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체가 챙긴 짐은 많지 않았다. 몇 권의 책과 옷가지가 끝이었다. 그 옷들은 모두 이블의 비서로 입사하면서 엔덤 가문에서 마련해 준 의복이었으니 그것들을 제외하면 사실상 체체의 개인적인 짐은 자그마한 가방 하나에 모두 들어가는 수준이었다.
적은 짐이었으나 옷 무게 때문에 혼자 다 들고 가기는 쉽지 않았다. 이블이 ‘제임스를 보내 주겠다’라고 했을 때 장소를 특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엔덤 가문에서 마련해 준 오피스텔로 올 거라 생각한 체체는 힘들게 짐을 가지고 오피스텔로 향하려 했다. 체체가 집 앞의 큰길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사이 이블은 체체의 위치를 파악하고 제임스를 보냈다.
“걔가 오피스텔이 아니라 다른 곳에 산다는 걸 모르는 듯 행동해. 그 새끼 더럽게 의심 많은 뱁새니까, 우연히 지나가다 발견한 거야. 알겠어?”
이블의 신신당부를 듣고 제임스는 열심히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 연기했다. 이블의 저택에 가고 있었는데, 우연히 길을 잃어서, 우연히 이곳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당신을 발견했다. 열심히 연기한 노력이 무색하게 체체는 딱히 의심도 믿음도 표하지 않고 담담히 차에 올랐다.
제임스는 운전기사 없이 손수 운전해서 체체를 저택까지 바래다줬다.
“도착하면 저택의 총관리자부터 만나게 될 텐데, 도련님을 굉장히 아끼는 분이니 조금이라도 도련님 흉을 보면 안 됩니다. 이미 체체 씨를 경계하고 있을 거예요. 아마 지금도 감히 도련님과 함께 사는 특혜를 누리는 사람을 향한 시기와 질투에 휩싸여… 아무튼 그 인간은 자기 아들보다도 도련님을 더 좋아하는 인간입니다.”
“힙스 집사님 말씀이신가요?”
제임스가 룸 미러로 체체를 봤다.
“알고 계십니까? 그 양반.”
“비서 계약서 쓸 때 한 번 본 적 있습니다.”
“그 꼬장꼬장한 늙은이가 너무 괴롭힌다 싶으면 말씀하세요. 저택의 총책임자는 그 사람이지만 저 또한 외부 활동의 총책임자이기 때문에 한 소리 할 힘은 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체체 씨는 걱정이 안 되는군요.”
제임스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항상 무심하고 무표정한 얼굴의 소년에 힙스는 경계심을 금방 누그러뜨릴 것이다. 자신이 그랬듯이.
스물한 살, 청년이라 불릴 나이지만 너무나 소년 같은 외모다. 겉보기에는 그냥 장인이 공들여 만든 예쁜 인형 같다. 체구가 작고 눈이 커다래서 약해 보이기만 하는 소년이 이블에게 할 말 다 하면서 대들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노집사도 곧 경악하게 되리라는 걸 생각하니 벌써 통쾌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나도 꽤 꼬장꼬장했죠? 어쩔 수 없었습니다. 도련님의 비서가 되었다고 기고만장해진 사람들도 많았고, 밖에서 도련님에 대해 나쁜 말을 퍼뜨리는 사람들도 많았거든요. 앞에서는 쩔쩔매면서 뒤에서는 악마니 뭐니 욕하는 사람들 질색입니다.”
“…….”
체체가 입을 다물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의아해하는 모습에 제임스가 물었다.
“왜요? 뭐가 이상합니까.”
“이상한 건 아닙니다. 단지 처음 만났을 때 비서님께서 제일 많이 이사님 욕을 하신 것 같아서요.”
“…안 했습니다만.”
“하셨습니다. 항상 화가 나 있는 악마, 약 먹은 미친놈이라고요.”
“…….”
“사이코라고도 하셨어요.”
“…….”
“사탄도 한 수 접을 거라고도요.”
“…….”
제임스는 그 뒤로 아무 말도 없이 운전만 했다.
***
이블의 저택은 도심 한가운데 있었다. 뒤에는 자그마한 산이 있는데, 제임스는 그 산을 뒷마당이라고 표현했다. 그 동산 하나가 전부 이블 소유의 사유지였다.
대저택의 정문 앞에는 힙스가 마중 나왔다. 정장 차림의 노인은 제임스와 눈인사를 하고 곧장 체체에게 인사해 왔다.
“안녕하십니까, 체체 님. 저희 본 적 있지요?”
“예, 옷 잘 입고 있습니다.”
비서직 계약 당시 의복을 구매해 줬던 사람이 힙스였기 때문에 체체도 알고 있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집사인 힙스는 이블이 태어나기 전부터 엔덤 가문의 집사였으며, 집안사람 중 이블을 가장 아끼는 이이기도 했다. 이블이 독립할 때에 자신이 모시고 싶다고 먼저 지원했을 정도로.
힙스가 데리고 나온 다른 사람들이 체체의 짐을 받아들었다. 저택 안내는 힙스가 맡았다.
“체체 씨.”
제임스가 다가와서 체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만 하세요. 절대 무시당할 일 없을 겁니다.”
“그렇게요?”
“예, 그렇게요.”
제임스는 체체로서는 의미 모를 말을 남기고 떠났다.
“타시지요.”
정원이 너무 넓어서 차를 타고 들어가야만 했다. 체체가 좌석에 앉자 힙스는 안전벨트를 착용하라고 말했다. 안전벨트를 맨 체체에게 쿠션을 안겨 준 후 그도 맞은편에 앉았다. 힙스는 체체와 거의 비슷한 체구였으나 마치 체체를 저보다 병약한 사람을 대하듯 했다.
“건물은 총 세 채입니다. 오른쪽 건물은 저택의 사용인들이 거주하고, 왼쪽 건물은 손님이 머무르는 공간이며 중앙 건물이 도련님께서 사용하시는 곳입니다. 체체 님도 같은 곳에서 머무르실 겁니다.”
“예, 말 낮추세요.”
“도련님께서 누군가를 초대하신 건 처음입니다. 게스트 룸이 아니라 중앙의 저택으로 모시는 것도. 가족이 와도 항상 게스트 룸이었지요.”
힙스는 빙긋이 웃었다. 겉으로는 인자하게 미소 지었지만 눈빛이 날카로웠다.
“어쩌다가 이블 데빌과 함께 살게 되셨습니까. 앞으로 정말 괴로우시겠군요. 그 미친 악마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을 텐데 전문 상담인을 소개해 드릴까요? 그 약 먹은 미친놈 때문에 위장약을 항상 달고 사는….”
“그러지 마세요.”
“…예?”
“저를 떠보기 위해서 좋아하는 사람의 험담은 안 하셔도 됩니다. 이미 아드님께 들었습니다. 너무 좋아하시잖아요, 이블 이사님.”
“…….”
힙스는 헛기침했다.
체체는 손쉽게 힙스의 입을 닥치게 해 놓고서 고개를 돌렸다. 체체의 시선은 창밖의 정원으로 향했다.
황량한 정원이었다. 가을을 지나 겨울로 들어가는 계절이라지만, 나뭇잎을 매단 나무 한 그루도 없었다. 사막이 지나간 숲처럼.
체체가 정원에 흥미를 보인다 생각한 힙스는 저쪽엔 마구간이 있고, 저쪽엔 동물 보호소가 있다고 설명했다.
“표범이나 치타 등 맹수를 보호하는 곳이었습니다. 지금은 비어 있지만.”
“이사님께서 말도 타세요?”
“예전엔 타셨습니다. 지금은 그곳도 비어 있지요.”
“그렇군요.”
“이유는 안 물어보십니까? 왜 지금은 비어 있는지.”
힙스의 물음에 체체는 황량하고 삭막한 정원에서 눈을 떼고 옅은 미소를 띤 노인을 바라봤다.
“시끄러울 테니까요.”
“…….”
“말 울음소리도. 밤마다 동물이 싸우는 소리도 너무 시끄러웠을 테니까요.”
힙스는 다소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쓰게 웃었다.
“맞습니다. 그분에게는 모든 것이 소음으로 들립니다. 어렸을 적 지금보다 능력 조절이 서툴렀던 도련님은 동물들 울음소리는 물론 밤사이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조차 견디지 못하셨지요.”
힙스는 창밖의 메마른 정원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황량한 풍경이 그분에게는 무엇보다 평화로운 세계인 겁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전혀 관리하지 않는가 보다고 하겠지만, 그 어떤 곳보다 특별하게 관리하는 곳이었다.
“도련님께서 갑자기 방을 준비하라 하셔서 놀랐습니다.”
여전히 시선은 창밖을 향해 있었다.
“게스트 룸이 아닌 중앙 저택의, 같은 층에 있는 방을 깨끗이 청소해 놓으라고 하셨지요. 도련님이 쓰시는 것과 동일한 침구를 마련했습니다. 알시티어 교재도 잔뜩 준비했지요. 들어가시면 우선 식사부터 하실 겁니다. 영양소가 골고루 든 음식을 도련님 전담 조리사님께서 조리해 줄 겁니다.”
“감사합니다.”
“다 도련님께서 지시하신 사항입니다.”
바로 어제 지시가 내려졌고 모든 사용인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단 하루 만에 모든 조치를 취했다. 체체가 머무를 곳은 중앙 저택 3층의 단 두 개 있는 방 중의 하나로, 그 층의 다른 방은 이블이 사용했다. 상상도 못 했던 명령에 도련님의 마음이 바뀔세라 밤새 움직인 다음 오늘 아침 출근하시기 전에 준비를 마쳤다고 고했다.
‘오늘 바로 들어와도 된다고? 먼지 겁나 쌓였을 텐데.’
‘항시 청소 중이었어서 원래 청결한 상태였습니다.’
‘오후에 데리고 올 건데, 그 자식 한쪽 귀가 안 들리는 병약한 난민 새끼라서 먼지 먹으면 탈 날지도 몰라. 깨끗이 준비해 놔.’
‘예, 이블 님.’
이 저택의 사용인들은 모두 이블을 모시고 싶어서 남은 사람들이었다.
그의 성격이 악마 같은 이유가 특별한 상처 때문이 아니라 태생적으로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임을 안다. SSS 멀티 유저로 각성했다는 게 모든 악행에 대한 면죄부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블이 방긋방긋 잘만 웃던 아기였을 때부터 지켜봐 온 사용인들은 저마다 이블을 막냇동생 혹은 막내아들로 여겼다. 아픈 손가락 같은 존재인 것이다.
평생 홀로 고독하게 살아갈 줄 알았던 사람이 대뜸, “난민이 들어와 살 거야.”라는데 그 누가 반기지 않을까.
저택의 사용인들 모두 처음 있는 일에 기대를 걸었다. 요즘 이블이 보이는 기이한 행동도 그렇고, 방을 준비하라는 지시까지 낙관적인 징후로 보이니까.
그러나 힙스는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 녀석이 너무 부풀려 놨어.’
힙스는 다시금 아들 제임스를 탓했다.
제임스는 어젯밤,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는 사용인들 앞에서 체체가 이블을 변화시킬 거라고 선언하듯이 말했다. 모두의 앞에서 그런 희망에 찬 발언을 해서는 안 됐다. 기대하는 만큼 실망은 더더욱 커지기에 너무 섣부른 망언이었다.
자신의 아들을 결코 믿지 않는 힙스는 이 난민 소년이 이블에게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알아낼 생각이었으나, 체체는 쉽게 걸려들지 않았다.
듣던 대로 인형 같은 소년이었다. 아무런 감정 없는 얼굴. 무슨 말을 해도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 같은 무심한 금색 눈.
제임스가 ‘그 녀석이 소울 오러 유저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고 말한 이유를 알 듯했다. 제임스는 여러 번 반복해서 말했다. 그저 예쁜 인형 같기만 하다고, 두려움도 모르고 즐거움도 느끼지 못하는 인형 같다고 했다.
힙스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도련님에게는 이런 사람이 필요한 걸지도 모른다.
이블 또한 두려움도 즐거움도 모르고 살고 있으니까.
“그분께서 누군가와 함께 살겠다는 말을 하실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
힙스가 같은 내용을 한 번 더 얘기했다. 체체는 힙스의 말을 가만히 듣기만 했다. 대답도 반응도 없는 상대라서 힙스는 좀처럼 경계심을 늦출 수 없었다. 그러나 사실 체체가 어떻게 대답했어도 노집사가 경계를 누그러뜨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차는 매끄럽게 움직여 저택의 정문 앞에 섰다. 체체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느껴지는 차가운 공기에 어깨를 움츠렸다. 힙스가 예민하게 그것을 알아챘다.
“이제 겨울인데 너무 춥게 입으신 것 아닙니까? 얼마 전에도 감기에 걸리셨다면서요. 괜히 다른 사람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스스로 챙겨야 합니다. 건강도 안 좋으신 분이.”
체체는 눈을 깜박였다.
“저 건강합니다.”
“도련님께 들었습니다. 몸이 안 좋으시다고요.”
“한쪽 귀가 안 들리는 병약한 난민 새끼라던가요?”
“…….”
힙스는 오늘만 두 번째로 헛기침했다. 띄어쓰기까지 정확히 맞았다.
“전 몸이 약하지 않습니다. 감기도 알시티에 와서 처음 걸렸어요.”
“알시티 오기 전에는 한 번도 감기를 앓지 않으셨다는 말씀입니까?”
“예.”
“설마 그럴 리가…, 아, 타르….”
힙스는 알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거긴 더운 나라였지요. 이곳은 타르와는 다르게 사계절이 뚜렷한 곳입니다. 가을이야 니트와 점퍼로 보낼 수 있지만, 이제 겨울이니 그런 가벼운 옷차림으로 외출하시면 안 됩니다. 의복 중에 코트가 몇 벌 있을 테니 일단은 그걸 입으세요. 곧 새로 사서 보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체체는 거부하지 않았다. 두 달 전 비서 계약서를 쓸 때 값비싼 의류를 선물하자 거절하지 않고 받았던 것처럼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힙스는 이중으로 잠근 문을 열었다. 따로 지시가 내려오지 않는 이상 체체에게 번호를 알려 줄 생각은 없었다.
저택이라고 부르는 이곳은 옛날 귀족이 살 법한 고풍스러운 외관이었지만 그 내부는 인공 지능이 모든 편의 기능을 제공하는 근 미래적인 건물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자동으로 불이 켜지고 넓은 공간이 나왔다. 이미 난방이 가동되어 쾌적한 온도였으나, 눈앞의 풍경은 서늘함을 느끼게 했다.
이블이 취침하는 이곳에는 무엇도 살지 않는다. 애완동물은 물론 그 흔한 화분 하나조차 없다. 바람에 커튼이 흔들릴까 봐 창문도 닫아 놓은 저택은 마치 바깥의 풍경처럼 황량했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 같지요?”
체체는 무심히 안쪽을 훑었을 뿐이었는데, 힙스는 다 안다는 듯이 설명했다.
“이래 봬도 매일매일 정성을 들여 관리합니다. 1층의 창문 관리 직원만 다섯이지요.”
“이사님께서 청소하는 소음을 괜찮다고 하시나요?”
“도련님이 출근하시거나 외출하신 후에 청소합니다. 벽과 가구들이 낮 동안 소음을 머금었다가 밤에 내뿜기도 하기 때문에 도련님이 계시지 않은 낮에도 우리 모두 조용하게 움직이지요. 정원의 동쪽에 있는 저희 숙소도 두꺼운 방음벽에 둘러싸였습니다. 집에서만은 편하게 쉬실 수 있도록 말입니다.”
“예, 저도 조용히 생활하겠습니다.”
즉시 흘러나오는 대답에 힙스의 경계심이 아주 조금 내려갔다.
힙스는 체체에게 3층에 마련된 방을 안내해 줬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넓은 복도 가운데에 문이 단 두 개 있었다. 서로 맞은편에 자리한 커다란 문은 하나는 백색, 하나는 먹색이었다.
“체체 님께서 머무르실 곳입니다.”
힙스는 백색 문을 열었다. 안쪽으로는 또 다른 복도가 펼쳐졌고, 힙스의 뒤를 따라 들어가니 넓은 거실이 있었다. 힙스는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 갔다. 저쪽이 침실이고 이쪽 방은 서재, 이쪽은 드레스 룸….
서재는 힙스의 말대로 온갖 교재와 책들로 가득 차 있었다. 고동색의 튼튼해 보이는 책상 위에는 체체가 비서실에서 사용하던 것과 같은 종류의 데스크톱과 노트북이 자리했고, 그 옆에는 엑셀 책도 세트처럼 함께였다.
드레스 룸은 벨트나 모자 외에는 아직 비어 있었다. 체체의 짐이 모두 들어와도 텅텅 빈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넓었다.
욕실은 창가에 있었다.
“2층에 온천 탕이 있기 때문에 각 방의 욕실은 조금 아담한 편입니다.”
엄청 컸다.
대여섯 명이 들어가도 될 만한 욕조의 전면에 밖이 다 내다보이는 창이 달린 걸 보고 체체는 자신이 저 욕조를 사용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반투명한 캐노피로 장식된 침실을 마지막으로 안내가 끝났다.
“방은 마음에 드십니까?”
“너무 과분합니다.”
“과분하다니요. 급하게 준비하느라 엉망입니다. 당분간 출근하신 사이 저희가 들어와서 이것저것 손봐도 될까요?”
“네….”
“그럼 쉬고 계십시오. 저택 구경을 하셔도 됩니다. 어느 곳이든 자유롭게 다니세요. 저희는 서쪽 별관에서 대기 중이니 필요하시면 인터폰으로 연락하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복도로 배웅 나간 체체의 눈에 먹색 문이 들어왔다.
“검은색 문은 이사님 방인가요?”
“…맞습니다.”
지금까지는 인자한 척이라도 하던 힙스가 갑자기 눈을 날카롭게 떴다.
“우리 도련님이 굉장히 잘생겼고 매력적인 분이긴 하지만, 밤사이 멋대로 침대로 침입한다거나 목욕하시는 걸 엿본다거나 속옷을 훔쳐 간다거나 하면 손모가지를 뽑아 버릴 테니 그렇게 아십시오.”
그 주인 따라서 협박이 무척 거칠었다.
“네, 걱정 마세요. 검은색 문 쪽은 쳐다도 안 볼게요. 없는 방이라고 생각하며 지내겠습니다.”
“꼭 지키셔야 합니다.”
힙스는 체체에게 제발 먹색 문을 흘깃 거들떠보기라도 해 달라고 애원하게 될 미래의 자신은 생각지도 못했다.
경계심 많은 팔불출 집사가 떠나고 체체는 자신이 머무를 방에 다시 들어갔다.
제일 먼저, 따로 맡기지 않고 들고 온 가방을 침대 밑에 쏙 집어넣었다. 바로 어제까지 살았던 집의 총면적보다 더 넓은 침대였다. 차마 앉지도 못하고 물끄러미 보다가 침실을 나왔다.
거실과 복도를 지나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서니 자동으로 환하게 불이 켜졌다.
체체는 적막하고 고독한 저택의 내부를 둘러봤다. 가구라고는 긴 소파와 테이블, 협탁 두세 개, 불 꺼진 TV가 끝이었다. 벽에는 액자 하나 걸리지 않았고, 협탁 위에도 장식품 따위는 없었다.
체체는 소파 등받이를 손가락으로 쓸어 보았다. 먼지 한 점 없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정성 어린 손길을 받으면서 마치 한 번도 사람의 방문을 받은 적 없는 듯 적막이 흐르는 곳이었다.
고요한 공간에 홀로 가만히 서는 것만으로도 평화로움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이블이 그렇듯이, 체체 또한 그러했다.
체체는 무척이나 안락해 보이는 소파를 내려다봤다.
이 집이 그에게 쉴 수 있는 곳이라면 내게도 쉴 수 있는 곳이겠지.
아무도 없는 곳.
고요하고 고독한 곳.
그 어떤 소음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 곳.
항상 그런 곳을 바라왔다.
그러나.
체체는 뒤돌아섰다. 결코 그 편안한 소파에 앉을 수 없었다. 푹신한 침대도, 넓은 욕조도 절대로 자신은 그런 것들을 누려서는 안 된다.
편안함을 느끼는 순간, 차가운 칼날이 목 뒤에 닿는다.
얼어붙을 듯한 섬뜩함에 가슴이 빠르게 가라앉는다.
조금이라도 평안을 느끼면 그들이 찾아와 목덜미를 서늘하게 잡아채며 속삭인다. 우리를 잊지 말라고. 너는 결코 평화로워서는 안 된다고.
체체의 어깨에는 시체들이 매달려 있었다. 언제나, 항상, 지금 또한.
***
이블은 세 시까지 기다리지 못했다. 난민이 이미 내 집에 들어와 기다리는데 어떻게 정시 퇴근을 한단 말인가. 그냥 같이 집에 들어가면 됐을 걸 굳이 체체를 먼저 보내 놓고 혼자 똥줄 타서 시계만 보다가 결국 세 시가 되기도 전에 퇴근을 결정했다.
“어, 어디 가십니까?”
“집에 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집무실을 나가는 이블을 제임스는 말리지 못했다. 얼른 운전기사에게 전화 걸어 지금 내려가신다고 전달하는 게 전부였다.
체체가 온 후로는 이블의 정시 퇴근 빈도가 높아졌지만 그 전에는 마음대로 퇴근 시간을 정했으므로 이블의 운전기사는 항상 근처에 머무른다. 이번에도 역시 긴장을 늦추지 않은 덕택에 이블이 내려오는 시간에 맞춰서 차를 움직였다.
“어디로 모실까요?”
“당연히 집이지. 얼른 밟아.”
“예.”
이블 데빌의 운전기사답게 각종 도로 교통법을 무시하며 액셀을 밟았다. 법규 위반보다는 이블의 심기를 거스르는 게 더 무서웠다.
중앙 저택의 정문 앞에 도착한 이블은 맘이 급해서 차 문을 열고 내릴 때부터 오러를 이용해 정문을 열어젖혔다.
“…….”
체체가 현관까지 마중 나와 있었다.
무심한 얼굴에 갑자기 열린 문에 대한 의아함이 잠시 비쳤으나 이블을 발견하고는 수긍하는 눈빛으로 바뀌었다.
“오셨어요.”
그 일련의 아주 작은 감정 변화와 나지막한 인사가 이블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기대 이상이었다.
그래, 이것 때문에 난민을 먼저 보낸 것이었다. 집에서 기다리다가 반갑게 마중 나오는 난민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
난민은 회사에 올 때와는 다르게 가벼운 옷차림이었다. 오전에는 니트를 입었는데 지금은 반팔 티셔츠 한 장에 편한 바지였고, 그 점 또한 무척 마음에 들었다. 사람들이 집에 돌아가면 편한 옷으로 갈아입듯이 난민도 그랬다는 사실이 흡족했다. 또한 이 병약한 난민 새끼한테 내 집이 그만큼 따뜻하다는 것도.
이블은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갔다.
“넌 내가 오는 줄 어떻게 알고 나와 있었냐?”
“아, 그건….”
“설마 문 앞에서 계속 기다렸어? 멍청아, 연락했어야지.”
“…….”
“그렇게 보고 싶었으면 전화라도 하든가. 그냥 같이 올 걸 그랬네.”
지레짐작하는 이블의 목소리가 아주 들떴다.
사실 체체로 말하자면… 힙스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이제 곧 도착하시니 마중 나가라고. 그러나 사실대로 말하면 저 들뜬 얼굴에 확 실망감이 어릴 걸 알았다.
체체는 오늘만큼은 이블의 얼굴에 실망감이 떠오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쯤 오실 것 같았습니다.”
“진짜 신기하네. 퇴근 시간도 아닌데. 얼른 들어가자. 추워.”
체체의 작은 어깨를 밀며 집에 들어온 이블은 대번에 인상을 썼다.
“개더워. 사람 쪄 죽겠다. 힙스는 관리를 왜 이따구로 하는 거야.”
본인이 ‘존나 병약한 난민 새끼가 살 테니까 난방 빵빵하게 높여 놔’라고 지시했다. 방금만 해도 체체가 반팔 티셔츠를 입었다는 것에 뿌듯해했었다.
“온도 낮추겠습니다.”
“응, 빨랑…. 어, 아니. 아.”
이블이 버벅거리더니 체체에게 물었다.
“너는… 너는 어떤데. 안 더워?”
제임스와 힙스가 있었다면 기함했을 것이다. 이블이 자기 편의대로 하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 지금의 기분을 물어보다니.
“저는 덥지 않습니다.”
“미친, 이게 안 덥다고? 존나 난민 새끼 아니랄까 봐. 거긴 이게 보통이야? 그래서 네가 까만 건가.”
아직 약자 혐오적 발언을 때려치울 정도로 성장하려면 한참 멀었지만.
결국 온도는 낮추기로 했다. 이블이 최대치로 양보해서 딱 3도만 낮췄다. 그래도 여전히 더운 집 안에 이블은 겉옷을 벗어 던지고 셔츠의 단추도 두어 개 더 풀었다.
체체는 이블에게 시원한 냉수를 한 컵 따라 줬다. 이블은 한 번에 마시고 익숙하게 체체에게 빈 컵을 건넸다.
“더 드릴까요?”
“됐어. 그보다 어때? 집 좋지. 네가 살던 데보다 한 천 배는 넓을걸. 따라와. 특별히 구경시켜 줄게.”
“이미 다 구경했습니다.”
“이 넓은 곳을? 어디에 서재가 있고 식당이 있는지 알아?”
“네, 서재는 2층에 있고, 식당은 1층에 있습니다. 온천 탕이 2층에 있다는 것도 압니다. 집사님께서 알려 주셨어요.”
“힙스….”
자기 몫의 즐거움을 빼앗긴 이블이 이를 빠득 갈았다. 그 시각 우리 도련님이 그 작은 난민과 뭘 하고 계실까 걱정하던 힙스의 머리털이 쭈뼛 섰다.
“밥은 먹었어?”
“아니요, 배고프신가요?”
“애한테 밥도 안 먹였단 말이야?”
“지금 세 시 이십 분입니다.”
체체는 이 시간에 저녁을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사실 이블 또한 저녁 식사는 주로 여섯 시 이후에 했다. 다만 퇴근하고 나면 ‘간식’으로 보통 사람 한 끼분의 음식을 먹을 뿐이다. 이블은 식사량이 굉장히 많은 편이었다.
“그래, 세 시 이십 분. 간식 타임이잖아. 이제 곧 힙스가 트레이에 차려서 가지고 올 거야. 식당 가자. 나는 하루 다섯 끼 챙겨 먹으니까 너도 게으르게 굴면 안 돼.”
“네…. …하루 다섯 끼요?”
“응. 아침, 점심, 간식, 저녁, 야식.”
“…….”
이블은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이었다.
이블은 곧바로 식당에 향했지만 체체가 뒤따르지 않았다. 이블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자 체체는 가만히 물었다.
“혹시 이사님께서는 지금 배고프신가요?”
“난 배 안 고픈데 너 배고프면 귀찮지만 같이 먹어 줄 수 있어.”
“저도 지금은 먹고 싶지 않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저희 대화 좀 했으면 합니다.”
“…대화?”
이번엔 이블의 머리털이 쭈뼛 섰다. 살면서 겪어 본 적 없는 생소한 감정이 뒤통수를 갈기고 지나갔다.
“괜찮으시다면요.”
“나, 난 너 같은 거지랑 할 말 없는데.”
“네, 그럼 저는 방에 들어가 보겠습니다. 쉬세요.”
“…야!”
정말로 주저 없이 뒤돌아서는 체체의 작은 등에 대고 소리쳤다.
“뭐, 들어는 봐 줄게. 해 봐.”
“감사합니다. 그럼 저기 앉아서 얘기해요.”
체체가 앞장서서 거실로 향했다. 이블은 고장 난 로봇처럼 삐걱삐걱 체체의 뒤를 따랐다.
대체 무슨 내용일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정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차갑고 날카로운 고드름이 머리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것 같은.
둘은 테이블을 가운데에 두고 마주 앉았다. 이블은 언제 웃었냐는 듯 날이 선 검날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만약 여기서 같이 살고 싶지 않다고 한다면,
저 건방진 머리통을 벽에 처박을 거야. 목을 조르면서 협박해야지. 네가 감히 우리 집에서 마련해 준 집을 팔고 다른 곳에서 사는 걸 알고 있다고. 타르로 다시 쫓겨나고 싶냐고.
아니.
아니지.
타르로 돌아가고 싶어 할지도 몰라. 쫓겨나고 싶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할 거야. 돌아가려 할 게 분명해. 이제 S급 소울러가 됐으니까. 완전 금의환향이잖아. 카론인지 뭔지가 자기를 노린다 하더라도 틀림없이 위험한 곳으로 뛰어들 녀석이야.
잔뜩 인상을 찌푸린 이블은 소파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본인은 자각하지 못했지만, 긴장하고 있었다. 아주 명백하게.
“뭔데. 얼른 말해. 할 일 없는 너랑 달리 난 바쁘니까. 간식 먹어야 돼.”
“제가 조심해야 하는 부분을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넌 나랑 같이 살아야 돼. 불발탄이라고 했잖아. 네 고향에 절대로 돌아가면 안 돼. 타르 그 거지 나라에 오러 유저도 없고 어댑터도 없는데 너 같은 시한폭탄이 가면 감당할 수 있겠냐?”
“…아니요.”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분수에 안 맞는 능력을 타고나서 여러 사람 신경 쓰이게 하는 것보다 그냥 나랑 사는 게 나아. 물론 나도 너무너무 싫지만 일단 내 비서니까 도와주겠다는 거야. 겁나 고맙지.”
“예, 감사합니다.”
이블은 자기 할 말을 속사포처럼 늘어놓았다. 체체도 바로바로 대답하는 걸 보면 알아듣는 듯했다.
“그 작은 머리통에도 뇌가 있다고 이해는 해서 다행이네. 자, 그럼 하려던 말 해 봐.”
“제가 조심해야 하는 점을 알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방금도 한 말이잖아. 아오, 씨, 그러니까….”
“저는 이사님 같은 부유한 분과 함께 산 적이 없어서요. 분명 민폐를 끼치게 될 겁니다. 함께 지내면서 어떤 점을 주의해야 할지 알려 주세요.”
“…….”
차분한 어조에 이블의 뾰족하던 심기도 가라앉았다.
체체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하고 싶은 말만 내뱉었는데, 제대로 듣고 보니까 예상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그게 할 말이었어?”
“예.”
이블은 멍한 채 눈을 깜박였다.
“나갈 생각 없었어?”
“예, 없습니다.”
“…….”
눈매에 서렸던 사나운 기운이 사악 흩어졌다. 날카로운 기색은 가셨지만, 이블은 오히려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인상을 썼다.
“그럼 왜 듣고만 있었어. 내가 막….”
심하게 말했는데.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답을 알 것 같았다.
‘틀린 말 아닙니다. 불발탄은 제거해야 되니까요.’
분명 그런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이 뱁새 새끼는 자기혐오와 죄책감으로 가득한 머저리니까.
그리고 방금 이블은 그 낮은 자존감을 이용하려 했다.
높은 등급의 소울 오러 유저는 감수성이 뛰어나다. 타인에게 공감을 잘하며 눈물이 많고 언제나 감성적이다.
체체는 S급의 소울러였다. 겉으로는 무심하기만 하고 무엇에도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속에는 죄책감의 소용돌이가 몰아칠 것이다.
그 증거로, 지금도 느껴졌다. 담담한 얼굴 아래서 다시금 상처가 벌어졌다는 게. 너무나 견고한 무표정이라서 그 누구도 느끼지 못하겠지만 이블만은 느꼈다. 지긋지긋했던 능력 덕분에 이블은 그 감정을 느꼈다.
아주 살짝 새어 나오는 감정조차 너무나 외롭다. 그 안쪽에는 얼마나 깊은 고독이 펼쳐졌을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이사님.”
“…어, 그래. 그러니까.”
체체의 나직한 부름에 이블이 정신을 차렸다.
“기본적인 것들만 제대로 지켜. 청소 이런 건 다 다른 놈들이 해 줄 테니까, 서로의 자리를 침범하지 않는다거나 소음을 일으키지 않는다거나. 공동생활 해 본 적 없어?”
“있습니다. 하지만 두 명은 처음이에요. 항상 많았거든요. 수백 명이서 함께 살 때도 있었고, 아무리 적어도 열 명은 넘었었습니다.”
“뭐가 그렇게 많아.”
눈썹을 찌푸리며 내뱉는 동시에 깨달았다. 그 공동생활이란 피난민 생활을 말하는 거라고. 까만 피부의 난민들이 수백 명씩 모여서 생활하는 곳. 당연히 청결은 관리가 안 되고, 더럽고 좁아터졌을 것이다.
체체는 그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도 끝이 없는 고독함을 느껴야 했던 어린 영웅이다.
차라리 S급의 소울 유저가 아니었다면 그나마 나았을까.
이블은 자꾸만 처음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런 좋은 곳에서 둘만 지내는 건 처음이라 말씀해 주신 기본적인 사항도 잘 모르고 있어요. 서툰 점이 많을 겁니다. 죄송합니다.”
“…나도.”
너무 답답해서, 저도 모르게 말해 버리고 말았다.
“나도 처음이야. 다른 사람이랑 사는 거.”
“…….”
“규칙 같은 거 몰라, 씨발. 같이 살아가면서 맞추는 거지. 너도 나도 처음 같이 살아 보는 건데 안 그래?”
이블이 일부러 틱틱대며 쏘아붙였다. 그 뾰족한 말에 체체는 눈을 깜박이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네, 그렇네요.”
정말 옅었고 금방 사라졌지만, 호선을 그리는 눈매와 살짝 올라간 입꼬리까지 분명 미소였기 때문에.
이블은 잠시 그대로 멍하게 있어야만 했다.
***
둘의 동거 첫날은 평화롭게 흘러가는 듯했다. 어차피 청소나 설거지 등의 자질구레한 집안일은 모두 사용인들이 해 주기 때문에 부딪칠 일이 없었다.
문제는 너무 없었다는 것이다.
이블은 닫힌 백색 문을 아주 뜨겁게 노려봤다. 그가 아무리 SSS 멀티 유저라지만 노려보는 것만으로 문이 타 버리지는 않았다.
‘난민 새끼가 지금 숨바꼭질하나.’
체체는 건방지게도 한 식탁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한 뒤 자기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고, 그 뒤로 나오지 않았다. 방 안에 욕실이나 TV, 교재 등 모든 게 있으니 나올 만한 일이 없는 것이다.
이블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같이 사는 의미가 없잖아!
아직 일곱 시밖에 안 됐고 잘 시간까지 무려 다섯 시간이나 남았는데 그동안 계속 혼자 처박혀 있을 생각인가.
아까는 그렇게 이쁘게 웃더니….
공동생활의 조건으로 ‘자기 할 일은 거실에서 하기’를 적어야겠어.
이블은 바로 세 시간 전의 말을 번복할 생각을 하면서 문을 노려봤다. 나지막하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났다. 사라락, 책장을 넘기는 소리도 들렸다. 펜으로 종이에 무언가를 끼적이는 소리도.
체체는 공간이 바뀌었어도 지금까지의 일상을 반복하는 모양이었다. 퇴근하고 나면 그 작은 한 칸짜리 방에서 공부를 하며 시간을 보내 왔으리라고 쉽게 예상되었다. 알시티에 온 지 일 년 만에 이렇게 능숙하게 회화하는 것만 봐도 그림이 그려졌다.
그 골방에서는 어두침침한 방구석에서 책만 읽는 게 고작이었겠지만, 이제는 할 수 있는 것이 많았다. 한동안 끄적끄적하더니 이제는 노트북 전원을 켜는 소리가 들렸다. 의자에 앉는 소리, 옆에 책을 갖다 놓는 소리, 마우스를 달칵거리는 소리.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대는 소리까지.
“…….”
어째서인지 화가 좀 가라앉았다.
타자 연습을 하는지 타닥타닥 키보드를 치는 소리, 잠시 멍 때리며 화면을 보다가 다시 타탁타닥. 마우스도 몇 번 딸깍하다가 곧 책을 편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 의자를 당기는 소리. 마우스를 이동시키며 뭔가 이것저것 눌러 보더니 작게 한숨을 내쉰다. 그 한숨이 너무 귀여우면서도 안쓰러웠다.
그리고 체체는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잠이 든 숨소리는 아니었다.
자각 없이 스토킹하던 이블이 심심해져서 돌아가려 할 때쯤 움직임이 느껴졌다. 뒤이어 가슴 한가운데를 주먹으로 내리치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갑작스러웠으나 이유가 충분한 자학이었다. 그 소리는 불규칙한 간격을 두고 계속 반복됐다. 이블은 문을 열어서 저 행동을 멈추게 할까 고민하다가 그만뒀다.
이블은 알았다.
그는 그런 행동을 해 본 적이 없지만, 사람은 답답하면 가슴을 친다.
억울한 일이 있으면 가슴에 응어리가 쌓이고, 슬픈 일이 있으면 가슴속이 쥐어뜯기는 듯이 아프며, 분노하면 가슴이 요동친다. 답답함을 풀 길이 없는 사람들은 고인 감정을 흩뜨리기 위해 스스로를 괴롭힌다.
체체는 괴로워하고 있었다. 알시티어를 배우는 것도, 컴퓨터를 다루는 것도, 따뜻한 방 안에서 지내는 것도, 모든 것이 타르의 어린 영웅을 힘들게 만들었다.
둔탁한 소음이 점점 작아지고 체체는 다시 펜을 쥐었다.
“…….”
이블은 입술을 깨물었다. 엔덤 가문의 병원과 이 저택은 이블이 그나마 쉴 수 있는 곳이었다. 이블의 청력을 고려해 설계 시부터 방음을 철저히 한 건물이지만 그래 봤자 귀를 기울이면 전부 들려온다.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체체의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지긋지긋한 소음 속에서 귀를 뜯어내 버리고 싶은 적도 많았던 이블 엔덤은 지금 그 소음을 조금이라도 더 듣기 위해 문에 기대서 귀를 기울였다.
본인은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행동이었다.
***
체체는 아직 S급 소울 오러 유저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지만, 소울러가 받아야 하는 교육은 미리부터 받기로 했다. 타르에서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오러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이 아주 부족했으므로 정말 기초적인 교육부터 시작하기 위해 강사를 초빙했다.
“오러라는 것은… 그, 인간이 태생적으로 가진 기운을 의미하며, 이 기, 기운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을 오러 유저, 다룰 능력이 없는 사람을 노유저라고 부… 릅니다.”
강사는 덜덜 떨면서 힘겹게 문장을 이어 나갔다. 그는 이 교육에 지원한 것을 굉장히 후회하고 있었다. 체체만 가르치면 된다고 들었는데 그 옆에 이블 데빌도 떡하니 앉아 있었으니까.
심지어 이곳은 교육실도 아니고 이블의 집무실이었다. 대체 몇십, 몇백 구의 시체를 치웠을지 모르는…. 이 끔찍한 소문이 무성한 곳은 예민하고 섬세한 C급의 소울 오러 유저가 감당하기 힘들었다.
강사는 다른 대부분의 오러 유저와 마찬가지로 이블을 동경하면서도 두려워했다.
“그, 오러를 다루는 능력에 따라 모셔너, 소울러, 어댑터로 나뉩니다. 긱각의 대표적인 특징으로는… 모셔너는 염력, 소울러는 감정의 조절, 어댑터는 오러 유저… 그러니까 다른 오러 유저의 오러를 조종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체체는 무표정하게 강의를 들었다. 시선은 어린아이용 교재를 향했다.
“모든 오러 유저는 어댑터를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소울 오러 유저의 경우에는 어댑터에게 휘둘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체체 씨의 경우 S급이므로 오러 유저 보호법이 강하게 적용되겠지만… 그래도 조심하시는 게 좋겠죠….”
“오러 유저 보호법이 뭔가요?”
“말 그대로 세계의 귀중한 자산인 오러 유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법입니다. 모든 어댑터는 센터의 승인이나 상대 오러 유저의 수락 없이 오러 유저의 정신을 침범해서는 안 되며, 만약 허가 없이 침범했을 경우 최소 십 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습니다. 어느 소울 유저 아이돌을 해하려 한 어댑터가 이 보호법을 적용받아 무기 징역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체체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물었다.
“오러 유저가 오러 유저를 괴롭히면요?”
“그 경우에는 오러 유저 보호법이 아니라 오러 유저 규약을 적용받습니다. 등급과 상황에 따라 다르죠.”
“노유저가 오러 유저를 괴롭히는 건요?”
“오러 유저 보호법 적용 대상입니다. 상대적으로 약자인 노유저라 하더라도 오러 유저를 해칠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으니… 이 부분은 논란이 있지만, 가해자가 노유저인 경우 어댑터보다 더 강하게 형벌을 받습니다. 그렇기에 요즘은 노유저가 오러 유저를 해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전에는 노유저들이 체체 씨처럼 막 각성해서 제대로 힘을 다루지 못하는 오러 유저들을 납치하기도 했습니다. 전부 무기 징역 선고를 받았고요….”
“전부….”
“예, 전부. 범죄자들의 국적이 무엇이든, 어떤 뒷배가 있든, 증거가 확실하다면 모두 무기 징역입니다. 오러 유저 보호법은 국가, 국제법보다 위에 있는 법규라서….”
굉장히 논란이 많은 법규였다. 특히 노유저들은 법이 약자가 아니라 강자를 보호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무리 형평성이 없더라도 이 법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현재의 지구는 노유저보다 오러 유저를 필요로 하므로. 지구를 위해서는 오러 유저가 강자이더라도 보호해야만 했다.
“야, 또 하나 있잖아. 오러 유저 종류. 어댑터, 모셔너랑 소울러 말고 하나 더.”
팔짱 낀 채 체체만 응시하던 이블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테스트를 당한다는 생각에 강사는 격렬하게 두뇌를 굴려 답안을 도출했다.
“멀티 유저… 소울 오러와 모션 오러를 동시에 사용 가능한 멀티 유저도 존재합니다.”
“몇 명 있지?”
“현재 멀티 유저는 이블 데… 엔덤 님, 한 분뿐입니다.”
강사가 눈치 빠르게 대답하자 이블이 어깨를 으쓱대며 체체를 쳐다봤다.
들었지? 내가 이렇게 대단해.
자신만만한 얼굴로 붉은 눈을 반짝이는 이블에게 체체는 무심히 물었다.
“그럼 멀티 유저는 멀티러라고 부르나요?”
“…안 줄여. 씨발, 어차피 나밖에 없는데.”
이블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강사는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고 구석만 쳐다봤다. 멀티러라니. 너무 하찮아서 표정 관리가 힘들었다.
“하긴 넌 역사상 유일무이한 SSS 멀티 유저인 나한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역사에 한 획을 긋냐고 물어봤었지.”
히익, 강사가 숨을 들이마시자 거슬렸는지 이블이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피처럼 붉은 눈에서 피어오르는 살기에 강사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럼에도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서 주저앉고 말았다. 그걸 보고 이블이 씩 웃었다.
“봐. 저런 반응이 정상이야.”
“…….”
체체는 벌떡 일어나 강사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괜….”
체체가 강사의 한쪽 팔을 붙잡고 어깨를 부축하자 이블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강사는 본능적으로 체체의 손을 뿌리쳤다. 찰싹, 하며 생각보다 거친 소리가 났다. 다갈색의 가느다란 팔목이 금세 붉어졌다. 강사는 미안하다는 말조차 못 하고 입술을 뻐끔거렸다.
“요즘 가만히 있었다고 별 거지 같은 것들이 짜증 나게 하네.”
이블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남과 동시에 체체가 강사의 등을 살짝 밀었다.
“나가세요.”
“하… 지만.”
“괜찮습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이블이 무섭게 으르렁댔다.
맹수의 위협 앞에 놓인 초식 동물처럼 얼어붙은 강사의 등을 체체가 다시 밀었다. 금색 눈과 마주쳤다. 두려움이라고는 없는, 담담한 정도가 아니라 무심하기까지 한 눈을 본 순간 강사는 일어날 힘을 얻었다.
“어딜 도망가려고. 네 오른팔은 놓고 가야지.”
단상 위에 있던 마이크 스피커가 허공을 날아 정확히 강사의 어깨로 향했다. 강사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츠렸지만 어떠한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살며시 눈을 떠 보니 체체의 등이 보였고, 스피커는 체체의 이마 바로 앞에 둥둥 떠 있었다.
“이사님.”
“너 내 인내심 테스트하냐? 내가 네 행동을 얼마나 참을 수 있을지 시험해?”
“아닙니다.”
“그럼 거기서 비켜. 난 저 팔을 뜯어내야겠으니까.”
“왜요?”
“왜냐니 저 새끼가 네 팔을…!”
“전 멀쩡합니다.”
체체가 둥둥 떠 있는 스피커를 밀어 내며 앞으로 다가갔다. 이블은 어, 어, 하며 그 자리에 멈췄다.
“이사님, 보세요. 전 다치지 않았어요.”
천천히, 가까이 다가간 체체가 긴소매를 팔꿈치로 주욱 밀고는, 살갗이 드러난 팔을 이블 앞에 내밀었다. 강사가 때렸던 손목은 아직 붉었는데, 체체의 눈에만 붉어진 피부가 보이지 않는지 봐라, 멀쩡하지 않냐는 식으로 뻔뻔하게 나왔다.
“너, 하….”
이블은 기가 막힌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순간 정신을 차린 강사는 그 미묘한 대치를 마지막으로 집무실을 뛰쳐나갔다. 안 그래도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와 복도에서 대기하던 비서 제임스와 눈이 마주치자 제임스는 곧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강사를 비서실로 안내했다.
강사는 비서실에서 모든 일을 함구하겠다는 기밀 서약서를 작성했다. 작성하면서도 연신 출입문 쪽을 흘깃하자 비서 중 한 명이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고 속삭였다.
“거기에 체체가 있잖아요. 쫓아오지 않으실 테니 안심하세요.”
대체 이해도 안 되고 안심도 안 되는 말이었으나 비서의 말대로 작성을 끝낼 때까지 악마는 나타나지 않았다. 강사가 집무실이 있는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로 향할 때, 집무실 쪽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강사는 센터의 정문을 나오면서도,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하는 동거인 앞에서도 이블 데빌이 갑자기 나타나 자신에게 해코지를 하지는 않을까 불안해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는 체체가 소울 오러 유저로서의 모든 교육을 수료했다는 뉴스를 보고서야 안심했다.
안심이 되고 나서야 호기심들이 생겨났다.
체체는, 무섭지도 않을까. 저런 악마와 단둘이서 같은 공간 안에 있어야 하는 게. 그날 내가 그렇게 도망친 이후 무슨 일이 있었을까. 어떻게 그렇게 담담할 수 있을까. 얼마 전에는 이블에게 폭행당하기까지 했는데. 뉴스로는 단 한 번이었지만 강사는 상습적인 폭행이 있었으리라고 추측했다.
그렇게 두려움 없이 구는 건 전쟁터에 있다 와서일지도 모르겠어. 소년병 역할로 나왔던 영화에서는 연기력이 엉망이었지만….
더 이상한 점은 이블 데빌이었다. 그 악마가 왜 체체에게… 그 작고 마른 난민에게 붙잡혔는지. 애초에 분노한 이유도 체체를 밀쳐 냈다는 것이었다.
그때 악마의 얼굴은 무척 이상했다.
‘하긴 넌 역사상 유일무이한 SSS 멀티 유저인 나한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역사에 한 획을 긋냐고 물어봤었지.’
그 말을 할 때 왠지, 정말 말도 안 되지만,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정말 말이 안 되지만, 뿌듯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정말 말도 안 되지만….
붉어진 손목을 내밀며 뻔뻔하게 앞을 막아서는 체체를 보면서, 자신을 감히 두려워하지 않는 난민을 보면서 몹시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
일주일의 교육 기간 동안 오로지 이블의 횡포 때문에 세 명의 강사를 갈아 치우고, 무사히(?) 오러 유저로서의 기본 소양 익히기가 끝났다.
“저는 이제 무엇을 하나요?”
오전에 이뤄진 테스트를 마치고 그렇게 묻는 체체에게 이블은 아직 해야 할 게 많다며 따라오라고 했다.
도착한 곳은 헬기 이착륙장이었고, 헬기를 타고 또다시 이십 여분을 날아간 곳은 어느 관광 도시에 있는 유명한 레스토랑이었다. 이블은 점심시간 약 한 시간 반을 위해 이곳의 두 층을 전세 냈다. 아래층은 헬기 조종사를 비롯한 수행원들이 쓰라고 하고, 이블과 체체, 제임스만 전망 좋은 꼭대기 층에 올라왔다.
“그거 내놔 봐.”
“예.”
음식들이 나오기 전 이블이 제임스에게 손짓했다. 제임스는 얼른 서류 가방에서 파일을 꺼냈다.
타르의 어린 영웅이자 이블 데빌의 비서라는 유명 인사가 S급 소울러로 각성한 사실이 퍼지고 각종 단체가 관심을 보여 왔다. 환상술을 이용한 공연을 전문으로 하는 단체, 트라우마의 심리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단체, 루젬 세공을 전문으로 하는 단체 등등.
이제는 이블의 비서진이 아니라 이블과 체체의 비서진이나 다름없는 비서들이 일차적으로 거르고, 제임스가 이차적으로 걸렀다.
“각 분야에서 한 곳씩 엄선했습니다. 물론 모두 센터 소속 단체입니다.”
“흐음.”
마침 빛깔 좋은 요리들이 서빙되었다. 잔뜩 굳어서 테이블에 접시를 가져다 놓는 웨이터에게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사람은 체체 혼자뿐이었다.
이블은 삐딱하게 앉아 서류를 대충 넘겼다.
체체와 친해지고 싶어 안달 난 곳들. 정확히는… 체체를 통해 자신과 연을 만들고 싶어 하는 곳들.
이 단체들에 소속시키려는 것은 아니었다. 체체는 이미 이블에게 소속되었으니까. 다만 가장 능력을 크게 발휘하는 분야가 어디인지 테스트할 필요는 있었다.
물론 엄청난 재능을 보인다고 해서 밖으로 나다니게 놔두진 않을 것이다. 이블은 자신이 가는 곳마다 체체를 데리고 다닐 생각이었다.
즉, 바꿔 말하면 체체는 어차피 이블과 함께할 것이므로 이블이 이렇게 단체 정보가 적힌 서류를 들고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이블은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야, 먹어.”
이블은 서빙이 끝나자마자 서류를 내려놨다. 자신이 서류를 보고 있으면 체체가 먹지 않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사 주시는 건가요?”
“응, 고맙지.”
“이번에는 제가 사고 싶습니다.”
‘이 한 끼가 체체 씨 연봉보다 많습니다…!’
라고 제임스가 속으로 울부짖었다.
이블은 피식 웃었다.
“나중에 사 주고 일단 얼른 먹어.”
“예, 맛있게 드세요.”
체체는 금가루가 뿌려진 거위 간 위로 포크를 가져갔다. 그동안 수차례 경험으로 체체가 전채 요리를 먹다가 배가 불러 버린다는 걸 안 이블은 메인 요리 두어 개와 디저트만 준비하라고 일렀다. 레스토랑 측에서 준비한 요리는 금가루가 올라간 거위 간과 특제 소스를 뿌린 살이 통통한 새우였다.
“맛있냐?”
“예.”
맛있다는 뜻이 뭔지도 모른다는 얼굴로 대답은 잘도 했다.
어떤 걸 먹여도 건조한 반응이라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언젠간 알 것이다. 시간은 많으니까.
오물오물 움직이는 입술을 보다가 이블도 식사를 시작했다. 체체가 거위 간 반 개를 깨작이는 동안 이블은 거위 간 하나와 새우 여덟 마리, 여섯 가지 소스에 발라 먹는 고소한 빵 세 개를 모두 해치웠다. 솔직히 그는 새우와 빵을 전부 흡입할 수 있었지만 체체도 먹어야 해서 참았다.
“맛있네.”
제법 괜찮았다. 희한하게, 본래 뭘 먹든 비슷하게만 느껴져 맛집 따위 찾아다닌 적 없었는데 난민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부터 맛있다는 말이 자주 흘러나왔다.
순식간에 제 몫을 비우고 심심해진 이블은 빨리 먹으라고 재촉하는 대신 다시 서류를 훑었다.
대다수의 소울 유저는 어떠한 재난이 일어났을 때 그곳에 투입되어 재난 피해자들의 마음을 다독이는 일을 한다. 하지만 이블이 생각했을 때 체체는 오히려 재난 피해자에 속했고, 다독임을 받아야 할 것 같았다.
환상술 쪽은 재능을 보일 가능성이 높았다. 지난 일주일간 체체가 받은 오러 유저로서의 기본 소양 교육 중에 간단한 환상술 교육이 있었는데, 체체는 처음치고는 곧잘 해냈다. 강사가 감탄할 정도였다.
환상술 무대를 펼치는 이들을 ‘쇼셀러’라고 부른다. 쇼셀러들은 공연의 콘셉트와 맞는 의상을 갖춰 입고 대중 앞에 서서 무대를 펼치는데, 대부분의 무대 의상이 화려하기로 유명하다. 천사 날개를 달고 하얀 무대 의상을 입은 난민의 모습도 보고 싶긴 하지만 아무래도 외부 활동이 많다는 단점이 너무 컸다. 심리 치료는 이블이 재난 지역에 투입될 때 동행해서 하면 되지만, 환상술 공연은 체체 혼자 다녀야 했다.
‘절대 안 되지.’
특히 쇼셀러는 가수나 배우와 다름없는 연예인이었다. 체체가 펼치는 환상술이나 무대 의상을 입은 모습이 무척 궁금했지만 대중 앞에서 공연하는 건 녀석의 성격과도 맞지 않는다.
뭘 하고 싶어 할까, 이 난민은.
이블이 체체를 빤히 바라봤다. 마주 앉은 체체는 아직 본인 몫의 삼분의 이도 비우지 못한 상태였다.
저 상의를 들추면 말라빠진 상체에 멍 자국이 가득할 것이다. 난민은 자해를 하고 있다. 아마 그때 병원에서 맡았던 피 냄새도 이 녀석의 것일 터다. 저택에 들어와서는 피를 내는 자해까지는 하지 않지만…. 이블은 자해를 한다는 사실 자체도 아주… 굉장히 못마땅했다.
“야, 빵 좀 크게 뜯어 먹어. 네가 진짜 뱁샌 줄 알아?”
그는 빵이 든 접시를 체체 쪽으로 밀었다.
“새우도 좀 먹고.”
“예.”
탱글탱글한 새우 접시도 밀었는데, 접시끼리 부딪쳐서 멈춰야 했다.
“테이블 겁나 좁네.”
테이블은 넓었다. 체체 앞에만 접시들이 몰려 있을 뿐.
제임스는 황량한 자기 자리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나도 아직 식사 중인데… 아무래도 이 자리에 나도 있다는 걸 잊으신 모양이다. 다행이다. 앞으로도 계속 내 존재를 잊어 주셨으면 좋겠다.
자기 앞에만 몰린 걸 아는지 모르는지 체체는 입 안에 있는 것을 꼭꼭 씹어 삼킨 후 이블이 내민 접시 위에서 새우 하나를 포크로 콕 찍었다.
“야, 야!”
그대로 입에 갖다 대는 체체를 이블이 멈추게 했다.
“새우 깔 줄 모르냐?”
“죄송합니다. 항상 통째로 먹어서 까 본 적 없습니다.”
“새우 껍질을 까 본 적이 없다고?”
“예.”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함께 먹은 새우 요리는 모두 껍질이 벗겨진 채 나왔었다.
“진짜 가지가지 한다.”
이블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새우를 집어 들었다.
“이거 그냥 이렇게.”
“…….”
“이렇게….”
“이사님도 모르시네요.”
빤히 쳐다보는 체체가 확인 사살을 했고 이블은 손가락 사이에서 짓눌린 새우를 집어 던졌다.
생각해 보니 그도 손으로 까 본 적 없었다. 대부분 껍질이 벗겨진 채 나왔고, 항상 오러를 이용해 깠으니까. 오늘도 오러를 이용해 벗겨 냈다.
“야, 몰라도 돼. 어차피 대부분 까서 나와. 그리고 어차피 내가 까 주면 되잖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접시 위의 새우들이 껍질을 벗기 시작했다. 모션 오러를 이용한 염력이었다.
“됐지?”
이블은 씩 웃으며 체체를 쳐다봤다. 체체는 탱글탱글 탐스러운 분홍빛 새우살들만 남은 접시를 한 번 보고, 자신만만하게 웃는 이블을 올려다봤다.
“감사합니다.”
“감사한 거 알면 얼른 먹어.”
“그 모션 오러를 좀 더 다른 의미 있는 곳에 사용할 수 있을 텐데….”
“아, 닥치고 얼른 처먹기나 해!”
이블은 꽥 소리치고는 다시 서류를 들었다. 그러나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곧 얼마 안 가서 오물오물 입술을 움직이는 체체를 훔쳐봤다.
귀가 있고 눈이 있는 죄로 모든 걸 듣고 본 제임스는 내가 지금 눈 뜬 채로 꿈을 꾸는 건가 싶어 볼을 꼬집어 봤다. 물론 꿈이 아니었다. 자신은 이 정도의 획기적인 상상력이 없으니까.
이블 데빌이 새우 껍질을 까 줬어…. 죽을 날이 온 것인가. 이블이 죽으면 세상이 한바탕 난리 날 텐데… 갖고 있는 주식을 현금화해야겠다….
그저 멍청히 그런 생각만 했을 뿐이었다.
***
평화로운 (누군가에게는 공포 영화 같던) 새우 파티가 끝나고, 디저트로 향긋한 꽃잎이 올라간 조각 케이크와 채소를 넣은 시원한 음료가 나왔다. 달짝지근하니 맛있어 보이건만 이블은 툭, 딴지를 걸었다.
“아니,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밖이 한겨울인데 웬 찬 음료야. 난민 감기 걸려.”
“감기 안 걸립니다.”
“너 저번에도 걸렸잖아.”
“살면서 그때 한 번밖에 없습니다.”
체체는 집사에게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블의 반응은 힙스와는 달랐다.
“타르가 더운 나라였어도 어떻게 한 번도 안 걸렸겠냐. 감기인 줄 모르고 지나갔던 거겠지.”
“이사님도 감기 걸린 적 없으시잖아요.”
“그건 나니까 그렇고.”
이블은 어깨를 으쓱하며 찬 음료를 다시 가져갈지 말지 방황하는 웨이터를 돌려보냈다.
“너 이거 마시고 감기 걸리면 죽는다.”
이블이 으름장을 놓았지만, 감기 걸릴 확률은 희박했다. 요즘 체체는 계절이 겨울이 맞긴 한지 헷갈릴 정도였다. 집 안이 하도 따뜻해서, 이블과 함께 출퇴근하며 타는 차 안도 너무 따뜻해서 옷차림이 오히려 가벼워졌다. 심지어 점심시간에 종종 이용하는 전용기나 헬기도 따뜻했다.
지금 체체가 차려입은 옷만 봐도 셔츠 위에 니트 레이어드, 카디건으로 끝이었다. 힙스가 패딩 점퍼나 모피 코트 같은 온갖 두꺼운 겨울 외투를 사 보냈으나 드레스 룸에서 꺼낼 일이 생기기나 할지 의문이었다.
체체가 이 정도이니 이블의 경우는 가벼운 셔츠 한 장이 끝이었다. 그 차림으로도 덥다고 툴툴거리면서 결코 온도를 낮추라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체체는 이블이 자신을 배려하고 있음을 알았다.
“맛있냐?”
“네.”
“팍팍 좀 마셔. 새우도 기껏 까 줬더니 반도 못 먹고.”
이블은 삐딱하게 앉아 테이블 위에 턱을 괸 채 구경했다. 체체는 눈을 내리깔았다. 공교롭게도 지금 막 배가 불러서 컵을 내려놓을 참이었다.
전쟁터에서 자라 온 체체는 결코 눈치가 없지 않았다. 이블은 계속 자신을 배려해 주었다. 그와 오랜 시간 함께한 제임스가 저렇게 경악한 얼굴을 할 정도로… 계속해서.그의 기분을 나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남을 배려하는 성격이 아닌데도, 성질을 꾹 눌러 참고 이렇게 배려심을 보여 주는데.
“…이사님도 드세요.”
고민하던 체체는 파란색과 붉은색이 어우러진 주스를 이블에게 건넸다.
이블의 붉은 눈이 휘어졌다.
“너 배불러서 나 주는 거지?”
“맛있습니다.”
“안 속아.”
“정말이에요.”
체체는 주스를 내밀며 아예 이블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이블은 숨을 들이마시며 의자를 뒤로 끌었다. 체체의 잿빛 머리카락이 살랑였다. 길고 촘촘한 속눈썹 아래 금색 눈은 노을 아래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밭 같았다. 체체의 눈동자에 당황한 청년이 담겼다. 청년은 시선을 회피하며 볼을 붉혔다.
“그… 래, 줘 봐.”
이블이 유리컵을 낚아채고는 생수 들이켜듯 벌컥벌컥 한 번에 삼켰다.
“이게 뭐가 맛있냐! 달짝지근하기만 한데.”
“전 맛있던걸요.”
“닥쳐, 씨발. 배불러서 나한테 넘긴 거 다 알아. 더럽게 맛도 없는 걸….”
이블은 티슈로 거칠게 입술의 물기를 훔쳤다. 여전히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항상 저한테 많이 먹으라면서 이사님은 디저트도 안 드시잖아요.”
“장난하냐. 메인을 다섯 그릇 먹었어.”
“디저트는 안 드셨죠.”
“…맛없어서 그래. 넌 얼른 그 케이크나 처먹어.”
이블은 뚱하니 내뱉었다.
“단거 좋아하나 보네.”
그 중얼거림에 체체는 한입 먹은 조각 케이크를 내려다보며 잠시 고민했다.
단걸 좋아한다고? 지금까지 이블이 자신을 데리고 다니면서 이것저것 먹였던 걸 떠올려 보면, 그런 것 같다.
이러면 안 되는데.
없어야만 했다. 세상에 맛있는 음식 같은 건 없어야만 한다. 세상 모든 사람이 향긋하고 맛있는 요리를 먹어도, 나만은 결코 즐겨서는 안 된다.
‘전 단걸 좋아하지 않아요.’
체체는 그렇게 부인할 만큼 뻔뻔하지도 않았다. 달콤한 조각 케이크나 잔뜩 먹어 버린 새우를 보면 뻔히 아는데.
쓴 것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모두 게워 내고 싶었다.
“야, 야.”
그때 이블이 혀를 차며 체체의 얼굴 앞에서 손을 휘저었다.
“왜 또 표정이 나라 잃은 사람처럼 거지 같아지냐.”
“…배가 불러서 더는 먹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 알았어. 맘대로 해.”
배가 터질 때까지 먹이려고 들 때는 언제고, 이블은 순순히 체체가 포크를 놓는 것을 허락했다. 깨끗이 치워진 테이블 위에서 체체는 다시 평소의 무심한 얼굴로 돌아왔다.
가만히 쳐다보던 이블이 체체에게 서류 더미를 던졌다. 제임스가 선별한 소울 오러 유저 단체들이었다.
“다 처먹었으면 이거나 보고 골라.”
체체는 회화는 능통해도 외국어가 빼곡히 적힌 종이를 읽는 건 다소 어려워했다. 체체가 차근차근, 천천히 읽어 나가는 동안 이블은 삐딱하게 앉아서 기다렸다.
제임스는 초조하게 눈치를 살폈다.
빨리 좀 읽으라고 재촉하지 않는다. 저 참을성 없는 인간이.
저 성질머리가 체체에겐 예외라는 데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됐는데, 여전히 새삼 놀라웠다. 두 번 묻는 일을 용인하는 것도, 새우 껍질을 벗겨 주는 것도, 서류를 다 읽을 동안 인내심 있게 기다리는 것도.
제임스와 마찬가지로 체체도 느꼈다. 이블은 인내심을 끌어모아 (비록 테이블을 손가락을 툭, 툭, 툭 빠르게 두드리고 있지만) 자신을 기다려 주고 있었다. 체체는 차분히 모든 서류를 읽었다. 체체의 눈동자가 서류 마지막 장의 마지막 문장, 마지막 단어에 다다르자마자 이블이 입을 열었다.
“어디 할래? 빨리 골라.”
“저는 이사님의 비서로서 활동하는 게 아닌가요?”
“당연하지. 날 보필해 줄 소울 오러 유저로 같이 다닐 거야. 이건 그거랑 별개야.”
“꼭 필요한 게 아니라면 안 하고 싶습니다.”
“하라면 해… 너한테 선택권 없어.”
이블이 인상을 찌푸렸다. 체체는 이블의 배려에 답례를 하고 싶었다.
“그럼 보석 세공 쪽을 하겠습니다.”
“아, 루젬. 너 저번에 여기 완전 관심 가졌었지. 돈 많이 벌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러냐?”
“많이 벌 수 있나요?”
체체는 고개를 기울였다.
“돈 때문 아니면 왜 이거 했는데.”
“그때 봤던 보석들이 예뻐서요.”
“…….”
이블도 제임스도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그래, 루젬용 원석이 보기 좋긴 해. 제임스, 들었지? 세공 도구 준비해서 집으로 보내. 보석은 원석으로 준비하고.”
“…예.”
집으로요? 라고, 제임스는 하마터면 확인하는 질문을 던질 뻔했다. 이블이 제일 싫어하는 짓을. 가슴을 쓸어내리는 제임스의 눈앞에서 체체가 눈을 깜박이며 이블이 제일 싫어하는 질문을 던졌다.
“왜 집으로요? 이 단체에 가서 배우는 게 아니었습니까?”
“이 단체 작업실도 어차피 센터에 있어. 집에 세공실 하나 만들어 줄 테니까 존나 고마워해. 건방진 난민 새끼도 내 비서라고 챙기는 거야.”
“감사합니다, 이사님.”
체체의 무덤덤한 감사 인사에 이블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뿐이었다.
화가 차오르는 것 같던 눈썹은 금세 누그러지고 입매는 호선을 그렸다. 웃는다는 자각도 없어 보였다. 화를 냈어야 할 타이밍이었으나 화는 내지 않고 오히려 웃음기 어린 얼굴을 한다.
“내 저택의 작업실에서 세공했으니 비싼 값에 팔리겠지. 돈 벌어서 좋겠어.”
“…….”
체체는 S급의 소울 오러 유저였고, 사람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짧은 고민 후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니까 보석 세공 말고, 환상술로 할까 싶어요.”
“아, 더럽게 변덕스럽네!”
이블이 쾅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냥 루젬 하지 왜 어울리지도 않는 걸… 야, 요즘 인기 많은 쇼셀러 무대 영상 취합해서 내 메일로 보내 놔.”
“예.”
“아니, 먼저 애한테 어울리는 거 잘 입힐 스타일리스트를 구해 놓고. 요즘 쇼셀러들 의상이 다 발랑 까졌어. 목 여기까지 단정하게 입히는 게 조건이야. 손목뼈도 보이지 말라고 해. 종아리도 안 돼. 무조건 긴팔, 긴바지야.”
“이사님.”
체체가 이블의 말을 끊으며 불렀다.
“왜.”
“…….”
“불러 놓고 왜 쳐다보기만 하는데.”
“…….”
이블은 이미 성질이 난 듯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체체는 이미 불이 붙은 장작에 기름을 부어야만 했다.
“저 그냥 루젬으로 하겠습니다.”
“아, 씨발 진짜!”
이블이 포효하며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넘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제임스는 멀찍이 도망가서 휴대폰을 손에 쥐고 아래층에 구급 신호를 보낼 준비를 했다. 당장 체체의 멱살을 잡고 내동댕이쳐도 모자란 상황이었다. 번복을 싫어하는 이블의 앞에서 두 번이나 번복했으니.
이번에야말로 폭발할 것이다. 아무리 체체가 예외일지라도.
195cm의 장신이 체체의 머리 위에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이블의 붉은 눈은 열기를 담고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것으로 체체는 알았다.
해하지 않으리라는 걸.
“…너.”
이블이 잔뜩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확실히 말해. 뭘 하고 싶은데.”
“…….”
“세 개 다 해 보고 싶은 거야? 그래서 그래?”
체체의 눈빛이 흔들렸다. 항상 무심한 금색 눈에 작은 일렁거림이 퍼져 나갔다.
그 반응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이블의 표정이 풀어졌다.
“야, 이 병시… 아오, 그런 거면 말을 하지. 다 해 봐. 다 해 보고 나서 제일 재밌었던 걸 고르면 되잖아. 제임스, 들었지? 전부 준비해.”
“…예….”
제임스는 얼빠진 상태로도 본능적으로 대답했다.
이블은 오러로 의자를 일으켜 세우고 다시 앉았다.
“재난 피해자 심리 치료는 나 재난 지역에 투입될 때 같이하면 되고, 환상술은 일단 쇼셀러 공연을 많이 보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 보석 세공도 먼저 홀리아젬을 본 다음에 하는 걸로, 아, 집에 홀리아젬이 몇 개 있었는데 버리지 말걸 그랬나. 일단 작업실을 지어 놓고….”
체체는 이블의 주절거림을 들으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블 엔덤은 나에게 호감을 가진 것 같아. 호기심이 섞인 호감을….
어째서인지 심장이 저릿해졌다. 주위의 소리들이 점차 아득히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
결국 체체는 심리 치유와 루젬 세공, 환상술을 모두 경험해 보기로 했다. 이블은 앞으로 바빠질 거라며 신이 나서 이것저것 지시했고, 체체는 그 옆에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직 재측정 전이기 때문에 엄연히 비서실 소속이지만 오늘 하루 종일 이블의 집무실에 있다가 퇴근하게 되었다.
이블과 함께 차에 올라 저택으로 돌아가면서 체체는 생각에 잠겼다.
그가 나를 예외로 두는 건 아주 짧은 시한일 것이다. 호기심이란 충족되고 나면 사라지기 마련이고, 호기심이 사라지면 그에게 나는 다른 탈타르 난민과 다름없어지겠지.
손에 잡히듯 선명히 그려지는 미래였다.
결코 얼굴에 티는 나지 않았지만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저택에 도착해서는 더욱 심경을 복잡하게 만드는 소식을 들었다.
“욕실이 고장 났다고요.”
“예… 두 방 모두 완전히 산산조각 났더군요. 마치… 누군가 주먹으로 내려친 것처럼….”
힙스는 말하면서 이블을 힐끗 보았다. 이블은 딴청을 피우다가 힙스와 눈이 마주치자 노발대발했다.
“뭐? 누구야! 강도가 들었어?”
“굉장히 힘이 센 강도였나 봅니다…. 바닥 타일과 세면대, 욕조가….”
“사람 주먹으로 어떻게 부숴. 부실 공사였겠지. 공사했던 인간들 존나 쓰레기다, 그치?”
“그러게 말입니다….”
이웃 나라 대통령 집보다 튼튼하게 지어졌다. 그리고 부술 만한 완력을 가진 사람이 눈앞에 있다.
이블은 신이 난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욕실이 망가졌다니 어쩔 수 없네. 오늘은 2층 욕탕에서 같이 씻….”
“이사님께서 먼저 씻으세요. 전 그 후에 씻겠습니다.”
“…안 되는데. 여기 따뜻한 물 나오는 시간 정해져 있어.”
그야말로 개소리였다. 알시티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의 자택에 온수 나오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니.
“찬물로 씻을게요.”
“미쳤냐? 감기 걸리려고!”
펄쩍 뛰는 이블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도 진짜 너랑 같이 씻기 싫거든? 물방울이 네 가느다란 목선을 타고 흐르는 걸 볼 생각만 해도 끔찍해! 따뜻한 물 속에 들어갔다 나와서 발그레해진 볼이나 잔뜩 풀린 금색 눈, 길고 촘촘한 속눈썹에 맺힌 물기 따위 보기 싫단 말이야!”
“…….”
“그거 말고도 씨, 발개진 팔꿈치나 복숭아뼈는 또 어떻고? 종아리랑 무릎, 허벅지 그리고… 분명 네 배꼽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보이겠지. 분명 작고 귀엽겠지! 네 가슴은… 한 손에 잡힐 수도 있을 것 같아… 씨발, 진짜 열받네. 얼른 씻으러 가자!”
“…….”
이블이 쿵쾅대며 2층으로 올라갔다. 덩그러니 놓인 체체의 작은 뒷모습을 보며 힙스는 조용히 문을 닫아 줬다.
아무렴 우리 도련님이 원하신다면야….
***
저택의 욕탕은 굉장히 넓었다. 온천수를 끌어다 쓰는 각종 탕과 사방 벽에 장식된 조각품들, 곳곳에 설치된 분수대.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광활했다. 합해서 열두 개나 되는 크고 작은 분수대들은 평소에는 이블이 시끄러워해서 켜지 않지만 오늘은 중앙에 있는 커다란 분수대 하나를 작동했다. 힙스의 정성이었다.
이 욕탕은 씻는 용도라기보다는 온천욕을 하며 휴식하는 용도였는데, 다른 호화로운 저택의 욕탕과 다른 점은 외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바깥 풍경을 보며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과 달리 이 저택의 주인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이어야 여유를 즐길 수 있었으므로.
이블은 일찌감치 욕탕에 가서 기다렸다. 입구에서 바로 보이는 미지근한 탕에 들어가 입구를 정면으로 보며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설마 안 씻을 생각은 아니겠지. 얼른 와라.
이블은 출입문에서 시선을 떼고 이번엔 위를 쳐다봤다.
방 안에서 뭘 하길래 뭉그적거리는지 기척을 느껴 보니, 체체는 느릿느릿하게 갈아입을 옷을 챙기고 있었다. 어쩌면 체체는 잠옷을 입고 내려올지도 모른다. 이블은 체체의 기척으로 행동 하나하나를 읽을 수 있지만 투시 능력은 없었고, 체체는 아침마다 일찍 옷을 갈아입고 내려왔기 때문에 그 모습을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
뭔가 간질간질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이블은 벌떡 일어나 뜨거운 탕으로 옮겼다.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물속이 보이지 않는 열탕이었다.
천천히 와라… 천천히 내려와.
이블의 바람대로 체체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족히 한 시간은 지나도 그대로였는데, 그때도 이블은 열탕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이게 왜 이러지….’
몸이 이상하고 말을 듣지 않았다. 인간 혐오증이 있는 이블은 스물하나가 되도록 연인끼리의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다.
제발, 가라앉아라. 가라앉아라. 염불을 외우기를 한참, 드디어 체체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에스컬레이터도 있고, 엘리베이터도 있는데 굳이 계단을 이용해서… 다행이다.
이블은 급히 열탕을 빠져나와 샤워기가 걸린 벽 쪽으로 향했다. 물을 최대한으로 틀어 놓고 벽과 마주 보고 섰다. 음, 잠깐 고민하던 이블은 잔뜩 젖은 머리칼을 위로 쓸어 올렸다. 잘생긴 이마를 보이고, 한껏 섹시한 표정을 지었지만 지금은 앞을 보일 수 없는 상태라는 걸 뒤늦게 알았다. 이블은 급히 염력을 이용해 하얀 수건을 허리에 감쌌다. 결과적으로 물줄기가 쏟아져 나오는 샤워기 아래에서 하얀 수건을 허리에 감은 채 벽을 짚은 상태가 됐다.
체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블은 출입구 쪽에서는 바로 보이지 않는 곳에 있었다. 사람은 없는데 물소리가 들려오니 이상하게 생각했는지 멈칫했다가 조용히 안쪽으로 걸어왔다.
“…….”
“…….”
이블은 왠지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이사님?”
넓은 욕탕에서 듣는 체체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울리는 것도 그렇고, 뭔가 좀 더 물기에 젖은 것 같기도 하고….
“아직 계셨군요.”
“응.”
“조금 이따 들어오겠습니다.”
“아, 왜. 너, 넓은데. 씨, 씻어, 너도.”
나 왜 더듬지?
아니, 병신도 아니고 왜 말을 더듬어.
이블은 속으로 울부짖었다. 겉으로는 그저 벽을 짚을 때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 멀리 가서 씻을게요.”
“야, 그냥, 가까이서 씻어. 내외하는 것도 아니고 왜 멀리 가.”
“…예,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중앙 저택의 욕탕은 손님을 맞는 곳이 아니라 이블 개인의 욕탕이었으므로 샤워기는 단 두 개뿐이었다. 다른 샤워기는 반대편에 있었고, 이블은 체체가 수도꼭지를 틀고 물줄기를 맞는 소리를 들었다. 어째서인지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잠시 후 수도꼭지를 잠근 체체가 물었다.
“여기 들어가도 되나요?”
체체는 수많은 탕 중에서 입구와 가장 가까운 곳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블은 “어, 그래.” 하고 뒤에도 눈이 달린 것처럼 끄덕였다.
체체는 바로 안에 들어가지 않고 손으로 물을 휘휘 젓기만 했다. 이블은 열심히 자기주장 중인 그곳이 가려지도록 교묘하게 서서 그 모습을 봤다.
“왜 안 들어가. 아, 이런 욕탕 같은 거 처음이야?”
“…타르에도 공중목욕탕은 있습니다. 욕조가 있는 가정집도 있고요.”
“호화로운 전쟁터였네.”
“목욕탕과 욕조가 있는 게 호화로운 겁니까?”
“거기 물이 부족한 국가잖아. 다들 꼬질꼬질해서 잘 씻지도 못하고 사는 줄 알았지.”
“맞아요. 민간인들은 거의 이용하지 못했습니다.”
“됐어. 타르 얘기는 그만하고 얼른 들어가. 뜨끈뜨끈해.”
“이사님도 들어오세요.”
“뭐, 뭐라고?”
이블은 놀라서 앞을 가리는 것도 잊고 상체를 틀었다. 체체는 무심히 올려다보며 덧붙였다.
“다 씻으신 게 아니라면요. …원래… 그렇게 씻으세요?”
“…….”
이블은 득음하려는 사람처럼 샤워기를 최대한으로 틀고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물을 맞는 상태였다. 사방에 물안개가 피어나고 쏴아아, 커다란 물소리에 목소리도 거의 가려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두피가 따가워서라도 바로 줄였을 것이다.
이블은 헛기침하면서 수도꼭지를 돌렸다.
“나 정도 되면 보통 강도로는 씻은 느낌도 안 나. 그러는 너는….”
“…….”
“너는….”
이블은 처음으로 체체의 벗은 모습을 봤다. 체체는 탕 밖에서 반쯤 몸을 비틀어 이쪽을 보고 있었으며, 완전한 나신이었다. 물기에 젖어서 빛이 나는 다갈색의 피부, 고운 목선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 물에 젖으니 진한 은색처럼 보이는 머리칼과 물기를 머금어 더욱 농염해진 황금색 눈동자까지. 상상 그대로였으나 아닌 것도 있었다.
종아리와 허벅지, 팔뚝, 가슴과 그 아래 납작한 배까지 크고 작은 흉터가 작은 몸을 뒤덮고 있었다.
허벅지 안쪽의 것은 최소 길이 20cm 이상의 칼날에 베인 자상이었다. 복부와 명치에 자리한 화상은 3도 화상 흔적이었고, 아랫배에도 2도 화상의 흉터가 있었다. 등은 더 심각했다. 화상과 자상이 그 작은 등에 빼곡했다. 피부가 찢어졌다가 다시 붙은 흔적들, 누군가 의도적으로 가했을 화상 자국들.
열심히 살아남은 흔적들을 보며 이블은 더 이상 야하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것들뿐이었다면 그저 안타깝게 여기고 말았을 텐데. 이블의 지나치게 좋은 시력은 정말 작은 상처까지 발견해 내고 말았다. 체체가 타르를 빠져나온 지 일 년이 넘었는데, 마치 어제 생긴 것 같은 찰과상과 타박상들이 가슴 중앙에 모여 있었다.
이블은 알고 있었다. 체체가 종종 가슴을 때린다는 것을. 그리고 가끔씩 피 냄새가 난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저렇게까지 난도질당한 것처럼 엉망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블 자신은 자해를 한다고 해도 저렇게까지 엉망이 되지 않을 테니까. 처음부터 SSS 모션 오러를 타고났던 이블은 차마 보통 사람의 몸이 어떤 상태일지까지는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안 체체가 탕 안으로 들어갔다. 너덜너덜한 몸을 가리려는 행동이라기엔 이미 이블이 다 봐 버린 후였다.
“화상… 그거 관리는 하고 있는 거야?”
이블의 목소리는 그사이 잔뜩 가라앉았다.
“예.”
거짓말이다. 이블이 체체의 단칸방에 갔을 때 화상 연고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존나 보기 흉하고 징그러워.”
“죄송합니다.”
사실 다른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벌주면 죄책감이 조금이라도 사라지냐고.
어차피 넌 살아남았고 죽은 사람은 되돌아오지 않는데.
너 때문에 죽은 것도 아니지 않느냐고.
그러나 입 밖으로 내뱉어지는 말은 영 다른 말이었다.
“꿰맨 것도 얼기설기하네. 어떤 멍청이가 꿰맸어?”
“제가 했습니다.”
“…진짜 거지 같네.”
이블은 살면서 좋은 말이란 걸 해 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의 아픔을 위로해 본 적도 없었고, 위로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었다. 위로를 어떻게 하는지, 위로하는 단어가 무엇인지도 떠오르지 않았으므로 그저 머저리 같다고 욕설을 내뱉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징그러워서 안 들어오시는 건가요?”
“…들어갈 거야.”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이블이 성큼성큼 걸었다.
“…….”
아니, 성큼성큼 걷지 못하고 집게발이 잘린 꽃게처럼 엉거주춤 옆으로 걸었다.
왜! 어째서! 이건 가라앉질 않는 거야!
머리는 숙연해졌는데, 분위기 파악 못 하는 신체를 탓하며 이블도 엉거주춤 탕에 들어갔다.
이블은 당당하게 체체의 정면에 앉지 못하고 구석에 비스듬히 앉았다. 체체와는 대각선으로 정반대 쪽이었다.
“왜 수건을 두르고 탕에 들어오세요?”
“닥쳐. 난 원래 이렇게 씻어.”
“…….”
이블은 비스듬히 앉는 걸로 모자라 상체를 숙여 허벅지에 팔꿈치를 기대고 두 주먹으로는 이마를 짚었다. 폭포수 같은 물줄기를 오랫동안 맞았던 금색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모래로 범벅된 미역 같아 보이겠지만 대상이 이블 엔덤이라서 마치 전설에서 튀어나온 유혹의 남신 같았다. 현재 그 남신의 머릿속은 아주 복잡했다.
아팠을까. 아프지 않았을 리가 없지.
저런 몸에 반응하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 난 이상한 건가. 아니, 저런 몸이 뭐가 어때서? ‘저런 몸’이 어떤 몸인데?
씨발, 다 죽일 거야. 저 작은 뱁새 괴롭힌 새끼들 다 찾아내서 죽여 버릴 거야.
때릴 곳도 없는 작은 놈인데.
저 작은 몸에 흉터를 가득 만들어 놨어.
…많이 아팠겠지.
저 작은 몸에 흉터를 만든 쓰레기들 중에는 자신도 있다. 그리고 체체도 마찬가지다.
‘후우….’
이블이 뜨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분노를 가라앉혀야 했다. 체체에게 화풀이를 하려고 이 상황을 만든 것이 아니다. 속이 바윗덩이를 올려 둔 것처럼 답답했다.
차라리 냉탕이라면 좋았을 걸. 머릿속이 차게 식기는커녕 열을 올려 그런지 심장이 조용해질 생각을 안 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오랫동안 흥분하지는 못했겠지만, 이블은 보통 사람이 아니기에 가능했다. 차라리 불가능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이블은 힐끔 고개만 들어 체체가 뭐 하는지를 살폈다.
체체는 다른 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분수대였다. 이 넓은 욕탕에는 여러 개의 분수대가 있고, 현재는 중앙의 가장 큰 분수대만 작동했다. 날개 달린 어린 천사 여럿이 손을 잡고 빙그르르 원을 그리며 도는 모습이 새겨진 분수대였다.
활짝 웃는 어린 천사들을 바라보는 체체는 감흥 있는 눈빛도 아니었고, 감정 섞인 표정도 아니었다. 평소의 무심함과 같았는데, 이블은 그 무심한 얼굴에서 무언가를 읽었다.
물방울이 튀는 분수대를 구경하던 것부터 욕탕에 들어가기 전 손을 넣어 물을 천천히 휘젓던 것까지.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체체와 처음 만난 날이었다. 신기하다는 듯이 분수대 속에 손을 집어넣었던 녀석을 보고 시골 촌놈이라고 생각했었다.
이제 생각해 보면 정말 촌놈은 맞았다. 다만 너무, 지나치게 촌놈이라서 어쩌면… 어쩌면.
“왜, 물이 아깝냐?”
“…….”
그제야 체체가 이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뇨, 처음엔 아깝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분수의 원리를 압니다.”
“이건 그런 방식이 아닐걸. 센터 앞에 있는 거랑은 달라. 지금도 존나 아까운 물이 낭비되는 거야.”
“끄면 안 되나요?”
“여긴 타르가 아니라 물 아낄 필요 없어.”
이블이 비웃으며 대답하자 체체의 물기 젖은 입술이 조용히 다물어졌다.
체체는 다시 분수의 낭비되는 물줄기를 봤다. 이블은 소울 오러 유저였고, 체체의 감정을 느꼈다. 희미하게 스며드는 감정은 또다시 죄책감, 지긋지긋한 죄책감이었다.
이블이 소울러가 아니라 감정과 마음을 읽지 못하는 보통 사람이었다면 체체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라고 재촉하거나 면박을 줬을 테지만, 이블은 참고 기다렸다. 지금 체체는 하고 싶은 말이 턱 끝까지 쌓였음을 느꼈으니까. 언제나 억눌러 참아 왔던 하고 싶은 말.
그동안은 체체에 대해 알지 못했기 때문에 수많은 말을 들을 기회 없이 지나쳤다. 그러나 이제 이블은 체체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기만 하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말을 계속해서 참는 거라는 사실을. 이 순간 필요한 건 재촉이 아니라 기다림이었다.
“이사님은….”
그 추리를 증명하듯이 체체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생긴 물건을 아세요?”
체체는 손가락으로 허공에 무언가를 그렸다. 아무리 이블이라도 그런 건 알아볼 수 없었다.
“환상술을 써. 배웠잖아.”
“…….”
체체가 다시 허공에 손을 들었다. 체체의 손끝에서 무형의 오러가 흘러나오고 형태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색감은 칙칙했고 형체는 노이즈가 낀 듯 흔들렸다. 반투명한 검은색에 원통처럼 생긴 물체였다. 이블로서는 여전히 정체를 알아볼 수 없었는데, 그건 체체의 환상술이 미숙해서가 아니라 이블이 이름을 알지 못하는 물건이라서였다.
“타르는… 물이 부족한 곳이 맞습니다. 욕조도 목욕탕도 사치이고요. 우물도 자주 메말라서 평화의 분들이 가끔 가지고 오시는 정화 장치에 의지하고는 했습니다.”
“그게 그 정화장치야?”
“예.”
“…….”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블은 또다시 말을 참고 기다렸다. 잠시 후 체체는 담담하게 덧붙였다.
“이 장치는 물속의 더러운 침전물을 정화해 깨끗한 물을 만들어 냅니다. 크기가 작아서 아주 소량의 물만 나오기 때문에 식수용으로 사용해요.”
“큰 걸 만들면 되잖아.”
“돈이 많이 들어서요. 지금 만들고 있긴 하지만 만들더라도 턱없이 부족한 양입니다. 영원히 사용 가능한 것도 아니거든요.”
“돈 들여서 많이 만들면 되지. 너….”
네가 타르에서 난민 빼 오는 돈으로 공장을 하나 세울 수도 있겠다고, 이블은 그 말을 하려다 말았다. 체체는 이미 모든 돈을 타르를 위해서 쓰고 있었다. 어차피 지금 저 정화 장치를 만든다는 비용도 체체에게서 나오는 돈일 것이다.
“아무튼, 확실히 거기서는 씻는 건 사치였겠네. 꼬질꼬질하게 다녔겠어.”
“아뇨.”
드물게 단호한 어조였다.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 속눈썹 아래에서 상처로 빛나는 금색 눈동자가 이블을 직시했다.
“저는 매일 씻을 수 있었습니다. 욕조가 있는 가정집에서, 아직 다 허물어지지 않은 목욕탕에서, 씻을 만한 물이 있으면 저는 반드시 씻을 수 있었어요.”
“어떻게 너 같이 작은 게? 사람들이랑 물 두고 막 싸워서 이겼어?”
“동료들이 양보해 줬어요.”
“…….”
“저만은 항상 깨끗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도록. 그래서 몇 없는 종군 기자들이 찍을 몇 없는 사진에 깨끗하고 깔끔한 타르의 어린 영웅이 나올 수 있도록, 저는 항상 씻었습니다.”
“…….”
사람들은 이블에게 사이코패스라고 말한다. 공감 능력이 결여된 잔인한 악마라고. 그러나 그 사람들도 이블이 사이코패스라는 게 말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소울 유저… 감수성과 공감 능력이 굉장히 뛰어난 사람. 심지어 이블의 등급은 SSS였다.
이블은 아주 또렷하고 선명하게 알았다.
‘너는 깨끗이 씻어야 해.’
‘너는 희망이니까.’
‘우리의 어린 영웅이니까.’
‘결코 더럽지 않은 모습으로 그들과 맞서야 해.’
체체가 흉터 가득한 작은 등에 짊어진 목소리들이 마치 지금 귓가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선명했다.
“…그래, 고마웠겠네.”
“네, 항상.”
갈라져서 나온 목소리에 체체는 희미하게 답했다.
이블은 또 한 가지의 진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보물같이 소중한 정화수를 양보해서 뽀독뽀독 씻겨 놔도, 알시티의 부유한 시민들이 안락한 침대 위에서 손가락으로 핸드폰 화면을 스크롤하며 보게 되는 타르의 어린 영웅은 전쟁터 한가운데서 잿더미를 둘러쓴 채 까지고 다친 얼굴이라는 걸.
타르를 벗어나 알시티에 와서도 지저분한 소년병 역할을 맡고, 엔덤 가문에서 얼마나 좋은 옷을 입히더라도 여전히 전쟁터에서의 그 사진이 기사의 메인으로 쓰이며… 깔끔한 옷을 입고 직장에 가더라도 상사에게서 더러운 난민이라는 욕설만 들으리라는 것을.
작은 단칸방에 있던 갖가지 종류의 목욕 제품들이 떠올랐다. 이블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가슴이 답답해졌다….
“야… 난민.”
“예.”
체체는 방금 전의 참혹한 대화는 다 잊은 듯이 얌전하게 대답했다. 이블은 지금까지 당연하게 체체를 ‘난민’이라고 불렀고, 체체는 그에 불만을 표현하지 않았다. 이블은 자기가 불러 놓고 새삼스럽게 호칭에 대한 고민에 잠겼다.
“이사님.”
그때 체체가 이블의 상념을 깨뜨렸다.
“그런데 이사님은 왜 그렇게 허리를 숙이고 계세요?”
“…어?”
“안 불편하세요?”
분위기 파악 좀 해라. 난민 새끼야!
체체의 질문은 절대로 이 분위기에서는 해서는 안 되는 지적이었다.
이블은 어느새 방만해진 자세를 얼른 바로 했다. 그러니까 비스듬하게 허리를 틀고 상체를 숙였다.
“이, 이 포즈가 편해.”
“이사님.”
“왜, 왜!”
“혹시 그걸 가리기 위해 자꾸 불편한 자세를 취하시는 건가요?”
“뭐….”
이블의 말문이 막혔다. 살면서 처음으로 진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아니, 처음이 아닌가. 최근에 한 번 너무 당황스러워 진땀이 났던 것 같다. 그것도 이 까만 뱁새 때문이었던 것 같고.
“그런 거라면 불편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계속 잘 보이니까요.”
“보, 보지 마. 보이면 보인다고 알려 줬어야지!”
“일부러 드러내신 줄 알았어요.”
“야, 눈 돌려! 아씨….”
“…….”
체체는 이블의 말을 잘 들었다. 얌전히 고개를 돌린 체체에게 이블이 버럭 소리 질렀다.
“언제부터 봤어!”
“아까부터 보였습니다.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요.”
“아, 씨… 어땠어!”
“정말 대단하세요. 사실 처음엔 잘못 본 줄 알았습니다. 이렇게 대단한 건 처음 봤어요.”
이블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그리고.”
“굉장히 잘생기셨고요. 강해 보여요.”
“그리고.”
“힘드실 것 같습니다. 괜찮으세요? 처음부터 그랬는데.”
“나, 나 정도 되면 이쯤이야 아무것도 아니거든. 애초에 힘들다는 게 뭐야? 난 도대체 힘들다는 게 무슨 뜻인지, 어떤 감정인지 전혀 모르겠어.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으니까. 대체 어떻게 하면 힘들어질 건지 누가 좀 알려 줬으면 좋겠다.”
이블은 본인이 무슨 말을 해 대는지도 모르면서 주절거렸다. 가만히 듣던 체체가 다시 이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블은 자신감 있게 주절거리던 것과 반대로 중심을 두 손으로 가렸다. 가려지지도 않아서 더 보기 민망했다.
“다, 다른 데 보랬지!”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벌써? 안 씻었잖아.”
신체 어딘가를 자랑하는 사람이랑 같은 탕에 들어가기 싫은 건 너무나도 당연했지만 이블은 뻔뻔하게 대응했다.
“저쪽에서 씻고 나갈게요.”
“더 있으라니까.”
이블은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더 있으라고 종용하는 이블을 보며 체체는 담담히 물었다.
“혹시 제게 따로 바라는 게 있으신가요?”
“뭐?”
“…….”
“…….”
이블과 체체의 눈이 마주쳤다. 체체는 눈을 내리깔았다. 정확히는 이블의 그것으로 시선을 향했다.
“혹시 제가… 를 원하시는 거라면….”
체체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체체와는 다른 의미로, 이블 또한 입을 열지 못했다. 누군가 뇌를 종에 담아 거세게 때린 것처럼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명이 들리는 착각까지 일었다.
“그런… 그런 거 아니야.”
이번에야말로 진짜 식은땀이 날 정도로 놀란 이블이 목소리까지 떨면서 부정해 왔다. SSS급의 소울 오러 유저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체체에게 크게 실수했음을 알았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내내 체체의 마음에 상처를 줄 만한 폭언을 쏟아 냈지만, 이번에는 체체뿐 아니라 이블 자신까지 깊게 찌르는 실수였다.
“진짜 아니야. 오해하지 마.”
“…….”
다급한 해명에도 체체는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이블은 본능적으로 소울 오러를 일으켜서 체체의 감정을 전달받으려 했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상처받았는지, 혹은 원망하고 있는지. 그런 것조차 알 수 없었다. 이블은 벌떡 일어났다.
수면 밖으로 상체만 드러나 더 작아 보이는 체체의 앞에서 흉흉할 정도로 당당하게 다리를 벌리고 선 이블이 대뜸 소리쳤다.
“너 똑똑히 들어.”
“…….”
“너는 내 취향도 아니고, 넌 어차피 날 감당하지도 못해, 젠장. 그리고 난 인간 혐오증 있어서 사람이랑 몸 닿는 것도 싫어하거든. 생각만 해도 기분 더러우니까 다시는 그딴 소리 하지 마!”
이블은 잔뜩 화가 난 듯이 버럭 소리 지르고는 탕을 빠져나갔다. 쿵, 쿵, 쿵. 발걸음 소리가 무척 컸고, 목은 물론 단단한 등 근육까지 시뻘겠다.
“…….”
체체는 자기도 모르게 긴장한 몸에서 힘을 빼며 머리를 욕탕 벽에 기댔다.
‘아무나랑 몸 닿는 것도 싫어한다기에는 문란한 파티를 일삼았다고 들었는데.’
엔덤 가문에서 체체를 데려온 건 당시 이블이 사람의 자살을 방관해 놓고 문란한 파티를 벌여 평판이 극도로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체체도 그 사실을 알았다.
이블이 답지 않게 당황하며 내뱉은 말은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인간 혐오증은 사실이므로 체체는 안심했다.
안심하기로 했다.
이블이 원한다면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그런 것을 시킬 생각은 없는 것 같다.
체체는 이블이 자신에게 몹시 후하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다. 소울 오러 유저로 각성한 후부터 이블에게서 숨겨지지 않은 감정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고, 이블이 그답지 않은 행동을 보일 때마다 제임스나 힙스가 깜짝깜짝 놀랐기 때문에 모를 수가 없었다. 괜히 이블을 자극하면서 몇 가지 실험도 해 봤는데, 이블은 누구나 다 알 만큼 노골적으로 자신에게 후했다.
호기심으로 비롯된 가벼운 호감인데… 그 감정에 포함된 성적인 성질을 이블이 스스로 억누른다는 점이 놀라웠다.
사람이 너무 놀라고 믿기 힘든 사실을 마주하면 몹시 얼떨떨해져 현실 인식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사실 체체는 계속 놀란 상태였다. 타르에서도, 알시티로 도망쳐 왔을 때도, 이블의 비서가 되고 오러 측정까지 받은 지금도.
체체는 오래전부터…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인생의 모든 것이 아득히 먼 꿈속 일처럼 느껴졌다. 살면서 겪는 모든 일이. 이를테면 밤에 잠을 자다가 갑작스러운 폭격에 깨는 것, 벌레가 기어다니는 쌀을 씻어 밥을 짓는 것, 아주 사소하게는… 누군가 제게 와서 말을 걸고 그 말에 대답하는 것까지.
모든 일이 매우 멀게 느껴지기만 했다. 심지어 죽음이 가까이 왔을 때에도 단 한 번도 주마등을 보지 못할 만큼 몽롱하게 살아왔다.
그런 와중에도 이블의 행동만은 현실처럼 와닿았다. 이블 엔덤은 모든 게 꿈속 같은 세상에 혼자 현실에서 섞여 들어온 사람 같았다. 그러나….
‘사람은 달라지지 않아.’
체체는 욕탕의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사람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블 또한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본성을 억누르고 참는다 해도 결국엔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겠지.
체체는 사람을 믿지 않았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겪어 온 일들이 그렇게 만들었다. 변화하는 것들이 없는 세계는 꿈이나 다름없다. 체체의 세계는 몽롱하고 아득한 비현실 속에 있었다. 만약 이블이 정말로 달라진다면 체체의 세계 또한 완전히 달라지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런 가능성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
체체는 이블이 그렇게 나가 버려서 다음 날 자신을 대할 때 부끄러워할 줄 알았다. 그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니까(제임스를 비롯한 이블을 아는 이들이 들었다면 이블이란 이름의 다른 사람을 말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나면 어디를 세우고 돌아다닌 걸 부끄러워할 거라고. 그러나 체체의 예상은 전혀 들어맞지 않았다.
우선 아침 식사 풍경부터 지금까지와 달랐다. 체체는 늘 그렇듯 계란 프라이 한 개와 손바닥의 절반만 한 토스트로 식사를 끝냈는데, 이블은 계란 세 개와 토스트 다섯 장, 샐러드 두 접시밖에 비우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뚱한 얼굴로 체체의 앞에 샐러드 접시를 밀어 준 것은 무척 놀라웠다.
식사를 책임지는 메인 조리사와 보조 조리사들이 당장 목매달고 자살하려는 걸 말리고 돌아온 힙스가 체체에게 조용히 물었다.
물론 모든 소리를 듣는 분에게 들키지 않게 종이에 펜으로 적어서.
도련님께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