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 회담은 사흘 후로 연기됐다. 취소를 주장하는 나라도 있었지만, 각국 정상들이 다시 모이는 게 쉬운 일도 아니며 죽은 이는 아주 작은 나라의 수행원에 불과했고, 죽인 사람은 SSS 멀티 오러 유저 이블이었기 때문에 취소까지는 과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더구나 이블이 순순히 죄를 인정하고 구속되었기 때문에 논란이 커지지 않았다.
이블은 얌전히 수갑을 찼고, 얌전히 연행되어 일단 자택에 연금되었다. 오러 유저도 현행범으로 붙잡히면 감옥에 들어가는 게 맞지만, 이블의 경우는 여러모로 특수했다. 그러나 그가 이블 엔덤이라도 센터의 특수 취조실에 들어가 취조를 받아야만 했다.
알시티의 오러 센터는 오러 유저와 관련된 모든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종합 센터이다. 감옥과 병원은 없었지만 작은 유치장이나 의료실 정도는 구비했다.
오러 세공에 쓰이는 원석은 오러를 특히 더 잘 머금는 물질로 이루어졌는데, 이와 반대로 오러를 약하게 하는 암석도 존재했다. 이 취조실은 사방이 이 암석으로 만들어졌다. 이블의 양손에 찬 수갑도 그 물질로 만든 것이었다.
자택에서 쉬던, 아니, 연금된 이블을 센터로 불렀을 때 사람들은 이블이 거부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블은 한 번에 수락했고 제 발로 센터 취조실 안에 들어갔다. 수갑도 차고 말이다. 그에 사람들만 더 난감해졌다.
“난 가기 싫어.”
“저도 싫습니다.”
“차라리 퇴사할게요.”
이블의 취조를 누가 맡느냐로 싸우던 이들은 가위바위보로 결정했다.
취조를 맡은 어댑터와 노유저 검사가 들어갔을 때 이블은 테이블에 턱을 괸 채 하품을 했다. 절대 몸이 지치거나 피곤하지 않을 테니 지루하다는 표현이었다.
“대체 왜 칼메스 피론테를 죽인 겁니까.”
“그게 누군데?”
어댑터는 이마를 짚었다.
“당신이 죽인 노유저 타르인 말입니다.”
“짜증 나게 해서.”
“짜증 나게 한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였다는 겁니까?”
“응.”
“칼메스가 어떤 행위나 발언을 했습니까?”
“…….”
이블은 잠깐 눈살을 찌푸렸다.
“짜증 나는 발언.”
내용을 묻는 말에 대한 대답으로는 무척 적절치 않은 답이었다.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떠올리기도 싫어서 말 안 할래.”
“이블 유저.”
칼메스와 이블의 대화는 단둘만 있는 자리에서 이뤄졌고, 칼메스는 죽었다.
이블이 입을 다물어 버리면 그 대화는 영원히 그 누구도 알지 못하게 되어 버린다.
‘그래, 내가… 그에게 알려 줬다.’
‘네가 타르에서….’
수많은 이들이 그 떨리는 목소리를 들었다. 정황상 체체와 관련된 내용임은 분명했다.
“체체 유저를 욕보이는 내용이었습니까?”
“…야.”
이블이 히죽거리며 서늘하게 웃었다. 주위에 얼음이 맺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했다.
“혹시 누가 또 그 내용을 들은 사람이 있어?”
“이, 있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죽이려고.”
“…….”
“죽여서 없애야지. 이 세상에서.”
이블의 그 말은 협박이었다. 더 이상 물어보지 말라고. 그 대화를 들은 사람은 다 죽이겠다고.
그리고 또한 반증이기도 했다
체체와 관련된 내용임이 분명하다. 그것도 상당히 부정적인 쪽으로….
사실 이 순간 사람들의 골칫거리는 이블이 아니라 체체였다.
그들은 체체가 조련사가 되었으니 앞으로 이블은 체체의 말을 따르며 자제하고, 인내하며 살아갈 거라고 생각했다.
정상 회담에서도 알시티 정부와 엔덤 가문이 계속 펼친 주장도 이것이었다. ‘이블이라는 병기에 제어 장치가 생겼으니 안심해도 된다’. 그러나 그런 주장을 펼치는 상황에서 그 살인 병기가 살인을 저질러 버렸으니 꼴이 참 우습게 된 것이다.
그리고 살인을 저지른 이유도 결국 체체와 관련 있다고 한다면, 체체라는 조련사가 생긴 것은 긍정적인 측면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이블을 말릴 수 있는 자가 생긴 게 아니라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성역이 생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번 사건이 일어나고 원래는 체체도 취조실에 부를 예정이었다.
‘체체 유저님이 관련인이시기에 하루 정도 취조하려고 합니다만 괜찮으십니까?’
‘네, 그렇게 하세요.’
‘어댑터와 둘만 있게 됩니다만….’
‘상관없습니다.’
체체는 그렇게 흔쾌히 수락했는데, 그 사실을 안 이블이 발광을 했다.
어떻게 이 작은 애를 어댑터와 단둘이 놔둘 생각을 하냐며, 말을 꺼낸 사람을 무슨 범법자라도 되는 것처럼 매도한 그는 체체에게도 한 소리 내질렀다.
‘내가 어댑터 피하라고 했지. 절대 둘만 있지 말라고.’
‘이건 취조잖아요.’
‘취조든 뭐든. 씨발, 한번 당해 봐야 알겠어?’
‘네.’
‘와… 환장한다. 이걸 진짜 당하게 둘 수도 없고 미치겠네.’
사실 이블이 걱정하는 부분은 다른 사람들도 충분히 이해했다. 오러 유저를 어댑터와 단둘만 자리하게 하는 건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특히 체체처럼 각성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댑터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무방비한 상태가 제일 위험했다. 이번만 해도 체체는 선뜻 취조를 허락하지 않았나. 결국 이블만 취조를 받게 되었지만….
위에서는 이블이 취조를 거부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고 말했지만, 취조해야만 하는 아랫사람들 입장에서는 다행인지 잘 모르겠다.
어댑터와 검사들은 난감하다는 얼굴로 서로 눈을 마주쳤다.
“잠깐.”
그때였다. 갑자기 이블의 눈빛이 변했다.
지루하게 그리고 다소 냉소적으로 자신보다 약한 것들의 표정 변화를 감상하던 악마가 갑자기 표정을 굳히고 물었다.
“체체, 지금 어디 가?”
“예?”
놀란 어댑터 하나가 무심코 되물었고, 이블은 손목에 아무것도 차지 않았던 것처럼 수갑을 끊으며 일어나 테이블을 발로 찼다. 벽에 부딪친 테이블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졌고, 어댑터는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정신은 잃지 않았으나 이마에서 피가 났다.
“지금 체체가 어디론가 움직이고 있어. 센터에서 나가서 차로 이동 중이야. 누구랑 이동 중인지는 몰라도 대화도 안 했어. 내가 목소리를 들을 테니까 말을 안 한 거겠지. 내가 직접 나가서 알아볼까?”
“제, 제가… 저희가 알아보겠습니다.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그들은 마치 좋은 기회라도 얻은 듯이 다친 어댑터를 데리고 서둘러 취조실을 빠져나갔다. 밖에서는 이미 체체의 위치를 알아보는 중이었다.
“통화 연결됐습니다. 지금 저택에 돌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이블 데빌이랑 같이 가야지 왜 벌써 가?”
“쉿, 말조심해요.”
그들은 재빨리 취조실 내부 감시 카메라 영상을 살폈다. 이미 이블은 이블 데빌이라는 호칭을 들었겠지만 가만히 서 있었다.
“전화 좀 바꿔 줘.”
“예.”
수화기를 든 노유저 검사가 어댑터에게 자리를 비켜 줬다.
“조나단입니다. 체체 유저?”
- 어댑터님, 제임스입니다.
“비서실장님, 체체 유저는 어디 있습니까?”
- 지금 앞에 있습니다만 무슨 일이십니까?
“왜 이블 유저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가셨죠?”
- 지금 네 시입니다.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났지요. 그리고 체체 씨에게 그 긴 시간을 기다리라고 하시는 겁니까? 건강이 약한 분이라 못 버팁니다.
“긴 시간이라니요.”
- 취조는 보통 몇 시간씩 하시지 않습니까.
그야 그랬다. 때에 따라서는 반나절을 이어 가기도 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보통 사람들에 한해서였다.
위에서는 사안이 사안인 만큼 열여섯 시간은 잡아 놓으라는 지시가 내려왔지만 이블을 취조하는 게 이번이 처음이어서 위쪽도 이블이 얼마나 인내해 줄지 예상하지 못했다. 검사들은 한 두어 시간만 한 뒤 보내 줄 생각이었다.
- 그리고 이블 이사님도 이걸 원하실 겁니다. 체체 씨가 따뜻한 저택에서 배부르게 밥을 먹고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자는 것 말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체체 유저가 멋대로 떠나셔서 화가 나셨습니다.”
“씨발, 나 화 안 났거든!”
그때 이블이 취조실 벽을 부수고는 구멍으로 얼굴을 내밀고 말했다. 파괴된 벽에서 부스러기가 후두둑 떨어졌다.
“화난 게 아니라 어디로 가는 건지 궁금했던 거야. 그렇게 사람 매도하지 마. 아늑한 우리 집에 돌아가 있으라고 해!”
“아… 죄송합니다.”
이블은 그 말을 외치고는 씩씩대며 돌아갔다. 휑하니 뚫린 구멍에서 찬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 이사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절대로 화가 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아늑한 집에 돌아가 계시라고도요.”
- 체체 씨, 이블 님 화 안 나셨대요.
제임스가 곧바로 체체에게 전달했다. 체체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때 어댑터 검사가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두 분께서 짧게 통화하셔도 됩니다. 통화하시겠습니까?”
어댑터가 주변 눈치를 보면서 그렇게 말하자 이블이 엄청 소란스럽게 반응했다. 쿠당탕탕 취조실 안에서 큰 소리가 들리고 이블이 다 부서진 수갑을 양 손목 위에 얹은 채 구멍 난 벽으로 상체를 내밀었다. 엄청 신난 표정이었다.
“영상 통화 할래.”
“…예….”
어댑터는 제임스에게 이블이 영상 통화를 원한다고 전달했다. 저쪽에서도 좋아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난감한 반응이 돌아왔다.
- 체체 씨가 원할지…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어댑터는 숨죽이며 전화 저편에 귀 기울였다. 체체가 뭐라고 하는지 들어야만 할 것 같아서였다. 신체 능력이 일반인보다 좋은 편인 어댑터의 귀에 허스키한 보이스가 들려왔다.
‘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주 작지만 분명 그렇게 들려왔다.
- 죄송하지만 전화 통화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곧 제임스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어댑터는 수화기를 든 채 이블을 쳐다봤다. 너무나 낙심한 얼굴이었다. 이블에게 강아지 귀나 꼬리 같은 게 달렸다면 양쪽 귀와 꼬리 모두 추욱 처졌을 것이다.
사탄도 명함을 주면서 딸랑딸랑할 악마 중의 악마 이블 데빌이 저런 의기소침한 표정을 지을 수도 있었던 건가.
“유감입니다….”
어댑터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 이블은 넓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취조실로 걸어 들어갔다.
‘싸웠구나….’
SSS 멀티 유저도 연인과 싸우고 나면 평범한 이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에 조금 우스워졌다.
물론 다시 취조실로 들어가 아까와 같은 상황을 되풀이할 때는 전혀 우습지 않았지만….
아무리 죽인 상대가 힘없는 약소국의 인물이라 해도 어쨌든 정상 회담이 이루어지는 장소에서 초대 국가의 수행원을 살해한 사건이었다. 알시티 정부와 센터의 권위를 위해서는 열여섯 시간쯤은 데리고 있어야 했다. 사람들은 이블이 한두 시간만 있어 주리라 예상했지만 체체에게 차여 기운이 없어진 이블은(그렇게 보였다는 뜻이다) 오랫동안 인내했다.
이블을 제외한 이들에게는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어서 이블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 줬으면 바랐지만 이블은 늦은 밤에야 힘없이 일어났다.
한밤중에 저택에 돌아온 이블은 제일 먼저 체체를 찾았다.
내가 자기 때문에 나쁜 짓을 저질렀다고 죄책감 병 도져서 구석탱이 바닥에서 자는 건 아닐까 걱정이 들었는데 기척을 느껴 보니 다행히 체체는 침대 위에 얌전히 누워 있었다.
숨소리와 체온, 심장 박동 등을 봤을 때 자는 건 아니었다. 체체는 어제도 잠들지 못했다. 마음이 복잡할 것이다.
차라리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며 마음이 불안하다는 티라도 내면 좋을 텐데 그러지도 않는다. 지금도 분명 이블이 도착했다는 걸 알았으면서 움직이지 않았다.
“고생하셨습니다, 이블 님. 어서 식사하십시오.”
푸짐하게 차려진 식사를 보며 이블이 힙스에게 물었다.
“쟤 밥은 많이 먹었어?”
“아뇨, 평소의 반도 못 드셨습니다.”
“씨… 어제도 못 먹었잖아.”
“예.”
“미치겠네. 나한테 화나서 단식 투쟁 하나 봐. 지가 어린애도 아니고 겁나 유치하지 않냐?”
단식 투쟁 전적이 있는 이블이 포크로 스테이크를 찌르며 씩씩댔다.
“지금도 지구 반대편에서는 굶주림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 가는데 무슨 단식 투쟁이란 말이야. 알 거 다 아는 성인이 이런 식으로 의사 표현하면 안 되지. 자기 건강만 손해야, 저건.”
여러모로 이블 데빌이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게다가 힙스가 생각했을 때는 단식 투쟁이 아니라 그냥 입맛이 없는 거였지만 구태여 말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블도 사실을 알면서 투덜대는 것이므로.
“아, 환장하겠다. 어떡해야 먹나.”
이블은 음식을 포크로 찌르기만 하고 입에 넣질 않았다. 어제도 그랬다. 그래도 예전에는 체체가 식사를 잘 못 해도 본인은 일 인분 이상 해치웠는데, 이제는 체체가 식사를 못 하면 이블도 수프 한 술 넘기지 못하는 것이다.
“뭐 좋은 생각 없어?”
“체체 님이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대화로 풀어 보는 게 어떠신지요.”
“…못 해.”
잠깐 생각하던 이블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이블은 고개를 저었다.
“못 하겠어.”
“왜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무섭잖아. 내가 고칠 수 없는 점 때문에 화가 났으면 어떡해….”
힙스는 그런 이블의 모습에 살짝 놀랐다. 그가 의기소침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마치… 연애가 어렵기만 한 스물두 살의 청년처럼.
주책맞게 코끝이 시큰거렸다.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억누르며 힙스가 말했다.
“사실 체체 님은 어제도, 오늘도 제 눈에는 그렇게 화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겠지. 걔는 나한테 화가 났지 너네한테 화가 난 게 아니니까.”
“보통은….”
힙스는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보통 사람들은 다른 문제로 화가 나도 이쪽에 성질을 부리고는 합니다. 화풀이를 하는 거죠. 우리는 ‘아랫사람’이니까 말입니다.”
이블이 코웃음을 쳤다.
“걔가 그런 머저리면 내가 사랑에 빠졌겠냐.”
무척 로맨틱한 말이었다. 그런데 이블은 그 말을 내뱉고는 갑자기 고민에 빠져 턱을 쓸었다.
“아니, 근데… 화풀이하는 모습도 겁나 귀엽긴 하겠다. 그 조그만 게 짹짹거리면서 스트레스 푸는 거 보고 싶긴 하네.”
“그, 이블 님.”
당장 체체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면서 화풀이해 보라고 할까 봐 힙스가 얼른 말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화난 티가 전혀 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아무리 표정 변화 없는 분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화난 게 아니라는 거야, 지금?”
“예….”
이블은 차갑게 비웃었다. 스물두 살 어린 청년 같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노유저는 좋겠다. 멍청해서.”
“…….”
“이럴 땐 멍청한 게 나아.”
이블은 결국 포크를 내려놨다. 몹시 빈정이 상한 듯했다. 힙스는 이블이 완전히 말도 못 붙일 정도로 화가 나지 않았다는 걸 알고서 다시 한번 말을 붙여 봤다.
“그럼 이블 님께서는 체체 님이 화가 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당연히 하나밖에 없지.”
분위기는 여전히 매서웠지만 살짝 풀죽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엇인지 알려 주시겠습니까? 같이 체체 님의 화를 풀 방법을 생각해 보죠.”
힙스는 평생을 살면서 이런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친아들인 제임스가 스무 살에 독립할 때까지 혼자 키웠는데, 그때도 연애 상담 같은 건 한 번도 해 본 적 없었다.
하물며 이블 엔덤이야….
이블은 아기였을 때 정말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적지 않은 나이를 살아오면서 본 아기들 중 가장 잘생긴 아이였다.
‘여러 사람 울리겠구나….’
자신을 향해 방긋방긋 웃는 갓난아기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있었다. 그러나 내가 모셔야 할 도련님이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에 연애 상담을 하리라고는 정말이지 기대도 하지 않았다. 이블이 SSS 멀티 유저로 각성한 뒤로는 아예 연애라는 단어는 머릿속에서 지워 두고 살았다.
“…내가… 잖아.”
이블이 중얼거리듯이 작게 말했다.
힙스가 가만히 기다리니 이블은 한 번 더 되풀이했다.
“내가 타르인을 죽였잖아.”
이블의 목소리에 억울함이 가득했다. 찌푸린 눈썹과 주름진 콧잔등, 표독스러워진 붉은 눈동자. 그리고 살짝 숙인 고개까지. 이블은 무척 억울한 것이다.
‘걔한테는 나보다 타르인이 소중해.’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게 너무 억울했다.
대체 타르인이 체체한테 해 준 게 뭐라고?
그 어린애를 영웅이라고 부추기며 온갖 부담감과 죄책감만 키우게 만들고는 정작 목숨이 위협받을 땐 나 몰라라 한 사람들이 대체 뭐가 좋다고.
“이블 님이 타르인을 죽이신 것 때문에 체체 님이 화가 났다는 말씀이시죠.”
“그래.”
이블은 아예 식사를 포기하고 물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하지만 그자는 죽을 만해서 죽은 거 아닙니까.”
“씨발, 당연하지! 그 쓰레기는….”
이블은 소리쳤다가 아차 싶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큰소리를 내 위층에 있는 체체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조심하는 것이었다.
이 저택은 방음이 상당히 훌륭한 건축물이고, 바로 위아래층이라고 해도 웬만큼 큰 소리가 아니고서야 들리지 않았다. 방금 전 목소리 정도는 큰 소리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블은 지금 그런 것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엔 소음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었고, 소음은 너무나 짜증 나는 것이며… 안 그래도 마음이 상했을 때 소음이 들려오면 더욱 화가 나기 때문에… 체체의 기분이 더 가라앉지 않도록 목청을 죽였다.
“죽어 마땅했어…. 체체도 알 거야.”
“그럼 왜 이블 님께 화가 나겠습니까. 쓰레기를 처리해 줬는데요.”
“자기가 처리하고 싶어 했으니까.”
이블은 머리칼을 거칠게 헤집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걔가 처리하고 싶어 하던 쓰레기를 벌써 두 명이나 죽여 버렸어.”
두 명.
힙스는 침을 꼴깍 삼켰다.
이블은 빌라인 제라도의 외교부 장관을 죽이지 않았다. 그 인간은 지병으로 죽었다.
그게 ‘공식적인 진실’이니 힙스도 그렇게만 알아야만 했다. 혹여 나중에 무심코 방금 이블이 너무 쉽게 뱉어 낸 사실을 발설하지 않도록 얼른 잊어버려야 한다.
“게다가 타르인을 죽인 것도 이번이 두 번째야.”
“…….”
힙스는 엄청나게 놀라며 이블이 또 언제 타르인을 죽였었나 얼른 기억을 헤집었다. 그러나 끝내 떠올리지 못했다.
이블이 말한 타르인 두 명은 정상 회담 날 죽인 쓰레기와 작년 산불 사건 때 죽은 타르인이었으니 힙스가 유추해 내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체체는 타르인이 타국인에 살해당하는 게 지긋지긋할 거야. 이젠 진짜 조심해야 해.”
“그렇군요….”
힙스는 첫사랑과의 다툼으로 고생하는 청년에게 물을 한 컵 더 따라 줬다. 이블은 바로 한 번에 들이켰다.
“체체 님의 화는 곧 풀릴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젠장, 네가 어떻게 알아. 네가 나보다 체체를 알아?”
“사랑을 하는 사람의 심리를 압니다.”
“…….”
힙스는 인자한 웃음을 머금었다.
“체체 님이 좋아하는 걸 선물하시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화해하시겠지만 시기가 조금 더 빨라지겠지요.”
이블은 자신의 결 좋은 금발을 헝클어 놓은 채 힙스를 쳐다봤다. 고민하는 이블의 모습은 보기에 참으로 흐뭇했다.
“좋아하는 거… 아, 그래. 타르로 국적 바꿀까.”
흐뭇은 무슨. 너무 극단적이잖아!
힙스는 식은땀을 흘렸다.
“일단 내일 아침에 센터 가서 사직서 내고, 전용기 되는 거 타고 타르 가면 되겠다. 집 지을 일꾼은 가서 구하면 돼. 아니면 씨, 그냥 내가 짓지 뭐. 내가 타르에 귀화하고 나면 내전은 자연스레 끝날 거고 체체도 편하게 살 수 있을 거야.”
힙스가 너무 황당해서 입만 뻐끔거리는 사이 이블은 제멋대로 이야기를 진척시켰다.
“걔는 나도 좋아하고 타르도 좋아하니까 좋아하는 거랑 좋아하는 게 합해져서 완전 좋겠네. 그래, 이거야. 이게 정답이었어.”
이블의 표정이 밝아졌다.
힙스는 생각했다.
사랑은 이렇게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것이던가.
“이블 님, 저는 그 방법은 비추천합니다.”
“뭐? 왜!”
힙스는 이블이 어느 나라 사람이든 따르기로 맹세했다. 하지만 일 년 내내 건조하고 더운 나라는 아니었으면 한다. 꼬부랑 할아버지가 살기에는 너무 불편한 환경이었다. 아무리 이블이라도 지구의 자전축을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니 무조건 힙스가 여기서 설득해야만 했다.
“이건 백 프로 먹힐 방법인데, 왜 비추천해?”
“백 프로 먹히니까, 입니다.”
힙스는 짐짓 엄격하고 근엄한 노인의 얼굴로 안경테를 한번 추어올렸다.
“이번처럼 타르 사람, 그것도 죽어 마땅한 쓰레기 한 명 죽인 일에 이런 좋은 방법을 소진해 버리지 마시고 아끼는 게 어떻습니까. 나중에도 분명 체체 님을 화나게 하는 사건이 있을 텐데 이 좋은 방법을 소모하면 그땐 어떻게 달래 드리려고요.”
“…….”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이블이 입을 다물었다.
“아, 물론 이블 님이 평생 화나게 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지금 사용하셔도 좋습니다만.”
“아냐. 난 분명 또 화나게 할 거야.”
이블은 다행히도 스스로에 대해 잘 알았다. 이블이 이건 킵해 놔야겠다고 중얼거렸다. 힙스는 웃는 얼굴 밑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그럼 타르에 일조 정도 기부할까. 아, 저번에 써먹은 방법인데. 이번엔 십조 해야겠다.”
이블은 곧바로 다른 방안을 찾았는데 그 역시 타르와 관련된 방법이었다. 게다가 액수가 심하게 컸다. 타르가 더운 나라고 뭐고 간에 집사로서 두고 볼 수만은 없는 낭비였다.
힙스는 다시금 인자하게 물었다.
“꼭 타르와 연관된 게 아니라도 괜찮지 않을까요.”
“걘 타르 말고는 관심 없어서 안 돼.”
“그렇다고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타르를 꺼내실 겁니까?”
“…그럼 어떻게 해?”
이블의 몸은 어느새 힙스 쪽으로 기울어졌다. 힙스는 살면서 처음으로 이블과 이렇게 오래 대화했다.
힙스는 사랑해 마지않는 악마 도련님이 스물두 살 먹은 손주라고 자기 세뇌 필터를 끼고는 말을 이어 갔다.
“의외로 정말 작고 소소한 것들도 환심을 살 수 있습니다. 꽃이나 직접 요리한 음식이나 사랑한다는 손 편지 같은 것들 말이죠.”
“토할 것 같은데.”
“체체 님은 소울 오러 유저십니다. 감성이 깊은 분이라는 걸 염두에 둬 주세요.”
“나도 소울런데, 심지어 체체보다 등급도 높은데 손 편지 쓴다고 생각하니까 진심 역겹고 토할 것 같아.”
진짜로 메스꺼운지 명치께로 손을 올리는 이블을 보고 힙스가 웃었다.
“만약 체체 님께서 이블 님께 손 편지를 써 주신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
이블이 눈을 크게 떴다.
“체체 님이 이블 님에게 예쁜 꽃을 선물해 준다면요? 그래도 역겹고 토할 것 같습니까?”
이블은 어깨까지 들썩이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체체 님이 직접 요리를….”
“그건 안 돼. 불이나 칼은 위험하니까.”
이블은 얼굴이 붉어진 채 말했다. 생일 선물에 대한 기대를 들키지 않으려는 어린애 같은 표정이었다. 이블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들겼다. 식어 가는 스테이크를 앞에 두고 일정한 박자로 두드리며 생각에 잠긴 이블의 옆에서 힙스는 감격에 젖었다.
이블은 잠시 후에 일어났다.
고민이 사라진 한결 개운한 표정이었다.
“내일 순후 주스 준비해.”
“예.”
“너 나이를 허투루 먹은 게 아니네.”
이블은 그 말을 남기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저 건방지기 짝이 없는 말을 풀이하면 이것이었다.
‘도움이 됐어.’
이블 식 고맙다는 인사였다.
힙스는 차분히 식기를 쟁반 위에 주워 담았다. 침착하게 별관에 가져가자 조마조마하게 기다리던 저택 사용인들이 한 점도 먹지 않은 스테이크를 보고 절망에 빠졌다. 소리 없이 비통한 표정만 지은 그들에게 힙스는 방금 전 있었던 일을 말했다. 저택 사용인들은 재빠르게 회복해 케이크를 구웠다.
오븐에 들어간 케이크를 기다리는 동안 힙스는 제임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 뭡니까, 이 시간에. 노망났습니까?
“도련님이 내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 …….
힙스는 말을 마치고 툭 전화를 끊었다.
제임스는 그날 밤 시기와 질투로 인한 복통에 시달려야 했다.
***
체체는 머리가 어지럽고 마음이 복잡했다. 안 그런 날이 드물긴 했지만 요 며칠은 더욱더 심란해졌다. 저택에 온 뒤로 많이 나아졌던 기분은 다시 끝없이 침잠해 갔다. 카론이 얘기한 삼 주가 끝날 때까지 계속 이 상태일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체체의 기분이 어떻든 간에, 밤은 지고 해가 뜬다.
밤새 자지 못한 체체는 피곤한 눈가를 비비며 나오다가 복도에 뿌려진 꽃잎을 발견했다.
“…….”
체체는 잠시 맞은편 이블의 방문을 쳐다보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꽃잎은 하얀색이었다. 체체는 하나하나 주우면서 꽃잎 길을 따라갔다. 꽃잎은 복도 끝까지 이어졌고, 마지막 종착지에는 분홍색 편지 봉투가 놓여 있었다.
체체는 착잡한 마음으로 그것을 주워 들었다.
편지를 줄 거면 꽃잎은 왜 뿌렸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봉투에서 종이를 꺼냈다. 체체의 손바닥만 했다.
시종 건조하던 체체의 표정은 종이에 적힌 글자를 보고 크게 흔들렸다.
알시티어가 아니라 타르어였고, 아주 잘 쓴 글씨체였다.
안녕, 체체.
넌 소심해.
아니야. 넌 사실 용감해.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제일 멋있어.
화내지 말고 밥을 먹어.
다시는 타르인 안 죽일게.
그 새끼는 진짜 쓰레기였어.
너는 나를 용서해.
네가 밥을 먹지 않으면 걱정된다.
넌 귀여워.
함께 아침밥 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