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를 용서하지 마세요.’
창문이 닫히고, 체체는 눈을 감았다. 좌석 아래에 숨어 있던 자들이 체체의 목 위로 검은 복면을 씌웠다. 체체는 가만히 받아들였다.
[트렁크에 있는 짐짝은 어떡하지?]
[어차피 가다가 차 바꿀 거니까 신경 쓰지 마.]
[먹을 거라는데 아깝잖아. 가져가자.]
[미쳤어? 더러운 알시티 놈들 음식을.]
[배가 고픈걸….]
[그래, 조금 먹자.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잖아.]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타르어였다. 체체는 이들이 타르 정부군임을 알았다. 운전기사 외에는 모두 타르인들이었다.
체체도 잠시 정부군에 속한 적이 있었다. 한번 소속되어 있다가 배신하고 반군에 들어갔기에 정부는 더더욱 체체를 증오했다.
정부군은 총통파와 카론파 둘로 갈리는데, 총통파는 체체를 보는 즉시 사살하라는 명을 받았고, 카론파는 체체를 생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들은 모두 카론파였다.
체체가 직접 카론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을 납치하게 했다.
[그나저나 이게 바로 그 어린 영웅, 체체구나. 실물은 더 예쁘네.]
[카론 대장이 집착하는 이유가 있지.]
[얼굴 한 번만 더 볼까?]
[손 떼고 신경 꺼. 체체는 S급의 소울 오러 유저다. 우리 같은 건 간단하게 조종해 버릴 수도 있어.]
[이제 막 발현했는데 제대로 쓸 수나 있겠어?]
한 명이 말렸지만 체체에게 치근덕거리는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다른 한 명도 그 정도쯤은 하게 놔두었다.
어딘가를 달리던 차는 갑자기 멈춰 섰다.
[이봐, 영웅. 내려라.]
그들은 체체의 팔을 잡고 힘주어 당겼다. 체체는 넘어지듯 차에서 내려 곧 또다른 차 안으로 던져졌다. 그렇게 세 번 더 교통수단이 바뀌고 한참 후에야 흔들림이 멎었다.
체체는 어느 의자에 앉았고 두 팔은 등 뒤로 젖혀져 수갑을 찼다.
체체는 신음 한 번 내뱉지 않았다.
체체를 구경하겠다고 몰려들어 온 이들 때문에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가 가라앉고 다시 시끄러워졌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내내 복면을 쓰고 있어서인지 점점 호흡도 가빠 왔다.
여섯 시간쯤 지났을까.
체체는 납치를 상당히 많이 당해 봤기 때문에 몸으로 느껴지는 시간과 실제로 흐른 시간이 상당히 차이 난다는 걸 알았다. 체감상으로는 하루 이틀은 지난 듯했지만 실제로는 대여섯 시간일 것이다.
체체의 짐작은 정확했고, 이블의 저택에서 나온 지 여섯 시간이 되었을 때였다.
주위가 조용해지고 뚜벅뚜벅, 보폭이 크고 차분한 걸음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체체가 뒤집어쓴 복면을 벗겼다. 체체는 눈살을 잠시 찌푸렸다가 천천히 눈꺼풀을 열었다.
카론이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정부군 제복을 입은 카론은 한쪽 다리를 꼰 느긋한 자세였다. 턱선이 날카롭고 눈두덩이 깊어서 상당히 예민한 인상인데, 오랫동안 카론을 보아 온 체체는 저자가 지금 기분이 좋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연락이 늦었다. 자칫하면 떠날 뻔했지.]
[어차피 절 납치할 생각이었잖아요.‘
체체의 목소리는 몹시 잠겨 있었다.
[네가 지내는 그 저택은 이블 엔덤이 부재해도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경비를 뚫지 못하겠더군. 알다시피 워낙 쓰레기 나라라 좋은 장비를 지급받지 못해서 말이지.]
카론은 타르를 좋아하지 않았다. 알시티에서 태어났어도 애국심 같은 건 없었을 것이다. 그에겐 좋다는 감정 자체가 없으므로.
체체는 차분하게 호흡하며 소울 오러를 사용했다. 카론의 감정을 건드리기 위함이었는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 카론은 뇌가 고장 나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기에 소울 오러가 통하지 않으리라고 예상했다.
[지금 바깥 상황을 알고 있나?]
[…….]
[네가 제 발로 걸어 들어왔는데, 우리가 널 납치한 모양이 됐어.]
체체는 말없이 들었다. 어차피 그날 카론이 존 게일의 행방을 빌미로 협박한 것은 내가 널 쉽게 납치하도록 해 달라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납치한 세력이 어느 쪽인지는 파악을 못 하더군. 알시티인 용병을 고용한 보람이 있어.]
[…….]
[총통이 내게 널 납치한 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나는 반군이 아니겠냐고 했지. 감시 카메라 영상에 네가 제 발로 차에 타는 장면이 찍혔으니, 네가 반군에 붙은 게 아니냐고 말이야.]
[…….]
[몹시 화를 내서 약으로 잠재우는 수밖에 없었어.]
체체는 듣고만 있었다. 카론은 한쪽 팔로 턱을 괴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블 엔덤이 원자력 발전소 해체 작업을 중단했고.]
[……!]
[사람들이 지하 방공호 시설로 대피하고 있지.]
어떤 말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던 체체가 어깨를 움찔했다. 카론이 입꼬리를 올렸다. 웃고 있었으나 그에게선 얼음으로 만든 칼처럼 날카롭고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너를 아주 애지중지 여겼던 모양이야. 설마 진짜 연애라도 했다는 건가.]
[…여기는 어딥니까.]
체체가 물었다. 카론은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작게 기울였다.
[알시티와는 아주 먼 곳이다.]
[이블 님은… 아무리 멀리 있어도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아, 그 초능력 말이지.]
카론은 천천히 일어나더니 뚜벅뚜벅 벽 쪽으로 걸었다. 검은색 커튼을 열어젖히니 창 저편으로 어두운 물이 보였다. 그제야 체체는 알았다. 그들은 바닷속에 있었다.
체체는 한쪽 귀가 좋지 않아 수평 감각이 떨어지고, 스트레스받는 상황에서는 더 상태가 악화된다. 그래서 지금 있는 곳이 흔들린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설마 그자가 아무리 대단한 초능력자라도 이 먼 바다의 소리까지 듣지는 못하겠지. 너는 아무 탈 없이 타르로 돌아갈 테니 걱정 마라.]
[…….]
[그리고 너와 그자가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정말 사랑하는 사이라면 그자는 원자로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대로 두면 세상은 멸망하고 너도 없어질 테니 말이야.]
그 말에 체체의 표정이 무너졌다.
이블.
이블 님.
체체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지금 이블이 어떤 심정일지 생각하면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이블을 한 번만이라도 더 보고 싶었다. 그런 대화를 마지막으로 하고 싶지 않았다.
방사능이나 원자력, 그런 것은 잘 모른다. 이블이 그곳으로 간 뒤 인터넷을 통해 알아봤는데 굉장히 위험하다는 것과 빨리 해체하지 않으면 지구의 절반이 파괴된다는 것 외에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화가 많이 났겠지.’
제 발로 차에 오르는 영상을 보면서 정말 큰 배신감을 느끼겠지만… 체체는 이블을 다시 만나 그 일을 사과하면 그가 아주 쉽게 용서해 주리라는 걸 알았다.
너무나 다정한 사람이라서… 내 얼굴을 다시 보면 한숨도 내쉬고 욕도 하고 씩씩거리고 벽에다 주먹질을 할지도 모르겠지만, 결국엔 달려와 끌어안아 줄 것이다. 내게 화를 내지 못하는 사람이니까.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곳에서 싸우는 사람의 다정함을 이용하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감정 변화가 다양하군.]
체체는 카론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였지만 카론은 눈앞에서 표정을 전부 본 듯이 말했다.
[나는 네게 감정이란 게 없는 줄 알았는데.]
체체는 눈을 감고 마음을 다스렸다. 저 뱀 같은 사내를 앞에 두고 여리고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이블에 대한 모든 감정은 저 뒤편으로 밀어 두어야만 했다.
이미 일은 저질렀다.
[…….]
늘 그렇듯이 거치적거리는 감정을 아주 빠르게 수습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체체의 금색 눈동자에는 무엇도 담기지 않았다.
카론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내 앞에서 그런 표정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잊은 건가.]
카론은 허리춤의 권총을 들고는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뒤에서 대기하던 군인이 단말마와 함께 쓰러졌다.
카론은 체체가 아무런 감정 없는 얼굴을 할 때마다 저렇게 다른 사람을 상처 입혔다. 타인을 죽지 않게 하려면 체체는 카론에게 반응해야만 했다.
체체는 입을 열었다.
[절 타르로 데리고 가서 어떡할 작정입니까.]
[정말 그 알시티인을 사랑하기라도 하는 건가.]
[제가 정부에 붙었다고 선전할 수도 없는 상황일 텐데요.]
[설마 이블 엔덤이 진짜로 널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기자님은 무사합니까.]
[…….]
이블의 이름을 꺼내서 도발해도 눈 한 번 깜박하지 않는 체체를 보고 카론의 냉소도 멎어 갔다.
카론은 체체에게 다가왔다. 의자에 묶인 체체의 바로 앞에 선 그는 허리를 숙이고 얼굴을 가까이 마주했다. 날카로운 시선이 체체의 얼굴을 훑었다. 솜털 하나하나까지 모두 집어삼키려는 듯한 시선이었다.
체체는 그 차가운 눈빛을 건조하게 마주했다.
[너를 보고 있으면 내가….]
카론은 웃었다.
양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만족스럽다는 듯이. 그 냉랭한 얼굴에 긴 가뭄 끝에 드디어 이슬비를 만난 대지 같은 웃음이 퍼져 나갔다.
[내가 벌레가 된 것 같아.]
카론은 체체에게 손을 뻗었다. 체체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차가운 손길이 뺨을 감싸 와도 눈빛에는 어떤 혐오감이나 경멸도 깃들지 않았다.
카론은 체체의 이런 점이 끔찍하게 싫었다.
그래서 세상의 그 어떤 진귀한 보석보다 마음에 들었다.
분노와 경멸로 마음이 들끓어도 한번 눈을 내리깔고 심호흡을 하면 그 모든 감정은 사라져 버린다. 살아 있는 사람에서 순식간에 인형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카론은 체체가 인형이 되는 순간을 좋아했다.
그 얼굴이 싫기 때문이었다.
‘싫다’라는 것.
무언가를 싫어하는 감정이 생겨나는 순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고장 난 뇌에 감정이 생기는 순간이므로….
[네 말이 맞다. 네가 여기 있다는 걸 알리면 이블 엔덤이 가만있지 않겠지.]
카론은 체체의 머리칼 사이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힘주어 끌어당겨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니 너를 내보이지 않을 것이다.]
[…….]
[무슨 뜻인지 이해했나?]
체체가 떠난 뒤로 카론은 무척 심심했다. 그 어떤 사람도 체체의 반응을 따라오지 못했고 너무나 평범하며 지루했다.
[내 장난감을 잃어버린 시간은 정말 끔찍하도록 무료하더군. 그래서 앞으로는 나만 가지고 놀 생각이야.]
[당신은 끔찍하다는 게 뭔지 모르잖아요.]
[이제 알게 됐지.]
어째서인지는 모르겠다. 이 녀석이 예상과 다르게 반응한다는 단순한 이유로? 아니면 얼굴이 제법 반반해서? 아니면 ‘감정’을 느끼게 해서?
아직도 이유를 모르겠으나 체체가 없으면 카론의 삶이 무척이나 무료해진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다른 이들은 당연한 듯이 풍부한 감정 속에서 살아가지만 카론은 그러지 못하도록 태어났다. 체체로 인해서 느끼는 감정은 아주 소중한 것이었다.
카론은 체체의 고개를 들어 올리고 가느다란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살갗에 숨이 느껴질 텐데 움찔하지도 않았다.
총통은 항상 체체를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 체체가 반군으로 돌아섰을 때 죽일 기회는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카론은 언제나 최후의 순간에 체체를 놔주었다. 장난감과 술래잡기하는 시간이 재미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넌 다시는 햇빛을 볼 수 없어….]
카론의 목소리에는 음습한 욕망이 가득했다.
***
배는 열두 시간이 더 지난 후 부두에 정박했다. 타르가 아니라 뀌꾸스 연안이었고, 그곳에서 다시 차를 타고 타르의 국경선을 넘었다. 체체는 이 년 만에 타르의 땅을 밟았으나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내내 카론이 동행하지는 않았다. 타르 정부는 체체의 실종과 관련되었다고 가장 의심받는 곳이었고, 총통도 카론을 의심스러워했다. 단지 정부군 내 카론의 힘 막강하기 때문에 섣불리 건들지 못할 뿐이었다. 카론이 의심을 피하려 외부에 있는 동안 수하의 군인들이 한 시도 자리를 비우지 않고 체체를 감시했다.
그들보다 훨씬 작은 체구의 어린 청년에게 정부군 다섯이 붙었다. 그들은 매우 긴장했다. 체체는 탈출 전적이 상당히 많은 데다가 무려 S급의 소울 오러 유저이다.
타르에는 오러 유저가 존재하지 않았다. 측정 센터도 없을뿐더러 어렸을 적 오러 유저로 발현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모두 빌라인 제라도로 강제 이민 되었기에 정부군에도 반군에도 오러 유저는 없었다. 말로만 들어온 소울 오러 유저를 앞에 두면 아무리 경험 많은 군인이라고 해도 긴장하는 게 당연했다.
그들은 타르 수도에 도착한 뒤 차 안에서 밤이 되기를 기다린 후 체체를 한 건물로 데려갔다. 곳곳이 무너진 낮은 건물엔 카론이 개인적으로 고용한 용병들이 보초를 섰다. 외국인 용병들은 끌려오는 체체를 신기하고 흥미롭다는 눈으로 쳐다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일부러 외국인을 고용한 것이다. 타르인들은 정부군이든 반군이든 중립이든 누구나 체체에게 경외심을 품었으니까. 실제로 체체는 정부군에 붙잡혔을 때 어느 청년 군인의 도움으로 탈출한 적이 있었다.
[카론 각하가 곧 오실 거다. 여기… 얌전히 있어.]
정부군은 체체를 건물 지하에 있는 옥사에 가뒀다. 끼이익 쇠창살이 끼워 맞춰지는 소리가 소름 끼쳤다.
감옥은 어두워서 앞이 가까스로 보일 정도였다. 피비린내가 섞인 퀴퀴한 냄새가 났다. 차가운 돌바닥에는 벌레가 기어 다녔다. 타르는 덥고 건조한 나라였으나 이곳은 매우 추웠다.
[우리보고 여길 맡으라고?]
[자기네 나라 사람들로는 안 된다더군.]
체체의 옥사 앞에 외국인 용병 두 명이 감시를 섰다.
둘다 금발이었고, 무척 체구가 컸으며 나이는 체체보다 위인 듯했다. 그들은 체체를 위아래로 훑고는 자기들끼리 시시덕거렸다. 사용하는 언어는 빌라인 제라도 말이라 모두 알아들었다.
[이 녀석이 바로 그… 생각보다 더 예쁜걸.]
한 명이 휘파람을 불며 바지춤을 붙잡았다. 다른 한 명은 히죽히죽 웃으며 가까이 다가오더니 쇠창살에 기댔다. 체체는 팔을 뻗으면 닿을 만한 위치에 서 있었다.
[그만해. 여기 사람들한테 들키면 곤란해진다.]
휘파람을 불었던 용병이 말렸다.
[알아. 이 녀석을 건들면 머리를 자른다 했었나. 이렇게 맛있어 보이는 걸 앞에 두고 참아야 한다니 아쉽군.]
[어쩔 수 없어. 카론 그자는 조심해야 하니까.]
둘은 아쉬운 얼굴로 체체를 쳐다봤다. 상황만 허락한다면 당장 옷을 벗겨 버리고 싶다는 욕망이 번들거리는 눈동자였다. 체체를 건드리려고 했던 자는 여전히 입맛을 다셨다.
손끝 하나 대지 않고도 희롱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들은 체체가 알아듣는다는 것을 알고 온갖 모욕적이고 수치스러운 단어들로 조롱했다. 그러나 체체는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대단하긴 해. 분명 우리말을 안다고 들었는데 표정 변화 하나 없고. 내 손도 피하려 들지 않았잖아. 이런 상황에 놓였는데도 말이야.]
[무려 이블 데빌의 연인 아닌가. 이 정도는 되어야지.]
두 사람이 이블을 언급했을 때 체체는 조금 뒤로 물러나 감옥 안의 그림자에 숨어 표정을 가렸다.
[그러고 보니 그 악마는 발전소로 돌아갔다지.]
[원자로 출력이 높아지기 직전에 돌아갔다고 하더군.]
[아슬아슬해서 살겠나. 나는 이 녀석을 카론 몰래 악마에게 돌려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어.]
[쓸데없는 걱정이야. 세상이 멸망하면 행방을 모르는 소중한 연인도 영원히 찾을 수 없는데 설마 그렇게 둘까. 우리는 우리 일만 열심히 하면 돼.]
그렇게 말하면서도 표정은 다소 심각했다. 그들도 각자 가족이 있으니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계단을 내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용병들은 바로 입을 다물더니 각을 잡고 섰다. 감옥을 보이지 않게 가리는 듯한 행동이었다.
그 발걸음 소리는 이쪽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향했다.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멀어진 뒤에는 대화가 이어졌다. 잘은 들리지 않았지만 ‘오늘 식사가 괜찮았다’, ‘각하는 바쁘신가’라는 내용이었고, 타르어였다.
식사를 하러 간 타르 군인들이 돌아온 듯했다. 빌라인 제라도 말을 쓰던 용병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체체는 감았던 눈을 떴다.
이블 님은 원자력 발전소로 돌아가셨구나.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리게 하는 내용이었다. 거짓인지 진실인지는 이미 저들 모르게 소울 오러를 사용하여 파악했다.
이블은 너무나 분노했고, 배신감도 느꼈겠지만 결국 돌아갔다. 어쩌면 또다시 뛰쳐나올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다시 박차고 나와 자신을 찾으려 하겠지만… 지금은 돌아갔다는 점이 중요했다.
조금 안도한 체체는 감옥을 살폈다.
체체는 감옥에 갇힌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그때마다 항상 다른 곳에 수감되었다. 이곳도 처음 와 보는 곳이었는데 만들어진 지는 꽤 지난 듯했다. 지네가 벽 틈에서 빠져나와 발치를 동글게 돌다가 창살 너머로 사라졌다. 구석에 만들어진 거미줄은 체체의 상체보다 컸다.
체체는 벌레를 보면서 이블을 떠올렸다.
그에게는 이 세계가 저 거미줄에 지나지 않겠지.
눈에 거슬리지만 귀찮아서 놔둘 뿐. 손을 뻗어 휘저으면 없어질 약하고 하찮은 세계.
사람들은 이블이 원자력 발전소 해체 작업에서 손을 떼면 지구상 절반의 국가가 소멸할 거라고 말했다. 이블이 앞으로 있을 각종 재해와 재난을 무시해 버리면 이 거미줄은 차츰차츰 스러져 갈 것이다.
그러나 체체는 알고 있었다. 이블은 차마 그렇게 두지 못할 것이다. 거미줄에 걸린 작은 존재를 발견하고 그것을 아끼게 되었기 때문에.
그는 이제 거미줄을 해치려 하는 거친 바람이나 거센 빗줄기 따위를 막아야만 한다.
사실 외국인 용병들이 잡담하지 않았어도, 체체는 이블이 원자력 발전소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리라는 걸 알았다.
이블이 발전소 일을 해결하는 동안 엔덤 가문과 수많은 오러 유저들이 자신의 행방을 찾아 헤맬 것이고, 아무리 카론이 꽁꽁 숨겨 놓아도 전 세계 강대국의 압도적인 정보력 앞에서 무력화되겠지. 카론의 성격상 또다시 도망치게 둘 바에는 죽일 게 분명했다.
체체는 죽음 이후를 생각했다.
분노한 이블에 의해 무너진 타르 정부와 빌라인 제라도 같은 것들.
그리고 만약 살아 돌아갔을 때도 생각해 봤는데, 왠지 앞서 그린 미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때도 이블은 타르 정부를 가만두지 않을 것 같았다. 카론이 개인적으로 벌인 일이라고 해도 총통까지 모두 무너지게 만들겠지. 그런 이블의 모습을 상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자신이 살아남든, 이곳에서 죽게 되든…. 체체가 바라는 것은 하나였다.
이블이 잠시 동안 흉포하게 날뛸지라도 언젠가 그의 마음을 위로할 사람이 다시 생겼으면 좋겠다. 그가 다시 작고 하얀 꽃을 보여 줄 사람이 생겼으면.
그는 고작 스물둘이니까.
아직 살아갈 날이 많은 어린 영웅이니까.
“…….”
체체는 가슴을 손으로 눌렀다. 그를 생각할수록 괴로워졌다.
마음먹고 결심하면 떠올리지 않을 수 있다. 순식간에 감정을 숨겨 버리듯이 이 괴로운 기억과 상상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릴 수 있다. 그건 체체가 소울 오러 유저로서 가진 유일한 특기였다. 이 재능으로 인해 체체는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하지만 체체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블을 잊고 싶지 않았다.
이블은 아직 어리다. 세상에는 그가 만나 보지 못한 사람이 잔뜩 있으며 누군가는 이블의 고독을 달래 줄 것이다. 그가 더 이상 무료하고 고독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한편으로는 어두운 마음이 생겨났다.
‘나도 어려.’
체체는 눈을 감았다.
‘나도 아직 스물두 살밖에 안 됐는데.’
손바닥 아래에서 심장이 마구마구 뛰었다.
‘나도 그를 위로해 줄 수 있어….’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삼켰다. 아무것도 먹지 못했지만 허기도 들지 않았다. 무섭지도 않았고 춥지도 않았다. 다만 외로웠다.
체체는 자신이 이타적이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나름대로 욕심을 참았다. 나를 위해 희생당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욕심을 부릴 수가 없었다. 욕심부릴 상황이 아니었다.
혼자 있으면 항상 시체가 나타난다. 뼈만 남은 손으로 어깨와 등을 긁어 오면서 우리를 잊지 말라고 말하는 그들.
바라는 게 없어야 하는 삶을 살아왔다. 아주 어렸을 적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으로 뛰어들어 갓난아기를 구했던 순간부터 시작됐다. 그것을 억울해하지도 서러워하지도 않았던 체체가 이제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정체성도 자존감도 기꺼이 버리고 껍데기만 뒤집어쓰며 살아온 체체는 이블 엔덤과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점점 사라져 버렸다.
길가에 떨어진 쓰레기를 줍고, 걸인에게 동정을 베풀고, 분수에 손을 넣어 물장난을 치던 난민이 창으로 비춰 오는 햇빛을 등지고 오만하게 선 진짜 영웅과 만난 순간부터 벽은 깨어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체체가 흐린 미소를 지었다.
나는 아마.
아직 죽고 싶지 않은가 봐.
너무 늦게 깨달은 사실이었다.
항상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고 생각했고 그게 자살하고 싶은 마음인 줄 알았는데, 자살과는 결이 다른 바람이었다. 끊임없이 죽음을 준비해 왔으나 사실 체체가 준비했던 건 죽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죽음과 반대편에 있는 것이었다.
체체는 가슴을 누른 손을 주먹 쥐었다. 심장은 여전히 불안정하게 박동했다. 넋 빠져 있을 시간은 없다.
‘난 해야 할 일이 있어.’
체체는 호흡을 가라앉히고 귀를 기울였다.
지하 감옥은 언뜻 고요하고 적막한 것 같지만 사실 다양한 소리들로 가득 차 있다. 바스락거리며 벌레가 기어 다니는 소리, 투두둑 시멘트 가루가 떨어지고, 희미하게 불빛이 들어오는 창밖에서는 주기적으로 커다란 진동이 오고 있다.
집중하던 체체는 순간 한쪽 귀에서 들린 이명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명 뒤에는 항상 두통도 따라온다. 찌릿찌릿한 관자놀이를 주먹으로 꾹꾹 눌렀다.
수갑을 찼기 때문에 철그덕, 하는 소리가 났다. 그때였다.
[어이, 시간 됐어.]
[어어, 이제야 교대인가.]
멀리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타르어였다. 체체는 잠시 숨 쉬는 것도 잊고 먼 곳의 대화에 온 신경을 기울였다.
이 지하 감옥에 자신 말고도 수감된 이가 있다는 건 아까 전 대화로 이미 알았다. 그 사람의 감시는 외국 용병이 아니라 정부군이 맡았으며, 식사를 하는 동안 두 명이 모두 자리를 비워 버릴 정도로 허술했다.
체체는 카론에 대해 잘 알았다. 카론의 성격을 보면 분명 체체를 유혹할 먹잇감을 가까운 곳에 놔둘 것이다. 자신의 장난감이 말을 듣지 않을 때마다 그것으로 협박을 해야 하니까.
체체는 찢어지는 두통과 이명 속에서 귀를 기울였다.
[오늘은 얌전히 있던가.]
[아주 조용하더군. 이제야 힘이 빠진 모양이지.]
[모션 오러 유저라고 했나. 대단하긴 대단해. 사흘을 꼴딱 굶은 뒤에야 겨우 힘이 빠지다니.]
모션 오러 유저.
존 게일은 D등급의 모셔너이다.
모셔너 중 유일한 종군 기자가 바로 그였다.
그가 스스로 모셔너임을 밝히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가 모셔너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오러 유저라는 길을 놔두고 세상 그 누가 종군 기자를 택하겠는가. 오러 유저로 각성하고 평안한 앞날만 기다리는 상황에서 종군 기자 따위를 선택하는 사람은 아마 이전에도 이후에도 존 게일 외에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저쪽엔 누가 들어온 거야? 위가 엄청 소란스럽네.]
[몰라. 우리 같은 말단한테는 안 알려 줘.]
타르 군인의 말에 체체보다 외국인 용병들이 먼저 반응했다. 둘은 커다란 덩치를 이용해 감옥 정면을 가렸다.
다가오는 걸음 소리가 들렸다. 체체는 천천히 뒤로 물러나 그림자 속으로 숨었다.
[이봐, 외국인.]
[무슨 일인가.]
[여기 오늘 누가 들어왔지?]
[알려 줄 수 없다.]
타르 군인은 용병 앞에 서니 안쓰러워 보일 만큼 작았다. 둘은 용병의 등 뒤를 기웃거렸다.
[궁금하군. 아주 중요한 인물이라고 들었는데, 설마….]
[네놈들 각하의 지시를 무시하는 건가.]
[…….]
용병이 꺼낸 각하라는 단어는 아주 유효했다. 타르 군인들은 자존심이 상한 듯 입술을 씹었지만 더 이상 접근하지 않고 떠났다. 긴장했던 용병들이 안도했다.
체체는 입이 막히지 않았으므로 소리를 질러 알릴 수 있었다.
타르 정부군 중에도 체체를 숭배하는 이들이 많다. 이미 체체의 실종 소식을 듣고 의심 중일지도 모르고. 이곳에 반군 첩자가 있다면 체체를 탈출시키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체체는 고요하게 어둠에 숨었다.
정부군 전부가 그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아는 건 아니다. 즉 카론은 정말로 혼자 이 계획을 꾸몄다는 뜻이다.
카론이 다시 나타나기 전에 이곳을 탈출해야 한다.
그는 이번에는 정말로 목숨을 빼앗을 생각이니까.
적어도 존 게일만은….
***
“빌라인 제라도와 타르 총통, 모두 체체 님의 행방을 모른다고 합니다. 어댑터와 소울 오러 유저를 보내 확인했습니다.”
“…….”
“차량을 바꿔 가며 이동해 이스틴 해안 부두에 도착했고 그 뒤로는… 아직 추적 중입니다. 바다 위에서도 선적을 바꿔 가며 이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제임스는 이블의 눈치를 보며 브리핑했다.
“카론은?”
고저 없는 목소리가 더욱 섬뜩했다. 차라리 새빨갛게 분노하며 날뛰는 게 나았다.
“그자 또한 체체 님의 행방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다만 그자는 선천적으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정신병을 보유해 S급 소울 오러 유저의 능력으로도 진실 확인은 어렵다고 합니다. 현재는 선박에 구금 중입니다….”
저택으로 돌아온 이블은 간략한 상황 설명을 들었다. 육안으로 관찰될 만큼 붉고 검은 기운이 그의 온몸을 감쌌다.
체체가 납치된 지 열 시간이 흘렀다.
체체 납치 직후, 제임스는 가장 먼저 이블에게 사실을 알리고 곧장 빌라인 제라도와 타르 정상을 추적했다. 둘은 본래 이십 일 일정을 잡고 방문했기 때문에 아직 알시티에 머무르고 있었다. 두 정상은 한 레스토랑에서 연회를 즐기던 중 갑작스레 연행되었다.
현재는 알시티 총관에 있는데, 사실상 구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체체를 납치할 만한 가장 큰 동기를 가진 곳이 바로 이 두 군데였으므로 다른 나라들도 강압적인 처사라고 반발하지 않았다.
빌라인 제라도는 바로 전 정상 회담 때만 해도 탈타르인인 체체 유저가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다닌다고 주장했으면서, 이제는 체체 유저는 영웅이며 우리도 전력을 다해 찾겠다고 외쳤다. 타르 총통의 경우에는 반군의 소행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이블을 비롯한 알시티인들은 정부군 짓으로 단정 지었다.
오러 센터는 타르에 소울 오러 유저를 급히 파견시켜 확인했는데, 타르 반군과 정부군 모두 체체의 행방불명에 깊은 유감을 표했다. 빌라인 제라도와 타르 정상도 마찬가지였다.
단 한 사람만 빼고.
카론 엔빌리우스.
그는 뇌 구조가 평범한 사람과 다르다.
인격 장애 환자의 감정은 소울 오러로도 읽지 못한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그랬다….
“제트기를 준비해. 가장 빠른 걸로.”
“…예.”
이블의 목소리는 산소가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 동굴 같았다. 사람의 것으로 들리지 않아서 제임스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역시 이블 님이 직접 그자를 심문하시는 건가.’
납치 소식을 들은 이블은 빌라인 제라도나 타르 정상은 염두에도 두지 않고 바로 카론을 의심했다.
카론의 공식적인 일정은 숙소에서 취침 후 아침이 되면 알시티를 떠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급히 경찰이 도착한 숙소에는 아무도 없고 텅 비어 있었다. 총통이 연락한 결과 카론은 ‘본래 비행기로 떠나려 했지만 아보브 섬에 들르는 일정이 추가되어 교통수단을 선박으로 변경했다. 그래서 조금 더 일찍 숙소를 나왔다’라고 알려 왔다.
체체 납치 후 약 일곱 시간 뒤 아보브 섬에서 카론을 붙잡았고, 현재는 엔덤 가문 소유 선박에 구속한 상태였다.
‘설마 케이시티로 돌아가시려는 건… 아니겠지.’
제임스는 그런 생각을 했다가 곧 씁쓸한 표정으로 지웠다.
체체가 납치되었는데 그곳으로 돌아갈 리가 없다. 자신이라도 그럴 것이다. 너무나 소중한 사람의 행방을 모르는데 어떻게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있을까.
체체가 납치된 직후 이블은 가장 빠른 제트기를 타고서 곧장 알시티에 왔다.
사실 그때 그는 자리를 비울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앞서 발생한 지진으로 인해 원자력 발전소의 제어봉 수십 개가 망가졌고, 강력한 염력 없이는 버티기 힘들었다. 이미 해체 순서를 밟고 있었기에 부지런한 관리가 필요했다.
체체가 제 발로 납치되던 순간, 체체와 전화 통화를 마친 이블은 체체와 만날 짧은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현장을 임시로 수습해 놨는데, 그 상태에서 바로 알시티로 와 버린 것이다.
그 소식은 딜레이 없이 바로 대중에게 알려졌다.
원자력 발전소 해체 작업과 관련된 사람들만 천 명이 넘으니 어차피 숨길 수 없는 비밀이었고, 숨겨서도 안 되는 사안이었다.
이블의 수식어 중에는 ‘제어봉 없는 원자로’라는 수식어도 있었다. 그만큼 위험하다는 뜻인데, 지금 그곳이 그러했다.
케이시티의 원자력 발전소는 전 세계 최대 규모이다. 이 사실을 숨겼다가 그대로 폭발해 버리면 이 근방은 물론이고 지구상 절반이 방사능 지대가 된다. 방사능은 인류가 정복하지 못한 재앙이며, 노유저, 오러 유저, 어댑터 모두가 방사능이라는 재앙 앞에서는 무력했다. 대폭동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전 세계 사람들에게 알려야만 했다.
예상대로 많은 이들이 혼란에 빠졌다. 불안한 새벽이 지나 아침이 왔을 때, 금융 시장은 개장하지 않고, 전국 학교들에는 긴급 휴교령이 내려왔으며, 도로는 피난 차량으로 마비되었다. 마치 지구 마지막 날 같았다.
군인들이 시내와 거리로 나와 소란을 잠재웠지만, 그 군인들도 혼란에 빠졌기에 큰 효과는 없었다. 마지막을 가족과 시간을 보내겠다며 탈영하는 군인들이 많았다.
이대로 있으면 원자로가 폭발하지 않아도 세계가 멸망할 기세였다. 알시티 정부는 일단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이블을 설득했다.
‘체체 님은 우리가 반드시 찾아올 테니 원자력 발전소로 돌아가 달라.’
처음에 그런 종류의 설득을 하기 위해 저택에 파견된 정부 인사는 이블의 어둠이 가라앉은 눈과 무거운 분위기에 그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알시티 정부와 엔덤 가문은 임시방편으로 거짓 뉴스를 내보내기로 했다. 이블이 원자력 발전소 해체 작업을 재개했다고 속인 것이다.
체체 납치 후 열두 시간 만의 일이었다.
우려와 다르게 이블은 그 발표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일개 벌레들이 얼마나 불안해하든, 어떤 식으로 거짓말을 하든 그딴 건 아무 상관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오직 체체의 행방이었다.
알시티 저택으로 돌아온 이블은 제일 먼저 핸드폰으로 받았던 감시 카메라 영상을 다시 돌려 봤다.
검은 차에 올라타는 체체. 짐을 싣는 건장한 체격의 운전기사. 다른 도로의 영상으로 차에는 세 명의 타르 군인이 더 타고 있었다는 게 밝혀졌다. 그들의 정체는 한 시간 만에 모두 파악했고 그중 한 명은 죽은 채 발견됐으며, 두 명은 유치장에 있었다. 소울 오러 유저들이 직접 심문에 나섰다. 그러나 그들은 단 일 킬로미터만 운전하고 차를 바꿨기 때문에 성과가 없었다.
이블은 체체의 통화 기록과 메시지 이력, 최근 며칠간의 감시 카메라 영상을 계속해서 탐독했다. 힙스도, 제임스도 걸리적거리는 벌레에 불과했고 이블은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카론을 타르로 돌아가게 해.”
“예.”
마침내 이블은 두 가지 지시를 내렸다. 하나는 제트기를 준비하라는 것. 다른 하나는 카론을 풀어 주라는 것.
이것으로 제임스는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이블은 타르에 가려는 것이다.
제임스는 마냥 불안하기만 한 대중과는 다르게 그가 모시는 도련님을 알았고, 도련님이 작은 뱁새를 얼마나 아끼는지도 알았다. 절대로 세상이 멸망하게 두지 않을 것이다.
어디에 있는지 행방이 불분명한 체체가 방사능의 영향에 놓일까 걱정되는 것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이분은 체체와 함께하고 싶은 게 아주 많은 분이다.
함께 오팔빛의 바다를 바라보며 해변을 거닐어야 하고, 주기적으로 쇼핑몰을 털어야 하며, 체체의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장신구와 옷, 신발을 착용시키면서 콧노래를 불러야 한다. 오늘은 어떤 음식을 먹일지 맛집 리뷰를 보면서 고민하는 일도 빠질 수 없다. 그러나 그 모든 건 세상이 존재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제임스는 불안하지 않았다.
언젠간 이블이 타르에 가는 날이 오리라 생각했다. 타르의 역사는 크게 바뀔 것이다. 이미 인류의 역사가 바뀐 것이나 다름없지만….
만약 정말로 범행을 저지른 이들이 타르 정부군이라면, 그 작은 영웅을 납치한 자들은 혹독하게 죗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제임스는 이블이 내린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자리를 떴다.
선박에서 구금 중이던 카론을 풀어 주라고 하고, 제트기를 준비시켰다.
그리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응, 나야. 걱정하지 마. 세상은 멸망할 일 없어. …그래. 그럼 나중에 연락할게. 아, 참. 파크비비지 알지? 순금 거래소. 거기에 내가 골드바 주문해 놨으니 찾아와 줘. …그냥 조금 샀어. …삼백 개 정도. …삼백 개 든 박스 열 개…. 아니, 걱정하지 마. 세상 안 망한다니까. 그냥 내가 금이 좋아서 그래….”
어떻게 기회가 돼서 순금을 쟁이긴 하지만(가격이 사상 최고로 뛰었음에도) 아무튼… 제임스는 불안하지 않았다.
이블은 알시티를 떠나는 제트기에 몸을 실었다. 조종사와 부조종사 외에는 누구도 타지 않았다.
전용기는 하늘 한가운데에 떠 있고, 밑은 바다다. 이블이 이성을 잃고 주먹으로 벽을 치기만 해도 이블을 제외한 모두가 죽고 만다. 그것을 우려한 제임스가 아무도 태우지 않았다.
거대한 대양을 건너자 노을이 진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블은 그 아름다운 풍경에 단 한 차례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핸드폰을 손안에서 굴리는 이블의 눈빛은 차갑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했다. 누구도 저 눈을 붉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런 불빛이 없는 곳에서 우주를 들여다보면 저런 빛깔일까.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보는 핸드폰은 체체의 것이었다.
납치범들이 아리나강 대교를 건너면서 창문 밖으로 버렸다. 아리나강은 굉장히 물살이 세고 수심이 깊은 곳으로 보통이라면 찾을 시도도 못 하지만 이블은 대교 위에서 손을 한 번 뻗는 것으로 핸드폰을 건져 냈다.
물에 젖어 고장 난 핸드폰은 곧바로 전문가에게 맡겨져 제 기능을 되찾았다.
필요한 정보를 입수하고 나서도 이블은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루젬 세공실은 물론이고 체체의 방에도 갔고, 핸드폰도 살펴봤다.
그러나 어디에도 없었다.
그에게 남기는 말이….
제 발로 그 검은 차에 기어들어 갔으면서 편지 하나 남겨 놓지 않고.
‘항상 감사드려요.’
‘밥 많이 드세요. 그래야 건강합니다.’
그게 끝이라고?
이블은 냉소도 짓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는 너무나 어두웠다.
사람들은 이블을 보고 분노했다고 말했다. 아주 흉흉하고 날카롭다고 얘기했다.
핸드폰을 쥔 손가락이 떨리고 있는 건 아무도 보지 못했다. 붉은 눈동자에 스며든 어둠은 분노와 배신감이 아니라 슬픔과 고통이었다.
이블은 체체를 만나고 많은 감정을 느꼈다. 아주 어렸을 적에 사라졌던 감정이 돌아오기도 했고, 살면서 처음 느끼는 감정도 있었다.
이블은 분명 화가 났다. 너무나…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너무 화가 나서 체체를 찾아내 멸망하는 지구에서 함께 끝을 맞이하려는 생각도 했다.
네가 그렇게 죽음이 아무렇지 않다면.
아직도 그렇게 죽고 싶어 한다면 내가 네 오랜 바람을 들어주겠다고.
어쩌면 멸망한 지구에서 나 혼자 살아남아 이 짧은 시간을 영원히 기억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게 네 소원이라면 못 들어줄 이유는 없다고.
그리고 그다음은 슬픔이었다.
이블은 무엇이 체체를 그렇게 만든 건지 생각했다. 고작 스물두 살이었다. 죽기에 좋은 나이가 몇 살이냐고 물어보면 대답하지 못하겠지만 스물두 살은 결코 아니었다.
체체가 처음으로 영웅으로 불린 건 아홉 살 때였다고 한다.
체체는 그 어린 나이에 저보다 더 어린 생명을 구했고, 그렇게 저주를 받았다.
남은 평생 타르의 희망으로 살아가도록.
전쟁으로 일어난 모든 죽음에 일일이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끼도록.
체체는 어쩌면 죽고 싶다고 착각하는 건지도 모른다.
사실은 저주받은 것뿐인데.
이블은 이런 상황에서는 분노보다 슬픔의 크기가 더 크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그는 핸드폰을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보석이라도 되는 듯이 감싸 쥐고 이마에 갖다 댔다.
“체체.”
소리 내서 불러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토록 무력감을 느낀 적은 살면서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불가능한 일 따위 없었는데. ‘할 수 없을 것 같아’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는데 지금은 ‘할 수 없다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체체에게 문제가 생겼을 확률은 낮았다.
체체는 안전한 곳에 있을 것이다. 카론은 체체를 죽이려는 정부군의 공작을 끊임없이 방해하면서까지 체체를 생포하려고 한 자다.
“무서워.”
이블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자신이 내뱉은 말에 놀라서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러나 그 손도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작은 난민은 언제나 이블에게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했다… 체체만이 유일했다. 모든 감정이 체체로 인해 재탄생했다. 안타까움도 즐거움도 두려움도. 안개에 둘러싸인 것처럼 흐릿했던 감정은 체체를 만나고부터 선명해졌다.
온몸을 떨게 만드는 두려움 속에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체체를 원망하는 것밖에 없었다.
체체는 납치 차량임을 알면서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존 게일을 구하고 더불어 명분을 만드는 것.
알시티가 타르와 빌라인 제라도의 관계에 강력하게 간섭할 만한 빌미였다.
납치범이 정부군 소속임이 밝혀지면 빌라인 제라도는 감히 이블 엔덤의 특별한 사람이자 S급의 소울 오러 유저를 납치한 타르 정부를 품에서 놓아 버릴 것이다. 이로 인해 정부군의 입지가 좁아지면 반군이 그 틈을 타 현 정권을 전복할 수도 있었다.
아주 난폭한 계획이다.
체체는 너무나 난폭하고 파급력이 큰 수단을 선택했다.
체체 자신에게도, 이블에게도 너무 잔인한 수단이었다.
이블은 체체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체체를 구속한 타르를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다 뒤집어엎고 타르라는 나라를 지구에서 지워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체체가 그것을 바라지 않는 이상은….
이블은 무력한 폭군에 지나지 않았다.
***
이블이 자신의 무력함을 절감하며 비참한 공포에 빠진 동안, 체체는 어둠 속에서 가만히 앉아 기회를 엿보았다.
감옥에 들어와 하루를 꼬박 지켜보고 나서 간수가 하루에 두 번 교대한다는 걸 알았다. 체체의 옥사는 두 명의 빌라인 제라도 용병들이 교대로 감시했다. 존 게일이 갇힌 옥사는 타르 정부군이 맡았는데, 그곳도 둘씩 교대로 번을 서지만 체체의 감옥보다는 감시가 허술했다. 타르인들은 매우 한가하게 수다를 떨었고, 자리를 비우기도 했다. 체체는 귀를 기울였다.
대화에 따르면 존 게일은 사흘간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고, 어제오늘이 되어서야 목을 축일 만한 물을 조금 받았다고 한다. 그전에도 모진 고문을 받았는지 제대로 일어나 앉지도 못하는 듯했다.
또한 체체가 갇힌 스물네 시간 동안 타르 정부군은 지하 감옥의 가장 안쪽 특별실에서 철통같은 감시를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차린 것 같았다. 뉴스에서는 체체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하고, 감시자들이 소속된 곳은 체체에게 유달리 집착하는 카론 엔빌리우스의 부대였으니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추측이었다.
그들은 옥사 가까이로 다가와 관심을 보이며 기웃대다가 빌라인 제라도 용병들에게 쫓겨나기를 반복했다. 그런 일이 대여섯 번이나 되풀이되자 이제는 빌라인 제라도 용병들도 호기심을 가졌다.
용병들의 시선은 누구 하나 빠짐없이 매우 더러웠다. 하루를 꼬박 굶은 체체의 앞에서 마른 빵을 흔들며 놀리거나 체체에게 지급된 물을 홀랑 마셔 버리는 이도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 빌라인 제라도 용병들이 한 번 더 교대를 했다.
[뭐야. 아직 시간 아니잖아.]
[닥치고 비켜. 소문 다 났어.]
빌라인 제라도인은 체체를 향해 손날을 세우며 인사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어린 영웅님.]
히죽히죽 웃는 얼굴은 조롱에 가까웠다. 다른 용병이 허리에 손을 얹고 다가왔다.
[필라츠, 이 녀석이 그렇게 대단해?]
[대단하지. 타르의 영웅이잖아. 내가 알기로 체체는 빌라인 제라도인을 구해 준 적도 있어.]
[우리나라 사람을? 왜? 미워 죽을 텐데.]
[모르겠냐. 그래서 영웅인 거야.]
필라츠라 불린 용병은 체체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혀로 입술을 훔쳤다.
[네놈들은 얼른 꺼지기나 해.]
필라츠는 원래 있던 이들을 등 떠밀어 보냈다. 용병들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멀리 사라졌다.
[그러게, 네 말이 맞다. 완전 예쁘네.]
필라츠와 같이 온 빌라인 제라도인은 체체의 미모를 보고 계속 감탄했다. 아니… 감탄이 아니라 희롱에 가까웠다.
필라츠는 가지고 온 빵을 창살 사이로 꾸깃꾸깃 밀어 넣었다.
[체체 님, 뭣 좀 먹었습니까?]
[…….]
[물은 마셨어요? 물도 가져왔다만.]
체체는 당연한 듯 빌라인 제라도 말을 사용하면서 친근한 척 구는 필라츠를 잠시 쳐다봤다.
혹시 반군 쪽에서 보낸 건가 했는데, 소울 오러를 이용해 파악해 보니 뭔갈 감추고 있지는 않았다.
체체는 기다렸다.
카론의 지시를 어기고 손을 댈 만큼 욕망에 눈이 먼 자를.
그 어리석은 자는 타르인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빌라인 제라도인이 나타났다.
[눈깔 겁나 이쁘네. 여기 좀 봐 줘요.]
[이리 와 봐, 빵 줄게. 가까이 와.]
둘은 강아지를 부르듯이 체체를 불러 댔다. 그 소리는 제법 컸기 때문에 멀리서 존 게일을 감시하는 타르인들에게도 들릴 것 같았다.
체체의 기대와 달리 빌라인 제라도인들은 창살 밖에서 말을 걸고 놀리기나 할 뿐 안으로 들어오거나 체체를 끌어내려 하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여기 좀 보라니까. 싸가지 없게 굴어서 너한테 좋을 게….]
[…….]
체체는 내리깐 눈꺼풀을 들어 올려 필라츠와 시선을 마주쳤다. 느물느물 웃던 필라츠가 순간 움찔했다.
초라한 차림새로 어둡고 추운 감옥에 갇혀 있는데도,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존재감이었다. 작은 체구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제가 좋으세요?]
체체가 입을 열었다.
체체의 음성은 쉰 듯이 낮고 허스키했다. 금색의 눈동자는 필라츠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지하 감옥에서 오로지 체체가 있는 곳만 빛났다. 두 빌라인 제라도인은 넋을 잃고 인형처럼 어여쁜 난민을 바라봤다.
체체는 고요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체체는 지금까지 이와 비슷한 행동을 아주 많이 해 왔다. 정말 어렸을 적부터….
지금처럼 가벼운 호기심을 부추긴 적도 있었고, 동정심을 불러일으킨 적도 있었다. 존경심을 자극하기도 했고, 두려움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어딘가에 갇혀 위험해질 때마다 그렇게 살아남았다.
아무것도 모르고서 본능적으로 소울 오러를 사용해 왔다.
몰랐을 때도 그렇게 강력했는데….
이제 체체는 소울 오러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웠다.
빌라인 제라도인들은 체체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크고 탄탄한 근육을 가진 건장한 남자였다. 그들은 총을 가졌으며 날카로운 단검도 소지했다.
그게 무슨 소용일까. 쇠붙이 따위는 오러의 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들은 풀만 뜯으며 살아가는 초식 동물이었고, 체체는 이들의 천적이었다.
[하아, 내가 지금까지 봐 왔던 타르 놈들 중에, 아니 내가 평생 살면서 본 놈들 중에 이렇게 예쁜 사람은 없었어….]
필라츠가 멍한 시선으로 감옥 문에 손을 댔다. 당연히 덜컹거리기만 하고 열리지 않았다. 타르 정부군이 카론의 지시로 용병들에게 감옥의 열쇠를 맡기지 않았기 때문에 용병들은 자물쇠를 열기 위해 총을 꺼냈다.
[총은 안 됩니다.]
체체가 가로막았다. 시끄러운 소리가 나 위에 있던 이들까지 내려오면 일이 커진다. 체체는 용병들에게 작고 날카로운 바늘 같은 것이 있느냐 물었다. 필라츠가 고문실에서 아주 작은 핀셋을 가지고 왔다. 체체는 그것을 반으로 잘라 달라고 부탁했다.
반으로 자른 핀셋을 건네받은 뒤에 먼저 수갑을 풀었다. 오랫동안 찼기 때문에 손목에는 검푸른 상처가 남았다. 체체는 손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문으로 다가왔다.
창살 밖으로 손을 내밀어 자물쇠를 더듬었다. 종류와 모양을 파악한 후 핀셋을 이용해 자물쇠를 푸는 데까지는 삼십 초도 걸리지 않았다. 철그덕, 소리가 나자마자 눈이 벌게진 용병들이 허겁지겁 자물쇠와 연결된 사슬을 풀었다.
사슬이 바닥에 떨어지며 소음을 냈다. 문이 열리고 필라츠가 체체에게 팔을 뻗었다. 체체는 그 손목을 잡아당기면서 다른 쪽 손날로 전완근을 내려친 뒤 하체 중심부를 무릎으로 찍었다.
신음을 내며 몸을 굽히는 필라츠의 어깻죽지를 발뒤꿈치로 힘껏 밟아 쓰러트리고 옆으로 몸을 굴렸다. 체체를 붙잡기 위해 달려들던 필라츠의 동료가 중심을 잃고 주춤거렸다. 낮게 몸을 숙인 체체는 그자의 발목에 발을 걸어 무너뜨리고, 손에 든 핀셋으로 목 뒤를 주저 없이 찔렀다. 급소를 찔린 남자는 바로 정신을 잃었다.
체체는 남자의 허리춤에 있던 총을 빼내어 꽉 쥐고 빠르게 감옥 밖으로 빠져나왔다. 빌라인 제라도 용병이 가지고 다니는 총은 체체가 기억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런, 씨발…!]
필라츠가 욕을 내뱉었다. 체체는 그에게 총구를 향했다.
[쉿.]
[……!]
필라츠는 체체가 총을 얼마나 잘 다루는지 아는 군인이었다. 체체의 사격 실력은 아주 유명했다. 그는 입을 다물고 체체를 노려봤다.
이 일련의 행동은 매우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하루 종일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수갑에 매여 있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날렵했으며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사슬이 떨어져 부딪치는 소리와 둔탁하고 낮은 소리밖에는 나지 않았다.
[총 꺼내.]
나지막하게 명령하면서 체체는 다시 소울 오러를 사용했다. 소울 오러 유저는 사람의 감정을 읽을 수 있다. 감정을 전달할 수 있고,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체체는 필라츠에게 공포심과 두려움을 심었다. 이미 있는 감정을 극대화시킨 게 아니라 새로운 감정을 심어 낸 건 처음이었다.
필라츠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손이 너무 떨려서 총도 다 꺼내지 못할 정도였다. 이곳에서 둘을 죽이는 게 안전했지만 체체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총을 겨눈 채 직접 몸수색을 했는데, 필라츠는 내내 두려움에 떨기만 했다. 모든 총을 빼앗기고도 계속 떨고만 있었다. 생각만큼 위험한 상황이 나오지 않아서 오히려 체체가 더 놀랐다.
감옥 문을 사슬로 단단하게 묶고 총에서 총탄을 들어내 하수구로 버렸다. 총 하나만 챙긴 채 타르 정부군이 지키는 존 게일의 감옥으로 가기 전 잠시 멈칫했다.
[히익, 흐으윽….]
필라츠는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고 흐느꼈다. 보기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은 눈물과 침으로 범벅이 되었다. 공포와 두려움, 비참한 감정이 그의 온몸을 감쌌다.
체체는 그제야 자신이 심은 공포심이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음을 알았다.
아니… 어쩌면 평생 갈지도 모른다.
S급의 소울 오러라는 건 이렇게 큰 힘이었나….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체체는 손안에 든 권총을 바라봤다.
이 총이 필요하긴 할까…?
오러 유저와 노유저, 어댑터의 관계는 가위바위보와 같다고 했다.
절대적인 천적 관계.
생각보다 너무 강한 힘은 체체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또다시 이블을 떠오르게 했다.
이블의 힘은 이 힘과는 차원이 다르다. SSS급, 그 이상. 그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이 너무 쉬워서 어려웠을 것이다.
이블을 다시 만날 날을 포기하고 이곳에 왔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어떻게 해서든 그를 다시 보고야 말겠다는 감정만 커져 갔다.
체체는 두 팔을 늘어뜨린 채 조용히 복도를 걸었다.
그때 타르 간수들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무전기와 총을 꺼내 든 상태였다. 지원을 요청하기 전 어두운 조명 아래 이쪽으로 다가오는 작은 인영을 발견했다. 빌라인 제라도 용병들은 체격이 상당히 컸으므로 상황을 파악한 타르 군인들은 일제히 총을 겨누었다.
[누구냐! 소속을 밝혀라.]
[손들고 무기를 버려!]
체체는 그들의 발치에 위협 사격을 가해 물러나게 했다. 옥사 쪽으로 피했던 이들이 곧장 보복 사격을 해 댔다. 체체는 처음으로 소울 오러를 감정이나 세공이 아닌 다른 부분에 사용했다. 오러로 방어막을 만드는 것인데, 이걸 결계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블 엔덤이 이 분야에서 역사상 최고의 실력자라고 정평이 나 있었다.
체체가 소울 오러 유저로서 기초 교육을 받을 때 어느 강사도 이런 사용법을 알려 주지 않았다. 그래서 옆에서 보던 이블이 왜 아무도 제일 중요한 기술을 가르쳐 주지 않냐며 결계 만드는 방법을 직접 가르쳤다. 배운 그날 연습해 보고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쓴 적이 없는 능력이었다.
굉장히 어설프게 만들어진 결계가 두 타르 정부군을 감쌌다.
‘너 진짜 처음 맞아? 왜 이렇게 잘해? 미쳤나 봐. 천재인가. 물론 나보다는 아니지만.’
이블에게 처음 배워서 만들었을 때는 이보다 더 어설펐다. 그러나 이블은 최선을 다해 칭찬을 해 줬었다.
생각해 보면 이상했다. 이블은 항상 ‘너는 앞으로 위험할 일 없어. 내가 옆에 있으니까’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하고는 했는데 어째서 이런 기술을 가르쳐 준 걸까.
이블은 위험하지 않기를 바라서 가르쳐 줬을지도 모르겠지만, 오히려 체체는 이블에게서 이러한 기술을 배웠기 때문에 위험한 곳으로 뛰어들 결심을 굳혔다.
이 사실을 알면 그는 무척 화를 내겠지.
머릿속에 자꾸 차오르는 이블의 모습을 뒤로하고 체체는 계속해서 오러를 사용했다. 이번에는 두려움보다는 존경심과 경외심을 불러일으켰다. 복도까지 가득히 퍼진 불안한 감정을 지워 내고 존경심을 불러내자 두 군인은 무전기를 내려놓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오러를 사용하는 데에도 체력이 받침이 되어야 하는데, 현재 체력이 상당히 저하된 상태라 머리가 어지러웠다. 체체의 오러는 사정없이 흔들렸고 위태로웠다. 그럼에도 노유저들은 너무 쉽게 제압당했다.
[어린 영웅….]
[열쇠를 주세요.]
[예….]
체체가 손을 내밀자 그들을 허리춤에서 열쇠를 빼냈다.
체체는 열쇠로 자물쇠를 열면서 ‘이들이 나를 속이고 있나’라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쉽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좋아하고 안도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는 이유는 이블 때문이었다.
이블에게도 항상 모든 것이 이렇게 쉬웠으리라 생각하니 기분은 점점 더 가라앉기만 했다.
그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어째서 가시 돋혔는지 이해한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아직도 까마득하게 모르는지도 모른다. S급의 소울 오러도 이토록 강력한데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사람을 한 번도 그런 힘을 지니지 않았던 체체가 이해하는 건 힘든 일이다.
이블이 보고 싶었다.
“체체…?”
그때였다. 안쪽에서 쇳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너무 작았고, 무척 쉬어서 사람 목소리가 아니라 녹슨 철문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같았다. 체체가 있던 곳과는 다르게 이 옥사 안은 그 어떤 빛도 들어오지 않아 복도 쪽을 제외하면 완전한 어둠이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런 캄캄한 어둠 속에 있었을까.
[기자님을 데리고 나오세요.]
체체는 다소 낮아진 목소리로 타르 군인들에게 지시했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자들은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마치 세뇌된 노예 같은 행동이었다.
군인들은 존 게일을 사이에 두고 연행하듯이 데리고 나왔다.
“존….”
존 게일의 모습은 무척이나 참혹했고, 체체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몹시 야위었다.
햇빛 아래에서 반짝였던 결 좋은 금발은 듬성듬성 빠져 두피가 보였고, 얼굴은 수염으로 덥수룩했다. 그가 걸친 누더기는 핏자국으로 흥건했으며, 신발은 신지 않았고, 발톱은 거의 다 빠졌다.
힘없이 끌려온 존 게일은 체체를 발견하고 눈가를 씰룩거렸다. 어떻게 체체가 이곳에 있는지, 왜 체체의 지시에 타르 정부군이 따르는지 혼란스러운 것이다.
체체는 서둘러 달려가 존 게일을 부축했다.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기자님.”
체체는 알시티어를 사용해 그에게 속삭였다. 그러고는 타르 군인들에게 말했다.
[기자님의 의수는 어디에 있습니까.]
[죄송합니다… 각하의 명령으로 버렸습니다.]
[…….]
존 게일의 왼쪽 팔은 팔뚝 아래로 텅 비었다.
알시티로 오기 반년 전, 체체는 반군 소속으로 활동했다. 먼저 정부군에 있다가 그곳을 배신하고 반군으로 왔기 때문에 박쥐라고 불리며 비난받았던 시기였다. 물론 체체를 비난하는 이들은 소수였고, 그 비난의 이유도 체체를 믿지 못해서라기보다는 반군 안에서 자신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을 우려한 견제에 가까웠다.
타르인들에게 경애받는 인기인인 만큼 체체를 비난하는 자들도 많았다. 체체는 언제나 그렇듯 견제하는 이들을 무시하고 지냈는데, 어느 날 늦은 밤, 그들이 체체가 거주하는 곳을 급습해 왔다.
체체는 존 게일 그리고 몇몇 동지와 함께 지냈기 때문에 바로 반격할 수 있었다. 염력을 다루는 모션 오러 유저인 존 게일의 존재로 체체 쪽은 찰과상조차 없이 압도적으로 침입자들을 제압했다.
침입자들의 배후에는 현재 반군 수장인 사밀라와 수장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이가 있었다. 이미 도망친 그를 체체가 쫓았는데, 마지막으로 대치했을 때 체체는 그자에게 방아쇠를 당기는 걸 아주 잠깐 망설였다.
그 틈을 타 그를 따르던 자가 체체를 향해 로켓포를 발포했고, 존 게일이 대신 맞았다. 다비즈 인더스트리가 만든 무기는 강력한 파괴력을 자랑하는데, 그건 심지어 집 한 채를 날릴 수 있는 로켓포였다. 원래대로라면 목숨을 잃어야 했다. 그러나 존 게일이 순간적으로 결계를 펼친 덕분에 팔 한 짝으로 끝났다.
본래 사람들 앞에서 오러를 사용하는 일이 없던 사람이었다. 오러 유저들 중에는 그런 부류가 있었다. 자신이 강자라는 걸 내보이고 싶지 않아 하고, 오러를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생각해 평생 사용하지 않으며 노유저처럼 살아가는 이들. ‘비유저’라고도 부른다.
존 게일은 그런 자였다. 그렇게 특이한 사람이었기에 멀고 먼 작은 나라 타르까지 온 것이다.
그날 존 게일은 남은 한쪽 팔로 체체를 들어 안고 무너지는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체체를 원망한 적 없었다.
방금 전 체체에게는 오러 유저로서 노유저를 제압했다는 경험이 새로 생겼다. D급의 모션 오러 유저로 살았던 존 게일이 한쪽 팔을 잃고 얼마나 절망했을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체체는 카론의 함정이라는 걸 알아도 이곳으로 와야만 했다.
이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체체… 역시 너였구나.”
“힘들게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비통하게 이름을 부르는 존 게일을 체체가 업었다. 존 게일이 아무리 앙상해졌다지만 체체보다 체격이 컸고, 체체도 상태가 좋지 않았기에 완전히 업진 못하고 간신히 부축하는 수준이었다.
“이틀 전부터 간수들이… 네 이름을 언급하는 걸 들었어… 정부군으로… 들어간 거니…?”
“아닙니다.”
“그럼 이들은… 반군의?”
“그냥 선의로 도와주고 계세요.”
존 게일을 데리고 나온 체체가 정부군 간수들을 돌아보면서 건조하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제 무기를 버리고 감옥에 들어가 계세요.]
[예.]
둘은 옥사 안에 들어갔고 체체는 감옥 문을 잠갔다.
존 게일은 여전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긴장한 상태였다. 체체는 그를 벽에 기대게 하고 감옥 문을 사슬로 동여맸다.
그런 체체를 간수 두 명이 가만히 바라봤다.
[체체 님, 당신은 타르의 영웅입니다.]
[…….]
[당신은 영웅입니다….]
웬만해서는 이런 경험이 없었는데, 계속 목덜미의 솜털이 쭈뼛 섰다. S급의 소울 오러가 생각보다 너무 강했다.
체체는 이들의 잠재의식에 내재된 타르의 작은 희망을 경외하는 감정을 최대치로 끌어 올렸다. 감옥에 갇히는 순간까지 저런 말을 내뱉도록. 본격적으로 인간에게 소울 오러를 사용한 건 처음이었는데, 너무 강해서 스스로에게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계속 이블이 떠올랐다. 체체는 머릿속에서 이블을 지우기 위해 세차게 흔들었다.
“오러를… 사용한 거니?”
“…예.”
존 게일이 괴롭게 신음했다.
체체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존 게일은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오러 유저로 발현해 어질고 자애로운 부모님과 우애 깊은 형제들 사이에서 자랐다. 그러나 그는 금은보화로 가득하도록 예정된 앞날을 뒤로하고, 그의 인생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을 지구 반대편의 작은 내전 국가로 향했다.
체체는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의 한가운데에서 이 종군 기자를 구하기 전부터 이자의 존재를 알았다. 그는 몇 번씩 체체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모두 거절하고 서로의 존재만 안 채 지냈다.
존 게일은 체체가 자신을 구해 준 날, 말했다.
‘나는 오러 유저이니 네가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들 필요 없었단다.’
체체는 대답했다.
‘당신도 이 나라에 올 필요 없었는데 왔잖아요.’
“괜찮으세요?”
체체가 존 게일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살폈다. 존 게일은 쓰게 웃었다.
“너무 배가 고프구나.”
“제가 있던 옥사에 물이 있습니다. 가지고 올게요.”
“아니야. 얼른 탈출부터 하자…. 지원군은 언제 오기로 했니?”
체체가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존 게일은 아무 지원도 없이 체체 혼자 뛰어든 걸 깨닫고 탄식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전 S급의 소울 오러 유저입니다.”
“안 돼….”
존 게일은 고개를 저었다.
“난 지금 걷는 것도 어렵고, 위에는… 어댑터가… 있어.”
어댑터.
예상치 못한 말에 체체의 표정이 굳었다.
“타르 정부군에는 어댑터도 오러 유저도 없을 텐데요.”
“간수들이… 대화하는 걸 들었어…. 카론이 외국인 어댑터를 고용했다고….”
“그게 언제입니까?”
“삼 주… 된 것 같구나.”
“…….”
카론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 삼 주 전 체체가 함정에 스스로 빠지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미리 체체를 제압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한 것이다.
‘어댑터는 조심해야 돼. 진짜로.’
‘내가 분명 말했지. 어댑터 조심하라고.’
이블은 지금까지 몇 번이나 어댑터를 조심하라고 말해 왔다.
체체는 어댑터의 능력을 경험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어댑터라는 존재는 얼마나 강한 걸까.
내가 빌라인 제라도 용병과 타르 간수들을 손쉽게 조종한 것처럼… 어댑터도 나를 그렇게 다룰 수 있는 건가.
만약 그런 거라 해도 이곳에서 가만히 다른 군인들이 내려오길 기다릴 수는 없었다. 지금도 끊임없이 간수와 용병들, 총 네 명의 감정을 소울 오러로 주무르고 있다. 체체의 체력은 한계에 다다랐다.
“조심하겠습니다. 어댑터와의 대치는 최대한 피할게요.”
“체체… 너는… 이제 막 오러 유저로 발현해서 모르고 있어… 어댑터 앞에서 오러 유저가 얼마나 무력한지.”
존 게일은 이블이 체체에게 해 준 말과 비슷한 말을 쏟아 냈다. 어댑터를 조심하라고.
하지만 가야 했다. 다른 수가 없었다.
어찌 됐든 이 공간을 떠나야 했다. 체체는 부축하던 존 게일을 벽에 기대 세우고 총기를 다섯 개 챙겼다. 존에게는 하나를 주고 나머지 네 개는 자신이 착장했다.
체체는 갇혔던 곳에서 수통을 챙겨 와 존에게 마시게 했다. 존은 두 통을 비웠고, 체체도 한 통을 모두 마셨다.
체체는 존 게일의 앞에서 등을 보인 채 무릎을 굽혔다.
“업히세요.”
“체체….”
만류하듯이 이름을 불러 본 존 게일은 단호한 작은 등을 보고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존은 체체에게 매우 불편한 자세로 업혔다.
계단을 올라가니 짧은 복도와 커다란 문이 나왔다. 문틈 사이로 빛이 새어 나왔다. 존은 ‘이상하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라고 조그맣게 말했다.
“아무것도 안 들린다고요?”
“그래, 내가 아무리 약해졌다지만 이 층의 소리는 들려야 하는데… 너무 고요해. 피 냄새도… 나는 것 같구나.”
체체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문 옆에는 숫자 암호 키가 있었다.
“…….”
체체는 멀리 떨어져 권총으로 암호 키를 겨누고 곧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암호 키는 물론이고 문까지 산산조각이 났다. 문이 열린 뒤에는 건조하게 말했다.
“이 짓으로 다 들킬 것 같네요.”
“그래… 그럴 것 같은데….”
체체야, 뭐 하는 거니….
존 게일은 지금이라도 감옥에 돌아가는 편이 좋지 않은지 잠시 생각했다.
체체는 황망한 존을 업고 계속해서 걸었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고, 양쪽의 방들은 열린 곳도 닫힌 곳도 있었는데, 열린 곳들에는 들여다보기도 싫을 정도로 참혹한 풍경이 펼쳐졌다.
사지가 붙은 시체는 잘 보이지 않았다. 살점이 복도에까지 튀기도 했다. 끔찍한 분노와 증오심을 품은 이가 가장 잔혹한 수단으로 살해한 것 같았다.
체체는 존 게일을 업고 한 층, 한 층씩 위로 올라갔다.
지하 감옥에서 지상으로 올라가기까지 총 네 층을 지났는데 둘을 위협해 오는 타르 군인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죽었기 때문이었다.
“죽은 지 얼마 안 됐어….”
“한 시간도 지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 몇 분 되지 않은 것 같구나….”
이 정도의 참상이 펼쳐지려면, 이렇게까지 일방적인 학살이 이뤄질 정도라면 기계식 부대가 쳐들어오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만약 그렇다면 이곳은 아수라장이 되었을 것이다. 지하에도 도망쳐 오는 자가 있었을 것이고, 끔찍한 비명과 포격 소리가 들려왔을 것이다.
그러나 올라오는 동안 내내 고요했다.
“체체, 잠깐.”
존 게일이 등 뒤에서 말했다. 체체가 존 게일을 내려 주자 그는 비틀거리며 지상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 마지막 방에 들어갔다. 체체도 뒤를 따랐다.
타르 군인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죽어 있었다.
어떤 자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고, 어떤 자는 피범벅이 되어 살갗이 보이지 않았다. 사지가 기괴하게 꺾이거나 시멘트벽에 파묻혀 죽은 이도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잔인한….”
존 게일은 비통하게 탄식하며 엎어진 시신을 뒤집었다. 체체보다 더 어려 보이는 외모의 청년이 희번덕거리는 눈을 뜬 채 죽어 있었다.
존 게일이 눈꺼풀을 감겨 주었다.
여태까지 죽은 이들은 대부분 타르인이었고, 간간이 빌라인 제라도인도 있었다. 체체와 비슷한 나이의 청년들이 많았다.
“반군이 이런 학살을 벌이다니….”
“반군이 아닐 겁니다.”
체체는 건조하게 말했다.
“반군은 이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이리해 놨단 말이야… 카론이?”
“…….”
“사실 나는 지금 이 학살자가 이블 엔덤이라는 생각도 드는구나.”
“그는….”
체체는 뒷말을 잇지 않고 존 게일의 앞에 등을 보이며 무릎을 굽혔다.
존 게일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스스로 걸을 수 있어.”
“…네.”
체체가 먼저 계단을 올라갔다.
***
지상에도 똑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다만 먼 하늘에서 밝게 쏟아지는 노란 햇살이 땅 위의 시체들을 덮고 있다는 것만이 달랐다.
가장 중앙에 있는 방문이 살짝 열린 채 체체를 기다렸다. 마치 너는 여기에 오면 된다고 방향을 알려 주는 듯이.
“조심해. 안에 두 명이 있어. 한 명은 어댑터인 것 같아.”
문을 열려고 하는 체체에게 존 게일이 경고했다. 체체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손잡이에 손을 올리자 존 게일이 한숨을 쉬며 말렸다.
“너는 몰라… 어댑터가 명령만 하면 너와 나는 서로를 죽이려고 달려들 수도 있단다.”
“조심할게요.”
체체는 대답했지만, 어댑터를 어떻게 조심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과연 정말 조심할 필요가 있는지도 몰랐다.
사방이 고요했기 때문에 문 열리는 소리가 크게 퍼져 나갔다.
유달리 화창한 날씨였다. 넓은 창으로부터 햇살이 아름답게 비쳐 왔다.
커다란 방에는 카론이 홀로 앉아 있었다.
아니, 혼자가 아니었다. 옆에 한 사람이 서 있었고, 외국인이었다.
“체체.”
카론은 기다렸던 것처럼 의자에서 일어났다.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체체는 그가 지하의 참상을 안다는 걸 눈치챘다. 옆에 있는 어댑터가 매우 두려운 눈을 했기 때문이었다.
“너를 부르러 가려고 했는데.”
“…….”
“이블 엔덤이 네가 나오고 있으니 움직이지 말라더군….”
카론은 어느 정도 다가오다가 멈췄다.
이블 엔덤이라는 단어에 체체가 숨을 들이켰다. 체체는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아무도 없었다. 카론은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체체의 행태를 비웃었다.
“그자를 찾고 있나?”
“어디 있습니까?”
“떠났다.”
체체는 다시, 이번에는 조금 더 급하게 구석구석 훑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걸로 빚은 없다고 말하고는 나가 버렸지.”
빚은 없다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정말 떠나 버린 걸까.
마지막 정으로 내가 복수하게 놔두고서 여기에 날 혼자 두고 떠난 걸까.
이블은 체체에게 너무나 쉽게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지금까지 무엇도 체체를 이렇게 두렵게 만든 적 없었는데….
그저 이블이 이대로 떠나 버렸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두려워졌다.
“그를 따라가고 싶은가?”
“…….”
체체는 흐트러진 정신을 집중했다. 지금은 이블을 찾을 때가 아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존 게일이 여기서 안전히 나가게 해야 한다.
카론은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옆에 있는 어댑터였다.
체체는 소울 오러를 불러일으켰다. 동시에 어댑터가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체체는 빌라인 제라도 용병들에게 했던 대로 카론에게 두려움을 심었다. 그러나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이번에는 타르 군인에게 했던 대로 존경심을 심으려 했으나 밑 빠진 독처럼 흩어져 버렸다.
카론의 고장 난 뇌 때문인가. 저 어댑터의 방해가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배 안에서 만났을 때도 카론에게 소울 오러를 사용해 봤지만 통하지 않았으니 뇌 때문일 확률이 높았다. 그래도 존 게일이라는 모션 오러 유저가 있는 한 카론은 큰 장해물이 아니었다.
“체체 유저.”
그때 어댑터가 체체를 불렀다.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만합시다. 당신은 존 게일을 데리고 나가시오.”
“…….”
“우리는 아무 짓도 하지 않겠소. 최대한 살인을 줄이고 평화롭게 해결하는 게 바로 당신의 방식 아닌가.”
“…….”
“어차피 카론 각하가 당신을 납치했을 때 타르 정부는 끝났소… 이블 엔덤의 분노가 두려웠던 빌라인 제라도는 타르를 버렸고, 지금쯤 사밀라가 반군을 이끌고 정부를 습격했겠지. 체체 유저, 당신의 승리를 인정하네. 아직도 흘려야 할 피가 남았나? 이제 우리를 가만두고 나가시오.”
체체가 뒤로 물러섰다. 뒤에서 존 게일이 속삭였다.
“체체, 그냥 가자. 이들은 살려 두는 게 좋겠어.”
체체도 동의했다.
처음부터 목적은 존 게일을 빼내는 것이었다. 이미 너무 많은 타르 군인들이 죽어 버렸고, 어차피 정부는 끝났다고 한다.
기나긴 내전이 끝났는데.
더 이상의 피는 무의미하다.
여기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이블은 더욱 멀어진다. 방금 전만 해도 이곳에 있었으니 서둘러 나가면 따라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체체와 존 게일은 둘을 향해 등을 보이고 돌아섰다.
그때였다.
철컥.
뒤에서 들려온 소리는 체체가 살면서 숱하게 들은 소리였다.
“무기는 모두 버리고 내게 와라.”
카론이 명령했다. 체체가 뒤돌아보니 카론은 소총을 겨눈 채 웃고 있었다. 어댑터도 마찬가지였다.
체체는 방어막을 만들려 했으나 오러는 모이지 않고 흩어져 버렸다.
“존 게일 기자님, 사흘 동안 못 주무시지 않았습니까? 피곤하겠는데 좀 주무시지요.”
“…그러고 보니 조금 피로하군….”
어댑터가 말했다. 존 게일은 눈살을 찌푸리며 하품을 하고는 그 자리에 쓰러지듯이 누웠다.
체체는 잠들어 버린 존 게일을 깨울 수가 없었다.
“체체 유저… 무기를 버리고 카론 각하께 가시오.”
어댑터가 그렇게 명했기 때문이었다. 체체는 무기를 떨어뜨리고 카론에게 걸음을 옮겼다.
“네가 오러 유저가 되니….”
“…….”
“소유하기 더욱 쉬워지는군.”
카론은 웃었다.
카론의 지척까지 다가간 체체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블 님이 여기 왔다는 건 거짓말이었군요.”
“그자가 오기를 바랐나?”
카론이 차갑게 비웃었다.
“고작 널 위해 이 작고 비참한 나라까지 강림해 줄 거라고 생각했나? 나는 네가 이렇게 어리석은 줄 몰랐지.”
“그럼 아래 있는 군인들은….”
“내가 죽였다. 정부가 무너졌으니 이제 다 쓸모없어진 패거든.”
체체는 눈을 내리깔았다.
다행이다.
그분이 그 모든 사람을 죽인 게 아니라서 다행이야.
체체가 희미하게 웃자 카론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때 어댑터가 가까이 다가왔다.
“존 게일은 이곳에 두겠소. 반군이 찾아서 치료해 주겠지. 체체 유저는 우리와 함께 가야겠소.”
“어디로요?”
“빌라인 제라도로.”
“당신은 빌라인 제라도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데요.”
“그곳에 고용되었소. 체체, 당신을 데리고 오라고.”
어댑터는 무표정했다. 두려움에 떨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애초에 두려움에 떠는 연기조차 한 적 없을지도 몰랐다. 체체는 지금 이 대화가 현실이 맞는지 혼란스러웠다.
“왜 저를.”
“당신은 그자를 움직이게 하는 유일한 무기니까.”
“…….”
“풍부한 석유와 루젬 원석 산지… 오러 유저 부대와 핵무기.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겠소. 이블 엔덤을 우리가 가지지 않았는데.”
빌라인 제라도와 카론은 이해관계가 맞았다. 카론은 체체를 원했고, 빌라인 제라도는 이블을 원했다. 마침 카론에게는 존 게일이라는 체체를 끌어낼 수단이 있었기에 둘은 서로 협력했다.
어차피 그들이 아니더라도 앞으로 체체는 수많은 단체에게 노려질 터였다. 이블 엔덤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를 손에 쥘 유일한 수단이니까.
“전 언제부터 당신에게 조종당하고 있었습니까?”
체체가 물었다. 어댑터는 대답하지 않았는데, 카론이 아량을 베풀듯이 알려 주라고 했다. 어댑터는 탐탁지 않다는 표정으로 설명해 주었다.
“처음부터. 당신이 지하 감옥에서 탈출 계획을 세울 때부터 조종했소. 나는 S급 어댑터라 한 공간에 있기만 하면 얼굴을 보지 않아도 조종이 가능하거든…. 올라오면서 끔찍한 참상을 봤겠지? 실제로는 그렇게 끔찍하진 않았소. 내가 ‘괴물이 아니면 이러한 참상을 만들기 어려울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도록 정신을 조종했기 때문에 악몽으로도 꾸기 힘들 만한 지옥이 펼쳐졌겠지.”
“…….”
“오러는 그만 거두시오.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지 않소….”
체체는 천천히 오러를 거두었다.
생각해 보면 이곳에 이블이 있을 리가 없는데, 너무나 쉽게 카론의 말을 믿어 버렸다.
이블의 말이 맞았다.
어댑터의 힘은,
저항해 보려는 마음조차 생기지 않게 했다.
이것은 체체에게 얼마나 강한 의지가 있느냐와는 다른 문제였다. 오러를 가진 한 어쩔 수 없었다. 백 명의 노유저가 총과 칼을 들고 덤벼 와도 오러 유저 한 명을 이길 수 없는 것처럼. 체체는 절대로 어댑터를 이길 수 없었다.
“카론 각하, 곧 헬기가 올 것이오.”
“이제 각하라고 하지 마라. 이 나라는 망했으니.”
카론은 체체에게 수갑을 채웠다. 그는 체체의 팔목에 남은 이전 수갑의 흔적을 손가락으로 만족스럽게 훑었다.
“일단 마무리를 지어. 네 녀석이 방심하면 노유저인 나는 무력하게 당할 것이다. 앞으로 영원히 나를 공격하지 말고, 내 말을 따르라고 해라.”
카론은 이 일이 끝나면 빌라인 제라도 국적을 얻고 빌라인 제라도의 사령관이 되기로 했다. 어댑터의 직속 상관인 것이다. 대개 어댑터의 상관은 노유저였다.
어댑터는 카론의 지시를 따랐다.
“체체 유저, 당신은 카론을 공격하지 말고 항상 그의 지시에 따르시오.”
“…네.”
체체가 조그맣게 대답하고는 카론을 바라보며 부탁했다.
“기자님은 건드리지 말아 주세요.”
“저 알시티인은 관심 없다.”
카론은 대답하면서 허리춤의 총을 만지작거렸다. 체체는 어떤 예감을 느꼈다.
그때였다.
탕, 소리와 함께 어댑터의 머리에 구멍이 뚫렸다. 어댑터는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조차 알지도 못한 채 쓰러졌다. 카론은 총을 다시 집어넣었다.
쓰러진 시체에서 더러운 피가 흘러나왔다. 카론이 시체를 발로 차 멀리 보냈다.
“S급 어댑터가 심어 놓은 정신 조종은 어댑터가 죽어서도 풀리지 않지. 다른 어댑터나 오러 유저가 풀어 주지 않는 한 말이야. 하지만 너는 평생 다른 사람을 볼 일이 없을 거야.”
“…….”
“말했잖아. 다시는 햇빛을 보게 하지 않겠다고.”
카론은 얼어붙은 체체를 웃으며 지켜봤다.
“…….”
계속 조종하던 자가 갑작스럽게 죽었기 때문에 체체의 머릿속이 엉망으로 뒤엉켰다. 끔찍한 두통이 닥쳐와서 머리를 감싸며 숨을 몰아쉬었다. 눈앞이 흐려졌다.
“이런.”
카론은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그대로 기절하는 것도 좋겠지. 다시 일어나면 모든 것이 정리된 후일 거다.”
그는 팔짱을 끼고서 체체가 정신을 잃기를 기다렸다.
모든 것이 흐려져 가는 머릿속에서 체체는 한 가지만을 붙잡았다.
이블의 얼굴이 떠올랐다.
별거 아닌 걸로 시비를 걸기도 했다. 한없이 다정해졌다가 갑자기 화를 내기도 하고. 툭, 툭 건드리면서 장난을 걸었다가도 너무나도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집어삼킬 것처럼 바라보던 붉은 눈과 뜨거운 손길… ‘체체’ 하고 부르던 낮은 목소리.
노을 지는 바다 위에서 가만히 웃음 짓던 모습.
눈덩이를 모아 눈 쌓인 뱁새를 만들며 즐거워하던 모습.
벌레와 친해질 필요가 있느냐고 묻던 그와 작고 하얀 꽃을 보여주며 뿌듯해하던 그.
루젬 세공을 하고 있으면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구경하던 얼굴.
이블의 수많은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보고 싶었다.
이블을 한 번만 더.
그에게 용서해 달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이제는 영원히 볼 수 없을 것이다.
타르 정부는 무너지고 반군이 승리했다. 기나긴 내전은 끝이 났다. 언제나 어린 영웅을 따라다녔던 시체들의 염원은 해결되었다.
그러나 체체가 가진 단 하나의 아주 작은 소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체체의 정신은 심연 속으로 잠겨 갔다.
아득한 심연으로….
***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눈앞은 어두웠고, 매우 추웠다. 체체는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움츠리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체체가 언제나 원했던 것이었다.
죽음.
체체는 단 한 번도 죽음을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 죽음은 언제나 그를 따라다녔고, 주위의 모든 걸 앗아가면서도 그에게만은 오지 않았다. 체체는 이곳에 홀로 앉아 언제나 죽음을 기다렸다.
그렇게 고대하던 죽음이 왔는데 조금도 기쁘지 않다.
영원한 고독을 마땅히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어둠에서 나가고만 싶었다. 체체에게는 만나야 하는 사람이 있었다. 만나서 사과를 전해야 하는 사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떠올랐다. 햇살처럼 밝은 금발에 붉은 눈, 나를 부르는 따스한 목소리.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제대로 한 적 있었나? 화가 많이 났을 텐데. 그를 다시 고독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그러나 뒤늦은 후회 또한 심연 속으로 잠겨 들어갈 뿐이었다….
그때였다.
“체체.”
짙은 어둠이 흩어졌다.
“일어나, 체체.”
무언가 자신을 흔드는 느낌이 들었다. 부드러운 목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눈떠 봐.”
다정한 음성이 귓가에 와닿았다. 머리가 깨질 것 같던 두통은 사라졌고, 온몸을 감쌌던 냉기를 온화한 것이 안아 왔다.
체체가 천천히 눈을 떴다.
햇살을 받아 아름답게 반짝이는 금발과 걱정으로 가득한 붉은 눈이 보였다.
“이블….”
어댑터의 정신 조종으로 헛것을 보는 걸까. 눈을 깜박이는 체체를 향해 이블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진짜 화를 못 내게 하네….”
이블은 체체의 이마에 입 맞췄다. 따스한 감촉이 체체의 정신을 완벽하게 건져 올렸다.
“이블 님…?”
“응, 그래.”
정신을 차린 체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은 이블의 단단한 품 안에 안겨 있었고, 이곳은 여전히 지하 감옥 건물이었다. 수갑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존 게일은 자고, 어댑터는 죽었고, 카론은… 주저앉은 채 떨고 있었다.
이건 꿈인가. 아직 조종당하는 걸까.
“꿈 아니야.”
이블의 낮은 목소리가 체체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체체의 숨이 가빠졌다.
그가 스스로 일어나려 하자 이블이 허리와 팔을 붙잡아 저에게 기대게 했다.
“어쩔 수 없었어. 네가 타르에서의 습관을 못 버리고 자꾸 객기를 부리니까 조금은 알려 줘야 했어.”
이블은 변명하듯이 말했다.
“멍청한 계획대로 소울 오러만 믿고 여기 올라왔다가 어댑터에게 어떤 꼴을 당할지 말이야. 이제 그걸 알아야 이런 짓을 또 안 하지.”
“…….”
“어때? 끔찍했지? 이제 안 할 거지?”
“네.”
체체는 대답하고는 이블을 원망하듯이 가슴을 머리로 살짝 찧었다.
“정말로 끔찍했어요.”
“…좀 더 빨리 구해 줄 걸 그랬나.”
이블의 목소리에 애타는 후회가 담겨 있었다. 체체가 정신을 잃었을 때 이블은 미친 듯이 불안했다. 살면서 이렇게 두려웠던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 일은 한 번은 치러야 할 홍역 같은 거였다. 오늘 어댑터의 능력을 겪지 못했다면 체체는 분명 또 이런 짓을 저질렀을 터였다. 그 사실을 이블도 알기 때문에 이런 강경책을 둔 것이다.
이십이 년 중 이십 년을 전쟁터에서 보낸 체체에게는 한 가지 버릇이 있었다. 스스로 위험에 뛰어들어 누군가 자신을 구하러 오게 하는 것. 납치된 어린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체체는 일부러 그곳에 뛰어들었다. 그래야만 동료들이 자신과 어린아이들을 구하러 올 테니까.
체체는 의식적으로도, 무의식적으로도 그런 방식을 숱하게 사용했고 아르말에서 그 사실을 이블에게 고백했다. 이블은 그때부터 이런 상황을 염두에 뒀다.
“너 괜찮은 거 맞지?”
이블이 초조하게 묻자 가슴에 기대 있던 체체가 고개를 들었다.
오랜 시간 감옥에 갇혔다가 나오자마자 어댑터에게 공격당하고 정신을 잃기까지 했던 체체는 아직 얼떨떨했다. 하지만 자신의 어깨를 감싼 이블의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보고 차츰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는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던 걸까. 이 장소는 어떻게 알았으며… 원자력 발전소는?
궁금한 게 많았지만 가장 먼저 해야 하는 말은 따로 있었다.
“이블 님.”
“응.”
“죄송합니다.”
“알아. 나도 화 많이 났어.”
“…….”
“존나 귀엽네. 괜찮아 보이기는 하는데, 일단 끝내고 다시 얘기하자.”
이블이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 속에서도 그의 분노가 느껴졌다.
그때 카론은 주저앉아 떨고 있었다. 그 떨림은 두려움이라기보다는 자신의 계획이 어긋났다는 좌절과 이제 영원히 저 인형을 독차지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비탄이었다.
이블 엔덤은 최근까지도 자신의 힘을 숨겼고, SSS 멀티 오러 유저의 능력은 아직 베일에 싸였다. 하지만 주체자인 어댑터가 사망했는데도 그 세뇌를 해소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절대적인 능력은 누구라도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어떡할까. 내가 죽여 버릴까?”
“아니요.”
“그래, 그럼 네가 끝을 내.”
이블은 체체를 단단하게 부축했다.
체체가 카론을 향해 옅게 웃음을 머금었다. 카론의 표정은 완전히 굳었다.
“나… 나한텐 통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정신이, 뇌가.”
“네 뇌가 뭐?”
이블이 체체의 옆에서 말했다.
그 경쾌한 목소리가 카론에게는 마치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카론은 도망갈 생각도, 총을 뽑을 생각도 못 하고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카론에게 그가 평생토록 바라 왔던 감정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압도적인 강함에 대한 공포, 죽음에 대한 두려움, 마치 벌레가 된 것 같은 무력함. 이블이 심어 놓은 감정들이 카론의 정신을 앗아 갔다.
체체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총을 드세요.”
“…….”
이블이 카론에게 총을 들게 했다.
카론의 동공은 사정없이 흔들렸고 입에서는 침이 질질 흘렀다. 언제나 흐트러짐 없던 정부군의 카론 엔빌리우스는 존재하지 않았다.
체체는 한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저자가 죽지 않는 이상 자신에게 평화는 없으리라고. 타르 내전이 끝난다 해도, 타르가 빌라인 제라도에서 독립한다 해도, 카론 엔빌리우스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영원히 자신의 전쟁은 끝나지 않을 거라고.
“심장을 겨누세요.”
체체가 말을 하면 이블이 따르게 했다. 카론이 스스로 가슴을 향해 총을 겨눴다.
체체의 마지막 명령은 아주 짧았다.
고요한 건물에 총성이 울려 퍼졌다.
눈앞에 튀어 오른 붉은 피는 부자연스러운 방향으로 꺾여서 떨어졌다. 이블이 자신들에게 닿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모든 것이 끝이 났다.
체체는 이블의 가슴에 등을 기댄 체 작게 숨을 내뱉었다.
그 이상으로 여운에 빠지지는 않았다. 체체는 이블의 옷을 꼭 붙잡았다. 이블도 힘주어 체체를 안았다.
“얼른 나가자. 피 냄새 더럽게 심해.”
“네.”
“나가서 기다리면 차가 올 거야.”
“기자님도 데리고 가야 합니다.”
이블은 쳇, 안 까먹었네, 하면서 잠든 존 게일을 염력으로 들어 올렸다.
“이 상황에서도 잘도 잔다.”
“깨우지 마세요.”
“안 깨워. 우리 둘만의 시간이잖아.”
둘은 건물을 나가 햇빛 아래에 섰다. 타르는 항상 덥고 건조한데, 오늘은 유달리 화창했다. 체체는 이 땅이, 이 땅에 처음으로 방문하는 SSS 멀티 유저에게 잘 보이려 한다고 생각했다.
적당한 곳에 자리에 퍼질러 앉은 이블은 체체를 제 위에 앉혔다. 그러고는 며칠 자리를 비웠던 주인을 다시 만난 고양이처럼 온몸을 끌어안고 비벼 댔다. 코를 킁킁대며 냄새를 맡기도 하고, 얼굴 이곳저곳에 키스를 퍼붓기도 했다.
멋대로 자리를 비운 데 대한 대가로 체체는 이블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었다.
“원자력 발전소는요?”
“몰라. 너랑 나만 안 죽으면 되지, 뭐.”
“내전이 끝났나요?”
“그랬대. 최소한의 희생으로 반군이 이겼다더라. 정부군은 거의 없었대. 빌라인 제라도가 손을 놓았으니 다 도망간 거지. 총통은 반군이 처형시킨다고 했는데 했는지 모르겠어. 궁금하면 널 안고 날아갈 수 있어.”
“안 궁금합니다.”
길고 긴 내전이 끝났다는데 실감은 나지 않았다. 체체는 이블의 옷을 부여잡고 품 안에 파고들었다. 체체의 손이 미세하게 떨린다는 걸 둘 다 알고 있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니, 너랑 같이 먹으려고 아직 안 했어.”
이블은 체체의 턱을 들어 올리고 콧등에 다시 키스했다. 며칠간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알시티로 돌아가기 전에….”
체체가 말했다.
“타르에 유명한 식당이 있습니다. 같이 가시겠어요?”
“…그래, 좋아.”
이블의 눈동자가 체체를 담았다. 햇빛이 두 사람을 따스하게 비춰 왔다.
“그런데 그래도 돼? 타르 정부가 지금 개판 났는데.”
“그곳엔 가지 않습니다.”
체체의 대답은 단호했다. 이블은 체체의 눈치를 보듯이 물었다.
“이제 네게 걸려 있던 저주는 풀렸어?”
“무슨 저주요?”
“타르가 너한테 건 저주 말이야.”
“그런 게 남았다 해도 상관없어요.”
체체의 금색 눈에 단호함이 서렸다.
“이제는 정말로 아무 상관 없어요.”
체체는 수많은 죽음의 위기를 겪으면서도 주마등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방금 전까지는.
그러나 이제는 주마등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했다. 정말로 순식간에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이블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차가운 눈빛이 자신을 향해 따스하게 변해 가는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보면서 체체는 생각했다.
살고 싶어. 살아서 그를 한 번만 더 보고 싶어.
이번에 살아나면 이제는 이렇게 위험한 일 하지 않을 거야. 타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시체들이 어떻게 울부짖든, 나의 아픔 때문에 그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나는 이제 그가 마음 아파할 일은 하지 않을 거야.
내가 그걸 원하지 않으니까.
“너….”
이블은 놀랍게도 조금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저주 따위 상관없다는 체체의 말이 진심임을 느끼고, 자신을 향한 체체의 감정을 느끼면서.
가슴이 벅차올라서, 숨이 가빠 왔다.
“이블 님.”
체체는 놀란 이블의 얼굴을 붙잡았다. 그리고 환하게 웃으며, 자신이 깨달은 것을 속삭였다.
이블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언제나 따라다녔던 죄책감 따위보다 더. 그동안 포기해 왔던 욕심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을 사랑한다고.
체체의 안에 감정이 가득했다. 그 감정이 이블에게도 전해졌다. 차오르고 차올라서 넘쳐 버릴 만큼. 이블은 체체를 끌어안고 작은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오랫동안 걸려 있던 저주가… 영원히 풀리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저주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