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블은 아르말의 재해를 깔끔히 해결하고, 아름다운 유추리 해변에서 짧은 휴가를 보낸 뒤 알시티로 돌아가기 전 대통령 관저에 초대받았다. 아르말 정재계 인사들과 대통령이 함께하는 만찬회였다.
격식 있는 자리인 만큼 수행원들이 맞춤 제작한 스리피스 슈트를 챙겨 왔다. 이런 자리에서 늘 캐주얼 차림이나 캐주얼 정장 차림이던 체체에게도 이번에는 각이 잡힌 스리피스 슈트가 제공되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불참하겠다고 통보했던 이블은, 체체가 맞춤 제작한 슈트를 얼떨떨하게 건네받는 모습을 보고 홀린 듯이 참석을 결정했다.
그때 이블은 옷을 빠르게 갈아입은 참이었다. 베스트는 익숙하게 내다 버리고, 셔츠 단추를 세 개까지 풀어 헤친 그는 묘하게 반짝거리는 눈으로 체체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야, 너네는 무슨 저런 어린애한테 정장을 입히려고 하냐? 분명 존나 안 어울릴 거야. 사진 찍어서 길이길이 놀려야겠다. 꼬마애가 어른 옷 입은 거 같을….’
놀릴 준비만 만만이던 이블은 슈트를 입고 나온 체체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제임스도 옆에서 짧게 감탄했다.
‘…….’
체체는 자신의 차림에 대한 반응 따위 무신경하게 넘겼다. 살아생전 처음 입어 보는 의복을 두고 어떤지 묻지도 않는 체체에게 오히려 이블이 안달 났다.
‘너 그런 옷 입으면 안 되겠다. 너무 야해. 인간 유혹하러 내려온 악마 같아.’
‘악마?’
‘응, 다 벗고 다니는 악마 있잖아. 사람을 유혹해 구렁텅이로 빠트려서….’
‘목숨을 빼앗아 버리는 악마요?’
‘뭐? 아니! 아니지. 왜 그렇게 돼!’
이블이 화들짝 놀랐다.
‘그러니까 악마 말고 천사 같다고. 씨, 너 악마처럼 나쁘다는 뜻 절대로 아니야. 오해하기만 해 봐. 가만 안 둬.’
‘…….’
‘빤히 보지 마. 너무 야하니까.’
살갗이라고는 얼굴과 손목 외에는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체체는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지만 이번만큼은 제임스도 공감했다. 평소에는 소년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이렇게 입혀 놓으니 영락없이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다갈색 피부에 황금빛 눈동자, 회색 머리칼…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청년은 허리도 잘록하고 신체 비율도 좋았으며 자세도 곧았다. 신체 사이즈에 딱 맞춘 칠흑 같은 슈트를 입으니 시선을 두기가 무서울 정도로 야했다.
‘너 눈 돌려라.’
진짜 악마의 으르렁거림이 있었기에 제임스는 혼신을 다해 허공을 바라봤다.
다른 사람들은 허공을 쳐다보게 하고서 이블은 마음껏 체체의 몸매를 음미했다. 맞춤 제작 의상이다 보니 몸 선이 깔끔하게 드러났다.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와 긴 다리까지. 작은 키임에도 얼굴이 작고 비율이 좋아서 혼자 서 있으면 절대로 작아 보이지 않았다.
뜨거운 눈길을 받으면서도 체체는 미동 없이 앞만 바라보고 걸었다. 동그란 이마를 덮은 잿빛 머리칼, 촘촘히 난 속눈썹과 붉은 입술을 보며 이블은 왠지 갈증이 일었다. 마른침을 삼키고 괜히 목을 돌리며 스트레칭했다. 그래도 뱃속이 간지러운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
“이사님, 이제 들어가면 아르말 대통령이 계실 겁니다. 그분께라도 존댓말을 써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싫어. 꼬우면 그쪽도 놓으라고 해.”
만찬회장에 들어서기 전 제임스가 간곡히 부탁했지만 이블은 단칼에 거절했다. 이블은 가끔씩 마음이 내키면 공식 석상에서 존댓말을 써 줬는데, 오늘은 내키지 않는 날인 듯했다. 이블이 존댓말을 사용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대신에 그는 상대가 그에게 말을 낮춰도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한번 거절당해서 더 청하기 어려웠던 제임스는 좀 부탁해 달라는 뜻으로 이블의 뒤를 따르는 체체에게 눈짓했다.
‘당신이 부탁하면 들어줄지도 몰라요. 거듭 부탁해도 화를 내지 않고 말을 들어줄 겁니다. 청해 보세요.’
“너 씨발 애한테 뭔 짓 하냐? 눈깔 도려내 버린다.”
“죄, 죄송합니다.”
이블이 바로 차단했지만, 결코 눈치가 없지 않은 체체는 제임스가 전하고자 한 뜻을 알아챘다. 그러나 체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무 아무 말이 없어서 오히려 이블이 체체를 돌아봤다.
“왜, 난민. 뭐 할 말 있으면 해.”
“없습니다.”
체체는 이블에게 존댓말을 사용해 주기를 부탁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이다.
이블은 그것에 매우 흡족해했다.
이블과 체체, 수행원들이 만찬회장에 들어서자 기다리던 사람들이 긴장한 얼굴로 인사를 해 왔다.
“국민을 대표해 감사 인사를 표합니다, 이블 유저님. 즐거운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르말의 대통령은 알시티어를 능숙하게 사용했다.
이블은 거의 큰절이라도 하듯이 거듭 감사 인사를 하는 아르말 사람들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았다.
나오는 음식들은 대부분 완벽한 아르말식이 아니라 퓨전 요리였다. 주말 내내 아르말 특식을 먹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이블은 체체 쪽으로 아르말의 제철 과일 음료를 밀었다. 이블의 앉은 자세는 이미 체체를 향해 틀어졌다.
맞은편에 앉은 대통령은 알시티어로 말을 걸었다.
“이사께서는 이제 귀국하시면 곧바로 기자 회견을 하시는 겁니까?”
“아, 맞네. 귀찮게… 까먹고 있었는데 상기시키지 마. 야, 물만 마시지 말고 이것도 먹어.”
말투는 몹시 불량스러웠고, 옆자리의 난민에게 신경 쓰느라 산만하기도 했다. 대통령은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나라를 위해 처음으로 능력을 개방해 준 것에 대해 무척 고맙게 생각하오.”
“됐어. 후회 중이니까. 앞으로 더 귀찮아질 거 생각만 해도 짜증 나는데… 어때, 달지?”
이블이 빨대를 쪽쪽 빠는 체체를 보며 히죽 웃었다. 체체는 빨대를 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두 손은 유리컵을 꼬옥 붙잡았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냥 평범하게 음료를 마시는 중이었지만 이블의 눈에는 처음 먹어 보는 맛있는 음료에 기분이 좋아진 뱁새로 보였다.
“그… 뉴스를 보면 알겠지만 우리 국민들도 모두 고문 이사께 감사한 마음이고, 그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알시티의 국화를 들고 거리를 행진하고 있소. 아르말에서는 길일에 행진을 하는 문화가 있지. 더 머무른다면 좋겠지만 오늘 떠난다고 해서 급히 약소하게나마 감사의 행진을 하는 것이니 가기 전에 한번 얼굴을 비춰 주면 어떻겠소?”
“젠장, 겁나 귀엽네.”
“…….”
“머리카락 흘러내린다.”
너무나 다행히도 이블이 겁나 귀여워하는 사람은 아르말의 대통령이 아니라 옆자리에 앉은 난민이었다. 이블은 손을 뻗어 체체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줬다. 완벽하게 무시당한 아르말 대통령은 이블의 표현에 따라 ‘겁나 귀여운’ 소년에게로 삐걱 고개를 돌렸다.
이블은 짙은 회색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그 머리칼의 주인은 그저 무심하게 과일주스를 마셨다.
체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난민.
분명 이블과 사이가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이건 꼭 애인 대하는 것 같다… 라고, 상대가 보통 사람이라면 그렇게 추측해야 마땅하지만 상대가 이블이기에 대통령은 식은땀까지 흘리며 짐작했다.
‘피를 말려 죽일 셈이 분명해!’
체체를 가지고 놀다가 방심하면 도륙하려는 작정인 게 분명하다. 머리카락 흘러내린다면서 머리를 잘라 버릴지도 모른다.
저 인종 차별주의자에 약자 혐오자, 극단적 이기주의자, 반사회성 인격 장애를 앓는 무자비한 폭군이 난민에게 호감을 가질 리 없다는 강한 확신이었다. 보이는 대로만 믿는다면 세기의 스캔들이 되겠지만, 대통령을 비롯한 아르말인들은 그런 가능성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
‘저 악마가 이런 해사한 웃음이라니.’
이블의 최근 행태를 지켜봐 이블이 체체를 많이 봐준다는 걸 아는 수행원들도 오늘 모습에는 다소 놀랐다. 그동안 이상하게 구는 것에 많이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처럼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다정하게 대하는 건 처음이었다.
주말 동안 별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언제 돌변할지 몰라 불안하면서도 매우 흥미진진했다.
“맛있냐? 너 단거 진짜 좋아하네.”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니야. 너 단거 좋아해. 네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냐.”
이블은 귀엽다는 듯이 두어 번 더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들 당황한 가운데 대통령이 선수를 쳤다.
“그, 단걸 좋아하신다면 센터로 순후를 좀 보내 드릴까. 지금 시기가 제철이라 아주 달고 맛있소.”
“아, 씨.”
체체랑 대화하는데 자꾸 늙은 아저씨가 끼어들어서 기분이 나빠진 이블이 닥치라고 하려는 순간, SSS 모셔너의 동체 시력으로 체체가 눈을 깜박이며 입술을 여는 모습을 보았다.
이블은 간신히 목소리를 내뱉기 직전에 멈췄다. 그 덕분에 체체는 방해받지 않고 말했다.
“주신다면 저택 분들에게 나눠 드려도 되겠어요.”
“…왜 나눠 줘. 네가 다 먹지.”
“우리만 먹기에는 양이 많잖아요.”
순후를 얼마나 보내겠다고 정확히 말하지 않았던 대통령은 체체의 얘기를 듣고 식은땀을 흘렸다. 서너 상자 정도를 생각했던 대통령은 최소 십 톤 트럭 백 대는 준비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 우리… 그렇지…. 우리가… 우리지….”
이블은 어째서인지 고장 난 기계처럼 버벅거렸다.
“이사님, 순후는 알시티에도 있습니다.”
상태가 심상치 않자 이블이 진짜 선물을 받으려고 할까 봐 제임스가 얼른 덧붙였다.
“당장 납품 요청하겠습니다.”
사실 제임스는 이블의 비서로서 각종 선물을 받았다. 엔덤 가문도, 오러 센터도 이블이 소속한 곳으로서 선물을 가장한 뇌물을 받았지만 정작 이블은 지금까지 그 어느 곳에서도 선물을 받지 않았다.
오러 유저로서건 센터의 고문 이사로서건 엔덤 가문의 후계자로서건 그 어떤 것도 받지 않았는데, 처음 ‘직접 선물을 받지 않는다’라는 관행이 생긴 건 인간 혐오증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딘가에서 선물을 받으면 전 세계가 그곳을 매우 특별한 곳으로 인식할지도 몰랐다. 제임스는 이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었다.
“우리 대통령 관저에 납품되는 순후는 최고 특등품이지. 아무리 알시티 오러 센터라도 이 정도의 산지 직송 특등품은 구하지 못할 것이오.”
“충분히 구할 수 있습니다. 당장 오늘 저녁에라도.”
“십 톤 트럭 삼백 대 분량을 말인가.”
“…….”
“원산지 직송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양이지.”
그렇게나 많이 주려고 했단 말이야? 고작해야 서너 상자일 줄 알았는데!
제임스의 말문이 막혔다. 고작해야 서너 상자만 주려고 했던 대통령은 뻔뻔하게 거드름을 피웠다.
“이블 유저, 말만 하시오. 바로 준비해 드리겠소.”
“그럼 받도록 하지. 비행기 안에 실어 놔. 가면서 마실 과일주스 만들어 놓고.”
“예.”
결국 이블이 선물을 수락했다. 결사반대를 외치던 것과는 다르게 제임스의 대답은 빨랐다. 속마음과 달리 항상 대답만은 빨랐기에 지금까지 비서실장의 자리를 유지했던 것이다.
제임스는 뒤쪽의 수행원에게 눈짓했다. 수행원 한 명이 대통령 관저 수행원과 함께 순후를 싣기 위해 일어났다. 이것으로 아르말은 최초로 이블 엔덤 본연의 초능력을 이끌어 낸 곳에 이어서 최초로 그에게 선물을 준 곳이 되었다.
복도로 나온 아르말 측 수행원은 얼굴에 웃음꽃이 피웠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분위기가 괜찮네요. 이블 유저님이 저러다 갑자기 터지실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아무 일도 없고.”
“방심하지 마세요. 우리 이사님이 좀 많이 무서운 분입니다. 저렇게 웃고 계시다가 갑자기 사람을 벽에 날리고는 하신다니까요.”
“그런가요? 저는 이블 유저님에 대한 소문이 퍽 과장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소문만큼 사이코패스 악마 같지는 않으시고, 그냥 적당히 성격 나쁜 인성 파탄자 같으십니다. 체체도 화면보다 더 예쁘고요… 그런데 자꾸 귀엽다고 하시는 걸 보니 이블 님이 체체를 상당히 싫어하나 봅니다. 피 말려 죽이려는 속셈이신가 봐요.”
“잠시만, 무슨 말씀입니까.”
이블 쪽 수행원이 돌연 정색했다.
“소문이 축소된 편이죠. 우리 이사님은 소문보다 훨씬 더 악마 같으십니다. 모든 악의 근원입니다.”
“생각보다 자주 웃기도 하시고… 조금 건방진 말투만 빼면 그냥 보통 수준으로 나쁜 사람 같던데요.”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악마란 말입니다. 지구 역사상 가장 악한 인성 파탄자에게 보통 수준이라니 그 말 취소하십시오.”
“예?”
“조금 변하시긴 했지만 우리 이사님은 아직도 명실상부 세계 제일가는 인성 쓰레기, 인성 파탄자, 지옥에서 온 대악마입니다. 이것만은 절대로 양보 못 합니다!”
“아… 예… 취소할 테니 진정하시죠….”
아르말의 수행원은 땀을 삐질 흘리며 수그렸다. 그래도 울분이 풀리지 않은 이블 쪽 수행원이 쉬익쉬익 콧김을 뿜어 댔다. 너무나 억울했다.
우리 이블 님이 얼마나 악마 같은데, 이런 식으로 명예(?)가 실추되다니. 소문과는 다르다니. 보통 수준으로 나쁜 분이라니. 아직도 건재한 악마를 두고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물론 둘의 대화는 모두 이블의 귀에 들려왔다.
이상하게 화는 나지 않고 가벼운 웃음만 나왔다. 확실히 조금은 변한 것 같기도 하다. 아르말인들이 시끄럽게 말을 걸고, 알시티에서 귀찮은 일이 기다리는 걸 알아도 계속 웃음이 나오는 걸 보면.
“순후 받으면 집에다 둘 테니까 목마를 때 마셔. 스물네 시간 내내 마실 수도 있게 해 줄게.”
“감사합니다, 이사님. 하지만 그렇게 마시면 당뇨병 걸려요.”
예상 못 한 대답에 이블의 웃음이 짙어졌다.
“그런다고 당뇨 안 걸려. 건강 검진은 해 보자. 깜빡했네. 한다 해 놓고.”
“…….”
“근데 너 같은 무식…. …당뇨는 어떻게 알아?”
“…….”
“아니, 씨발, 아.”
멈추려고 했으나 이미 나가 버린 단어를 체체가 들어 버렸다. 이블은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고, 만찬회장의 사람들은 긴장한 가운데에서도 흥미진진하게 둘을 구경했다.
“이사님은 제가 무식한 게.”
“…….”
“…….”
“뭐. 왜 말하다 말아.”
“아닙니다.”
“말하라니까.”
“아니에요.”
이블이 싫어하는 상황 중 하나였다. 말을 제대로 잇지 않고 중단해 버리는 것. 작년, 이블에게 질문할 기회를 얻은 기자 한 명이 질문을 하려다 우물쭈물한 적이 있었다. 그는 이블이 던진 마이크 때문에 뇌출혈이 와 평생 후유증을 앓는 신세가 되었다.
“아씨, 진짜… 평소에는 닥치래도 겁나 지랄 대더니 갑자기 왜 그러냐.”
“…….”
“사람이 살면서 말실수를 좀 할 수도 있지. 너는 그걸 가지고 삐지고 그래?”
“…….”
“야, 일단 순후 주스나 처마셔 봐.”
그러나 지금 이블은 테이블을 엎기는커녕 난감해하며 당분을 들이켜기를 종용했다. 달콤한 걸 좋아하니까 먹으면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의도였다.
체체는 한 모금 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좌중이 조용해서 의자 빼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이블이 다급히 반응했다.
“어디 가게.”
“화장실 다녀오겠습니다.”
체체는 화장실이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이블이 경호원에게 눈짓했고 경호원 한 명이 난민의 뒤를 따랐다.
겨우 한 명이라는 게 마음에 안 들었던 이블은 눈썹을 찌푸리면서 오러를 이용해 강제로 경호원 두 명의 등을 떠밀었다. 무형의 힘에 발걸음을 옮긴 경호원들은 얼떨떨하게 난민을 경호하러 향했다.
체체가 사라지자마자 웃음을 지운 이블을 보고 구경꾼들도 표정을 추슬렀다. 흥미진진하게 보던 영화 예고편은 이제 끝났다.
아르말의 부통령이 주름이 자글자글한 눈을 접으며 입을 열었다.
“체체 씨는 알시티 말이 상당히 능숙하시군요. 일 년 만에 이 정도라면 아주 총명한….”
“닥쳐. 나도 쟤가 무식하지 않다는 거 알아. 여기 있는 사람 중에서 나 빼고 제일 똑똑한 애야.”
체체가 옆에 없어지니 이블은 그야말로 이블스럽게 굴었다. 그는 삐딱하게 앉아 다리를 꼬면서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올렸다.
체체가 나간 쪽을 노려보는 이블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볼이 불만스럽게 꿈틀거렸다.
“야, 돌아가면 타르어 사전 구해. 교재도 새로 구하고. 지금 있는 거 완전 오류도 많고 허술해.”
“예.”
뜬금없는 지시에 즉답하며 제임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시중에 존재하는 타르어 교재가 없기 때문에 이블이 교재를 구하라고 한 날 난리가 났었다. 지금 교재는 빌라인 제라도에 있는 타르어 교재를 알시티어로 번역해서 급하게 인쇄해 이블에게 준 것이었는데… 이제는 출판사라도 새로 만들어서 제작해야 하나….
“뭐라 말하는지를 모르니까 존나 답답하네.”
“체체 씨가 이사님 앞에서 타르 말을 자주 사용합니까?”
“내 앞에서는 알시티 말 쓰는데 전화할 때는 타르 말 써. 쟤 지금 전화하러 갔잖아.”
“전화….”
“방금 짧게 진동 왔잖아, 병신아. 누가 메시지 보내서 그거 확인하려고 나간 거야. 문자가 서투니까 전화를 건 거고. 알시티인 세 명이 붙어 봤자 타르 말을 모를 걸 알고 아주 맘껏 떠들고 있어. 짜증 나네. 국제 전화 요금제 살려 버릴까.”
가족이 타국에 나가 있는 제임스가 움찔했다.
이블은 체체가 나간 쪽을 다 태워 버릴 듯한 뜨거운 시선으로 노려보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분노의 기운이 스멀스멀 새어 나왔다. 이러다가 일이라도 저지를 기세였다. 주위 사람들은 의자를 옆으로 밀며 이블에게서 떨어졌다.
아르말 대통령은 고민하다가 모두를 대표해 질문을 던졌다.
“이사님과 체체 씨는… 서로 호감을 가진… 관계인가 보오.”
“뭐무뭣뭐?”
“……?”
“뭐뭐뭔 개소리야. 호감이라니!”
갑자기 이블이 극도로 흥분하며 날뛰었다.
“어떻게 호감을 가져! 그런 말 그렇게 쉽게 하는 거 아니야.”
“시, 실언을 했소. 좋아하는 것처럼 보여서….”
“너네는 씨발 사람이 착하고 귀엽고 예쁘기만 하면 다 좋아하게 되냐? 어? 그냥 좀 애달프게 웃었다고 반해? 애가 아기 뱁새처럼 쫑쫑거리면서 다니고, 평범한 인간들이랑 존나 다른 행동 보이고, 이 거지 같고 역겨운 세상에는 너무 과분한 영웅이라는 이유만으로 내가 쟤를 좋아할 것 같아?”
이블이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대통령은 무심코 자신의 경호원 위치를 찾았다.
사실 대통령은 이블이 체체에게 호감을 가졌다고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분위기 환기차 물어본 것이었다. 이렇게 격렬한 반응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
“대가리가 있으면 생각을 하고 발언해. 나 같은 완벽한 사람이 왜 쓰레기 국가의 난민 따위를 좋아하겠어?”
“그… 렇군. 이거 미안하오. 하긴 난민은 상대하기에 좀 그렇지.”
“미쳤나, 진짜. 어따 대고 난민이야. 내가 그쪽 보고 ‘아르말인 주제에’라고 말하면 기분이 어떨 거 같은데?”
어떻냐니.
그냥 이블이 짖는구나 할 것이다.
지금처럼 말이다.
“저자에게 대하는 태도가 무척 달라 보이는 바람에 내가 실언을 했소.”
“흥, 다르기는 무슨. 그냥 난민 새끼가 궁상떠는 꼴 보면 명치가 빠듯하게 조여 와서 막 대하는 것뿐이야. 여기, 심장 부근도 떨리고, 가끔 미친 듯이 뛰기도 하고. 쟤 건강 검진 할 때 나도 같이 받아야겠어.”
당신은 SSS 모션 오러 유저잖아.
모두가 속으로 외쳤다.
“아무튼 나는 그냥 울화가 치솟기도 하고 한 대 때리고 싶기도 하고, 가끔은 존나 귀엽기도 하고 뺨 깨물고 싶고 맛있는 것도 먹이고 싶고, 내 위에 눕혀 두고 푹 재우고 싶을 뿐이지 별로 좋아하는 거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겠지. 안 그래? 나는 모든 게 완벽한 사람이고, 쟤가 저렇게 환장하는 타르에 오러 유저 보내는 일도 허락했잖아. 쟤는 날 좋아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이해했소….”
대통령은 이해했다.
이건 공개 고백이다.
살해하겠다는.
이블이 스무 해를 살아오면서 저질러 온 악행들을 떠올리면 도저히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낄 사람으로 생각되지 않으므로 아르말 사람들은 저 발언을 자각하지 못한 첫사랑이 아니라 자각하지 못한 살해 의지라고 해석했다.
이들은 이블이 체체에게 존나 귀엽니 어쩌니 한 것도 ‘시체로 만들면 귀엽게 봐 줄 만하겠군’이라고 멋대로 해석해서 들었다. 아마 대놓고 체체를 좋아한다고 고백해도 ‘시체로 만들면 조용해서 좋아한다’라고 알아들을 터였다.
내용이 어떻든 이블 데빌이 큰소리를 냈다는 자체만으로도 온몸의 털이 쭈뼛 서 얼어붙은 사람들 사이에서 제임스는 혼자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제임스도 최근까지는 아르말인들처럼 생각했다. 이블이 체체에게 그답지 않게 대하는 이유가 호기심인 줄 알았다. 손가락으로 툭 치면 끈이 떨어질 연약한 인형을 향한 호기심이며, 그 호기심이 다할 때까지 가지고 놀다가 버릴 거라고.
이전까지 제임스는 이곳의 아르말인들과 마찬가지로 선입관과 편견에 휩싸였던 것이다. 이블 데빌은 절대로 살아 있는 사람을 좋아하지 못할 거라는.
그냥 호감을 가진 관계냐는 짧은 질문에 저토록 흥분하면서 주절주절하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편견만 버리고 나면 너무나 선명하게 보인다.
색안경을 빼고 보면 그는 첫사랑에 어쩔 줄 모르는 보통의 어린애일 뿐이다. 물론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기 어려워졌다고 상대를 때리고 목을 조르는 건 평범한 어린애가 저지를 행위가 아니지만, 이블에 대한 콩깍지를 버리지 못한 제임스에게는 스물한 살의 귀여운 투정으로 보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블에 대한 두려움도 0.0001 나노미터 정도는 옅어졌다. 제임스는 싱긋 웃었다.
“야, 너 왜 웃어.”
이블이 바로 지적해 왔다. 제임스도 바로 정색했다.
“웃은 게 아닙니다. 턱 근육이 말을 안 들어서요. 가끔 침도 떨어지는 거 있죠.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봅니다.”
“치매 걸려서 사람 짜증 나게 하기 전에 빨리 일 관둬.”
“예, 물론이죠…. 그나저나 확실히 체체 씨가 예전에 비하면 말수도 많아지고 밝아진 것 같습니다. 어제 이사님께서 베푸신 선행이 무척 고마웠나 봅니다.”
이블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알고 있네. 쟤 이제 제법 조잘조잘 잘 말하는 거.”
“예, 이사님께 마음의 문을 연 것 같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야.”
이블은 체체가 나간 쪽을 바라보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게 아니야.’
그 후의 말은 나오지 않았으나 그럼 무엇이냐고 물어보기 힘든 분위기였다.
이블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아르말 측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이블이 주말을 보낸 유추리 해변을 비롯한 관광 명소 얘기를 시작하고, 제임스와 수행원들이 맞장구를 쳐 주었다.
이블의 관심은 온통 체체에게 향했다.
체체는 전화를 끊고서도 어물쩍대며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 점마저 아주 앙큼했다.
제임스는 체체가 이블에게 마음의 문을 연 것 같다고 얘기했지만, 이블이 느끼기에는 그 반대였다.
‘마음의 문은 내가 열었고, 그걸 체체가 느꼈다.’
안 그래도 건방진 놈이 더 건방 떨 걸 생각하니까 한숨이 나오면서도 왜인지 가슴이 간지러웠다. 그동안은 체체를 기다리며 자꾸 지어지는 미소를 일부러 지워 내고 인상을 썼지만, 이제 이블은 개운하게 웃었다.
분명 귀찮은 일들이 산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체체의 존재로 인해 오늘 하루가 기대됐다.
***
이블은 알시티에 도착하자마자 공항에 마련된 기자 회견장에서 오러 능력의 한계에 대한 인터뷰를 해야만 했다. 그가 인터뷰하는 동안 체체는 저택으로 먼저 돌아갔다.
개인 욕실에서 씻고 나온 체체가 이블이 뒤적거려 놓은 크로스 백의 내용물을 정리하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계십니까?”
“예, 들어오세요.”
힙스는 매우 파리해진 낯빛으로 나타났다. 그는 체체에게 입욕제는 괜찮았는지, 방 온도는 적당한지, 혹시 지금 시장하지는 않은지 물었다.
“시장이요?”
“공복감이 드는지요. 허기가 느껴지시는지.”
“이사님이 오시면 함께 먹겠습니다.”
“예.”
힙스는 체체의 대답에 만족한 듯 흐뭇하게 웃었다.
“혹시 이사님께서 순후를 어떻게 처리할지 언질해 주셨습니까? 기존 냉동고로는 다 감당이 안 되는데, 저택에서 소진하길 원하시면 냉동고를 추가 주문하겠습니다.”
“따로 들은 적 없습니다. 전화해서 여쭤볼게요.”
“아, 아닙니다. 지금 전화하면 안 됩니다. 상당히 기분이 언짢으신 상태라고 합니다.”
체체가 핸드폰을 꺼내려다 말고 의아한 눈으로 보자 힙스는 부연 설명을 했다.
“기자 회견이 끝나고 제니스 회장님께 불려 가셨습니다. 가문 어르신들이 모두 모였다고 하니 분명 기분이 안 좋으실 겁니다.”
“제니스 회장님이 누군가요?”
“…이블 님의 모친입니다….”
힙스는 어떻게 그런 것도 모르냐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가 곧 눈을 매섭게 번뜩였다.
“혹시 이블 님의 부친 성함은 아십니까?”
“모릅니다.”
“타리다 엔덤 회장님이십니다. 기억해 두세요.”
“예.”
“큰삼촌 성함은?”
“모릅니다.”
“피타입니다. 작은삼촌은 탐랜디고요. 큰이모는 레다, 작은이모는 미어시, 첫째 조카는 미카엘, 둘째 조카는 엔지스, 작은할아버지 앤디미온, 고모할머니 엘린다, 숙모 엘리자베스….”
힙스는 빠른 속도로 엔덤 가문의 족보를 모두 읊었다. 워낙 대규모 가문이기 때문에 전부 읊고 나니 숨까지 벅차 왔다. 그래도 조금의 버벅거림 없이 부드럽게 내뱉었다는 게 뿌듯했다.
“다 외우셨죠?”
“아니요.”
“…….”
“그런 건 바로는 못 외웁니다. 죄송합니다.”
“안 되겠군요. 프린트해서 드리겠습니다. 이 정도는 당연히 외워야죠.”
“왜요?”
“…….”
“왜 기억해야 하나요?”
체체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사님은 제 가족의 이름을 모르시는데요.”
“…….”
가족이 있긴 했었나.
지금 이 순간 갖기에는 너무 무례한 의문이지만, 어쩔 수 없이 그런 의문이 떠올랐다.
잠깐 허를 찔려 당황했던 힙스는 체체에게 엔덤 가문은 알시티의 역사 교재에도 나오는 가문이며, 이블의 양친 이름이 중고등학교의 주관식 문제로 나오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한 명, 한 명이 알시티는 물론이고 전 세계를 들었다 놨다 하는 힘을 가졌습니다. 앞으로 알시티에서 살아갈 거면 이름을 알아 놔서 나쁠 건 없죠. 적어도 양친 성함은 외우세요.”
모두 공사다망한 사람들이라 얼굴 볼 일이 거의 없겠지만, 이블의 부모님과는 마주칠 가능성이 있었다. 그들은 어제 아들이 감추었던 초능력을 선보였다는 것을 알고 기절초풍하며 힙스에게 연락했다. 이블이 제 능력을 모두 펼치지 않는다는 건 짐작했지만 이렇게 쉽게 드러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혹시 이유를 아느냐는 질문에 힙스는 답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최근에 생소한 모습을 보이고는 하셨습니다. 정시에 출퇴근을 한다든가, 출근 전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손본다든가, 난민 비서를 집에 데리고 온다든가.’
‘그 탈타르인 말인가? 이블의 앞방에 머물고 있다고 했지. 이름이 체체였나.’
‘예, 수석 비서가 이블 님이 체체에게 대하는 태도가 이상하다고 언질을 줘서 열흘간 지켜봤는데 확실히 이상하더군요.’
‘나도 얘기 듣긴 했네. 어떤 식으로 이상하던가?’
‘이블 님이 아니라 보통 사람이라면 첫사랑이라도 앓는 줄 알았을 겁니다.’
제니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주 실없는 농담을 들은 듯 웃어넘기고는, ‘아무튼 능력은 개방한 이유에 대해서 짐작 가는 게 있다면 언제든 말해 주게’ 하고서 힙스를 내보냈다. 이블의 모친조차 이블이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전혀 생각지 않았다. 아들의 이상한 행동을 직접 봤다면 달라졌겠지만….
“이블 님의 양친은 무척 좋은 분입니다. 수익의 대부분을 기부하시고, 뇌물은 일절 받지 않으시며, 바쁜 와중에도 나눔 봉사를 게을리하지 않으십니다. 피스앤드라는 기부 단체를 운영하고 계시며 타르에도 몇 번 성금을 보냈을 겁니다.”
“예, 압니다.”
체체는 담담하게 끄덕였다.
“타르를 도와주신 분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모두 기억한다면서 왜 이름을 모르십니까?”
“피스앤드의 대표자님 성함은 그 이름이 아니어서요. 데미안 로자리오였습니다.”
“…….”
힙스는 피스앤드가 데미안 로자리오라는 사람을 바지 사장으로 내세운 돈세탁 업체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알시티 사람들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었다. 누군가 지나가는 알시티인을 붙잡고 피스앤드 대표가 누군지 물어본다면 십중팔구는 ‘엔덤 가문 아냐?’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기에 힙스도 경각심 없이 이런 실수를 해 버렸다. 힙스는 헛기침했다.
“아무튼, 그분들은 굉장히 고상한 인품을 지닌 분들이라는 게 중요합니다. 알겠습니까?”
“예, 아드님이신 이사님을 보면서 부모님이 굉장히 좋은 분들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
앞뒤가 안 맞는 말에 잠시 인지 부조화를 일으켰던 힙스가 돌연 눈을 부릅떴다.
“지금 감히 두 분을 모욕하는 겁니까?”
“아닌데요.”
“어떻게 그런 식으로 비난하실 수 있습니까!”
“…….”
“자식새끼를 그런 인성 파탄자, 인간쓰레기, 악마의 사람 모양 아바타, 사탄의 생애 최고의 라이벌로 키운 양육자가 어떻게 품격 있고 좋은 사람들이겠냐고 조롱하는 거 아닙니까, 지금!”
힙스가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콧김까지 뿜으며 화가 난 할아버지와는 달리 체체는 주위에 보호막이라도 두른 듯 고요했다.
“죄송합니다. 그 뜻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그 뜻이 아닐 수 있습니까? 도련님이 얼마나 쓰레기인지 다 알면서.”
“그렇게 쓰레기이신 것 같지 않아서요.”
“…….”
“이사님이 그렇게까지 쓰레기인가요?”
체체는 겁먹지도 않고 아주 담담하게 힙스가 방금 전 한 말을 그대로 읊었다.
“이사님은 인성 파탄자, 인간쓰레기, 악마의 사람 모양 아바타, 사탄의 생애 최고의 라이벌일 정도로 쓰레기세요?”
“…….”
“…….”
“제가 그렇게까지 표현하진 않았던 것 같은….”
“똑같이 표현하셨습니다.”
“그런….”
숨을 들이켠 힙스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방문을 벌컥 열었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또 들은 사람 없겠지?
초조하게 주위를 살피는 그를 체체가 멀뚱히 바라봤다.
굉장히 민망해진 힙스는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대고 헛기침했다. 그는 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하게 목소리를 내리깔며 희뿌연 눈썹을 찌푸렸다.
“얘기가 다른 데로 샜군요. 아무튼 이사님의 양친은 제니스 회장님, 타리다 회장님입니다. 기억하세요.”
“예.”
비록 그분들의 자식새끼를 욕한 꼴이 되었지만, 힙스는 두 분을 굉장히 존경했다. 자신보다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스승으로 모시고 싶을 정도로 정말 선한 분들이었다.
그렇게 착한 사람들에게서 어떻게 저런 악마가 나왔느냐는 모든 알시티인들의 의문이었다. 이블의 부모님은 사회 복지가, 정치가, 사업가로서도 완벽할 뿐만 아니라 자연을 사랑하며 친우에 대한 신의를 지키는 사람들로 명성도 높았다. 대부분의 분야에서 아주 완벽했지만, 부모의 역할만은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들은 이블을 두려워했다. 이블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젊은 부부에게 훈계해 줘야 할 엔덤 가문의 웃어른들 또한 어린 꼬마가 무서워 그들을 외면했다. 차라리 이블에게 잔소리해 줄 친지가 있었다면 이런 악마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연약한 인간들 사이를 아무런 족쇄나 목줄 없이 유유자적 돌아다니는 맹수.
지진 해일을 소멸시켜 수백만의 사람을 구했다고 해서 맹수가 인간이 되지는 않는다. 더 강한 힘을 가졌다는 게 드러난 이블은 어제보다 위험해진 맹수이고 괴물이며, 악마였다. 수많은 생명을 구했으나 오히려 더욱 두려운 존재가 된 것이다.
힙스는 기자 회견이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끝났는지 이미 들어서 알았다.
기자 회견이라고 해 봤자 이블이 얼마만큼 괴물인지 재확인하는 자리에 불과했다. 기자들은 사전에 검열된 질문을 던졌고, 이블이 폭발할까 봐 두려워 서둘러 돌아갔다.
힙스가 예상한 대로, 누구도 감히 이블을 혼내지 못했다. 기자 회견장을 엎어 버리지 않고, 순순히 이 자리에 도착한 것만으로도 인내심을 전부 소진했을 그를 알기 때문에.
그러나 그 기자 회견이 끝난 후 순순히 엔덤 가문이 부르는 대로 따라간 것은 의외였다. 이블에게 왜 그동안 능력을 숨겼느냐 질책할 책임이 있는 엔덤 가문이기에 일단 부르기는 했지만, 당연히 모든 요청을 무시하고 집으로 돌아올 줄 알았다.
생각할수록 신기했다.
기분이 나빠진 상태의 이블이 가문의 부름에 응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요즘에는 항상 ‘처음’의 연속이었다.
“한 시간 후쯤 도착하신다고 하니 그때 맞춰서 식사 준비하겠습니다. 쉬고 계세요.”
“예.”
“…체체 님.”
힙스는 복도로 나가지 않고 머뭇거리다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도련님은 변하고 계십니다.”
“…….”
“평소의 그분이라면 기자 회견 같은 건 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해일을 막아 주지도 않으셨을 것이고, 애초에 아르말에 향하지도 않았겠죠.”
“……”
“저와 제임스는 그게 체체 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백의 어른은 체체를 향해 주름 잡힌 눈을 휘며 잔잔히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힙스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힙스는 자존심이 무척 강한 사람이었고, 그가 손자뻘 되는 (이블이 아닌) 어린 이에게 처음 고개를 숙였다. 그만큼 그는 이 변화가 진심으로 기꺼웠다.
감사 인사를 전한 힙스가 떠나고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던 체체는 방금 느껴졌던 감정을 되새겼다.
힙스의 감정. 이블에 대한 애틋함, 체체에 대한 고마움, 이 변화가 한순간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과 찰나의 시간 후 결국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소울 오러 유저로서 자각하고 나니 그 감정들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순간 체체에게 그것들은 더 이상 타인의 감정이 아니었다. 나 자신의 감정이라고 혼동하는 건 아니지만, 아주 타인의 감정도 아닌 것.
소울러들은 이것을 몰입도 높은 영화를 보면서 극 중 캐릭터의 감정에 이입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영화라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체체는 이 상태를 비유할 만한 대상도 몰랐고, 표현할 어휘 능력도 없었다.
등급이 높은 탓에 더욱 강하게 전해지는 감정의 동요 속에서, 그는 조금 빠르게 뛰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누르며 이 흔들림이 어서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
체체가 그랬듯 이블 또한 돌아오자마자 욕실로 향했다.
이블이 나오는 시간에 맞춰 저녁 식사가 준비될 거라는 말에 이동하기 위해 방에서 나왔는데, 방문을 열자마자 달콤한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 오는 게 느껴졌다. 순후 냄새였다.
식당 앞에 도착하니 조리사와 조리원들이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는 게 보였다.
“이걸 어떻게 다 보관하라고.”
“기다려. 집사님이 물어보고 알려 주시겠지.”
“냉동고를 더 사더라도 내일 저녁에야 올 텐데, 아이스박스는 아직이야?”
“절반이 아직 도로 위야. 너무 걱정하지 마. 날이 추워서 빨리 상하진 않을 것 같아.”
“근데 진짜 이걸 다 어쩌려는 걸까요. 상하지만 않는다면 저택 사람들이 다 하루에 하나씩 먹어도 일 년은 먹겠어.”
조리원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체체는 과일 냄새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열자마자 달콤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저택 앞쪽의 정원 크기만도 축구장 세 개는 되었는데(저택 뒤편은 더 넓다) 지금은 순후를 실은 트럭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방에 달콤한 냄새가 퍼져 저택 내부에 그만큼밖에 나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이블을 위한 맞춤 저택이 아니었다면 내부도 이미 달짝지근한 냄새로 가득했을 것이다.
정원 한쪽에서는 경비실장과 정원 관리사, 영양사 세 명이 고민스러운 얼굴로 모여 불만을 토로하는 중이었다.
“제임스 그 녀석은 이것만 달랑 두고 가 버리면 어쩌자는 건지….”
“그 녀석 저택 일에는 항상 상관 안 하잖소.”
“듣기로는 센터에도 절반 갖다 놨다던데요.”
“센터는 사람 수가 여기랑 비교가 안 되잖나. 처리하기 쉽겠지.”
아르말이 보내온 순후는 십 톤 트럭 삼백 대 분량이었다. 제임스는 그중 이백 대는 센터, 백 대는 저택으로 보냈다. 지금쯤 센터에서도 조리사들이 모두 모여 심각하게 토의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센터에서는 직원들에게 한 상자씩 나눠 주거나 협력 업체 쪽에 뿌릴 수도 있으니 이곳보다는 처리하기 수월했다.
영양사는 입가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고 조그맣게 물었다.
“그런데 이사님께서는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어서 선물을 받으셨대요?”
“집사님 말로는 체체가 이 과일을 좋아해서 그렇다더군.”
“난민이 무슨 이렇게 비싼 과일을 좋아한대.”
“내가 보기엔 체체를 괴롭히려고 그러신 것 같네. 실컷 먹여서 물리게 만들려는 거지.”
“그거 말 되네요. 이사님이라면 상한 것도 너 이거 좋아하잖아 하면서 먹이실 거예요.”
“아니, 그렇다 하더라도 진짜 이걸 어떻게 다 처리한단 말이야.”
“기증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기증? 거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정원 관리사가 코웃음을 치다가 체체를 발견하고 딸꾹질을 했다.
발걸음 소리도 없이 지척까지 다가온 체체에게 세 쌍의 당황 가득한 시선이 향했다.
언제부터 들었지.
방금 전 난민 운운하는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체체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이었다.
“기증하면 될 것 같습니다. 필요로 하는 곳에요.”
터무니없는 소리에 세 명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물론 보육원이나 학교 급식이나 독거노인들 등등 값비싼 외국 특산물을 준다고 하면 기뻐하지 않을 곳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전제 자체가 틀렸다.
영양사는 평소에 체체에게 말을 낮춰 왔으나 다른 사람들도 있으므로 존대했다.
“체체 씨, 그거 허락받고 하는 말이에요?”
“허락이요?”
체체가 고개를 갸웃하자 영양사는 팔짱을 끼며 내려다봤다.
“우리 도련님한테 허락받았냐고. 스무 해 평생 사시면서 콩 한 쪽도 누군가에게 나눠 준 적이 없는 분인데 무슨 기증이에요.”
“집으로 온 순후는 이사님께서 제게 주신 거라 이사님의 허락을 받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자 영양사가 크게 웃었다. 배까지 접어 가며 얼마나 웃었는지 눈꼬리에 눈물까지 작게 매달릴 정도였다.
“이건 무슨 황제의 총애를 받고 기고만장해진 첩도 아니고.”
“…….”
“그래, 뭐. 우리 도련님은 이런 건 안 드시니까 체체 씨 다 먹으라고 준 게 맞긴 하지. 그래서 더 다른 데 기증하면 안 될 것 같은데. 자기가 준 걸 다른 사람한테 주면 얼마나 기분 나쁘시겠어. 허락받고 오세요, 허락받고.”
영양사는 체체에게 손을 뻗었다. 체체의 시선이 그 손길을 따라갔다. 그 손길은 어른이 세상 물정 잘 모르는 어린애를 대하듯 체체의 정수리를 툭툭 가볍게 두드리고 물러났다.
“…….”
체체는 그때 무표정한 얼굴 속에서 굉장히 생소한 감정을 느꼈다.
최근, 체체의 머리를 건드린 사람은 이블밖에 없었다. 폭력을 휘두른 일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머리칼을 마구마구 헤집거나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쓰다듬거나… 괜히 앞머리를 건드리면서 씨익 웃기도 한다. 오늘만 해도 영양사가 한 것처럼 머리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똑같은 행위인데 이블이 했을 때와 굉장히 다른 기분이 들었다. 체체는 어떤 행위를 그 행위의 주체자에 따라 다르게 느낀 적이 없었다. 차이를 둬 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 체체는 기분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인식했다.
타르에서도 이곳에서도… 기분이 좋지 않은 게 맞다.
기분이 안 좋아야 한다. 누군가의 허락 없는 손길은 혐오스럽고 뿌리치고 싶은 것이었다. 수십 번… 수백 번을 당해도 신체 접촉은 불쾌했다. 다만 너무 익숙해져서 신경 쓰지 않는 것뿐.
그러나 그 사람이 만질 때에는 괜찮았다. 이상한 일이다. 분명 괜찮았다. 커다란 손으로 머리칼을 헝클여 놔도 전혀 기분이 나빠지지 않았다.
그것을 자각하고 나니 아주 생소한 감정이 들었다.
아무 말도 못 하는 것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체체를 바라보던 정원 관리사가 별안간 영양사의 어깨를 툭 쳤다.
“그만하지. 꼭 비꼬는 것 같구만.”
“비꼰다기보다는 알려 주는 거죠. 특별 대우 받는 줄 알고 건방지게 굴다가는 큰일 나요, 정말. 이렇게 작아서는 도련님이 한 대만 쳐도 날아갈 텐데.”
“아무튼 그만하게. 체체도 알아들었을 거야.”
정원 관리사가 체체에게 눈짓했다. 체체는 잠깐 일렁였던 감정을 추슬렀다.
“예, 알아들었습니다. 주의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해했다니 다행이네요.”
“이사님께 허락받고 올게요.”
“뭐?”
순간 이해하지 못했던 세 사람은 뒤늦게 체체를 붙잡았다.
“진짜 허락받아 오란 말이 아니잖….”
“그래, 맞아. 허락받을 필요 없어.”
서늘한 목소리가 세 명의 말을 가로막았다.
저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뒤돌아선 체체는 그대로 멈췄다. 바로 앞에 이블이 서 있었다. 스산한 기운이 서린 붉은 눈이 체체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 한순간 이 공간의 소리와 색깔이 모두 사라진 것처럼 차가운 적막이 흘렀다.
“순후는.”
이블은 저벅저벅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걸어와 체체의 옆에 섰다. 날카로운 시선이 체체를 제외한 세 사람을 훑었다. 피비린내를 진하게 풍기는 차가운 시선에 셋은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전부 네 거야.”
“…….”
“네 말을 믿지 못하는 벌레들은 무시해. 누가 특별 대우를 받는지도 모르는 해충 따위는 내가 제대로 박멸할 테니까.”
숨조차 들이마시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이블이 내뱉는 말이 한 음절 한 음절마다 날카롭게 벼린 칼날이 되어 세 사람을 난도질했다. 해충이 누구를 의미하는지는 명백하다.
이블 엔덤은 지금 화가 났다. 평소처럼 불같이 노여워하며 성질을 부리는 게 아니라 어둡게 가라앉아 고요히 주위를 얼려 갔다.
불꽃의 온도가 높을수록 청색을 띠듯이 이블의 눈동자 또한 푸른빛이 감돌았다.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서리밖에 없는 얼음 대지처럼 새파란 불꽃이었다.
그 무서운 분노가 자신에게 향한다는 건 극도의 위협이었다. 그들은 저택에서 일하며 이블이 분노하는 모습을 수없이 봐 왔지만 지금만큼 목숨의 위협을 느낀 적은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리는 셋을 보며 이블이 천천히 다가왔다.
한 걸음.
날카로운 시선에 붙들린 그들은 다가오는 악마를 보며 덜덜 떠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그때 작은 몸이 끼어들었다. 이블과 셋의 중간 지점에서 세 명에게 등을 보이고 보호하듯이 가로막은 사람은 체체였다.
“이사님….”
“비켜.”
이블의 몸 주위로 한기가 느껴질 만큼 새파란 기운이 새어 나왔다. 이곳의 모두를 손가락 하나로 죽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본능적인 두려움에 몸에서 힘을 잃고 자각도 못 한 채 눈물을 흘리는 ‘보통 사람들’과 달리 체체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저를 도와주시겠어요?”
다시 한 걸음.
“저는 알시티의 학교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이사님께서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
중간에 끼어들었다고 그의 작은 몸에 뒤에 있는 사람들이 가려질 리가 없었다. 그러나 뒤쪽으로 비껴가던 서늘한 시선은 마치 시야에 오직 체체만이 든 것처럼 천천히 체체에게로 향했다. 눈이 마주치자 이블은 계속 지껄여 보라는 듯 가만히 노려봤다.
“순후를 기부할 만한 학교나 보육원을 같이 찾아 주세요.”
“…….”
“한 상자 빼고 전부 기부할 생각입니다.”
“…….”
“남은 한 상자는 우리끼리 먹어요.”
이블은 뻔히 보이는 수작에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체체는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체체의 미소는 이블의 모든 사고를 정지시켜 버리는 무서운 무기였다. 뻔히 보이는 수작질이어도 정확하게 통했다.
“이사님께서 싫다 하시면 힙스 집사님이랑 같이 먹겠습니다.”
“…….”
“제임스 비서님이랑도요. 이사님이 싫으시면요.”
이블은 길게 숨을 내뱉으면서 잠시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를 반복했다.
“…나랑 먹어야지. 왜 다른 인간들이 나와….”
이윽고 한숨과 함께 흘러나온 대답이었다.
그는 결코 화가 풀리지 않았다. 이곳이 풀밭이라면 작은 풀벌레조차 이블의 곁을 피해서 날아갈 것이고, 바다 위라면 파도도 이블을 향해 달려오지 않을 것이다. 그는 여전히 위험한 기운을 내뿜었고 여전히 눈에 거슬리는 것들을 지체 없이 물어뜯을 맹수였다.
단지, 억누르고 있을 뿐인.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양이 너무 많아서 둘만으로는 다 먹지 못할 것 같아요.”
“정도껏 해. 더 이상 양보는 없어.”
“어차피 다 제 거라면서요.”
“닥쳐. 지금도 참고 있으니까 더 이상 건들지 마. 아무리 너라도.”
“…….”
“아무리 너라도….”
“…….”
“하, 젠장….”
담담하게 올려다보는 금빛 눈을 보며 그 이상의 말은 할 수 없었다.
이블은 스스로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잘생긴 미간에 주름을 그렸다.
“…미치겠네… 그래, 내가 널 때리길 하겠어, 뭘 하겠어.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진짜.”
다 들리게 한탄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마를 짚기도 했다. 그러다가 결국 져 준다는 식으로 몸을 옆으로 틀었다.
“들어가자. 저녁 준비 다 됐네.”
이블은 정원에 가득한 순후 냄새 속에서도 저택 내부의 음식 냄새를 정확히 짚어 냈다. 그는 여전히 인상을 사정없이 구기고서 체체가 나란히 서기를 기다렸다.
체체는 아주 잠깐, 뒤를 돌아봤다. 서로에게 기댄 채 주저앉은 이들은 하나같이 눈물 젖은 얼굴로 얼빠진 표정을 했다. 체체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곧 빠른 걸음으로 이블의 옆에 섰다.
“안 추우세요?”
“너야말로. 머리카락이 찬데.”
이블의 금발은 물기에 젖어 있었다. 머리카락에 매달린 물방울이 겨울 저녁의 찬 바람을 맞고 투명한 얼음 빛깔을 띠었다. 그러나 그런 건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이블은 체체의 동그란 뒤통수를 쓱쓱 쓸었다.
“오늘 부모님을 만나셨다면서요.”
“어떻게 알았어. 인터넷도 안 하는 애가.”
“집사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존나 친해졌네. 분명히 말해 두겠는데 순후 나 말고 다른 새끼랑 같이 먹으면 죽여 버릴 거다. 너 빼고 다 죽여서 네 죄책감만 늘어나게 할 거야.”
이블이 툴툴거리며 경고했다. 체체는 이블이 화를 푼 것처럼 대했고, 이블도 화가 풀린 것처럼 굴었다.
그러나 둘 다 알고 있었다. 이블은 화가 풀리지 않았다는 것을.
단 한 번도 분노를 참아 본 적 없는 괴물이 발톱을 다시 집어넣고 억눌렀을 것뿐이다. 이블의 심기는 여전히 저조했다.
“너 몸이 너무 차. 내가 말했지. 감기 걸리면….”
“절 죽이실 건가요?”
“아니, 집사부터 운전기사랑 여기 저택 수행원들 다 죽여 버릴 거야.”
이블이 협박을 하면서 체체 쪽으로 몸을 붙여 왔다. 그 몇 분 밖에 나와 있었다고 금세 서늘해진 어깨에 이블의 단단하고 따뜻한 팔뚝이 닿았다. 체체는 니트를 입었고, 이블은 반팔 면티를 입었는데도 체온 차이가 컸다.
“칭찬 많이 들으셨어요?”
문득 체체가 물었다.
“뭔 칭찬.”
“부모님께, 아르말 일에 대해서요.”
“아르말 일 중에 어떤 거?”
이블은 의아해하며 며칠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내 품에 안긴 너랑 바다 구경했던 거?”
“…….”
“눈동자 만지고 싶은데 참은 거?”
“…….”
“네 마약 바다에 내다 버린 거?”
“…….”
“칭찬받을 일이긴 했지.”
체체는 말없이 걸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그저 무표정이겠지만 주의 깊게 살피던 이블은 미세하게 빗장이 풀어졌음을 느꼈다. 약간… 한숨을 내쉬는 것 같기도 하고.
“지진 해일 말입니다.”
“아, 그거.”
이블이 소리 내서 웃었다. 붙어 있는 탓에 낮은 웃음소리가 너무 귓가 가까이 들려서 체체는 어깨를 움츠렸다. 워낙 예민한 이블은 그 움츠림을 바로 알아챘지만 그래도 거리낌 없이 달라붙어서 체체의 뒷머리를 손가락으로 조물조물 만졌다.
“내가 칭찬받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너밖에 없을걸.”
이블은 가볍게 웃었다. 진심이었다.
뉴스에서는 이블 엔덤이 그동안 감춰 놓았던 능력으로 수백만 명을 구했다고 떠들어 댔지만, 사실 다른 말이 하고 싶을 것이다. 인간들 사이를 마음껏 휘젓고 다니는 괴물에게 사실은 날개까지 있었다고, 그렇지 않아도 위협적인 것이 더 위험한 존재가 되었다고. 이블에게는 투명한 물속을 들여다보듯 훤히 읽혔다.
“내가 사람을 구했다고 생각하는 건 오직 너뿐이야.”
“…….”
“다른 인간들에게는 더 위험해진 괴물이지.”
씁쓸할 것도 없는 사실이었다. 이블은 자신이 괴물인 쪽이 좋았다. 누구도 내게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나는 그 누구든 함부로 대해도 된다. 어차피 이 세상은 벌레들로만 이루어졌으니 벌레가 나를 괴물이라 부른다고 별다른 감정 따위 들지 않는다.
저택 문은 열려 있었다. 이블이 급하게 열고 나온 모습 그대로였다. 안쪽으로부터 온화한 불빛과 따뜻한 공기가 흘러나왔다. 이블은 체체가 먼저 들어가도록 옆으로 비켜섰는데, 체체는 들어가지 않고 중간에 서서 이블을 올려다봤다.
“아닙니다, 이사님.”
뭐가 아니라는 거지.
의문을 갖자마자 깨달았다.
‘내가 사람을 구했다고 생각하는 건 오직 너뿐이야.’
이 말의 부정이라는 것을.
체체는 이블을 올려다보며 옅은 웃음을 지었다. 마치 슬로 모션 같았다. 반짝이는 금색 눈동자, 호선을 그리는 눈매, 살며시 올라가는 양 입꼬리와 도톰하게 부풀어 오르는 뺨.
그 미소는 이블의 머리를 크게 두들겼다. 아주 옅은 미소였지만, 저번처럼 금방 사라지지도 않았다. 체체는 은은한 미소를 띤 채 이블에게 말했다.
“아르말 사람들은 알아요.”
“…….”
“그들은 영원히 그날을 잊지 못하겠죠. 아르말 사람들에게 이사님은 괴물이 아니에요. 삶의 터전을 포기했던 그들에게만은 영원히 은인이고 구원자일 겁니다.”
찬 바람과 따스한 열기 사이에서 이블은 눈도 깜박이지 못하고 체체의 미소에 붙잡혀 버렸다.
“이사님은 그날 수백만 명을 구하셨어요. 이 세상에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사님뿐일 거예요. 어떤 괴물이 수백만 명의 목숨을 구해 주나요. 이사님께서는 정말 대단한 일을 하셨습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멋있는 일을, 모두가 오랫동안 얘기할 거예요.”
“…….”
“이사님의 이름은 아르말의 역사서에도 오르겠죠. 전 세계에서 교육할지도 모릅니다. SSS 멀티 유저가 큰 재해를 막았다고. 아르말에 기적을 선사한 이사님은 영원히 모두의 기억에 남을 겁니다.”
“…….”
이블은 칭찬을 당하고 있었다. 난민은 막무가내로 칭찬을 퍼부었고 폭군은 속수무책으로 칭찬을 들었다.
난민이 퍼붓는 칭찬은 아주 특별했다.
당신은 누구도 할 수 없는 위대한 일을 했다. 그 누구도 그것에 대해 부정할 수 없다. 당신은 아르말을 구해 줬으며 그들에게 영원히 은인으로 남을 것이다….
이블은 아주 어렸을 적부터, 오러 유저로 각성하기 전부터 지금까지 칭찬 속에서 살아왔다. 언론은 이블에 대한 비판 기사를 싣다가도 다음날이 되면 찬양하는 기사를 내보냈으며, 대중은 이블을 악마라 칭하면서도 하나뿐인 메시아로 불렀다.
귀에 박히도록 비난을 받으면서 동시에 그만큼의 칭송을 들어 왔다.
그러나 이블은 SSS 소울 오러 유저였다. 감동에 젖은 얼굴로 나를 찬양하는 이 사람이 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 너무나 쉽게 들여다보았다. 그러므로 사실상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칭찬을 들은 적이 없었다.
모두 더러웠다.
두려움이 담겨 있거나, 경계심이 스며들어 있거나, 질투와 열등감이 자리해 있거나.
이블은 칭찬이란 걸 포기했다. 어떤 의미로는 칭찬을 들으면 오히려 기분이 나쁠 거라고 생각했다. 이따위 벌레들이 감히 날 칭송하다니 더 기분 나쁠 거라고. 이렇게 더럽고 추잡한 것들이 날 찬양해 봤자 내 기분만 더 더러워질 뿐이라고.
‘이사님은 영웅입니다. 수많은 생명을 구했어요.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했어요. 저도 영원히 잊지 않을 거예요. 이사님이 하신 일을 영원히 잊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지금, 이블이 아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투명하고 깨끗한 존재가 이블을 향해 칭찬을 쏟아 내고 있었다.
진심 어린 칭찬에 면역이 없는 이블은 숨 쉬는 것도 잊고 멍해졌다가, 점차 세차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에 무심코 손바닥을 올렸다.
그는 얼마든지 체체의 작은 입술을 틀어막을 수 있었다. 닥치라고 면박을 줄 수도 있고, 더 이상 얘기를 듣지 않고 저택에 들어가 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블의 얼어붙은 마음이 이 천사처럼 아름다운 영웅에게서 칭찬을 듣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좋은 일을 했어요….’
체체는 조곤조곤 이블에게 속삭였다. 따스한 태양이 내리쬐는 들판의 들꽃 위에 살포시 내려앉아 조그맣게 지저귀는 뱁새처럼, 평화롭고 포근하게. 사실 그가 앉은 곳은 들꽃이 아니라 괴물의 발톱 위인데도. 괴물에게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작은 존재가 괴물을 칭찬하겠다고 날카로운 발톱 위를 맴돌며 지저귀었다.
그 객기 어린 행동에 이블의 심장은 속절없이 요동쳤다.
그날 밤 잠이 들어서도 주위를 날아다니며 삐익, 삑 지저귀는 뱁새 꿈을 꿀 정도로.
그것 때문에 잠에서 깨 버리고, 앞방에 누운 체체의 느린 숨을 귀 기울여 듣다가 끝내 밤을 새워 버릴 정도로, 이블은 속수무책으로 흔들렸다.
***
알시티의 겨울에는 약 보름간 스물네 시간 하루 종일 눈이 내린다. 이를 두고 적설 기간이라고 부른다. 적설 기간은 보통 연말에서 연초 사이, 즉 12월부터 3월 중인데, 오랫동안 이어져 온 자연 현상이었고, 결코 폭설은 아니기에 아침마다 부지런히 밤사이 쌓인 눈을 치워 주면 크게 불편할 일은 없었다.
어젯밤 이번 겨울의 첫눈이 내렸다. 저택의 정원 관리사들은 소복이 쌓인 눈을 치우기 위해 새벽부터 나왔다. 하얗게 천지를 메운 함박눈이 적설 기간이 시작되었음을 알려 왔다.
“저기 또….”
“쉿, 모르는 척 인사해.”
정원 관리사들은 입 모양으로 수군거렸다. 숙소에서 나오자마자 멀리서 뜀박질하는 이블이 보인 것이다.
벌써 일주일 넘게 반복되는 기행이었다.
첫날에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평소처럼 일어나 하품하며 나왔다가 무시무시한 얼굴로 정원을 내달리는 이블을 발견한 정원 관리사 다섯 명은 그날 내내 놀라서 창백해진 낯으로 근무했다. 이튿날에는 첫날보다는 덜 놀랐지만 이블에게 인사할 때는 여전히 굳었다.
오늘은 눈이 와서 없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오히려 눈 따위 다 녹여 버릴 듯한 이글이글한 눈으로 정원을 질주 중이었다. 이블은 정원 관리사들의 인사는 여전히 본체만체하고 쌩하니 빠르게 지나갔다. 정원 관리사들은 고용주가 같은 공간에 있는 만큼 빠릿빠릿하게 근무 준비를 했다.
소복하게 쌓인 눈을 치우고, 어디선가 굴러들어 온 이름 모를 식물을 전부 뽑아내고, 벌레 한 마리 기어 다니지 않게 살충제를 뿌려 최대한 삭막하고 앙상한 공간으로 만드는 게 그들 임무였다.
오늘은 한창 건설 중인 루젬 세공실 건설 자재들을 정리하는 것도 추가됐다. 적설 기간이 시작되었으니 세공실 건설도 일단 중지였다. 당분간 눈만 쌓일 테니 내부로 옮겨 놔야 했다.
그들은 부지런히 일하는 와중에도 계속 이블이 있는 곳을 힐끔거렸다.
저택 정원 관리사는 총 열일곱 명으로 앞 정원에 다섯 명, 앞쪽보다 넓은 뒷 정원에는 열두 명이 배치되는데, 뒤쪽 정원에는 중앙에 작은 구덩이(원래 호수였는데 이블이 없애 버렸다)가 있어서 관리하기 까다롭기 때문에 모두 가기 싫어했다. 그러나 요 며칠 사이에는, 아침마다 무시무시한 얼굴로 내달리는 이블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모두 원하는 자리가 되었다.
정원 관리사들은 삼 초당 한 번씩 힐끗힐끗하며 이블이 얼마나 멀리 있는지 확인했고, 오 초당 한 번씩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몇 바퀴 정도 뛰시려나.”
“어제 저택 보안 인원들이 감시 카메라를 돌려 보니 대략 오십 바퀴 정도 뛴다고 하더라고.”
“나는 다섯 바퀴만 뛰어도 쓰러지겠지.”
“한 바퀴도 용하지, 이 사람아.”
이렇게 사소한 부분에서도 이블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모션 오러 유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넓은 정원을 쉬지 않고 오십 바퀴 돌아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는 것. 정말 괴물 같은 체력이었다.
이블이 정원의 저쪽 끝으로 가서 거의 점으로 보이자 한 명이 모두를 대표해 물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조깅하시는 걸까.”
“저걸 조깅이라고 할 수 있나. 무슨 무공 수련 같은데.”
“도련님에게는 가벼운 조깅이지. 평생 아침 일찍 일어나는 일이 없었던 분이 제시간에 출근하시질 않나. 아침 운동을 하시질 않나. 요즘 들어 이상하군.”
“힙스 집사님이 말한 것처럼 아무래도 체체가 온 뒤로 이상해지신 것 같단 말이야.”
“살의를 참느라 이러시는 건가.”
“쉿, 그만하고 일이나 하지.”
가장 오래 일한 정원 관리사 마테오가 잡담을 멈추게 했다. 얼마 전 고용인 세 명이 동시에 퇴사했는데, 이유는 말하지 않았지만 이블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아무리 이블을 존경해서 입사했다고 해도 분노한 이블에게서 한 번 목숨을 위협당하고 나면 전처럼 존경하기 어려워진다. 생존 본능에 의해 도망가 버리는 것이다.
그만둔 인원 중에는 꽤 오래 일해 온 정원 관리사 한 명도 있어서 현재 신입을 뽑는 중이었다.
이블의 저택에서는 항상 업무량에 비해 대인원을 고용했다. 상당히 높은 급여에 널널한 업무량까지, 사실 보스의 심기를 거스르지만 않으면 꿀 직장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였다. 그러나 눈 내리는 시기에 정원 관리사가 두 명이나 나가게 되면 보통 직장 수준의 업무량이 되므로 조심해야 했다.
정원 관리사들은 눈빛 교환을 하고 묵묵히 업무에 착수했다. 마테오의 본능적인 경고에 따른 덕에 그들은 이블의 위협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안심하는 그들과 달리 이블은 전부 들었다.
“빌어먹을, 더럽게 시끄러워.”
속삭이면서 대화하면 안 들릴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진짜 병신들 아냐.
이블은 짜증이 나서 땅바닥을 걷어찼다. 땅에 박힌 돌덩이가 멀리 날아가고 바닥이 움푹 파였다.
사실 진짜 화가 났다면 이미 달려가 혀와 입을 분리해 버렸을 것이다. 이블이 가만히 있는 건 그들의 말에 긍정하기 때문이었다.
‘힙스 집사님이 말한 것처럼 아무래도 체체가 온 뒤로 이상해지신 것 같단 말이야.’
정확하다.
이렇게 새벽부터 달리는 이유는 모두 체체 때문이다.
다 난민 때문이었다.
체체는 늦게 잠든다. 불면증을 앓는 난민은 단 한 번도 이블보다 이르게 잠든 적이 없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어.’
체체는 복도에서 인사한 후 방에 들어서면 바로 서재로 향한다. 알시티의 고전 서적들이 장식처럼 꽂힌 책꽂이 앞에 아크라지엘 공화국산 나무로 만든 책상을 놓았는데, 체체는 그 앞에 앉아 노트북의 전원을 누르고 북마크로 구분해 놓은 컴퓨터 프로그램 책을 편다. 노트북은 센터에서 사용했던 것과는 다른 종류로, 컴퓨터 사용 연습하라고 이블이 직접 마련해 준 것이었다.
한 시간 정도 각종 프로그램을 다루는 공부를 하고 나면 이제 동영상 사이트에 들어간다. 아직도 서투른 타자 실력으로 무엇을 검색하는 건지 너무 궁금했던 이블은 체체가 방을 비운 사이 몰래 들어와 검색 기록을 염탐해서 알아냈다.
루젬 세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