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덤 가문 소유의 □□ 병원은 한 층에 병실이 하나뿐인 호화로운 곳으로 가문 사람들 아니면 입원은커녕 외래 진료도 받기 힘든 특수 병원이었다. 체체는 그중에서도 최상층 특실에 입원했다. 외부인은 절대 들어오지 못하도록 보안을 철저히 하는 곳이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상층으로 움직이는 동안 이블은 뚱한 표정으로 셔츠 깃을 정돈했다. 만약 제임스가 이곳에 있었다면 기함했을 것이다. 셔츠 정돈이라니, 이지비디 왕족을 만날 때도 귀찮다고 셔츠를 풀어 헤치고 갔던 그가.
아니, 그 이전에. 병문안이라니. 제임스가 알았다면 목숨 걸고 말렸을 것이다.
제발 한 번만이라도 병문안해 달라는 애원에 이블은 단호하게 싫다고 했고, 그렇게 병문안이 싫다던 이블이 병원에 향한다면 제임스가 추측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체체 씨가 입원한 병원에 가신다고요…?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목숨을 끊어 낼 생각이신 거죠? 절대 안 됩니다, 이사님. 제발….’
그렇게 나올 게 뻔해서 이블은 제임스에게 말하지 않고 왔다. 밤 열 시, 누구의 면회도 금지된 시간에, 쥐새끼처럼 몰래.
엘리베이터가 서고 문이 열리자마자 이블은 일 층부터 느껴지던 메스꺼운 냄새가 더욱 진해졌음을 느꼈다.
그는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눈을 감는 순간까지 언제나… 지나치게 많은 냄새를 맡고 살았다. 보통 사람은 상상조차 못 하는 너무 많은 종류의 냄새를. 그중에서도 이것은 특히 싫어하는 냄새였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 복도 중간에 있는 문을 벌컥 열었다.
“…….”
창가에 기대서 있던 체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손가락에는 담배 한 개비가 들렸다. 그는 커다란 금색 눈을 한 번 깜박이더니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이블이 아니었다면 누구도 느끼지 못했을 만큼 미세했다.
“…이사님?”
“씨발, 당장 꺼. 역겨우니까.”
이블은 욕을 내뱉으며 들어왔다. 그는 체체가 담배를 창틀에 비벼 끄는 걸 보며 자연스럽게 침대에 걸터앉았다.
“무식한 난민 새끼 아니랄까 봐 감히 병원에서 담배를 피우냐. 아예 알시티에서 쫓겨나고 싶어?”
“죄송합니다.”
“지금까지 냄새 용케 숨겼다?”
“이사님께서 마약은 하지만 담배는 안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담배 냄새에 예민하다고 하셔서 출근할 때는 피우지 않았습니다.”
“입원한 동안은 아주 맘 놓고 피웠겠네.”
“아니요….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요.”
“거짓말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
이블은 콧방귀를 뀌며 다리를 꼬았다. 체체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블은 체체에게 어디 앉으라거나 이리 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헐렁한 환자복을 입고 달빛을 등지고 선 체체는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처럼 보였다. 이블은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마주 봐 오는 건방진 난민을 보며 ‘난민 놈 눈 색은 제법 봐 줄 만하네’ 생각했다.
“존나 어둡게 하고 사네. 너 그러고 있으니까 눈만 둥둥 뜬 것 같아, 병신아.”
병실 불이 꺼진 상태여서 이블이 아니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캄캄했다. 체체가 리모컨을 찾아 불을 켜려는데 방이 저절로 환해졌다. 이블이 오러로 스위치를 올린 것이다.
넓은 병실에는 텔레비전이나 데스크톱, 영화 스크린은 물론 조리가 가능한 주방도 있었으나 어느 것도 사용한 흔적이 없었다.
침대 위에 컴퓨터 프로그램 관련 책 두 권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블은 그중 하나를 주워 들었다. 책을 펼치자 볼펜으로 열심히 밑줄을 친 흔적이 있었다. 이블의 웃음이 짙어졌다.
“이런 건 실제로 해 봐야지 알지. 안 그래도 무식한 머리로 책만 본다고 이해가 되겠어?”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
대답은커녕 건방지게 질문으로 되받는 난민이었지만 이블은 왠지 화가 나지 않았다.
“네가 비서한테 문자했 잖아. ‘오늘일로 기자들이 다 이사님집으로 갓을테니 이재저도 병원밖으로 나가도 돼나요?’”
아.
체체는 오후에 보낸 메시지를 기억해 냈다. 전화를 했는데 받지 않아서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알시티어를 듣고 말하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읽고 쓰는 것은 아직 어려워서 무척 힘들었다. 아무 답장이 없길래 안 되는구나 체념했던 체제는 여전히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나가도 되나요?”
“넌 씨발 그 난리가 났는데 드는 생각이 이제 기자들이 없어지겠구나 이거야? 겁나 공감 능력 떨어지네. 모시는 상사가 난처한 상황이 됐는데 나만 편하면 된다는 거지, 지금.”
“죄송합니다.”
체체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가며 사과했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이제 나가도 됩니까?”
“하….”
이블이 기가 찬다는 듯 숨을 내뱉었다.
“안 돼. 절대 안 돼. 내 일이 해결될 때까지 아무 데도 못 가. 나도 어디 처박혀 있어야 할 판에 어디서 난민 놈이 자유를 누리려고 해.”
“뉴스로 보기는 했습니다만 어디 처박혀 계셔야 할 만큼 곤란한 상황이셨습니까?”
“뭐?”
이블은 어이가 없었다. 감히 ‘처박혀’라는 어휘를 사용한 것부터, 감히 자신에게 곤란한 상황이냐는 질문을 던진 것까지.
처박혀 있어야 한다고 표현하긴 했지만 그의 사전에 ‘곤란함’이라는 단어는 없었고, 실제로도 곤란한 상황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수없이 반복해 왔던 일상일 뿐이었다. 그저 며칠 집무실에서 가만히 게임만 하다 보면 어느새 논란은 수그러질 것이다. 수그러들지 않아도 상관없다. 어차피 저들이 먼저 고개를 숙이고 들어올 테니까.
“처박혀 계셔야 할 정도로 곤란한 상황인 것도 모르고 무리한 부탁을 드려 죄송합니다.”
“아니, 씨, 절대 곤란한 건 아니거든? 저 인간들 반응 따위 완전 아무렇지 않은데 그냥 목소리가 크다 보니까 시끄러워서, 그러니까 귀찮아서….”
주절거리던 이블은 왜 내가 이 새끼한테 변명을 하나 싶어서 얼른 하던 말을 끊었다.
“됐고 넌 그냥 아무 데도 못 간다고 알고 있어.”
“사람들이 조용해지면 나가도 되나요? 연락할 곳이 있습니다.”
“아, 난민 새끼 더럽게 집착하네. 좀 참을성을 갖고 조용해지길 기다려 봐. 사람들 겁나 다혈질이니까. 쉽게 흥분하고 쉽게 꺼지고. 곧 네가 맞았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걸. 그때가 되면 네 맘대로 돌아다니든가.”
“예….”
실망했을 텐데도 얌전히 대답하는 체체의 얼굴엔 아무런 감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블은 들고 있던 컴퓨터 프로그램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팔랑, 팔랑 넘어가는 페이지마다 볼펜 흔적이 가득했다.
저 무표정한 얼굴로 밑줄을 치고 동그라미를 그리고 공부했을 모습을 상상하니 웃기면서도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교재는 기본적으로 알시티 공용어로 적혔지만 외국어 고유 명사들도 나왔는데, 그때마다 동그라미가 쳐졌다. 군데군데 깨알같이 뭔가를 적어 놓았는데 이블에게는 낯선 언어였다. 아마 타르어인 것 같았다.
“야, 난민.”
“예.”
“인터넷에서 나 욕하는 글들 봤냐?”
“아니요.”
“하긴 로그인도 못 하는 무식한 난민이 인터넷 기사를 어떻게 읽겠어.”
이블은 픽, 비웃고는 프로그램 책을 내던졌다. 그리고 체체의 베개 머리맡에 있던 휴대폰을 오러를 이용해 끌어당겼다. 엔덤 가문에서 준 휴대폰에는 당연히 잠금 따위 걸려 있지 않았다. 아마 방법도 모를 터였다.
인터넷은 여전히 난리였다. 이블이 악성 댓글에 대응하지 않는다는 사실만 믿고 파티를 벌였다. 이블은 한번 단체 고소해 줘야겠군, 생각하면서 악성 댓글이 가득 달린 기사 하나를 열고는 여전히 창가에 선 체체에게 휴대폰을 보냈다.
“읽어 봐.”
휴대폰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오러를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이용하는 모습을 보며 다른 생각을 하던 체체가 휴대폰을 받아 들었다. 이블이 미간을 좁히고 읽기 시작한 체체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말했다.
“내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 할 것들이 익명이라고 겁 없이 굴지. 인터넷 실명제 얘기가 있었는데 하도 지랄해 대서 취소됐어. 아니었으면 존나 다시는 그런 소리 못 하게 다 손가락을 부러뜨려 놓을 텐데.”
“…….”
“나는 익명이 아닌데 지들은 익명이고 싶어 해. 남 깎아내리는 데 쾌감 느끼는 미친 변태 놈들.”
신랄하게 비난하는 이블을 체체가 물끄러미 보았다.
“왜 그렇게 봐.”
“그걸 이사님이 말씀하시는 게 어이가 없어서요.”
“죽고 싶냐?”
다혈질이며 쉽게 흥분하는 이블이 당장 벌떡 일어나 씩씩거렸다.
“이게 봐주니까 씨발, 기어오르고 있어. 내가 너 못 죽일 줄 알아?”
왈왈거리는 이블과는 달리 체체의 표정은 여전히 고요했다. 겁먹지도 않고, 변명하지도 않고….
몇 가지 폭언을 하다가 여기서 어떤 말을 하든 저런 무심한 눈빛이 계속되리라는 걸 그간의 경험으로 깨달은 이블은 다혈질이며 쉽게 꺼지는 성격상 금방 가라앉았다. 지금까지는 이런 상대가 없어서 몰랐는데, 모든 성질머리를 다 흡수해 버리는 사람이 앞에 있으니 화내고 싶은 마음도 별로 안 들었다.
“씨, 이번만 봐준다… 그거 계속 읽기나 해.”
“예.”
체체는 다시 휴대폰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왜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당연히 없어 보였다.
이블은 그런 체체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원색적인 인신공격과 비난을 읽는 중이지만 예상대로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아니… 예상 이상으로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글을 읽기는 하는 건가 의심이 될 정도로. 이블은 혹시나 싶어 물었다.
“너 알시티 공용어 못 읽어?”
“읽을 줄 알지만 이렇게 많은 글자를 빠르게 읽기는 힘듭니다. 아직 ‘제발 이블 데빌 죽었으면 좋겠어. 다 같이 힘 합쳐서 대가리 한 번이라도 치면 안 돼? 저딴 쓰레기를 왜 유저 대접해야 하는 거야’까지밖에 못 읽었습니다.”
…저거 악의 없는 거 맞아?
도통 감정이 느껴지지 않으니 이블은 어이없어도 참는 수밖에 없었다. 태아 시절에나 있었던 참을성을 끌어내야만 했다.
체체가 휴대폰 화면을 보는 동안 이블은 벌러덩 뒤로 누웠다. 한 층에 병실이 하나뿐인 병원은 조용했다. 천장이 높고 벽이 두꺼워 웬만한 소리는 막아 주기 때문에 이블은 가끔씩 이곳에 머무르고는 했다.
물론 이곳도 모든 소리를 막지는 못 했다. 가만히 있으면 항상 소음이 들려왔다. 지상 위의 모든 소음이.
소음과 악취 속에서 이블은 항상 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이 들으면 매일 게임만 하고 놀고먹지 않느냐 하겠지만, 이블은 무료함에 시달리면서도 언제나 쉬고 싶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에서….
어디서 무엇을 하든 항상 소음이 따라다니는 그에게는 적막이 필요했다.
이블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가문에서는 최고층의 병실을 비워 두고는 했는데, 오늘은 이곳에 체체가 있었다.
분명 사람이 있는데, 사람이 없는 것처럼 고요했다. 이블의 귀에 들려오는 체체의 심장 박동은 처음 문을 열고 얼굴을 본 그때만 잠깐 빨리 뛰었고, 그 뒤로는 계속 잠잠한 상태였다. 사람을 향한 악의적인 비난을 읽는데도 집중하기 위해 미간을 좁힌 것 외에는 무엇도 변하지 않았다.
하긴 면전에서 내뱉는 욕설에도 아무 감흥 없고, 죽이려 들어도 건조하기만 하니 이 정도 비난에 반응이 없는 건 당연했다. 이블은 뚱하니 체체를 쳐다봤다.
어디 앉으라는 말을 할 때까지 계속 저렇게 서 있을 건가.
창문을 등지고 선 체체의 잿빛 머리칼이 바람에 흔들렸다. 살짝 내리깐 눈에는 아무런 빛도 담기지 않았다. 저 무심한 눈빛에 깃든 건 이블의 정신을 좀먹는 지긋지긋한 무료함과는 달랐다.
조용하다.
아주 오랜만에.
아직 메스꺼운 담배 냄새가 남았다. 창문을 활짝 열라고 하려다가 그냥 뒀다. 담배 냄새 속에 희미하게 다른 냄새도 섞인 것 같았다. 아주 희미한, 비릿한 피 냄새 같은 것.
병원이라 그런 거겠지.
이블은 그렇게 생각하고 눈을 감았다.
***
이블의 예상대로 며칠 지나자 사람들의 관심은 급격하게 식어 버렸다. 이블이 무반응으로 대응하고, 대중도 그런 무반응에 익숙해졌기 때문이었다.
체체가 입원한 병원 정문에 포진한 기자들도 대폭 수가 줄었다. 퇴원하는 날에는 기자들 몇몇이 있었지만 쉽게 따돌릴 만한 수였다. 체체는 엔덤 가문에서 준비해 준 고급 리무진을 타고 곧바로 유저 센터로 향했다.
유저 센터의 로비에서부터 많은 사람이 체체를 알아봤지만 가드가 붙어 있어 다가오거나 말 걸지는 않았다. 가드들은 체체가 201층 직통 엘리베이터를 타는 걸 확인한 후 떨어졌다. 201층에 도착한 체체는 곧장 비서실로 향했다.
“아, 체체. 퇴원했구나.”
“병문안 못 가서 미안해. 우리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서.”
선임들이 상냥하게 웃으며 인사했는데, 얼굴이 퀭했다. 그동안 이블의 악행에 쏟아진 비난 전화를 감당하느라 지친 모양이었다. 인사하는 와중에도 전화가 울렸고, 한 명은 계속 통화하며 “예, 저희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이라는 사과만 반복했다.
“업무 복귀는 다음 주 월요일부터라고 들었는데 왜 벌써 왔어?”
“가져갈 게 있어서요.”
몇 안 되는 지인들의 전화번호를 적어 둔 수첩이 데스크 서랍에 있었다. 정확히는 가방 안에.
“가방 놓고 갔었구나….”
“예.”
체체는 회사에서 갑작스레 이블에게 폭행당했고 그대로 병원에 실려 갔다. 체체가 찾아 달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방 같은 개인 소지품을 전달해 준 사람도 없었다. 제임스에게 나가게 해 달라는 말이 아니라 회사에 두고 온 가방을 달라고 했다면 얼마든지 전달해 줬을 테지만….
그때 다시 전화가 울렸다. 이블 발신 전용 벨 소리였다. 체체가 받으려고 하자 줄리아가 식겁했다.
“내가 받을게. 예, 고문 이사님.”
체체가 받기 전 얼른 수화기를 드는 이유는 그가 이번에도 이블 데빌의 신경을 거스를까 봐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비서실 선임들에게 체체는 이미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사람 카테고리에 있었다. 이제 체체는 전화를 받는 업무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체체는 앉은 기억이 드문 의자를 꺼내 책상 아래에서 가방을 챙겼다. 비서실 전원이 전화를 받고 있어서 소리 없이 고개만 숙여 인사하고 나가려 했다.
“아, 예. 알겠습니다. 잠깐만, 체체!”
조용히 문을 닫으려는 그때 줄리아가 다급히 체체를 불렀다. 여전히 수화기를 든 채였다. 체체가 돌아보자 줄리아는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사님이 집무실로 오라셔. 얼른 가 봐.”
“예.”
어차피 상사에게 인사하고 갈 생각이었던 체체는 고개를 꾸벅했다.
***
이블은 긴 다리를 꼰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특유의 삐딱한 비웃음을 띤 얼굴로.
“넌 씨발 직장에 왔으면 보스한테 먼저 인사를 해야지.”
“죄송합니다.”
“시대가 어느 땐데 수첩이냐? 존나 꼬질꼬질하네.”
이블은 체체의 가방에서 반쯤 고개를 내민 수첩을 보고 비웃었다. 위쪽에 스프링이 달린 손바닥 사이즈의 수첩은 이블의 표현대로 꼬질꼬질하고 낡은 모습이었다.
“핸드폰 줘 봐.”
이블이 손을 내밀었고 체체는 늘 그렇듯 아무 의문 없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얇은 스마트 패널을 꺼내 쓰는 최신 제품이었다.
이블은 핸드폰 화면을 켰다. 예상은 했지만 당연히 잠금도 안 되었고, 배경 화면도 기본 파란색이었다. 구매 당시에 설치된 애플리케이션과 위젯도 그대로였으며 메시지 앱은 깔려 있지도 않았다. 전화번호부에는 제임스의 연락처조차 없었다. 이블은 자신의 번호로 전화를 걸며 물었다.
“너 번호도 저장 안 하고 비서한테 어떻게 연락하냐?”
“통화 기록에 들어가서 합니다.”
신호음을 세 번까지 듣고 끊었다. 통화 기록으로 들어가 보니 자신의 번호 밑으로 저장 안 된 번호 하나만 여러 번 찍혀 있었다.
“친구도 없어? 여기 탈타르인 백삼십일 명이나 산다던데.”
“…없습니다.”
이블이 꽤나 정확한 숫자를 읊었다. 체체의 기억보다 네 명 많아진 수치였다.
“메시지 앱 깔아. 난 문자 잘 안 쓰니까.”
“어떻게 까는지 모릅니다.”
“아, 멍청한 새끼. 그냥 스토어 들어가서 ○○○ 치고 다운 받으면 되잖아.”
“스토어요?”
“이리 와.”
이블이 손가락을 까딱했다. 체체가 가까이 다가가자 이블은 화면의 무언가를 눌러 체체로서는 처음 보는 창을 열고 거기에 ○○○를 검색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다운로드까지 했다.
“쉽지?”
“아니요.”
대답이 바로 튀어나왔다.
“어휴, 병신.”
이블은 모든 창을 끈 후 체체의 작은 정수리를 쳐다보며 핸드폰을 내밀었다.
“다른 거 받아 봐.”
“처음에 누르신 게 뭐였는지 모르겠어요.”
“아, 겁나 귀찮게 하네.”
이블은 다시 배경 화면에서 스토어 어플을 눌렀다. 체체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이블은 미소를 참았다.
재미있다.
이블은 아주 오랜만에 그 감정을 느꼈다.
그는 이 난민이 어떻게 핸드폰에 어플을 다운로드받는지 배우고 싶어 한다는 게 꽤 재미있었다. 목숨이 위협당하는 상황에서도 언제나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것처럼 무심하던 녀석이 어째서 이런 것에는 관심을 보이는지.
“이제 알겠어?”
이블은 예를 들어 주겠다고 게임 앱을 세 개나 다운 받았다. 마지막엔 체체에게 해 보라고 줬고 체체는 적극적으로 받아 들었다. 의지는 있었으나 헤매는 건 똑같았다.
“그거 누르고.”
“……”
“‘캐치 하트 씨’라고 써.”
“어디예요?”
“여기 빈칸에 커서 깜박거리잖아.”
“커서가 뭔가요?”
“아오, 씨, 빌어먹을 인내심 테스트하냐, 멍청아. 여기 까맣고 얇은 세로선, 깜박거리는 거.”
“아… 이런 것에도 이름이 있군요.”
“당연히 있지.”
빈칸의 아무 여백이나 터치해도 되지만 체체는 굳이 깜박거리는 커서를 터치하려고 애썼다. 이블은 체체가 뻘짓을 하는 걸 가만히 두고 봤다.
가는 손가락의 작은 손톱은 다 뭉개져 있었다. 화상 자국이 남고 마디마디 긁힌 흉터가 많아서 결코 예쁜 손이 아니었다.
키패드 화면이 올라오고, 애플리케이션 이름을 치는 손가락이 무척 신중했다. 잿빛 머리칼이 이블의 눈 아래에서 살랑거렸다. 담배 냄새 따위는 나지 않았고 오히려 좋은 향이 나는 것 같았다.
체체의 심장 박동이 평소보다 살짝 빠르게 뛰었다.
이게 뭐라고.
고작 앱 하나 다운 받는 데 네 번이나 알려 줘야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아무리 처음 접해 본다지만, 그가 처음 핸드폰을 사용할 때만 해도 그는 누가 알려 줘서가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난민은 무식하다.
하지만 무식한 걸로 따지만 난민보다는 제임스가 더 심각했다. 신제품만 달랑 던지고서 아량을 베풀었다고 자위했겠지. 이런 걸 접해 본 적도 없고, 주위에 사용법을 알려 줄 사람도 없는 이에게는 결코 선물이 아니었을 텐데.
난민은 ‘캐치 하트’까지 쓴 후 ‘씨’를 작성하는 데 애먹었다. 그러나 결코 도움을 요청할 마음은 없는 것 같았고, 이블도 도와줄 생각은 없었다. 그는 그저 의자 팔걸이에 턱을 괸 채 서투르게 핸드폰 기기를 조작하는 체체를 바라보기만 했다.
체체는 손가락을 꼼지락, 꼼지락 움직여 화면의 ‘ㅅ’ 자판을 두 번 터치했다.
ㅅ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