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17)

선행상 시상식 일정이 끝나고 알시티로 돌아온 이블이 제일 먼저 한 일은 휴가계를 내는 것이었다. 무료함을 가장 싫어하는 이블은 어렸을 적 센터에 들어온 후 휴가를 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본래 제멋대로 쉬었던 터라 휴가를 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만 이번에는 비서직인 체체도 함께 쉬기 때문에 휴가 신청서를 작성해야 했다.

이블이 체체를 옆에 앉히고 체체의 핸드폰을 뒤적거리는 동안 제임스가 휴가 신청서를 양식을 가지고 왔다.

“체체한테 이거 쓰는 방법 알려 줘.”

“예.”

이블 엔덤의 집무실 테이블에 휴가 신청서라는 게 놓이는 진귀한 순간이었다.

제임스는 체체에게 우선 이름과 오늘 날짜를 작성하게 한 뒤 물었다.

“체체 씨, 휴가 날짜는 며칠까지로 할까요?”

“한 달 쉬고 2월 초에 출근한다고 해.”

되겠냐….

“이사님, 체체 씨는 한 달 휴가를 낼 수가 없습니다….”

“왜?”

“체체 씨는 이제 입사한 지 오 개월째라서… 최대로 많이 써도 오 일이에요.”

“진짜 머리 안 돌아간다. 체체, 소울 오러 유저로 각성했잖아. 원래 센터 소속 루젬 세공 유저는 일 년 중 삼십 일 제작 휴가를 받아. 그거 쓰면 되지. 이런 걸 설명해 줘야 되냐? 존나 멍청해. 이럴 거면 회사 왜 다니냐. 걸리적거리지 말고 그만둬.”

“아… 그렇군요.”

멍청하다는 소리야 매일 들어서 감흥도 없지만, 이블이 이런 사규를 안다는 건 놀라웠다.

센터의 오러 유저 복지 제도는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오러 유저는 기본적으로 평일 근무가 원칙이지만 아무래도 직업의 특수성 때문에 주말이나 공휴일에도 긴급히 지원을 나갈 때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곳이 오러 유저에게 상당한 휴가를 보장해 주는데, 연월차를 제외하고도 일 년 중 삼십 일의 휴가를 따로 주는 곳은 센터가 유일했다. 때문에 많은 오러 유저들가 센터에 소속되기를 원했다.

마저 날짜를 기입한 후 제임스가 소속 칸을 가리켰다.

“소속 부서는 이제 세공1 팀으로 바뀌었습니다. 세공1 팀으로 적어 주셔야 합니다.”

“세공1 팀이요?”

“예, 휴가가 끝나면 세공1 팀 작업실로 출근하시면 됩니다.”

“네….”

세공1 팀으로 소속 변경 결정을 내린 건 이블이었는데, 정작 체체에게는 얘기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지. 내 집무실로 출근해.”

“…이곳이요?”

“그래, 여기.”

체체가 고개를 들어 넓은 집무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럼 전 이제 책상도 컴퓨터도 없어지나요.”

“어? 아니, 있어. 여기, 이쪽에 마련할 거야. 그치, 제임스야?”

“예? 예, 맞습니다. 여기, 이쪽으로 데스크를 옮길 겁니다. 그렇죠, 그렇고 말고요.”

“…….”

체체는 물끄러미 이블을 쳐다봤다. 이블이 한껏 입술 양 끝을 끌어 올리며 선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금발 홍안의 미남자가 짓는 미소는 어색하고 인위적일지라도 눈부시게 황홀했다. 그러나 체체에게는 그 황홀함이 통하지 않았다.

“제가 옆에 있어도 괜찮으신가요?”

“어, 뭐….”

“출근해서 퇴근까지 이렇게 가까이에 사람이 있으면 시끄럽지 않으시겠어요?”

“…….”

“전 이사님이 걱정됩니다. 제 소음으로 괴롭게 하고 싶지 않아요.”

집무실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이블의 미소가 점차 가라앉았다. 화가 나거나 언짢은 표정은 아니었다. 크게 뜨인 붉은 눈은 약간의 놀람을 담았다.

체체의 말이 맞았다. 이블은 작은 뒤척임뿐만 아니라 숨을 내뱉거나 심장이 박동하는 소리는 물론 눈을 깜빡이는 소리까지 듣는다. 그 정도에서 끝난다면 나았겠지만 사람의 감정 파동까지 읽어 버리는 이블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지긋지긋하게 여겼다.

“소음 아니야.”

그러나 희한하게도 체체가 눈을 깜박인다면 그것이 정말 소음으로 들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제임스가 난초 잎을 닦는다고 수선을 부리면 당장 머리를 날려 버리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체체가 난초 잎사귀를 닦겠다고 손수건을 가져와 호호 불면서 수선을 부리면 진짜 무지막지하게 귀여울 것 같다….

실제로 이블은 체체와 지척에서 자면서 단 한 번도 시끄럽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오히려….

“넌 더 시끄러워도 돼.”

이블은 가볍게 웃으며 체체의 머리칼을 톡, 건드렸다.

“넌 좀 더 시끄러울 필요가 있어.”

“…….”

잠시 이블을 바라보던 체체는 곧 수긍했는지 휴가 신청서를 마저 작성했다.

***

“실장님, 무슨 일 있었어요? 표정이 이상한데.”

체체의 휴가 신청서를 들고 온 제임스에게 인사부 직원이 물었다.

“내 표정이 어떻길래.”

“좀… 이상해요. 얼떨떨해 보이고. 빨개졌는데요?”

“…….”

“이사님 집무실… 다녀오신 거 맞죠?”

“그래. 이거나 받아.”

제임스가 체체의 휴가 신청서를 내밀었다. 체체의 소속은 세공1 팀으로 변경되었으나 휴가에서 복귀하기 전에는 인사부에서 맡기로 했다. 직원은 서류를 받으면서도 신기하다는 눈으로 제임스의 얼굴을 살폈다.

“얼굴색이 왜 이렇게 붉어요?”

“…….”

“누가 보면 방금 야한 동영상이라도 보고 온 줄 알겠어요.”

“이만 가지.”

제임스는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뜻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복도를 걷는 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스스로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어쩔 수 없었다.

누구라도 방금 이블의 집무실에 함께 있었다면 같은 반응이었을 것이다.

이블을 괴롭게 하고 싶지 않다는 체체나, 체체가 내는 소리는 소음이 아니라는 이블이나… 잿빛 머리칼을 부드럽게 매만지는 손길까지. 뭐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야릇하고 오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지금까지 이블과 체체가 제임스를 투명 인간 취급한 적 많았지만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방금 그곳은 오로지 둘만의 세계였고, 제임스는 둘만의 세계에 초대받지 않은 완전한 외부인이었다.

체체가 본격적으로 이블의 집무실에서 근무하기 시작하면 집무실에 들락날락하기 어려울 것 같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블을 어린 막냇동생이라고 생각하는 제임스는 어쩐지 부끄러우면서도 가슴이 간질간질하고 자꾸 웃음이 흘러나와서 한동안 비상구 계단에 서 있다가 업무로 복귀해야만 했다.

***

한 달간의 휴가는 체체의 루젬 세공에 쓰일 예정이었다.

사실 루젬 세공은 상당히 전문적인 기술을 필요로 하는 영역이기 때문에 독학으로는 불가능하고 전문 세공 강사도 따로 있다. 그러나 이블은 세공 강사를 부르지 않기로 했다. 이블도 루젬 세공 경험이 있었고, 집으로 다른 인간을 들이기 싫었으며, 무엇보다 체체가 다른 인간을 따르는 모습이 보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오러 유저의 기본 교육이야 삼 주면 끝이 나지만 세공 강의는 몇 년이 소요될 수도 있는 코칭 과정이었다. 이블은 체체의 곁에 그렇게 오랫동안 사람을 두고 싶지 않았다. 이블에게 사람은 집사나 비서 등 몇몇 빼고는 다 구역질 나는 쓰레기들이다. 그런 쓰레기들로부터 몇 년씩 강의를 듣게 하면 체체가 자신을 원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이블은 자신의 황량하고 아늑한 집에서 체체와 한 달 동안 한 시도 떨어지지 않고 같이 있을 거라는 사실이 무척 즐거웠다. 휴가를 낸 후 다음 날 아침부터 잔뜩 신이 나서 체체를 데리고 작업실로 향했다.

저택 정원에 짓던 작업실은 지난주에 완공되었고, 이블은 손수 최고 품질의 원석을 구해서 안에 채워 넣었다. 처음으로 작업실에 들어가 본 체체는 바깥에서 볼 때보다 더 넓은 공간에 입을 벌리고 구경했다. 원석은 물론 온갖 종류의 세공 도구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침실과 욕실도 따로 있었다.

작업실의 한쪽 벽면에는 높은 장식장이 있었다. 이블은 체체를 그 앞으로 데려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원석이랑 루젬, 홀리아젬 다 갖다 놨어. 원석만 오십 개고 루젬은 삼십… 몇 개야. 구분은 할 줄 알지?”

“예.”

편의상 ‘루젬’이라고 호칭하지만 사실 루젬은 세공 단계에 따라 세 가지 명칭이 존재한다. ‘원석’은 미가공 상태, ‘루젬’은 환상을 세공할 수 있도록 가공된 상태, ‘홀리아젬’은 환상술을 세공한 완성품이었다.

체체는 장식장을 올려다봤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보석들이 진열된 장식장은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지만 그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장식장의 높이였다. 상당히 높아서 맨 위 칸에는 발뒤꿈치를 올리고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것 같았다.

“너 진짜 나 잘 만난 줄 알아. 보통 사람은 이렇게 단기간에 이 정도 상급으로 몇십 개씩 절대 못 구하니까.”

“예, 감사합니다.”

“너 하는 거 봐서 더 구해 줄 수도 있어.”

“제가 돈 벌어서 살게요.”

“씨발….”

기분 좋았던 이블이 돌연 욕설을 내뱉었다.

“넌 이게 돈만 있으면 구할 수 있는 줄 알아? 네가 평생 모은 돈에 0을 세 개를 더 붙여도 못 구하는 거야. 돈만 있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고. 나 정도 되는 인맥과 지위가 있어야 구할 수 있어.”

“인맥이요?”

“그래!”

이블은 꽥 소리를 질렀다.

“무려 다비즈 그룹의 최상품 원석이야. 다비즈 그룹은 산지에서 원석을 캐내는 것부터 유통과 판매까지 그 어떤 중개도 거치지 않고 직접 다뤄서 세계에서 가장 신뢰받는 곳이란 말이야. 여기의 최상품 원석을 수십 개나 구하려면 반년 전부터 예약해야 돼. 우리 집이 거기랑 친해서 구한 거지 넌 절대 손도 못 댄다고. 알았어?”

“다비즈….”

체체가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다비즈 그룹이라면 타르의 반군에 군수 물자를 지원하는 알시티의 기업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 …….”

“다비즈 인더스트리?”

“…….”

아주 쏟아붓던 이블이 입을 다물었다. 체체는 감정의 동요 없이 이블을 올려다봤다.

“이사님은 그 군수업체와 친하세요?”

“아니, 전혀 안 친한데.”

이블은 본능적으로 부인했다.

엔덤 가문과 다비즈 그룹은 선대 때부터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친밀한 관계였다. 이블은 SSS 멀티 유저가 된 후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다비즈 그룹의 삼남인 레오 다비즈와는 나름 친한 친구였다.

레오는 알시티에서 일루전 클럽을 운영하고 그의 큰형, 즉 다비즈 그룹의 장남인 살렌달 다비즈는 현재 타르 반군에 무기를 파는 군수 업체의 CEO였다. 이블도 아는 사실이었다.

“정말 솔직히 말해서 다비즈 그룹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곳이야.”

“친해서 루젬을 구한 거라고 하셨잖아요.”

완전 찹쌀만 해 가지고 날카롭기는….

이블은 무심한 금색 눈과 마주하면서 일부러 표정을 굳혔다. 등에서는 이미 식은땀이 흘렀다.

“아니, 야, 체체야. 말 제대로 들어. 우리 집이 거기랑 친하다는 거지 내가 친한 건 아니야. 거기 겁나 싫어. 왜 타르에서 전쟁을 하고 그러는지 그 어리석음이 안타까워. 무기 팔아먹고 싶으면 딴 나라에서나 하지 말이야.”

“다른 곳에서도 하면 안 됩니다.”

“어우… 물론이지. 시대가 어느 땐데 무기 같은 걸 판매하는지 이해를 못 하겠어. 당장 사업 접고 지구에서 꺼져야 돼. 그런 인간쓰레기 집안과는 절연하려고 생각 중이야.”

다비즈 그룹은 그렇게 희대의 인간쓰레기 이블 데빌로부터 쓰레기 취급을 당하게 되었다. 살렌달 다비즈도 군수업이 결코 ‘선한’ 돈벌이가 아니라는 걸 잘 알았지만 만약 이 자리에 있었다면 억울해서라도 군수업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했을지도 몰랐다.

“절연이 뭔가요?”

“절교 말이야. 헤어진다고. 영원히 거기랑 관계를 끊겠다는 뜻이야.”

“그러지 마세요. 이사님과 절연한다고 군수업을 그만두지는 않겠죠….”

체체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이블은 체체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더 이상 얘기를 꺼내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안심하는 한편 왜 자신이 난민의 눈치를 살피는지, 그리고 왜 안심하는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한심하면서도 살짝 자존심도 상해 기분이 안 좋아졌으나 체체가 “이사님.”이라고 부름으로써 순식간에 휘발되었다.

“응, 왜.”

“이 홀리아젬은 어떤 분이 만드신 건가요?”

“몰라. 그냥 요즘 판매 수량 제일 많은 세공사 걸로 사 오랬으니까.”

이블은 체체가 가리킨 홀리아젬을 장식장에서 꺼냈다.

주먹만 한 크기의 보석 안에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배경은 없었고 단지 바람만 존재했다.

홀리아젬은 멈춘 이미지보다 움직이는 이미지가 더욱 인기 있다. 다채롭고 화려한 것부터 단아하고 조용한 것까지 다양한 장르의 환상술이 루젬 안에 담기는데, 이블은 루젬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요즘 어떤 풍이 인기 많은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바람만 거세게 몰아치는 보석을 보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거칠고 투박하며 아무런 서사도 없다. 확실한 건 이블의 취향은 아니었다.

판매량 높은 세공사 거 말고, 좀 희망차고 밝고 작품성 있는 걸로 사 오라고 할걸.

“정말로 바람이 들어 있는 것 같아요. 너무 멋있네요.”

체체가 이블의 손에 쥐인 홀리아젬을 구경했다. 목소리에 감탄이 서렸다.

“그렇지? 바람 부는 풍경을 섬세하게 잘 담아냈어. 쓸쓸한 정취가 느껴지는 좋은 작품이야.”

이블은 흡족해하며 체체에게 홀리아젬을 건넸다.

“마음껏 구경해.”

“감사합니다.”

체체는 손바닥 위에 홀리아젬을 올려놓고 그 안을 들여다봤다. 솔직히 이블이 보기에는 영 아니었지만 난민이 저렇게 좋아하니 그걸로 충분히 좋은 작품이었다.

홀리아젬을 감상하는 모습을 보며 이블은 체체가 어떤 환상을 담아낼지 궁금해졌다. 다채로운 색상을 지녔을지, 단조로운 흑백일지. 정적일지, 동적일지. 서사에 치중했을지, 묘사에 치중했을지.

서정적일까. 아니면 딱딱할까. 아련하고 슬픈 느낌일까. 엉뚱한 구석이 있으니 의외로 재미있을지도 모른다.

루젬 세공에는 세공사의 성격이 드러난다. 의뢰를 받아 제작하는 외주 작품이라 해도 환상술에는 어쩔 수 없이 세공사만의 성격이 담기기 마련이다.

체체가 세공한 루젬이 너무나 궁금했다.

체체의 보석 안에 담긴 환상을 보고 나면 이 조그만 머리로 무엇을 생각하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사님께서 세공하신 것도 있나요?”

그때 체체가 물었다.

“내가 한 거?”

“예, 이사님께서도 세공한 적 있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이블의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갔다.

“왜? 보고 싶냐? 궁금해?”

“네.”

이블은 참을 수 없어서 푸흐흐 웃었다.

“참 나. 내 루젬이 그렇게 궁금해 죽겠단 말이야?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가 알고 싶어서 죽겠어? 네가 그렇게 궁금해서 안달 났는데 못 알려 줄 것도 없지. 난 아량이 넓은 사람이니까.”

알려 주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처럼 지껄이던 이블이 장식장 가운데의 커다란 보석함을 꺼냈다. 가장 눈에 띄는 중앙에 있는 데다가 상자가 크고 화려해서 들어오자마자 눈길을 끌었던 것이었다.

이블은 보석함에서 동그란 보석을 꺼냈다. 체체의 얼굴만 했으니 굉장히 커다란 크기였다.

“이게 내가 세공한 보석이야. SSS 멀티 유저가 만든 유일한 홀리아젬이니 가격도 매길 수 없지.”

“몇 살에 하셨어요?”

“정확히는 기억 안 나는데 열다섯 살 정도였어.”

“그 후에는 안 하셨습니까?”

“응, 재미없더라고.”

열다섯 살에 하루하루가 너무 무료하고 지긋지긋해서 한번 해 봤던 것이었다.

체체는 이블이 세공한 홀리아젬을 품에 안았다. 외견은 굉장히 어두운 검은색의 보석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보석 안의 어딘가에 파랗고 하얀, 동그란 무언가가 빛나는 걸 알 수 있었다.

“나가서 볼래? 여기는 좁아.”

“네.”

어쩐지 신이 난 이블이 체체를 데리고 작업실 밖으로 나갔다.

한겨울이라 낮이라고 해도 무척 공기가 찼다. 순식간에 낮아진 온도에 살짝 움츠러든 체체의 어깨 위로 따스한 담요가 내려앉았다. 이블이 염력으로 작업실에서 꺼내 온 것이었다.

이블은 이제 얼른 보라는 듯이 체체가 안은 홀리아젬을 턱으로 가리켰다. 체체는 홀리아젬의 기본 감상법대로 젬 위에 손을 올렸다.

이블이 세공해 놓은 환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니, 눈앞이 아니라 이 공간을 가득 메웠다. 빛 하나 없이 어두운 밤이 이 넓고 황량한 정원에 퍼져 나갔다. 저택 전체를 감싸는 엄청난 크기였다. 갑작스레 어두워진 사방에 놀랐는지 별관에 있던 저택 사용인들이 소란을 떨면서 나왔지만 두 사람은 상관하지 않았다.

머리 위도, 발밑도 모두 어두워서 마치 밤을 밟고 선 것 같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이블이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체체는 만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 손을 들어 어둠을 건드렸다. 때맞춰 멀리 앞쪽에 하얀빛 하나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점이었던 그것은 점점 커지면서 푸른빛이 감도는 구체가 되었다. 체체의 주먹만 한 크기로 부풀어 올랐다가 천천히 빛을 잃고 어둠 속에 잠겨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 자리에 다시 하얀 점이 생겨났다. 그것은 방금 전처럼 천천히 커졌다가 다시 빛을 잃고 어둠이 되었다. 그리고 또다시, 하얀빛이 나타났다.

사그라들듯이 희미해지고, 완전히 어둠에 잠긴 줄 알았는데 다시금 존재를 과시해 오고, 그러다가도 곧 사라질 것처럼 희미해지고.

이블의 환상은 그것의 반복이었다.

“체체.”

이블이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자신이 만들어 낸 환상을 손으로 휘저으면서 모습을 드러낸 그는 신이 난 말투로 물었다.

“뭐처럼 보여? 사람들은 광활한 우주 속의 지구 같다고 말하던데. 너한텐 어떻게 보이는지 그냥 느낀 대로 말해 봐. 너무 감동적이고 막 벅차오르고 그래?”

“고독해 보여요.”

“…….”

“이사님의 루젬은 무척 고독하네요.”

고독….

그 솔직한 감상에 이블은 이마가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체체는 짧은 감상을 내뱉고 다시 구경에 집중했지만, 이블은 그럴 수가 없었다.

사실 어릴 때 너무 심심해서 계획 없이 만든 거라 어떤 감정을 담으려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무의식대로 만들었고, 이걸 가지고 평론가들은 수천 개의 비평을 쏟아 냈다. 혹평보다는 칭송에 가까운 평이 훨씬 많았다. 엔덤 가문의 눈치를 본 것인지, SSS 멀티 유저라는 지위 때문인지, 정말로 작품성이 좋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블은 어차피 남의 평에 상관하지 않는 성격이었고, 세공 자체가 취미가 아니라서 딱 한 번으로 관뒀다. 사실 이 홀리아젬도 최근까지 존재 자체를 잊고 있었는데, 힙스가 루젬 작업실에 이것도 둬도 되냐고 물어서 그제야 인식했다.

이블의 루젬을 보고 고독함을 느낀 사람은 체체가 처음이 아니었다. 분명 어떤 비평가는 홀리아젬 안에 내재된 고독함을 느끼고 그에 대해 평을 썼다. 이블도 그 평을 읽었지만 어떤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자신의 창작물에 대한 감상을 들으면 우쭐대거나 부끄러워하거나, 분명 어떤 반응이 있어야 하지만 이블은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체체가 고독하다고 말해 오니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은 홧홧해지는 이상 증상이 나타났다.

더 듣고 싶었다. 내가 만든 것에 대한 난민의 감상을.

“고독하다고. 그래서? 그리고? 그거뿐이야?”

“궁금한 게 있습니다.”

“응, 말해.”

“어쩌다 이걸 만들게 된 겁니까?”

체체가 개인적인 질문을 해 오니 이블은 무척 신이 나서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너무 심심해서. 그때 화산 하나가 폭발해서 대충 용암 처리하러 갔는데 너무 뜨거우니까 나 말고는 아무도 못 다가갔거든. 나 혼자 있었고, 거기가 또 마침 루젬 광산이 있는 곳이라서 시간 때울 겸 만들어 본 거야.”

“열다섯 살에, 화산 폭발 현장에서요.”

“그렇지. 예전에 딱 한 번 강의 들었었는데 그걸로 바로 이렇게 세공에 성공했어. 정식으로 배웠으면 이것보다 훨씬 잘했을걸. 물론 이것도 완전 잘했지만.”

“…….”

신이 난 이블과는 다르게 체체의 분위기는 다소 가라앉았다. 본래 늘 침착하고 차분한 표정이지만, 이블은 체체의 감정이 침잠해 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 별로야?”

“좋아요, 이사님.”

“…….”

“너무 좋아요.”

체체는 눈썹을 기울이며 애달픈 미소를 지었다.

이블은 참지 못하고 체체를 달랑 들어 안았다. 자신의 한쪽 팔 위에 앉히자 체체는 익숙하게 어깨에 뺨을 포개 왔다. 이블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처음 세공한 루젬에는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이 담긴대.”

“인생이요?”

“응, 네 인생은 어땠어?”

체체는 조금 생각하더니 답했다.

“제 인생은… 비어 있어요.”

“나도 마찬가지였어. 얼마 전까지는.”

그 얼마 전이 언제를 말하는지는 아주 명확했다.

“지금 다시 세공하면 아주 다른 게 탄생할 거야.”

이블은 즐거운 듯이 얘기했다. 체체는 가만히 들었다.

“그리고 네 인생도 이제 안 비어 있어. 잘 생각해 봐. 정말 비어 있는지.”

“…….”

체체의 심장 소리를 듣는 이블은 결코 체체를 ‘비어 있다’라고 표현할 수 없었다. 이블은 체체의 고운 이마에 깃털이 내려앉듯 아주 살짝 입술을 맞춘 후 바닥에 내려 줬다.

체체는 이블이 세공한 검은색 홀리아젬이 정말 마음에 들었는지 보석함에서 꺼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전시해 두었다. 그 덕에 작업실에 들락날락하는 저택 사용인들도 이블의 홀리아젬을 마음껏 구경할 수 있었다. 물론 손을 대서 작동시키지는 못하지만… 작업실 내부를 청소하러 온 이들은 홀리아젬 앞에서 유독 오래 머물다 가고는 했다.

그리고 체체에게는 몇 가지 뇌물이 바쳐졌다. 저택 사용인들이 저마다 달콤한 디저트를 선물하면서 한 번 더 이블 님의 홀리아젬을 작동시켜 주면 좋겠다고 넌지시 어필했다. 자신도 원하는 바였기에 체체는 이블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정원에 가지고 나온 홀리아젬을 한 번 더 완전하게 감상했다.

이블도 분명 알았겠지만 그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뒤로도 체체는 종종 이블의 홀리아젬 감상 시간을 가졌다.

많은 이들은 이블의 환상을 보고 잠식해 가는 어둠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체체에게는 달랐다. 그것은 아무리 어두워져도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하얀빛이었다.

***

이블은 체체가 루젬 세공에 굉장한 재능이 있으리라고 막연히 예상했다. 애가 루젬에 크게 관심을 가지기도 했고 환상술도 곧잘 해내기에 내심 기대했는데, 체체는 며칠이 지나도록 환상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무지개를 만들어 봐’, ‘비 오는 풍경을 그려 봐’라고 주제를 특정해 주면 잘했지만 스스로 주제를 생각해 내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창작이란 걸 해 본 적 없기 때문인 것 같았다.

루젬 세공사 중에는 외주를 받아 정해진 스토리, 정해진 그림으로 환상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블은 체체가 직접 세공한 게 보고 싶었다. 그래야 체체도 자신의 내면이 어떤지를 직시할 수 있을 테니까.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는 체체를 위해 이블은 다른 방안을 찾아냈다.

첫 번째 방안으로 그는 센터 근처에 있는 16층짜리 대형 쇼핑몰에 체체를 데리고 가기로 했다. 쇼핑몰의 14층과 15층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원석, 루젬과 세공 용품을 판매하는데, 워낙 규모가 커서 일부러 외국에서 방문하기도 하는 곳이었다.

대중은 동시에 휴가를 낸 이블과 체체가 앞으로 무엇을 할지에 큰 관심이 있었다. 선행상 시상식 연회장에서 있었던 일이 알려지고 과연 두 사람은 어떤 사이인가 소문이 무성하던 찰나에 동시 휴가라니. 많은 이들이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러나 정작 두 사람은 휴가의 절반이 지나도록 저택에서 두문불출했다. 추운 겨울에 휴가를 냈으니 당연히 따뜻하고 포근한 휴양지에라도 놀러 갈 줄 알았는데 이 주가 지나도록 잠잠하니 사람들의 관심도 점차 식어 갔다.

그러던 차에 오늘, 외출을 나서기로 한 것이다. 그것도 어디 경비 삼엄한 휴양지의 개인 별장이 아니라 누구나 갈 수 있는 대형 쇼핑몰로. 웬만하면 사람 많은 곳에 가지 않는 이블로서는 굉장히 큰 결심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이블 이사님, 체체 유저님.”

쇼핑몰에 도착하니 주차장에서부터 쇼핑몰 직원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오늘 오전에 갑자기 이곳에 방문하겠다고 통보했으나 유능한 제임스 비서실장은 15층과 16층을 오후 시간대로 두 시간이나 대관해 냈다. 갑자기 있던 손님들도 다 내보내야 했으나 쇼핑몰 쪽에서도 그 이블 엔덤이 이곳에 방문했다는 사실을 널리 자랑할 수 있으니 상부상조였다.

좌우로 선 직원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이블은 체체의 손목을 붙잡고 엘리베이터로 성큼성큼 걸었다. 맨 앞줄에 있던 본사에서 직접 온 중년인이 서둘러 따라갔다.

“어서 오십시오, 이블 이사님. 저는 OO 기업의 갈란다 상무라고 합니다. OO 쇼핑몰을 방문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

“바로 15층에 가시겠습니까?”

“야.”

이블은 힙스뻘은 되어 보이는 중년인을 차갑게 노려봤다.

“너 왜 체체한테는 인사 안 해.”

“……?”

“씨발 새끼야. 왜 얘한텐 인사 안 하냐고.”

이블이 체체의 손목을 붙잡은 채 아래위로 흔들었다. 갈란다 상무는 허겁지겁 허리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큰 실수를 했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체체 유저님.”

“네, 안녕하세요.”

이블이 똑같이 허리를 숙이려는 체체의 가슴 쪽으로 한 팔을 쓱 들이밀어 멈추게 했다. 체체는 이블을 빤히 올려다봤지만 비켜 줄 용의가 전혀 없는 것을 알고 그냥 인사를 포기했다. 결국 허리를 숙인 건 쇼핑몰 상무뿐이었다.

상무는 화가 난 이블이 이대로 가 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했는데, 그래도 깍듯하게 사과하고 제대로 인사한 덕에 이블의 기분이 풀린 듯했다.

15층은 원석과 루젬, 홀리아젬이 전시된 곳이었다. 상무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기로 했고, 대신 15층 매니저와 직원들이 이블과 체체를 방해하지 않도록 일정한 간격을 두고 대기했다.

원석과 루젬은 문이 없는 진열장에 놓인 반면 홀리아젬은 투명한 유리 진열장 안에 예쁘게 꾸며진 채 진열되었다. 꽃으로 둘러싸거나 아기자기한 인형들을 주위에 앉혀 놓거나.

오묘하고 신비로운 홀리아젬을 이렇게 모아 두니 아주 휘황찬란했다.

“마음껏 구경하고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사.”

“정말 종류가 많네요.”

“응, 얼른 구경해.”

“감사합니다.”

체체가 가장 가까운 진열장으로 타박타박 걸어갔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무런 감정 없는 걸음걸이였지만 이블이 보기에는 아주 설렘 가득한 발걸음이었다.

체체는 홀리아젬이 진열된 투명한 유리 전시장에 달라붙어서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들을 구경했다. 이블은 그 모습을 보면서 한쪽 손으로 입을 감싸고 한쪽 손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찰칵, 셔터음 소리가 나자 체체가 이쪽을 돌아봤다.

“아무것도 아니야. 계속 구경해.”

이블은 손을 휘휘 젓고는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체체의 시선은 다시 홀리아젬을 향했다.

쇼핑몰의 밝은 배경 아래에서 베이지색 니트를 입고 태양 빛 눈을 빛내는 체체의 모습은 이블이 보기에 너무 자극적이었다. 발그레 달아오른 뺨을 보며 입 안에 넣고 싶다 생각하던 그때 체체와 눈이 마주쳤다.

“이곳에서는 원석과 루젬만 파나요?”

“당연히 홀리아젬도 팔지. 네가 지금 본 것도 살 수 있어.”

“여기 견본이라고 써 있습니다.”

“홀리아젬은 반영구라도 작동시킬수록 수명이 닳잖아. 그런 걸 직접 전시할 수는 없으니 싸구려 원석에다가 대충 이런 느낌의 환상이 세공되어 있다고 견본을 만들어 놓은 거야.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바로 얘기해. 진짜 홀리아젬을 구해 줄 테니까.”

이블은 그 어떤 자극적인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뻔뻔하게 대답했다.

홀리아젬은 기계로 찍어 내는 게 불가능하다. 모든 홀리아젬은 수제작이고, 이 세상에 단 하나만 존재하기 때문에 판매 방식 또한 예술품과 같았다. 아무리 똑같은 내용의 환상을 세공하려고 해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조금씩 차이 날 수밖에 없으므로 하나하나가 세상에 유일한 물건이었다. 대량 생산이 불가능하다는 게 루젬 세공이 심리 치유보다 상업성이 떨어지는 결정적인 이유였다.

처음에는 여러 소속사가 연합하여 경매를 열거나 전시회를 열어서 그를 통해 판매를 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판매 방식은 아무래도 서민들에게는 접근이 어려워 여기저기서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왔고, 이에 대형 쇼핑몰에서도 홀리아젬을 판매하도록 정부가 지침을 내렸다. 쇼핑몰이 홀리아젬을 선구매한 뒤 그것을 시민에게 판매하도록 한 것이다.

쇼핑몰로 인해 홀리아젬이 대중화되면서 홀리아젬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인터넷 쇼핑몰도 등장하고 자신만의 가게를 차리는 세공사들도 생겼다.

오늘 이블이 체체를 데리고 온 이 쇼핑몰은 알시티에서 가장 큰 루젬 코너를 보유한 곳이었다. 연계된 소속사만 스무 개가 넘으며 전시용도 백 개 넘게 가졌다.

지금까지 체체가 실물로 감상한 홀리아젬은 요즘 인기 많은 세공사의 바람 부는 홀리아젬과 이블이 만든 것 두 가지뿐이었다. 이블은 체체가 거의 처음 감상한 홀리아젬이 하필 이 우주에서 가장 뛰어나고 완벽한 사람의 작품이라 기가 죽어 저렇게 제작을 어려워하나 싶었다. 그래서 허접한 물건도 많다는 걸 일부러 알려 주기 위해 데리고 온 거다.

“이게 마음에 들어?”

“아니요.”

“물론 너무 완벽한 걸 봐 버린 네 눈에 차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일단 감상해 봐. 창작하려면 많이 보는 것도 중요하다니까. 내 거 보여 주지 말 걸 그랬어. 다시 보기 힘들 정도로 완벽한 걸 처음으로 봐 가지고 다른 건 눈에 안 들어오는 게 당연해.”

콧대가 아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상태였다.

“하나하나 다 구경하자.”

이블은 체체의 눈길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홀리아젬에 손을 올렸다. 홀리아젬이 작동되고 그 앞쪽으로 아주 조그맣게 사람 모양의 환상이 나타났다. 전시용이라서 그런 건지 원래 이런 건지 손바닥 한 뼘 정도의 작은 크기였다.

가벼운 옷차림의 어린애가 맨발로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다 길에서 마주친 어떤 아주머니가 신발을 신겨 주고, 또 걷다가 마주친 아저씨가 외투를 입혀 줬다. 그리고 조금 더 홀로 걷다 보니 새가 날아와서 모자를 씌워 주고 떠났고, 잠시 후에는 강아지가 목도리를 물고 와서 아이가 목에 목도리를 두를 때까지 맴돌았다.

시간이 지나 집에 도착했을 때 아이는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따스하고 포근한 것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서사 있는 홀리아젬들이 늘 그렇듯 환상은 한 번 펼쳐진 후 끝이 났다. 어떠한 서사 없이 풍경 환상만 존재하는 정적인 홀리아젬은 환상이 반복 재생 되게끔 세공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동적인 홀리아젬은 환상 그 자체보다 서사를 중시하기에 보통은 한 편을 감상한 후 여운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와, 진짜 별로다. 이딴 것도 루젬이라고 만들었어? 아무리 예술은 개성이라지만 씨발 정도가 있지.”

이블은 아주 학을 떼며 홀리아젬을 내던졌다. 휴머니즘이 강조된 스토리는 이블의 성격과는 맞지 않았다.

“저는 좋았습니다. 저도 이런 걸 만들고 싶습니다.”

“…이게 좋다고?”

“예.”

“이런 걸 만들고 싶다고?”

“네.”

“…겁나 취향 이상하네.”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기분이 나빠진 이블이 옆에 있던 홀리아젬을 건드렸다.

아주 작고 동글동글하고 북슬북슬한 강아지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갈색 털의 어린 강아지는 작달막한 꼬리를 흔들며 자리를 빙글빙글 돌거나 배를 까뒤집고 앞발로 공중을 휘젓는 등 온갖 애교를 다 부리다가 사라졌다.

뭐야, 이게.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고.

이블은 이번에야말로 실망했을 거라 생각하며 체체를 쳐다봤다.

“좋네요.”

“…너 방금 좋다고 했어?”

“예, 귀엽습니다.”

“…….”

이블은 몹시 저조해진 기분으로 다른 홀리아젬을 작동시켰다.

처음엔 비가 쏟아지다가 먹구름이 물러나고 맑게 갠 하늘 위로 무지개가 떠올랐다.

에라이, 빌어먹을.

옆에 체체만 없었다면 이 끔찍하고 징그러운 환상이 담긴 보석 따위는 당장 내던져 깨트려 버렸을 것이다.

“이것도 좋네요. 아름다워요.”

“…야, 너 지금 나랑 뭐 하자는 거야.”

체체의 입에서 세 번째 칭찬이 나오자 이블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배신감에 몸서리쳤다.

“넌 뭐가 이렇게 쉬워? 언제는 내 거가 제일 마음에 든다고 했잖아.”

체체는 그렇게 말한 적 없었다.

“너무 좋아서 존나 중독자처럼 하루 종일 볼 때는 언제고!”

존나 중독자처럼 하루 종일 쳐다본 적도 없었다.

“그냥 루젬이면 다 좋아? 네가 무슨 루젬에 환장한 인간이야? 이것도 좋다 저것도 좋다. 젠장,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마음이 변해?”

“…….”

“너 계속 이딴 식으로 나올 거면 앞으로 내 홀리아젬 감상하지 마!”

“이사님.”

“닥쳐, 늦었어. 집에 가면 내 보석 갖고 나와서 꽁꽁 숨겨 둘 거야.”

“…….”

단단히 삐진 이블이 팔짱을 끼고는 성큼성큼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체체는 서둘러 뒤쫓았다.

“이사님께서는 마음에 드는 거 있으세요?”

“없어.”

이블은 제대로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블은 체체가 곧 만들어 낼 홀리아젬 외에 다른 것들은 영원히 관심 없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정작 체체는 그의 것이 아닌 다른 인간들이 만든 것까지 이것도 좋다, 저것도 좋다 하니 억울하기도 하고 짜증 나고 답답하고 싫었다.

“오늘 쇼핑은 끝이야. 집에 갈 거야.”

이블은 세 살 어린애처럼 부루퉁하게 입을 내밀었다. 체체는 그 옆에서 무심한 얼굴로 서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이미 이 층에 와 있었다. 이블이 먼저 탔으나 체체는 오르지 않았다. 안 그래도 표정이 좋지 않던 이블이 인상을 썼다.

“뭐 해, 얼른 타.”

‘뭐 해요. 얼른 타란 말이야.’

두 사람에게서 투명 인간 취급받던 쇼핑몰 본사 상무가 속으로 외쳤다. 멀찌감치서 둘을 지켜보던 그는 이블이 이쪽으로 걸음을 옮기자마자 얼른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 놓았다. 아무것도 구매하지 않아도 좋으니 이대로 나가 줬으면 했다.

“너 지금 반항하냐?”

“전 이사님 게 제일 좋습니다.”

“닥쳐. 늦었다고 했지.”

“이사님 것만 보다가 다른 사람들 거 보니까 크기도 작고 별로였어요. 색깔도 이사님의 그것이 더욱 진하고 어두워서 더 취향이었고요. 한 손으로 쥐지 못할 만큼 크고 묵직한 이사님 것에 비하면 다른 사람들 건 너무 작고 빈약합니다.”

‘……?’

본사 상무는 스스로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루젬 얘기 하는 거 맞아?

“거짓말이잖아. 너 방금 전에 다 좋다고 한 거 다 들었어.”

“이사님께서 직접 다른 사람들 것을 소개해 주셔서 실망했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흥.”

체체는 잠시 눈동자를 굴리더니 곧 결심한 듯 이블을 올려다보면서 아련한 미소를 지었다.

“전 이사님의 것이 제일 좋아요… 처음을 이사님 것으로 경험했기 때문에 이제 다른 사람들 건 영원히 품지 못할 거예요.”

“…역시 그렇지?”

이블이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샐쭉하니 입을 내밀었다. 이블은 체체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어깨동무하는 척 감싸 안았다.

“넌 거짓말을 너무 밥 먹듯이 해서 문제야. 앞으로는 솔직하게 말해.”

“예, 죄송합니다.”

“홀리아젬은 이제 됐고, 세공 용품이나 보러 가자. 야, 안내해.”

체체에게는 꿀 떨어지는 목소리였는데, 본사 상무에게 말하는 ‘안내해’ 세 글자는 한겨울 고드름보다 차가웠다. 본사 상무는 아주 혼란스럽고 복잡한 상태에서도 착실하게 둘을 16층으로 안내했다.

원석을 환상술 세공이 가능한 상태로 만드는 루젬 세공 단계에는 다양한 세공 도구들이 사용된다. 대표적으로 고글, 엔드스틱2), 장갑이 있으며, 외에도 확대경과 받침대, 붓 등 여러 가지 소도구들이 많이 필요했다.

쇼핑몰 본사 상무가 다양한 세공 용품을 자세하게 설명할 능력은 없었으므로 16층 담당 매니저가 설명을 맡았다. 어려서부터 사회생활을 해 온 노련한 매니저는 웃는 낯으로 이블과 체체를 맞이했다.

“안녕하십니까. 찾으시는 제품 있으신가요?”

“여기에만 있는 거 내놔 봐. 필요한 건 집에 다 있거든.”

“예, 카탈로그를 준비해 드릴 테니 앉아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이블은 체체를 먼저 소파 안쪽에 앉힌 뒤 옆에 앉았다. 한쪽 팔은 체체의 등받이 쪽으로 뻗은 상태였는데 손가락은 이미 체체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갈란다 상무는 맞은편에 앉으며 그 다정한 모습을 애써 모른 척했다.

매니저는 음료와 쿠키를 빠르게 준비한 후 카탈로그를 내밀었다.

“종이 더럽게 작네. 글씨도 잘 안 보여. 야, 어쩔 수 없이 붙어야겠다.”

SSS급 모션 오러 유저 이블은 카탈로그를 같이 보겠다는 핑계로 고개를 좀 더 체체 쪽으로 숙였다.

“아, 하나 더 있습니다. 한 권씩 따로 편하게 보십시오.”

그러나 매니저가 하나를 더 내밀어서 초를 쳐 버렸다. 이블은 저 멍청한 놈을 날려 버릴까 고민했지만, 곧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아닙니다. 같이 볼게요.”

체체가 이블 쪽으로 좀 더 가까이 붙어 앉으며 그렇게 말했기에.

분노는 순식간에 소멸했고, 이블은 그 뒤로 내내 실실 웃는 상태였다.

저택 루젬 세공실에 갖춰 놓은 세공 도구들은 모두 전문 브랜드의 장인들이 만든 고품질이었으나 생김새는 그닥이었다. 쓰임새 자체에만 신경 쓰느라 고글이나 장갑, 엔드스틱 등 모든 것들이 투박한 디자인이었는데, 여기 와서 카탈로그를 보니 신세계가 따로 없었다.

“이건 뭐야? 토끼?”

“이번에 새로 나온 고글입니다. 뒤쪽 벨트에 토끼 귀가 달려 착용하면 움직일 때마다 까딱까딱합니다. 벨트 이음새에 열기가 닿으면 귀 끝이 붉어지기도 하고, 기울어지는 각도에 따라 귀가 접히기도 합니다. 고양이나 강아지 귀도 있고요.”

“미친… 겁나 귀엽겠다. 뭐 이딴 걸 만들고 그러냐? 루젬 세공이 아주 장난인 줄 알지. 이것도 내 저택으로 보내.”

“예….”

“이건 또 뭔데?”

“선행상 시즌이라 이벤트성으로 발매된 엔드스틱입니다. 손잡이 부분에 하얀 날개가 달렸는데 움직일 때마다 팔랑팔랑 흔들리지요.”

“하, 미쳤다. 씨발.”

이블이 뜨거운 콧김을 내뿜었다.

분홍 토끼 귀가 달린 고글을 착용한 채 천사 날개를 단 엔드스틱을 들고 움직이는 체체를 상상하니 황홀해졌다.

“이거 다 살래. 저택으로 보내. 고양이랑 강아지 버전도.”

“예.”

“장갑은 뭐 없냐?”

“물론 있습니다. 카탈로그 47페이지를 봐 주시겠습니까.”

이블이 후다닥 페이지를 넘겼다. 체체는 그 옆에서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뭐야. 장갑은 영 별로네.”

카탈로그 47페이지부터 시작된 각종 장갑들 사진 중 이블이 원했던 모양은 없었다. 이블은 금방 흥미를 잃고 페이지를 휙휙 넘겼다.

“이런 거 말고. 좀더 도톰하고 귀여운 거 내놔 봐.”

“그런 장갑은… 없습니다. 아무래도.”

너무 귀여운 것만 찾다 보니 루젬 세공이라는 용도조차 잊은 듯했다. 세밀한 세공 작업을 어떻게 그런 장갑을 착용하고 하겠는가.

“다른 것들은 귀여운 것도 있으면서 왜 장갑만 평범하고 못생겼지. 막 손등에 새 그림 있다거나 하는 거 없어?”

“새라면….”

“그냥 작은 새 같은 거 있잖아. 존나 작고 귀여운 거.”

작은 새라고 하니 떠올랐다. 작년 눈 조각상 축제 때 이블과 체체가 <눈 맞은 뱁새>와 <살찐 뱁새>를 만든 사실은 아주 유명했다.

“장갑은 아니지만 작은 새 장식이 달린 보석함은 있습니다. 163페이지입니다.”

이블은 또다시 후다닥 페이지를 넘겼다.

163페이지는 각종 보석함을 실어 놓은 코너였다. 그중 자수로 만들어진 케이스에는 작고 하얗고 털이 빵실하게 부푼 새를 수놓았다.

“참 귀엽지 않습니까? 아기자기하고 귀여워서 꽤 잘나가는 제품입니다.”

“너 지금 장난해?”

그러나 이블은 매니저의 기대와는 달리 카탈로그를 내던지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씨발, 지금 대놓고 인종 차별하냐? 얘 까만 거 안 보여? 어디서 감히 나한테 희멀건 걸 추천하고 있어!”

인종 차별의 대명사이자 온갖 약자 차별을 조장하며 살아온 이블 엔덤이 크게 호통을 쳤다.

“그리고 존나 솜뭉치도 아니고 이딴 하얀 것들은 하나도 안 귀여워. 까만 게 최고야. 난 하얀 걸 귀엽다고 생각해 본 적 한 번도 없어. 누구처럼 저것도 좋고 이것도 좋은 쉬운 사람 아니거든. 난 까만 거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아.”

이블 엔덤은 옆에 가만히 앉은 체체의 눈치를 살피며 주절주절했다. 마치 자신은 다른 사람은 쳐다도 안 보고 너만 바라보고 살 테니까 칭찬해 달라는 것 같았다. 그 긴 주절거림에 체체는 “그렇군요.”라고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매니저는 이블의 취향을 빠르게 파악했다.

“있습니다. 뱁새… 뱁새가 대표 캐릭터인 브랜드가 있어요.”

생애 최대의 위기 순간을 맞은 매니저는 격렬한 두뇌 회전 끝에 한 브랜드를 생각해 냈다.

뱁새처럼 작은 새가 디자인된 제품들을 제작하는 세공 도구 브랜드가 있었다. 마침 쇼핑몰 입점 브랜드였다. 매니저는 카탈로그를 가지고 오겠다며 일어났다.

“까만 새 맞지? 또 희멀건 걸 귀엽다고 가져오면 죽여 버린다.”

“예… 갈색 깃털입니다.”

“응, 갈색이면 돼.”

매니저가 자리를 떠나고 이블은 체체를 힐끔거렸다.

“어떻게 하얀 게 귀여울 수가 있지? 난 진짜 이해가 안 돼. 대체 취향이 얼마나 독특한 거야. 그 취향으로 이 세상 살기 힘들겠다.”

“귀여울 수도 있지요. 하얀 새.”

“뭐?”

이블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너 설마 하얀 새가 좋아?”

“예, 귀엽습니다.”

“너는 그러면 안 되지. 완전 배신이야. 너는 피부가 까마니까 까만 새를 좋아해야지.”

“이사님은 피부가 하얀데도 갈색 깃털의 새를 좋아하시잖아요.”

“피부색이 무슨 상관이야? 이건 취향 문제인데.”

“이사님.”

체체가 자가당착에 빠진 이블을 빤히 올려다봤다.

“하얀 것도… 귀여워요.”

“…….”

“특히 하얀 깃털에 붉은 눈을 지닌 새라면 더요.”

“…….”

“정말 귀여우세요.”

체체는 설핏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블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두 사람에게선 무시당하고 있지만 엄연히 같은 테이블에 동석 중인 갈란다 상무의 얼굴도 빨갛게 달아올랐다. 어쩐지 공기가 후끈후끈해진 것 같았다. 토도 좀 나올 것 같았고.

혼자 낯빛이 멀쩡한 체체는 아까 이블이 내동댕이친 카탈로그를 집어 들었다.

“저도 구경해도 될까요.”

“어, 어. 당연하지. 같이 보자.”

이블은 체체와 어깨를 더욱 가까이 맞댔다. 이 핑계로 스킨십을 하는 것이다. 거기서 멈추는 게 아니라 카탈로그를 쥔 체체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슬쩍 얹기까지 했다. 체체는 잠깐 멈칫했지만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에 이블은 더욱 신이 나서 아주 헤벌쭉 웃어 댔다.

갈란다 상무는 최선을 다해 모르는 척했다. 이블 엔덤은 지금 자신이 콧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자각하지 못하는 게 분명하다. 이 자리에는 자신도 있었고, 16층 담당 직원들도 멀찍이서 지켜보는데 자각한 상태라면 저런 해괴망측한 짓거리를 할 리가 없다. 어떤 의미로는 안심되었다.

“야, 넌 근데 왜 따라다니냐.”

그때 이블이 갈란다 상무에게 물었다.

“예?”

“말귀 하나 제대로 못 알아들을 거면 따라다니지 말고 꺼져.”

무심코 반문해 버린 그에게 차가운 비난이 돌아왔다. 유심히 카탈로그를 들여다보던 체체가 고개를 들었다.

“이사님.”

“어, 왜. 넌 신경 쓰지 말고 계속 구경해.”

이블이 체체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체체는 카탈로그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가격이 적혀 있지 않아서요. 이건 얼마인가요?”

“글쎄다….”

체체는 매끈매끈한 검은색 가죽 장갑을 가리켰다. 이블이 생각하기에 솔직히 체체한테 어울릴 것 같지는 않았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가격이 뭐가 중요해. 내가 사 주면 되잖아.”

“제가 사고 싶어요.”

“왜, 내 돈이 싫다는 거야, 지금?”

“이사님께 사 드리고 싶습니다. 그동안 받기만 했잖아요. 이번엔 제가 선물 드릴게요.”

“…….”

안 그래도 날아갈 상태였던 이블의 기분이 더 좋아졌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덕분에 갈란다 상무의 반문으로 살벌했던 분위기는 완벽하게 사라졌다.

이블은 매니저가 새로운 카탈로그를 가지고 돌아오자마자 바로 체체가 얘기한 장갑의 가격을 물었다. 매니저로서는 이블의 취향이 전혀 아닌 디자인에 의아했지만 체체가 이블에게 선물할 거라고 말하자 납득했다. 상대의 속성에 대한 이해력이 높은 커플이었다. 매니저는 착실하게 답해 주었다.

“아, 예. 이천만 다알입니다.”

“…….”

체체의 재산 상황을 아는 이블은 체체를 대신해 말했다.

“좀 깎아 봐.”

“그, 그럼요. 20퍼센트 할인을.”

“더.”

“30퍼센트 할인해 드리겠습니다.”

“더.”

“40퍼센트 괜찮으십니까?”

“아. 좀 팍 좀 써 봐.”

“50퍼센트로….”

안 될 것 같은데. 쟤 재산에 턱도 없어.

이러다가 선물 못 받는 거 아냐?

초조해진 이블이 체체를 쳐다봤다. 체체는 담담하게 물었다.

“더 깎아 주실 수 있으신가요?”

“얼마를 원하시는지요….”

“공짜로 드리겠습니다.”

갈란다 상무가 다급히 외쳤다. 매니저는 시가 이천백삼십만 다알짜리 명품 세공 장갑을 그냥 주겠다고 하는 본사 상무를 보고 순간 미쳤나 생각했다. 그러나 놀란 사람은 매니저뿐이었다.

“대신 착용한 사진을 SNS에 딱 한 번만 올려도 되겠습니까? 이블 유저님과 체체 유저님 모두 개인 SNS가 없으시니 저희 쇼핑몰 대표 계정을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한 컷만 찍어도 됩니다.”

“지랄, 사진? 개뼉다구 같은 소리 하네. 그딴 걸 왜 내가.”

“저는 좋아요.”

“응, 나도 상관없어.”

이 자리에 제임스가 있었다면 그깟 이천만 다알 자신이 빌려주겠다고 했겠지만(아예 자신이 사겠다고 하면 체체의 선물이 아니라서 싫어할 것임을 알았다)… 이 자리에는 적당히 컷할 줄 아는 제임스가 아니라 체체의 말 한마디에 빠르게 태세 전환하는 이블만 있었으므로 SNS 사진 촬영 수락은 쉽게 이뤄졌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가격은 공짜로….”

“그런데 난 공짜는 싫어. 그럼 얘가 나한테 주는 선물이 아니잖아. 성의가 안 느껴진단 말이야.”

“그럼 십만 다알… 십만 다알만 주시면 됩니다.”

“흠, 너 그 정도는 돼?”

체체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고는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있습니다.”

“그래, 좋아. 십만 다알에 사는 걸로 해.”

그렇게 체체는 공짜로 얻을 수 있었던 물건에 전 재산 십이만 다알 중 십만 다알을 소비하게 되었다.

체체는 항상 가지고 다니는 크로스 백에서 꾸깃꾸깃 접힌 지폐를 꺼냈다. 지갑이 없는 건 알았지만 현금이 나오니 이블이 물었다.

“너 카드 안 쓰냐?”

“저는 카드를 발급받지 못합니다.”

체체는 체류 중인 외국인 가운데 난민 자격자로 분류되어서 신용 카드를 발급받지 못했다. 이블의 비서로 취업하며 한 번 더 은행에 가 봤지만 불가능하다는 소리만 들었다. 은행 계좌와 현금 카드는 얼마든지 발급 가능하지만 신용 카드는 불가능했다.

“카드도 없으면 불편해서 어떻게 살아? 집에 가면 하나 줄게.”

“감사합니다.”

체체는 늘 그렇듯 이블이 주는 금전적 혜택을 사양하지 않았다. 십만 다알짜리 선물을 하며 알시티에서 오직 열 명만 가진 홀리아 카드를 갖게 되었으니 오히려 체체가 선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계산은 한 번에 했다. 이블이 이 짧은 시간에 구매한 루젬 세공 도구는 수억 대에 육박했다. 가게를 하나 차려도 될 만큼 온갖 종류의 세공 용품을 샀지만 다른 사람이 만든 홀리아젬은 단 한 개도 사지 않았다.

용품은 모두 저택으로 바로 보냈지만, 장갑만은 매니저가 실물로 가지고 왔다. 장갑은 체체의 손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블이 빼앗아 갔다.

은은하게 광택이 도는 검은색 가죽 장갑이었다. 손목에 금실로 브랜드의 로고를 작게 수놓았는데, 이 부분엔 문구를 새길 수도 있었다.

이블은 장갑을 끼고는 손목을 휘휘 돌렸다. 입꼬리가 주체할 수 없이 올라갔다.

“괜찮네. 편하고.”

“잘 어울립니다.”

“당연하지. 워낙 완벽하니까. 뭐 나한테 안 어울리는 게 있겠냐?”

“있습니다. 안 어울리는 거 많을 거예요.”

“…….”

“이 장갑은 너무 잘 어울려요.”

아무렇지 않게 사람 긁어 놓고 예쁘게 미소지어서 사람 입을 막아 버린다. 사실 이제는 이 정도는 긁는 축에도 들지 않았다. 뱁새가 작은 부리로 쪼아대 봤자 간지럽기만 하지.

이블은 장갑을 낀 채 체체의 목 뒤를 쓸었다.

“디자인이 다가 아니야. 세공 장갑은 질이 좋아야 돼. 촉감 어때?”

“부드럽습니다.”

루젬 세공용 장갑은 오러 주입 과정을 견디는 동시에 아주 세심한 터치가 가능해야 한다. 전면은 가죽이지만 손가락 끝부분과 손바닥 밑면에는 부드러운 섬유를 대서 제작한 장갑이라 보기와는 다르게 부드럽고 따스한 온도였다.

이블은 체체의 뒷머리를 간질거리다가 슬그머니 손을 옮겨 뺨을 건드렸다.

“…….”

체체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어울려요.”

어울린다는 걸 거듭 말하면서 이블의 장갑 낀 손에 얼굴을 살짝 기대 왔다.

‘으어어!’

이블은 속으로 괴성을 내질렀다.

미쳤다.

존나 귀여워, 씨발. 사람이 이렇게 귀여워도 되는 거야? 아니, 지금 사람 아닌 거 티 내는 거야, 뭐야.

“이사님은 마음에 드세요?”

“응.”

솟구치는 신체 온도와 심장 박동을 억누르며 이블은 차분히 대답했다. 그러나 이미 입이며 눈이며 사정없이 웃는 상태였다.

“저… 이사님, 손목에 문구는 어떻게 해 드릴까요?”

둘만의 세계에 언제쯤 끼어들 수 있을까 눈치 보던 매니저가 슬그머니 물었다.

“아, 그거.”

이블은 체체를 힐끗 보고는 매니저에게 말했다.

“종이랑 펜 갖고 와.”

“예.”

매니저가 종이와 펜을 가지고 오자 이블은 생각해 둔 문구를 종이에 적었다. 단, 체체에게는 보이지 않게 손으로 가렸다. 매니저는 종이를 받고서 표정 관리를 못 하고 무척 오묘하고 미묘한 표정을 지어 버렸다.

“이렇게… 정말 이 문구로… 수놓아 드릴까요?”

“응.”

정말로…?

매니저는 다시 묻고 싶었지만 상대가 이블이라서 차마 한 번 더 확인하지 못했다.

쇼핑몰 SNS에 올릴 사진은 두 장 촬영했다. 장갑을 낀 이블과 체체가 함께 서 있는 사진과 장갑 낀 손을 클로즈업한 사진이었다. 상무와 매니저는 더 찍어도 되느냐는 질문은 엄두도 못 냈다.

“사진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응.”

이블은 장갑 낀 손 사진은 휙 넘기고 체체와 둘이 함께 찍은 사진을 유심히 관찰했다.

“미쳤다, 진짜…. 사진발도 잘 받아.”

“…….”

“너네 왜 닥치고 있어. 사진발이 잘 받는다고 생각 안 하는 거야 설마?”

“아뇨, 그럴 리가요. 너무너무 잘 받습니다.”

“제 쇼핑몰 근무 인생 중 이렇게 잘 받는 분은 처음 봅니다.”

“분?”

이블이 눈을 매섭게 떴다.

“왜 ‘잘 받는 분들’이 아니야. 씨발, 아까부터 신경 거슬리게 하네. 눈치가 없는 거야, 대가리가 안 돌아가는 거야.”

검은색 가죽 장갑을 천천히 벗으며 스산하게 말하니 상무와 매니저는 혀까지 얼어붙었다. 그들은 눈동자만 간신히 움직여 체체를 찾았고, 체체는 자연스럽게 이블의 시선에 끼어들었다.

“저도 사진 보여 주세요.”

“SNS 올라가면 봐.”

“SNS가 뭔가요?”

“…나중에 알려 줄게.”

“집에 가요, 이사님.”

체체는 이블의 팔 위에 손을 얹었다.

“…….”

이블의 화는 가라앉지 않았다. 여전히 화가 났으나 다만 이번에도 참아 넘겼다. 체체가 그것을 원하니까.

장갑은 문구를 수놓은 뒤 저택으로 본사 직원이 직접 배달해 준다고 했다. 약 보름이 걸리는데, 장갑 외에도 오늘 산 세공 용품 중 당장 배달이 불가능한 것들이 있어서 그때 한꺼번에 받기로 했다.

성공적인 쇼핑을 마치고 저택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이블은 불현듯 생각이 나 힙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집에 카메라 있어?”

- …어떤 용도의 카메라를 찾으시는지요?

“너까지 좀 멍청한 질문 좀 하지 마. 카메라가 사진 찍는 거 말고 무슨 용도가 있는데? 화질 좋은 걸로 구해 놔. 앨범도 같이.”

- 예, 알겠습니다.

힙스는 알아서 인물 사진 촬영에 최적화된 카메라로 구했다.

이블의 인내심을 걱정했는지, 쇼핑몰에서 발송을 기다리던 나머지 용품들도 사흘이 지나기 전에 모두 도착했다. 그날 이블은 하루 종일 체체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보냈다.

엔드스틱을 들게 하고 찰칵, 장갑을 착용한 모습을 찰칵, 고글을 씌운 후 찰칵. 그렇게 찍은 사진들은 하나도 남김 없이 현상되어 앨범에 곱게 끼워졌고 그중 체체가 함께 찍자고 해서 둘이 같이 찍은 유일한 사진은 이블의 지시를 따라 대형 액자로 만들어졌다.

이블의 저택에는 아무런 장식품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흔한 화병 하나 없는 곳에 처음으로 들어온 장식품이 눈 조각상 축제에서 받은 뱁새 눈 조각 액자였다. 그 액자는 이블의 방에 걸렸고, 이번에 둘이 함께 찍은 액자는 현관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곳에 걸렸다.

저택 사용인들은 그날을 이블 님, 체체 님 첫 커플 액자 들어온 기념일로 정해 거하게 케이크를 만들어 먹었다.

***

좀처럼 루젬 세공을 하지 못하는 체체를 위해 이블이 두 번째로 선택한 방법은 남의 힘을 빌리는 일이었다.

이블은 루젬 세공 전문 강사를 저택에 초대했다. 강의 세 번에 일억 다알을 받는 강사가 오로지 한 명의 수강생만을 위해서 강의를 하게 된 것이다. 강사는 이 주 동안 여섯 차례 강의를 하기로 계약했다.

사실 이블은 여전히 다른 사람이 체체를 가르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고, 다른 사람을 저택에 부르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루젬 세공이라는 건 전문적인 교육이 필요한 영역이었다. 이블이야 오러 능력 자체가 월등하고 모든 오러 관련 분야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어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아도 쉽게 해낼 수 있지만, 체체는 그 정도 천재는 결코 아니었다.

이블은 체체를 위해 강사를 불러 놓고서, 정작 강사가 체체에게 가까이 붙어서 가르치려고 할 때마다 매섭게 노려봤다. 그래서 강사는 최대한 거리를 유지한 채 강의를 해야만 했다.

다섯 번째 강의가 끝났을 때 이블이 체체에게 물었다.

“어때? 강의가 도움 되긴 하냐?”

“네.”

“…횟수 늘릴까? 이제 마지막 한 번 남았잖아.”

이 자리에 강사가 있었다면 백억을 줘도 추가 강의는 못 한다고 외쳤을 것이다.

“아니에요, 이사님. 안 늘려도 됩니다.”

“진짜? 괜찮겠어?”

“예, 이사님도 계시잖아요. 그리고.”

체체가 이블을 빤히 바라봤다.

“외부인이 계속 방문하면 스트레스 받으시잖아요.”

“…….”

이블은 그날도 어김없이 돌연 발작을 일으키는 심장 때문에 정원을 오십 바퀴 달리고 와야만 했다.

***

한 달은 정말 순식간에 지나갔다. 이블은 한 달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짧은 줄 살면서 처음 알았다.

이제 주말이 지나면 출근해야 하는데, 루젬 세공을 만든다는 명목으로 받은 휴가라서 반드시 완성된 홀리아젬을 하나 가져가야만 했다. 그러나 사실… 이블이 있는 이상 반드시라는 건 없었다. 센터의 모든 사규는 이블에게 통하지 않았다.

이블은 체체에게 억지로 창작을 강요할 마음도 없었다. 그렇게 힘들면 그만두라는 말이 혀끝까지 맴돈 적도 많았다. 하지만 내뱉지 않은 건 루젬 세공을 꼭 하고 싶어 하는 체체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휴가 마지막 주말, 이블은 체체에게 빈 노트와 펜을 건넸다.

“바로 세공하는 게 어려우면 밑그림을 그려 봐.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쓴 뒤 그걸 환상화하는 거지. 우선 주제부터 정해. 생각해 둔 주제 있어?”

“아니요.”

환장하겠다. 생각해 둔 것도 없단 말이야? 왜 이렇게 느긋해. 머리가 작아서 그런 거야 뭐야.

“응, 그럴 수 있지. 주제가 없을 수도 있지….”

“…….”

“그 강사가 그랬잖아. 처음은 무의식 속에서 나오는 거라고. 너도 주제 없이 만들다 보면 알아서 나올 거야.”

체체는 눈을 내리깔았다. 무언가를 곱씹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블은 체체의 손에 펜을 쥐여 주었다.

“기승전결이 있는 스토리로 할 거야? 아니면 정적인 장면이나 풍경으로 할 거야?”

체체는 자신의 마음속에 맴도는 영상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스토리 있는 걸로요.”

“그 이야기를 여기에 글로 써 봐. 키워드만 나열해도 괜찮아.”

“…….”

“어렵겠어?”

“해 보겠습니다.”

체체는 노트를 빤히 보더니 세 장 정도를 찢었다. 의아하게 보는 이블에게 노트를 내밀고 자신은 세 장의 찢은 종이를 가졌다.

“이사님도 그려 보세요.”

“뭐?”

“이사님이 만드실 홀리아젬이요.”

“하, 참 나.”

나 안 만들 건데.

그 말은 할 수 없었다. 체체가 예쁘게 미소 지으면서 권유했기 때문이었다.

이 뱁새 새끼 내가 자기 웃을 때 꼼짝 못 한다는 걸 알고 있어. 완전 대놓고 아는 게 분명해!

이블은 속으로 바득바득 이를 갈았지만 별수가 없었다. 내 뱁새의 웃는 얼굴은 너무 귀엽고 예뻤으므로.

둘은 넓은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아 각자 창작의 시간을 가졌다. 체체는 몇 번 그림을 그렸는데, 그때마다 이블이 반려를 내렸다.

“이게 뭔데. 침대야?”

“로봇입니다.”

“이건 알람 시계야? 시계 종류 같은데.”

“로봇을 구경하는 사람들이에요.”

이블은 그림이 그려진 종이를 구겨지지 않게끔 조심히 파일철에 집어넣었으며 말했다.

“넌 그림은 무리다. 글이나 써라.”

“네.”

결국 체체는 글로 노선을 틀었다. 혹시 손이 아플까 봐 걱정된 이블이 노트북을 줄까 물어봤지만 체체는 왜 글 쓰는데 노트북 같은 소리를 하느냐는 반응이었다.

체체는 열심히 썼다. 잿빛의 정수리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이블이 쓰윽 종이의 내용을 훔쳐봤다.

“아, 돌았나. 장난해?”

그 내용이 전부 타르어로 적혀 있어서 이블은 버럭 성질을 냈다.

“공용어로 써. 대체 알아볼 수가 없잖아. 타르어 잘 모르는 사람도 생각해야지!”

“어째서요? 저만 알아보면 되는 거 아닌가요?”

“뭐…?”

체체가 고개를 갸웃하며 담담하게 물어보는 말에 이블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너무 당황스럽고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섭섭해졌다. 정말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이 서운한데, 굳이 표현하자면 가슴속에 쓸쓸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떻게 저런 말을 한단 말이야.

나한테 안 보여 줄 생각을,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냐고.

내가 타르인이 아니라서 그래?

타르로 국적을 바꾸면 완전 친절해지겠지?

“그래, 너만 알아보면 되지. 아주 네 맘대로 써라. 난 몰라.”

이블은 입을 삐죽 내밀며 삐진 티를 팍팍 냈다.

종이를 북북 찢거나 펜을 내던지거나 한숨을 쉬거나 테이블 다리를 걷어차거나. 얼른 달래 주지 않으면 세공실을 부숴 버릴 기세였다.

그런 이블의 행태를 지켜보던 체체가 입을 열었다.

“이사님.”

“왜.”

“종이 한 장만 더 주시겠어요?”

“진짜 귀찮게 하네. 그러게 누가 노트 달랬나.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 가지고 사람 귀찮게 만들어.”

이블은 툴툴거리며 노트의 절반을 찢어서 건넸다. 체체는 지금까지 작성한 것은 구겨서 휴지통에 버리고, 이블이 준 종이에 다시 글을 써 내려갔다.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린 채 체체가 하는 꼴을 보던 이블은 곧 스멀스멀 입꼬리를 올려야만 했다. 잠시 후 이블의 표정은 완전히 풀어졌다.

체체가 알시티어로 한 자, 한 자 열심히 글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오전부터 시작해서 점심 식사 때만 잠깐 멈추고 계속 글을 쓴 지 세 시간째.

“다 썼습니다.”

체체가 드디어 글을 완성했다며 종이를 내밀었다. 이블은 얼른 종이를 낚아챘다.

“다 쓰면 다 쓴 거지, 왜 날 주냐? 내가 읽어 줬으면 좋겠나 봐. 그래 네 소원이라면 읽어 줄게.”

“…….”

이블은 싱글벙글 웃으며 체체의 첫 홀리아젬이 될 내용을 읽었다.

삐릿삣삐

어느 날 커다란 로봇이 알시티 상공에 나타났다.

팔을 휘두르자 센터 빌딩이 무너졌다.

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사람들이 도망갔다.

삐리릿

로봇은 엄청 세고 강했고 크기가 센터 빌딩만 했다. 그런 로봇은 사람들을 손에 쥐고 삼키기 시작했다.

콰콰쾅!

소문을 듣고 군인들이 나타나 막 대포를 쐈다.

삐리리삘.

로봇은 대포를 맛있게 먹었다. 엄청 센 로봇은 다시 인간을 뱉어 냈다. 인간들은 다친 곳이 없었다. 인간들은 로봇이 왜 저러는지 영문을 몰랐다. 아무튼 로봇은 자리에 주저앉아서 대포를 그 팝콘 같은 거 던져서 입으로 받아먹는 그런 거처럼 받아먹었다.

그날 이후 로봇은 그곳에 자리 잡고 움직이지 않았다. 로봇은 너무 키가 크고 귀가 좋아서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다 보고 다 듣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인간들이 바다와 바다 사이에 다리를 지으려고 했는데 재료가 부족했다. 로봇이 자신의 팔을 떼어 냈다. 우주선을 만드는데 재료가 부족하자 로봇은 발도 떼어 냈다.

로봇이 도와준다는 사실을 알고 인간은 로봇 앞에서 매일 부족한 척하며 많은 것을 얻어냈다. 로봇은 양팔과 양발이 없었다. 나중에는 눈과 다리도 없어졌다. 로봇은 몸뚱이만 남았다. 인간들은 덩그러니 놓여 있는 로봇을 해부했다. 로봇의 안은 비어 있었다.

인간들은 로봇이 움직이는 모습이 그리워서 바다와 바다를 잇는 다리를 다시 로봇에게 돌려줬다. 우주선의 발도 다시 로봇에게 조립했다. 눈과 다리도 돌려줬다. 그러나 다시 맞춰도 움직이지 않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