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Break (7/8)

7. Break

문이 열렸다. 출근을 마친 시연우는 마치 경주가 끝난 선수처럼 푹신한 소파에 눕듯이 앉았다. 다리를 꼰 채로 발을 까딱거리며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이내 후,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면서 장혜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한참 후에 연결되었다.

「응, 연우야. 누나 신혼여행 중인 거 뻔히 알면서 냅다 전화를 거는 걸 보면 뭔가 대단한 일이 있나 봐? 왜, 인터뷰하게? 마음 바뀌었어?」

“그거 때문에 내 전화 받을 것 같은 누나한테 건 거야. 옆에 박진석 있지? 바꿔 봐.”

싸가지 없는 놈이라며 욕하는 장혜수를 진정시키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전화를 넘겨받은 박진석이 「여보세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왜. 이 미친 새끼야.」

“전화 못 할 시간에 한 것도 아닌데 왜들 그래.”

연우는 시계를 보며 시차를 가늠하고는 말했다.

박진석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이기적인 놈은 좀처럼 남의 상황을 고려할 줄을 모른다. 아니, 모른다기보다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게 더 정확하다. 시연우의 경우는 그렇게 31년을 살아온 케이스다. ‘지독하게 재수 없는 놈.’ 그는 생각하면서 「됐고, 용건이나 말해.」 했다.

연우는 시계를 보기 위해 살짝 들었던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목소리는 금세 신경질적으로 돌변했다.

“누구누구한테 말했어?”

「뭘?」

“내 카페 얘기, 누구누구한테 말하고 다녔냐고.”

이것이 도망치듯 갤러리로 출근을 한 이유였다.

1시간 전, 택시를 보내고 난 후 집으로 들어섰을 때까지만 해도 연우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이건 분명 오해로 이루어진 상황이고, 이 오해는 곧 있으면 풀리게 될 것이며, 자신은 강서원과 한바탕 섹스를 한 뒤에 한결 산뜻한 마음으로 출근할 것이라고. 분명 녀석의 신발을 벗기고 다시 집으로 끌고 들어왔을 때까지만 해도 그런 행복한 미래를 예견했더랬다.

연우는 서원을 소파에 앉혔고, 냉침한 다즐링 티를 내어주었다. 서원은 먼저 화를 내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고 차가 든 잔을 매만지다가 한참 만에 다시 입을 떼어냈다.

‘어제 결혼식장에서, 로비에 앉아 있다가…… 그런 말을 들었어요.’

‘응.’

‘형이 카페를 준비하고 있는데, 그게 나를 위한 거라고.’

‘…….’

‘그리고 형이 그런 말을 했대요.’

……우리가 헤어지면, 그 카페, 나 줄 거라고.

마지막 말은 거듭 떠올려도 속상한 건지, 목소리가 작았다. 이윽고 제 찻잔을 바라보고 있던 눈이 올라 연우를 바라보았다. 동그란 눈은 간절하게 일렁이는 채로 연우에게 묻고 있었다.

아닌 거죠?

거짓말이죠?

아니면, 제가 잘못 들은 거죠?

연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일순 연우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만이 떠올랐다. ‘그게 중요한가? 지금은 아닌데.’ 하는, 그의 인생관이 철저히 묻어나는 의문이었다.

그러나 여태 애인들에게 줄곧 그랬던 것처럼 ‘그게 그렇게 중요해?’ 라고 묻는, 상대방의 기분보다는 제 생각을 중요시하는 그런 눈치 없는 짓거리를 할 수가 없었다.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를 바라보는 강서원의 눈빛이 아주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그런 서원을 이길 수 없다. 심지어는 그 말간 눈동자를 마주 보고 있자니 쉽사리 아니라고 거짓말도 하지 못하겠다.

연우는 불현듯 얼떨결에 도둑질을 한 뒤에 부모님에게 추궁을 받는 소년이라도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아니, 그 비유마저도 어불성설이었다. 소년기 시절의 자신은 이런 경험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도둑질한 적도 없지만, 설령 했다 해도 숨기지 않았을 터다. 그렇게 자라 왔다.

‘……아, 회의 시간 늦었다.’

‘……네?’

말을 잘 해야 하는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애당초 누가 어떤 식으로 말을 한 건지 모르니까 더 그랬다. 사실을 말한다 한들 되도록 좋게 포장해서 말하고 싶었다. 일단은 대답을 보류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연우는 빠르게 판단한 뒤에 벌떡 일어섰고, 서원은 놀란 눈 그대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연우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추궁하는 부모님보다 더 무섭게 느껴지는 그 동그란 눈의 시선을 필사적으로 피했다. 그리고 ‘이따가 돌아와서 이야기하자.’는 아주 구차한 말과 함께 집을 나섰다. 그리고 갤러리까지 오는 차 안에서는 박진석에게 전화를 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그 말을 했던 건 박진석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박진석 잘못은 아니었다. 다만 박진석이 누구누구한테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했는지 알아야 대강 강서원이 누구한테 그런 소리를 들었는지 추측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내가 네 카페 얘기 누구누구한테 했냐고?」

“어.”

별걸 다 묻는다는 듯 귀찮음이 가득 묻은 목소리였다. 연우의 긍정에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아무한테도 안 했는데? 그런 시시콜콜한 걸 왜 말하고 다녀, 내가. ……아, 준우한테 했었던 것 같은데. 걔가 하도 슬퍼하길래 좀 달래 줬지. 야, 준우가 아무리 그래도 마음은 여리니까 네가 좀 잘 좀 해라. 애를 집에서 쫓아내길 왜 쫓아내? 그래도 동생을 챙겨야지. 어차피 걔랑은 헤어질 거라면서…….」

“헤어지긴, 씨발. 야, 그딴 소리 다신 입 밖으로 꺼내지 마.”

「뭐?」

“끊어.”

연우는 짓이기듯 말하고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미치겠네.’ 저절로 드는 생각에 인상을 찌푸렸다.

시준우. 시준우였다.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는데 진석에게서 그 이름을 들으니 그제야 퍼즐이 다 맞는 기분이었다. 연우는 강서원이 화장실에 가겠다고 한 뒤 사라진 그 30분 동안, 단순히 그 말을 누군가의 대화 속에서 주워들은 게 아님을 확신했다.

강서원은 분명 그 말을 직접 들은 거다, 시준우에게. 그리고 시준우가 녀석에게 어떤 태도로, 어떤 방식으로, 어떤 언행으로 말했을지 훤히 보였다.

뜨거워진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시준우가 있는 곳으로 찾아갈까, 아니면 전화를 먼저 할까 생각하던 중이었다. 연우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준우에게 전화가 왔다. 연우는 짐짓 침착한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어.”

「어제 날 그렇게 버리고 가 놓고, 어떻게 전화 한 통이 없냐?」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어.”

연우는 눈을 감았다. 성가시다는 듯한 투였으나 사실이었다.

「왜, 드디어 정신 차렸어?」

“할 말 있으니까 갤러리로 와.”

한참을 잘못 짚은 상대방은 코웃음을 쳤으며, 연우는 그에 상관하지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

「알았어. 15분 내로 갈게.」

멀지 않은 간격으로 대답이 돌아왔다. 연우는 말없이 전화를 끊었다.

준우를 기다리는 동안 연우는 당장 내일 미국으로 가는 항공권을 끊었다. 내일 아침, 놈은 군말 없이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게 될 것이었다.

* * *

연우는 어깨로 중문을 밀면서 집 안으로 들어섰다. 종일 매고 있던 넥타이가 불현듯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는 쇼핑백을 거실 테이블에 내려두고 넥타이를 슬쩍 내렸다. 희미한 불만 켜져 있는 거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주욱 거실을 둘러본 그가 이내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

들어선 방은 시커멨다. 그 사이로 색색거리며 잠을 유영하고 있는 숨소리만 들렸다.

연우는 침대로 다가갔다. 수면등을 켜자 옆으로 누워 몸을 웅크리고 자고 있는 서원이 보였다. 뺨을 어루만지니 잠잠하게 감겨 있던 속눈썹이 깜빡거리며 어렴풋이 눈을 떴다. 연우의 얼굴 위로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가지런한 콧등 위로 입술이 조심스레 내려앉았다.

“…….”

“계속 잘래?”

서원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일어났다.

둘은 거실로 나갔다. 연우는 소파에 앉아 제 허벅지를 툭툭 쳤다. 서원은 머뭇거리면서 그의 허벅지 위에 올랐다. 금세 골반에 커다란 손바닥이 달라붙었다. 골반을 가볍게 잡고 있는 손이 어딘가 불안한 것처럼 연신 장골을 엄지로 매만졌다.

“…….”

“…….”

아침에 어설프게 찢겨나갔던 대화가 공기 중에 맴돌았다. 가만히 시선을 맞추고 있어도, 부드러운 인상의 얼굴은 조금 굳은 채로 풀어지지 않았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만을, 강서원은 기다리고 있었다.

연우는 한숨을 삼켰다. 이제라도 그냥 거짓말을 해버릴까, 싶은 유혹이 들었으나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건 또 안 될 일이었다. 상황을 모면하고자 하는 어설픈 거짓말은 더 큰 불신을 낳을 것이었다. 차라리 지금 인정하고 용서받는 게 나았다.

골반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연우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떼어냈다.

“서원아.”

“네.”

“네가 결혼식장에서 들었다던 말 있잖아. 내가 너랑 헤어질 걸 당연하게 여겼던 거.”

“……네.”

잘못을 시인할 인물은 상대방인데, 강서원은 마치 자신이 벌을 받는 것처럼 스리슬쩍 떨었다. 긴장한 기색이었다. 연우는 착잡함을 느끼면서 잠시 다물었던 입을 작게 열었다.

“맞아. 나, 그랬었어.”

그 말이, 선고처럼 내려졌을 때부터였다.

“…….”

방울같이 크고 반짝거렸던 눈이 더 이상 깜빡거리지 않았다. 꼭 굳은 것처럼 가만히 남자의 입술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급기야 일렁거리는 눈 위로 꼭꼭 잠겨 있던 감정이 망울망울 피어나기 시작했다.

연우는 황급히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진짜, 지금은 안 그래.”

“…….”

“지금은, 서원아, 나 너랑 헤어질 상상도 하기 싫어. 진짜야. 옛날에, 옛날에 그랬어. 지금은 아니야.”

“…….”

망울지던 실망감은 기어이 툭, 눈물이 되어 떨어졌다. 연우는 골반에 머무르던 손을 올려 허겁지겁 서원의 허리를 감쌌다. 상체가 품 안으로 쏟아지기 전, 서원은 그를 저지하듯 연우의 어깨에 손을 얹어 몸을 바로 세웠다. 반대쪽 손으로 한 방울 떨어진 눈을 손등으로 훔쳐낸다.

“……서원아.”

“…….”

“화났어?”

검은 눈이 서원의 얼굴을 걱정스레 샅샅이 훑어보았다. 서원은 손등으로 눈 한쪽을 훔쳐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는 것 빼고는 일견 담담해 보였으나, 그 반응이 남자를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어떤 칭얼거림도 없이 뚝뚝 눈물만 떨궈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차라리 평소 울 때처럼 뭐라뭐라 반말하면서 화내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연우는 쥔 양 옆구리를 조물조물 손으로 쥐었다 펴면서 “그러면, 화 안 났어?” 하고 재차 물었다. 서원이 손가락으로 눈물을 거둬냈다. 그리고 불현듯 퍽, 남자의 어깨를 때렸다. “아야.” 연우가 공연히 반응하자, 두어 대 세게 때린다.

“……화났어요.”

“……화 풀릴 때까지 때려도 돼.”

“그러면 형 어깨 부서질 거예요.”

연우는 숨죽여 웃고 말았다. 이를 눈치챘는지 서원이 그를 노려보았다. 눈에는 눈물이 아직도 그렁그렁했다.

“나 진짜 화났어요.”

“알아.”

“근데 왜 웃어요…….”

“이 상황 때문에 웃은 거 아니야.”

사실이었으나 서원은 연우의 말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네가 귀여워서 웃었다고 하면 또 맞겠지.’ 연우는 생각하면서 자꾸 숙이려는 서원의 뺨을 가볍게 쥐어 올렸다. 노려보던 눈이 시선을 피하듯 내리깔렸다.

“미안해. 그렇게 가볍게 말하고 다녀서 미안해. 진짜로. 진심이야.”

축축이 젖은 눈은 조용히 깜빡거렸다. 서원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으나, 대답과 다르게 서러운 물방울은 한 번 더 흰 뺨을 갈랐다.

“……난 엄마한테도 안 부렸던 어리광을, 대학생씩이나 돼서 다 형한테 부릴 작정인가 봐요.”

“…….”

“형한테 맨날 울고, 투정 부리고……. 이런 것도, 형 붙잡으려면 참아야 하는데. 어른스럽게, 괜찮다고 해야 하는데, 그냥 넘겨야 하는데…….”

“…….”

아래쪽을 향하던 눈이 슬금슬금 올라 기어이 연우를 바라본다. 급기야 눈물이 퐁퐁 솟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폭포수에 당황한 남자가 무어라고 할 새도 없이, 서원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줄줄 흐르는 눈물을 대강 닦아내며 웃는 얼굴이, 어쩐지 억지스럽게 느껴진 찰나였다.

비로소 서원은 무너지는 것처럼 연우의 가슴팍에 퍽, 거세게 제 이마를 묻었다. 옷이 삽시간에 함빡 젖어들었다. 꾹, 힘주어 감은 눈 사이로 눈물이 또르르 흘렀다.

“……어떡하지. 나 못하겠다.”

읊조리는 목소리는 축 처진 채로 물기를 가득 담고 있었다. 그는 참고 있던 숨을 한꺼번에 뱉어내듯 말을 덧붙였다.

“섭섭해서 못 참겠어요…….”

실패다. 형의 흉내를 내서 가볍게 생각하려는 시도도, 그저 장난스럽게 화내 보려는 것도, 다 망했다. 서원은 기어이 백기를 들어 보였다.

형이라면 과거의 일일 뿐이라서 연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것 같았다. 애당초 그가 그렇게 생각했던 것도 저와 그의 차이를 생각하면 당연했다. 자신이 바보 같은 거였고, 그는 그저 현명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은, 지나갔을 뿐이고 현명한 것뿐인 그 사실은 무겁게 쿵쿵 심장을 찌르다 못해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가면서 커다란 흔적을 남겼다. 고통은 좀처럼 그리 쉽게 목 뒤로 넘어가지를 않았다. 그저 아프고, 눈물이 나고, 턱없이 진지해지고 만다.

“망했다.”

서원은 끝내 스스로를 욕했다.

진지함. 지루함. 어색함. 그 무겁고도 느린, 자신의 모든 것.

중학교 때, 반 아이들은 그런 자신을 우습게 생각했지만 한 번도 서러웠던 적이 없었다. 그저 친구가 없는 게 슬펐던 것뿐이었다.

“못 참겠어, 난 안 되나 봐요…….”

하지만 그의 앞에서는 그런 자신이 너무 서러웠다. 아무리 흉내 내려고 해도 되지를 않았다. 그 현실이 답답하다 못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돌연 두 뺨의 온도를 식히기에는 충분할 정도로 서늘한 손이 서원의 뺨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서원의 얼굴을 확인하듯 천천히 올린다. 눈이 마주했다. 동시에, 서원은 우물에서 끌어오는 물처럼 아주 깊은 곳에 있던 말을 길었다.

“……형이 좋아서,”

“…….”

“좋아서, 미워요.”

당황으로 물들었던 눈은 어느새 진지하게 가라앉은 채로 서원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파들파들 떨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무 좋은데, 너무 밉고, 가끔은 싫어서 보기 싫은데도, 떠나갈까 봐 무서워요.”

“…….”

“나는, 형을 좋아하는 게…… 무서워요.”

갈색 눈동자는 단순한 실망감만을 품고 있지 않았다. 연우는 깨달았다.

강서원은 그보다 더 깊고, 처참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에 보았을 때, 호수 같다고 생각했던 그 눈동자는 물기가 다 빠져 다 무너진 땅만을 드러낸 채였다. 눈의 주인이 의도적으로 내비쳤던 얕은 감정. 그리고 그보다 아주 크고 깊은 것이 보였다.

그것의 정체는, 당사자에게 구태여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이가 방금 했던 말들로도, 이 눈으로도 충분했다.

“…….”

상처였다.

제 말 하나, 하나에 간신히 매달리고 있던 강서원이 방금 전 커다랗게 넘어지고 난 뒤에 생긴, 아주 크고 처참한 상처.

그게 중요한가, 하는 제 인생관이 묻어나는 그 질문이 무참히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연우로서는 최초의 경험이었다. 적어도 서원에게는 중요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헤어지면 카페 하나 주겠다는, 생각 없이 내뱉었던 제 말 한마디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설령 자신은 가벼웠다 하더라도 그랬다.

제 말의 끝에는 강서원이 온 힘을 다해 매달려 있었다. 그러니까, 제 말들은 전부 강서원 하나의 무게를 고스란히 달고 있었던 셈이다.

“…….”

돌연 심장이 조여드는 것같이 아팠다.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처럼 머리가 울리는 듯했다. 연우가 무어라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한 본능이 홀리듯 말했다.

“……미안.”

여태껏 사과한 적은 많았는데, 미안하다는 연우의 말에 서원은 처음으로 놀란 얼굴을 했다. 남자는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안해, 서원아. 미안.”

그저 그렇게 되뇌이면서 서원의 머리를 품에 끌어안았다.

그제야 서원은 마음 놓고 울기 시작했다. 남자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로 울기를 허락받은 아이처럼, 넘어진 뒤에 엄마를 찾는 아이처럼, 그는 엉엉 소리 내면서 울었다. 그러면서도 자신과 정말 헤어질 생각이 없는 건지 남자에게 자꾸 확인하듯 물다가, 원망하다가를 반복했다. 백 번도 더 한 것 같은 그 물음과 원망에, 남자는 그렇다고 일일이 답해 주다가도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들의 밤은 서원이 울음을 그칠 무렵 끝이 났다. 새벽이 한참 지난 시간이었다. 연우는 울다 지쳐 잠든 서원을 방에 옮기고 난 후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침대에 누운 그는 눈물에 젖어 살짝 부은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잠에 들었다.

* * *

다음 날 아침, 연우는 잠에서 깼다. 그는 눈을 감은 채로 품에 안은 아이의 머리를 만지기 위해 가슴팍 쪽으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보들보들한 머리칼을 상상하며 품에 안은 무엇인가를 문질렀다.

“…….”

보들보들하지 않다. 푹신하다.

연우는 그를 느끼자마자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아래를 바라본다. 자신이 안고 있던 건, 베개였다.

‘뭐지.’

의아했다. 그는 상체를 일으켰다. 공연히 기분 나빠져 베개를 제 품에서 치워버렸다.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화장실을 갔거나, 주방에서 뭘 먹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비단 그게 아닌 것 같다는 요상한 직감이 들었다.

침대 옆 바닥에 연우의 발이 닿았다. 침대를 벗어난 그가 그대로 문을 향해 걸어가려고 할 때였다. 시야에 무엇인가가 걸렸다.

“…….”

침대 옆, 원목 협탁 위에 노란색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연우는 걸음을 멈추고 포스트잇을 떼어냈다. 떼어서 들여다보지 않아도 대강 읽혔으나, 어이가 없어서 도무지 다시 읽지 않고는 못 배기는 내용이었다. 한 번 더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방학 끝날 때까지 집에 있을게요. 이 상태로 형이랑 잘 지내기 힘들 것 같아요. (화났어요)

그때까지 저 찾지마세요.

형이 문자도 안 보고 전화할까봐 메모합니다. 전화, 문자 하지마세요.

화났어요, 라는 말은 쓰고 난 후 지우려 했던 듯 볼펜으로 엉망진창 그어져 있었으나 필압 탓에 검게 칠해진 흔적들 사이로 보였다. 전화하지 말라고 거듭 말하는 것을 보아 그날, 부재중 전화가 못내 무서웠던 모양이었다.

다시 읽어도 같은 내용이다. 확실히 확인한 연우는 까치집이 된 머리를 쥐어뜯듯 헝클었다.

“하, 진짜…… 진짜, 미쳤나……?”

어이가 없었다. 황당했다. 그러면서도 마치 가출 청소년처럼 편지를 남기고 집을 떠난 강서원을 상상하자니 좀 웃겨서, 연우는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를 쥐다 말고 헛웃음을 지었다.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그 도토리 같은 머리통 안은 무슨 별나라 이야기라도 품고 있는지 항상 저의 예상을 벗어난다. 애라도 키우는 느낌이면 차라리 이 정도로 여유가 없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나 자신도 녀석과 똑같이 변해 가고 있었다. 그 증거로, 어제는 내내 화났다가 쩔쩔매다가 덩달아 우는 얼굴에 고통스러워하다가를 반복하면서 시달리다 잠에 들었고, 지금은 녀석의 유치하기 짝이 없는 도주에 동화되어 결국 속이 타들어 가는 감각을 느끼고 만다.

쿵쿵쿵쿵쿵. 주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연우는 그대로 한 번에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목구멍을 통해 찬물이 몸 안으로 흐르는 게 느껴졌다.

노란 포스트잇이 냉장고 한가운데에 철썩 붙었다.

* * *

인천 대교를 건널 때가 되어서야 연우는 입을 열었다.

“여권 챙겼지?”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준우는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응.” 하고 대답했다. 목소리가 개미 기어가는 것처럼 작았다.

연우는 흘긋, 조수석에 앉은 사람의 얼굴을 살필 수 있게 각도를 조정해 두었던 룸미러로 시선을 던졌다. 강서원의 얼굴 높이에 맞춰 둔 탓에 입가는 보이지 않았지만, 놈의 눈과 코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시준우는 역시나 잔뜩 기가 죽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20년 평생 형에게 호되게 혼난 것이 어제가 최초였을 테니까.

차가 공항 앞에 섰다. 연우는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어 셔츠에 끼우면서 운전석에서 내렸다. 트렁크를 열어 시원시원한 동작으로 큼지막한 캐리어를 내린다.

“공부 열심히 해라.”

연우는 캐리어를 준우 쪽으로 밀면서 말했다. 준우는 캐리어 손잡이를 쥐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심해졌다기보다는, 어제의 일이 그로서는 꽤나 충격이었던 듯싶었다. 그는 제 형과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

“다음에 올 때 서원이랑 밥 한 끼 먹자.”

“…….”

“서원이 형한테 사과도 할 겸.”

“…….”

“알았지?”

“…….”

고집스레 다물린 입은 좀처럼 열릴 생각을 않았다. 연우는 슬쩍 목소리를 낮췄다.

“싫어? 서원이 형이랑 시연우가 징그러운 호모 새끼라 네 성에 안 차?”

“……아니.”

알았어. 압박을 이기지 못해 대답하는 입술이 쪼그라든 채로 부들부들 떨렸다. 사과까지 하라는, 제 형의 은근한 명령이 퍽 억울한지 기어이 준우의 눈에서 분노 어린 눈물이 툭 떨어졌다. 연우는 못 본 척 준우의 등을 문 쪽으로 떠밀었다. 본격적으로 울기 전에 들여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가라. 조심히 가.”

놈은 훌쩍거리며 캐리어를 끌었다.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공항 안에 들어가자마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시연우 개새끼’를 시작으로 온갖 욕을 줄줄이 털어낼 게 분명하다. 벌써부터 귀가 간지러운 것 같았다. 연우는 공연히 제 귓바퀴를 만지작거리면서 차에 올라탔다.

다음 목적지는 확실했다. 검은 차가 고속도로 위를 빠르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 * *

집에서 홀로 늦은 점심을 먹고 있던 중이었다. 재원이 집에 왔다. 터덜터덜 방 안으로 들어가려던 그는 식탁에 앉아 있는 제 형을 발견하고 식탁 건너편에 앉았다. “형 왔네?” 하며 등받이에 등을 기대는 모양이 조금 지쳐 보였다.

“어제 어디 갔어? 교회 갔다 오니까 형 없어져서 놀랐어.”

“그냥, 좀.”

서원은 짐짓 눈을 피하면서 국을 떴다. 재원은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에 먹구름이 가득하다. 서원은 제 동생의 얼굴을 물끄러미 살피면서 “무슨 일 있어?” 하고 물었다.

“……무슨 일은 무슨.”

“아빠 보고 온 거 아냐, 오늘?”

그는 어제 저를 찾는 막내와 문자를 하다가 알게 된 재원의 스케줄을 들먹이며 물었다. 재원은 식탁에 놓인 반찬들을 바라보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는 서원이 튀겨 놓은 치킨 너겟을 손으로 집어 입에 넣어 부자연스럽게 씹었다. 더 묻지 말라는 듯 시선을 피한다.

늘 생기발랄하던 녀석이 저렇게 의기소침해질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서원은 들고 있던 숟가락을 느리게 내려놓으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아빠랑 무슨 일…….”

‘있어?’라고 물음을 끝낼 새도 없이 식탁 위에 올려 두었던 핸드폰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동시에 네모난 액정으로 향했다.

대문짝만하게 쓰인 ‘연우 형’이라는 글자에 서원은 지레 놀라 핸드폰을 가리듯 움켜쥐었다. 받지 말아야 하는데 저를 바라보는 재원의 눈이 괜스레 신경 쓰였다. 이미 당황한 티를 내버렸다. 여기서 안 받으면 이상해 보일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던 서원은 급기야 큼, 헛기침을 하고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집이야?」

“네. 무슨 일이세요.”

짐짓 쌀쌀맞은 태도를 일관해도 타격이 하나도 없는 듯 남자는 천연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거의 다 와 가. 10분 뒤에 나와.」

재원은 통화하는 서원의 얼굴을 덤덤한 얼굴로 보다가 조용히 일어섰다. 끼익, 의자가 바닥을 끄는 소리가 났다. 서원은 터덜터덜 방 안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시선으로 쫓으면서 무슨 일인지 제대로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메모, 못 보셨어요?” 하고 남자에게 말했다.

「봤어. 근데 전해 줄 게 있어서 그래. 할 말도 있고.」

“……집에 동생 있어요.”

「이참에 가족들한테 남친 소개해 주고 싶은 거면 나오지 마. 내가 초인종 누를게.」

다분히 여유로운 목소리와 함께 뚝. 전화가 끊겼다. 서원은 미지근한 온도만 남은 핸드폰을 당황스레 쳐다보다가 금방 욕실로 후다닥 달려갔다.

* * *

남자의 차는 정확히 10분 뒤에 모습을 드러냈다. 서원은 집과 멀리 떨어진 곳까지 걸어가 서 있었다. 서원을 지나치려던 차가 끽, 소리를 내며 멈추더니 슬금슬금 후진했다. 곧이어 운전석 창문이 열렸다.

“왜 여기 서 있어?”

“……용건이나 말해요. 저 화났다고 했잖아요. 왜 맨날 멋대로 행동해요. 이제는 진짜 못 참아요. 미, 미안하다면서요. 내 메모도 봤으면서 왜 왔어요.”

서원은 남자를 기다리는 동안 몇 번이고 생각하고 있던 말들을 쉬지 않고 내뱉기 시작했다. 폭격처럼 말이 이어지는 중간에 남자는 선글라스를 살짝 내려 서원을 바라보았다. 선글라스의 코받침대가 콧대를 따라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그는 뭐라 뭐라 잔소리를 해대는 서원을 흥미롭다는 듯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룻밤 새 쫑알이가 다 됐네.”

쫑알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은 귀여운 별명에 당황한 서원이 입을 벌린 채 남자를 보았다. 어떻게 반응해야 화가 난 흉내를 잘 낼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이, 남자는 웃는 얼굴 그대로 턱짓을 했다.

“타 봐, 일단. 다른 차 오면 비켜 줘야 하잖아. 도로 한복판에 서 있을 수도 없고.”

맞는 말이었다. 서원은 입을 다물고 조수석에 올라탔다. 남자는 한 블록 더 달려 생겨난 갓길에 차를 세웠다. 기어를 바꾸고 뒷좌석으로 팔을 뻗는다. 갑자기 바투 다가온 몸에 서원은 몸을 굳혔다.

부스럭 소리가 났다. 다시 되돌아온 손에는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남자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서원에게 쇼핑백을 내밀었다.

“자, 선물.”

놀란 눈으로 볼 뿐 받아들 생각이 없어 보이는 서원을 향해 쇼핑백이 툭, 한 번 흔들렸다. “빨리 받아. 팔 떨어져.” 하는 목소리에 서원은 눈을 깜빡이며 쇼핑백을 받아들었다.

“시계야. 내 시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길래 같은 걸로 하나 더 샀어.”

연우는 제 손목을 들어 보이다가 다시 핸들 위로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주문 제작하는 거라 좀 오래 걸렸어. 오늘 다 됐다고 연락 왔길래, ……화난 건 아는데, 하루빨리 주고 싶어서.”

풀어 봐. 유혹하듯 속삭이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설프게 쇼핑백을 쥐고 있던 손이 떠듬떠듬 쇼핑백을 열었다.

“…….”

염치없지만 거절하기는 싫었다. 서원은 선악과를 눈앞에 둔 최초의 인간처럼 꼴깍 침을 삼켰다.

형을 둘러싼 것들 중에서, 자신은 이 시계가 형과 가장 닮아 있다고 줄곧 생각해 왔다. 형이 자주 착용하기 때문인지, 분위기가 닮은 것인지, 큰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랬다. 풍경 사진으로 해 두었던 제 메신저 프로필도 형을 따라 기본으로 설정해 둘 정도로, 형을 따라 검은색으로 염색을 할까 고민한 적이 있을 정도로, 어떨 때는 형 그 자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형과 닮고 싶어하는 욕심이 그득그득한 자신에게는 너무도 큰 유혹이었다.

“손목 줘 봐. 매 줄게.”

“…….”

“화나도, 형 부탁은 들어줄 수 있잖아. 이거 하나만 받아 줘. 아깝잖아.”

“…….”

“응? 제발, 서원아. 이것만 받아 주라.”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홀린 듯 손목을 내미는 서원을 보면서 연우는 소리 없이 웃었다. 붉은색 입꼬리가 뱀처럼 미묘하게 휘었다. 시계 끈이 가느다란 손목을 둘렀다.

연우는 시계를 찬 손목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매일 차고 다녀.”

“……네. ……감사합니다.”

감사하다는 말은 모기처럼 작았다. 저도 나중에 일하면 갚겠다느니 하는 말들이 웽웽거리며 뒤따랐으나 연우는 듣지 않았다. 그저 적절한 타이밍만 재기에 바빴다.

“아, 그리고, 서원아.”

돌연 저를 부르는 음성에 어설프게 손목을 든 채로 뭐라 중얼거리던 서원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 동그란 눈과 마주하자마자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지금이 딱이다. 화내다가, 선물을 받게 된 강서원이 지금 얼마나 당황스러울지는 눈에 선하니까.

“혹시, 카페 알바…….”

“…….”

지금이 딱, 녀석이 약해질 타이밍이다.

“해줄 수 있어? 준비 다 끝났는데.”

“아…….”

“그냥 두면 아깝잖아. 아르바이트 구하기도 힘들고……. 난 서원이가 해줬으면 하는데. 일은 별로 안 힘들 거야. 관리해 주는 사람도 많이 있어.”

“…….”

“……안 될까?”

손목을 더듬거리던 손이 내려가 작고 따뜻한 손을 조몰락거렸다. 남자의 꼬드김에, 원래부터 물기가 많은 큼지막한 눈은 순진하게도 단칼에 거절하지 못했다. 정신없이 깜빡거리는 속눈썹이 당혹감을 고스란히 보이고 있었다.

분위기도 좋고, 상황도 딱이다. 강서원이 아무리 삐졌다 하더라도 이걸 거부할 수는 없을 거라고 연우는 확신했다. 검은 눈은 한껏 불쌍한 척하고 있었으나 기다란 입술은 이후 전개가 정해진 연극을 바라보는 감독처럼 슬쩍 웃고 있었다.

“……그,”

한참 동안 빠끔거리던 입술이 비로소 천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연우는 그 입술에 시선을 고정했다.

서원은 머뭇머뭇 연우와 눈을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그게…….”

“…….”

그래. 하겠다고 말해. 그대로 알겠다고 해.

연우는 속으로 되뇌었다. 골대 바로 앞까지 굴러간 축구공을 바라보는 것만 같은 열렬한 눈빛이었다.

“사실은…….”

“…….”

형 하라는 대로 하겠다고.

얼른.

“민규 알바 대타하기로 했어요.”

“…….”

“민규가 축구 하다가 발목을 삐끗해서, 그, 치킨집…… 내일부터 나가요.”

민규, 민규.

그놈의 민규 새끼.

“…….”

손을 주물럭거리던 움직임이 멈췄다.

연우는 차오르는 욕을 삼켰다.

* * *

휴가가 끝나 가고 있었다.

얼마 전 저와 만취한 채로 야밤에 축구를 하다가 발목을 접질린 민규의 병문안을 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경찬은 방금 자리가 난 지하철 의자에 앉으며 서원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강남 맞지?

[강서원] 응 나 알바 지금 끝났어 가는중

[나] 민구 대타?

[강서원] ㅇㅇ

[나] 아ㅋ 나도 가는중 도착하면 문자좀

[강서원] 응

휴가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PC방 붙박이가 되어 게임의 티어를 올리는 대신 강서원의 얼굴을 보는 데에 시간을 쓰기로 한 것은 경찬으로서는 꽤 중대한 결단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강서원을 보지 않고 복귀한다면 내내 마음에 걸릴 것 같았다. 경찬은 3일 전, 민규와 함께 만나려고 했던 그 날 강서원과 했던 통화를 기억했다.

‘경찬. 미안. 나 오늘 못 갈 것 같아.’

‘어? 왜?’

‘……그냥, 좀……. 미안. 나중에 보면 맛있는 거 사 줄게.’

내내 연락이 없던 강서원은 약속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야 제게 전화를 걸어 와 못 갈 것 같다고 말했다. 갑작스러운 통보였으나 화낼 수가 없었다. 놈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힘이 쭉 빠진 채로 바닥 아래로 꺼져 있었다. 아프면 아프다고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놈은 이유를 얼버무렸다. 경찬은 곧바로 무슨 일이 있음을 알아챘다.

그러나 목소리만 들어도 굉장히 힘들어 보이는 놈을 붙잡고 무슨 일이냐고 물을 수는 없었다. 경찬은 모르는 척 알겠다고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오늘,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잡은 건 그 다음 날이었다.

마침내 지하철이 강남에 다다랐을 때였다. 슬슬 내릴 준비를 하는 사람들을 따라 일어서는데, 문자 두 개가 연달아 왔다. 경찬은 사람들 사이에 꽉 낀 채로 핸드폰을 꺼내 들어 확인했다. 문자는 각각 다른 사람에게 온 것이었다.

[강서원] 나 강남 도착. 10번 출구에서 기다리는중

[시연우 형] 경찬아 안녕^^ 혹시 오늘 서원이 만나기로 했어?

경찬의 얼굴 위로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는 확인하듯 문자를 다시 읽었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시연우 형’이라면 몇 주 전 서원이 친해졌다고 소개해 주었던 그 형이었다. 고깃집에서 만났을 때 연락처를 주고받은 이후로 한 번도 연락한 적이 없던 사람이, 하필이면 지금 이때 문자를 보낸다. 절묘하다면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뭐지?’ 그는 생각하면서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엄지가 액정을 짧게 두드렸다.

[나] 나 이제 내려

경찬이 답장을 보낸 사람은 서원뿐이었다. 그는 경쾌하게 홀드 버튼을 누르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 형에게는, 강서원에게 물어보고 답장해도 늦지 않겠지. 경찬은 지하철 밖으로 떠밀리듯 내리면서 생각했다.

* * *

술집 안은 음악 소리가 컸다. 평상시 목소리가 작은 데다가 오늘따라 할 얘기는 또 많았다. 음악 소리를 이길 큰 목소리로 그 긴 이야기를 이어 가려니 목이 아팠다. 이야기 중간중간 목을 축인답시고 소주를 홀짝거리던 서원은, 이야기가 끝날 때쯤에는 취기가 도는지 감정 표현이 평소보다 과감해졌다.

“야, 물 마셔.”

반면 경찬은 소주를 한 잔도 비워내지 못했다. 제 친구 놈의 말을 듣고 있자니 복장이 터져 술맛이 다 떨어진 탓이었다.

차가운 물을 따라 밀어 주자 서원이 고맙다고 중얼거리며 물을 마셨다. 미간을 구긴 채로 그 얼굴을 보고 있던 경찬은 이내 심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잘 모르겠다.”

서원은 컵에서 입술을 떼어냈다. 그리고 의아한 눈으로 경찬을 바라보았다. 힘없이 흐물거리는 손은 물을 찔끔찔끔 쏟아냈다. 그는 입술 아래로 줄줄 흐르는 물을 손등으로 대충 닦아내며 “뭐가?” 했다.

“네가 모아 뒀던 돈 다 털어 가면서 해외 인턴십 가는 거 말이야.”

“…….”

“그것도 그, 형 때문에.”

이게 복장이 터져 술이 한 잔도 들어가지 않은 이유였다.

3일 전, 강서원에게 무슨 일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게 애인 문제일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 애인이 그 ‘시연우’ 형일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언제 사귀었냐는 둥, 어떻게 사귀었냐는 둥, 원래 남자를 좋아한 거냐는 둥의 질문을 할 새도 없이 강서원은 또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내년에, 해외 인턴십을 갈 생각이란다. 그것도 그 형 때문에. 형의 원래 직장이 미국에 있으니까 나중에라도 쉽게 따라갈 수 있게. 최소한, 그에게 걸맞은 사람이 되기 위해.

제 지적에 바보처럼 ‘왜?’ 하며 물어 올 줄 알았는데, 서원은 이해한다는 듯 젖은 손을 티슈로 닦아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지.”

“그렇게 생각하긴 해?”

“응. 솔직히 좀 무모하지. 지금 사랑한다 하더라도, 나중에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차라리 현실을 자각한 이상 더 상처받기 전에 도망가는 게 더 현명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나도.”

서원은 느릿느릿 말하면서 손가락 끝으로 소주잔을 둥글게 쓸었다. 경찬은 그제야 소주를 한 잔 비워내고는 “그렇지. 잘 아네.” 하고 맞장구를 쳤다.

자신이 놈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불편하게 여겼던 부분이었다. 그 형이 설사 진짜 좋은 사람이고 그들이 정말 사랑이라는 것을 하고 있을지라도 그랬다. 현실은 현실이었고, 언제 바뀔지 모르는 게 사람 마음이었다.

어쨌든 나중에 헤어진다 하더라도 해외 인턴십을 하면 녀석의 스펙에는 도움이 되는 거니까 딱히 뜯어말리지 않는 것뿐이지, 서원이 결국 상처를 받을까 걱정이 되는 건 여전했다. 심지어 강서원이 고등학교 때부터 모아 뒀던 그 돈이 어떤 의미인지는 저로서도 잘 알았다. 그건 정말 강서원이 제 마음을 다 바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근데, 그게 비겁한 것 같은 거야.”

“비겁하다고?”

“응. ……일단 지금의 형은 나를 진짜 사랑하고 있는 건데, 나는 미래가 두렵다는 이유로 지금의 형에게서 도망치려고 하는 거니까. 나 상처 안 받겠다고 지금 형한테 상처를 주는 거니까. 비겁한 거지.”

유리를 매만지던 손가락이 머뭇거리며 거두어졌다. 서원은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래서 일단 지금은, 형을 믿으려고.”

“…….”

“내가 상처받을지언정,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상처 주기 싫어.”

내리깐 눈이 어쩐지 조금 성숙하게 느껴졌다. 경찬은 잠시 말을 잃었다가 짐짓 킬킬 웃음을 터뜨렸다.

“아주 염병을 하네.”

“……좀, 그랬어?”

“어.”

서원은 멋쩍은 얼굴로 더듬더듬 제 목 뒤를 쓰다듬었다. 경찬은 웃는 얼굴 그대로 손을 뻗어 서원의 정수리를 헝클었다.

“야, 그러다가 너나 상처받지 마라. 알았어? 내가 맨날 말하잖아. 너무 좋아하면 우습게 본다고.”

“알았어. 아, 맞다. 이것 봐라.”

서원은 퉁명스럽게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화색을 띠며 제 손목을 들이밀었다. 발음이 정확해서 그렇지, 방방 들떠 있는 모습이 줄곧 취해 있던 게 맞긴 맞는 모양이었다.

비싸기로 유명한 시계라 그 형에게 선물 받았을 거라고 아까부터 짐작하고 있기는 했다. 경찬은 고개를 숙여 본격적으로 시계를 구경했다.

“오.”

“형이랑 똑같은 거. 커플.”

“나 한 번만 껴 보자.”

“아, 싫어.”

답지 않게 욕심부리며 시계를 만지려는 손을 짝 쳐내는 게 영 못나 보이지 않았다. 경찬은 킬킬거리며 웃는 소리를 키웠다. 서원은 경찬의 웃음소리에 전염된 것처럼 덩달아 웃었다. “왜 자꾸 웃어.” 하면서 맑게 웃는 목소리가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순수했다.

둘은 그대로 화제를 옮겨 갔다. 민규 얘기부터 경찬의 군대 이야기, 서원의 지나간 군대 이야기까지 거쳐 가니 소주병이 두 병 더 비워졌다. 서원은 기어이 만취한 듯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경찬은 서원을 부축한 채로 계산을 했다. 낑낑 서원을 끌어당기면서 가게 문을 민다.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여름밤의 후덥지근한 열기가 느껴졌다.

“……나, 제대로…….”

걷던 중에 서원이 무어라 꿍얼거리는 게 들렸다. 경찬은 멈춰 서서 “뭐라고?” 하며 서원에게 바짝 귀를 댔다. 웅얼거리는 것을 조합해 보니 제대로 걸을 수 있으니 놓아달라는 뜻이었다.

“됐어. 택시 부를 거니까 그냥 자, 새끼야.”

안 되겠다. 경찬은 포기하듯 생각하면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파절이가 된 사내놈을 끌고 다니는 건 역시 역부족이었다. 그는 숨을 가쁘게 쉬면서 핸드폰 잠금을 풀었다. 집까지 택시비가 꽤 나올 것 같기는 했는데, 그렇다고 얘를 끌고 지하철을 탈 수는 없었다. 병원비가 더 나올 것이었다.

“……안…….”

서원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또 무어라 꿍얼거렸다. 경찬은 조금 전보다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뭐라고?” 했다. 또 조합해 보니 많이 취해서 미안하다는 뜻이었다.

“알면 그냥 조용히 해. 야, 우리 집 간다? 어차피 우리 엄마가 너 보고 싶댔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경찬은 택시를 호출했다. 호출 버튼과 엄지가 맞닿은 그 순간이었다. 불현듯 핸드폰을 쥐고 있는 손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다가온 누군가가 경찬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벌써? 누른 지 1초도 안 된 것 같은데?’ 경찬은 생각했다. 기어이 잠에 들었는지 스륵, 부축하고 있던 몸이 경찬에게로 맥없이 흘러내렸다. 으쌰. 그는 서원의 몸통을 고쳐 잡으며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오셨냐고 물으려던 입이 벌어진 채로 굳었다.

“……어……?”

경찬의 놀란 얼굴에 비해, 반듯한 얼굴은 태연했다.

“무겁겠다. 줘.”

시연우는 그렇게 말하는 중간에 이미 팔을 뻗었다. 부드러운 힘이 서원을 제게로 당겼다. 그는 휘청이는 몸을 그대로 등에 업었다.

경찬은 남자가 서원을 등에 업는 걸 신기루 보듯 망연히 바라보다가, 곧이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 떻게 오셨어요?”

“넌 왜 답장을 안 했는데?”

남자는 흘리듯 조용히 물었다.

추궁하는 목소리는 아니었으나 촘촘히 가시가 박혀 있었다. ‘아. 문자.’ 경찬은 그제야 지하철에 휩쓸리듯 내리면서 동시에 뇌 밖으로 휩쓸려 사라졌던 남자의 문자를 기억했다. 까맣게 잊고 있던 탓에 강서원에게 물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녀석과 이 형 사이에 있던 일들은 이미 다 들은 상태였다. 구태여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강서원이 이 형에게 제 위치를 말했을 확률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

별안간 좋지 않은 예감이 밀려든다.

남자의 목소리에 박혀 있던 가시들은 고스란히 의문이 되어 경찬의 머리를 톡톡톡톡 얕게 건드렸다.

수상하다. 너무, 이상했다. 불현듯 저 때깔 좋은 얼굴이 음습하게 느껴져서 경찬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택시 타고 가는 거지? 조심히 가.”

대답을 바라고 물은 건 아닌 듯 남자는 가볍게 말을 돌렸다. 지체 없이 돌아가려는 몸을 잡아 세운 건 경찬이었다.

“저기, 형.”

남자가 움직임을 멈추고 경찬을 보았다. 경찬은 인상을 쓴 얼굴 그대로 물었다.

“강서원이, 형한테 여기 있다고…… 말 안 했죠?”

“음, 몰라?”

어깨를 들먹이는 꼬라지가 못내 천연덕스럽다. ‘모르긴 뭘 몰라. 이거 완전 미친놈 아니야.’ 경찬은 생각했다.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시 남자를 불렀다.

“저기요.”

그 짧은 순간에 호칭이 여간 삐딱하게 바뀌었다. 남자는 업어 든 서원의 허벅지와 엉덩이 사이를 문질문질 매만지면서 “응, 왜?” 대답했다.

“……위치 추적해요, 설마?”

자신은 머리에 든 의문은 곧바로 해결하고 봐야 직성이 풀리는 타입이었다.

직설적인 물음에도 남자는 당황하지 않았다. 대답도 물론 하지 않았다. 그는 꼭 원숭이가 기대 밖의 재주를 부리는 것을 보며 놀라워하는 것처럼 오, 하면서 엷게 웃을 뿐이었다. 재차 모르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등이 완전히 돌아갔다. 유유히 멀어지는 뒷모습에 강서원이 덜렁 매달려 있었다. 시계추처럼 흔들리는 팔 끝에서 시계가 번쩍거리며 존재감을 밝혔다.

“……뭔데, 저 시발놈은…….”

남자가 저 멀리 모습을 감춘 뒤에 경찬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놈이 자랑했던 시계조차 꺼림칙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까 괜찮다던 강서원의 말이, 왱왱 귓전을 맴돌았다. 마음이 묵직하게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경찬은 집으로 가는 길에 편의점을 들러 맥주캔을 샀다.

* * *

일어나자마자 익숙한 향기가 코 위로 끼쳤다. 서원은 베개에 박고 있던 얼굴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형의 집이었지만, 형의 방은 아니다.

“…….”

무슨 일이 있던 거지. 경찬이가 형을 불렀나.

서원은 베개에 턱을 묻은 채로 생각했다.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이 경찬의 집이 아닌 형의 집에서 일어날 리가 없었다.

그는 상체를 일으켜 제 몸을 살폈다. 몸은 샤워를 한 것처럼 깔끔했고, 형의 집에서 입던 잠옷이 입혀져 있었다. 싹 말린 머리에는 샴푸 냄새가 났다. 이상한 일이지만 숙취도 없었다.

찬찬히 상황을 살피고 나니 뒤이어 밀려오는 건 당연하게도 감정이었다. 민망했다. 서원은 인상을 쓴 채로 제 미간을 짚었다.

단호하게 이 집을 나선 것이 이번 주 월요일이었고, 어젯밤은 수요일이었으며, 지금은 목요일 아침일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은 일주일도 안 되어 술에 찌든 꼴로 형의 집에 온 것이다. 그렇다고 형을 부른 경찬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었다. 몸을 못 가눌 정도로 마신 제 잘못이다.

‘어쨌든, 나가 봐야겠지.’ 끝내 결심한 서원이 머뭇머뭇 방을 나섰다. 자신이 잠든 방은 2층에 있던 방 중 하나였다.

어쩐지 배가 허전하다 했더니 파자마가 접혀 올라가 있었다. 그는 구겨지고 접혀 있는 밑단을 슥슥 내리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돌연 계단과 정면에 자리한 서재의 문이 열렸다. 곧바로 남자와 눈을 마주한 서원은 눈에 띄게 어색해하며 느긋하게 옷을 펴던 손을 빠릿하게 내렸다.

“…….”

“…….”

시연우는 서원을 발견하자 거실로 향하려던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대로 닫힌 문에 비스듬히 기대어 섰다. 그의 눈이 계단을 내려오는 몸을 물끄러미 훑었다. 그는 귀에 핸드폰을 대고 있었다. 통화 중인 모양이었다.

“……네, 다음 주 맞아요. 내내 가 있을 것 같아요. ……. ……. 아니요, 연락하셔도 돼요. 휴가도 아니니까. 메일 보내시면 바로 확인할 수 있어요.”

그는 태연한 얼굴로 그대로 입을 열어 통화를 이어갔다. 그 사이 계단을 다 내려온 서원이 자연스레 남자를 지났다. “그럼 끊을게요.” 연우는 시선으로 서원을 좇으며 급하게 말했다. 툭 전화를 끊는다. 뻗은 팔이 저를 지나친 서원의 허리를 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강서원의 몸이 순식간에 품에 안겨 왔다. 연우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안을 때마다 생각하는 건데, 서원의 몸은 꼭 저의 몸에 딱 맞춰 제작된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안을 때마다 이런 안정감이 느껴질 리가 없었다. 연우는 은은한 흥분감을 느끼면서 마른 어깨에 턱을 묻었다.

“이렇게 안는 건 괜찮아?”

충동적으로 안아버리긴 했으나, 아무튼 지금은 강서원이 정해 둔 기간이라는 이성적인 생각이 따라왔다. 돌발적인 스킨십을 하다가 괜히 거부를 당하기라도 할까 봐 연우는 나지막하게 물었다.

서원은 말없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능청스러운 손이 모르는 척 서원의 가슴께를 꾹 눌렀다. 쿵쿵쿵쿵. 요란하게 뛰는 심장이 느껴졌다. 아닌 척해도 엄청 동요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너무 사랑스러워. 진짜 미치겠다.’ 참지 못한 연우는 결국 서원의 귓바퀴를 꾹 물어버렸다.

“아!”

“아파?”

“아파요. 이런 건…… 싫어요.”

“알았어. 미안.”

그건 또 싫다고 몸을 옹송그리며 빠져나가려고 한다. 연우는 벗어나려는 몸을 꽉 안고는 사과하듯 흔적이 남은 귓바퀴에 쪽쪽 뽀뽀했다. 보송한 피부는 예민한 곳에 뽀뽀할 때마다 움찔거렸다. 벌써 뜨끈하게 달아오르는 열감이 느껴졌다.

“……놔주세요. 씻어야 돼요.”

“싫은데.”

“씻고 알바 가야 돼요.”

“안 보낼래. 계속 이렇게 안고 있어야지. 아무 데도 못 가게.”

연우는 공연히 장난처럼 말하면서 서원의 몸을 터뜨릴 것처럼 꽉 조였다. “숨 막혀요…….” 서원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가만히 안겨 있었다.

“알바 다 못 하게 하고, 학교도 안 보낼 거야.”

귀 끝과 뺨, 관자놀이 위로 키스가 유성우처럼 쉼 없이 펑펑 쏟아졌다. 충만한 느낌에 숨이 끝도 없이 차올랐다. 서원은 벅차오르는 숨을 푹, 내쉬면서 짐짓 퉁명스럽게 “……바보도 아니고, 왜 자꾸 이상한 말 해요.” 했다.

남자는 웃었다. 쪽. 키스와 함께였다.

“우리 애기는 화날 때마다 쨍알거리는구나.”

“그런 적 없어요.”

“귀여워.”

연우는 간질거리는 무엇인가를 이기지 못하고 아득 이를 갈았다. 톡, 밉게 튀어나온 윗입술이 자꾸 시선을 앗아갔다. 통통하고 끝은 뾰족한 게 진짜 예뻤다. 결국 성난 이가 다시 한번 귓바퀴를 물었다. 음흉한 손은 그새 파자마 안으로 들어가 그토록 만지고 싶었던 배와 배꼽을 꾹꾹 매만졌다.

“아……!”

안 그래도 화난 척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이렇게 치대 오니까 정신을 못 차리겠다. 장난기가 다분한 낮은 웃음소리가 산들바람처럼 귓가를 달콤하게 스쳤다.

며칠 형과 스킨십을 하지 않은 탓인지 금세 역치가 낮아진 몸은 날뛰듯 반응하고 있었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서원은 꼴깍, 침을 힘겹게 삼키며 몸을 비틀었다. 이대로면 그냥 다시 형이랑 살아야겠다고 말을 바꿔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면 안 될 일이었다.

어쭙잖게 가출이니 뭐니 들먹이면서 화난 척을 하고서라도, 당분간은 그와 떨어져 있어야 했다. 형 몰래 하고 있는 해외 인턴십 준비 때문이었다. 만약 지금 제가 해외 인턴십 심사를 앞두고 있다는 걸 형에게 들킨다면, 그는 어떻게든 저에게 도움을 주려고 할 것이었다. 그걸 방지하고 싶었다. 자존심 따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형의 옆자리를 가질 자격 정도는 스스로 만들고 싶었다.

“……다음 주에, 어디 가요?”

그런 의미에서 ‘화난 척’을 유지하려면 이 질문도 하면 안 됐지만, 결국 참지 못했다. 귀에 스며들던 웃음소리가 잦아들 즈음에 서원은 제 배를 안고 있는 팔을 만지작거리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조금 전, 계단을 내려오면서 그가 전화 상대에게 했던 말들을 듣고 계속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다.

“나? 다음 주에?”

연우는 서원의 몸을 고쳐 안으면서 가볍게 되물었다. 서원은 고개를 까딱였다. 자그마한 엄지가 연우의 팔을 연신 쓰다듬었다.

“네.”

“미국.”

“……왜?”

연우는 부스스한 갈색 뒤통수에 쪽, 입을 맞추면서 순순히 대답했다.

“그냥, 일하러. 집안일. 거기에 외가 쪽 어른들이 몇몇 살거든.”

“지금 준호 있는 쪽이요?”

“응. 아, 그리고 오늘은 하동 내려가야 돼. 주말에 돌아올 거야.”

제가 알기로 형이 동생들 없이 혼자 하동에 내려가는 건 처음이었다. ‘왜 갑자기 그러지. 무슨 일이 있나.’ 생각하는 사이, 꽁꽁 몸을 싸매던 팔이 서원을 놓아주었다. 몸을 단단히 감싸던 열기가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연우는 동그란 뒤통수를 정리해 주듯 슥슥 쓰다듬으며 말했다. 유혹하듯이 꾀어내는 어조였다.

“토요일 점심에 돌아오니까, 같이 저녁 먹고 싶으면 놀러 와.”

“…….”

“놀러 오는 건 괜찮잖아. 그것도 아니야? 안 돼?”

뻔뻔히 궤변을 늘어놓는다. 서원은 입을 꾹 다물고 내리깔고 있던 눈을 슥 올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생각해 볼게요.”

남자는 가볍게 웃었다. “그래.” 하며 마른 어깨를 잡아 부드럽게 돌렸다. 서원이 욕실 쪽을 보게 한다.

“씻고 나와. 해장국 끓여 줄게.”

톡톡, 커다란 손이 재촉하듯 엉덩이를 두드렸다. 서원은 전혀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 않는 얼굴로 얌전히 욕실을 향했다.

* * *

치킨 기름에 젖은 유산지라도 된 듯했다. 온몸이 눅진하게 늘어졌다.

터덜터덜 밤거리를 걷던 서원은 치킨집 근처 버스 정류장에 앉았다. 맥주 아르바이트보다는 노동 강도가 약하긴 했지만 어쨌든 노동은 노동이었다.

그는 뻐근한 팔을 주물럭대면서 곰곰이 고민하는 얼굴을 했다. 형의 집에서 일어난 것이 벌써 이틀 전의 일이었고, 오늘은 형이 놀러 오라고 말했던 토요일이다. 형은 가볍게 던져 본 말이겠지만 자신은 가볍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목요일부터 오늘까지 계속 고민하고 있던 중이었다.

어쩌지. 형은 와도 그만, 안 와도 그만인 것 같기는 했는데…….

스니커즈가 툭툭 탱탱볼이 튀는 것처럼 도보를 건드렸다.

정류장에 붙은 알림판이 버스 도착을 알렸다. 집으로 가는 버스와 형의 동네로 가는 버스가 동시에 오고 있었다.

일단 뭐라도 탈 준비를 해야 했다. 서원은 카드 지갑을 챙겨 일어났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무음으로 해 둔 탓에 모르고 있었는데, 부재중 전화가 한 통 와 있었다. 발신인을 확인한 그가 슬쩍 눈썹을 구겼다.

그 사이 두 대의 버스가 연달아 정류장에 도착했다. 서원은 여전히 정류장에 선 채로 발신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윽고 통화 연결음이 끊겼다. 전화 상대방이 살가운 목소리로 그를 반겼다.

「어, 서원아. 알바 하고 있었어?」

“어. 왜?”

조금 전만 해도 경쾌하게 도보를 건드리던 고무 밑창은 어느새 질질 늘어지는 소리를 내면서 바닥을 짓이겼다. 서원은 푹 고개를 숙인 채 성질을 부리듯 땅바닥을 괴롭혔다.

「짜식이, 정 없게. 백화점에서 그렇게 가고 나서, 어? 오랜만에 아빠가 먼저 전화한 건데.」

“……왜 전화했는데.”

버스가 지나간 정류장에는 서원이 홀로 남겨졌다. 정류장 옆으로 쌩쌩 차들이 지나는 소리가 매서웠다. 상대방은 서원의 쌀쌀맞은 반응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허허. 쇳소리가 섞인 웃음소리가 났다.

「아빠랑 단둘이서 소주 한잔하자.」

“…….”

갑자기 내가 왜요?

라는 말을 조금 더 예의 바르게 말하기 위해 서원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말을 순화시키는 그 찰나에, 그의 아빠는 서원이 할 말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말을 덧붙였다.

「재원이 놈 때문에 그래. 너, 재원이 놈이 아빠한테 명동 한복판에서 소리 지른 건 아냐? 버릇없이?」

당당한 목소리였다.

재원의 친부인 그는, 형인 서원에게 책임을 묻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 미묘하고 부적절한 책임 전가는 서원만 느꼈다. 심지어 말을 뱉은 당사자조차도 그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가족에 대한 스트레스는 늘 괜찮아질 만하면 어김없이 다시 찾아온다. 마치 형태 없는 굴레 같았다. 지긋지긋하다. 별안간 머리가 무거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서원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역삼으로 가면 돼?”

* * *

택시가 한산한 도로를 내달렸다. 서원은 뒷좌석에 앉아 검은 한강과 그 위로 비친 아파트의 불빛들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울렁거리고, 반짝거리는 것이 꼭 별무리 같았다.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2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다시 집으로 돌아갈까.’ 서원은 멍한 눈으로 톡톡, 유리창 너머의 불빛들을 건드리면서 소심한 생각을 했다.

많이 충동적이긴 했다. 물론 형은 우리 집, 우리 집, 했으나 엄연히 따지면 그 집은 온전히 형의 집이었다. 주인에게 통보도 하지 않고 타인의 영역에 들이닥치는 건 처음이었다. 꼭 빈집털이 도둑이 된 것처럼 떨렸다. 너무 민폐가 아닐까 싶은, 여릿한 불안감이 들기도 했다.

“학생, 다 왔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

마침내 택시가 집 앞에 멈춰 섰다. ‘아니야. 그냥 얼굴만 보고 오는 거니까.’ 서원은 스스로를 설득하며 택시에서 내렸다.

부쩍 한적한 분위기를 뽐내는 동네는 새벽 또한 조용하게 보내고 있었다.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조경용 나무 밑을 기어 다니는 개미들의 소리까지도 들릴 것 같았다. 서걱거리는 작은 곤충의 움직임 위로 서원의 발소리가 얹혔다.

대문이 열렸다. 어두운 정원이 보임과 동시에 쏴아아, 나뭇잎들이 부대끼는 소리가 났다. 서원은 그 사이를 조심스럽게 걸었다. 이윽고 현관문 앞에 서서는 잠시 망설인다. 머뭇머뭇 엄지를 지문인식구에 대자 기계음이 났다. 기분 탓인지 소리가 요란하고 컸다.

집안은 잠든 것처럼 새카맸다.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침실을 향해 걸어가던 중이었다. 서원은 별안간 부엌 앞에서 멈춰 섰다. 놀란 듯 눈을 둥그렇게 뜬 채였다. 그는 물끄러미 냉장고 앞에 놓여 있는 기다란 식탁 위를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 다시 걸음을 뗐다.

비로소 침실 앞이었다. 서원은 큼, 공연히 목을 가다듬으며 문을 응시했다. 빳빳해진 손이 침실 문을 열었다.

쿵.

문이 닫히는 소리가 컸다. 서원은 삐질,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면서 문고리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 등을 돌렸다.

새카만 거실과 달리, 달빛 때문인지 방 안은 푸르스름했다. 단순한 구조의 침실은 침대의 존재감이 강했다. 유독 넓은 침대 위, 그 한가운데도 아니고 모퉁이에 남자가 길게 몸을 뻗은 채로 누워 있었다.

서원은 살금살금 걸어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못내 당황한 눈으로 남자를 멀거니 내려본다.

“…….”

‘어디 갔다 왔나.’ 서원은 생각했다. 그리고 남자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천천히 침대 옆에 앉았다. 두 팔이 침대 시트 위에 얹혔다.

남자는 정장 차림으로 잠들어 있었다. 더하여 늘 자연스럽게 넘기거나 그냥 눈썹을 덮게 두었던 앞머리도 깔끔하게 뒤로 넘겨 고정한 채였다. 이불은 덮지 않았고, 긴 다리 한쪽은 침대를 벗어나 발 한쪽이 바닥에 닿아 있었다. 잠자리에 들었다기보다는, 깜빡 잠에 빠진 모양새였다.

서원은 잠든 연우를 꼼꼼하게 훑었다. 정장 차림이 낯설다거나 왜 이러고 자고 있을까 싶은 의아함은 둘째 치고, 잠든 형을 바라보는 것이 꽤 쏠쏠한 재미였다. ‘잘생겼다.’ 단순하고도 강렬한 감상이 들었다.

‘이마 좀 봐.’

설렘이 가득한 눈동자가 바쁘게 굴렀다. 달뜬 시선은 잘생긴 이마부터 시작되어 눈썹뼈, 깊은 눈가, 콧대, 유혹적으로 생긴 입술까지 느긋하게 미끄러졌다.

이제는 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애틋한 감정이 이슬처럼 몽글몽글 맺혔다. 서원은 공연히 손을 쥐었다 펴면서 얼른 심사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얼른 해외 인턴십 갔으면 좋겠다고. 아니, 어떻게든 악착같이 스펙을 쌓아서 얼른 성공한다면. 아니, 얼른 그의 옆자리에 어울릴 만한 어른이 된다면.

당당하게 그를 가지게 된다면.

그리고 그때였다.

“왜 쳐다봐.”

낮게 잠긴 목소리가 뜨거운 시선을 잡아챘다. 화들짝 놀란 서원이 몸을 떨었다. 감겨 있던 눈이 슬며시 뜨인다. 돌연 손이 붙잡혔다. 남자는 서원의 손을 쥐어 제 얼굴 쪽으로 당겼다. 그리고 작은 손에 제 코를 박았다.

“……자는, 자는 줄 알고…….”

서원은 놀라 굳은 입을 가까스로 움직였다. 얼뜬 목소리까지는 감출 정신이 없었다.

“잤어. 지금 깬 거야.”

거짓말은 아닌 듯 목소리가 푹 젖은 것처럼 나른했다. 손바닥에 입술과 코를 묻고 있던 남자가 점점 손을 더 깊게 끌어당겼다. 기어이 코끝에 손목 안쪽이 닿았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났다. 탐미하는 듯한 얼굴에 공연히 긴장이 됐다. 남자가 저를 쳐다보고 있지 않음에도 갑자기 그의 얼굴을 보는 게 부끄럽게 느껴졌다. 서원은 도망치듯 시선을 비꼈다.

도망간 시선은 남자에게 잡힌 손의 손가락 끝까지 도달했다. 그의 관자놀이 부근이었다. 그 순간, 무엇을 발견한 서원이 인상을 찌푸렸다.

“……형, 여기 왜 이래요?”

상처였다. 그의 관자놀이에 짧고 깊게 찢긴 상처가 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약한 생채기 정도가 아니었다. 놀란 서원이 조금 더 자세히 보려는 듯 허리를 숙였다. 그와 동시에 남자가 서원의 손목 안쪽을 깨물었다.

“아!”

“담배 피우고 왔어?”

예리한 말이 갑작스레 코앞으로 닿는다. 서원은 쉽사리 주의를 빼앗겼다. 관자놀이를 파고들던 시선이 스륵 이동했다. 동그란 눈동자가 제 눈을 바라보자 남자는 자연스럽게 전환한 화제를 이었다.

“요즘에 안 피운 걸로 알아서. 손에서 담배 냄새나네.”

“아…… 네. 피웠어요.”

손 닦고 올게요.

서원은 황급히 중얼거리며 다리에 힘을 주었다. 연우는 일어나려는 그의 팔을 붙잡아 저지했다.

“괜찮아. 있어.”

“그래도…….”

“나쁘다고 한 거 아니야. 나도 담배 피우는데 뭐.”

남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팔을 옆으로 뻗어 제 팔뚝을 툭툭 쳤다. “올라와. 형 안아 줘.” 하는 목소리가 조금은 몽롱하게 느껴졌다. 서원은 눈을 깜빡이다 잠자코 침대로 올라갔다. 딱딱한 팔에 머리를 대자 남자가 서원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가까운 곳에 두 얼굴이 자리했다.

“오늘, 속상한 일 있었어?”

담배를 찾은 것도 그렇고, 요즘의 녀석답지 않게 순순하게 안겨드는 것도 그렇고, 무슨 일이 있겠다는 것은 자연스레 추측이 가능했다. 남자는 나지막이 물으면서 서원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서원은 잠시 망설이다가 충동적으로 “……조금.”이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무슨 일인지 구체적으로 물어 올 거라고 짐작했는데, 남자는 툭 서원의 코끝을 건드리기만 했다.

“서원이가 조금 속상하면 나는 엄청 속상한데. 어쩌지.”

꼭 자신이 오늘 무슨 일을 겪었는지, 왜 이렇게 새벽에 불쑥 찾아와 약하게 구는 것인지 아는 듯한 말이었다.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서원은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

몇 시간 전, 그리고 역삼 주변. 고기 기름처럼 매캐한 연기가 공기 위로 떠다니던 그 고깃집에서 자신과 제 아버지가 했던 말들, 또 다소 언성을 높이고 말았던 그 대화 주제들……. 자신은 그에 관한 것들을 한 번도 형에게 꺼내 보인 적이 없었다. 물론 누구에게도 나서서 먼저 말한 적은 없지만, 특히나 형에게는 부쩍 티를 내지 않았던 주제였다.

……뭔가를 아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든 찰나였다. 마주 본 얼굴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왜 그렇게 빤히 봐, 부끄럽게.”

“…….”

아닌가.

느물거리는 말투에 움트던 생각이 쉽사리 잘려 나갔다. 그제야 슬쩍 굳어 있던 서원의 몸이 풀렸다.

“……내가 보낸 문자 못 봤어요?”

“뭐? 오늘 집에 못 온다는 거?”

서원은 짐짓 화제를 옮겼다. 남자만큼 능숙하지는 못했으나 연우는 순순히 옮겨 간 화제를 따랐다.

서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봤지.” 하고 대답했다.

“……근데 왜, 식탁에 밥이 있어요. 반찬이랑…….”

조금 전, 부엌에서 잠깐 걸음을 멈추었던 이유였다. 식탁 위에 갖가지 반찬들과 두 공기의 밥, 두 벌의 수저가 마주 본 채로 놓여 있었다.

남자는 별거 아니라는 듯 소리 없이 웃었다.

“내가 한 거 아니야. 일해 주시는 분한테 부탁한 거야. 네 문자는 집 와서 봤어. 밥은 이미 차려진 상태였고.”

“…….”

“치우기 귀찮고, 강서원은 안 온대고, 갑자기 씻을 의욕도 사라져서 침대에 잠깐 누워 있으려던 게 그만 푹 잠들어버렸네.”

조곤조곤 말하면서도 느리게 껌뻑이는 눈을 보니 많이 피곤해 보이기는 했다. 아무래도 집안일이 바쁜 모양이었다. 무슨 일일까, 서원이 가볍게 궁금증을 띄우는 사이, 남자가 서원의 머리를 받치고 있던 팔을 끌어당겼다. 머리통을 품에 감싸듯 안는다.

향수 향기가 한꺼번에 코를 간지럽혔다. 서원은 그의 몸에 안긴 채 괜스레 꼼지락거렸다.

“형, 자면 안 돼요. 씻고 자요…….”

“응. 5분만.”

남자는 눈을 감은 채 서원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견고한 힘이었다.

온몸에 힘을 풀자, 쪽, 이마를 간질이는 입술이 느껴졌다. 서원은 도로록 굴리던 눈을 질끈 감았다.

* * *

정오에 문자가 왔다. 다음 학기 해외 인턴십에 합격했다는 내용이었다.

서원은 문자를 받은 이후 치킨집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얼른 형을 만나 웃는 얼굴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다. 포스트잇에 휘갈기듯 썼던 그 말들은 전혀 지켜지지 못했고, 화난 척도 어색하기 그지없었으며, 심지어 오늘 아침까지도 자신은 형의 집에서 일어났지만 어쨌든 제 목표는 성공했으니까 나쁘지 않은 일주일이었다. 이 이야기도 전부 형에게 다 하고 싶었다. 사실 자신은 화나지 않았으며, 해외 인턴십을 합격한 뒤 형에게 서프라이즈로 말해 주고 싶었던 것뿐이라고. 그리고, 자신은 이제 열심히 할 작정이니까 형은 기다려만 달라고. 평생 같이 살자고.

마침내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다. 서원은 행주를 쥔 채 내부로 들어갔다. 행주를 빨고 손을 닦은 뒤 유니폼을 벗었다. 사물함 안에 입고 온 티셔츠와 그 위에 고스란히 올려 둔 시계가 있었다. 매일 차고 다니라는 형의 말대로, 자신은 한 번도 시계를 빼놓고 다닌 적이 없었다.

티셔츠를 입고 시계를 찬 서원이 그대로 시간을 확인했다. 공항 리무진 도착까지 10분가량이 남아 있었다.

지난 새벽, 형은 오늘 밤 10시 비행기를 탄다고 했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서원이 별안간 뛰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었다. 치킨집에서 버스 정류장까지는 걸어서 15분 거리였다. 배차 간격이 넓어서 이번 리무진 버스를 놓치면 형을 볼 수 없었다. 형이 비행기를 타기 전에, 잠깐이라도 봐야 했다. 물론 형이 미국에서 돌아오면 말해도 되지만 당장이라도 얼굴을 보고 말하고 싶었다.

서원은 다리에 힘을 주고 계속 달렸다. 중간에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잠깐 울렸다가 끊기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것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저 멀리서 버스 정류장과 다가오는 버스가 동시에 보였다.

“하아, 하……. 안, 녕하세요.”

끝내 헐떡이는 숨이 목 위까지 차올랐다. 서원은 저를 의아하게 바라보는 버스 기사에게 인사하면서 단말기에 제 지갑을 갖다 대었다. 다행히 버스에 탄 것이었다. 그는 새 가죽 냄새가 나는 버스 의자에 앉으면서 핸드폰을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 1건. 경찬이.

형, 아니면 동생들 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서원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면서 경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금방 연결되었다.

「어.」

연결된 상대방의 목소리는 조금 경직되어 있었다. 서원은 의자에 등을 기대면서 “어, 왜 전화했어?” 했다.

「……아, 그게…….」

질질 끄는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급기야 서원이 눈썹 한쪽을 올리면서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겼나 싶었다.

경찬은 끙, 앓는 소리를 내더니 어렵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음…… 내가 진짜 고민 많이 했는데…….」

“…….”

「……아, 내가 이걸 말해야 하나, 안 해야 하나, 싶어서. 지금도 잘 모르겠는데…….」

말을 잇는 소리가 더뎠다. 아직까지도 고민 중인지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응, 뭔데? 말해 봐. 괜찮아.”

이야기를 종용하자 전화기 너머로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김경찬은 처음이다. 서원은 불현듯 불안감을 느꼈다. ‘진짜 어디가 안 좋나.’ 생각한 다음 순간 경찬이 입을 뗐다. 음성만 듣고 있을 뿐인데도 그가 지금도 얼마나 망설이고 있는지 느껴질 정도였다.

「저기, 서원아.」

“응.”

「나도 확실한 건 아니니까, 그냥…… 알아만 둬.」

“……응.”

거듭 한숨을 쉰다. 문득 버스 안 에어컨 바람이 조금 쌀쌀하게 느껴졌다. 서원은 허벅지 아래에 손 한쪽을 넣었다.

「……있잖아, 너랑 나랑 술 마신 날. 그러니까, 수요일에…….」

초록색 버스가 거침없는 속도로 도시의 풍경을 갈랐다.

통화는 길게 이어졌다.

* * *

시연우는 공항 벤치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라운지가 아닌 이런 곳에 앉아 있는 것은 처음이라 불편하고 시끄러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오늘 강서원이 저를 배웅 나올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촉박했다. 녀석이 오면 얼마 보지 못할 게 분명하니까 조금이라도 빨리 봐야 했다.

도넛이라도 하나 먹이고 가고 싶은데. 다 먹는 거 보고 들어가고 싶은데. 뽀뽀도 좀 하고, 눈도 좀 보고, 손도 좀 조물조물, 쪽쪽……. 아, 왜 안 오지. 길이 막히나.

거침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지금 녀석을 못 보면 일주일 내내 보지 못한다는 생각이 짜증을 돋운다. ‘어디 있는지 봐야겠다.’ 급기야 그는 시계에 박고 있던 고개를 들고 핸드폰을 꺼냈다. 이런 용도로 쓰려고 위치추적기를 심어 둔 건 아니지만, 급하니까 어쩔 수 없었다.

“…….”

돌연 매끈한 미간이 구겨졌다.

분명 20분 전, 위치를 확인했을 때만 해도 공항 쪽으로 오고 있던 강서원은 금세 방향을 틀어 다른 쪽으로 가고 있었다.

‘뭐지? 사고라도 났나?’ 그에 관해서는 과민한 머리가 번뜩 불길한 생각을 떠올린다. 연우는 결국 평소 켜 두지 않는 핸드폰을 꺼내 켰다. 성가신 사람들을 대하는 용도의 핸드폰이었다.

전원을 켜자마자 폭발적으로 알람이 울렸다. 띵. 띵. 띵. 띵. 띵. 쉴 새 없는 알람 소리에 옆에 앉아 있던 여자가 힐끔 쳐다볼 정도였다. 연우는 놀라지도 않고 무음으로 전환했다. 요즘 폭탄을 터뜨려 둔 게 있으니 예상했던 바였다. 목, 금, 토. 고작 삼 일 사이 사촌들과 젊은 축에 속하는 손윗사람들에게 온 문자가 300개가 넘었다. 부재중 전화도 마찬가지였다.

하여간 유난들은. 할 짓도 없나. 그는 알람들을 무시하고 서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번호로는 처음 거는 것이니 저일지 모를 것이었다. 어떻게든 사고가 나지 않았음을 확인받아 불길한 생각의 불씨를 꺼트리고 싶었다. 녀석이 멀쩡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면 그대로 끊어버릴 생각이었다.

「고객님이 통화 중이어서, 삐 소리 후…….」

하지만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조용하고 뜨끈한 목소리 대신 통화 중이라는 안내 음성이 들려왔다. 몇 번을 다시 걸었으나 똑같았다. 어찌 되었든 통화 중이라는 뜻이니 사고가 난 건 아닌 것 같았다.

연우는 아랫입술을 씹으며 일어섰다. 입국장으로 들어갈 시간이었다.

* * *

드디어 금요일.

일주일 내내 얼마나 오늘을 기다렸던가. 태원은 감격스러웠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냥 금요일이 아니다. 지하철 출구 앞에서 물티슈를 나누어 주는 전도 봉사가 있는 금요일이었다. 오늘은 봉사를 한 뒤에 봉사팀 회식이 예정되어 있었고, 이은혜의 생일 파티도 겸한다 했다. 동시에 태원의 캘린더 위에 체크가 되어 있는 날이기도 했다.

아주 중요한 날. 바로 자신이 이은혜에게 고백을 하는 날이었다.

“큼큼.”

긴장을 완화시키기 위해 계속 목을 가다듬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태원은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제 용모를 훑어보았다. 멋들어진 스트릿 브랜드 셔츠. 부담스럽지 않게 모양을 만든 머리. 진청바지……. 영 나쁘지는 않은데, 뭔가 허전하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쿵쿵쿵쿵 제 방을 벗어났다.

둘째 형의 방문은 꾹 닫혀 있었다. 태원은 바로 돌릴 기세로 덥석 문고리를 잡았다가 문득 손을 멈추었다.

“…….”

요즘 기분 안 좋아 보이던데.

그런 생각이 떠오른 탓이었다. 잘은 모르지만, 요즘 제 형은 아빠와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뭐냐고 물어도 넌 몰라도 된다며 말해 주지 않은 지 며칠째였다. 여하튼 저기압이었다. 잘못 걸리면 괜히 못된 소리만 얻어들을 게 뻔했다. 태원은 그대로 문고리에서 손을 떼어냈다.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걷는 발이 향한 곳은 첫째 형의 방이었다. 가는 동안 태원은 요즘 첫째 형의 기분은 어땠는지 떠올렸다. 마주친 적은 별로 없지만 썩 나빠 보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방문이 열렸다. 끼이익. 느리게 열린 문틈 사이로 태원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첫째 형은 침대에 걸터앉아 무엇인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형, 뭐 해……?”

대답이 없다. 태원은 의아해하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어쩐지 위축이 되었다. 그는 발걸음 소리를 잔뜩 죽인 채로 제 형의 곁으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톡톡, 어깨를 치자 누군가 들어온 지도 몰랐던 듯 푹 숙이고 있던 고개가 번쩍 들렸다. 형이 손에 쥐고 있던 것은 요즘 제 눈에도 띄었던, 비싸 보이는 가죽 시계였다.

“왜?”

형은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눈가가 벌겠다. ‘잠을 못 잤나.’ 태원은 생각하면서 “뭐 해?” 다시 물었다.

“그냥, 생각.”

“알바 가는 날 아니야?”

“오늘 못 간다고 했어. 몸이 안 좋아서.”

“어디 안 좋아? 아침에 나갔다 들어온 거, 병원 갔다 온 거였어?”

지금 보니 표정만 덤덤할 뿐 얼굴이 핼쑥했다. 태원이 걱정하는 얼굴로 제 형을 쳐다보며 그의 옆에 앉았다. 침대가 출렁였다.

“아냐. 잠깐 어디 갔다 올 일이 있어서. 병원 갈 정도는 아니야. ……왜 들어왔어?”

걱정하는 눈빛을 만면에 드러내 보이는 제 동생이 귀엽다. 단정한 얼굴이 픽 건조하게 웃었다. 태원의 머리를 슥 매만진다. 태원은 화들짝 놀라면서 그의 손길을 피했다. “안 돼. 왁스 바른 거야. 만지지 마.” 하며 수선을 떤다.

“웬 왁스?”

차림새를 훑는 시선이 민망하다. 태원은 짐짓 딴청을 피우며 “아, 그냥…….” 했다.

“내 방에 뭐 더 걸칠 거 없나 들어온 거구나.”

예삿일이냐는 듯한 목소리였다. 큰형의 덤덤한 지적에 태원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흘긋, 큰형이 보고 있던 시계를 바라보았다.

사실 저걸 노리고 왔던 게 맞다. 형이 자주 끼고 다니는 것 같기는 했는데, 웬일인지 이번 주 내내 형의 손목은 비어 있었다. 아무리 비싸 보여도 질릴 수 있다. 예상외의 수확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어 들어온 것이었다.

“이거 끼고 싶어서?”

태원의 시선을 느낀 서원이 시계를 들어 보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묻는다. 평소보다 훨씬 냉소적인 어조였으나 떨어질지도 모르는 콩고물에 정신이 팔린 태원은 눈치채지 못했다.

“응……. 근데 형이 싫으면 안 빌려줘도 돼. 그냥 하루만…….”

“자.”

자신 없는 꿍얼거림이 채 다 끝나기도 전이었다. 차갑게 시계를 흘긋 내려본 서원이 태원의 손 위에 시계를 얹었다. 태원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헉. 진짜?”

“어. 하고 가.”

제 큰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망설임 없이 말했다. 어쩐지 가까이서 보니 더 비싸 보였다. 명품 시계 같은 건 잘 모르지만 딱 봐도 때깔이 다르다. 덜컥 허락을 받고 나니 흠집이라도 낼까 겁이 난다. 태원은 시계를 문질거리며 재차 물었다.

“……진짜 나 해도 돼? 이거 엄청 비싸 보여.”

“상관없어.”

“……아니야. 내가 모르고 흠집 내면…….”

“상관없다니까.”

말을 자르고 되풀이하는 목소리가 화를 짓씹는 것 같았다. 놀란 태원이 말을 멈추었다. 걱정스레 시계를 바라보던 눈을 거두고 제 형을 바라본다.

그는 시계를 노려보고 있었다. 잠잠했던 눈동자의 표면이 고요하게 요동친다.

“……형?”

태원의 부름에 눈동자가 깜빡거리며 느리게 이동했다. 화가 난 건가, 싶었는데 눈을 마주하고 있자니 어쩐지 툭 치면 울 것 같기도 하다. 태원은 돌연 당황했다.

싸늘하게 식은 입술이 작게 달싹였다.

“상관없으니까, 써.”

“…….”

“망가뜨리든, 부수든, 상관없어.”

저를 보며 하고 있지만, 저에게 하고 있는 말이 아닌 것 같았다. 화가 나 있다. 형이 이렇게 화내는 건 아빠와 싸우는 것을 봤을 때 빼고는 처음이었다.

태원이 무어라 말을 꺼낼 새도 없이 흘긋, 시계를 한 번 더 바라본 서원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침대가 한 번 더 출렁거렸다.

태원은 방문을 여는 뒷모습을 벙찐 얼굴로 바라보았다. 제 형은 문을 젖히면서 반대쪽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이내 그의 뒷모습마저 사라졌다. 멀찍이서 문소리가 들려온다. 형은 뒷마당으로 나간 것 같았다. 뒷마당에는 엄마의 텃밭 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

첫째 형도 무슨 일 있나 봐.

방 안에 홀로 남겨진 태원은 생각했다.

* * *

[서원아, 연락하지 말랬는데 연락해서 미안. 비행 전에 문자 남겨 놓을게, 그냥 편지라고 생각해. 별 건 아니고, 혹시 이 문자 보면 답장 줄 수 있어? 괜히 걱정돼서. (꿈자리 뒤숭숭)

P.S. 형 일요일 오후 2시에 한국 도착해. 그리고 그날이... 약속한 기한도 끝나는 날이야. 그러니까... 마중 나와줘도 될 것 같은데... 아닌가?ㅎㅎ 피곤하면 괜찮아. 그냥 너무 보고싶어서.]

급기야 시연우는 제가 남긴 문자를 여러 번 읽어보기에 이르렀다.

도무지 모르겠다. 아무리 읽어 보아도 잘못된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기껏해야 강서원이 남겼던 포스트잇 속 괄호를 따라 쓴 것 정도. 그러나 그 정도는 그냥 장난으로 넘겨도 대수롭지 않은 부분이었다. 심지어 강서원이라면 모르고 넘어갈 터였다.

그렇다면 대체 왜지. 연우는 캐리어를 끌며 고민을 이었다. 출국할 때 보냈던 문자의 답장을 입국할 때까지 받지 못하고 있다는 건 단순히 시간의 문제가 아니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거나, 혹은 고의적으로 무시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다.

“일단 보자, 애기가 어디 있는지…….”

짐을 싣고 운전석에 올라탄 연우는 피곤에 찌든 눈을 슥슥 비비면서 핸들에 두 손목을 걸쳤다. 그리고 핸드폰으로 시계의 위치를 확인했다. 사실 지금 몸 상태라면 집으로 돌아가 한껏 잠을 자기에도 부족했다. 알았다. 그런데 어쩔 수가 없었다.

‘일단 오늘은 꼭 만나야 돼. 7시 전에는. 오늘 밤부터는 또…….’

조바심을 내며 괴롭히듯 액정을 두드리던 손이 불현듯 멎었다.

시계는 강북의 번화가 쪽에 있었다. 만약 답장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지금 강북에 있을 리가 없다. 고의였구나. 연우는 결론을 내리면서 손을 내렸다. 차의 시동이 걸렸다.

강북까지 가던 중에 위기감을 느꼈다. 그는 중간에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대리기사를 불렀다. 그리고 대리기사가 잠든 그를 깨웠을 때는 40분이 지난 뒤였다. 목이 뻐근했다. 연우는 목을 좌우로 누르면서 차에서 내렸다. 시계는 아직도 비슷한 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평소 녀석이 노는 데가 아닌데.’ 연우는 중고등학생들이 모여 노는 거리 한가운데를 걸으며 생각했다. 의아했다. 자신의 문자에 답장을 안 한 건 약속한 기한이 지나지 않았으니 일부러 모질게 군 거라고 쳐도 평소 오지도 않은 곳에 와 있는 게 영 수상쩍었다. 심지어, 오늘이 제가 오는 날이라는 걸 모르지 않을 터였다.

시계는 8층짜리 건물 안에 있었다. 그는 건물 안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층별 안내표를 훑어보았다. 5층부터는 원룸텔이고, 4층은 저녁부터 여는 술집들이었다. 2층은 식당들, 그리고, 3층에는 PC방과 코인노래방이 있었다.

PC방. 연우는 그를 확인하자마자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긴 다리가 계단을 겅중겅중 뛰어가듯 올랐다.

‘여기에 있는지 어떻게 알았다고 하지. 아, 몰라. 대충 둘러대면 되겠지.’ 그는 3층에 다다라서야 떠오른 의례적인 생각들을 대충 넘겼다. 그런 사사로운 수습은 제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자신은 강서원의 얼굴을 한시라도 빨리 보는 게 중요했다.

탁. 버튼을 누르자 자동문이 열렸다. 연우는 다시 한번 핸드폰을 꺼내 시계의 위치를 확인했다. 내부의 서늘한 공기가 그의 얼굴을 에워쌌다.

카운터 앞에 앉아 있는 직원은 핸드폰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연우는 맨 안쪽으로 걸어가 섰다. 키가 큰 덕에 서 있기만 해도 자리들이 잘 보였다.

그는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죽 훑었다. 어두운 조명과 칸막이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뒤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만 봐도 충분했다. 시계를 찬 손만 찾으면 되었다.

비로소 네 번째 열에 다다랐을 때였다. 사람들의 손을 훑던 시선이 뚝 멈추었다.

시계다.

그는 곧바로 시계를 향해 걸어갔다. 등받이가 높은 의자 때문에 시계를 찬 손과 팔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어쩐지 그에 가까워질수록 손 모양이 강서원 같지가 않았다. 위화감이 들었다. 하지만 시계는 가까이서 보아도 강서원의 것이 맞았다. ‘얼굴부터 확인해야겠다.’ 생각한 연우는 툭툭 어깨를 두드리는 대신 걸음을 비틀었다.

연우는 시계를 찬 누군가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자리와 아예 멀찍이 떨어진 반대편이었다. 잠시 후, 자리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허리를 쭉 폈다. 모니터에 가려 있던 얼굴이 보였다.

“…….”

그 얼굴은, 강서원이 아니었다.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뭐야?’라고 생각한 순간 돌연 팔이 잡혔다. 억센 힘이었다. 연우는 반사적으로 팔을 뿌리치면서 등을 돌렸다. 뒤에 있던 누군가를 확인하자마자 구겨져 있던 얼굴이 놀라움으로 크게 뜨였다.

“어, 서원…….”

갑자기 뒤에서 제 팔을 쥐어 당긴 사람이야말로, 자신이 그토록 찾던 강서원이었다. 얼떨떨한 상황에 당황할 새도 없었다. 불현듯 뺨을 미는 손바닥에 의해 얼굴이 돌아갔다. 그와 동시에 등을 돌린 서원이 멀어져 갔다. PC방 문이 거세게 열렸다가 닫혔다. 연우는 밀린 고개 그대로 허공을 응시했다.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

아니다. 이건 뺨을 민 게 아니었다.

강서원은 지금 제 뺨을 치고 싶었던 거다.

빗긴 턱은 상황을 파악하며 서서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연우 또한 PC방을 뛰쳐나갔다. 계단을 내려가고 있던 서원의 손목이 연우에게 붙들렸다. 계산 위에서 연우는 서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두 얼굴이 마주했다.

토끼같이 빨갛게 달아오른 눈은 화가 나 있었다. 이내 살짝씩 떨리는 턱이 벌어졌다.

“형이, 나한테 멋대로 굴어도 상관없던 이유가 뭔지 알아요?”

조용한 목소리는 아직도 잠에 잠겨 맹맹한 귀를 또렷하게 파고들었다. 연우가 눈을 깜빡이는 사이 말이 이어졌다.

“형도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

새까맣게 타버린 재처럼 건조하고 퍼석한 어조. 그리고 표정. 그제야 연우는 상황을 파악했다.

자신은 강서원이 놓아둔 덫에 제 발로 들어온 것이었다. 그리고, 강서원은…….

“내가 형을 믿으려고 노력했던 것처럼, 형도 이 관계를 유지하고 싶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

“……근데 아니었어.”

지금,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하다.

두 시간도 수면을 취하지 못한 뇌는 멍청이가 된 것처럼 더디게 돌아갔지만 제법 정확한 답을 유추했다.

“형은, 나를 믿으려는 노력조차 안 했어요.”

분노로 탁해진 것조차 투명하고 맑은 목소리는 폭포수처럼 계속 흘렀다. 토끼같이 부릅뜬 눈은 여전했다.

연우는 찐득한 덫을 떼어내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7시까지 얼마나 남았지.’

그는 생각했다.

* * *

새벽 2시의 집은 조용했다.

재원은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신다고 했다. 12시까지 녀석을 기다리던 엄마도 TV를 보던 것을 관두고 자러 들어간 지 두 시간째였다. 서원은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시간을 확인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은 잠자리에 든 지 3시간째였지만 아직도 잠에 들지 못하고 있었다.

별안간 현관문의 잠금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서원은 눈을 다시 감는 대신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방을 벗어나 현관문 앞에 섰다. 태원과 엄마가 자고 있으니 지금 집에 들어올 사람은 재원뿐이었다.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센서등이 번쩍 켜졌다. 재원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신발장에 들어섰다. 여기까지 혼자 온 게 용하다 싶을 정도로 많이 취한 얼굴이었다. 얼굴은 물론 목까지 빨갰다.

재원은 신발장 앞에 선 서원을 보자마자 활짝 웃었다.

“어, 형.”

“조용히 하고 씻고 자.”

목소리가 컸다. 서원이 경고하듯 소곤거렸으나 재원은 비죽비죽 웃으며 그에게 안겨들었다.

웃는 얼굴은 잠시였다. 서원의 목에 파고들 듯 비비적거리던 것이 갑자기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훌쩍거리는 소리조차 커서 서원은 쉬, 하면서 재원의 등을 토닥였다.

“혀엉, 형…….”

“왜 이래.”

“형, 그거, ……알아? 아냐고…….”

단순한 주사가 아닌 것 같았다. 서원은 제게 달라붙는 재원을 떼어내고 신발장 턱에 앉혔다. 그리고 저도 그 옆에 앉았다. 굽힌 등을 토닥이며 얕게 한숨을 쉬었다.

“뭘 아냐는 거야. 아빠 여자친구 생겼다는 거?”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묻자 훌쩍이던 소리가 뚝 멈췄다. 재원이 놀란 얼굴로 서원을 돌아보았다. 코끝이 주정뱅이처럼 벌겠다.

“……어, 떻게…….”

“들었어, 아빠한테.”

서원은 꺼진 센서등을 켜기 위해 팔을 휘휘 저으면서 무심하게 덧붙였다.

얼마 전, 아빠와 역삼에서 만났을 때 들었던 이야기였다. 아빠는 재원이 그를 듣자마자 식당 밖으로 뛰쳐나갔고, 따라 나온 자신에게 소리를 질렀다고 했다.

그는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어이가 없다는 태도를 일관하며 서원에게 공감을 구했다. 제 인생인데, 게다가 범법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재원이 놈이 과잉반응을 했다며 빈정거리기도 했다. 서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술만 들이켰다.

아빠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재원과 다르게 확실히 자신은 아무렇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아빠를 향한 자신의 기대감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러니까 재원의 마음도 이해했다. 설령 아빠가 범법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도, 떳떳하다고 해도, 재원은 그 사실을 못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사람의 감정이란 무 자르듯 자를 수가 없었다.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은 못 받아들이는 일은 참 많았다.

오늘 낮의 자신도 그랬다.

‘……나를 사랑해요?’

‘…….’

‘그냥, 갖고 놀고 싶은 건 아니고요.’

형의 뺨을 때린 뒤, 자신은 다 안다는 듯 짐짓 조소 섞인 어조로 읊조렸다. 그러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사실을 아는데 받아들이지를 못한다. 말하면서도 속이 새카맣게 타는 것 같았다.

형의 가벼운 언행에 상처받았음에도 그를 놓지 않았던 건 정말 바보여서가 아니었다. 바보가 되기 위해 노력한 것이었다. 어떻게든, 바보가 되어도 괜찮으니 그를 믿고 싶었다. 예전엔 가볍게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그의 말을 믿기로 했다.

단순히 위치추적이 화가 난 게 아니었다. 불안할 수도 있다. 저도 가끔은 형이 어디서 뭘 하는지 궁금하니까, 그가 제게 말만 했다면 허락했을 것이었다. 멍청하지만 그에게 말했듯, 애정을 기반으로 한다면 무슨 짓이든 해도 괜찮았다. 그러나 이건 애정이 아니었다. 애당초 그는 자신을 믿으려는 노력조차 안 했다.

노력 없는 애정은 애정이 아니다.

그저 욕구다.

‘아냐. 서원아, ……너 오해하고 있어.’

문득 커다란 손이 손목을 붙들어 왔다. 어쩐지 그는 평소보다 반응속도가 더뎠다. 서원은 팔을 비틀어 손을 떼어냈다. 낙엽처럼 버석하던 얼굴에 화르륵 열이 났다.

‘무슨 오해요? 시계에 아무것도 없다고?’

‘…….’

‘아니면, 날 사랑해서 그랬다고 할 거예요?’

‘…….’

날 사랑해서 그랬다고. 그렇다면 조금 더 자세히 말해 줘요. 그럴듯한 말이라도 해 봐요. 서원은 그가 변명이라도 하기만을 기다렸으나, 둘의 사이는 한참 동안 조용했다.

오해하고 있다면서, 남자는 이상할 정도로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원을 내려다보면서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이내 꾹 다물었다. 그는 몹시 피로해 보이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이 상황 자체가 귀찮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노코멘트. 한참이 지나도 묵묵부답. 이게 제 앞에 내려진 답일 뿐이다. 그 와중에 바보같이 또 변명을 기다리다니. 서원은 스스로를 욕하며 마침내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난 형 애인이 되고 싶었어요. 장난감이 아니라.’

어중간한 존재는 싫었다. 그대로 형 곁에 미련하게 남아 있다가 형이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게 되면 큰일이었다.

그러다가는, 진짜 질투심에 미쳐 돌아버릴 거야.

서원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미친 듯한 욕심이었다. 살면서 이토록 무언가를 원한 적이 있던가. 하다못해 형이 콘 치즈였으면 울고 말면 되었는데, 그조차 되질 않는다. 감당 못 할 정도로 원해서 먼저 놓아버리려고 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눈앞이 캄캄했지만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그저 현실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서원은 미련처럼 끝도 없이 이어지는 생각을 싹둑 잘라냈다. 그리고 버석한 입술을 열었다.

기어이 냉정한 목소리가 두 발 사이로 떨어졌다.

‘그게 안 되면, 끝낼 수밖에 없어요.’

형에게 사랑받을 수 없으면, 이 관계는 그냥 끝이야.

형 장난감. 장식품. 형이 아끼는 무언가. 형이 예뻐하는 것. 혹은 욕구해소용. 다 싫어. 난 그거 다 하고 싶어. 다 할 수 있는 애인이 되고 싶어. 형을 혼자 다 갖고 싶어. 눈길. 손길. 혀끝. 성욕. 마음. 머릿속. 형의 모든 것을 다 내게 향하게 하고 싶어. 그냥 하나로는 안 돼.

서원은 그대로 그를 지나쳐 갔다. 도망치는 것처럼 빠른 걸음이었다. 하지만 그가 도망치는 것은 시연우에게서가 아니었다. 제 지독한 욕심으로부터였다.

그리고 형은, 저를 따라오지 않았다.

“그냥 받아들여. 어쩔 수 없어.”

서원은 생각을 거두면서 혼잣말을 하듯이 재원에게 중얼거렸다. 냉랭한 목소리였다.

“이제 아빠…… 전화도 안 받아. 형, 진짜 아빠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재원은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지점토를 문지르듯 얼굴을 마구잡이로 문지른다. 취기가 상당히 오른 것인지 발음이 흐리멍덩했다.

“원래 그런 사람이었어.”

“아니야. 안 그랬어. 어떻게 아들한테 그래. 어떻게. 아빤데, 아빠야. 우리 아빠라고……. 여자친구도, 어떻게 우리 두고 그래? 여자친구라니. 최소한 우리한테 허락이라도 받아야지, 허락이라도…….”

“강재원, 그만해. 엄마 깬다.”

“어떻게 그만해! 형은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

휘청이던 목소리가 별안간 커졌다. 울음기 젖은 소리가 듣기 싫었다. 서원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벌떡 일어나 현관문을 연다. 서원의 손이 뻗어나가 재원의 멱살을 쥐었다.

“아, 뭐 해, 씨발!”

“닥치고 나와.”

집 밖으로 끌어내는 힘이 갑작스러웠다. 재원은 엉겁결에 욕설을 내뱉었다. 알코올에 푹 젖은 몸이 속절없이 끌려간다. 돌아오는 건 차가운 목소리였다.

쾅. 현관문이 닫혔다. 벌레 우는 소리가 시끄럽게 귀를 들쑤셨다. 서원은 잡은 멱살을 끌어 재원을 집 외벽에 밀었다. 쿵. 재원의 등이 벽에 부딪혔다. 재원이 숨을 헐떡이며 서원을 노려보았다. 술에 취한 눈이 혈기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이거 놔.”

“진상 부려 봤자 바뀌는 거 없어.”

“그러면, 계속 이러고 있게?”

“나 말고, 아빠가 바뀌는 거 없다고.”

“뭐?”

찬물이 쏟아지는 것처럼 냉정하고 명확한 어조였다. 몸을 비틀던 재원이 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뻘겋게 달아오른 눈가가 애처롭다. 서원은 멱살을 쥐던 손을 풀었다. 힘을 주고 있던 손가락, 또 가슴 아래가 동시에 저릿저릿했다.

“너 이렇게 술 마시고 아빠아빠 해 봤자, 아빠는 강태원, 나, 그리고 너까지. 다 아들이라고 생각 안 해. 우리 가족 지금보다 힘들었을 때 코빼기도 안 보였던 거 보면 몰라? 재원아. 아직도 모르겠어?”

“…….”

“너 혼자 어릴 적 아빠 모습 붙들고 있는 거야. ……아빠는 너 사랑해서, 너한테 용돈 주는 거 아니야.”

관계란 그랬다. 가족이라고 해도 다를 게 없었다. 사람 관계는, 혼자 열심히 노를 젓는다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게 가장 잔인하고 아프고, 또, 인정하기 싫은 점이었다.

서원은 눈을 세게 감았다가 떴다. 동생에게 이렇게 대한 적은 처음이라 아까부터 계속 현기증이 났다. 빙빙 도는 머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길게 한숨을 내쉰다. 가느다란 손이 천천히 들렸다. 재원의 젖은 볼을 정성스레 닦아 주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재원은 놀란 얼굴 그대로 계속 울었다.

“재원아.”

“…….”

“……멱살 잡고, 닥치라고 한 거 미안해.”

“…….”

“술 깨고, 정신 차리고 들어와.”

서원은 멀거니 서 있는 제 동생을 남겨 둔 채 집 안으로 들어갔다.

마른 몸은 그대로 이불 속으로 숨었다. 서원은 몸을 옹송그리며 작게 신음을 앓았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어두운 이불 속에서 핸드폰 빛이 다시금 희미하게 터졌다. 그는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 시간을 확인했다. 아니, 사실은, 시간을 확인하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가버린 건 스스로인 주제에, 지금 자신은 새벽 세 시까지 형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습게도 그랬다. 서원은 비로소 인정했다.

그러니까, 자신도 강재원과 같았다. 형과 그렇게 끝났다는 사실. 그 허무한 이별을, 머리로는 인지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핸드폰은 하루 종일 조용했다. 부재중 전화도, 문자도 없었다. 이것 또한 현실이었다. 서원은 이마로 핸드폰 모서리를 톡, 두드리면서 “너나 정신 차려, 머저리 새끼야.” 하고 중얼거렸다.

“…….”

눈이 감겼다. 마음이 텁텁했다. 허나 이상하게도, 형과 관련되어서는 왈칵 잘 흐르던 눈물이 오늘따라 나오지 않았다. 아직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증거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자그마한 웃음조차 흘렀다.

서원은 몸을 더 강하게 웅크렸다. 허벅지 밑에 닿는 발이 차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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