는 이블이 소중하게 안은 체체에게 전달했다.

“체체 님, 이블 님께서 식사를 남기시면 조리사들을 분쇄기에 갈아 버리신다고.”

“아니야!”

이블이 버럭 소리쳤다.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 그냥 조리사들을 교체하겠다고. 씨발, 내가 무슨 사이코패스 연쇄 살인마도 아니고 분쇄기가 왜 나와. 갈아 죽여도 그냥 내 손가락 한 번 튕기면 끝인데. 아니, 진짜 갈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모가지를 자르고 다른 사람을 뽑을 거라고. 아니, 그 목이 아니라 그냥 자를 거라고. 퇴사시킨다고.”

이블이 다급히 변명했다. 힙스는 모시는 분의 저의를 곡해해 버렸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당연히 갈아 죽이겠다는 줄 알았다. 지금까지 쌓아 온 이블의 이미지 탓에. 오늘 이블의 말이 다 와전된 건 자업자득이었다.

“이블 님, 같이 먹어요. 혼자 먹고 싶지 않습니다.”

체체가 이블의 어깨와 목 사이에 얼굴을 포개며 말했다. 손길로 단단한 어깨를 어루만졌다. 이블은 체체의 의미 없는 행동과 말 하나하나를 다 유혹으로 해석하고는 했는데, 이번에는 진짜 유혹이었다.

“오늘은 가스 폭발 사고도 처리하고 와서 힘드셨잖아요. 같이 밥 먹어요.”

“…….”

체체의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이블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이블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체체한테 정 원하면 먹어 줄 수는 있다고… 그렇게 전해.”

이블은 아직 화를 다 푼 건 아닌지 체체에게 직접 말하지는 않았다. 둘 사이의 거리로 봐서는 귓가에 속삭이는 것과 마찬가지였지만.

힙스는 이번엔 이블이 말한 그대로 전달했고 체체는 옅게 웃으며 이블의 팔뚝을 만지작거렸다. 늙은 힙스가 보기에는 너무 야해서 힙스는 서둘러 중앙 저택을 나왔다.

***

몸을 깨끗이 씻은 후 맛있는 식사도 마치고 후식까지 깔끔하고 먹고 다니 오후 다섯 시였다. 평소라면 체체는 세공실에서 세공 연습을 하고 이블은 그런 체체를 구경하는 시간이지만, 오늘 이블이 화가 난 주요 원인이 바로 이 세공이었으므로 체체는 세공실로 향하지 않았다. 체체가 어떻게 행동하나 눈을 부라리던 이블은 그런 결정에 만족한 듯했다.

둘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영화 한 편을 봤다.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였는데 사실 이블은 주제가 자연환경이라는 것 말고는 기억나지 않았다. 영화에 몰두한 체체의 옆얼굴이 너무 예뻐서 영화에 집중하지 못한 것이다. 당장 안고서 침실로 올라가고 싶은 미모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 밤은 어떡하지?’

체체의 고운 속눈썹을 바라보던 이블의 머릿속에 한 가지 고민이 스쳤다.

둘은 스물두 살의 청년이고 한창 타오르는 연애 초기이다 보니 하루가 멀다 하고 뜨거운 밤을 보냈다. 이블은 오늘도 그런 밤을 보내고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그는 체체에게 화를 낸 상태고 체체도 용서를 구한다거나 화해를 청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오늘은 각방인가? 하지만 또 그런 것치고는 아까 체체가 대놓고 유혹해 오기는 했다. 자신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적거리고, 긴 속눈썹을 깜빡이면서 간지럽히기도 하고….

오늘 낮까지만 해도 외박할 거라고 협박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채, 이블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이윽고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었다.

중앙 저택에는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가 모두 설치되어 있지만 체체는 오늘도 어김없이 계단으로 2층으로 올라갔다. 이블은 심각한 얼굴로 체체의 뒤를 따랐다.

체체는 두 방 사이에서 잠깐 머뭇거렸다. 납치 사건 이후로 내내 이블의 방에서 함께 잤는데, 오늘도 저 방에서 자도 되는 건지 자신이 없었다. 체체의 방은 여전히 문을 달아 놓지 않아 안이 훤히 보였다. 청소는 하루도 빠짐없이 하기 때문에 당장 들어가서 자도 되긴 할 것이다.

“안녕히 주무세요.”

“…….”

결국 각방을 택한 체체가 취침 인사를 한 후 자신의 방 쪽으로 발걸음을 돌리는 그때였다.

쾅, 갑작스러운 굉음에 체체가 깜짝 놀라며 소리가 난 쪽을 바라봤다.

이블의 방문이 폭삭 무너졌다.

“…….”

“아, 갑자기 아침에 갑자기 아슬아슬하더라니 역시 무너졌네. 그, 못 잠그겠다. 왜냐하면 손잡이가 갑자기 무너져서. 정말 잠그고 싶었는데. 문이랑 손잡이가 무너지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단 말이야.”

이블이 엄청 티 나는 거짓말로 혼잣말했다. 그러면서도 체체에게 잔해가 튀지 않도록 앞을 막아 주었다.

“아씨, 밤에 누가 들어올지도 모르겠네. 침대가 넓어서 둘이서도 충분히 잘 수 있긴 한데.”

이블이 계속 곁눈질했다. 체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블 님의 방에는 함부로 안 들어갑니다. 집사님과 약속했습니다.”

“약속? 무슨 약속?”

“밤에 함부로 이블 님 침실에 기어들어 가지 않기로 저택에 온 첫날 약속했습니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

체체가 자신의 방으로 총총총 향하고, 이블의 얼굴은 싸늘히 굳었다.

그때 힙스는 불현듯 치밀어 오르는 불길한 예감에 몸을 부르르 떨어야 했다.

***

다음 날 아침에, 이블은 어젯밤보다 훨씬 더 삐졌다. 밤에 당장 별관으로 달려가 힙스를 족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화는 풀리지 않았다. 체체는 밤에 정말로 침대로 기어들어 오지 않았고, 그렇다고 자기 방에서 잘 잔 것도 아니라서 이블은 더 화가 났다. 각방 하기로 했으면 잠이라도 잘 잘 것이지, 체체는 내내 못 자다가 새벽 서너 시경에야 잠이 들었다. 체체에게 신경 쓰느라 이블도 못 자긴 했지만 둘은 체력이 달랐다.

“난 안 먹어. 너나 처먹어.”

먼저 씻고 나온 이블은 정말 화가 많이 나서 아침 식사를 거르겠다고 선언했다.

“…….”

이블이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어제보다 더 불량한 표정을 짓는 걸 가만히 보던 체체가, 그대로 식당으로 사라졌다.

이블은 얼음이 되었다.

지금 진짜 그대로 가 버리겠다는 거야?

내가 아침밥을 안 먹었는데? 어제 저녁도 조금밖에 안 먹었지. 야식은 아예 안 먹었잖아. 게다가 잠도 따로 잔 상태에서 아침을 안 먹겠다고 했는데 진짜로?

날 안 안아 줘?

진짜? 정말?

이블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체체가 나를 걱정하지 않아.

이블이 황망한 얼굴로 일어났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쟤가 진짜 화가 났나 봐.

작아지는 뒷모습을 보면서 이블은 발밑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왜 이런 걸로 화를 내? 화는 내가 내야지. 섭섭한 것도 나고 서운한 것도 난데 왜 자기가 화를 내는 거야.

세상에서 가장 쉽게 화를 내고 쉽게 토라지는 이블이 그런 원망스러운 마음으로 체체의 뒤를 따라가려던 그때였다.

체체가 갔던 길을 되돌아왔다.

이블의 시선이 체체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이블의 앞에 선 체체는 살짝 피로해 더욱 야해진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같이 먹어요, 이블 님.”

이블은 너무 안도한 나머지 체체의 어깨를 끌어안아 버렸다.

작은 손이 자신을 위로하듯이 등을 토닥였다. 이블의 심장은 여전히 쿵쿵쿵쿵 빠르게 뛰었다.

“…입맛 없어.”

“그럼 저도 먹지 않겠습니다.”

“씨발, 너는 약 먹어야 되니까 처먹으라고.”

“저 약 먹어야 되니까 이블 님도 순순히 식사하세요.”

당돌한 협박에 이블은 미소를 주체하지 못했다. 체체도 옅게 웃음 지었다. 금빛 눈에 사로잡힌 이블이 살짝 피로한 기가 있는 체체의 눈가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얼굴이 어제보다 더 작아지기라도 했는지 뺨을 감싸자 얼굴의 절반이 사라졌다. 이러다 정말 요정이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생각해 보니 이 사랑스러운 눈가에 입을 맞추지 못한 지 벌써 스무 시간이나 지났다. 이블은 체체가 개인 의뢰를 포기할 때까지 계속 화난 척을 할 생각이지만, 키스는 그와 별개였다.

화가 났다고 키스하지 못하란 법이 있나?

이블이 체체의 턱을 손가락으로 올렸다. 체체는 발꿈치를 세웠다. 따스하고 조금 까슬한 입술이 맞닿자 온몸에 열기가 확 퍼져 나갔다. 귓가에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 두 개가 겹쳐 들려왔다. 이블은 체체를 단번에 안아 들고는 뜨거운 숨을 내쉬며 말했다.

“야, 오늘….”

“네, 그래요.”

“내가 뭐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오늘 지각하죠.”

체체는 짧게 말하고는 집중하라는 듯이 이블의 목을 끌어당겼다.

이블은 체체를 안은 채 위로 올라갔다.

***

“어서 오십시오, 이사님. 체체 씨.”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센터에 도착한 둘에게 제임스가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상사의 지각을 언제나 환영하는 그였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역시나 같이 인사해 오는 사람은 체체뿐이었다. 제임스는 이블의 인사가 없는 평범한 하루에 몹시 만족했다.

이블은 집무실로, 체체는 세공실로 향하는데 헤어지는 둘의 분위기가 이상야릇했다. 제임스는 두 사람이 화해했음을, 아니, 이블이 일방적인 화를 풀었음을 직감했다.

오늘 주식 시장은 크게 변동이 없겠군.

요 근래 주식으로 큰 수익을 본 제임스는 이제 모든 걸 주식과 연관 지었다.

돈맛을 보고 황금만능주의자가 되어 버린 비서실장은 이블의 결재가 필요한 파일이 든 태블릿PC를 가지고 집무실에 들어갔다. 태블릿을 건네받은 이블은 의자에 삐딱한 자세로 앉아 여느 때처럼 무심하게, 그리고 빠르게 오러 유저와 업무를 배정했다.

“…….”

어느 순간 이블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블이 업무를 배정하면서 고민하는 건 아주 흔치 않은 일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제임스가 고개를 빼고 보니 <에어컨 사용 자제를 독려하는 루젬 세공 의뢰>였다.

한여름 무더위가 찾아오는 이 시기에는 늘 오는 의뢰였다. 이블은 십 대 때부터 센터의 고문 이사로 일했기 때문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야, 너 걔 단점이 뭔지 물어봤지?”

전혀 생뚱맞은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았지만 제임스는 마치 예상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예, 제가 볼 때는 너무 완벽하셔서 단점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걔는 너무 성실한 게 단점이야.”

“…그렇군요.”

둘이 재출근하고 오늘이 열흘째인데 무단결근 한 번, 지각 세 번, 조퇴 두 번을 했으니… 아주 성실하다고 할 수 있었다.

“걔한테 공공 의뢰만 주니까 이제 개인 의뢰를 받고 싶대.”

주면 되잖아.

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제임스도 이블이 개인 의뢰를 주지 않는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갔다.

이블은 손가락을 움직여 에어컨 사용 자제를 독려하는 루젬 의뢰에 보란 듯이 체체를 배정했다.

“하지만 난 공공 의뢰만 줄 거야. 어제 이것 때문에 걔가 삐지긴 했는데, 그냥 삐지든 말든 앞으로도 계속 공용만 주기로 했어.”

“삐진 건 이사님… 이 아니라 네, 그러셔야죠. 그럼요. 체체 님의 루젬은 널리 더 많은 이들이 보고 느껴야 합니다.”

“씨발, 그렇게 말하니까 다 싫어지네. 그냥 이것도 주지 말까.”

이블의 붉은 눈이 거칠어졌다. 제임스는 뭐라고 대답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오러 센터에 근무하면서 이와 비슷한 경우를 몇 번 접한 적 있었다.

몇몇 루젬 세공사들은 연인이 이 일을 반기지 않는다고 토로하고는 했다. 홀리아젬에는 세공사의 내밀한 모습이 무의식중에 담기는데,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의 내면을 담아낸 것이 다른 이의 손아귀에 쥐이는 게 싫은 것이다. 이해 못 할 건 없었다.

“걔가 좀 더 게을렀으면 좋겠는데. 나한테도 일 관두라고 하고. 낮이든 밤이든 뒹굴면서 놀자고 했으면 좋겠어.”

“그러게요… 저도 진심으로 바랍니다.”

정말 진심이었다.

“왜 개인 의뢰를 원하는지 이유는 물어보셨습니까?”

“아니, 어차피 안 들어줄 거라서 안 물어봤지.”

“한번 물어보는 게 어떻습니까?”

그사이 모든 배정을 마친 이블이 태블릿을 내던졌다. 다행히 제임스는 이를 예상하고 태블릿 케이스를 아주 두껍게 주문 제작했다. 이블은 의자에 깊숙이 기대면서 툴툴거렸다.

“안 물어봐도 뻔해. 다 타르를 위해서야. 타르 출신 최초의 소울 오러 유저로서 더 많은 작업을 하면서 빨리 성장하고 싶은 거야. 걘 타르에 환장했거든.”

“타르… 그렇군요.”

“가서 체체한테 전해. 일이 들어오기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으니까.”

“…네.”

이블이 다소 의기소침해 보여서 제임스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무언가 위로를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제임스가 생각하기에도 체체는 애국심이 대단한 사람이었고 성실했기에 이블의 말에 일리가 있는 것 같아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제임스는 비서실에서 의뢰서를 출력한 후 곧장 세공실로 향했다.

체체는 원석을 깎아 내려 루젬으로 만드는 중이었다. 제임스가 들어오자 체체는 고글을 벗었다. 금색 눈동자는 무심했다. 멍 때리기 대회가 있다면 압도적으로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무심한 표정이었지만 사실은 단 한 순간도 멍하지 않고, 언제나 늘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의뢰가 들어왔나요?”

“…예, 공용 의뢰입니다.”

제임스는 지레 찔려서 의뢰서를 내밀기도 전에 먼저 말해 버렸다. 체체는 살짝 눈을 내리깔았을 뿐 그 이상의 표정 변화는 없었다.

“감사합니다.”

파일을 받으며 하는 인사에도 딱히 싫은 감정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제임스는 왠지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느끼며 세공실을 나왔다.

이블도 신경을 곤두세웠을 것이다.

이 의뢰를 줬을 때 체체가 어떻게 반응할지.

제임스는 왠지 이블이 체체의 무반응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노유저에 불과했고 체체의 무심함으로 위장한 표정에서는 무엇도 읽을 수 없었지만, 그냥 그런 직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감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이블은 체체를 혼자 두고 멋대로 퇴근해 버렸다. 체체에게 언질도 주지 않아서 세 시가 되자 체체는 여느 때처럼 가방을 챙겨 이블의 집무실로 왔고, 난초를 쓰다듬는 제임스와 마주쳐야만 했다. 제임스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이, 이사님께서는 이미 퇴근하셨습니다.”

“그렇군요. 저도 가 보겠습니다.”

“들어가세요.”

“…실장님.”

“네, 네?”

“항상 그렇게 주인이 자리를 비운 집무실에서 붉게 물든 얼굴로 가쁜 숨소리를 내면서 난초를 쓰다듬으세요?”

“…….”

제임스가 딸꾹질했다.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은데 나오는 건 딸꾹질뿐이었다.

“내일 봬요.”

체체는 제임스를 난초에 환장한 사람으로 만들고는 무심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 제임스는 핸드폰을 들어 화면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봤다. 정말로 얼굴이 벌게지고 콧구멍이 벌름거리는 게 무척 이상한 사람 같긴 했다. 하지만 자기는….

“타르에 환장했으면서.”

“…….”

체체가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멈췄다.

“실장님,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체체는 문을 조용히 다시 닫고는 제임스에게 다가왔다.

“타르에 환장했다고 하셨죠.”

제임스는 목덜미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이블은 가끔씩 저 조막만 한 게 왜 이렇게 무서운지 모르겠다며 투덜대고는 했는데, 제임스도 이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사람마다 타고난 분위기와 위압감이 다른데 체체에게서는 작은 체구를 무색하게 하는 묵직한 무게감의 카리스마가 뿜어져 나왔다. 제임스는 쭈뼛거리면서 대답했다.

“제가 한 말 아닙니다. 그냥 옆에서 흘려들었고 사실 애국심 넘치는 건 장점이죠.”

“압니다. 이블 님이 말씀하셨겠죠.”

“예… 제가 아니라 이사님께서 표현하신 단어입니다.”

“어떤 상황에서 그 단어가 나온 건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체체가 제임스가 어루만지는 나니나니의 잎사귀를 흘깃하다가 다시 제임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제임스는 그 눈길이 왠지 ‘네가 여기서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네 소중한 난초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될 것이다’라는 협박처럼 느껴졌다. 제임스는 노유저였고 체체는 소울 오러 유저였으므로, 체체가 소울 오러를 사용한 건가 의혹도 들었지만 그냥 타고난 카리스마에 짓눌렸기 때문인 것 같았다.

“체체 씨가 루젬 세공 개인 의뢰를 받고 싶어 하는 것은 타르 출신 오러 유저로서 빠르게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안 물어봐도 뻔하다고, 다 타르를 위해서라고. 존나 타르에 미쳤다고.”

“…….”

체체의 표정이 더욱 굳었다. 하지만 아주 잠시였고 곧 평소의 무심하고 건조한 얼굴로 돌아왔다. 이 무심한 표정을 보며 위로해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버석버석하고 메마른 금색 눈에 대고 ‘슬퍼하지 마’라는 말을 건네기는 어렵다. 제임스도 체체가 화가 났으면 났지 슬퍼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체체는 평소와 같이 인사하고 집무실을 나왔다.

체체는 이블이 자신을 두고 갔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기척을 느낄 수 있을 만한 거리에서 기다릴 거라 생각하고 그대로 세공실로 돌아갔다.

오늘 이블이 맡긴 의뢰는 아주 의미 있고 무게 있는 의뢰였다. 세공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세공사가 맡기에는 과분했다. 아무래도 이블은 계속 공공 의뢰를 맡길 모양이었다.

체체도 이미 이블이 최대한으로 양보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집에만 놔두고 싶은 마음을 참고 바깥을 돌아다니게 해 줬다는 것도.

‘안 물어봐도 뻔해. 다 타르를 위해서야.’

직접 듣지는 않았지만 이블의 목소리로 들려오는 느낌이었다. 그가 그 말을 할 때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생각하면 심장이 가라앉았다.

체체의 슬픔을 알아볼 수 있는 건 오직 이블뿐이었다. 그리고 이블의 슬픔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도 오직 체체뿐이었다. 자신을 향해 ‘타르에 환장했다’라고 표현하는 이블에게서 슬픔을 느꼈다고 말한다면 모두가 놀라고 믿지 않겠지만….

이블은 타르에 열등감이 있었다.

누군가 그 말을 하면 이블은 콧방귀를 끼면서 절대 믿지 않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엔 그 말이 맞다고 인정할 것이다.

이블의 마음 깊은 곳에는 자신과 타르 중에서 타르를 선택하는 체체의 모습이 잠들어 있다. 타르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스스로 납치되고, 목숨을 위협하는 모든 위험을 감수하던 지난 모습이 분명 트라우마처럼 남았을 것이다. 본인이 듣는다면 자신처럼 강한 사람에게 무슨 트라우마 같은 개소리를 하냐며 지랄발광을 하겠지만 결국엔 그 자신도 인정할 것이다.

체체는 지끈거리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이블이 보고 싶었다. 이블을 보고 싶어 하는 자신이 무척 건방지다고도 생각했고, 자격이 없다고도 생각했지만 그래도 체체는 이블이 보고 싶었다.

***

여름의 긴 해가 넘어가고 창밖이 어두워졌다. 센터 가드가 퇴근 안 하느냐고 물어 와서 먼저 가시라고 답했다. 본래도 방음이 뛰어난 건물이라 소음은 없었지만 대부분이 퇴근한 후의 센터는 더욱더 적막했다.

어두운 고요함 속에서 원석을 다듬던 그때 문밖에서 쿵쿵쿵, 하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체체가 고개를 듦과 동시에 문이 벌컥 열렸다.

“씨발, 진짜.”

금발 홍안의 잘생긴 남자가 욕을 내뱉으며 들어왔다. 눈썹이 치켜 올라가고 미간에는 주름이 졌다. 아주 열 받아 죽겠다는 얼굴의 이블이 성큼성큼 주저 없이 걸어와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 와중에도 체체가 놀랄까 봐 힘 조절을 했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았다.

“너 진짜 나랑 뭐 하자는 건데.”

“이블 님.”

“내가 그만큼 숙여 줬으면 너도 양보할 수 있는 거잖아. 먼저 연락도 안 하고 저녁도 굶고. 그래, 그렇게 시위해서 네가 이기면, 네 기분이 좋아지면 내가 말을 안 해. 그것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고집부리는데.”

이블은 체체가 무서워할까 봐 일부러 목소리를 낮췄는데 그게 더 서늘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체체는 이블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이블의 눈가가 바르르 떨렸다. 어깨 근육은 팽팽하게 땅겨졌고 셔츠 아래 팔뚝에는 푸른 힘줄이 돋았다. 체체는 들고 있던 엔드스틱을 내려놨다.

“루젬을 빨리 완성하고 싶습니다.”

“왜, 빨리 끝내고 개인 의뢰 달라고 하려고?”

이블이 차갑게 비아냥거렸다. 체체는 테이블 위에 얹어진 이블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이블이 잠깐 움찔했지만 서늘하고 무시무시한 표정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재출근 후 처음으로 받는 세공 의뢰잖아요. 빨리 끝내야 제 이름을 알리는 데에 도움이 될 테니까요.”

“…….”

담담한 대답에 이블의 표정이 더욱 험악해졌다. 야차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 이블이 뜨거운 분노를 토해 냈다.

“이딴 걸로 이름을 알린다고 그 좆같은 나라에 도움이 될 것 같아? 타르가 널 한 번이라도 정식으로 초대한 적은 있어? 너한테 고맙다고 인사를 표하거나 상을 내린 적은 있냐고. 그 일이 터지고 나서도 널 부르지도 않는 곳에 그만 좀 집착해, 씨발. 존나 외사랑도 아니고. 네가 뭐가 아까워서 그딴 쓰레기 나라에 그렇게까지 하는데. 은혜도 모르는 것들한테. 네가 얼마나 소중한지도 모르는 쓰레기들한테 왜….”

토해 내는 이블의 목소리에 울분과 서러움이 섞이기 시작했다. 체체는 얼른 일어나 테이블을 빙 돌아 이블에게 다가갔다. 양팔을 벌려 단단하고 커다란 몸을 안자 이블도 체체의 허리를 끌어안아 왔다. 그리고 곧 머리를 비비적거릴 것처럼 내렸다가 다시 들고는 거리를 벌렸다.

“스킨십으로 무마하려고 하지 마.”

“타르는 이제 없어요, 이블 님.”

“…….”

“타르가 있던 자리에는 아타스라는 나라가 새로 생겼죠. 저와는 관계없는 나라입니다.”

체체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저는 단지… 얼른 이름을 알려서 이블 님의 옆에 있어도 된다는 확신을 갖고 싶어요.”

“…….”

“이블 님이 가져다주시는 간단한 의뢰만 하면서 이블 님 덕분에 편하게 산다는 얘기를 듣고 싶지 않습니다. 이블 님은 항상 사람을 구하고 다니시는데, 너무나 위대한 일을 하시는데 그에 비해 저는 저택에서 당신을 배웅하고 마중하는 일밖에는 하지 않잖아요. 너무나 초라합니다. 저는… 이블 님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체체가 이블의 어깨에 이마를 포갰다. 하지만 이블은 체체의 목 뒤를 부드럽게 붙잡고 거리를 벌려 눈을 마주쳤다. 이블은 평생 힘들게만 살다가 믿기지 않는 행운을 겪은 사람처럼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 멍청한 얼굴은 언제나 여유롭거나 매섭거나 둘 중 하나인 이블답지 않아서, 누군가 본다면 이블이라고 알아보지도 못할 것이다.

속마음을 쏟아 낸 체체는 부끄러워서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이블은 집요하게 눈을 마주쳐 왔다.

“나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렇게 고집부렸던 거야?”

“네.”

체체는 부끄러운 와중에도 솔직하게 대답했다.

“저는 이블 님에게 환장했거든요.”

“야, 너 진짜….”

이블의 목소리는 말랑말랑한 솜 베개처럼 풀어졌다. 이블은 체체의 뺨을 아프지 않게 아주 살짝 꼬집고는 그 자리에 입술을 맞췄다.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하지.”

“그랬으면 제게 개인 의뢰를 주셨을 겁니까?”

“아니, 넌 앞으로도 절대 개인 의뢰는 못 받아.”

“…이블 님, 전 이블 님 덕을 보면서 편하게 산다는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아요.”

“누구도 그렇게 얘기 안 해. 왜냐하면 이 세상 사람들은 다 네가 영웅이라는 걸 알고 있거든. 한 명만 빼고.”

이블은 웃으며 말했다. 체체가 그 한 명이 누구냐고 묻자 그는 대답했다.

“체체, 너. 너만 빼고 사람들은 다 알아.”

“…….”

이블은 다정하게 체체의 눈가를 쓰다듬었다. 이블의 표정은 매우 부드러웠다. 체체가 특히 좋아하는 표정이었다. 함께 밤을 보내고 아침에 일어나면 이블은 이런 표정으로 체체의 얼굴을 만지작거리고는 했다. 그럼 체체도 그 커다란 손에 얼굴을 비비면서 마음껏 응석을 부렸다. 거의 매일 보는 표정이지만 볼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가슴이 벅찼다.

“아, 진짜 존나 귀여워.”

이블도 비슷한 생각을 한 건지, 전혀 표정 관리도 못 하고 체체의 얼굴에 키스를 퍼부었다. 미간에, 눈썹에, 눈가에, 콧대에, 뺨에, 귓가에, 턱에, 입술에. 온갖 곳에 쪽, 쪽, 소리를 내면서 퍼부어도 성에 차지 않는 듯이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그의 뒤쪽으로 세공실 문이 철컥, 하고 잠겼다. 체체가 그 소리에 고개를 기울이자 이블이 문을 가리면서 말했다.

“그리고 너는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

“네가 나한테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건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걱정이야. 그 시간에 차라리 요정이 되어 버리는 건 아닌지 그거나 걱정해. 진심 걱정돼 죽겠으니까.”

“하지만 이블 님은 너무 강하고, 저는 그에 비해 하는 일도 없습니다.”

“내가 누누이 말하잖아. 지구가 살겠다고 나랑 너를 태어나게 한 거라고.”

“이블 님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왜요?”

이블은 체체를 가볍게 들어 테이블 위로 살포시 내렸다. 테이블 위에 걸터앉은 체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블을 올려다봤다.

“생각해 봐. 만약에 너를 만나지 못했으면 내가 제대로 지구를 지키려고 하겠냐? 화산 폭발이나 원자력 발전소 같은 일 내가 했을 것 같아? 나는 지구랑 같이 죽어 버렸을 거야. 그러니까 지구가 나를 계속 살아가게 하려면 내 작은 뱁새가 필요하다는 걸 알고 너도 태어나게 한 거지.”

“그건 아닙니다.”

체체는 동그란 눈을 사랑스럽게 깜빡이면서 말했다.

“제 생일이 더 빠르잖아요.”

“야, 너는 생일 정확하게 모르잖아. 그 나라 내전 상태라 주민 등록 시스템도 후져 가지고.”

“맞아요. 저희는 아기가 태어나고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야 출생 등록을 합니다. 그러니 어쩌면 저는 이블 님보다 연상일지도 모릅니다.”

“하, 미친. 존나 귀엽겠다.”

“…….”

또 어디서 귀여운 상상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블은 콧김을 뿜어 대며 마음껏 귀여워했다. 한 번 더 체체의 입술에 키스한 뒤 체체의 등 뒤로 팔을 뻗어 테이블을 짚었다. 체체를 그대로 팔에 기대게 했다.

“네 말 들으니까 이제야 알겠네.”

“무엇을요?”

“지구는 먼저 너를 태어나게 했어. 지구 역사상 가장 사랑스러운 요정을 만들어 내고 나서 생각해 보니까 이 지구 환경이 요정이 살기에는 너무 험했던 거야. 그래서 네가 평화롭게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지구를 지켜 줄 나를 만들어 낸 거지. 바로 그거였어.”

이블은 지구가 직접 얘기라도 해 준 듯이 확신에 가득 찼다.

“나는 널 지키기 위해 태어난 거야.”

“이블 님….”

이블은 역사적인 발견이라도 한 과학자처럼 벅차서 말했지만, 체체는 그 이론이 무척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따지면 그 반대 아닌가. 지구라는 행성을 유지하는 데에 이블이란 존재가 필요하니까 결국 ‘이블을 지키기 위해 체체를 태어나게 했다’고 보는 게 더 설득력 있었다.

하지만 SSS 소울 오러 유저인 이블은 자신의 깨달음에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살면서 처음 보는 벅차오르는 표정을 지었고, 체체는 그 부풀어 오른 감정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았다.

“이제 알겠지? 그러니까 너는 그런 고민 절대 할 필요 없어. 차라리 그런 고민 하려면 내가 해야지.”

이블이 무척 쾌활하게 말했다. 황금색의 머리카락이 달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났다. 붉은 눈은 생에 대한 기쁨으로 가득 찼고, 잘생긴 이목구비는 어느 하나 빠짐없이 활짝 웃고 있었다.

체체는 이블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블을 슬프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저 자신만만하게 웃는 남자가 무언가에 열등감을 품는 모습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면 이것으로 되었다.

체체는 이블의 어깨를 짚고 고개를 들었다. 이블은 체체가 자신을 끌어안기 전 그 잠깐의 시간을 참지 못하고 팔을 뻗어 품으로 당겨 버렸다.

체체는 세공실 구석에 달린 감시 카메라 두 대의 렌즈가 쩌저적 갈라지는 소리를 들었다. 동시에 이블의 뜨거운 손이 셔츠 속으로 파고들어 와 맨살을 쓸었다. 둘은 스물두 살 한창나이였고 이블은 가끔씩 집 말고 다른 곳에서도 하고 싶다고 어필을 했다. 체체는 이왕이면 저택이 좋았으나 이블이 원한다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이제 웬만하면… 그의 말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저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고집을 피워서 그를 속상하게 만들 시간에, 조금 더 즐거이 웃게 하고 싶다.

이블의 입술이 목을 간지럽혔다. 체체는 어깨를 살짝 움츠리면서 이블의 두꺼운 등을 안았다. 세공실 전등 스위치가 내려갔다. 오로지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만이 두 사람을 비췄다. 달빛을 머금은 잿빛 머리와 금색 머리가 맞닿았고 두 사람은 상대의 기적 같은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 동시에 생각했다. 아, 또 사랑에 빠졌다고.

***

이블과 체체는 늦은 밤에 저택에 도착했다. 둘은 차를 타지 않았다. 이블이 체체를 안아 든 채 하늘에서 날아왔고, 달빛 아래에서 천천히 지상 위로 내려오는 그 모습은 신의 강림처럼 보일 만큼 경건했다.

체체는 이블의 품에 아주 편한 자세로 안겨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이블은 곤히 잠든 체체의 뺨에 입을 맞추며 저택으로 들어갔다. 힙스는 혹시나 해서 준비했던 야식을 취소한 후 저택을 전체 소등했다.

이튿날은 주말이었다. 평일이었어도 체체를 출근시키지 않을 작정이었지만 주말이라 결근하라고 설득할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체체는 늦게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딱딱한 테이블 위에서 다소 격렬한 행위를 했기 때문도 있겠지만, 알게 모르게 이틀 동안 많은 압박을 받았기 때문이 더 컸다. 긴장이 풀리면서 피로가 몰려왔다는 걸 아는 이블은 체체가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 깨우지 않았다.

체체와 갈등을 빚었던 그 이틀은 이블에게도 스트레스였다. 평범한 연인들은 다퉜다가 화해하고 다시 또 싸우고를 반복한다던데, 이블로서는 평범한 사람들이 너무 대단해 보였다.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과 다투고 화해하기를 반복한단 말인가. 너무 힘든 일이다.

체체의 표정에서 미소를 사라지게 하고, 체체가 스트레스를 받음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한다는 건 너무나 큰 고통이었다. 정말 힘들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마음이 아프든 말든 상관이 없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이블은 죽었다 깨어나도 평범해지진 못할 것 같았다. 일단 이블은 이번 일로 굳게 결심했다. 앞으로 체체와 의견이 맞지 않는 상황이 발생하면 무조건 하루 이상 끌지 않고 당일에 해결해 버리겠다고.

곤히 잠든 체체의 얼굴을 집어삼킬 것처럼 들여다보면서 이블이 그런 결심을 하는 사이 오전이 흘러갔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고 이블의 참을성도 점점 바닥났다.

제 품에서 입술을 살짝 벌리고 새근새근 자는 요정을 건드리지 않는 건 엄청난 인내심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체체는 오후가 되어서야 일어났다.

오랜만에 개운하게 눈을 뜨고 일어나 보니 이블이 자기를 꼭 끌어안고 온갖 곳에 뽀뽀하는 중이었다.

“이블 님….”

체체가 웅얼거리면서 눈을 깜빡이자 이블이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이 웃었다.

“응, 일어났어?”

“일찍 일어나셨네요.”

“아침에 잠깐 눈떴는데 옆에서 요정이 자고 있잖아. 존나 놀라서 잠 깨 버렸네.”

그 목소리는 햇살처럼 다정하고 따스했다.

“그리고 지금은 이미 일찍도 아니야.”

“몇 시인가요?”

“너 이미 오늘 하루는 부지런하게 보내기 글렀으니까 더 자도 돼.”

“배고프시죠.”

“응.”

이블의 즉답에 체체가 몸을 일으켰다. 이블은 체체를 부축하고는 얼른 복도의 벨을 눌러 식사를 차리라 지시했다.

이블은 체체를 안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욕조에 앉힌 뒤 나가는 게 아니라 아예 팔을 걷어붙이고 자리에 앉자 체체가 당황했다.

“안 나가세요?”

“씻겨 줄게.”

이블은 체체의 잠옷을 순식간에 벗겨 버렸다. 수온을 따뜻하게 맞춘 후 말랑말랑한 살결을 마음껏 매만지면서 씻기려는데 체체가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제가 씻겠습니다.”

“가만히 있어. 물 튀잖아.”

“이블 님은 그럼 제가 이블 님 씻겨 줘도 괜찮으세요?”

“씹, 존나 좋아.”

“…….”

다갈색 피부에 물방울이 튀었다. 이블이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덤비지는 않았다. 이블은 체체에게 얼른 밥을 먹이고 약을 먹여야 한다는 사명 의식이 있었다.

순식간에 씻긴 뒤 물에 젖은 뱁새를 보송보송하게 말리고 다시 품에 안아 1층으로 내려왔다. 막 씻김을 당하고 나온 체체는 나른하고 노곤해서 다시 잠이 들 것만 같았다. 차라리 품에서 내려놔 스스로 밥 먹게 한다면 잠이 깨겠지만 이블은 꿋꿋이 자기 품에 안은 채 한 그릇을 비우게 했다. 이블의 몸은 딱딱한 근육으로 이루어졌으나 온도가 높았고 매우 안정감 있으며 편안했다. 체체는 가끔씩 침대보다 이블의 품이 더 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햇살이 따스하게 비춰 오는 테라스에서 후식으로 나온 순후 주스를 마셨다. 이블은 자기 걸 단번에 마셔 버리고 체체의 주스까지 노렸다. 체체가 마시라고 컵을 내밀었지만 이블은 체체의 입술에 묻은 순후 주스를 핥고는 이걸로 충분하다고 씩 웃었다.

“야… 진짜 좋다. 화해하니까 이렇게 좋네.”

이블은 ‘화해’를 처음으로 겪었다. 볕이 잘 드는 테라스에서 체체와 나란히 앉아 황량한 풍경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평온해졌다. ‘갈등 끝에 화해를 한다’는 경험이 삶을 한층 더 풍요롭게 만들었다.

“앞으로도 종종 싸울까요?”

“뭔 말을 그렇게 하냐. 우리가 언제 싸웠다고.”

이블은 체체의 등 뒤로 손을 뻗어 말랑말랑한 뺨을 만지작거렸다.

“싸우는 건 싫고. 그냥 화해만 계속하자.”

“싸워야 화해를 하죠.”

“넌 씨발 그런 고정 관념을 버려. 안 싸워도 화해할 수 있어.”

이블이 체체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거대한 맹수가 작은 뱁새에게 헛소리하면서 애교를 떨었다.

“네가 잘해 줘야 돼.”

이블이 체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잘 들어 봐. 나는 이런 데에 면역이 없어. 존나 도련님으로 살았단 말이야. 화를 낼 줄만 알았지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방법도 모르고 화해하는 방법도 몰라. 그러니까 내가 화를 내면 네가 먼저 다가와 줘야 해.”

“제가 먼저요?”

“응, 네가 먼저 화해하자고 해야 돼. 앞으로도 계속.”

“네, 어렵지 않습니다.”

이블의 연인은 아주 통이 크고 화끈한 뱁새였다. 또한 이런 얼토당토않은 말에도 어울려 줄 정도로 이블을 사랑했다.

이블의 마음에 평화가 내려앉았다. 그러자 체체의 마음에도 안정이 찾아왔다.

둘은 그렇게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며 생각했다.

내가 이 사람의 평화를 위해 태어난 거라면 좋겠다고.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결코 끊어질 수 없는 인연이라고 지구가 증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외전 3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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