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17)
  • 이블이 벌르파에서 돌아오고 사흘쯤 지났을 때, 빌라인 제라도에서 알스마인 렙테로의 사망 소식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그들은 알시티 정부에 얘기했던 대로 선행상 시상식 연회장에서 이블이 오러를 사용한 바 있다고 밝혔으며, 그 뒤부터 사경을 헤맸다는 설명까지 추가했다.

    연회장에는 수많은 목격자가 있었고 그중엔 어댑터들도 있었으나 누구도 빌라인 제라도의 편을 들어 주지 않았다. 알시티의 압박을 받은 나라들은 그저 침묵으로 의사 표현을 했다. 누구나 그것이 이블의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누구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며칠간 센터 분위기는 팽팽하게 당겨진 실처럼 아슬아슬했다. 이블의 눈치를 보느라 다들 발뒤꿈치를 들고 걸어 다닐 정도였다. 그가 감히 자신을 거론하는 빌라인 제라도에게 상당히 분노했을 거라는 추측이었는데, 사실 이블은 자신의 사랑스러운 뱁새와 달콤한 연애를 즐기느라 그런 문제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엔덤 가문과 알시티 정부가 어떻게 뒷공작을 펼치는지도 신경 쓰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그걸 다행으로 여겼다.

    「기자 회견에는 직접 나와 주셔야 합니다. 체체 씨만 믿을게요.」

    체체의 핸드폰에 이른 아침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제임스가 보낸 것이었다.

    이블이 신경을 쓰든 안 쓰든, 해명 기사는 내야 한다. 살면서 단 한 번도 해명이란 걸 해 본 적 없는 이블 엔덤을 기자 회견장까지 이끄는 일은 체체가 맡았다. 체체가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었다.

    “오늘 세 시라고?”

    “네.”

    “그냥 가서 내가 한 짓이 아니다, 억울하다. 이렇게 말하라는 거지?”

    “네.”

    “알았어. 어렵지 않네.”

    이블은 사람들의 예상과는 반대로, 그리고 체체의 예상대로 쉽게 기자 회견을 결정했다.

    체체는 제임스에게서 기자 회견 때 발표할 내용을 받아 왔다. 이블은 체체의 앞이라고 읽어 보는 시늉을 했지만, 내용은 기억하지 않았다.

    기자 회견 예정 시간은 오후 세 시.

    십 분 전에 도착한 프레스 룸 대기실에서 이블은 체체의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제임스와 줄리아는 물론 엔덤 가문의 대외용 비서까지 있는 공간이었지만 거리낌 없이 손을 주물럭거렸다.

    “넌 어떻게 생각해? 내가 진짜 죽였을 것 같아?”

    그 물음에 체체는 다른 이들을 살폈다.

    “우리는 나가서 기다리겠습니다.”

    가장 눈치 빠른 제임스가 다른 비서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나가기 전에 손목을 툭툭 두드리며 제발 시간만 잘 지켜 달라고 애원했다.

    모두 나가고 둘만 남은 후 체체가 대답했다.

    “네.”

    “내가 죽였을 것 같다고?”

    “네, 죽이셨잖아요.”

    “…….”

    이블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을 잃었다. 체체의 금색 눈동자는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그럼… 왜 화 안 내?”

    “제가 화내야 합니까.”

    “네가 죽인다고 했는데 내가 죽였잖아.”

    “괜찮아요.”

    체체는 이블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죽이고 싶으셨던 거잖아요. 이블 님이 원한 일이라면 전 괜찮습니다.”

    알스마인은 죽어 마땅한 자였다. 이블은 악인을 처벌했고, 그 이유는 자신 때문이다. 체체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야, 체체. 너 이제 큰일 났다.”

    즐거움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이블은 체체를 자기 위에 앉히고 마주 봤다.

    “넌 내가 살인을 했는데도 괜찮다고 말하잖아. 날 너무 좋아해. 날 너무 좋아해서 도덕적 기준이고 뭐고 없어진 거야.”

    “악어는….”

    “그 새끼가 아무리 죽어도 싼 쓰레기였다고 해도 말이야.”

    이블은 너무 기분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체체를 품에 안고 키스를 퍼부으며 말했다.

    “빨리 집에 가고 싶다. 너랑 둘만 있고 싶어. 너는 안 그래?”

    “…….”

    체체는 동의의 표현으로 이블의 목에 팔을 두르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하, 미친. 너무 귀여워.”

    이블은 참을 수 없어서 발을 동동 구르다가 체체를 끌어안지 않은 다른 쪽 팔로 뒤쪽 벽에 주먹질했다.

    쾅, 소리가 들리고 곧 콘크리트 벽이 부서졌다.

    “…….”

    체체가 고개를 들고 휑하니 뚫린 구멍과 이블의 주먹을 번갈아 보았다.

    체체도 놀라고 이블도 놀랐다.

    구멍 사이로 찬바람이 새어 들어와서 일단 이블은 벌떡 일어나 체체에게 외투를 입혔다.

    “야… 부실 공사인가 봐. 그냥 툭 쳤는데….”

    “무슨 일입니까!”

    문이 벌컥 열리며 제임스가 들어왔다. 제임스는 구멍 뚫린 벽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체체에게 외투를 입히는 이블을 보고 입을 쩍 벌렸다. 그에게는 꼭 기자 회견을 거부하고 저 구멍을 통해 탈출하려는 것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제임스의 뒤쪽으로 등장한 비서들도 다 똑같은 생각을 했다.

    “시간 됐네요.”

    그 와중에 체체만 침착했다. 체체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이블의 팔을 붙잡았다.

    “기자 회견에 가세요, 이사님.”

    “응.”

    이블은 화분을 실수로 넘어뜨리고 주인의 눈치를 보는 강아지처럼 순순히 대답하며 체체의 뒤를 따랐다.

    “우, 우리도 얼른 가지.”

    “네….”

    당황했던 비서들도 서둘러 따라갔다.

    ***

    프레스 룸은 역대 최고로 붐비는 상태였다. 테이블이 부족해 팔에 노트북을 얹어 놓은 기자들부터 사다리 계단에 올라가 무거운 카메라를 두 손으로 든 기자들까지.

    이블이 사람을 죽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올해로 고작 스물두 살이면서 살인자라는 타이틀을 단 오러 유저. 심지어 이번에 죽은 이는 일개 서민이 아니라 빌라인 제라도라는 강대국의 외교부 장관이었다. 빌라인 제라도가 타르를 속국으로 두었다는 사실도 널리 알려졌다 보니 이블이 체체와 특별한 관계가 되어 일부러 살해한 게 아닌가 하는 의견이 많았다.

    만약 그렇다면 괴물에게 족쇄가 생겼다고 해서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조련사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블 이사님께서 들어오시겠습니다.”

    회견 진행자가 마이크를 잡고 말하자 카메라 셔터 소리가 사방에 가득했다. 이블은 여느 때처럼 당당하게 들어와 가운데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어째서인지 외투를 입은 체체도 함께 들어왔는데, 이블이 체체의 의자를 뒤로 빼 줬다. 체체는 딱히 감사하다는 인사도 하지 않고 그 의자에 앉았다.

    기자들은 순간 셔터 누르는 것도 잊을 뻔했다.

    지금 내가 뭘 본 거야….

    “그럼 오늘 회견을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정숙해 주십시오.”

    이미 조용했다.

    이번 기자 회견은 기자들의 질문을 받는 자리가 아니었다. 빌라인 제라도가 알스마인 렙테로가 이블 엔덤에게 살해당했다고 주장했고, 그에 따른 이블의 공식적인 입장을 발표하는 자리였다.

    이블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러한 입장 발표를 한 적이 없었다. 그냥 ‘그 인간? 응, 내가 죽였지. 너도 죽이기 전에 거슬리게 하지 말고 비켜’ 이런 식으로 짧게 언급하고 지나갔을 뿐이다.

    대체 뭐라고 말하려는 걸까.

    기자들은, 그리고 생중계를 지켜보는 대중은 모두 긴장하며 이블의 입술만을 지켜봤다.

    “빌라인 제라도의 쓰레기 외교부 장관은….”

    첫마디부터 강렬했다.

    “내가 죽이지 않았어.”

    곳곳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이블은 다리를 꼬면서 눈을 갸름하게 떴다. 여유가 흐르는 몸짓이었다.

    “내게 누명을 씌우려는 빌라인 제라도 정부에 매우 실망했고, 너무 상처받아서 앞으로 화산 폭발이나 지진이 일어나도 실력 발휘를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어.”

    심지어 가벼운 웃음까지 입가에 매달았다.

    “그리고 뭐더라… 아, 귀에서 피가 흘렀다고 했지. 글쎄, 내가 오러로 테이블을 흔드니까 그 쓰레기가 아주 겁 먹었나 봐. 너무 스트레스받아서 피가 흐른 거지. 원래 머리 쪽이 안 좋았다고 들었는데. 아니야?”

    이블이 진행자를 바라봤다. 진행자는 매우 당황하면서도 “예, 본래 지병이 있었다고 합니다.”라고 착실히 대답했다.

    “거봐. 그 인간은 진짜 내가 자기한테 오러를 사용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지. 그런데 난 안 죽였어. 죽일까 했지만 체체가 말려서 그만뒀거든.”

    “…….”

    체체는 입을 열지 않았다. 체체는 오늘 기자 회견에서 이블의 옆에 앉을 테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자들과도 이미 합의된 바였다.

    “내 말을 못 믿겠으면 어댑터나 소울 오러 유저를 데리고 와서 진실인지 거짓인지 판단해.”

    이블은 그렇게 말하고는 피식 웃었다.

    “나보다 높은 등급으로 찾아와야겠지만 말이야.”

    그러고는 할 말은 끝났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날 연회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이블이 오러를 사용해 죽였다고 확신했다. 이블의 눈빛이 새빨갛게 변한 직후 알스마인이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쌌고, 귀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쉬쉬할 뿐 나서서 증언하지 않았고. 이블은 자신이 살해하지 않았다고 확실하게 입장을 발표했다.

    아마도 당분간 논란은 계속되겠지만 결국 대중은 이블의 편을 들 것이다. 사람은 결국에는 강자의 말을 듣게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죽일까 했지만 체체가 말려서 그만뒀다’라는 내용을 믿고 싶어 할 것이다.

    이블을 말릴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믿지 않기에는 너무나 달콤한 유혹이었다.

    “가자.”

    이블이 먼저 일어나고 체체가 뒤를 따랐다.

    출입구 바로 앞에서 이블이 아, 하며 뒤를 돌았다.

    “그리고 말해 둘 게 있는데.”

    이건 예정에 없었다. 진행자와 비서들의 눈빛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거, 알스마인 어쩌구는 내가 죽인 게 아니긴 한데.”

    이블의 얼굴에 장난기 가득한 웃음이 떠올랐다. 이블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체체를 한 번 바라봤다. 동공이 마구마구 흔들리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체체의 눈은 담담하고 건조하기만 했다.

    이블은 숨죽여 듣는 기자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체체 건들면 다 뒤지는 거야.”

    붉은 눈이 피처럼 번뜩였다.

    “얘한테 문제 생기면 지구 끝나니까 그렇게 알아.”

    이블은 더없이 근사한 미소를 짓고는 체체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 프레스 룸을 떠났다.

    그리고… 오늘 기자 회견의 주요 내용은 알스마인 렙테로의 사망과 그 요인이었으나 정작 도배되는 기사들은 모두 이블과 체체의 특별한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이블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알스마인 렙테로의 사망은 화제성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

    전 세계에 이블과 특별한 사이라고 낙인(?)찍혔지만, 체체의 하루하루가 특별히 달라지지는 않았다.

    체체는 센터에 출근해서 성실하게 루젬 세공 업무를 했고, 이블과 함께 점심을 먹었으며, 이블과 함께 퇴근했다. 이블과 함께 저녁을 먹고, 밤에는 자신의 방에서… 이블과 함께 잤다.

    센터에서 근무하는 시간인 아홉 시부터 세 시. 이외의 시간은 모두 이블과 함께하는 셈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기자 회견 전에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단 하나 달라진 게 있다면, 그전에는 저택과 센터만 왔다 갔다 하던 이블이 이제는 쇼핑몰, 루젬 전시회, 경매장 등 외부도 자주 돌아다니게 됐다는 것이다.

    “야, 이거 재밌겠다.”

    오늘도 이블은 세공 작업실로 들이닥쳐서 핸드폰을 보여 줬다. 체체는 익숙하게 고글을 벗고 화면을 봤다.

    내일도 봄, 미리 맞는 봄의 홀리아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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