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4권] (9/17)
  • 체체는 한 달의 휴가가 끝나고 2월 초부터 세공사로서 본격적으로 업무를 시작했고, 그로부터 한 달 동안 세 개의 홀리아젬을 만들었다. 모두 창작이 아니라 외주품이었다.

    체체는 몰랐지만 첫 번째와 두 번째 클라이언트는 이블이었고, 세 번째 클라이언트는 엔덤 가문 가주 부부였다. 그리고 오늘 새로 들어온 네 번째 클라이언트는 알시티 정부 공공복지 부서로, 체체의 홀리아젬을 기부 문화 활성화를 위한 광고로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이블은 체체의 홀리아젬을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욕심을 뒤로하고 결재를 내렸다.

    정부가 의뢰한 홀리아젬은 서사가 있는 것으로, 후원을 받고 자란 아이가 어른이 된 후 또 다른 어린아이에게 후원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완성된 홀리아젬은 대통령 관저의 공개 정원 한가운데에 비치될 예정이었는데, 이블은 상시 가드를 두어야 한다는 조건으로 허가했다.

    센터에서 고글을 쓴 채 루젬 세공을 하고, 퇴근 후에는 이블과 전시회를 가거나 공원을 거닐다가 저택에 와서 세공 작업실에 바로 처박히는 게 요즘 체체의 일과였다.

    “야, 넌 집에 와서도 바로 세공이냐. 아주 푹 빠졌네.”

    체체를 졸졸 따라온 이블이 투덜거렸다.

    “이블 님도 하세요.”

    “어우, 귀찮아.”

    “화산 가기 전에 세공하던 거 마저 하셔야죠.”

    “그래, 그래. 해야지.”

    대답은 하면서도 고글도 쓰지 않고, 장갑도 착용하지 않았다. 체체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고글과 장갑을 착용했다. 이번 것은 이블이 주문 제작한 것으로 벨트가 아닌 모자 형태였으며 모자에는 고양이 귀가 달렸다.

    체체는 이블이 온갖 귀여운 걸 가져와도 다 건조하게 받아 들었다. 어차피 고글은 루젬 세공 때만 사용하고 홀리아젬으로 만드는 과정에서는 벗을 때가 많았다.

    “오늘은 이거 써 봐. 완전 귀엽지.”

    체체가 갈색 엔드스틱을 꺼내자 이블이 얼른 다른 스틱을 꺼내 왔다.

    손잡이 부분에 하얗고 조그만 날개가 양쪽으로 달리고, 기둥에는 별 모양이 새겨졌으며 맨 끝은 꽃봉오리 같은 형태로 마감된 스틱이었다. 체체는 그것을 받고 이블이 나간 사이 상자에 넣어 선반 맨 아래쪽 구석에 숨겨 놨었다.

    “…….”

    이블이 원한다면 사용하지 못할 건 없었다.

    체체가 받아 들자 이블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블의 웃음은 그 어떤 꽃보다 아름답고 눈부셨다. 체체는 조금 미소를 머금었다.

    아직 웃음을 멈추지 못한 이블이 사진을 찍어 대는 것까지 언제나와 같은 일상이었다.

    ‘일상….’

    체체의 표정이 굳었다.

    내가 방금 ‘일상’이라고 생각한 거야?

    언제부터 이게 내 일상이었어.

    체체는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기 전에 얼른 세공에 착수했다.

    이블은 이미 알아챘을지도 모르지만….

    “야.”

    이블이 툭하니 말했다.

    “넌 은근히 감정 기복이 크더라.”

    세상에서 가장 감정 기복이 큰 SSS 소울 오러 유저가 하는 말이었다.

    “이사님보단 적습니다.”

    “아니야, 나보다 더 심한 것 같아. 틈만 나면 우울해지잖아. 나라 잃은 사람처럼.”

    “…….”

    “너네 나라 아직 안 망했어. 걱정 그만해. 죄책감도 그만 가져. 또 갑자기 뭐 때문에 그런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블은 옆 의자에 걸쳐진 체체의 크로스 백을 자연스럽게 가져가고는 그 안에서 약 봉투를 꺼냈다.

    “저녁 약 먹어야지.”

    “저는 건강합니다.”

    “너 여기 벽 주먹으로 부술 수 있어?”

    “…아니요.”

    “약해도 너무 약해. 벽도 못 부수는 힘으로 어떻게 이 험난한 세상을 사냐.”

    이블은 물컵에 물을 따르고 한 회 분량의 약 봉투를 체체에게 건넸다. 체체는 약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이블은 체체가 약을 삼키는 것까지 확인하고는 여봐란듯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야, 너는 좋겠다.”

    “…….”

    “왜냐고 물어봐, 빨리.”

    “왜요?”

    “너는 약을 한입에 먹을 수 있잖아. 나도 널 한입에 먹고 싶은데. 그렇다고 진짜로 털어 먹었다간 네 몸이 남아나지 않을 거 아니야. 참느라 미치겠어.”

    “…….”

    이블은 골치가 아프다며 머리를 감싸 쥐고 한참을 한숨만 쉬었다. 체체는 엔드스틱을 어정쩡하게 든 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한참 후 이블이 서운하다는 투로 말했다.

    “왜 한 마디도 안 해. 뭐라고 좀 해 봐.”

    “…저는… 몸이 남아날 수도 있습니다. 해 보면요….”

    “안 된다니까, 이 뱁새야. 내가 세계 역사서 다 뒤져 봤거든? SSS 모셔너에 대한 연구 기록도 다 봤는데 존나 어려울 것 같아. 흥분할수록 조절을 못 하고 그러면 너 뼈 부러질 수도 있어.”

    역사상 SSS 모셔너는 이블 하나뿐이니 SSS 모셔너에 대한 연구 기록이래 봤자 결국 이블에 대한 연구 기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당연히 조절을 못 한다고 기록되었다. 이블은 언제나 절제해 왔는데도 말이다.

    “괜찮습니다.”

    “뭐가 괜찮아. 완전히 나한테 미쳐 가지고 아주….”

    이블은 쓱 일어나더니 체체의 머리칼을 툭툭 쳤다.

    “그러니까 몸도 마음도 얼른 건강해지자. 알았지? 어쨌든 하기는 해야 하니까. 안 할 수는 없잖아.”

    “…….”

    근사하게 웃어 보이는 미남자를 향해 체체는 조그맣게 대답했다.

    네… 안 할 수는 없지요….

    정상 회담을 이틀 앞두고 각국의 정상들이 알시티로 모이는 시점, 마한빈야에 대형 모래 폭풍이 발생했다. 그곳은 본래 사막이었고, 수시로 모래 폭풍이 이는 지역인데 일 년에 두어 차례 굉장히 큰 모래 폭풍이 일어나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는 했다. 체체가 이블의 비서가 된 후에도 한 번 대형 모래 폭풍이 있어서 이블이 직접 나간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모래 폭풍이 예측되자마자 가장 먼저 센터로 연락이 왔다. 물론 이블 엔덤을 향한 요청이었다.

    “당연히 가야지. 체체야, 가자!”

    이블은 기다렸다는 듯이 체체를 옆구리에 끼고 달려갔다. 작년과는 아주 다른 모습이었다. 그때 이블은 산불 사건 클레임 시민이 자살하기 전까지는 그 어떤 재난에도 도와주지 않을 것처럼 굴었다. 그때 이블을 변하게 한 사람도 체체였다.

    이블은 마한빈야까지 가면서 내내 체체에게 내 멋진 모습을 잘 감상하라고 떠들어 댔지만, 막상 현장에 도착하자 체체를 마을의 가장 안전한 곳에 두고 혼자 모래 폭풍이 불어오는 사막으로 떠났다.

    마한빈야 사람들은 햇볕에 그을려서인지 체체와 비슷한 피부색이었다. 체체의 방문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경호원에게 둘러싸인 체체를 훔쳐봤다. 체체는 이블이 돌아오면 가장 먼저 맞이하고 싶어서 바깥에 나와 있으려고 했으나 너무 시선이 몰리자 경호원들에게도 폐 끼치는 것 같아서 마을의 유일한 호텔로 들어왔다.

    호텔의 최고층부터 아래 열 개 층까지 모두 이블과 체체를 위해 비워졌다. 외부 전경이 그대로 보이는 통유리 창이었다.

    체체는 의자를 끌어다 앉아 이블이 향한 곳을 멍하니 바라봤다. 아주 멀리 모래 폭풍은 보였으나 이블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핸드폰이 지잉, 진동음을 냈다. 기다리는 연락이 있는 체체가 얼른 핸드폰을 꺼내자 처음 보는 번호로부터 전화가 오고 있었다.

    “네, 체체입니다.”

    체체는 일단 알시티어로 전화를 받았다.

    - 체체.

    “누구십니까.”

    - 내 목소리를 잊었소?

    타르 말이었다.

    가래 끓는 듯한 낮은 목소리에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사밀라.”

    반군 수장 사밀라 칼타아제였다.

    살짝 긴장이 풀렸던 정신이 확 들었다.

    체체가 알시티에 온 뒤로 타르에서 공식적인 연락이 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블의 비서가 되고 S급 소울 오러 유저로 각성한 후에도, 선행상을 받고 빌라인 제라도의 악어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져도 타르 정부는 체체에게 연락해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반군도 마찬가지였다.

    반군에게는 체체의 전화번호를 알아낼 방법이 충분히 있었는데, 존 게일을 통해서만 말을 걸어올 뿐 체체에게 직접 연락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밀라와 대화하는 건 거의 2년 만이었다.

    - 이제 체체 유저라고 불러야겠지. 이것 참 오랜만이오.

    “무슨 일 있습니까?”

    둘은 타르어로 대화를 나눴다.

    - 일이야 항상 있지… 그대도 알지 않는가.

    “무슨 일로 연락하셨어요.”

    체체는 딱딱하게 용건만을 물었다.

    - 나도 타르를 버린 자에게 연락하고 싶지 않소. 다만 기자님의 위치가 꽤 오랫동안 불명이라서 말이야….

    존 게일. 사밀라도 그가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뜻이었다. 그건 굉장히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기자님과는 저도 연락이 끊어진 지 오래입니다.”

    - 언제부터?

    “작년 말부터요. 마지막 연락 때 당신이 저와 손잡고 싶어 한다고 전했습니다.”

    사밀라는 앓는 소리를 냈다.

    수십 년간 반군에서 활약해 수장 자리를 꿰찬 사밀라는 체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사밀라는 정부군을 구하기도 하고 반군을 구하기도 하는 체체를 ‘어린 박쥐’라고 부르고 다녔다.

    사밀라의 사상에 중립이란 건 존재하지 않았고, 그건 강한 자의 편이나 마찬가지라고 여겼다. 반군을 떠나 정부군에 붙었던 체체가 다시 반군으로 돌아왔을 때 사밀라는 체체를 불러 어디에 뜻이 있는지 확실히 정하라고 말했다.

    ‘타르에 평화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뿐이에요.’

    ‘그럼 반군으로 오시게.’

    ‘…….’

    ‘그대는 확실하게 위치를 정해야 하오. 마음 가는 대로만 행동하기에 그대는 너무 많은 타르인들의 신뢰를 얻고 있으니….’

    당시 타르 국민들 사이에서 체체의 인기는 정부와 반군 그 어느 쪽보다 더욱더 높은 상태였다. 체체가 가는 곳이 이 기나긴 내전의 승리자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사흘의 시간을 주겠소. 정하지 않겠다면 적으로 간주할 테니 알아 두시오.’

    그 사흘간 체체는 끝내 입장을 정하지 못했다. 정부군에 서나 반군에 서나 어쨌든 전쟁이었다. 체체는 전쟁 그 자체를 중단하기를 원했다. 타르는 힘을 합쳐서 빌라인 제라도와 싸워야 했다. 하지만 정부군과 반군의 대립은 어린 체체로서는 짐작하지도 못할 만큼 깊었다.

    편을 결정하지 못한 체체는 나중에는 정부군과 반군 모두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고, 존 게일의 도움으로 거처를 옮기며 살던 그때 알시티에서 연락이 왔다….

    그렇게 탈타르인 신분이 되었으며, 일 년이 더 지난 후에는 이블 엔덤의 비서가 되었다.

    체체는 사밀라가 자신을 처리하려고 했던 이유를 잘 알았다.

    체체는 타르인들에게 너무나 인기가 많았으며, 체체의 말 한마디로 신념을 바꿔 버릴 민간인들도 너무나 많았다.

    한때 정부군 소속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대로는 위험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밀라를 경계해 온 체체와는 달리 존 게일은 사밀라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고는 했다.

    ‘사밀라는 괜찮은 사람이지. 훌륭한 리더이고… 잘 고민해 봐.’

    연락이 끊기기 전 마지막에 남긴 말도 그것이었다.

    - 악어가 기자님을 감금했던 것은 아닌가.

    “아닙니다. 제가 소울 오러로 확인했습니다.”

    - 소울 오러라….

    사밀라가 침음했다. 그녀는 체체가 존 게일의 행방을 모른다는 정보를 얻었으면서도 전화를 끊지 않았다.

    체체는 멍하니 창밖을 보며 물었다.

    “여전히 저와 손잡고 싶으신가요?”

    - 그야… 아니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지….

    사밀라는 자조적으로 말했다.

    - 그대는 탈타르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타르인들의 희망이자 영웅이오. 나로서는 답답한 일이지만… 우리 반군은 민간인들에게 적의 적일 뿐 그들의 편으로 여겨지지 않소. 우린 민간인들의 병원이나 학교를 공습한 적도 없는데도 말이지. 그러나 체체, 그대는 탈타르를 하더라도 모든 타르인들이 구원자라고 여기니 어찌 탐나지 않을 수 있겠나. 심지어 그대는….

    사밀라의 목에서 끓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나이가 적지 않았고, 여기저기 아픈 곳이 많았다.

    - S급 소울 오러 유저로서 각성까지 했으니….

    더욱더 중요한 사람이 된 것이다.

    탈타르 했음에도 말이다.

    - 그대는 여전히 마음이 없는가?

    “…….”

    체체는 대답하지 못했다.

    - 정말 여전히 멍청하고 답답하군. 대체 왜 그대를 보고 겁쟁이가 아니라 영웅이라고 하는지 모르겠소!

    사밀라가 한바탕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조금 후에 사밀라는 비난하는 투로 물어 왔다.

    - 그대는 계획이란 게 있긴 하오? 그 중립이라는 허무맹랑한 주장에 대체 무슨 계획을 세우는 거요? 알스마인 렙테로를 죽이고, 그다음은?

    “그자는 지병으로 인해 죽었습니다.”

    - 지병 같은 개소리는 그만두시오.

    그녀는 아주 울화통이 터져 죽겠다는 듯 목청을 높였다.

    - 다비즈 인더스트리가 우리에게 군수 물자를 지원해 주기 어려워졌다고 전해 왔소. 이것에 대해 모른다고 말하지는 않겠지.

    체체는 핸드폰을 귀에 댄 채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지끈거렸기 때문이었다.

    - 중립이면 중립으로나 있든가 왜 괜히 다비즈를 들쑤셔 무기 조달을 못 하게 막는단 말이오. 알스마인 렙테로는 죽이고, 우리의 무기는 끊어 버리고. 대체 그대의 계획이란 게 무엇이오.

    체체는 두통 때문에 미간을 살포시 찌푸린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구석으로 향했다. 넓은 침대와 소파를 놔두고 구석의 바닥에 앉아 관자놀이를 꾸욱, 꾹 눌렀다.

    “사밀라.”

    체체는 유리창을 바라봤다. 모래바람이 불어왔다.

    “저는 타르를 나와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전화기 저편에서는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사밀라는 체체를 좋아하지 않았고 항상 답답해했다. 체체는 사밀라에게 목숨을 위협당한 적도 있었다.

    “타르는 아주 작은 곳입니다.”

    -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거요.

    “타르는 알시티의 도시 하나만큼도 되지 않는 아주 작은 나라이고, 그곳에서 패배를 거듭하며 싸우는 반군은 소규모 단체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말 작은 나라에서 목숨을 걸고 전쟁을 일으켜 봤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사밀라, 오늘은 또 몇 명이 죽었나요?”

    사밀라가 숨을 들이켰다.

    이제 이명까지 들려왔다.

    ‘머리가 아플 때는 참지 말고 바로 먹어. 참으면 병 되는 거래. 아프면 그 즉시 바로 먹어야 돼.’

    이블이 그렇게 말하며 약통을 전해 줬었는데, 크로스 백 안에 들어 있는데. 체체는 의자 위에 있는 크로스 백까지 갈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희생해 봤자 아무도 관심 없습니다. 이런 작은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 같은 건.”

    알시티에는… 자리에 앉아서 전화 한 번으로 세계적 군수업체의 무역을 끊어 버리는 존재도 있는데.

    그에 비해 타르는 정말 작은 나라였다.

    수십 년이나 계속된 내전으로 타르의 모든 곳은 폐허로 변했다. 무덥고 건조한 곳에서 그들만의 문화를 꽃피우며 살아가던 사람들은 이제 없다. 타르는 계속 구르고 깎여 나가고 작아지기만 했다.

    체체는 타리다가 전화 한 통으로 다비즈 그룹의 무기 지원을 끊어 낼 때 생각했다.

    알시티인들에게 타르인은 살아 있는 걸까.

    이렇게 먼 나라에서 하루에도 수백 명씩 죽어 버리는 사람들을 그들이 보기에 이 세상에 ‘살아 있었다’고 할 수 있을까.

    지구 반대편의 일은 결국 지구 반대편의 일일 뿐이다.

    - 그래서 뭐 어쩌자는 것이오. 어차피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니 손 놓자는 말은 아니겠지.

    “그게 아닙니다. 저는….”

    체체가 하고 싶은 말은.

    이제 우리들끼리는 그만 싸워도 된다는 뜻이었다. 이 작은 나라에서 서로를 죽이는 일은 그만하자고 말하고 싶었다.

    알시티는 어떠한 명분만 찾으면 빌라인 제라도가 타르에서 손 떼게 해 주겠다고 말했다. 이 얘기를 사밀라에게 한다면, 사밀라는 타르 내외에 흩어진 반군을 총집합시켜 대규모 전쟁을 대비할 것이다. 빌라인 제라도라는 뒷배가 없는 정부군과 다비즈 인더스트리의 군수 물자 지원이 없는 반군의 전쟁.

    그 전쟁은 비등하게 전개될 것이며, 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을 것이다.

    체체는 그런 건 바라지 않았다.

    정부군과 반군 사이는 골이 아주 깊어 어느 한쪽이 완전히 파멸하지 않는 이상은 절대로 평화를 협정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기 때문에 사밀라에게 더 이상의 얘기는 하지 않았다.

    - 그대는 변했군. 평화가 그리 달콤하던가.

    그렇다 보니 체체가 내뱉은 말은 사밀라에게는 꼭 ‘이제 다 그만두자’로만 들렸다. 아주 오해하기 쉬운 말이었다.

    실망감이 가득 담긴 목소리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사밀라는 혀를 차며 말했다.

    - 됐소. 우리도 싫다는 사람 붙잡고 싶지 않으니 그대는 ‘중립’으로 정했으면 계속 중립이나 유지해 주시게.

    “정부군에는 절대 들어가지 않을 겁니다.”

    - 당연히 그래야지.

    “기자님의 위치를 찾으면 제게도 연락해 주세요.”

    - 뭔 내 부탁은 들어주지도 않으면서 바라는 게 많구만.

    사밀라는 툴툴거렸다. 이 상황이 몹시 답답한 듯 한숨을 연거푸 내쉰 그녀는 끊기 직전에 말했다.

    - 사실 그대는 어차피 ‘중립’을 유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오. 정부군은… 그대를 제거하기로 했으니.

    “…….”

    그 또한 존 게일에게 들은 바가 있었다.

    S급 소울 오러 유저로 각성하면서 더욱 위험해진 ‘어린 영웅’이 적의 손에 넘어가게 정부군이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그들은 체체를 자신의 편으로 포섭할 의지 따위 없으며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발탄처럼 제거하려는 생각뿐이었다. 정부군은 체체를 죽이려고 하고 카론은 체체가 살해당하기 전에 납치하려고 하지만, 체체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이와 스물네 시간을 함께하기 때문에 그들의 시도는 모두 부질없는 것이었다.

    - 이제 그대와 타르의 일을 논의하는 상황은 오지 않겠지.

    “…….”

    - 몸조심하시오.

    사밀라는 차갑게 안부를 전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체체는 힘없이 팔을 내렸다. 핸드폰이 손에서 굴러떨어졌다.

    “몸조심하세요.”

    듣는 사람이 없는 인사는 조용히 흩어졌다.

    사밀라에게 ‘해볼 만한’ 전쟁을 준비하게 할 수는 없었다.

    체체는 무릎을 모았다.

    바깥에서는 모래바람이 불고 있었다.

    ***

    이블은 약 여섯 시간 만에 돌아왔는데, 하필 돌아온 타이밍이 좋지 못했다. 체체는 그때 욕실에서 물을 틀어 놓고 주저앉아 있었다. 이블은 멀리서부터 욕실의 물소리를 듣고 빠르게 날아왔다.

    “야!”

    이블은 문을 부숴 버리고는 우당탕탕 욕실로 들어왔다. 체체는 욕실 벽에 기댄 채 앉아 있었고, 상체는 거의 물에 젖었다.

    이블은 후다닥 체체를 품에 끌어안고 어깨를 다독였다.

    “너 뭐 잘못 먹었어? 왜 토해? 무슨 일 있었어? 어디가 안 좋아? 아픈 곳이 어디야? 더 토하고 싶어? 등 두드려 줄까?”

    쏟아지는 질문 속에서 체체는 흐리게 웃음 지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하지 마.”

    이블은 안절부절못하며 체체를 부둥켜안고 일어났다. 체체의 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이블의 옷까지 젖었지만 그런 건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아니, 자신까지 젖는다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는 우선 체체를 욕실에서 꺼내고 부드러운 타월로 물기를 훔친 뒤 가운을 들고 왔다.

    “나 뒤돌아 있을 테니까 옷 갈아입어.”

    “…….”

    “그 옷 젖어서 안 돼.”

    “…….”

    “갈아입으라니까. 감기 걸려.”

    “뒤돌아 있겠다면서요.”

    이블은 한 발짝 물러난 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체체가 말하자 이블은 존나 칼 같네, 하며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고는 뒤를 돌았다.

    체체는 젖은 옷을 벗고 가운을 걸쳤다. 너무 크고 헐렁해서 끈을 조여도 가슴이 훤히 드러났다. 다갈색 피부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욕실과 침대는 열 걸음 정도 떨어졌는데, 이블은 체체를 번쩍 안아 들고 침대까지 옮겼다. 조심스럽게 앉힌 후에는 체체의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 열을 쟀다. 분명 물기는 찼는데, 체온은 조금 높았다.

    “야, 너 이러다가 또 감기 걸리는 거 아니야?”

    “안 걸립니다.”

    “감기 진짜 무섭다. 대체 반년 사이에 몇 번을 걸리는 거냐. 약은 먹었어?”

    “아니요.”

    이블은 염력으로 크로스 백을 가지고 왔다.

    약통의 알약 개수를 빠르게 헤아린 이블은 체체가 정말 단 한 개의 약도 먹지 않았다는 걸 알고(여섯 시간 동안 먹었어야 했던 약이 세 종류나 됐다) 욕을 내뱉었다.

    “너, 씨발, 내가 좋은 일 하러 간 사이 이딴 식으로 네 몸 자해하면 나도 앞으로 좋은 일 안 할 거야.”

    “자해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자해야!”

    이블은 마구마구 욕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버럭 소리 지르고 싶고, 침대고 샤워기고 뭐고 다 때려 부수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차차 알면 된다. 답답하고 짜증 나는 거? 그거야 내 감정이다. 내가 답답하고 짜증 나는 거고… 체체는.

    넓은 침대 위에 하얀 가운만 걸친 채 덩그러니 앉은 내 작은 뱁새의 상처받은 마음은 내가 짜증을 낸다고 해서 나아지지 않으니까.

    이블은 참았다.

    그는 물컵에 찬물과 뜨거운 물을 섞어 미지근한 온도를 맞추고는 체체에게 알약 세 종류 총 다섯 개를 내밀었다.

    체체는 순순히 받아먹었다.

    이블은 체체의 목울대 아래를 쳐다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눈가가 조금 붉었는데, 설마 운 건가 생각하는 사이 이미 손가락이 붉은 눈가를 쓸고 있었다.

    “아프지 마. 나 칭찬 들어야 하는데 너 때문에 못 듣고 있잖아.”

    “…해 드릴게요.”

    “닥쳐, 그냥. 나중에 너 기분 괜찮아지면 그때 열 배로 칭찬해 줘.”

    이블은 체체의 발치에 앉아서 하얀 가운으로 덮인 허벅지 위에 머리를 기댔다.

    “거지 같은 인간들 구하느라 귀찮은 짓 하고 왔는데 네가 이 모양 이 꼴이면 내가 또 인간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 들겠어?”

    “들겠어요.”

    “알고는 있었지만 진짜 겁나 뻔뻔하다.”

    그러자 체체가 겨우 웃음을 보였다.

    “이블 님에게서 찬 공기가 느껴집니다.”

    “하늘 위에 있다 왔으니까. 모래는 단 한 톨도 안 맞았어. 깨끗해.”

    이블이 머리를 비비자 작은 손이 부드럽게 머리를 쓸어 왔다.

    지금 위로받아야 하는 건 체체인데 오히려 체체가 위로를 해 주는 듯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블은 체체가 이렇게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는 걸 알았다.

    SSS 오러 유저여서 다행이지.

    저주 같기만 했던 이 능력이 체체를 만나고부터 좋아지기 시작했다. =체체의 감정이 느껴진다는 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다른 평범한 이들과는 달리 표정으로는 거의 감정이 드러나지 않으니까.

    이블은 체체가 자신의 머리를 마음껏 쓰다듬게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체체는 오래가지 않아서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체체가 옷을 갈아입기 위해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자마자 이블은 크로스 백을 뒤져 핸드폰을 꺼냈다.

    통화 기록에는 특별한 수신 기록이 없었다. 메시지도 마찬가지였다.

    내 뱁새가 통화 기록을 삭제하는 방법을 터득한 모양이다. 정말 귀엽고 앙큼하지.

    이블은 피식 웃으며 인터넷 창을 켰다. 인터넷 검색 기록에는 두 개가 추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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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형 모래 폭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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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래 폭풍 오러 유저 위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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