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같은 주말이 지나고 어김없이 지옥 같은 월요일이 찾아왔다. 제임스는 출근길에 상사에게 메시지 하나를 받았다. 이블은 주로 전화 통화를 이용하기 때문에 그에게서 메시지가 왔을 때 제임스는 아직도 꿈인 줄 알았다. 다행히 스스로 뺨을 내리치기 전 현실임을 자각하고 메시지를 봤는데, 메시지에는 「감기약 사 와」 라고 적혀 있었다. 그래서 제임스는 꿈이라고 확신하고 뺨을 내리치고야 말았다.
제임스는 한겨울에 벗고 다녀도 감기 따위 걸리지 않을 사람이 감기약을 사 오라고 한 이유에 대해 묻지 않았고, 이블도 이유를 알려 주지 않았다. 제임스가 퉁퉁 부은 얼굴로 온갖 감기약을 종류별로 산 후 조금 늦게, 아홉 시쯤 이블의 집무실로 출근했을 때 이블은 잔뜩 인상을 찌푸린 무서운 얼굴로 벽을 향해 앉아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이사님….”
이블은 제임스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제임스는 얼른 감기약을 건네고는 오늘따라 다사다난한 자기 뺨을 꼬집어 봤다. 꿈은 아니었다. 이 어린 악마가 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정시 출근을 했다.
“뭐야. 뭐가 이렇게 많아?”
“혹시 몰라서 종류별로 사 왔습니다. 열이 심한지, 기침을 하는지, 인후통이 있는지 증상에 따라 복용하는 약이 다릅니다.”
“감기 주제에 겁나 복잡하네. 약은 물이랑 같이 먹는 거 맞지?”
“예, 식후에. 누가 먹을 겁니까?”
“난민이.”
“그렇군요. 체체 씨가 먹는군요….”
체체가 감기에 걸렸는지도 몰랐고, 감기라 하더라도 왜 이블이 약을 챙기는지 알 수 없었다. 체체가 감기약 알레르기가 있어서 괴롭히기 위해 먹이려는 거라면 이해할 수 있겠지만.
“꼭 식후에 먹어야 돼?”
“이왕이면요. 아침 식사를 했을 테니 지금 먹으면 될 겁니다.”
“아니, 안 했어. 그 새끼 아침 굶었어.”
말투가 묘하게 단호했다. 이블은 약 봉투를 손에 쥔 채 벽을 노려봤다.
“젠장, 또 기침했어. 출근하고 세 번째 기침이야.”
체체가 기침을 또 하든 말든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아직도 정문 앞에는 항의하는 시민 단체가 있었고, 센터는 얼른 처리해 달라고 난리였다. 엔덤 가문에서는 시민 단체를 고소하겠다는 움직임이 있었다. 어떻게 모욕당한 유가족을 상대로 고소할 생각을 하는지 제임스로서는 이해가 불가능했다.
엔덤 가문은 무척 고상하고 도덕적인 그룹이며 이블에 비해서는 상식적이지만, 어디까지나 ‘이블에 비해서는’이었다. 사람들은 어떻게 엔덤 가문에서 이블 같은 악마가 태어났냐고 한탄하지만 제임스는 엔덤 가문이라서 이블이 태어난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랬다. 제임스는 시민 단체에 어떻게 대응할지 고민하느라 골치가 아팠는데, 정작 이블은 난민 출신 비서의 기침 횟수에 집착했다.
하지만… 이편이 나은 건지도 모른다. 시위에 대해선 까맣게 잊고 있는 게 더 나을지도.
“기침 소리가 저번 주랑 다른데. 주말 지나고 더 심해진 것 같아.”
“그렇습니까….”
“독감인 게 분명해. 저러다 몸살이란 것도 걸리겠어.”
“그럼 일단 약을 먹일까요? 공복에 먹어도 큰 상관은 없습니다.”
“두 시간만 있으면 점심이니까 됐어. 이따 난민도 데려가.”
오늘은 소앤소와의 오찬이 예정되었는데, 본래 체체가 동행하는 일정이 아니었으나 비서 명목으로 얼마든지 데려갈 수 있었다. 제임스가 식당에 한 명분의 식사를 더 준비하라고 전화하는 동안 이블은 약 봉투를 꾸깃 접으며 벽을 노려봤다.
그 후로 두 시간이 지나도록 이블의 집중력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좀처럼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고 시계만 보다가 출발할 시간이 다가오자 제임스에게 난민을 부르라 했다.
전화 받는 업무도 없어지고, 타자 연습만 열심히 하던 체체가 제임스의 부름을 받고 일어났다. 이블은 어제처럼 제임스에게는 체체를 두고 나가라고 눈짓했다.
집무실 문이 닫히고 그 자리에 덩그러니 선 체체를 보며 이블은 눈을 찌푸렸다.
“서 있지 말고 처앉아.”
“예.”
체체는 이블이 가리킨 소파에 앉았다. 이블은 꼿꼿이 허리를 세운 자세가 무척 불편해 보여서 등을 기대라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체체는 셔츠에 니트를 레이어드한 차림새였다. 둘 다 행어에서 본 옷이었다. 이블은 심통이 가득한 얼굴로 가까이 다가갔다. 체체의 앞에서 상체를 숙이고 셔츠의 목깃을 손가락으로 들추었다. 목을 졸랐던 상처는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
바로 눈앞에 체체의 얼굴이 있었다. 잿빛의 머리칼은 생각보다 결이 좋았고, 다갈색 피부에서는 좋은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금색 눈동자에 자신의 얼굴이 담긴 순간, 이블은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황급히 물러나다가 테이블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모셔너다운 순발력으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
이블은 홱 체체를 노려봤다. 방금의 쪽팔릴 뻔한 모습을 보고 비웃는 건 아닌지.
비웃으면 죽인다는 생각으로 험악하게 노려봤지만 체체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밥 먹으러 가자.”
“예.”
체체는 아무런 의문도 없었다. 왜 불렀는지도, 왜 갑자기 예정에 없던 식사를 함께하는지도 묻지 않았다.
건조한 사막처럼.
고요한 심장 박동에 이블은 어째서인지 조금 허탈해졌다.
***
오찬 인원은 총 열둘이었다. 소앤소 쪽에서는 전무와 상무, 그 외 임원진 다섯 명이 동행했고, 유저 센터에서는 이블과 비서 두 명, 실무를 맡을 오러 유저 두 명이 나왔다.
‘소앤소’는 알시티 공화국 정부 직속의 루젬 세공 기업으로, 사업 규모로만 따지면 하나의 국가나 다름없는 대기업이었다. 그 소앤소와의 오찬이니만큼 유저 센터에서는 유일무이한 SSS 멀티 유저 이블 엔덤을 내보냈다.
실무진은 따로 있고, 이블은 이 자리의 등급을 올리기 위한 끼워 맞추기였기나 마찬가지였다.
메인 디시로 나온 오일을 바른 문어 구이와 금가루를 얹은 생선 살은 제법 먹음직스러웠다. 이블은 포크질 한 번으로 문어 다리 하나를 통째로 찍어 올려 우물우물 씹으며 체체를 살폈다. 체체는 문어 다리 하나도 다 먹지 않았고, 곁다리로 나온 샐러드만 깨작거렸다.
“존나 못 먹네. 맛없냐?”
“굉장히 맛있습니다.”
“그럼 왜 안 먹어.”
“포장해 가려고요.”
예전에도 들었던 말이었다. 그때도 체체는 음식을 남기고 포장해 갔다. 하지만 이블로서는 코웃음만 나왔다. 전자레인지나 냉장고도 없고, 냄비나 그릇도 없는 좁은 방에서 대체 어떻게 보관을 하고 꺼내 먹겠다는 건지. 난민 시설에 들러서 한 입씩 나눠 주기라도 하나.
“하나 더 싸 줄 테니까 그냥 지금 다 처먹어. 깨작거리는 거 보기 싫으니까.”
“배가 불러서 지금은 다 못 먹습니다.”
“뭘 먹었다고 배가 불러?”
이블이 눈살을 찡그렸다. 같은 테이블에 앉았지만 소외된 소앤소의 임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체체가 먹은 것은 애피타이저로 나온 사과 수프와 토마토가지볶음, 그리고 문어 다리 구이 한 개의 삼분의 이 조각뿐이었다.
“체체 씨가 소식을 하나 봅니다….”
“그래도 더 드셔 보시죠. 아직 남은 요리도 많은데….”
임원들이 각자 호인처럼 웃으며 덧붙였지만 그 말은 허공으로 흩어졌다.
“너 사실은 맛없는데 거짓말하는 거지?”
“아니요, 배부릅니다.”
“개소리하지 마. 그딴 걸로 배부른 사람이 어디 있어? 어린애도 그것보단 더 먹겠다.”
“정말 사람을 못 믿으시네요. 고작 배부르다는 말조차 믿지 않으시니 세상 살기 참 어려우시겠어요.”
체체는 무미건조한 어조로 이블의 불신을 비난했다. 소앤소 임원들은 물론 동석한 오러 유저들까지 기함을 하며 각자 들고 있던 포크나 나이프를 떨어뜨렸다.
“난민 새끼 좋은 거 먹으라고 기껏 데리고 와 주니까….”
다들 자리를 피하려고 엉덩이를 들썩였으나, 이블은 테이블을 뒤집어엎거나 불 지르지도 않았다. 그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참으며 목소리를 깔았다.
“너 지금 배고픈 거 다 알아. 나 정도 되면 포만감이라는 감정이 느껴지는데 넌 안 느껴진다고. 거짓말하는 거잖아.”
“포만감이 뭔가요?”
“이런 무식한….”
이블은 윽박지르려다가 아차 싶어서 입을 다물었다. 전 세계에서 공용어 수준으로 사용하는 알시티어를 모른다는 건 무식이 맞으므로, 왜 자신이 ‘무식한 놈’이라는 표현을 끝까지 발음하지 않고 다물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골방 구석의 알시티어 사전이 떠올라서 그 생각을 하느라 말을 끝맺지 못한 건 분명했다. 모서리가 접힌 두꺼운 책, 접힌 페이지에는 ‘부동산’, ‘임대차’, ‘등기부 등본’ 등의 단어가 있었다. 포만감이라는 단어는 모르면서.
“…배부른 느낌 말이야. 더 먹고 싶지 않을 만큼 배가 부른 거.”
“포만감이 배부르다는 뜻인가요?”
아니, 씨발. 뭐 하러 두 번 묻지? 지도 잘만 알아들었으면서 왜 수고스럽게 두 번 말하게 하는 거지?
이블은 인내심을 끌어모아 화를 억눌렀다.
“그래, 그 뜻이야.”
“전 더 먹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왜냐고. 너도 맛있게 먹었잖아.”
“예, 맛있어서요.”
“…….”
“…….”
“…….”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대답이었지만 기다려도 부연 설명은 없었다. 이블의 짧은 인내심이 폭발했다.
“야, 저 자식 포장해 주지 마! 앞으로 어디에서 뭘 먹든 간에 절대로 포장하지 마. 알았어? 난민 주제에 건방지게 굴어!”
“예… 이사님.”
불똥이 튈까 봐 조용히 있던 제임스는 이번에도 거역하고 싶지만 거역하기 힘든 명을 받고 말았다. 그는 원망스럽게 체체를 바라봤지만, 체체는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인 듯 무표정할 뿐이었다.
체체는 이블을 두 번 말하게 하고, 포만감이라는 단어의 뜻을 설명하게 했다. 이블은 씩씩 화를 내면서도 체체를 쫓아내 버리지 않았다. 모두가 티 내지 않고 속으로 이 상황에 경악했는데, 정작 체체 본인만 방금 자신이 특별 대우를 받았다는 걸 몰랐다.
특별 대우를 받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체체뿐만은 아니었다. 방금 자신의 행동을 자각하지 못한 게 분명한 이블이 약 봉투를 꺼내 들었다.
“…이딴 게 뭐라고 내가….”
이블은 입을 삐죽 내밀고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약 봉투를 테이블 위로 던졌다. 체체가 정확히 제 앞에 떨어진 약을 전혀 집을 생각을 하지 않자 이블은 창가를 바라보며 뚱하니 말했다.
“처먹어. 감기 옮겨서 민폐 끼치지 말고.”
“저요?”
“그래, 여기 너 말고 감기 걸린 사람이 어딨냐. 왜 자꾸 다 들었으면서 묻는 거야. 이해력 딸려? 밥을 안 먹으니까 점점 무식해지지.”
체체는 천천히 약 봉투를 집어 들었다. 기침, 재채기부터 오한, 몸살까지 온갖 증상의 약이 들어 있었다. 체체는 가만히 봉투를 내려다봤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뭐가! 뭐가 왜 또 뭐! 왜 감기약도 먹기 싫냐? 포장해가게?”
“감기 걸려서… 죄송합니다. 폐 끼쳐서요.”
“아, 젠장!”
죄송하다는 말을 기대한 게 아니었던 이블은 길길이 날뛰었다. 벌떡 일어나 그 위압감 자아내는 커다란 덩치로 조그만 체체를 내려다봤다. 저러다 폭력 사태가 벌어질까 모두 불안해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이블은 조용히 다시 앉아야만 했다. 고작 감기약인데, 체체에게는 감기약으로 보이지 않은 것 같았다. 늘 보아 온 무심한 눈이 아니었고, 깊은 감정이 일렁이고 있었다. 이블이 알 정도의 농도 짙은 감정… 후회, 회한과 슬픔, 아득한 괴로움, 바닥이 보이지 않는 고독함.
‘뭐야. 누가 감기약 잘못 먹고 죽기라도 했나.’
속으로 중얼거리던 이블은 어쩌면 체체의 주위에는 정말로 감기약을 먹지 못해 죽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SSS 소울 오러 유저인 이블은 지금까지 사람들의 감정을 무수히 느껴 왔다. 할 수만 있다면 뇌를 짓이겨서라도 그만 읽고 싶다고 바랐다. 그러나 지금은 이 능력에 감사했고, 도리어 부족함을 느꼈다.
저 조그만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었다. 좀 더 정확하게…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숨겨 버리고 마는 무심한 낯의 안쪽으로는 어떤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
오찬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업무 얘기에 들어갔다. 임원진은 가지고 온 케이스에서 보석을 꺼내 테이블에 진열했다. 각각 붉은빛, 금빛, 푸른빛 세 가지였고 모두 동그란 형태였다. 크기는 다양해서 붉은빛이 성인 얼굴 정도로 가장 크고, 금빛은 어린아이 얼굴만 했으며, 푸른빛은 성인 주먹만 했다.
‘루젬’은 내부에 오러 유저의 환상을 담을 수 있는 보석으로, 소앤소는 오러 유저 센터의 저명한 유저들이 세공한 ‘홀리아젬’을 갖고 싶어 했다. 정부와 유저 센터가 이미 협약을 맺어 어느 유저들이 환상술을 세공할지는 결정이 났으나 아직 어느 원석에 세공할지는 결정되지 않은 상태라서 오늘 조율하러 온 것이다.
유저 센터의 실무진과 소앤소의 임원들이 회의하는 동안 체체는 가만히 앉아 테이블 위의 보석 케이스를 바라봤다. 케이스 안에는 임원진이 꺼내지 않은 보석도 많았다. 주먹만 한 크기의 반짝반짝 아름다운 보석들이었다.
체체에게 지극히 관심을 기울이던 이블이 그 시선을 눈치챘다.
“뭐냐. 루젬 처음 보냐?”
“예, 처음 봅니다.”
환상술을 보존하는 보석은 드물고 매우 값비싸다. 원석 자체도 귀중하고, 루젬은 더더욱 귀중하고, 홀리아젬은 그야말로 보물이었다. 내전 국가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값비싼 보석인 것이다.
“이걸 루젬이라고 부르나요?”
엄밀히 말하면 이것들은 원석 상태로, 아직 루젬은 아니었다. 이 보석은 가공 단계에 따라 세 가지로 명칭이 나뉜다. 아무런 가공도 하지 않은 ‘원석’, 환상술을 보존할 수 있도록 가공한 ‘루젬’, 환상술을 세공한 ‘홀리아젬’.
하지만 대개는 구분 없이 루젬이라고 부른다. 설명이 귀찮았던 이블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가질래?”
“가져도 된다면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이블이 허, 바람 빠진 웃음을 지었다.
“뻔뻔한 놈이네. 이게 하나에 얼마 하는지 알아?”
“이만한 크기면 이백에서 삼백만 다알 정도라고 알고 있습니다.”
루젬을 구분하지도 못하면서 시세는 정확히 알아서 잠깐 놀랐던 이블은 곧 확 표정을 구겼다.
“이 돈에 환장한 새끼, 너 이거 받으면 팔려고 그러지? 팔아서 타르….”
“…….”
“타르….”
타르 난민을 빼 오려고 그러는 거지.
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말을 하면 이 난민은 분명 당황하고 난처해할 텐데, 물끄러미 바라보는 금색 눈을 보고 있으려니 차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타르요?”
오히려 난민이 되물어 왔다. 화제를 피하고자 아무 말이나 지껄여도 모자랄 판에 금가루를 뿌려 놓은 듯한 커다란 눈을 새초롬 뜨고서, 아주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이사님, 타르가 왜요?”
아주 저돌적인 난민이었다. 네 진실을 안다고 확 말해 버리면 어쩌려고.
저러다 들키면 어떡하려고.
밀조밀 예쁘게도 생긴 얼굴을 마주하려니 이블은 왠지 몸에 열이 오름을 느꼈다.
“눈깔 치워, 씨발. 나한텐 미인계 안 통해.”
그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눈 한 번 깜박하기도 전에 곧 다시 체체를 힐끔거렸다.
이블과 체체가 사담을 나누는 동안 회의실의 인원은 아까부터 이어지는 이블의 이상 행동에 무심코 시선을 두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 중이었다. 그 노력을 이블이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블이 곧 다시 체체를 힐끔거리고 말듯이, 다른 이들도 이블과 체체를 힐끔거리기 바빴다.
그때 휴대폰의 진동음이 들렸다. 동시에 제임스가 상의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자리를 떴다. 이블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소앤소와의 회의 중임을 알면서도 연락했다는 건 상당히 긴급하다는 뜻이었고, 곧 늘 그렇듯듣고 싶지 않아도 통화 소리가 들려왔다.
도시 국가인 마한빈야의 서쪽 지방에서 거대한 모래 폭풍이 일기 시작했다는 소식이었다.
***
사람에게 오러를 다루는 능력이 생긴 시기와 자연재해가 급격히 늘어난 시기는 교묘하게 맞물려 있다. 오러 유저가 태어났기 때문에 자연재해가 늘어난 건지, 자연재해가 늘어났기 때문에 오러 유저가 태어난 건지. 무엇이 먼저인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다만 시기가 맞물리기 때문에 혹자는 이렇게 말하고는 했다. 오러 유저는 자연재해에 대응하도록 지구가 인류에게 준 선물이라고. 많은 사람이 그 이론을 믿었다. 왜냐하면 그 이론은 오러 유저에게 ‘책임’을 부여하는 아주 설득력 있는 이론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자연재해 중에서도 이번에 일어난 마한빈야의 모래 폭풍은 한 도시를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는 대형 재해였다. SSS급 오러 유저가 아니면 누구도 막아 내질 못할 것이다. 마한빈야에서는 모래폭풍을 관측하자마자 곧바로 알시티로 연락을 했고, 이블 엔덤을 파견해 주길 요청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정도의 커다란 재해가 일어나면 다른 일 뒤로 제쳐 두고 달려가겠지만, 이블은 산불 사건 클레임 시민이 무릎 꿇고 사죄하지 않으면 아무런 요청도 수락하지 않겠다고 선포한 상태였으므로 그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졌다.
얼마 전에도 이블은 이런 비슷한 선언을 했고, 상대가 자살하고 나서야 활동을 재개한 바 있었다. 이번에도 사람이 죽어야 하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체체라는 타르의 영웅을 옆에 두는 것이 그의 성격이 나아지는 데에 전혀 소용이 없다는 뜻이었다.
“뒷문으로 들어가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기자들이 많이 왔는데….”
“내가 그것들이 뭐가 무섭다고 피해.”
센터 앞에는 더욱 많은 기자가 몰렸지만, 이블은 느긋하고 여유로운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뒷문이 있음에도 부득불 정문을 고집한 그는 오만한 독재자 같은 태도로 정문을 향해 걸었다. 그 뒤를 제임스와 체체가 따랐다.
“이블이 나타났어.”
“저기 이블 엔덤이야!”
수많은 인파가 이블의 양옆으로 갈라졌다. 기자들이 마이크와 카메라를 들이밀었으나 퍽 거리가 있었다. 이블이 폭력을 휘두르는 데에 거리낌이 없는 난폭한 악마라는 사실을 모르는 기자는 없었다.
“이블 유저님, 마한빈야에서 모래 폭풍이 인다는 소식을 전달받으셨습니까?”
“방금 들었어.”
“혹시 지금 출발하시는 겁니까?”
용기 있는 기자가 묻자 이블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냉소했다.
“사과받기 전까지는 안 간다고 말했는데, 너 뇌가 없어?”
질문을 던졌던 기자가 겁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그 옆으로 다른 용기 있는 기자가 나섰다.
“한 명이 신경을 거슬렸다는 이유로 수천 명의 죽음을 방조한다는 말입니까?”
“그래. 맞아.”
“…….”
“마한빈야라고 했나. 그 도시 사람들은 저 쥐새끼가 내 신경을 거슬렀기 때문에 죽는 거야.”
수천의 목숨이 달린 사안에 너무나 가벼운 말투였다.
센터 정문 앞에는 시위 중인 시민 단체가 있었다. 맨 앞줄에서 비서실로 전화를 걸었던 클레임 시민이 불안한 얼굴로 이블을 바라봤다. 시민은 매우 초췌한 몰골이었다. 실핏줄이 터진 눈과 껍질이 벗겨진 입술이 그가 얼마나 마음고생하는지를 알려 줬다. 시민은 다 쉬어 버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왜 여기 있어…. 당장 구하러 가!”
“싫다니까.”
“사람 생명을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당신의 자존심이 목숨보다 소중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목숨을 아주 간단하게 구할 수 있으면서 왜….”
“내가 왜 도와줘야 하는데?”
“멀티 유저잖아!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도와주는 건 당연한 거야!”
당연하다, 라. 이블은 턱을 치켜들었다.
사람들의 시선에 울분이 담겨 있었다.
초월적이고 위대한 힘을 가졌으면서 어떻게 도와주지 않을 수 있는지, 눈앞에 죽어 가는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손을 내밀지 않을 수 있는지, 아주 간단하게 구할 수 있는데 어떻게 보고만 있을 수 있는지.
휘몰아치는 감정의 한가운데에서 이블은 외따로 뜬 섬이었다. 그는 그 어떤 감정에도 공감할 수 없었다. 그 어느 것에도 공감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턱을 든 채 눈만 오만하게 내리깔았다.
“다 사과해. 무릎 꿇고 잘못했다고 빌어. 너네 말대로 사람 생명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귀중한 거라면 너네도 얼마든지 자존심 버리고 빌 수 있겠지.”
이블은 무성의하게 말했고, 시위대는 분노와 모멸감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이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다. 몇몇 사람들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결국 이렇게 이블 데빌의 비인간성에 시위대가 무릎 꿇었다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면 좋았겠지만, 자존심을 버린 이들을 무료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이블은 김빠진 듯 한마디를 내뱉었다.
“너무 싱거우면 재미없는데.”
그는 고민하고 있었다. 모래 폭풍을 막을지, 방치할지. 시위대의 자존심을 짓뭉개고서도….
이블이 가지 않더라도 파견된 오러 유저들은 어느 정도의 방어는 해주겠지만 도시의 파괴는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마한빈야가 파괴되건 말건 이블과는 상관없는 일이며 그는 그 때문에 돌아오는 비난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블에게 사람들의 비난은 귓가를 날아다니는 모기의 날갯짓 소리 같은 것이었다. 귀찮고 성가신 것. 결코 그 이상은 아니었다.
역시 귀찮아. 안 갈래.
그렇게 결론을 내리려는 그때, 시위대가 이블의 뒤에 선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체… 체체.”
이블 데빌과 정반대 편에 선 타르의 어린 영웅이 사람들의 눈에 들어온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악마의 비서가 된 타르의 어린 영웅은 무표정한 얼굴로 이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블을 말려 달라, 뭐라고 말을 해 달라며 체체의 이름을 연호하는 사람들을 보고 이블은 피식 웃었다.
“만만한 게 난민이지.”
그는 체체를 향해 돌아섰다. 체체는 이블이 아량을 베풀어 푸짐하게 포장해 준 음식 봉투를 품에 안고 있었다. 170cm도 되지 않는 작은 체구는 음식 봉투조차 버거워 보였다.
“왜 그런 눈으로 봐. 불만 있으면 말로 해.”
금색 눈에는 어떤 비난이나 혐오도 담기지 않았지만 이블은 지레 찔려서 그렇게 말했다.
“너도 내가 모래 폭풍을 막아 줘야 된다고 생각하냐? 사실 산불도 빨리 가서 사람을 구해야 했다고 생각하지? 이 기회에 비난하고 싶으면 해.”
“비난하고 싶지 않습니다. 더 일찍 갔다고 얼마나 달라졌겠습니까. 사망자 수는 똑같았겠죠.”
체체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합동 장례식 기자 회견과 같은 대답이었다.
이블이 무슨 개소리냐는 식으로 눈썹을 들어 올렸다.
“너 그딴 기분 나쁜 오해 하지 마. 씨발, 알시티인이든 탈타르인이든 나한텐 다 똑같이 동등한 벌레 새끼들이거든.”
“그 뜻이 아닙니다.”
체체는 담담하게 말했다.
“아무리 이사님이라도 대형 산불 앞에서는 무력하셨을 겁니다. 많은 사람이 착각하고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이사님이 일찍 간다 한들 희생자 수가 줄어들진 않았을 텐데요.”
“내가 바람 막고 산불 가둔 것 못 봤어? 방송 안 봤어?”
“그건 소방대원들이 이미 불줄기를 잡아 놓은 덕분입니다. 많이 약해진 덕분에요.”
“와… 어이가 없어서….”
“이사님의 능력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치가 너무 높아서 부담스러우실 것 같습니다. 모래 폭풍도 마찬가지겠죠. 가신다고 해도 어떻게 고작 인간이 자연재해를 막아 내겠습니까. 실제로 이사님은 대형 산불을 초기에 진화시키거나 모래 폭풍을 막아 낸 적이 한 번도 없으신데 많은 사람이 과대평가를 하시네요.”
“하….”
이블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잊어버렸다. 그는 길 걷다가 갑자기 펭귄이 연주하는 꽹과리에 얻어맞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지켜보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체체가 너무 무표정한 얼굴로 이야기해서 이블에 대한 도발인지 아니면 순수한 진심인지 구분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만약 이사님께서 그런 힘이 있으시다면.”
체체가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목숨을 구해 준다면, 그 나라 사람들은 평생 이사님께 감사해하며 살 겁니다. 이사님은 그 사람들의 현재와 미래를 구원해 주고… 그 사람들은 누군가의 대가 없는 선의로 얻게 된 두 번째의 삶을 소중히 하며 살겠죠. 그들은 이사님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겁니다.”
잠시 멍해져서 눈만 깜박이던 이블은 곧 바람 빠진 웃음을 지었다.
“뭐야, 그게. 결국 너도 내가 당연히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결코 당연한 일은 아니니까요.”
체체는 무심한 눈으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 시선은 가장 적극적으로 이블에게 대항했던 시민에게 멈췄다. 체체가 클레임 전화를 받았던 사람이었다.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도와주는 게 당연한 일입니까?”
“당연하지. 왜 그런 말을….”
“그럼 당신은 왜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어요?”
“…….”
“그 나라는 수만 명이라고 했죠. 타르에는 수백만 명이 있습니다. 당신들 모두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지만 수백만 명이나 살아 있습니다. 지금도 그곳에서….”
고저 없는 목소리에 감정이 담겼다. 괴로움과 죄책감으로 일그러진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드물게도 통제력을 잃은 듯이 흘러나오는 체체의 감정은 지금까지 이블이 느껴 온 그 어떤 감정보다 어두웠다. 깊은 어둠이 내린 늪이었고 별이 뜨지 않는 검은 밤하늘이었다. 바람조차 불지 않는 사막 같았다.
괴로움과 자책감 외에는 어떤 감정도 없었다. 원망도, 분노도…. 촛대의 모든 불씨가 꺼져 버린 어두운 복도에서 혼자 희미하게 타오르는 것은 죄책감뿐이었다. 죄책감만이 유일하게 체체를 움직이게 하고, 말하게 했다.
그 감정이 전달되어 왔다. 오러 유저에게도, 노유저에게도.
“우리가 무슨 힘이 있다고… 어떻게 도와… 힘이 없는데. 우리보다 당신이 더 힘이 있지….”
시민이 고개를 숙였다. 체체에게 풍요로운 알시티에서 태어나고 자란 시민들은 ‘강자’였으나 시민들에게는 알시티에서 엔덤 가문의 지원을 받고 현재 위력자의 곁에 서 있는 체체가 더 강한 자였다. 그동안은 가여운 난민이었지만, 권력자의 편에 선 이 순간부터 강자가 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체체에게 비난의 돌을 던지지 못했다.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흘러들어 오는 죄책감이란 감정 앞에서.
“소울 오러…?”
누군가의 중얼거림이 이블의 귀에 들려왔다.
의문을 갖는 게 당연했다. 이렇게까지 감정을 동화시키는 현상이 벌어지는 데에는 한 가지 원인밖에 없으니까. 이곳은 많은 오러 유저가 드나드는 유저 센터이므로, 소울 오러의 파장을 느끼는 다른 유저가 얼마든지 있었다.
“가자.”
이블은 수백만 명을 죽인 죄인처럼 선 체체에게서 음식 봉투를 빼앗아 들고는 팔을 붙잡았다. 체체는 센터로 이동하는 이블이 이끄는 대로 힘없이 따라왔다. 손목은 한 손에 잡히고도 두 마디가 남았다.
감정은 여전히 고요하게 요동쳤다. 곧 폭발할 것처럼, 금방 사라질 것처럼.
***
이블은 그날 오후 마한빈야의 서쪽 지방으로 출발했고, 도시 국가를 모래 폭풍으로부터 지켜 냈다. 그 일은 전 세계적으로 아주 크게 다뤄졌다. 이블이 이런 대규모의 자연재해를 초기에 나서서 해결해 준 건 이 년 만의 일이었다. 성인이 되고 처음인 것이다.
알시티로 돌아오는 전용기 안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늘 무료한 얼굴로 핸드폰을 두드리던 이블은 창밖을 바라본 채 생각에 잠겼고, 그를 둘러싼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사님께서 감기약을 주신 덕분인 것 같습니다.”
가문과의 통화를 끝낸 제임스가 뜬금없는 소리를 하며 다가왔다.
“뭐가.”
“체체 씨가 사람들 있는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이사님을 편들어 준 것 말입니다.”
“그게 날 편든 거라고?”
“예, 시위대에게 면박 주고 이사님의 편을 들지 않았습니까. 힘 있는 사람이 힘 없는 사람을 도와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그래? 기사에서도?”
“좋은 영향을 주고 있다더군요. 체체 씨에 대한 좋은 기사도 많이 나왔습니다. 왜인지 알 것 같아요. 아까 체체 씨의 얘기를 들으면서 가슴이 울컥했거든요. 현장에 있던 기자들이 모두 좋은 기사를 썼습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머저리 놈들.”
이블은 차갑게 비웃었다. 그가 더 이상의 대화는 원하지 않는다는 듯 창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기 때문에 제임스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자리를 떴다. 제임스가 눈치 빠르게 다른 칸으로 옮겨서 이블은 혼자 있을 수 있었다. 이블은 창밖을 바라봤다.
하늘은 어두웠고, 별 하나 보이지 않았다.
사방은 고요한 소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블은 좁은 단칸방에 몸을 뉘었을 체체를 떠올렸다. 냉장고도 전자레인지도 없는 곳에서 포장한 음식은 어떻게 보관했을까. 난민 시설에 가져가서 애들 먹으라고 줬을까. 감기약을 먹긴 먹을까. 모래 폭풍 기사를 찾아보기는 할까. 아니면 여전히 죄책감과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을까. 담배를 피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텅 빈 방에서.
‘시위대에게 면박 주고 이사님의 편을 들지 않았습니까. 힘 있는 사람이 힘 없는 사람을 도와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의 생각은 착각이다. 그건 편들어 준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당신은 왜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어요?’
약자를 도운 적 없는 강자를 향한 분명한 비난이었다.
***
사람은 모두 오러를 지니고 태어나지만 오러를 사용하는 능력의 보유자는 언제나 세계 인구의 20% 정도로 한정되어 있다.
오러 유저는 사용 능력이 얼마나 탁월한지에 따라 등급이 나뉘는데, 알시티에서는 유아기 때 국비로 능력치를 측정하며 이때 발현하지 않아도 청소년기에 필수 교육 과정을 거치면서 분기별로 측정한다. 성장기가 멈추면 보통 오러의 발현도 멈추기 때문에 성인이 되면 측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주 간혹, 성인이 된 노유저가 오러 유저로 발현하기도 한다. 이 경우에는 오러 능력이 생겼다는 것도 모르는 사람들도 있고, 일부러 숨기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오러 유저 협회는 그들을 감시하고, 측정 대상을 선별하는 역할을 했다. 협회는 ‘이 사람에게 오러 능력이 생긴 것 같다’는 제보가 들어오면 내부 회의를 거쳐 측정 통보를 내리는데, 협회의 본부가 바로 이곳, 오러 유저 센터였다.
센터 소속 유저들 몇몇이 타르의 난민 체체가 오러 유저 아니냐 문의를 해 왔다. 일주일 전, 체체의 말에 현장에 있던 많은 사람이 감정의 동화를 느꼈고, 어떤 유저들은 오러 또한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은 많은 카메라에 결코 무시하지 못할 증거로 담겼다. 센터의 고문 이사인 이블은 체체에게 감기가 다 낫자마자 오러 등급 측정을 받으라고 통보했다.
그는 잔뜩 인상을 쓴 채 체체가 받게 될 등급 측정 검사 목록을 훑었다.
“모션은 할 필요 없고, 소울 오러 검사만 시켜. 딱 봐도 모셔너 체격이 아니구만. 너네 얘 조롱하냐?”
“조, 롱은 아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보통 최초 측정 때는 양 오러를 모두 검사하기에….”
“이런 뱁새 같은 애한테 모션은 무슨.”
“뱁….”
“참 나, 어댑터는 또 왜 뺐어? 넣어야 되는 건 제외하고 제외해야 되는 건 넣었네.”
“어댑터 검사를… 해야, 할까요?”
“하라고, 미친아. 말귀 못 알아먹냐?”
“죄송합니다. 하겠습니다….”
측정 담당 직원은 잔뜩 겁먹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측정실이 어댑터 검사 항목을 제외한 이유는 어댑터가 아주 희귀한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개천에서 용 난다고 빈민 국가 출신인 체체가 오러 유저라는 건(아직 정확하지는 않지만) 놀라운 사실이지만, 그래 봤자 오러 유저 정도이지 더욱 희귀한 어댑터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블의 명이 떨어졌으니 어댑터 검사 준비도 해야만 했다.
“어댑터 측정 장비를 준비하려면 시간이 조금 걸립니다. 반나절 정도는 있어야….”
“점심 먹고 측정할 수 있게 해 놔.”
“…….”
측정실 직원은 살려 달라는 눈빛으로 이블 뒤편의 제임스를 쳐다봤다. 제임스가 다급하게 입 모양으로 말했다.
‘대. 답. 하. 세. 요. 얼. 른.’
직원은 화들짝 놀랐다.
“예, 예. 한 시까지 끝내겠습니다.”
“대답이 늦다, 씨발. 한 시간 안에 다 해결해.”
“…예, 알겠습니다.”
지금부터 딱 한 시간이 주어졌다.
직원들이 빠르게 새로 장비를 준비하는 동안 이블은 맞은편에 인형처럼 조용히 앉아 있는 체체에게 ‘오러 능력 자기 검사 표’를 내밀었다. 다섯 장의 설문지였다.
“너는 이거 쓰고 있어.”
“…….”
곧잘 예, 대답하던 체체가 이번에는 이블을 물끄러미 보았다.
“이사님, 저는 오러 유저가 아닙니다. 어댑터일 리도 없습니다.”
“너는 소울 오러 유저야. 최소 B 등급 이상의.”
“그럴 리가 없어요. 이건 귀중한 측정 도구를 낭비하는 겁니다.”
“소울러라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거야.”
기대감도,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도 전혀 없는 무감정한 얼굴을 보며 이블은 사실을 말해 주었다.
“내전 국가에서 몇 번이나 위험에 처하면서도 살아남은 건 네가 소울러이기 때문이야. 허구한 날 폭격 쏟아지는 동네에서 성인이 되었잖아. 네가 아는 사람들도 다 죽었다면서. 너는 오러에게 선택받아서 살아남은 거야.”
“이사님, 제가 죽지 못한 건 다른 사람들이 저 대신 죽었기 때문이에요.”
이블의 오만한 얼굴을 보며 체체는 자신이 아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저 대신 다른 사람들이 죽어서 죽지 못한 거예요.”
“…….”
잠깐 멍해졌던 이블은 곧 콧잔등을 찌푸리며 체체 쪽으로 기울었던 상체를 뒤로 젖혔다.
“존나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되냐….”
“죄송합니다.”
“뭐가 어찌 됐든 검사는 해야 하니까 그거나 빨리 써.”
“…….”
“대답 안 하냐.”
“…예.”
체체가 펜을 쥐고 검사 표에 작성을 시작했다. 이블은 그때 체체의 손등에 있는 작은 화상 자국을 발견해 버렸다. 이미 알고 있었으나 오늘따라 더욱 눈에 들어왔다.
쉽지 않네.
이블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른 곳에 시선을 두었다. 회백색 벽에 붙은 이상한 화분이 그려진 액자, 온갖 단체로부터 받은 감사패가 진열된 장식장, 비서가 매일 관리해 주는 난초… 그리고 종착지는 다시 체체였다.
조그만 손으로 펜을 쥐고 열심히 검사 표를 작성하고 있었다.
“…뱁새.”
“……?”
“아니야, 계속 써.”
무심코 속마음을 내뱉어 버렸다.
이런 뱁새 같은 거한테 모셔너 테스트는 무슨.
작은 정수리를 보이며 고심하는 모습은 꽤 볼만했다. 촘촘한 속눈썹이 만들어 낸 그늘이나 오므린 입술 같은 게 왜 재미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냥 보고만 있으라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팔짱을 낀 채 구경하던 이블에게 검사 직원의 불안정한 심리가 느껴졌다.
바로 이 난민 때문이었다. 한 항목에 머무르는 시간이 너무 길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는 결과가 잘못 나올 수 있다. 측정실 직원은 이블 앞이라 차마 말하지도 못하고 혼자 걱정에 잠겼다. 이블은 그 걱정을 읽었다.
결과가 잘못 나오면 안 되지.
이블이 팔짱을 풀었다.
“길게 고민하지 말고 바로바로 답변해. 심리 테스트처럼 떠오르는 걸 바로 써야 들어맞아.”
“심리 테스트 해 본 적 없습니다.”
“아오, 씨. 대체 너는 할 줄 아는 게 뭐야.”
“KP-s678 시리즈 조립은 합니다.”
“그게 뭔데….”
이블도 측정실 직원도 알아듣지 못했다. 이블은 체체의 설명을 기다리지 않았다.
“됐고, 고민하지도 말고 생각하지도 말고 그냥 적어.”
“…네.”
그러나 그 후에도 한 항목마다 걸리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내 말에 반항하는 건가.
무슨 말을 해도 무심하던 놈이 갑자기 왜 이러나, 인상을 구기던 이블은 체체의 미간에 잡힌 작은 주름을 보고 깨달았다. 알시티어로 쓰인 검사 표는 체체에게는 읽기 힘든 것일지도 모른다.
저명한 대학교수와 전문가들이 작성한 검사 표에는 처음 보는 어려운 단어도 많을 테니까.
이블은 딴청 피우는 척하면서 말했다.
“혹시 적다가 모르는 단어 있으면 물어봐.”
“여기, ‘효시’가 뭔가요?”
바로 질문이 돌아왔다.
“오러의 효시에 대해서 알고 있냐고. 그러니까, 오러가 어떻게 처음 나타난 건지 아냐고. 모르면 모른다고 써.”
“예.”
체체는 ‘모른다’라고 적었다. 그 뒤로도 몇 번 모르는 단어를 물었고, 이블은 뚱한 얼굴로 대답해 줬다.
이렇게 모르는 단어도 많고 멍청한 게 잘도 여기서 일 년이나 살았네.
이블은 처음에는 ‘효시’나 ‘범주’가 어려운 단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대체 이 난민은 얼마나 무식하단 말인가. 그러다 나중에는 왜 검사 표를 이런 어려운 단어로 만들어 놓은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검사를 받는 사람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빈민국 출신일 수도 있는데.
이블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체체는 마지막 항목에 다다랐다. 오러 유저가 된다면 구체적으로 무얼 하고 싶은지 묻는 서술식 항목이었다. 작성자는 최대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방향으로 써야만 했다.
체체는 서툰 알시티 글자로 답을 써 내려갔다.
제가 오러 유저라면 타르를 돞고십슴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