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Lucky break
일주일이 지났다.
핸드폰은 원래 그랬던 것처럼 조용해졌다. 그와 헤어진 날로부터 이틀이 지나서야 서원은 끝도 없이 들여보던 핸드폰을 눈에서 떼어낼 수 있었다. 울지 않았고,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신경질을 부리지도 않았다.
대신 그 후로 꼬박 나흘을 앓았다. 나흘이 지나서야 서원은 위염, 열, 약, 그리고 잠으로 가득 찬 침대를 벗어났다. 몸은 많이 나아졌으나 며칠은 계속 죽을 먹어야 했다. 느지막이 일어난 서원은 식탁에 앉아 흰죽에 간장을 뿌리고 있었다.
일주일간 울리지 않던 핸드폰 벨소리가 들렸다. 흰죽을 느리게 섞던 수저가 멈추었다. 멀거니 그릇을 바라보고 있던 서원이 고개를 들었다.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제 핸드폰 벨소리였다.
덜그럭. 수저가 죽 안에 푹 담긴 채로 놓였다. 서원은 방으로 향했다. 그동안 벨소리가 끊겼다.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은 배터리가 적게 남아 있었다. 그는 충전기를 꽂으면서 이불 정리가 되지 않은 침대 위에 앉았다.
부재중 전화, 발신인은 시준호였다.
‘아. 과외.’
기운이 없어 멍한 머릿속 위로 명확한 현실 감각이 떠올랐다. 동시에 문자가 왔다. 이 역시 준호로부터 온 것이었다. 서원은 문자를 확인했다.
[시준호] 쌤 전화 안받내여? 저 한국옴
[시준호] 과외는 낼말구 목욜부터해여 저 존나피곤 ㅇㅋ ?
[시준호] 연우형이 그래도 된데여 ㅇㅋ ?? ㅇㅋㅂㄹ
[시준호] 목욜에 봐여ㅋㅋ 밤말고 2시 ㅇㅋ?ㅇㅋㅂㄹ
[시준호] 저 쌤 선물도 사옴 ㅋㅋ
[시준호] 응숙제는안함~
타이핑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읽는 도중에 연달아 문자가 왔다. 서원은 주르륵 꼬리를 잇는 문자들을 계속해서 읽다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허공을 응시한 눈이 한참을 깜빡였다.
서원이 일어났다. 끼이익, 오래된 매트리스가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 * *
흰 운동화는 주춤거리면서도 계속 나아갔다. 장마를 거친 것도 아닌데 꼭 그런 것처럼 하늘이 맑은 날이었다.
거의 2주 만의 외출인 것 같다. 서원은 공연히 손가락으로 자신이 며칠 만에 집 밖으로 나온 것인지 세어 보면서 주의를 분산시키는 데 애를 썼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못했다. 급기야 흰 운동화가 깨끗하게 굳은 아스팔트 위에 뚝 멈춰 섰다.
‘이게 말이나 되는 상황인가?’
주택가에 멀거니 선 서원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미묘했다. 준호에게 연락이 온 건 월요일. 그리고 화, 수. 이틀 동안 고민한 끝에 결국 자신은 그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무턱대고 모든 것을 무시할 용기도, 그렇다고 준호에게 어떻게든 둘러댈 재간도 없는 탓이었다.
돈이 엮인 일에 책임감 없이 굴 수도 없었고, 게다가 녀석은 ‘연우 형이 그래도 된대요’라고 말했다. 그가 제게 계속 과외를 하라는 잠정적인 의사를 전달한 것이었다. 그게 퍽 잔인하게 느껴졌지만 서원은 그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정확히 말하면 생각하지 않기로 애쓰는 중이었다.
“쌤!”
망설이느라 10분을 늦었다. 서원은 현관문을 열자마자 저를 반기는 준호를 보고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준호는 새까맣게 타 있었고, 키도 자라 있었다. 머리는 언제 자른 건지 짧게 다듬어진 채였다. 그렇게 가기 싫어하더니, 막상 가니 좋았는지 얼굴이 활짝 피었다.
“그새 컸네.”
“얼마나 있었다고 커요. ……음, 좀 컸나?”
준호는 서원의 어깨에 팔을 걸치면서 거들먹거렸다. 서원이 별다른 반응 없이 정말 컸다고 한 번 더 말해 주자 기분이 좋은지 킥킥 웃는다. 준호의 손이 마른 어깨를 주물렀다.
“아니, 그게 아니라 쌤이 말랐네! 갈비뼈 만져지잖아요. 와. 오져. 허리 봐, 존나 볼품없어.”
선생님의 몸을 맘대로 주무르면서 악담을 내뱉는 걸 보니 버릇없는 성격은 여전했다. 평소 같았으면 지적했을 일이었으나 오늘은 그럴 기운이 몸에 남아 있지를 않았다. 서원은 제 뒤에서 조잘거리는 소리를 잠자코 흘려들으며 계단을 올랐다.
준호는 그의 뒤를 쪼르르 따르면서 계속 말했다.
“진짜 쌤 몸 왜 이래요. 완전 말라비틀어져서 한 대 치면 날아갈 것 같아요. 혹시 일부러 살 뺀 건 아니죠? 그런 거면 진짜 별론데. 진짜 존나 하나도 안 멋있……, 아……!”
퍼붓듯 이어지던 놀림 섞인 비난이 일순간 뚝 멈췄다. 허리 부근을 주물럭거리던 손도 마찬가지였다. 불에 덴 것처럼 몸에서 떨어진다. 뭐라도 발견했나 싶어서 서원은 걸음을 멈춰 세웠다. 제 뒤를 따라오던 준호를 돌아본다. 녀석은 아차, 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커다란 실수라도 한 것처럼 당황을 한껏 머금은 채였다.
“왜 그래?”
“……아, 아니에요. 쌤, 미안해요. 내가 한 말 다 취소. 우리 쌤 존나 잘생김. 존나 지림. 아이돌 같음.”
“뭐?”
“쌤 존나 쩐다고요. 와. 다이어트 대성공하셨네. 역시 근성의 한서대생. 명문대답다.”
저건 또 무슨 꿍꿍이인가 싶었다. 서원이 설핏 인상을 찌푸린 채로 준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놈은 시선을 피하듯 서원을 지나쳐 올라갔다. “빨리 수업해요.”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말을 남기고서.
놈의 이상한 태도는 수업 내내 계속되었다. 뭔 말을 해도 고개를 끄덕이지를 않나, 다음에는 숙제를 꼭 하겠다고 말하지를 않나, 심지어 매번 지적해도 고쳐지질 않던, 지우개를 손톱으로 조각조각 뜯어 저 멀리 던지는 짓도 하지 않았다. 요즘 아이들의 신종 괴롭힘 방법인가 싶을 정도로 순종적이었다.
문제는 자신이었다. 꽤 덤덤하게 대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아지는가 싶던 위가 다시 지끈지끈 아프기 시작했다. 아닌 척 신경을 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수업 전, 거실에서 2층으로 올라갈 때 차고와 집 안을 연결하는 중문을 흘끗 확인한 탓이었다. 중문의 젖빛 유리 너머로 형의 검은 차가 보였다.
그 말인즉슨, 형이 집 안에 있다는 뜻이었다.
“…….”
수업이 끝난 뒤 서원은 꽉 닫힌 서재 문을 바라보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준호는 한인 교회에서 만난 여자애 이야기를 하면서 또 쪼르르 서원의 뒤를 따랐다. 이내 서원이 신발장에 다다랐다. 그는 허리를 숙여 스니커즈를 신으면서도, 자꾸 닫힌 서재 문을 흘긋흘긋 바라보았다. 문은 요동도 하지 않았다.
서원이 허리를 폈다. 그리고 신발장 앞까지 따라와 여자애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떠벌리던 준호를 바라보았다.
“준호야, 쌤 갈게.”
“아, 네.”
역시나 순순한 태도. 서원은 재차 낯섦을 느끼며 현관문을 열었다. 그때였다.
“저, 저기, 쌤.”
뒤에서 준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원은 문고리를 쥔 채로 고개만 돌렸다. 준호는 목소리처럼 망설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잠시 후, 달싹이던 입술이 떨어졌다.
“……언제부터, 였어요?”
느닷없는 물음이 흐른다. 녀석답지 않게 못내 진지한 투도 이상했다. 서원은 슬며시 인상을 찌푸리면서 “뭐?” 하고 되물었다. 그 와중에도, 동그란 눈은 또 한 번 준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서재 문을 흘깃 스쳤다. 틈만 나면 신경이 온통 그쪽으로 쏠리고 만다. 중력처럼 불가항력적이었다.
“아, 아니에요.”
“뭔데? 자세히 말해 봐.”
“아니. 진짜 아니에요. 쌤하고 이런 얘기 하려니까 좀 이상하네, 됐어요. 아! 쌤이 이상하다는 건 아니고, 쌤은 정상, 음, 그런 말이 아니라, 그러니까…… 아, 아무튼, 가요! 빨리. 나도 준비하고 나가야 돼.”
횡설수설하던 녀석은 갑자기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버럭 화를 냈다. 힘껏 등을 떠민다. 못내 수선을 떠는 모습에 서원은 “알았어, 알았어.” 하며 현관문을 나섰다.
두꺼운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서원은 홀로 정원을 가로질렀다. 자신과 준호의 목소리가 꽤 소란스러웠을 텐데도 서재 문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까마귀 떼처럼 몰려와 위를 쪼아먹는 것 같았다. ‘그래야 정상이지, 헤어졌는데. 대체 뭘 기대해.’ 그는 또 솟아난 무엇인가를 무참히 죽여버리면서 대문을 열었다.
대문은 나선 얼굴은 무덤덤함을 되찾았다. 꼭 대가처럼, 그만큼 위가 쑤셔 왔다. 서원은 병원에 다시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 * *
의사 선생님이 마카로니 과자는 괜찮다고 했나.
서원은 나무 그릇 안에 가득 담긴 마카로니 과자를 손가락으로 둥글둥글 매만지면서 생각했다. 배가 고픈데, 또 죽 먹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질렸다. 편의점에서 인스턴트 죽을 사 오기는 했으나 막상 치킨집에 앉아 있으려니 기름이 줄줄 흐르는 것들을 먹고 싶었다. 달고, 짭짤하고, 자극적인 것. 맛을 상상하고 있자니 구미가 당긴다.
‘아니야. 당연히 치킨은 안 되겠지. 자살행위일 거야.’ 서원은 옆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양념치킨을 바라보던 눈을 황급히 거두면서 고개를 저었다.
“…….”
……근데 이거 하나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
마침내 자신을 합리화하기에 이른다. 꼬르륵. 뱃속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허기가 느껴졌다. 서원이 홀린 듯 슬쩍 입을 벌렸다. 그대로 과자 하나를 입에 넣으려는 순간이었다.
“안 돼. 넌 이거나 먹어.”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민규가 불쑥 테이블 옆으로 다가왔다. 서원의 손가락 사이에 끼어 있던 과자를 잡아채 낼름 제 입에 넣는다. 툭. 테이블 위로 접시가 놓였다. 먹기 좋은 크기로 잘린 배였다.
“치킨집에서 배도 팔아?”
“아니. 냉장고에 있던 거 그냥 깎아 왔어. 먹어도 되겠지 뭐. 사장님한테 그냥 네가 먹었다고 하면 돼.”
사장님이 너 좋아하거든. 민규는 서원의 맞은편에 앉으면서 장난을 걸듯 속닥거렸다.
“너 대타 끝나고 엄청 아쉬워했어. 자리 만들어 줄 테니까 데리고 오래.”
“생각해 볼게. 치킨집 알바 힘들더라.”
“그치? 나도 맥주 알바가 나은 거 같아. 먹어.”
민규는 배 조각을 포크에 꽂아 서원의 입 앞에 들이밀었다. 서원은 그것을 받아먹었다. 과자나 치킨보다는 덜할 테지만 오랜만에 달고 아삭거리는 것을 먹으니 꽤 만족스러웠다. 서원은 배를 씹으면서 “맛있다.” 했다.
“많이 먹어. 너 엄청 말랐어, 지금. 얼마나 아팠던 거야? 일주일?”
“그냥…….”
아직 입 속에 남은 배 조각을 뺨 안쪽으로 밀어내면서, 서원은 느릿하게 대답했다. 눈이 도록 굴러 테이블을 향했다. 가지런히 누운 속눈썹을 빤히 바라보던 민규가 테이블에 턱을 괴었다.
“별거 아니야. 거의 나았어. ……너는 다리 괜찮아? 다 나은 거지?”
끝내 다갈색 눈동자가 다시 올라와 민규를 바라보았다. 서원은 천연덕스럽게 말을 넘기며 민규에게 물었다.
무덤덤한 얼굴은 수척해 보이기는 했지만 슬픔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았다. 민규는 그 얼굴을 관찰하듯 뚫어져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다 나았지. 이제 다시 축구 안 하려고.”
“그래. 그리고 김경찬 그놈이 너무 막 해, 축구를.”
“그것도 그렇고 술 마신 게 문제야. 막 바닥이 울렁거리더라.”
“하하. 얼마나 마신 거야.”
“진짜 많이 마셨지. 소주 3병? 4병?”
“안주도 거의 안 시키고?”
“응.”
“엄청 많이 마셨네. 대체 술 취한 놈들이 축구는 왜 한 거야.”
“경찬이가 하자고 했어. 정확히 말하면 걔가 도발했어.”
“다음 날 머리는 안 아팠어?”
“……너, 무슨 일 있는 거지?”
공백이 생기기라도 하면 큰일 날 것처럼 꼬리를 물 듯 줄줄이 이어지던 대화가 불현듯 뚝 흐름을 잃은 채로 잘려 나갔다.
애꿎은 테이블을 긁던 손가락이 뚝 멈추었다. 서원은 눈을 크게 뜨고는 의아하다는 듯 민규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놀자는 소리에 망설임 없이 오고…… 지금도 평소보다 말 엄청 많아, 너.”
“…….”
근데, 그게 어떻다고. 서원은 얼떨떨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민규와 최근 들어 부쩍 친해진 건 맞지만 경찬이만큼 오래된 것도 아니었다. 그리 깊은 대화를 나누어 보지도 않았다. 만나면 가벼운 농담이나 흥미로운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그저 재미있는 친구 사이. 그것뿐인데도 민규는 지금 제법 정확히 저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민규는 당황한 듯한 서원의 얼굴을 보고도 침착했다. 턱을 괴던 얼굴을 뒤로 무르며 말한다.
“무슨 일인지 굳이 말 안 해도 돼. 그냥 궁금했어. 미안.”
“아냐, ……미안하긴.”
서원은 테이블에서 손을 떼어내며 중얼거렸다.
잠시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돌연 민규가 커다란 동작으로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배와 함께 가져온 치킨의 닭다리를 집어 들어 서원을 향해 보란 듯 뜯어 먹었다. 눈이 마주치자 짐짓 웃는다.
“맛있겠지? 못 먹어서 어째.”
우적우적 닭의 살을 씹어 먹는 게 영 장난스럽다. 서원은 어설프게 웃으면서 “안 먹어도 되거든.” 했다. 배를 한 조각 집어 입에 넣는다.
“배 깎아 오길 잘했다.”
“…….”
서원이 배를 먹는 것을 바라보며 민규가 말했다. 서원은 과육을 열심히 씹으면서 허벅지에 올려 둔 제 손을 슬그머니 움츠렸다. 꼴깍. 마지막 배 부스러기가 목 뒤로 넘어간다.
그대로 고개가 들렸다. 두 눈이 마주했다. 배를 먹어 번들거리는 입술이 잠시 망설이다가 벌어졌다.
“……민규야.”
호수 위로 톡,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처럼 눈 위로 파동이 일었다. 민규가 그를 발견했을 때, 서원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
“…….”
“헤어진 것 같아.”
며칠째 곱씹고 있는데도, 아직도.
꼭 실감이 나지 않는, 신기한 꿈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몽롱한 목소리였다.
* * *
햇빛이 눈부셨다. 서원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면서 눈을 떴다. 술을 마신 건 아닌데 숙취처럼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어제 새벽 여러 번 토를 한 탓이었다. 치킨집 화장실에서 제 등을 두드렸던 민규의 손길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 뒤로 기억이 없는 것으로 보아 결국 쓰러진 것 같았다.
‘어떻게 집에 온 거지. 민규가 데려왔나.’ 서원은 생각했다. 어떻게 수습했는지는 몰라도, 저 때문에 고생 꽤나 했을 것이었다.
서원은 상체를 일으켜 벽에 등을 기댔다. 손가락 끝까지 기운이 하나도 없었으나 민규에게 전화 한 통은 해야 할 것 같았다. 이불 속을 더듬자 딱딱한 것이 잡혔다. 핸드폰이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액정을 찬찬히 눌렀다. 메신저 앱을 누르니 최근에 나눈 대화가 맨 위에 자리했다. 서원은 부은 눈을 껌뻑거리면서 자는 사이에 와 있던 문자를 확인했다. 오늘 아침 민규에게 온 것이었다.
[이민규] 전화 안와있당 부재중전화 떴을텐데 이상하네
착실도 하다. 서원은 엷게 웃으면서 민규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규가 말하는 ‘전화’라는 것은 그가 녀석에게 걸 전화를 말하는 거였고, ‘부재중 전화’라는 것은 녀석이 그에게 걸었던 전화를 말하는 것이었다.
발단은 어젯밤의 대화였다. 민규는 사귀던 연상의 애인이 사실 남자였다는 서원의 서두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더니 혹시 양평에서 본 그 형이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서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눈을 껌뻑이며 충격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서서히 평온을 되찾았다.
500cc짜리 맥주가 다 비워질 때가 되어서야 서원은 이야기를 마쳤고, 민규는 지나가던 동료 아르바이트 직원에게 생맥주를 한 잔 더 부탁했다. 그리고는 한참 만에 입을 떼어냈다.
‘그 형하고 제대로 대화해 봐야 될 것 같은데?’
‘……뭐?’
‘결국 그 형이 널 좋아하지 않아서, 네가 끝내자고 하고 가버렸다는 거잖아. 그래도 넌 계속 그 형을 좋아하고. 근데 왜 그냥 도망쳤어? 매달리든가, 이참에 그 자식한테 정 떼고 저주 퍼부으면서 거시기를 차 버리든가, 아니면 확실하게 차이든가, 셋 중 하나는 했어야지.’
이렇게 간단히 나올 이야기인가. 당황한 서원이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생맥주가 놓였다. 민규는 맥주를 마시고는 말을 덧붙였다.
‘헤어졌다고 하기에, 네가 너무 어설펐다는 뜻이야. 그 형한테서 대답도 못 들었다며.’
‘한참 기다려도 아무 말도 안 했어. 그게 답이겠지.’
‘말 안 하는 게 어떻게 답이야. 당황했을 수도 있잖아.’
형이 당황했다, 라.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경우였다. 그가 당황한 걸 본 적은 제가 울었을 때밖에 없었다. 그조차 자신이 눈물을 거두면 금방 능글맞게 변하곤 했다. 자신은 한 번도 그가 당황하거나 저처럼 어리바리하게 행동한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한 번도 본 적이 없지. 서원이 생각하는 사이 민규는 말을 이었다.
‘……내가 보기엔 넌 그 형을 찬 게 아니야. 그냥 지레 도망친 거지. 제대로 끝내고 싶으면 밑바닥 다 드러내고 끝내. 그 형 입에서 제대로 헤어지잔 소리가 나오도록 하든지, 아니면 네가 매달려 보든지. 그러고 나면 너도 그 형 떨쳐내기 더 편할 거야. ……근데, 그 형이 그날 이후로 연락 하나 없다고 했지?’
‘응.’
‘음, 이상하네. 왜일까. 대답 안 한 것도 솔직히 이상하고…….’
민규는 고민하는 것처럼 제 턱을 문질렀다. 의아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서원은 포크로 배 표면을 괴롭히면서 ‘이별을 받아들였으니까 그렇겠지.’ 하고 중얼거렸다.
‘뭐, 그럴 수도 있지만……. 원래 그런 자식들은 마지막까지 자기가 나쁜 거 안 하려고 하거든. 마지막까지 실실 웃으면서 조잘조잘 떠들어 대는 게 양아치 특징이야. 근데, 네가 그렇게 화내는 데 그냥 가만히 있었다는 게 이상해. 진짜 이상하단 말이야.’
‘……넌 어떻게 그런 걸 잘 알아?’
‘바람둥이. 양아치. 전형적이잖아. 그런 놈들 세상에 엄청 많아. 딱 하는 것만 들어도…… 아, 됐고, 서원. 일단 지금 전화 걸어 봐.’
초등학생 같은 물음에 급기야 민규는 설명하기를 포기한 사람처럼 손을 휘휘 저었다. 이어지는 급작스러운 제안에 서원은 화들짝 놀랐다. ‘지금?’ 하며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있던 제 핸드폰을 꽉 쥐어 냉큼 숨긴다.
‘안 돼.’
‘못하겠으면 내가 해줄게, 줘 봐.’
‘아니야……. 안 할래.’
민규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자신은 제대로 차일 용기조차 없어서 어설프게 그에게 이별을 고하고, 그대로 도망간 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 없었던 용기가 이제 와서 갑자기 생기지는 않을 터다. 못한다. 서원은 황급히 제 어설펐던 행동에 대해 변명하기 시작했다.
‘김경찬도 이게 맞댔어. 자기 안 좋아하는 사람한테 매달릴 필요 없다고, 헤어질 거면 그냥 쿨하게…….’
‘아, 답답해. 까고 말하자. 김경찬 말 듣지 마. 하나도 도움 안 돼. 걔 모쏠이잖아. 너네 둘 다 그냥 초딩들 같아.’
민규의 말에 입이 다물렸다. 맞는 말, 사실이다. 서원이 붙잡고 있는 제 핸드폰을 공연히 만지작거렸다.
민규는 슬쩍 인상을 찌푸리면서 말을 이었다.
‘봐. 이론으로는 쉽지. 이건 잘못됐고, 그 사람은 잘못한 거니까, 그래, 날 사랑하지 않으니까, 애인이 되기에는 적합하지 않으니까 헤어져야 한다. 헤어지자.’
‘…….’
그의 말투는 꼭 과외 수업 중 준호에게 문제를 설명하는 자신처럼 답답함을 꾹꾹 눌러 참는 듯했다. ‘지금 내가, 문제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시준호보다 답답한가.’ 서원은 어렴풋이 생각했다.
‘근데 그게 돼? 안 되니까 문제인 거고, 세상 사람들이 사랑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거야. 그래서 사랑 노래, 멜로 영화, 멜로 드라마, 연애 소설이 매일매일 나오는 거라고. 너도 지금 그래. 이론처럼 되질 않는데 억지로 헤어졌다 하고 있으니까 혼란스러운 거야. 은연중에 기대감 갖고 있잖아, 너. 그러니까 이별도 제대로 못 받아들이고, 실감 못 해서 울음도 안 나오는 거 아니야. 현실 부정. 그냥 서서히 괜찮아질 것 같지? 아니. 그거 나중에 빵 터진다.’
‘…….’
‘그때 가서 후회하면 너무 늦어. 지금 확실히 끝내든지 하는 게 나아. 나중에 가장 후회스러운 게 바로 지금 네가 하는 거, 겁먹어서 내빼는 거야.’
‘…….’
‘상처받을까 봐 무서운 거, 알아. 근데 그게 필요할 때가 있어. 내가 보기에 지금 네가 그래. 너 그 형한테 집착하고 있잖아. 처참하게 차이든, 진짜 기적처럼 네가 먼저 그 형한테 정내미가 떨어져서 확 차버리든, 아무튼 진짜 끝내면 그때 확실히 위로해 줄게. 술이든 고기든 다 사 줄게. 잘생긴 형님들이나 예쁜 누나들, 내가 다 찾아와서 만족할 때까지 소개해 줄게.’
내뱉는 족족 다 맞는 말이었다.
두서가 안 맞는 이별이기는 했다. 어떻게, 그는 자신을 좋아하지 않고 자신은 그를 좋아하는데 제가 그를 찰 수가 있을까. 좋아하는 사람은 늘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주도권이라는 건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나 있는 것이었다.
자신은 그를 찰 수 없다. 그와 헤어지는 방법은 확실하게 버림을 받거나, 아니면 지금처럼 현실로부터 도망쳐서 혼자 천천히 이별을 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자신이 한 건 후자였고, 민규는 제게 그것이 나중에 더 상처가 될 거라고 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연애에 대해 잘 아는 걸까. 서원은 문득 놀라웠다. 매일 여자친구와 쪽쪽거리고, 술이나 마시러 다니고 사람들만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녀석은 의외로 어른스러운 구석이 다분했다. 사실 민규는 빠른년생이라 저와 경찬보다 한 살이 어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규가 셋 중 가장 어른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민규야. 너 멋있다.’
‘그래?’
‘어. 다영이가 널 왜 좋아하는지 알 것 같다.’
그의 말을 잠자코 되새기며 이해하던 서원이 문득 순수하게 감탄하자 민규가 웃었다.
‘아냐. 나도 내 연애할 때는 안 이래. 나도 완전 쑥맥이야.’
‘……그래? 안 그럴 것 같은데.’
‘자기 연애 능숙하게 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걸.’
‘많잖아.’
서원은 그렇게 대답하면서 자연스레 시연우를 떠올렸고, 민규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건 다 가짜니까.’
가짜. 서원이 그 단어를 영어 단어처럼 곱씹었다.
민규는 한 번 더 물었다.
‘서원. 전화는 못 하겠어? 강요 안 할게. 난 그냥 네가 그랬으면 좋겠다는 거야. 한 번이라도 침착한 상태에서 대화 제대로 해 봐.’
‘……지금은 못 하겠어.’
‘알았어. 아오, 답답이.’
겁쟁이. 쫄보.
민규가 밉지 않은 어투로 서원을 놀렸다.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한 말이어서, 서원은 발끈할 이유조차 못 느꼈다. 자신은 겁쟁이에 쫄보가 맞았다.
그에 대한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그로부터 30분 뒤, 민규는 맥주를 한 잔 더 비웠고 배를 다 먹은 서원은 깨작깨작 마카로니 과자를 먹기 시작했다. 취기가 돈 민규는 서원을 말리지 않았다. 대신 갑작스럽게 제안했다. 목소리가 조금 커진 채였다.
‘그럼 내가 전화해 볼까?’
‘뭘?’
방금까지 김경찬의 근거 없는 운동 자부심에 대해 말하고 있던 참이라 영 뜬금없었다. 서원은 과자를 씹다 말고 물었다.
‘그 자식한테 말이야. 전화, 내가 해 볼까? 어차피 모르는 번호잖아.’
‘어차피 대화해야 할 건 나인데, 뭐.’
‘……그게 아니라, 사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너한테 연락 안 하는 게 이상하단 말이야. 그 자식이 납치당하지 않는 이상에야 이렇게 끝낼 리가 없다고. 그 양아치가.’
그게 대체 뭐가 이상할 부분인 걸까. 서원이 영 요령 없는 머리를 열심히 굴리려는 찰나, 쾅, 민규가 결정했다는 듯 책상을 때렸다. 그리곤 서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줘 봐. 한 번만 전화해 보자.’
‘전화해서 뭐라고 하게?’
‘진짜 단순하게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 궁금해서 그래. 목소리만 듣고 전화 잘못 걸었습니다, 하고 끊을 거야.’
‘……진짜지?’
‘응.’
민규가 왜 전화를 거는 것인지 솔직히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아무 말도 안 할 것이라면 상관없었다. 무엇보다 녀석이 보기보다 굉장히 끈질겼고, 기분 나쁜 장난을 할 녀석도 아니었다.
망설이던 서원이 기어이 제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의 전화번호를 서둘러 베낀 민규가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귀 옆에 핸드폰을 대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떼어냈다. 의아한 표정이었다.
‘전원이 꺼져 있다는데?’
‘……할 일이 많은가 봐.’
‘이런 적 있었어? 전원 꺼져 있던 적.’
한 번도 없었다. 서원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민규는 수사를 하는 형사처럼 고개를 사선으로 기울이며 또 한 번 물었다.
‘과외 할 때, 집에는 있었다고 했지?’
‘응.’
씁. 수상하다는 듯 입술을 꾹 누르며 고개를 느리게 가로젓던 민규가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두었다.
‘에라, 모르겠다. 부재중 전화 뜨면 전화하겠지. 아니면 문자라도.’
‘……응.’
‘내일 만약에 전화나 문자 오면 알려줄게.’
‘어차피 나도 전화해야 한다며.’
‘너는 일주일 지나도 할까 말까 할 것 같아서. 겁만 많아서는.’
녀석의 장난기 가득한 핀잔, 거기까지가 정상적인 기억의 끝이었다.
그 이후 갑자기 위에서 더부룩함이 느껴졌고 명치가 요동치는 감각에 금방이라도 토를 쏟아낼 것 같아 화장실로 달려갔다. 뒤따라온 민규는 등을 두드려 주었다. 자신은 여러 번 토했고, 어느 순간 기절했다.
「서원. 몸 괜찮아? 너 어제 엄청 토했잖아.」
술을 마시지 않은 자신은 기억한다 치더라도, 말미의 녀석은 꽤 취한 상태라 기억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그도 아닌 모양이었다. 민규는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서원에게 물었다. 서원은 머쓱하게 웃는 소리를 내면서 “응. 괜찮아. 미안해.” 했다.
「뭐가 미안해. 너 과자 먹는 거 말릴걸. 나도 취해서 정신이 없었다.」
“아니야. 내가 미련한 건데, 뭐. 솔직히 몇 개 정도는 괜찮을 줄 알았는데.”
「먹을 거 조심해라. 너 기절해서 진짜 놀랐다. 네 동생이 와서 데려갔어.」
“재원이?”
「응.」
재원과는 그날 이후로 대화를 하고 있지 않았다. 서원은 공연히 목덜미를 매만지면서 “그렇구나.” 했다.
「아무튼, 그놈한테는 이제 전화 안 할게. 지금쯤이면 핸드폰 켜고도 남을 시간 아닌가? 진짜 이상하네. 모르는 전화는 무시하나?」
“내 전화인 거 눈치채고 안 하는 걸 수도 있잖아.”
「뭐어, 그럴 수도 있지만. 내 생각으로는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어.」
민규는 정말 이상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야기로만 들은 사람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걸까. 서원은 확신하는 태도의 민규가 못내 신기하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아, 애매하게 “그래?” 하고 말았다.
곧이어 인사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서원은 생각을 멈추고 다시 누웠다.
햇빛을 받아 밝은 갈색을 띤 머리통이 이불 안으로 숨어들었다.
* * *
비록 책상 서랍 안에 처박혔다 하더라도 초침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마는 시계처럼, 서원의 현실도 그러했다. 아무리 이불 안에 들어가 숨어 보았자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금요일 내내 이불 속에서 웅크려 폭면을 취한 서원은 기어이 토요일의 오전을 맞닥뜨렸다. 그는 천천히 침대를 벗어났다. 과외를 갈 준비를 해야 했다.
여전히 멍한 기분. 여전히 단절된 생각들과 추측들. 그리고 여전히 조용한 핸드폰. 다를 건 없었다. 서원은 민규가 했던 제안을 다시 생각하면서 버스에 올랐다. 지나치는 풍경을 보는 눈이 느리게 깜빡거렸다. 살짝 벌어진 입술은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마치 냉동된 인간 같은 표정이었다.
“쌤, 맞다. 선물. 내가 목요일 날 선물 안 줬죠? 깜빡했어. 잠깐 기다려 봐요. 갖고 올게요.”
과외는 무난했다. 준호는 목요일과 비슷한 태도를 보였다. 총체적으로 얌전했다. 날라리 같은 말투는 여전하나 예전과 비교하면 사근사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선물까지 챙겨 주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저와 친해졌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 수도 있겠다고 서원은 짐작했다. 그리고 기다리라는 준호의 말에 현관문을 나서려던 발을 멈추었다. 준호는 우당탕 소리를 내며 계단을 올랐다.
2층으로 올라가는 준호의 뒷모습을 보던 서원은, 그 모습이 다 없어졌을 때 천천히 걸음을 옮겨 거실 소파에 앉았다.
“…….”
뻣뻣이 선 목은 고집스레 정면을 향하고 있었다. 서원은 의식적으로 차고로 향하는 중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있었다. 그가 지금 집에 있는지 없는지 알게 된다면 또 마음이 어지러워질 것 같은 까닭이었다. 그래서 들어올 때도 일부러 중문 쪽을 보지 않았고, 조금 전 나가려고 할 때도 그랬다.
잠시 후 계단을 내려오는 어수선한 발소리가 들렸다. 서원은 그대로 일어나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빠르게 내려온 준호는 저를 기다리고 선 서원에게 “잠깐 기다려 봐요, 쌤. 방에 없네. 욕실에 있나?” 하며 그를 스쳐 지나갔다. 서원은 저를 스치는 준호의 모습을 좇다가, 흘긋, 바로 옆에 자리한 중문으로 시선을 던지고 말았다.
실수로 제 앞에 스쳐버린 그 시야. 젖빛 유리로 보이는 차고 안에는 분명 검은 차의 실루엣이 있었다. 스치듯 보았을 뿐인데 그새 그걸 또 확인해버리고 만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긴장하다가 도리어 다리가 굳어 넘어져 버린 아이와 같은 꼴이었다. 서원은 기어이 울며 겨자 먹는다는 심정으로 제대로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 차고 안 검은 차. 확실히 있었다.
형은 집 안에 있다.
‘민규가 틀린 것 같아.’
비로소 서원은 그런 생각을 했다. 민규는 그가 제 연락을 무시할 리 없다고 확신했지만 아니다. 당장 지금 같은 집 안에 있는데도, 그는 서재 안에 꼭꼭 숨어 얼굴 하나 비추지 않고 있었다.
서원이 느리게 몸을 돌렸다. 동시에 준호가 욕실 문을 닫으며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준호는 사각형의 넓적한 박스를 가지고 나왔다.
“쌤, 여기. 선물. 내가 그새 욕실에다 넣어 놨었나 봐요. 완전 병신 짓 했네.”
빠른 속도로 서원에게 다가오더니 불쑥 박스를 내민다. 서원이 들고 있던 지갑을 주머니에 넣으면서 두 손으로 들자 준호는 “아, 어디 넣어 줄게요.” 하며 부엌으로 걸어갔다. 부엌 선반을 뒤진다. 쇼핑백이라도 찾으려는 모양이었다.
“아, 몰라요! 그냥 여기에 넣어 가요.”
하지만 의욕과 달리 참을성은 얼마 가지 못했다. 마구 선반을 헤집던 준호가 기어코 싫증을 내면서 식탁 위에 구겨져 있던 검은 비닐봉지를 집었다. 봉지에는 족발집 로고가 박혀 있었다. ‘족발이라니.’ 서원은 조금 의아해하면서 박스를 비닐봉지에 넣었다.
“고마워.”
“내가 뭐 샀게요.”
“그냥 네모 박스라 모르겠는데.”
“에이. 아, 그래. 여기서 뜯어 봐요.”
준호는 생색낼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것인지 한껏 들뜬 얼굴로 서원의 팔을 잡고 소파로 끌었다. 그를 따라 소파에 앉은 서원이 허벅지 위에 박스를 올렸다. 가게에서 해준 듯한 고급스러운 선물 포장을 뜯으니 동그랗고 알록달록한, 야구공 크기의 입욕제들이 연회색 구김지 위에 올라가 있었다.
“…….”
“어때요. 이거 향 쩔어요. 면세점에 살 만한 게 이거밖에 없었던 건 아니고요. 아무튼 어때요? 좋죠? 나 존나 착하죠?”
멀지 않은 과거가 벼락처럼 내리쳐 온몸을 휩쓰는 듯했다. 분홍색 물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고, 라벤더 향기가 코를 스치고, 연보라색과 파란색이 섞인 거품의 폭신폭신한 촉감이 손 위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심지어는 등 뒤에서 느껴지던, 그 딱딱하고도 다정한 몸과 손길, 또 목소리까지도.
“…….”
돌연 눈가가 뜨거워진 건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서원은 눈물을 꾹꾹 내리누르기 위해 필사적으로 현재의 상황을 제게 상기시켰다. 너 여기서 울면 미친 거야. 웃긴 거야. 일주일 내내, 거의 이 주가 가까워지도록 안 울었으면서 갑자기 왜 그래. 강서원. 정신 차려. 엄한 데에서 청승 떨지 마.
“……쌤? 이거 별로예요?”
가만히 박스 안을 내려다보는 서원이 이상했는지, 준호는 툭, 그의 팔을 치며 물었다. 서원은 급히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는 공연히 웃었다. 저를 다그치는 것이 그래도 효과가 있었는지 눈물이 금세 쏙 들어갔다.
“……그게 아니라, 우리 집에 욕조가 없어서 어떡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어. 나도 써 보고는 싶은데……. 어디 여행 가서 써야겠다. 고마워.”
“엥, 욕조가 없다고요?……. 아니, 뭐, 그럼 우리 집에서 쓰면 되잖아요.”
“내가 왜 너네 집에서 목욕을 해.”
아무리 친해졌다고 생각해도, 그건 너무 간 거 아닌가. 서원은 급작스레 비약적인 말을 하는 준호가 귀엽기도, 또 어이없기도 해서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나 준호는 웃지 않았다. 도리어 서원의 반응이 이상하다는 듯 눈썹을 구겼다.
“뭐야. 내숭이에요?”
“……어?”
“왜 이래요. 나도 알 거 다 아는데. 설마 쌤이 우리 집에서 목욕 하나 안 했을까. 나 없을 때.”
“…….”
뚱딴지같은 이야기가 쉼 없이 이어졌다. 도무지 따라가지 못하겠다. 서원은 준호의 말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웃었던 탓에 살짝 벌어진 입 그대로 눈을 깜빡인다.
“……대체 무슨 말인지…….”
“됐어요. 그런 거 말하기 싫으면 말아요. 허, 참. 웃겨. 내숭 떨 거면 제대로 떨든지. 그제부터 서재 문은 계속 흘끗흘끗 훔쳐봤으면서.”
이해하지 못해 결국 어중간한 목소리로 말꼬리를 흐리자, 준호는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면서 벌떡 소파에서 일어났다. 쿵, 쿵, 쿵, 쿵, 거침없이 서재 앞으로 걸어간다. 화들짝 놀란 서원이 엉거주춤 일어섰다. 별안간 어지럽고, 이해하지 못하겠는 말들과 상황이 빨리감기가 눌린 비디오처럼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지금, 무, 무슨 말 하는……,”
“그렇게 쳐다만 보면 나와요?”
준호는 못내 불만스럽다는 듯 꿍얼거리며 문고리를 잡았다. 빠르게 뛰던 심장이 기어이 미친 듯이 요동을 친다. 서원이 눈을 크게 떴다.
“무슨……!”
“보고 싶은 티는 팍팍 내면서. 네까짓 게 어른의 연애는 몰라도 된다 이거야?”
그는 팔을 뻗으며 걸음을 한 발자국 내디뎠다. 갑작스럽고 파격적인 상황이 차라리 꿈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대체, 대체 이게 뭐지. 준호가 무슨 말을 했던 거지. 왜 갑자기 문을. 뭐야. 물음표가 머릿속에서 팍팍 연달아 터지면서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준호는 멈추지 않았다. 태연하고, 일상적으로, “염병. 나도 반년만 지나면 성인이거든요?” 한다.
덜커덕.
문고리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또 망설임 없는 속도로 문이 젖혀졌다. 그 꿍얼거림과 찰나의 동작은 순식간이었으나 서원에게는 느리게 지나갔다. 가슴을 두드리던 심장은 기어코 쿵,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서원은 공포에 질린 사람처럼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안 돼.
“쌤, 뭐 해요. 들어와요.”
태연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서원은 슬며시 눈을 떴다.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눈을 뜨자 서재 안으로 들어가는 준호의 뒷모습이 보였다.
“…….”
서재 안은 비어 있었다. 서원은 당황한 얼굴 그대로 주춤주춤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준호는 무엇을 찾는 듯 그의 책상 서랍을 뒤지고 있었다. 책상 서랍에 가려진 녀석이 “어딨더라.”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는 동안, 서원은 방 한가운데에 서서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벙찐 얼굴을 했다. 상황 파악이 되지를 않는 탓이었다. 준호는 서랍을 뒤지다 말고 흘긋 서원을 보았다.
“왜 그런 표정이에요? 형 여기 있는 줄 알았어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겠어.”
“무슨 상황이기는……, 어, 여기 있다. 쌤, 여기요.”
준호가 찾던 걸 발견한 듯 말을 멈추고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서원을 향해 구겨진 종이를 내밀었다.
서원은 그에게 다가가 그것을 받아 들었다. 구겨진 종이는 명세서 봉투였다. 꽤 오래전 것인지 누렇게 삭은 종이 위 잉크가 바래 있었다.
“다른 거 필요 없고, 이것만 봐요.”
서원은 준호의 손가락 끝을 따랐다. ‘[받는 이] 시우환’까지 읽었을 때, 녀석은 성질을 부리며 “아니, 여기 보라고요.” 하며 손가락을 슬쩍 밑으로 옮겼다.
주소.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형 지금 거기 있어요. 찾아갈 거면 찾아가요. 맨날 진단받는 건 아닐 테니까. 아, 전화를 못 거는구나.”
주소를 읽던 서원이 고개를 들었다. 의아한 눈으로 준호를 본다. 준호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설명을 덧붙였다.
“하동. 우리 할아버지 집이에요. 이제 2주 다 되어 가죠?”
“……왜?”
“네?”
“왜 여기 있는데?”
“엥. 정말 몰라요, 쌤?”
진심이냐는 듯한 어조에 서원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쌤은 형 어디 있는 줄 알았는데요? 헉. 그 새끼 일부러 숨겼나? 시발, 좆됐다. 쌤, 시연우한테 내가 말했다고 하면 안 돼요. 아니, 이런 말 해줄 사람 나밖에 없잖아. 씨발. 아, 몰라. 못 들은 걸로…….”
“준호야.”
점점 이상한 불안감이 몰려오고 있었다. 서원은 수선스럽게 구는 준호의 팔을 꽉 잡고선 그의 말을 잘랐다. 제 머리를 마구잡이로 흩뜨리던 준호가 동작을 멈추고 서원을 바라보았다. 서원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형, 지금 거기 가서 뭐 하고 있어?”
“…….”
“말해 줘.”
준호는 에라 모르겠다, 싶은 심정으로 말했다.
“……정신 진단.”
“…….”
정신 진단?……. 긴장으로 희게 질린 머릿속 위로 그 말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서원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준호는 제 머리를 한 번 더 흩뜨렸다. 귀찮게 되었다는 듯 인상을 슬며시 찌푸린다.
“할아버지한테 게이라고, 쌤이랑 결혼할 거라고 했다면서요. ……그래서 그럴걸요?”
“…….”
“시연우, 정신 진단 먼저 받는다고 들었어요.”
조금 전, 준호가 문을 열었을 때 떨어졌던 심장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그것이 경련을 일으키는 것처럼 파르르 떨었다. 더 남아날 것도 없다는 듯, 아주 미세하고 끈질기게.
* * *
해질녘의 햇빛은 강하다 못해 맹렬했다. 시연우는 저택 문을 나섰다. 그는 가벼운 소재의 베이지색 슬랙스와 나풀거리는 인디고 블루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늘씬한 발목 아래에 자리한 발은 옷과는 어울리지 않게 허름한 슬리퍼를 질질 끌었다. 기다란 그림자가 그의 뒤를 따랐다.
“씨발. 진짜 좆같은 노인네.”
오렌지색 빛이 눈을 파고든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짓이기듯 욕을 내뱉었다. 들고나온 태블릿 PC를 겨드랑이 아래에 끼우고는 주머니를 뒤적거린다. 꺼내 든 건 담뱃갑이었다.
저택에 갇힐 줄은 몰랐지만, 정신 진단을 시킬 것은 예상했었다. 평생 제가 아는 게 다 옳다고 믿으며 살아온 늙은 영감이 그런 걸 안 하는 게 더 이상했다. 며칠이 지나는지도 모른 채 노인과 친한 수많은 정신과 박사들에게 시달렸고, 심지어는 신학대 교수들도 집으로 찾아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성수라도 뿌려 보자고 비아냥거리다 교수들 앞에서 뺨을 맞았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에게 정신병자 취급을 받으며 노골적인 질문을 받아내야 했다. 어느 누군가는 저를 보균자 취급하기도 했다. 대놓고는 아니었지만 손끝조차 닿지 않으려고 신경 쓰는 게 눈에 보였다. 치욕스럽기는 했지만 연우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런 치욕을 누군가가 반드시 당해야 한다면, 강서원이 아닌 자신이어야 했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일까지 시키는 건 너무 하지 않나. 소도 아니고.’
시연우는 투덜거리면서 풍성한 잎사귀들을 지났다. 길게 늘어진 가지들이 그의 머리를 툭툭 치면서 지나갔다. 그는 몇 시간 자지 못해서 지끈거리는 눈두덩을 꾹꾹 누르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까슬해진 입술에 장초가 가볍게 물렸다. 입가에 머무르던 손이 턱을 매만졌다.
거칠거칠했다. 조심스럽게 면도를 해주던 그 얼굴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아침 햇살. 예쁘고 말간 얼굴. 열중한 눈동자. 따뜻한 냄새. 특유의 고요한 분위기. ‘보고 싶다.’ 그는 생각하면서 털썩, 버드나무 밑 벤치에 앉았다. 입술 사이로 하얀 연기가 탁하게 퍼졌지만 녀석의 잔상은 흐릿해지지 못했다. 도리어 더 선명해지는 듯하다.
“참 아이러니하네…….”
시연우는 태블릿 펜슬로 이제 누구 것인지도 모르겠는 논문을 첨삭하면서 중얼거렸다. 펜슬 끝이 시원하고 거침없이 액정을 긁었다. 이윽고 담배가 입술 끝에 매달려 흔들리다가 툭, 재를 털어냈다.
제 말대로였다. 아이러니했다. 모든 일이 꼬리를 물고 무니 아이러니한 상황에 도달했다. 강서원을 갖고 싶어서, 지금 당장 강서원을 보지 못하고 있는 상황. 제가 지금 그랬다.
시초는 깨달음이었다. 강서원은 절대 제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할 것이라는 걸 어느 순간부터 깨달았다. 문제는, 그에 욕심을 내면 조급해지는 건 자신이었고, 제가 조급해지면 결국 상처받는 건 강서원이었다.
더 이상 울리기는 싫었다. 이 악순환을 끊어야 했다. 그렇다고 현명한 어른처럼 현실을 좇을 수가 없었다. 녀석을 대하는 자신은 결코 어른이 될 수가 없다. 무조건 강서원을 가지고 싶었다. 어린아이 같은 욕심이었지만 그랬다.
결혼.
그러니까, 자신은 어떻게든 강서원과 결혼하고 싶었다.
‘싫어? 서원이 형이랑 시연우가 징그러운 호모 새끼라 네 성에 안 차?’
‘……아니.’
두 번째 문제는 곧바로 들이닥쳤다. 강서원이 시준우에게 모욕을 당했다는 걸 알았을 때였다.
강서원이 누군가에게 그런 취급을 당하는 일은 다시 없어야 했다. 차라리 제가 다 감당하고 마는 게 나았다.
막무가내로 녀석을 데려가 소개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서원 몰래 길을 터야 했다. 처음 하동으로 내려와 말했을 때, 날아온 백과사전에 맞아 관자놀이가 찢어진 것은 잘 숨겼다. 외가에 허락을 받으러 미국에 갔던 것도 대강 둘러댔다. 거기까진 퍽 순조로웠다.
정밀 진단은 미국에서 돌아온 날부터 시작이었다. 강서원을 만나 대충 둘러댄 뒤 하동으로 내려갈 작정이었다. 어차피 진단이든 뭐든 다 화풀이에 불과하니까, 얼마든지 조부의 화풀이를 다 받아내기만 하면 되었다.
그리고 서울에 올라오는 날 프러포즈. 나름대로 착실한 계획이었다.
단 하나, 계획에 어긋났던 것이 커다란 문제라면 문제였다.
‘난 형 애인이 되고 싶었어요. 장난감이 아니라.’
그렇게 화를 낼 줄은.
그렇게 생각이 닿을 줄은.
그 말에, 자신이 울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줄은.
‘…….’
할 말이야 많았다. 애당초 강서원의 말은 틀렸다. 녀석을 장난감처럼 생각했기 때문에 위치추적을 한 게 아니었다. 지키고 싶어서 그랬다. 그러니까 그대로 말했으면 되는 일이었다. 우리 할아버지가 내가 모르는 사이 널 찾아갈까 봐, 그리고 널 설득해버릴까 봐, 혹은 협박이라도 해버릴까 봐 무서워서 그랬다고. 그렇게 말했어야 했다. 그게 사실이니까. 강서원은 오해를 하고 있었으니까.
근데, 말이 안 나왔다.
‘그게 안 되면, 끝낼 수밖에 없어요.’
그 말을 하는 강서원의 얼굴 때문이었다.
연우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강서원의 마음은 저가 지켜야 할 만큼 그렇게 어리지도, 여리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제 해명도 그다지 큰 효력을 발휘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어쨌든 자신이 강서원을 온전한 애인처럼 여기지 않았던 건 맞으니까. 자신은, 녀석을 지켜야 할 소유물처럼 다루고 있었으니까.
자신이 종종 서원에게 불렀던 그 애칭처럼, 연애를 ‘애기’처럼 하고 있던 건 사실 녀석이 아닌 자신이었으니까.
“……하아…….”
연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떠올리기만 했을 뿐인데, 심장이 펄펄 끓는 듯했다. 녀석과의 연애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스스로가 얼마나 바보 같은지를 상기하게 만들었다. 펜슬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머리를 환기시키듯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어쨌든, 나가서 사과부터 하자.’ 그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생각했다. 이내 톡톡, 다시 재떨이 위로 담뱃재가 털렸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버드나무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재떨이에서 다시 액정으로 향하려던 시선이 멈추었다. 연우는 어느새 길게 자란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그리고 두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한 담장을 빤히 바라보았다. 저택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이었다.
“…….”
담장 아래에는 풀이 무성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조용했다. ‘그냥 바람 소리였나. 그러기에는 컸는데.’ 연우는 고개를 기울였다. 시선을 거두려는 순간 다시 한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마침내 그는 태블릿 PC를 내려놓고 일어났다. 물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짓이기며 걸음을 옮겼다.
담장은 높기도 했지만, 또 바깥과 지반의 높이 차이가 컸다. 누군가가 담장 앞에 서 있다면 정수리만 간신히 보일 터였는데, 그조차 지금은 풀에 가려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다 해도 사실 사람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저택 주변 환경을 고려하면 고양이일 가능성이 높다. ‘치즈색 고양이면 좋겠다.’ 연우는 얄팍한 기대감을 품으면서 소리가 난 담장 쪽으로 걸어갔다.
담장 앞에 다다른 그가 무릎을 굽혀 몸을 숙였다. 커다란 손이 풀을 한껏 옆으로 거두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바람 소리와 함께 섞였다. 비로소 담장 밑 공간이 보였다. 그리고, 그 사이로 누군가의 정수리가 보였다.
사람이다.
고양이가 아니라는 실망감을 느낄 새도 없었다. 연우는 황급히 일어서서 담장 턱에 발을 딛고 섰다. 곧이어 몸이 담장에 매달렸다. 그는 고개를 숙여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
햇빛을 받아 갈색으로 물든 머리통이 수직으로 보였다.
연우는 놀란 얼굴 그대로 가까스로 입술을 벌렸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서원.”
“…….”
“서원아.”
목소리가 또렷하게 커졌다.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담장 주변을 하염없이 서성이던 걸음이 뚝 멈추었다.
연우는 다시 한번 목소리를 냈다.
“서원아, 여기. 위. 위에 봐.”
곧바로 얼굴이 들렸다.
“…….”
“…….”
위에서 아래. 아래서 위. 시선이 간신히 맞닿았다.
커진 눈망울이 깜빡이는 순간, 쏴아아―, 바람이 나무와 부대끼는 소리를 불었다. 갈색 머리칼이 흩날렸다. 연우는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돌연 성급한 목소리로 “거기 그대로 있어.” 했다.
기다란 몸이 훌쩍, 담장에서 떨어져 착지했다. 허름한 슬리퍼가 나무 사이를 힘껏 내달렸다.
* * *
먼발치에서부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흙바닥을 찧는 발이 꼭 심장을 꾹꾹 짓이기는 것 같았다. 서원은 제게로 달려오는 연우를 바라보면서 손가락을 움칠움칠 떨었다. 저도 그에게로 걸어가고 싶었다.
마침내 연우가 제 말대로 그대로 있던 서원의 앞에 멈춰 섰다. 거리에 비해 빠르게 왔다 싶더니 안에서 여기까지 쉴 새 없이 달려온 모양이었다. 그는 거칠게 헐떡였다. 늘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던 검은 생머리도 바람에 날려 헝클어져 있었다.
“하, 하아…….”
연우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숨을 고르는 동안 서원은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한 걸음 앞에서 본 형의 모습은, 엉망이었다. 머리뿐만이 아니었다. 낯설 정도로 후줄근한 차림새는 둘째치고 살이 많이 빠져 있었다. 며칠 잠을 이루지 못한 사람처럼 눈가도 퀭했다. 살아 있는 건 눈빛뿐이었다.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막연한 미안함. 막연한 걱정. 막연한 원망. 막연한, 애정. 무엇부터 표현해야 할지, 무엇 때문에 바보처럼 울음이 나오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진짜, 아무것도 모르겠다. 이런 게 정말 민규가 말했던 그런 사랑, 연애라면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정도로 제게는 버겁고 어려웠다.
그 사이, 숨을 마저 정돈한 연우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성큼성큼 서원에게 다가갔다. 갑작스러운 밀착에 놀란 서원이 무어라 반응할 새도 없이 허리를 안아 온다. 목덜미를 감싸 쥐는 손바닥이 부드러웠다. 입술이 거침없는 속도로 다가왔다.
“흡……, 으…….”
꺼칠한 입술과 말랑한 혀가 느껴졌다. 동시에, 서원이 버튼이 눌린 곰돌이 인형처럼 팡,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남자는 급하지 않았다. 도리어 침착하고 조심스러웠다. 입술 끝과 목에 달라붙은 손가락이 덜덜 떨리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마치 하나뿐인, 그리고 황홀한 무엇인가를 음미하는 미식가처럼 그는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 마음이 입술 위로, 닿은 살 위로 쏟아내려 적나라하게 느껴져서 자꾸 가슴을 저미게 했다. 눈물이 쉴 틈 없이 났다.
“……하아, 씨발, 미안.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섬세한 키스가 이어지던 중이었다. 연우는 갑자기 입술을 떼어내더니 급하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미련이 남은 손가락은 계속 서원의 목을 쓰다듬고 있었다. 서원은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내저으며 훌쩍거렸다.
“……왜 그래. 왜 울어. 누가 또 괴롭혔어? ……아니면, 형 때문이야?”
두 이마가 맞닿았다. 남자가 뺨을 연신 닦아 주며 이것저것 묻자 아이는 다시 한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그를 꼭 안아 넓은 품에 파고들었다.
“……나 때, 나 때문에…….”
“…….”
젖은 목소리. 온화한 숨. 그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자 가까스로 억눌렀던 욕망이 돌연 펑, 터지듯 팽창했다. ‘존나게 건강한 새끼.’ 그는 스스로를 비난하며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그리고 아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서원의 발이 허공 중에 떴다. 연우는 서원을 어깨에 걸머진 그대로 비교적 가까운 대문 대신 후문을 향해 걸어갔다. 후문 쪽에 있는 감시 카메라는 고장 난 지 오래였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남자의 발이 도착한 곳은 저택보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 위치한 창고였다. 아니, 창고였던 곳이다. 연우는 이곳을 한 번도 제 발로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자신조차 어렸을 때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던 이곳은 어린 동생들이 아지트처럼 드나들었던 곳이었다.
그래서 이 허름하고 낡은 곳을 부수려 하지도 않았고, 조부에게 존재에 대해 말을 꺼낸 적도 없었다. 놈들에게도 모르는 척했다. 제가 모르는 놈들만의 공간이 하나쯤은 있어도 좋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놈들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더 이상 이곳을 찾지 않았다. 덩달아 저도 잊고 있던 곳이었다.
‘내가 여길 올 줄이야.’ 연우는 생각하면서 창고 문을 닫았다. 창문이 하나뿐인 창고 안은 어두웠다. 해가 지고 있는 탓이었다. 주황빛으로 물든 하늘은 어느새 가물가물 색을 흐리며 밤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서원은 창문 옆, 그나마 깨끗한 박스 위에 내려졌다. 울음을 멈추지 못한 채였다. 연우가 서원의 앞에 앉았다. 곧이어 말랑한 손이 남자의 팔을 붙잡듯 꾹 쥐었다.
“미안해요, 형, 나는 형이, 형 못 믿고, 흑, ……나야말로, 나야말로, 맨날, 끅, 혼자 생각하고, 형 못 믿고…….”
“괜찮아. 왜 미안해. 울지 마. 응?”
“난, 멍청하게, ……형 걱정도 안 하고, 그냥 형이, 형이……, 아, 응……!”
자신도 참 질기다 싶었다. 빨갛게 물든 코와 젖은 눈. 울망거리는 눈동자를 보니 더 이상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심장이 왈칵왈칵 욕망을 내뱉었다. 서원을 달래던 연우는 급기야 헐떡이는 입술을 황급히 물어버리고 말았다.
혀가 섞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입술이 떨어졌다. 떨어뜨린 것 역시 연우였다. 연우는 조금 전처럼 급하게 중얼거렸다.
“씹……. 미안, 너한테 그런 거 아니야. 서원아, 미안, 아……, 씨발.”
화산처럼 터지는 욕망을 억누르려고 해도 도무지 두 번은 되질 않는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주체할 수 없는 흥분에 못 이겨 기어코 욕설을 내뱉고 말자 강서원이 젖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바라본다. 그 눈조차 미치게 한다. 성기가 한껏 부풀어 바지를 조였다.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연우는 기어이 미간을 찌푸린 채로 더듬거리며 슬랙스의 버클을 내렸다. ‘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 그는 서원에게 했던 말을 거듭 생각하면서도 몸을 주체하지 못했다. 곧이어 흉기처럼 커진 성기가 드러났다. 큼지막한 손이 그것을 한꺼번에 감쌌다.
“미안, 서원아, 미안. 그냥, 이거 보고만 있어. 아무것도 안 할게. 미안, 미, ……하, 아……, 씹…….”
벌컥벌컥 기다렸다는 듯 쿠퍼액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힘줄이 도드라진 성기가 손에 의해 정신없이 흔들렸다. 탁탁탁탁. 살이 마찰하는 소리와 남자의 신음이 섞여 창고 안을 날카롭게 긁었다.
“아, 후으…… 윽…….”
남자는 쾌락에 휩싸인 얼굴을 했다. 매끈한 미간이 구겨졌다. 그는 제 성기를 미친 듯이 흔드는 와중에도 미안하다며 서원에게 계속 사과했다. 밍밍한 말 모양과는 달리, 그의 눈은 불처럼 활활 타올랐다.
“…….”
목덜미, 귓바퀴까지 새빨갛게 피가 몰려 있었다. 검은 눈이 제 얼굴을 집요하게 응시한다. 그 밑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강렬한 욕망이었고, 그것은 명확하게 자신에게로 향해 있었다. 서원은 그 뜨거움에 놀라 잠시 눈을 깜빡거리다가 홀린 듯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자그마한 혀가 조심스럽게 기둥을 훑었다. 남자의 허벅지가 움찔거렸다. 화들짝 놀란 연우는 서원의 어깨를 약하게 밀었다.
“안, 돼……, 서원……. 읏,”
서원은 대답하지 않고 연우의 손목을 쥐어 옆으로 치웠다. 그리고 할짝할짝 혀를 내밀어 기둥을 타고 흐르던 액체를 핥았다.
“아, 씨, 발……, 서원, 서원아. 하…….”
미칠 것 같았다. 그대로 박고 싶은 충동에 머리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경고를 울렸다. 연우는 턱을 치켜들면서 이를 꽉 물었다. 말캉한 혀의 감촉이 점점 과감하게 성기를 감쌌다. 기둥을 할짝거리던 서원이 그대로 성기 끝을 입에 담았다. 반도 물지 못했는데 뺨이 볼록하게 솟았다.
“하아. ……안, 안 돼, 하지 마. 나 진짜 못 참……!”
서원은 정성 들여 귀두를 빨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더 숙여 고환을 입에 물었다.
성감대였다. 연우는 신음을 거칠게 내뱉었다. 급히 하지 말라는 말을 했으나 이 이상 어깨를 밀어내지는 못했다. 대신 서원을 만지지도 못했다. 이대로라면 눈이 돌아 아이의 옷을 홀딱 벗겨버릴 것만 같아서였다. 갈 곳 잃은 손이 서원의 주변을 움칠움칠 맴돌기만 했다.
비로소 사정했다. 질끈 감은 눈이 뜨였다. 연우는 서원의 팔을 답싹 쥐면서 상체를 일으켰다. 입 안에 사정해버렸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시발, 미안. 나 봐봐. 괜찮아?”
서원이 정액을 입 안에 머금고 있었다. 어디 다른 데 튄 곳은 없는지 허둥지둥 얼굴을 살펴보던 연우가 “바닥에 뱉어도 돼. 뱉어. 비려.” 하는 순간, 그는 그것을 꼴깍 삼켜냈다. 연우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번들거리는 입술을 망연히 바라본다.
“……무슨…….”
“형도 내 거…… 자주 먹었잖아요.”
아무래도 역한지, 서원은 그새 눈꼬리에 눈물을 대롱대롱 달면서도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맛있어요.”
반짝거리는, 그 도톰한 입술이 숨을 잔뜩 섞은 채로 목소리를 흘렸다. 달짝지근한 말이 설탕을 뿌리듯 사르르 뿌려졌다.
명백한 유혹. 그를 인지할 새도 없이 서원이 남자의 손을 쥐어 잡아끌었다. 끌려간 손이 도달한 곳은, 늘 그렇듯 티셔츠 안이었다.
보드랍고 은밀한 속살이 손안에 가득 들어찼다. 조금 전 사정했던 성기는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다시 발기한 채였다. 휘둘리고 있다. 연우는 지금 제 상황을 인지했다. 아니, 새삼스러운 깨달음이다. 언젠가부터 저는 늘 휘둘렸다.
“…….”
“더, 만져 줘.”
이 향기에. 이 눈동자에. 이 목소리와 이 미련한 성격. 느릿한 말투. 소심하게 우물거리는 입술. 강서원의 모든 것에.
강서원에게.
“어떡하려고…….”
연우는 들끓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서원이 냉큼 남자의 허벅지 위에 올라갔다. 바지 아래로 젖은 성기가 느껴진다. 묘한 감각에 서원이 몸을 비틀었다.
“으응…….”
“서원아, 어? 너 어떡하려고 그래.”
브레이크가 고장 난 트럭이 경사진 도로를 돌진하는 듯했다. 지끈거리는 감각이 온몸을 지배한다. 연우는 허겁지겁 서원의 귓바퀴와 목덜미를 핥고 빨면서 말했다. 상체를 감싼 두 손이 엄지로 유두를 깔짝깔짝 건드리다가 짓뭉개듯 눌렀다. 서원은 엉덩이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의 성기에 다리 사이가 빠르게 마찰했다.
“응, 형……, 아…….”
“어떡하려고, 이렇게……. 천사 같아……. 진, 짜. 너무 예뻐. 하, 윽……. 애기야. 서원아.”
말도 안 되는 말들을 멍청해 보일 정도로 진지하게 내뱉는 형이 좋았다. 저에게 지배당한, 얼빠진 얼굴이 좋았다. 정말 그의 말처럼 경이로운 것을 보는 듯한 그 어리석은 눈빛이 좋았다. 서원은 그의 성기에 제 아래를 사정없이 비비는 것을 멈추지 않으면서 날카로운 턱을 단단히 붙들었다. 고개를 숙여 키스해 주자 거친 신음이 비죽 흐른다.
“미안해, 형, 읏, 미안…….”
“하아……, 하……. 뭐가. 뭐가 미안해, 자꾸.”
“난, 형이랑, 헤어질 줄 알고……. 하아, 춥……, 헤어진 줄 알고, 막……, 친구한테 말, 해서, 읏, 다른 사람…… 응!”
다른 사람 소개받으라는 소리까지 들었는데, 형은 나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잖아요.
라고 하려던 사과의 말은 절반도 지나지 않아 잘려나갔다. 별안간 유두를 꽉, 짓이기듯이 깨문 이 때문이었다.
서원은 페팅에도 삽입까지 간 것처럼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쾌락에 흐물거리던 마른 몸이 놀라 크게 떨자 단단한 손이 그의 허리를 받쳤다. 연우는 유두를 끈질기게 잘근거리며 “웃기는 얘기네.” 하고 말했다.
“아파…….”
“네가 나 말고 누구를 만나.”
“깨물, 깨물지 마……. 읏…….”
생각해 보는 얼굴을 하던 남자가 갑자기 사납게 말했다.
“……너 그러다간 진짜 큰일 나는 거 알지.”
“안 그래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서원이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꿍얼거렸다. 연우는 대답 대신 허리를 세게 흔들었다. 바지를 뚫고 들어오지는 않을까 싶을 정도로 묵직한 감촉이었다. 딱딱한 성기가 서원의 다리 사이에 송곳처럼 무자비하게 파고들었다. 입술이 맞닿고 이어 벌어졌다. 두 혀가 진득하게 섞였다.
“음…… 으응…….”
“하, 하아……, 윽, 읏…….”
괴로운 얼굴로 서원의 바지 밑을 향해 허릿짓을 하면서도, 박고 싶어 허리를 벌벌 떨면서도 남자는 끝내 서원의 옷을 벗기지 않았다. 바지 밑의 압박만으로도 그의 충동이 느껴질 정도였다. 서원이 “형, 여기서 해요. 나 하고 싶어요…….” 하고 어설프게 속닥거렸으나 연우는 고개를 내저었다. 유두를 매만지던 손이 내려가 바지를 벗길 듯 말 듯하다가 결국에는 떨어져 나갔다.
“안 돼.”
“왜…….”
“너 아파 보여. 몸도, 읏, ……말랐잖아…….”
맞는 말이었다. 지금 무모하게 섹스를 했다가는 또 쓰러지고 말 것이었다. 기어이 서원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연우를 한껏 품에 안았다. 엉덩이를 한 번 더 위아래로 움직인다. 선명한 자극을 받은 성기가 끝내 두 번째로 사정했다. 동시에 어느새 바지 안으로 침범한 손이 서원의 엉덩이 한쪽을 쥐어짜듯 꾹 그러쥐었다.
“하아…… 하…….”
바지 한가운데가 정액으로 함빡 젖었다. 축축한 느낌이 영 찝찝했으나 서원은 잠자코 연우의 목덜미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면서 그의 입술에 쪽쪽 뽀뽀했다. 연우는 그 입술을 받아내면서 황급히 대충 앞섶을 정리하고 바지 버클을 올렸다. 이대로 또 뭘 했다가는 진짜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은 탓이었다. 솔직히, 이미 참지 못한 게 맞기는 했지만. 그는 자조하듯 생각하면서 침을 삼켰다.
둘은 한참 동안 키스했다. 그리고 서로의 살에 자국을 남겼다. 서원에게 홀리다시피 하며 그의 뺨에 입을 맞추던 연우는 마침내 창문 너머를 인지했다. 어둑어둑했다. 곧 있으면 완전한 밤이 될 터였다.
아차 싶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그는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서원에게 말한다.
“……서원아, 너 이제 가야 돼. 밤 되면 택시 타도 위험해. 길도 험하고…… 여기 멧돼지도 나와.”
“…….”
나긋한 음성에도 서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도리어 얼굴을 굳히며 공연히 고집스러운 표정을 지어냈다. 머리를 쓰다듬던 걸 멈추고 남자의 시선을 스멀스멀 피한다.
왜 고집을 피우는지 알 것 같았다. 연우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보들보들한 머리칼을 슥슥 정리해 주며 어르듯이 말한다.
“여기 있어 봤자야. 준호한테 어디까지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형 여기서 진짜 맨날 상담만 받아. 편해. 힘든 거 하나도 없어.”
“살, 빠졌잖아요……. 면도도 안 하고, 수척하고…….”
“여기서는 운동 안 하고 관리 안 해서 그래. 괜찮아. 힘들어서 그런 거 아니야.”
“……거짓말이면서.”
힘든 걸 끝내 말하지 않는 연우가 못내 미운 듯 서원은 낮게 중얼거렸다.
“…….”
시위하는 것처럼 딱 달라붙은 두 입술은 물러날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다. 알고는 있었으나 고집이 여간 강한 게 아니었다.
‘어떻게 돌려보내야 하지.’ 연우는 점점 조바심이 났다. 저녁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상태의 노인네다. 먼 훗날이라면 몰라도 지금 당장은 강서원의 얼굴을 보자마자 무슨 말을 할지, 무슨 짓을 할지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모르긴 몰라도 최악의 상황일 터였다. 만에 하나 발각되는 경우까지 상상이 닿자 별안간 조급함이 머리 꼭대기까지 차올랐다.
그사이, 말이 없는 남자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서원이 손가락을 접었다 펴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형 할아버지께, 제가 가서…….”
그 말에 플래시를 터뜨리는 것처럼 벌컥 머리가 아찔해졌다. 돌연 연우의 눈이 심각해졌다. 그는 서원의 말허리를 잘랐다.
“말도 꺼내지 마. 절대 안 돼.”
단단하고 날 선 목소리였다. 혼내는 것 같기도 했고, 걱정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둘 다일지도 몰랐다. 곧이어 연우가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서원의 어깨를 단단히 붙들었다. 손가락이 두서없이 어깨 위를 문질렀다.
“서원아. 형 말 들어.”
“…….”
“형 진짜 괜찮으니까 집에 가. 응?…….”
“…….”
“서원아.”
형이, 당황하고 있다.
그가 낯선 표정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던 서원은 비로소 깨달았다. 문득 민규와 했던 대화가 그의 머리를 스쳤다. 그때, 형이 당황한 걸 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허나 지금 형은 명백하게 당황하고 있었다. 이 표정은 언젠가 본 적이 있었다.
제가 관계를 끝내자고 했던 그 순간이었다.
“……약속해요, 그럼……. 다치지 않기로.”
“알았어.”
형이 당황스러워하며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고 있자니 제가 여기 있는 게 도리어 도움이 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원은 여전히 미련을 담은 얼굴을 하면서도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연우는 안도했다. 냉큼 손가락을 건다.
“택시 부르고 있어. 갈아입을 바지 가져올게.”
연우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서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른 몸이 그의 허벅지 위에서 벗어났다.
몇 분 후 돌아온 시연우는 물티슈와 통이 넓은 검은색 트레이닝 바지를 가져왔다. 그는 서원의 바지를 벗기고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뽑은 물티슈로 서원의 허벅지를 살살 닦아내기 시작했다. 젖은 바지를 입고 있던 탓에 허벅지 안쪽까지 정액이 흠뻑 묻어 있었다.
“……준호한테, 어디까지 들은 거야?”
연우는 느긋한 손길로 살결을 닦으면서 말했다. 차가운 감촉에 움칠움칠 허벅지를 떨던 서원이 “형이, 나랑 결혼한다고 했다고……. 그래서 진단받는다고요.” 하고 대답했다.
쓰윽. 물티슈가 한 장 더 뽑혔다. 연우는 서원의 양손을 차례로 닦아 주었다. 먼지가 많은 곳이라 아까부터 계속 걸렸다.
“……결혼 얘기까지 들었어?”
“응.”
깔끔한 대답이 떨어진다. ‘젠장.’ 연우는 욕을 삼켰다. 거절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조금 더 근사한 곳에서, 멋있게, 제대로 제안하고 싶었다. 풀벌레 소리가 들리는 시골의 허름한 창고에서, 또 이런 차림과 외모로 강서원에게 결혼 이야기를 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부담 갖지 마. 난 그냥, 제안하려고 한 거고……. 천천히 생각해. 어르신들한테 허락받으려고 한 건, 미리 해 둬야 네가 편할 것 같아서…… 나 모르는 사이에 네가 못된 짓 당할 수도 있고…… 아, 이렇게 말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는데. 망했네.”
“…….”
가라앉은 목소리가 변명하듯 빠르게 말을 잇다가 이내 한탄했다.
그사이 서원은 연우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속옷만 입은 채, 모지리처럼 물티슈로 코 아래와 눈 밑을 살살 닦이면서 결혼 이야기를 들을 줄은, 서원 또한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문득 민망함이 몰려왔으나 참았다. 서원은 순순히 바지까지 입혀 주는 손길에 응했다. 그의 어깨에 손을 받치며 엉덩이를 들썩이자 골반 위까지 바지를 올리기에 성공한 그가 쪽, 잘했다는 듯 불그스름한 뺨에 키스했다.
서원에게는 바지가 좀 길었다. 연우는 다시 뒤로 물러서서 서원의 발을 살짝 들었다. 그리고 제 무릎에 서원의 발을 받쳤다. 길고 섬세하게 뻗은 손가락이 바지의 밑단을 접었다.
꼼꼼한 손길이 이어졌다. 마침내 양 밑단이 적당한 길이로 접혔으나 연우는 여전히 서원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였다. 그는 민망함을 이기지 못해 꼼지락거리는 발을 신발 위에 내려 주고는 고개를 들어 서원을 응시했다. 검은 눈이 창문 너머의 황혼을 머금은 채로 은은하게 반짝거렸다.
“서원아.”
“…….”
꼭, 정말 프러포즈라도 받는 기분이었다. 이런 급작스러운 프러포즈가 어디 있겠느냐만은, 마음만은 그랬다. 서원은 벌써부터 목덜미가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말이 나오지 않아 고개를 끄덕이고 말자 남자가 말을 이었다.
“……나는, 혼나거나 억압당한 기억이 없어.”
“…….”
“편하게 살았어. 우리 집이 그래. 공부만 잘하면 인간 취급해 주는 곳이야. 나는 운 좋게 공부가 체질이었고, 좋은 고등학교에 조기입학도 했고…… 좋은 대학도 갔어. 거기다가, 어린 동생들까지 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고. 걔네 어릴 때부터 다 내가 관리했거든.”
처음 들어 보는 이야기였다. 미국에 가기 전, 가기 싫다면서 투덜거리던 준호를 보면서 형은 어떻게 살았을까 생각했던 걸 떠올리던 서원은 이내 “네.” 하고 작게 대답했다.
“생각이 단순해. 너처럼, 그렇게 깊게, 세세하게 생각하지를 못해. 하고 싶은 대로 살아와서 그래. ……철이 없어.”
곧잘 박진석한테 듣던, 철이 없다는 그 소리를 제 입으로 인정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이윽고 손에 아주 약하게 힘이 들어갔다. 연우는 꼴깍, 침을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결혼하는 건 네 선택이야. 네가 좋다면 하도록 만들어 볼 거고, 싫다면 안 할 거야. ……근데, 헤어지는 건 못해. 말한 적 있는 것 같은데…… 서원아, 너 진짜 형이랑 못 헤어져. 너 놔주느니 차라리…….”
“…….”
서늘하고 커다란 손이 뻗어 와 서원의 뺨을 감쌌다가 곧 거두어졌다. 느닷없이 말을 멈춘 연우는 잠시 후 슬쩍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러니까, 가르쳐 달란 말이었어. 형이 잘 모르니까…….”
“…….”
“너한테 다 맞출게. 네가 혼내 주면, 바로 고칠게. 하지 말라는 건 다 안 하고, 하라는 건 다 할게. 형이 잘못할 때마다 혼내 줘. 난 네 말에만 따를 거야. 뭐라든 나한테는 네가 하는 말이 정답이야.”
“…….”
그토록 똑똑한 사람이 바보 같은 상황에서, 또 바보 같은 말들을 늘어놓는다. 서원은 그의 부탁이 사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애달프면서도, 또 당혹스러웠다.
서원이 얼뜬 표정을 한 채로 대답을 하지 못하자, 연우는 꽁꽁 숨겨 왔던 약점을 고백하듯 어렵게 말했다. 입술이 느리게 움직인다.
“……원래 내 인생은 쉬운 거 천지였는데.”
“…….”
“난, 네가 제일 어려워. ……그래서 그래.”
그 말을 이해한 순간, 차분한 얼굴 위로 혜성처럼 반짝이는 것이 스쳤다.
놀라웠다. 서원은 모으고 있던 손을 더 세게 움츠렸다.
“…….”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도, 그가 세상에서 제일 어려웠다. 연애가 어려웠다. 어떻게 사랑하는지 몰랐다. 그래서 서툰 아이처럼, 늘 그렇게 삐걱대고 말았다.
그 어설프고도 복잡한 어린아이의 마음을, 형도 품고 있었다고 한다. 자신과 같다고 말한다.
‘형도 그랬어. 형도, 나랑 똑같이…….’
‘나만,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형도. 시연우도.’
동감의 순간. 같은 마음. 같은 감정.
신기했다. 또 찬란하게 다가왔다. 서원은 울고 싶은 마음으로 웃었다. 그대로 상체를 숙여 그의 목을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얼굴이 가까워진다. 서원의 손길에 끌려간 연우는 손을 바닥에 짚은 채 놀란 얼굴로 서원을 내려다보았다. 숨이 느껴진다. 목덜미에 닿아 있던 손가락이 올라와 검은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
“……바보.”
서원이 웃는 얼굴로 작게 속닥거렸다. 그제야 연우의 손이 서원의 허리를 둘렀다. 두 몸이 안락한 간격을 둔 채로 가벼이 붙었다. 욕을 들은 주제에 밸 없이 쪽쪽 입술을 맞춰 오는 것조차 바보 같았다. 또, 그래서 사랑스러웠다. 서원은 웃음소리를 내며 연우의 두 뺨을 쥐어 제게로 끌어당겼다.
가벼운 입맞춤이 키스로 이어지려던 순간이었다. 서원의 핸드폰이 울렸다. 택시일 터였다. 끝내 미련을 담은 입술이 떨어졌다.
“약속 지켜야 해요.”
“응.”
“진짜예요.”
“괜찮아. 진짜 별거 아니야. 맨날 상담만 하더라. 지루하긴 한데 그 이상은 아니야.”
“…….”
“서원아.”
“……응.”
“……새벽에, 전화 걸어도 돼?”
택시 앞이었다. 서원은 여전히 걱정하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서원의 손을 쥐어 말랑말랑 매만지던 연우는 원하던 대답을 받아내자 끝내 웃었다. 매일 새벽 전화기 앞에서 고민하는 짓을 안 해도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얼른 와야 돼.”
결국 서원은 그 말과 함께 까치발을 들어 그의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 염려가 가득 묻어나는 얼굴에 연우는 짐짓 장난스럽게 웃으며 “당장 내일 갈게.” 했다.
쿵. 차 문이 닫혔다. 택시는 요란한 소리를 남기며 시골길을 벗어났다. 연우는 차 뒤꽁무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느새 달빛이 내리는 밤이었다.
* * *
닷새 동안 비가 왔다. 서원은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을 보냈다.
월요일은 침대 안에서 핸드폰으로 이것저것을 찾아보았다. 화요일은 엄마가 뒷마당에서 따 온 자두 중 벌레가 먹지 않은 것을 골라 과외를 가는 김에 준호에게 주었다. (준호는 전혀 고맙지 않은 얼굴로 고맙다고 했다.) 수요일은 도서관에 가서 밀린 영어 공부를 종일 하다가 밤에는 민규의 부름에 응해 그가 일하는 치킨집으로 갔다. 목요일은 나흘째 내리는 비가 지겹다고 생각하면서 과외를 가던 길에 자그마한 청개구리를 발견했다. 우중충한 하늘 아래로 비 내리는 소리만 단조로이 울리는 주택가, 그 가운데 홀로 선명한 초록색을 띤 그것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제, 금요일은 소파에서 낮잠을 자는 태원을 깨워 부추부침개를 해 먹었다. 먹어도 괜찮은 걸 보니 위가 다 나은 모양이었다.
오늘은 일어날 때 비가 오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서원은 침대에 앉아 창 너머로 보이는, 맑게 갠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과외를 갈 준비를 했다.
모레부터는 준호도 개학이었다. 서원은 오늘 녀석이 많이 까칠할 것이라 짐작하면서 들끓는 아스팔트를 걸었다.
직접 대문과 현관문을 여는 건 이제 익숙했다. 신발장에 선 그는 스니커즈를 벗으면서 집 안을 둘러보았다. 이번 주 내내 현관 앞에서 저를 반겼던 준호가 나와 있지 않은 게 영 의아한 까닭이었다.
서원은 신발을 정리하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계단으로 향하는 도중, 중문 너머로 검은 차가 보였으나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는 그저 손가락으로 톡톡 유리를 두드리며 그 앞을 지났다. 그 옆, 닫힌 서재 문도 마찬가지였다. 무덤덤한 얼굴이 꽁꽁 닫힌 문 앞을 스쳤다.
‘설마 자나?’
2층으로 오르는 동안에는 급기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집 안은 슬리퍼와 바닥이 마찰하는 소리만 날 정도로 조용했다. 이윽고 준호의 방 앞이었다. 그 앞에서 잠시 망설이던 서원은 노크를 한 뒤 “준호야. 선생님 들어간다.” 하고 문고리를 돌렸다.
문은 잠기지 않은 상태였다. 벌컥. 문이 열렸다. 서원은 밖에 선 채로 안을 확인했다. 따스한 해를 한껏 품은 넓은 방 안에는 시원한 공기만 머물고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윙윙, 에어컨이 돌아가는 소리가 컸다.
“…….”
‘땡땡이인가.’ 서원은 생각하며 방으로 한 발자국 들어섰다. 밖으로 나가 찾든지, 녀석에게 전화를 하든지, 일단 에어컨은 끄고 나가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대로 두어 걸음, 책상 위에 놓인 리모컨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을 때였다.
쿵. 쿵.
뒤에서 걸음 소리가 들렸다. 놀란 서원이 어떤 반응을 하기도 전이었다. 부드러운 힘이 서원의 허리에 닿았다.
휙, 몸이 돌아갔다. 곧바로 제 앞에 가까이 자리한 얼굴에 서원은 숨을 삼켰다.
“짜잔.”
마치 서프라이즈 파티를 준비한 사람처럼, 시연우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
깜빡. 동그랗게 뜨인 서원의 눈이 감겼다. 곧바로 눈을 뜨는 그 짧은 순간에, 서원은 놀란 표정을 지워냈다. 대신 얼굴을 붉혔다. 금방 울 것처럼 인상을 찌푸린 채로 연우의 멱살을 쥔다.
“깜짝 놀랐…… 읍.”
확, 연우의 얼굴이 빠르게 끌려갔다.
신난 얼굴로 하던 말은 금세 입술에 부딪혀 먹혀 들어갔다. 연우의 멱살을 쥐고 끌어당긴 손은 어느새 그의 목을 안고 있었다. 서원은 그의 목을 두 팔로 한껏 껴안으며 입 안을 열심히 탐했다. 허리를 감는 팔이 느껴진다. 두 몸이 완전히 밀착했다.
연우는 비죽비죽 새어 나오는 웃음을 삼키면서 서원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성실하게 고개를 꺾으며 저와의 키스를 음미하고 있다. 어찌나 열중했는지 귓바퀴와 뺨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기어이 길고 야릇하게 생긴 눈꼬리 끝으로 눈물이 구슬처럼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마치 십 년은 떨어졌다가 재회한 것처럼 애틋하디 애틋한 반김이었다. 허리를 안던 손을 들어 뺨을 닦아 주자 꾹 감은 눈가와 맞대고 있는 혀가 동시에 떨렸다.
‘마음고생 했구나.’
녀석의 열렬한 반응이 귀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긴, 저 같아도 멀쩡히 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강서원이 고생할 걸 뻔히 아는데 자신은 아무것도 못 해주는 상황에서 일주일을 보냈다면 정신 진단 정도가 아니라, 미쳐서 폐쇄 병동이라도 가야 했을지도 몰랐다.
“하아……. 으음…….”
서원은 숨이 모자란지 살짝 입술을 떼어내 숨을 내쉬다가, 다시 남자의 입술을 머금었다. 연우는 서원의 키스에 응하면서 허리를 더듬었다. 하동에서도 느꼈지만, 안은 허리가 예전보다 말라 있었다. 원래도 날씬했으나 지금은 놀라울 정도로 더했다.
‘어떡해. 엉덩이도 빠졌나.’ 연우는 순수한 의문을 품은 척 더듬거리던 손을 슬금슬금 내렸다. 이윽고 그의 손이 서원의 바지 안에 쏙 들어가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아……! 안, 돼.”
화들짝 놀란 서원이 키스하던 걸 멈추고 몸을 떼어냈다. 형을 보자마자 눈이 돌아가 허겁지겁 입술을 맞춘 주제에 말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어쨌든 과외 시간, 게다가 준호의 방 안이었다. 서원은 허리를 끌어당기는 손에 끌려가면서도 상체를 뒤로 빼면서 곤란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눈치 좋게 “준호 때문에 그래?” 하는 남자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다.
“준호 집에 없어. 현장체험학습 보냈어.”
남자는 턱을 밀어 서원의 눈꼬리에 입을 맞추면서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현장체험학습… 이요?”
“응. 그리고 친구네서 자고 온대.”
천연덕스러운 목소리였다.
‘고등학교 3학년이 갈 만한 현장체험학습이 뭐가 있지.’ 궁리하는 틈에 몸이 들렸다. 서원은 고민하는 얼굴을 하면서도 저를 안아 든 남자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집 대문과 현관문을 여는 것처럼, 그에게 매달려 안기는 일은 이제 익숙했다.
연우는 서원을 안아 든 채로 준호의 방을 나섰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중간쯤 내려갔을 때, 서원은 설마, 하는 얼굴로 연우를 바라보았다.
“……PC방 보냈어요?”
“누구?”
“준호.”
“응.”
비로소 침실 문이 열렸다. 연우는 거침없이 대답하며 뻔뻔하게 웃었다. 그리고 서원을 침대에 눕혔다. 서원은 그의 손길에 순순히 따르면서도 “뭐라고, 뭐라고 하고 보냈어요?” 물었다. 못내 걱정스러운 목소리였다. 시연우는 흰 티셔츠 밑단을 잡아 들추며 말했다.
“기억 안 나. 만세 해.”
“나랑 있겠다고 했어요?”
“응. 쌤이랑 큰형이랑 오늘 애 만들 거니까 나가라고 했지.”
티셔츠가 훌렁, 벗겨졌다. 연우는 상체를 숙여 서원의 가슴에 입술을 대며 말했다.
유두를 깔짝거리는 혀의 감촉이 느껴졌다. 서원은 인상을 찌푸리며 연우의 머리에 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등을 슬쩍 비튼다.
“읏, 장난하지 말고…….”
“바지 벗기게 엉덩이 들어 봐.”
“진짜 뭐라고 했는데요. 준호가 이상하게 생각하면……, 아!”
바지와 속옷이 한꺼번에 벗겨졌다. 그대로 성기를 확 잡아채듯 쥐어 오는 손에 서원이 몸을 팔딱였다. 급작스러운 자극에 놀란 눈이 남자를 원망하듯 바라보았다. 연우는 거침없이 서원의 성기를 흔들면서 발그스름한 귓불을 슬쩍 깨물었다.
“왜 자꾸 다른 새끼 얘기를 해.”
“그게, 아니라…….”
“섹스 잘하는 그 새끼 형을 위에 두고.”
“형이, 응, 앗, 제대로……, 흣, 제대로 안 알려주니까……, 읏……!”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공교롭게도 질투가 난 모양이었다. 그가 준호에게 어떻게 말했을지 걱정되는 와중에 그건 또 못 견디게 귀엽다. 서원은 손등으로 제 입을 가리며 웃었다. 미미하게 번지는 웃음에 연우는 불퉁하게 두었던 얼굴 그대로 “웃어?” 하며 서원의 성기를 더 세게 흔들었다. 쪽. 쪽. 쪽. 마른 목을 따라 입술이 부딪혔다. 엄지가 귀두를 슥 긁자 서원은 금세 사정했다.
“형이, 하아……, 형이, 더 애기 같아. 그런 걸로 질투하고.”
그가 종종 그런 식으로 저를 불렀던 걸 기억하며, 서원은 가빠진 숨 사이로 말했다. 한 번의 사정에도 몸이 나른했다. 이윽고 차가운 젤이 아래에 닿아 오는 게 느껴졌다. 기다란 손가락이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구멍을 눌렀다. 찌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구멍을 넓힌다.
“내가 애기 같다고?”
“……응…….”
고작 손가락 하나가 들어왔을 뿐인데도 빠듯했다. 오랫동안 섹스를 하지 않은 탓이었다. 연우는 아래를 만지는 손을 멈추지 않고 서원의 얼굴을 감상하듯 바라보면서 물었다.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은 여전히 웃음을 담고 있었다.
“연우야― 해 봐, 그럼.”
“무슨, 어떻게 그래요…… 아, 읏…….”
구멍에 두 개의 손가락이 한꺼번에 더 들어갔다. 연우는 구멍을 밭게 쑤시면서 쪽, 서원의 입술에 뽀뽀했다. 그리고 무구한 아이를 꼬시는 악동처럼 “왜, 뭐 어때서.” 하고 속닥거렸다.
“서원이는 애기인데 나도 애기면 똑같다는 거잖아.”
“……하, 으…….”
“빨리. 연우야, 해 봐. 듣고 싶어.”
보채는 목소리가 나긋나긋했다. 안에 들어간 손가락이 조금 더 과감하게 움직였다. 슬슬 아래가 뭉근하게 열이 올랐다. 느끼는 부분을 한 번에 자극하지 않고 살짝씩 건드리는 건 의도임이 분명했다.
서원이 살짝 허리를 비틀면서 연우의 어깨를 가볍게 잡았다.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했다. 달싹거리던 입술이 꾹, 다물렸다. 동시에 침을 삼키더니 다시 피어났다.
“……연우…….”
“…….”
“연우야…….”
연우는 만족한 듯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별안간 손이 질척한 소리를 내면서 빠져나갔다. 그는 그대로 상체를 들어 제 옷을 훌러덩 벗기 시작했다. 시선은 서원을 향한 채였다.
“서원아, 힘 빼야 해. 오랜만이라 힘들 수도 있어. 많이 풀긴 했는데…….”
곧이어 딱딱한 맨몸이 서원의 몸에 틈 없이 붙어 왔다. 다 벗은 몸으로 그와 살을 맞댄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서원은 벌써부터 충만한 기분에 그의 등을 한껏 안았다. 마음은 급한데, 말 그대로 제가 걱정되는지 애널 입구에 닿아 오는 성기는 입구만 비비적거리며 삽입을 늦췄다.
그 느낌만으로도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다. 그를 빨리 품어 저만의 것임을 확인하고 싶어서 조바심이 난다. 서원은 고이는 침을 삼키며 그를 보챘다.
“……빨리…….”
“하아……. 안이 좁아서, 빨리 못 넣어. 너, 윽……, 너 다쳐.”
“싫어, 빨리……. 연우야, 응?”
그렇게 부르기 민망하다고 한 지 일 분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강서원은 그새 그걸 써먹는다. 가끔은 진짜 부끄럼을 잘 타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다. ‘존나 귀엽게 구네, 진짜.’ 연우는 생각하면서 불타는 귓바퀴를 잘근잘근 깨물었다.
“아, 아…… 읏……!”
다음 순간 성기가 조금 빠른 속도로 내벽 사이를 꿰뚫었다. 조금 아팠는지 커다란 눈망울 위로 눈물이 그렁그렁 찼다. 서원은 인상을 쓰면서도 웃었다. 연우의 뺨을 쥐고 쪽쪽 입술에 뽀뽀한다. 만족감이 그득한 말간 얼굴에, 연우는 엷게 웃었다.
“다 넣어 줘서 좋아?”
“응…….”
“왜 좋은데?”
“형이, 읏, 내 거라는……! 아, 아!”
조곤조곤 말소리가 오가던 중이었다. 불현듯 두 몸이 붙은 채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참지 못한 연우가 서원의 안에 제 것을 뿌리박듯 허리를 내박찼다. 큼지막한 양손이 서원의 두 다리를 쥐어 휙 어깨 위에 올렸다. 성기가 더 깊숙이 삽입되었다.
선명한 감각이 기묘할 정도였다. 서원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깜빡이는 눈과 치켜든 턱이 뾰족한 쾌감을 내질렀다.
“서원아, 읏……, 더 불러, 봐, 내 이름.”
“아, 으, 넘, 너무, 깊……, 아! 흣, 으응, 응!”
“시연우가, 네, 거라서, 좋아?”
철퍽. 철퍽. 엉덩이와 허벅지가 부딪히는 소리가 쨍하게 울렸다. 어깨에 매달린 종아리가 추처럼 흔들리며 콩콩 널따란 등을 두들겼다. 근육이 선명하게 짜인 등 위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연우는 손을 뻗어 리모컨으로 에어컨을 켰다. 그리고 리모컨을 휙 뒤로 던지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서원의 손을 쥐었다. 깍지를 낀 손이 시트 위에 지그시 짓눌렸다.
“응, 좋……, 좋아, 앗, 흐으, 읏……! 형, 그쪽, 그만, 흐응……!”
“하아, 나도, 읏, 나도 그래.”
자비 없이 콱콱 느끼는 부분만을 명확하게 찌르는 성기가 무서울 정도로 쾌감을 터뜨렸다. 사정했던 탓인지 민감해진 몸이 기어이 바들바들 떨었다. 서원의 성기가 비스듬히 선 채로 쿠퍼액을 왈칵왈칵 뱉어냈다. 연우는 깍지를 끼던 손을 풀어 서원의 기둥을 훑었다. 그리고 맛보듯이 쿠퍼액이 묻은 제 손가락을 입 안에 넣더니 쪽, 소리가 나게 빨았다.
“시러, 읏, 먹지, 마……! 아, 읏, 쌀 것, 같……, 흐응, 응! 아, 흣.”
“하아, 왜, 왜 먹지, 마? 이거라도, 먹어야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씹어 먹고 싶은 거 참고 있는데.
뒷말은 삼켰다. 그 대신 연우는 도톰한 입술 새로 질질 흐르는 침을 꼼꼼하게 핥아 먹었다. 장난이 아니라, 정말 강서원은 다 맛있었다. 달콤하고 중독성이 있었다. 특히나 맛있는 걸 꼽을 수도 없었다.
퍽! 세찬 마찰음이 일었다. 쪽쪽 성기를 빨아대는 내벽을 향해 귀두를 거세게 박은 순간, 연우는 사정했다.
동시에 서원은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온몸의 세포가 내리쳐지는 듯하면서도 찌릿한 감각이었다. 배 안으로 정액을 받아낸 마른 몸이 갑자기 딱딱하게 몸을 굳혔다가 경련하는 것처럼 흠칫 크게 떨었다. 잔뜩 힘이 들어간 등이 휘었다. 천장을 바라보던 초점이 살짝 비끼더니 이내 눈이 꾹 감겼다. 발간 얼굴이 터질 듯 열을 몰았다.
“아, 흐……!”
물줄기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배 부근이 축축해졌다. 연우는 숨을 몰아쉬면서도 고개를 숙였다. 별안간 서원이 화들짝 놀라며 시연우의 얼굴을 붙잡아 올렸다. 수치심에 새빨개진 얼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지 마, 보지 마…….”
서원은 많이 부끄러운지 못내 애처롭게 울었으나, 애석하게도 소리까지 막아낼 수는 없었다. 숨소리만 가득한 둘 사이로 줄줄 물이 새는 소리가 쉼 없이 흘렀다. 얼마나 쌌는지 배를 흥건히 적실 정도였다. 얼굴을 붙잡은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알았어. 안 볼게.”
“아, 읏!”
담백한 목소리에 안심할 새도 없이 연우는 삽입한 그대로 서원의 몸을 돌렸다. 그리고 양 무릎을 대고 침대 위에 섰다. 서원의 턱이 베개에 박혔다.
“뭐 하는……!”
“이렇게 하면 서원이가 쉬 싸는 거 안 보이잖아.”
투명하고 냄새가 나지 않으니 사실 소변이라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연우는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늘씬한 등과 허리, 그리고 엉덩이까지. 흰 몸이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서원의 자세가 흩뜨려지지 않게 그의 골반을 똑바로 쥐고는 다시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마찰음이 물기를 흠뻑 머금은 채로 철썩철썩 터졌다. 흥분감에 검붉어진 성기가 하얀 엉덩이 사이로 숨었다가 나타나길 반복했다.
“응! 아……, 읏, 아흣! 아!”
“우리, 애기, 아, 이렇게, 이렇게, 느껴서, ……하아, 어떡해.”
“형, 혀엉, 아, 으응, 응! 아응!”
“맨날, 떡칠 건데, 떡칠 때마다, 오줌 싸면, 형이, 치워 줘야 되잖, 아.”
“아니야, 아니야……, 아, 흐응……!”
박을 때마다 꼿꼿이 선 성기 끝에서 체액이 후두둑 쏟아져 시트를 적셨다. 퍽! 퍽! 세게 엉덩이를 때리던 허벅지가 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에 서원은 소리 내어 흐느꼈다. 흰 베개가 눈물과 침으로 함빡 젖어 들었다.
내벽이 요동치는 느낌이 미칠 것 같았다. ‘씨발. 좆 터질 것 같아.’ 연우는 생각하며 이를 꽉 깨물었다. 길고 곧은 손가락이 골반을 더 세게 그러쥐었다.
”아니긴, 지금도 싸잖아. 후우……, 언제, 쉬야 가릴 거야, 응?”
공연히 그렇게 말하니, 서원은 우는 소리를 내다가 기어이 견디지 못하고 베개에 얼굴을 처박았다. 곧바로 연우가 허리를 숙여 서원의 등에 찰싹 붙었다. 그리고 허리에 팔을 감고 그대로 안아 들었다. 침대맡에 앉는다.
“아, 안 돼……, 물, 물 흘러서…….”
“괜찮, 씹……, 괜찮아. 괜찮아. 하아…….”
물을 줄줄 흘리는 성기가 적나라하게 보이는 게 부끄러운지, 서원은 몸을 바르작거렸다. 그조차도 자극이 되어서 연우는 인상을 세게 찌푸렸다. 이제 슬슬 저도 한계였다. 몇 번이나 사정을 참은 상태였다.
연우는 서원의 허리를 단단히 붙든 채로 기둥을 쳐올리다가, 크게 안을 휘저었다. 온몸이 성감대가 된 것처럼 몹시 민감해진 몸은 빠르게 반응했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던 서원이 “아,” 소리를 내며 아까 전처럼 몸을 갑자기 굳혔다. 한껏 치켜든 고개 때문에 그의 뒤통수가 연우의 어깨에 닿았다.
연우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고개를 숙여 서원의 어깨를 세게 깨물었다. 둥글게 내벽을 휘젓던 성기가 다시 안을 찧는다. 서원의 몸이 콩콩 그의 몸 위에서 흔들렸다.
“형, 나, 어떡해요, 어떡……, 아, 안 돼, 하으, 읏……!”
“아, 윽! 씨발, 서원아, 읏, 강서원.”
어깨와 귓불, 뺨까지 새빨갛게 익었다. 서원은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것처럼 그렇게 신음을 흘리다가, 이내 뒤로 손을 뻗어 연우의 머리를 꽉 쥐었다. 아무렇게나 튀어나온 헐떡임이 난잡하게 뒤섞였다. 땀에 젖은 미간이 거세게 구겨졌다. 연우는 입술을 짓씹었다. 넋을 놓은 사람처럼 미친 듯이 허리를 쳐올린다. 눈앞이 번쩍번쩍 튀는 감각이 그를 지배했다.
“안, 돼……, 너무, 너무 커, 형, 어떡, 어떡해, 아, 아!”
“서원아. 서원아, 하아, 서원, 윽, 아윽……!”
시연우는 사정없이 벌벌 떨리는 몸을 붙잡고 한꺼번에 밀고 들어갔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가장 깊숙한 곳을 찌른 성기가 짙은 정액을 내뿜었다. 동시에 서원의 성기도 다시금 맑은 물을 터뜨렸다.
숨을 몰아쉬는 소리와 훌쩍거리는 울음만 들렸다. 잠시 서원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있던 연우가 이내 그의 몸을 돌려 저를 보게 했다.
뭐가 그렇게 서럽고 부끄러운지, 서원은 잔뜩 눈물을 쏟고 있었다. 연우는 눈을 뭉개는 손을 치우면서 턱을 치켜들고 그에게 키스해 주었다.
“흑, 으……. 흣…….”
서원은 울음을 멈추지 못하면서도 남자의 키스에 적극적으로 응했다. 목을 감싸 안는 팔의 감각이 좋아서, 연우는 서원의 허리를 문질문질 쓰다듬으며 도톰하게 부은 입술을 쪽쪽 빨아들였다.
둘은 그 뒤로 두 번 더 몸을 섞었다. 목욕을 한 뒤, 연우는 녹초가 된 서원을 안은 채로 침대에 누웠다.
“형 할아버지가, 형 많이 괴롭혔어요?”
서원이 제 손을 잡아끌어 꼼지락거리며 손장난을 치는 걸 가만히 보고 있던 중이었다. 그의 품 안에 가만히 안겨 있던 서원이 문득 물어 왔다. 줄곧 생각하고 있었던 듯 못내 진지한 목소리였다. 시연우가 바싹 몸을 붙이고 서원의 어깨에 턱을 얹었다.
“왜. 걱정했어?”
서원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하동에 가 있던 내내 잠을 못 이룬 탓인지, 섹스를 많이 한 탓인지, 아니면 목욕을 한 탓인지 몸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노곤노곤했다. 연우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에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좀? 괜찮아. 다 지나갔어. 마음대로 하래.”
사실이었다.
‘네 맘대로 해.’
끈질긴 나날 끝에, 마침내 제게 내려진 말은 고작 그거 하나였다. 어젯밤, 조부는 두툼하게 쌓인 소견서들을 책상에서 치워내면서 말했다. 본인이 다 진저리가 난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연우는 감사 인사 대신 바닥으로 떨어진 소견서 하나를 주워 읽다가 계속 읽을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버렸다. 더하여 글자라면 신물이 날 정도여서, 당분간은 글자를 읽지 않을 계획이기도 했다.
‘그럼 명절 때 뵐게요.’
집을 나서며 말했을 때, 조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연우의 말에 잠시 망설이던 서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결혼 안 한다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헛수고잖아요.”
일차원적인 질문이 귀여웠다. 시연우는 눈을 감은 채로 피식 웃었다. 이어 나른한 목소리가 조곤조곤 침실 안에 내려앉았다.
“헛수고 아니야. 너랑 결혼하고 싶었던 것도 있지만, 네가 내 동생한테 못된 말 들었다는 사실이 견딜 수가 없어서 그랬던 거야. 죽을 때까지 같이 있을 건데, 우리 집안사람들이랑 만날 일이 또 없겠어? 그때 또 그런 일 당하면 어떡해. 예방 차원으로 저지른 거지.”
“…….”
그렇다고 결혼을 안 하고 싶은 건 아니고. 결혼도 하고 싶어. 당장 내일이라도.
장난스러운 음성이 덧붙었으나 서원은 웃지 않았다. 장난치지 말라고 핀잔을 주지도 않았다. 그저 저보다 훨씬 큰 손을 가만히 매만지기만 했다.
한참 후에 감긴 눈이 뜨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연우는 말 없는 뒤통수를 보며 생각했으나 구태여 서원을 부르지 않았다. 이윽고 손을 끌어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연우는 그에 끌려갔다. 얇은 파자마를 입은 채로 밀착한 두 몸이 따뜻한 온도를 만들었다.
안정감이 들었다. 눈이 느릿하게 움직인다. 마침내 졸음에 잠식된 것만 같았다. 연우는 서원을 고쳐 안으면서 눈을 감았다. 정신이 가물가물해졌을 때, 서원은 만지작거리던 손 하나를 들어 손가락 끝에 입을 맞췄다.
“잘 자요.”
얼굴을 보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제가 잠에 드는 걸 알았을까.
연우는 잠에 빠지면서도 웃었다.
* * *
서원이 잠에서 깬 건 푸르스름한 새벽이었다. 베개 아래에 넣어 둔 핸드폰이 진동을 낸 탓이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기 위해 베개 아래로 손을 넣었다. 자그마한 움직임에도 제 뒤에 딱 붙은 몸은 어리광을 피우듯이 허리를 더 세게 끌어당겼다. 서원은 그 힘에 끌려가면서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액정을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가 두 통 와 있었다. 발신자를 확인한 서원이 의아한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 순간, 이번에는 문자가 왔다.
“…….”
문자는 짧았으나 서원은 그것을 반복해서 읽었다. 이윽고 작게 한숨을 내쉰다.
그의 품에서 벗어났으나, 남자는 잠깐 인상을 찌푸릴 뿐 눈을 뜨지 못했다. 아무래도 깊이 잠에 든 모양이었다. 침대에서 빠져나온 서원이 연우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새벽빛을 받은 얼굴이 마치 석고상처럼 선명하고 아름다웠다.
쪽, 가지런한 이마에 입술이 내려앉았다. 서원이 발소리를 죽이며 침실을 벗어났다.
* * *
시연우는 새카만 어둠 속에서 가만히 누워 있었다. 피로에 찌든 몸과 정신이 무의식 깊은 곳에 침잠했다.
누군가 제 이름을 부르는 것 같다.
이게 실마리였다. 불현듯 자그마한 자극이 귓가를 스쳤다. 동시에 그는 감고 있던 눈을 꿈틀거렸다.
“……우야. 연우…….”
목소리가 점점 선명해졌다. 어두웠던 의식이 서서히 불을 밝혔다. ‘나는 자고 있었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 동시에, 침잠되어 있던 정신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
잠에서 깼다. 서서히 밝아지던 불이 별안간 쨍한 햇빛이 되어 눈을 내리쳤다. 연우는 눈을 느리게 떴다. 가느다란 시야 사이로 익숙한 정수리가 보였다.
“연우야, 일어나 봐…….”
“…….”
“언제까지 잘 거야.”
햇빛을 잔뜩 받은 머리가 보인다. 강서원의 뺨이 바로 제 가슴팍 위에 착 붙어 있었다.
살금살금, 목소리가 피부 위를 스친다. 몸 위로 무게감이 느껴졌다. 연우는 가늘게 뜬 눈 그대로 피식 웃었다. 그 약한 웃음소리에, 서원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깼어요?”
“……방금. 몇 시야?”
“2시요.”
잠에 잠긴 남자의 목소리와 달리, 서원의 목소리는 또렷했다. 연우의 몸 위에 엎어진 서원은 그렇게 속닥거리며 그의 입술에 쪽, 뽀뽀했다. 이내 한 번 맞대다 떨어질 것 같은 입술이 다시 다가왔다. 애교를 부리듯 입술을 맞댄 채 쪽쪽 소리를 내며 오물거린다.
“……나 연우라고 불렀지.”
“응…….”
서원은 연우의 뺨을 붙잡은 채 계속 입술을 맞추며 대답했다. ‘왜 이렇게 귀엽게 굴지.’ 시연우는 생각하며 이게 꿈인가 잠시 의심했다. 더듬더듬 이불 속에 감추고 있던 손을 올려 서원의 엉덩이를 덥썩 잡는다.
연우의 미간이 슬쩍 구겨졌다. 당연히 얇은 파자마를 입고 있을 줄 알았는데, 빳빳한 청바지의 감촉이 느껴진 탓이었다.
“어디 나갔다 왔어?”
“네.”
“어디?”
“키스 먼저…….”
계속 입술을 맞추다 보니 혼자 애가 닳아버린 모양이었다. 서원은 급기야 자꾸 움직이는 턱을 꼭 쥐며 작게 보챘다. 연우는 두 팔로 가볍게 서원의 허리를 감싸며 짧게 혀를 섞어 주었다. 입술을 떼어내자 모자란다는 듯이 한 번 더 입술을 부딪혀 온다. 남자는 제 아랫입술을 깨무는 서원을 내려다보며 다시 물었다.
“어디 갔다 왔어.”
“집.”
“왜?”
“둘째 동생이 집에 안 들어온다고, 막내한테 연락 왔었어요.”
서원은 순순히 답했다.
그에게 말했던 대로, 새벽에 제게 연락을 한 건 태원이었다. 태원은 재원이 형이 엄마와 싸우고 나가 집에 들어오지 않고, 제 연락도, 또 엄마의 연락도 받지 않는다고 했다.
엄마와 태원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는 녀석은 제 전화를 한 번에 받았다. 서원은 그것이 놀랍지 않았다. 아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요즘 재원이 겪는 외로움, 억울함, 그 성장통과도 같은 과정은 저도 겪었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재원도 그것을 알 터였다.
“그랬구나.”
연우는 더 묻지 않았다. 그리고 그제야 서원의 요구에 응해 주겠다는 듯 턱을 밀어 키스했다.
키스가 이어지던 중이었다. 문득 서원이 연우의 얼굴을 붙잡은 채로 입술을 떼어냈다. 달뜬 눈이 연우를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
“왜?”
분위기가 평소와는 좀 다르다. 특히나 계속 키스를 조르는 모습이 그랬다. ‘왜 그러지.’ 의아함을 품은 채로 묻자 비로소 서원이 입을 열었다.
“나, 할 말 있어요.”
“뭐?”
“나 내년에…… 반년 동안 미국 가 있을 거예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연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물으니 서원은 잠시 생각하는 듯 손을 꼼지락거리다 입을 열었다. 경직된 목소리였다.
“……해외 인턴십 때문에요. 저번 주에 최종 합격했어요.”
해외 인턴십. 그건 언젠가 양 교수님께 들었던 이야기였다. ‘이 얘기를 하려고 뜸을 들였나.’ 연우는 짐작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님께 제안을 들었을 때는 시큰둥했다던 서원이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꾸었는지, 또 인턴십을 준비하는 기간 동안 제게 그에 대한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은 없었다. 아쉬운 건 매일 매일 붙어 있지 못한다는 점이었는데, 반년 정도는 서원을 위해 어떻게든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중간중간 찾아가면 되기도 하고.
그러나 연우의 담백한 반응에도 서원은 긴장을 풀지 못했다. 오히려 더 긴장한 듯한 얼굴로 연우를 응시했다. 이내 가지런한 손이 연우의 이마를 훑었다. 서원이 말했다.
“있잖아요…….”
“응.”
말꼬리가 바들거리며 늘어졌다. 이마를 훑던 시선이 찬찬히 내려 연우와 눈을 마주했다. 동시에 이마를 훑던 손이 다른 쪽으로 뻗었다. 침대 옆, 협탁 쪽이었다. 협탁을 향해 있던 손이 돌아왔다. 서원은 살짝 상체를 들어 연우의 가슴팍에 공간을 두었다.
그 공간 위로 손이 놓였다. 남색 융의 자그마한 케이스와 함께였다.
“…….”
연우는 벙찐 얼굴로 그것들을 내려다보았다. ‘설마.’ 하고 의심하는 동안, 서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집으로 다시 오는 내내 준비했던 말들을 내뱉을 차례였다.
“난 꿈이 없었어요. 집에 빚이 있어서, 매달 많으면 100, 적으면 70만 원을 엄마한테 드려야 하거든요. 엄마도 열심히 일하시지만 그래도 모자라서요. ……그런 현실이 너무 버거웠고, 그래서 꿈 같은 건 사치라고 생각했어요. 졸업하면 그냥 바로 일할 수 있는 곳에 취직하려고 했고요.”
“…….”
“……근데, 형을 만나고 꿈이 생겼어요.”
“…….”
마침내 케이스가 벌어졌다. 깔끔한 디자인의 은색 반지가 검정색 실크 쿠션 위에 놓여 있었다.
서원은 침을 삼켰다. 그리고,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꿈은 형이에요.”
커진 눈이 반지를 바라보았다가 이내 서원의 눈을 마주했다. 턱없이 진지한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형에게 걸맞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할게요. 형이 가는 곳 어디든 다 따라갈게요.”
“…….”
“형에게, 내 인생을 바칠게요.”
“…….”
그 무거운 말들이 들려오는 순간, 가볍게 떠다녔던 의문들과 섭섭한 감정이 삽시간에 떠내려갔다. 그리고 단단한 설렘만이 남아 몸을 에워쌌다. 연우는 뛰는 심장이 새삼스럽게 버거워서 잠시 침을 삼켰다.
머뭇거리던 서원의 입술이 작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나에게 형을 주세요.”
“…….”
“……형을 갖고 싶어요.”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으나 강한 고집을 담고 있었다.
“…….”
연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어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는 탓이었다. 엉덩이를 움켜쥐던 손이 서원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 행동의 의미를 깨닫자, 서원은 긴장이 역력한 얼굴 그대로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살짝 떨리는 손이 반지를 집어 연우의 약지에 조심스럽게 끼웠다.
차가운 금속이 손가락을 붙드는 감각은 영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심장이 벌벌 요동칠 만큼 좋았다. 돌연 반지를 낀 손이 서원의 뒤통수를 옭아맸다. 그대로 입술을 머금는다.
두 입술은 오랜 시간 서로를 나누었다.
* * *
바깥이 어두워졌다. 하루 종일 몇 번이나 했는지 당사자들도 모를 정도로 둘은 끊임없이 몸을 섞었다.
준호가 귀가하기 1시간 전, 또 나란히 소파에 앉아 영화를 보던 중이었다. 맥주와 팝콘을 먹으며 영화에 열중해 있던 서원은 불현듯 제 허리를 끌어당기는 힘에 순순히 끌려갔다. 그러면서도 혹여나 맥주를 쏟을까 맥주캔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단단한 허벅지 위에 몸이 앉혔다. 이어서 제 몸 구석구석을 서슴없이 더듬는 손이 느껴졌다. 그 손길을 가만히 받아내면서도 서원은 영화에 열중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마침 재미있는 구간이었다. 몰입한 눈이 모니터에 박혀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근데, 그 친구가 누구야?”
그래서 바지 안으로 들어가 허벅지 안쪽까지 쓰다듬던 남자가 제게 그렇게 물었을 때, 서원은 당연히 그가 영화 내용을 물어본 줄로 알았다. 그는 팝콘통에서 팝콘을 두 개 집었다. 그리고 하나는 남자의 입에, 하나는 제 입에 넣으면서 “누구 친구요?” 하고 되물었다.
남자는 팝콘을 조용히 받아먹고는 허벅지 안쪽을 약하게 꼬집으며 대답했다.
“너한테 다른 사람 소개해 주겠다고 한 친구.”
팝콘을 씹던 턱이 멈췄다. 서원이 망설이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자, 남자가 사타구니에 자리해 있던 손을 더 깊숙이 집어넣으며 팬티 밑을 더듬었다. 마른 목을 핥아 올리며 다시 묻는다.
“누구야?”
“그냥, 친구……. 왜요?”
“경찬이? 민규?”
“걔네 말고 다른 친구 또 있어요.”
“없잖아.”
꾹. 팬티 밑을 더듬던 손이 응징하듯 아래를 꾹 눌렀다. 술기운 탓인지 그 자그마한 자극이 선연하게 느껴졌다. 서원이 빠져나가려는 듯 몸을 뒤틀면서 “있어요……. 손…… 하지 마.” 했다. 연우는 마른 몸을 고쳐 안으면서도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곧바로 손을 떼어냈다. 그리곤 서원의 목 뒤에 제 머리를 비비적거리며 애교스럽게 “말해 봐. 이름만.” 하고 칭얼거렸다.
“왜 궁금한데요.”
“내가 설마 해코지할까 봐 그래? 안 해.”
“그런 게 아니라…….”
“아니라?”
“……이간질 시키는 것 같잖아요.”
“이게 왜 이간질이야. 그냥 너 생각해서 친구도 그렇게 말한 거잖아. 난 이해해.”
“…….”
짐짓 부드러운 어조를 연기하자 서원은 금방 설득당했다. 잠시 생각하던 서원이 마침내 팝콘통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려던 때였다. 연우는 참지 못하고 거의 확신하고 있던 답을 불쑥 내놓았다.
“민규지?”
“……어떻게 알았어요?”
“경찬이가 너한테 누굴 소개해 줄 여력이 있어 보이지는 않아서.”
연우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서원은 그 대답이 재미있는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 날라리 같이 생긴 새끼가 그랬단 거지.’ 연우는 생각하면서 서원의 몸을 돌려 저를 바라보게 했다. 술기운에 익어버린, 사과같이 빨갛고 탐스러운 뺨을 어루만진다. 서원은 웃음기가 남아 있는 얼굴로 남자와 눈을 마주했다.
잠시간 꼼꼼하게 말을 포장한 연우가 재차 입을 열었다.
“형 없는 동안, 민규랑 많이 친해졌어?”
“응. 수요일에도 만났어요.”
숨길 필요는 없어서 서원은 거칠 것 없이 긍정했다. 조금 취한 탓에 과감해진 것일지도 몰랐다. 수요일, 민규를 만나 그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말을 했던 걸 기억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연우는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혀로 뺨 안을 굴렸다.
“……형보다 더 친하게 지내면 안 돼.”
한참 만에 나온 말은 고작 그거였다. 서원은 그제야 연우의 마음을 깨닫고는 재차 웃음을 터뜨렸다.
“안 그래요.”
“나는 걔 마음에 안 들어. 너한테 그런 말 해서가 아니라, 원래 마음에 안 들었어. 날라리 같이 생겼잖아.”
낮게 중얼거리는 투가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고스란히 드러냈다. ‘귀여워.’ 서원은 생각하며 소리 내어 웃었다. 쭈욱. 심술 맞은 볼을 쥐어 슬쩍 늘린다. 열이 올라 손바닥이 뜨끈뜨끈했다. 연우는 그 손을 피하지 않았다.
“질투하는 거예요?”
“그러면, 싫어?”
집요한 물음에 웃는 얼굴 그대로 고개를 내젓는다. 꼬집던 손이 떨어지고 대신 입술이 다가와 뽀뽀했다. 서원은 그의 품에 안겨들면서 아늑함을 느꼈다.
“좋아.”
“…….”
“형이 질투하니까 너무 좋아요.”
“…….”
“질투쟁이.”
조그마한 덧붙임에 남자는 서원의 등을 안아 주면서도 피식 웃었다. 품에 파고든 아이의 따뜻한 숨이 느껴졌다.
“내가 속으로 얼마나 열불이 나는지도 모르고 그런 소리 하지.”
사실이었다. 진단의 결과가 이상하게 나올까 내심 조금 불안했을 정도로, 강서원을 대하는 자신은 무척 이상했다. 스스로도 놀라울 만큼 폭력적이고, 또 지칠 만큼 집요하면서도 넓은 범위로 질투를 느꼈다.
강서원이 숨을 쉬는 것. 또 바라보는 사물들은 물론이었다. 강서원이 몸을 섞는 도중에 천장을 보며 절정을 맞이하는 것조차도 화가 나서 천장을 박살 내고 싶었다. 지금도, 녀석이 자꾸 손을 뻗으려는 맥주캔도 저 멀리 던져버리고 싶었다.
사물이 이 정도이니 사람은 말할 가치도 없었다. 어쩌다 눈을 마주하는 낯선 사람들. 녀석의 인생 중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했을 가족들. 친구들. 다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제가 만들어 놓은 공간 안에서만 강서원을 살게 하고 싶었다. 끝내 강서원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될 정도로 긴 시간 동안. 입을 열면, 제 이름밖에 부르지 못할 만큼,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아, 준호 새끼 오지 말지.
언제 같이 살지. 다음 주 내로 이사를…….
결국 생각이 거기까지 닿았을 때였다.
“또 말해 줘…….”
서원은 금세 아득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연우는 생각을 거두고 서원의 등을 토닥이면서 “뭘?” 하고 되물었다.
“또 뭐에 질투하는지.”
“그게 왜 궁금해.”
“좋아서…….”
연우는 낮게 웃었다. 고개를 숙여 서원의 귓바퀴에 키스한다.
영화는 어느새 절정부를 지나고 있었으나, 둘 중 아무도 그를 의식하는 사람은 없었다. 등을 토닥이던, 반지를 낀 손이 올라 서원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전부 다 질투해. 나 빼고 전부 다.”
“……나도인데.”
“진짜? 거짓말.”
“정말이에요.”
“그럼 왜 티를 안 내.”
“그걸 내서 뭐 해요…….”
“너도 말해 봐. 뭐에 질투하는지.”
“형이 갤러리 직원들한테 웃어 주는 거랑……, 그, 형 친구랑…….”
큭. 숨죽여 웃던 소리가 새어 나가자 서원은 “……그만 말할래.” 했다. 연우는 끝내 차오르는 무엇인가를 이기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작은 목소리로 주고받는 대화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누가 들었다면 비웃을 만큼 유치한 대화였다.
한 시간 뒤, 준호가 오는 소리가 시끌벅적하게 들려왔다. 그제야 그들은 비로소 서른한 살과 스물네 살로 돌아왔다.
베이비 (Baby)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