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Become complex (6/8)

6. Become complex

서원을 내려 준 검은 차는 용인에서 서울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용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가, 끼익, 거친 마찰음을 내면서 다시 되돌아왔다.

출근 시간을 훨씬 벗어난 시간에 갤러리에 도착한 시연우는 주차선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아무렇게나 차를 세웠다. 모르는 누군가가 지나가다 보면 참 건방지게도 세웠다며 혀를 찰 정도로 성의 없는 주차였다. 어차피 다 제 것들이니 상관은 없었다. 연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차 문을 열었다. 주차장을 벗어나는 걸음이 빨랐다.

대표실로 올라가는 동안 마주친 두 명의 직원이 그에게 인사했다. 그는 눈길도 주지 않고 대충 고개만 까딱거리며 그들을 지나쳤다. 직원들이 의아해할 정도로 평소와 다른 불손한 태도였다.

연우는 닫힌 엘리베이터 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목을 죄는 셔츠 단추를 몇 개 풀었다. 손가락의 움직임이 다소 신경질적이었다.

“…….”

마침내 대표실에 다다른 그는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조금 전, 용인으로 올라가던 도중에 대충 보았던 박진석의 문자를 다시 확인했다.

09:32 [박진석] 운전중? 전화받아바

09:33 [박진석] 골프 보러 올래? 용인해온CC. 나 아부지에게 끌려나왔다..... 결혼이 코앞인데.... 평생 이러고 살려나보다 난

09:33 [박진석] 갤러리에서 한시간도 안걸리잖아.. 와라. 형아가 맥주 사줄게

09:37 [박진석] 바쁘냐? 너 또 그냥 무시하는거지. 개새끼야

10:12 [박진석] 야 여기 네 애인 있다?

10:13 [박진석] 너도 오지 그랬냐? 말 안했어? 진짜 바쁘냐?

10:34 [박진석] (사진)

10:34 [박진석] 땀 뻘뻘 흘리면서 고생하길래 츄러스랑 아이스크림 박스 째로 사서 직원들한테 몰래 주고옴. 잘했지ㅋ

10:35 [박진석] 키다리 아저씨 박진석이라고 불러줘

10:38 [박진석] 야...... 나 심심하다고......

사진은 츄러스와 아이스크림을 가까이서 찍은 것이었다.

연우는 툭툭툭툭, 사진을 띄우고 있는 액정을 의미 없이 두드리며 아랫입술을 약하게 짓씹었다. 잠시 고민하는 얼굴을 하더니, 곧 박진석에게 전화를 건다. 전화는 금방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고생한다는 게 무슨 뜻이야.”

전화 너머로 박진석의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그는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목소리는 침착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아직 감정을 휘두르기에는 이르다. 연우는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청소나 맥주컵을 뽑아 준다거나 하는 일을 보통 고생한다고 표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만약의 경우가 있다. 섣불리 판단하지 말고, 확실히 해야 했다.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지.」

“구체적으로.”

「구체적으로? 이 변태 새끼……. 그냥 맥주병 나르고 있던데? 와, 근데 덩치도 쪼매난 게 은근히 힘세더라? 두 짝을 한 번에 막 나르더라고. 너 걔랑 싸우면 한 번에 쥐어 터질 듯. 조심해라.」

연우는 대답하지 않고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소파 위로 핸드폰을 던지듯 내려놓는다.

“……하.”

벙찐 얼굴 위로 비로소 짧은 숨이 터져 나왔다. 그는 등받이에 쓰러지는 모양으로 등을 기대었다.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이해할 수는 있는 상황이었다. 그만큼 제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나 보다, 하고 여기면 될 일이었다. 조금 강박적이기는 했지만 강서원은 원래 좀 고리타분한 면이 있으니까 그럴 만했다. 애당초 그를 모르고 있던 것도 아니었고, 엄연히 말하면 그게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 것도 아니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렇다.

안다. 머리로는 다 아는데.

“…….”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럽지?

당최 이 기분의 출처를 알 수가 없었다. 허공을 보고 있던 그가 이윽고 천천히 턱을 밀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검고 찰랑이는 생머리가 소파 가죽 위로 흩어졌다.

* * *

골프 대회는 해가 지기도 전에 끝이 났다. 뒷정리까지 마쳤는데도 7시가 채 안 된 시간이었다. 민규와 스케줄을 맞추느라 대회는 처음 와 보았는데, 아무래도 시간 가늠에 실패한 모양이다. 여느 음악 페스티벌처럼 늦게 끝날 줄 알았다.

서원은 당황한 얼굴을 하고서 공연히 핸드폰을 뒤적거렸다. 형은 끝나기 한 시간쯤 전에 연락을 하라고 했으나 지금은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퇴근 시간도 안 될 것이었고, 심지어 오늘은 형이 많이 바쁜 것 같았다. 종일 형에게 연락이 없었다.

“서원! 여기서 뭐 해. 안 가?”

‘어쩌지. 그냥 버스 타고 갈까.’ 하고 고민하던 중이었다. 불현듯 뒤에서 어깨를 툭 치는 게 느껴져 서원은 고개를 돌렸다. 민규와 다영이 나란히 서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뒷정리를 마치자마자 어디를 그리 서둘러 가나 했더니 오늘 내리 지겹도록 먹었던, 출처도 모르는 그 츄러스를 직원들에게서 더 얻어 온 모양이었다. 둘의 양손에 츄러스가 들려 있었다.

“가야지. 너네는 집 어떻게 갈 거야?”

“버스 타려고. 찾아보니까 버스 많던데? 근데 정류장까지는 택시 타야 돼. 오늘 여친이 데리러 오는 거 아니면 같이 타자. 택시비 뿜빠이 하게.”

다영이 말했다. 서원은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콜택시를 기다리는 중에 형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원은 제 옆에서 노닥거리는 민규와 다영의 눈치를 보다가 끝내 전화를 거부했다. 혹시나 녀석들이 형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있었다.

[나] 형 저 지금 전화 못 받아요ㅠㅠ

[연우 형] ?

[나] 옆에 친구들있어서.. 저 알바 끝나구 서울 올라가려고 택시 기다리고 있어요

[연우 형] 끝나면 전화하라고 했잖아

문자가 조금 무섭게 느껴졌다. 서원은 ‘죄송해요’까지 쓰다가 지웠다. 형은 그냥 쓴 건데, 자신이 과민한 걸 수도 있었다. 아니, 당연히 그럴 텐데 눈치도 없이 딱딱하게 굴어 상황을 어색하게 만들기는 싫었다.

어떻게 답장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는 동안 다시 전화가 왔다. 서원은 우물쭈물하다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서원아. 나 지금 출발했거든?」

“아…….”

「어디 앉아 있을 데 있으면 들어가 있어. 그리로 갈게.」

“괜찮아요. 저 그냥 버스 타고…….”

「두 번 말하게 할 거야?」

일순 핸드폰을 쥔 손이 움찔 떨렸다. 낮게 조곤거리는 목소리 사이로 은근한 냉기가 느껴진 탓이었다.

“…….”

당황한 혀는 금세 얼어서 움직여지지를 않았다. 형의 차가움이 자신의 착각인지, 아니면 정말인지 모르겠다.

‘정말 화내고 있는 거라면 어쩌지.’ 서원은 고민했다. 자신은 누군가가 화내거나 저를 혼내는 것에 면역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런 상황을 맞닥뜨린 적이 별로 없던 탓이었다. 그래서 이런 낯선 상황만 되면 싫다 못해 도망치고, 숨고 싶었다.

특히 형의 앞에서는 더 그랬다. 언젠가 그가 갑자기 비속어를 섞어 가며 무섭게 말했을 때 돌연 전화를 끊어버렸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여보세요, 서원아?」

잠시 조용하더니 곧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상시와 같다. 서원은 안심하면서 “네.” 대답했다.

「버스 타면 힘들잖아. 노선 보니까 엄청 돌던데. 환승도 해야 하고.」

“…….”

「오늘 고생도 많이 했을 텐데 좀만 기다리고 있어. 내가 빨리 갈게.」

“……천천히 오세요. 기다릴게요.”

「응.」

전화가 끊겼다. 서원은 “누… 나가 오기로 했어.” 하며 다영과 민규를 보냈다. 다영은 애인이 과보호가 심한 편인가 봐, 하며 서원을 양껏 놀렸고, 민규는 그런 다영을 끌어당기며 택시를 태웠다. 택시가 떠난 건 순식간이었다.

연우가 용인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완전히 넘어간 뒤였다. 그와 서원은 집으로 가는 도중에 한정식집에 들러 밥을 먹었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 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서원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의 손에 이끌려 같이 목욕을 했고, 수건으로 젖은 몸을 닦는 중에 얄궂은 희롱을 당했으며, 끝내는 넓은 품에 안긴 채로 소파에 앉았다. 그동안 그는 평소와 같이 다정했고, 잘 웃었다. 통화를 할 때 서원이 설핏 느껴졌던 서늘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오늘 일 잘했어?”

그래서 남자가 문득 그렇게 물어 왔을 때도, 서원은 이상한 조짐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저 커다란 손에 제 손을 얽고 푸는 손장난을 치면서 “네.”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뭐 했어. 덥지는 않았어?”

야하게 생겼다고 드문드문 생각하던 그 입술이 귓바퀴에 닿아왔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상냥하게 물어 온다. 따뜻한 감촉에 두근두근, 심장이 떨렸다. 서원은 “그냥 청소……. 네, 괜찮았어요.” 대답하고는 힘줄과 핏줄이 도드라진 손등에 쪽쪽 입을 맞췄다.

시연우는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어 서원의 몸을 더 품에 당겨 안았다. 검은 눈이 풍성한 속눈썹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목소리와 다르게 창백한 푸른색이었다.

“서원아.”

“…응.”

“형, 내일 준우랑 아침 일찍 하동 가서 하룻밤 지내고 와야 돼. 할아버지에게 인사 드려야 해서. ……내일모레 11시까지 준비하고 있어. 같이 형 친구 결혼식 가기로 한 거, 안 잊었지?”

서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얌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그러면 집에 가 있을게요.”

“됐어. 여기 있어.”

“형 없는 집이잖아요. 저 혼자 있는 건 좀 그래요.”

“우리 집이지. 너랑 나랑 비밀번호도 같이 바꿨잖아.”

“준호 돌아오면 걔도 알 텐데요, 뭘.”

그답지 않게 웃음기 없이 억지스러운 이야기들을 늘어놓는 것이 왜인지 귀여워서, 서원은 푸스스 웃고 말았다. 연우는 항상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있는 귓바퀴를 살짝 깨물었다. 살에 대고 있는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준호 알려주지 말고 계속 둘이 살까?” 한다. 유혹하는 것처럼 은근한 목소리였다.

“걔는 집 따로 구해 주면 되잖아. …아니면 우리가 나갈까? 서원이가 마음에 드는 데로.”

“…….”

구체적인 덧붙임이 이어졌으나, 동그란 뒤통수는 반응이 없었다.

서원은 말없이 제가 입을 맞췄던 손등 위에 손가락을 얹어 둥글게 원을 덧그리기만 했다. 웃음기는 어느새 사라진 채였다. 어차피 장난일 게 뻔한데, 형이 너무 진지하게 말하니까 괜히 믿어지려고 한다.

“응? 형이랑 계속 살래?”

“…….”

“왜 대답을 안 해.”

읊조리는 목소리 위로 조바심이 스친 것처럼 들렸던 건, 착각일 게 자명했다. 서원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가 꼴깍 침을 삼켰다. 이내 어설프게 웃음소리를 내버린다.

“……준호 삐지겠다.”

“…….”

그를 흉내 내듯 서원은 키득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형이 제 얼굴까지는 보지 못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목소리는 그럴듯했지만, 천연덕스러운 표정 연기는 아직 영 꽝이었다.

같이 살자는 그 말이 얼마나 가볍게 흘러가는 것인지, 자신은 알고 있었다. 공연히 진지하게 굴어서 상처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형의 잘못도 아니고, 형이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고 한 것도 아닌데 혼자서 끙끙 머리를 싸맬 필요는 없다. 멍청한 짓이다. 차라리 자신이 형에게 맞춰 가는 게 똑똑한 처사다.

곱고 매끈한 손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무엇을 원하는 것처럼 연우의 손목을 살짝 제 티셔츠 위로 끌어당겼다. 여느 때와 같이 티셔츠 안에 손을 넣어 달라는 뜻이었다.

“……아, 응…….”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한참 동안 조용하던 남자가 돌연 서원의 귓불을 물었다. 이어 거세게 빨아대는 감각에 서원은 하려던 말 대신 신음을 내뱉었다. 붉은 입술 사이로 야한 목소리가 터졌다. 서원의 허벅지를 완전히 덮을 정도로 커다란 손이 침범한 곳은, 티셔츠가 아닌 바지 속이었다.

“형, 아……! 잠, 잠깐만…….”

서원이 몸을 비틀었으나 남자는 꿈쩍하지 않았다. 뜨겁고 딱딱한 손이 페니스를 거침없이 주무르기 시작했다. 놀란 서원이 연신 움찔움찔 손을 떨었다. 마른 등이 남자의 몸 위를 천천히 비비적거렸다. 미미하게 저항하는 듯했으나 남자는 모르는 척 기둥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서원아.”

“흣, 으응…… 네…….”

움츠러드는 발가락. 마른 몸. 달뜬 숨 사이로 진득하게 녹아내리는 작은 목소리. 연우의 눈은 그것들을 필사적으로 훑었다. 으레 그렇듯 뱀처럼 차갑고 조용한 시선이 아니었다. 어쩐지 그가 조급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서원은 더 생각을 이어 갈 수 없었다. 맞닿은 몸이 뜨거웠다. 브리프 위가 벌써부터 젖어들고 있었다.

성기는 계속 손에 의해 흔들렸다. 그사이 다른 한 손이 흰 티셔츠 안으로 쏙 들어섰다. 조그마한 유두를 비틀어 꼬집자 등이 팔딱거리며 휘었다. 무릎이 굽혀지고 발이 빳빳이 섰다.

“아, 으……, 흣, 너무, 형, 읏……!”

“외박하지 않기로 했지?”

숨이 많이 섞인 나긋한 목소리가 온몸을 기어 다닌다. 서원은 힘껏 바르작거렸다. 무자비한 쾌감과 수치심이 동시에 느껴졌다. 성기만 내놓은 채로, 밝은 등 아래에서 남자의 손에 휘둘리며 젖어드는 제 모습이 이상했다.

“으응, 아! 흐…… 으……!”

“했어, 안 했어.”

“해, 했어요, 응, 흐, 으…… 아흣!”

“형 없을 때도 마찬가지야.”

다른 생각 하기만 해. 형 속이지 마.

분명,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다. 어린아이에게 겁을 주는 선생님처럼 능글맞기 짝이 없었고, 말의 내용 또한 방금의 대화를 이어서 하는 것뿐이었다.

그를 아는데도 불구하고, 왜인지 모르게 혼이 나는 것만 같다. 본능적으로 등줄기가 쭈뼛쭈뼛 섰다. 서원은 대답 대신 신음을 터뜨리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딱딱하게 솟은 유두를 손가락 사이에 끼고 빠르게 비비던 손이 어느 순간 내려가 귀두 아래를 둥글게 감쌌다.

“으읏……! 하아, 으…….”

그와 동시에 서원이 사정했다. 익숙한 손길과 타이밍으로 그의 정액을 받아낸 남자는 팔을 뻗어 티슈를 뽑았다. 손바닥을 닦아내고 티슈를 버리는 동작은 담백했다. 그는 녹아버린 것처럼 흐물거리는 몸을 고쳐 안았다. 그리고 티슈를 더 뽑아 꼼꼼하게 서원의 앞을 닦아냈다. 서원은 숨을 헐떡거리며 멀거니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뭉쳐진 티슈가 포물선을 그리며 한 번 더 휴지통에 들어갔다. 남자는 흰 티셔츠를 밑으로 내려주면서 곧고 마른 목덜미를 살짝 깨물었다.

“하, 아…….”

피곤했던 것인지, 한 번의 사정에 서원은 쏟아지는 노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금방 졸린 소리를 냈다. 연우는 갓난아기를 재우는 것처럼 납작한 배를 토닥토닥 두드리면서 서원의 얼굴을 확인했다. 쪽. 쪽. 쪽. 쪽. 곧이어 목덜미. 귀밑. 뺨. 턱 끝 위로 쌉싸름한 키스가 연이어 내려앉았다.

“자.”

자장가같이 감미로운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서원은 의식 아래에 빠질 듯 말 듯 첨벙거리면서 눈을 느리게 꿈뻑거렸다. 비로소 팔랑이던 속눈썹이 폭 내려앉는다. 잠에 빠져버린 건 한참 뒤였다.

다음 날 아침, 서원은 그의 침대 위에서 일어났다.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 * *

시준우는 가볍고 단정한 셔츠에 베이지색 슬랙스를 입고 방을 나섰다.

조부의 집은 황량할 정도로 넓었다. 거실 한 벽을 차지한 유리창을 통해 푸르스름한 새벽의 빛이 들어오고 있었고, 그 가운데 놓인 거실 테이블 위로는 은은한 주황색 조명이 쏟아졌다.

할아버지와 형은 그곳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제 형은 할아버지의 말에 대충이지만 성실히 응하다가도 힐끗힐끗 손목을 비틀어 티 나지 않게 시간을 확인했다.

“형.”

준우가 다가가자 연우와 노인의 눈이 한 번에 그쪽으로 돌아갔다. 연우는 그제야 시간을 확인하는 것처럼 확실한 동작으로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아, 벌써 갈 시간이네.” 하는 목소리는 정말 지금 알아차렸다는 듯했다.

“저희 가보겠습니다.”

“그래. 가 봐.”

노인은 섭섭하단 말 대신에 퉁명스러운 태도를 보이며 김이 오르는 찻잔에 입을 댔다. 연우는 일어나면서 준우에게 눈짓했다. 준우는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살짝 허리를 숙여 “가볼게요, 할아버지.” 했다.

“그래. 공부 열심히 하고.”

“준우 잘하고 있어요. 성적 보내드렸잖아요.”

‘언제?’ 준우는 놀란 눈으로 제 형과 할아버지를 번갈아 보았으나 누구도 그에 대해 설명해 줄 마음은 없는 눈치였다.

형제는 저택 앞에서 저들을 기다리고 있는 차를 향해 걸어갔다. 시준우는 뒷좌석에 앉았고, 시연우는 조수석에 앉았다. 곧이어 대리기사가 차를 출발시켰다. 차가 저택 주변을 벗어나자마자 연우는 등받이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서울에 갈 때까지 조금 자 두려는 요량이었다.

“그랜드 더블유 호텔 먼저 가면 되나요?”

“네.”

대리기사가 물었다. 연우는 눈을 감은 채로 대답했다.

기사가 말한 호텔은 제가 묵는 호텔이었다. 준우는 귀에 이어폰을 꽂다 말고 “나 호텔 안 들르고 그냥 가도 되는데?” 했다.

“어딜 간다는 거야.”

“어디긴. 진석이 형 결혼식이지.”

감긴 눈이 뜨였다. 연우는 의아한 얼굴을 하고 준우를 흘끔 바라보았다.

“너도 결혼식 가게?”

묘하게 성가신 것을 대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연우의 눈이 성의 없이 준우의 차림새를 훑었다. 지금 보니 결혼식에 갈 법한 차림이긴 했다.

준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한 거 아니야?”

진석이 형은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봐 왔던 형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날, 형이 저를 호텔로 쫓아낸 게 화가 나서 그대로 진석이 형을 찾아가 짜증을 한 바가지로 쏟아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다. 제게 형은 아빠 같았고, 정작 친형 같은 존재는 진석이 형이었다. 그걸 모르지도 않을 사람이 새삼스레 제게 가느니 안 가느니 물어 오는 게 더 이상했다.

“……그래, 그럼.”

잠시 준우를 바라보던 연우가 이내 흔쾌히 대답하면서 다시 눈을 감았다. 꼭 제 일이 아닌 것처럼 선을 긋는 태도에 갑자기 불안감이 인다. 준우는 조수석 헤드를 잡고 “……뭐야, 따로 가는 것처럼.” 했다.

“따로 가야지. 내가 너랑 왜 가.”

“굳이 따로 갈 건 뭔데?”

갑작스러운 태도가 못내 당황스러웠다. 준우는 찌푸린 얼굴 그대로 물었다. 예전에 몇 번 그랬던 것처럼 형이 애인과 같이 가겠다고 이러는 것이라면 상관없겠지만 지금은 애인이 없는 것으로 안다. 한국 온 날 봤던 그 남자를 논외로 치면 그랬다.

“……그러고 보니 너, 서원이한테 뭐라고 했어?”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조용하던 연우가 불현듯 눈을 뜨고 다시 제 동생을 바라보았다. 묻는 목소리는 추궁하는 것처럼 차가웠고, 피곤에 절어 느슨했던 눈빛은 뾰족하게 모서리를 세웠다.

“서원? 그게 누군데. 그 호모 새끼?”

“새끼야, 말 가려서 해.”

툭, 거친 말이 나왔으나 준우는 자신이 실수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원래 형제간의 분위기가 그랬다. 수준이 비슷하지 않은 것들은 어떻게 지칭하든 상관이 없었다.

분명 착각이 아니었다. 형이 나서서 누군가를 깔본 걸 본 적은 없으나 중학생이었던 자신이 저보다 못사는 반 애들을 보며 ‘거지새끼들’이라고 욕해도 형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제게 지적한 거라고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말라는 것뿐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사람’은 저들이 신경 써야 할 만한 수준의 사람들이었다.

‘근데 왜 갑자기 이런 걸로 지적질이냐고.’ 준우는 위화감을 느꼈다. 문득 기분이 나빠졌다. 불안한 마음은 급격하게 커져 마침내 아예 생각하지도 못했던 그 경우. 아주 기분이 더러울 최악의 경우를 불러일으켰다.

준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형, 설마, 그 새끼랑 가는 거야?”

“뭘.”

“진석이 형 결혼식을, 그 새끼, 그 남자 새끼랑 같이 가는 거냐고.”

거듭 말하는 준우의 목소리가 점점 불안정하게 갈라지기 시작했다. 눈이 핑핑 돌아가고 있는 게 구태여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왜 저렇게 흥분하려고 하는지, 연우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이가 없기도 했다. ‘내가 걔랑 사람 많은 곳 같이 가는 게, 그게 왜?’ 꼭 어마무시한 금기를 깨는 것처럼 말하는 태도에 급기야 빈정이 상하고 만다. 그는 비열하리만치 질 나쁘게 웃으며 비꼬듯 말했다.

“……그렇다면?”

“형, 진심이야?”

“진심이면 네가 뭘 어쩔 건데. 왜, 내가 걔랑 사람들 앞에서 떡이라도 칠 것 같아?”

“장난까지 말고 제대로 말해, 진짜냐고!”

바들바들 떨리던 경멸 어린 목소리가, 연우의 도발에 부지불식간 비명처럼 커졌다. 시준우는 엄청난 수치를 당한 사람처럼 벌벌 떨리는 손을 거세게 쥐었다가 폈다.

끔찍했다. 그 호모 새끼는 몰라도, 자신의 형은 그냥 잠깐 즐기는 도박처럼 호모짓을 좀 즐겨 보다가 끝을 내야 했다. 선을 지켜야 한다. 그것만 확실하다면, 그런 징그러운 실수 정도는 동생으로서 참아 줄 수 있었다.

한국에 왔던 날, 진석이 형도 짜증을 부리는 제게 말했었다. 형이 그 남자랑 사귀는 것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별로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고. 정말 가볍게 사귀는 거라고. 자기가 확실히 안다고. 달래는 투가 조금 섞여 있기는 했지만 아예 거짓말은 아니었다.

분명, 그랬는데.

준우는 발악하는 혐오감을 가까스로 짓누르며 이를 갈았다. 형에 대한 배신감에 머리가 타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내가 걔 못 데리고 갈 데 데려가? 뭐가 문젠데 지랄이야. 내가 내 꺼 예쁜 거 자랑하겠다는데.”

“씨발, 그래서 나 호모 새끼라고 동네방네 자랑하겠다고? 형 진짜 미쳤어?”

“너야말로 미쳤어? 미국에서 약 하냐? 아니면 잠 덜 깼어?”

비죽비죽 놀리듯 웃으며 말하던 연우가 마침내 여기까지 하라는 듯 냉소적으로 말했다. 급격하게 싸늘하게 식은 눈이 준우를 힐끔 바라보았다. ‘시준호랑 피가 섞인 게 맞긴 맞나 보네.’ 그는 감상적으로 생각했다.

준우는 광분했다.

“씨발, 징그럽게, 진짜! 나 어떻게 고개 들고 다니라고 그딴 짓을 해! 형 나 진짜 쪽팔려서 뒈지는 꼴 보고 싶어?”

“그만해. 계속 시끄럽게 굴 거면 내려. 기사님, 졸음 쉼터나 휴게소 나오면 잠깐 세워 주세요.”

“뭔데, 진짜 호모라도 됐어? 어차피 헤어질 거라며, 진석이 형한테 다 들었다고! 그 호모 새끼는 좋다고 결혼식까지 따라온대? 아니, 평생 끼고 살 것도 아니면서 왜,”

“그냥 지금 세워 주세요.”

연우는 스스럼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어이 바닥을 끌 것처럼 목소리의 높낮이가 현저하게 추락한 채였다. 운전기사는 당황한 눈을 하면서도 비상등을 켜고 속도를 줄였다. 검은 차가 고속도로 갓길 옆에 정차했다. 뒤따라오던 차들이 클랙슨을 울리며 차를 비켜 갔다.

“내려.”

“미친, 여기서 어떻게 내려!”

“두 번 말 안 해.”

“나 치여 죽으면 어쩌라고, 형이 책임질 거야?”

“너 한마디만 더 하면 동생이고 뭐고 턱주가리부터 갈아버릴 거거든? 진짜 죽여버리기 전에 입 닥치고 당장 내려.”

건조하게 읊조리는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준우는 억울함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씨발, 소리를 지르며 후려치듯 세게 문을 닫았다.

차는 곧바로 출발했다.

* * *

강서원은 드레스룸의 한 벽면을 꽉 채운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제 모습을 샅샅이 훑던 그는 이내 허리와 어깨를 펴고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씩, 웃는 얼굴을 만들어 보이다가 금방 그만둔다. 괜한 긴장으로 딱딱해진 입술이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동그란 눈이 백 번도 넘게 다듬었을 옷매무새를 한 번 더 확인했다.

시간이 되었겠다 생각한 찰나에 형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원은 나가겠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그런 옷은 어디서 났어? 처음 보는데.”

새로 신은 로퍼가 딱딱하고 불편했다. 조금 굼뜬 움직임으로 조수석에 올라타는데,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시연우가 말했다. 서원은 조수석 문을 닫으면서 공연히 제 차림새를 바라보았다.

남색의 얇은 세로 줄무늬가 넓은 간격으로 그어진 흰 셔츠. 적당히 접은 소매와 가죽 시계. 객관적으로 말하면 평범하기 그지없는 차림새였지만 제 평소 스타일을 생각하면 꽤나 멋을 부린 축이었다. 형이 못 알아챌 리가 없었다. 서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인터넷에서 샀어요.” 하고 얼버무렸다. 형이 지인에게 저를 소개해 줄지도 모른다는, 자신의 은밀한 기대를 들킬 것만 같아서 조바심이 난다.

“왜 그렇게 꾸몄어, 오늘따라?”

“……그냥…….”

연우는 한 번 더 서원을 힐긋 바라보며 물었고, 서원은 대답을 길게 끌었다.

과하게 신경 쓴 것을 결국 눈치챌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대놓고 그 이유를 물어 올 줄은 몰랐다. 거기에 꼭 네 입으로 말해 보라는 듯 덜컥 진지한 얼굴로 물으니 당황스러웠다.

‘싫은 건가, 좋은 건가.’ 서원은 붉어진 얼굴을 한 채로 그의 생각을 가늠해 보았다. 하지만 자신에게 남자의 감정은 늘 흐린 안개와 같았다. 그의 마음을 파악하기에 저는 너무 서툴렀다.

“시계는, 형 따라 산 거야?”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서원이 고민하는 사이, 남자가 다시 한번 느닷없이 물어왔다. 서원은 화들짝 놀라며 정갈한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애매한 표정이다.

아직도 형의 감정을 모르겠다. 다만 썩 그리 유쾌하지 않은 것은 확실했다. 서원은 황급히 손목을 가리면서 “아니에요.” 하고 중얼거렸다. 붉은 기가 목덜미까지 옮겨 갔다.

“민규, 민규가 꾸미고 다니라고 잔소리해서, 산 거예요.”

“…….”

“옷도 민규가 이렇게 입어 보라고 한 거예요. 그냥, 이런 남방 잘 어울릴 것 같다고요. 골라 줬어요. 그래서, 그냥……. 민규가 패션에 관심이 많아서요. 이유가 있어서 이렇게 입은 건 아니고…….”

“…….”

“그냥, 어차피 밥 먹으러 가는 거니까요.”

서원은 민규가 잔소리처럼 하던 말을 떠올리며 급하게 변명을 지어냈다. 급하게 내뱉은 것치고는 꽤나 그럴듯하다.

다행이었다. 마지막에 덧붙였던, 그냥 어차피 밥 먹으러 간다는 말은 그가 했던 이야기를 인용한 것이니 더 그랬다. 제게 형 친구 결혼식에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물어보았을 때, 그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밥도 맛있는 거 나올걸. 서원이가 좋아하는 콘 치즈도 있을 거야. 어차피 밥 먹으러 가는 건데 부담 갖지 마.’ 하고 속닥거렸었다.

그것까지 기억해서 써먹었다. 서원은 형과 연애하면서 자신의 처세술이 조금이나마 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재차 옆모습을 확인했다.

“…….”

“…….”

허나 이상하게도, 형은 말이 없었다. 웃지도 않았다.

잠잠한 얼굴. 잠잠한 눈빛. 잠잠한 입꼬리. 잠잠한, 공기. 정적이 내려앉은 차 안이 어쩐지 답답하게 느껴졌다. 서원은 짐짓 헛기침을 했다.

그때였다. 정면을 바라보고 있던 눈이 조용히 옆으로 옮겨 가 서원을 바라보았다. 위아래로 훑던 눈동자가 다시 원위치로 돌아간다.

“……민규가 골라 준 거라고? 그것뿐이야?”

“네?”

“그렇게 옷 입은 이유가, 그것뿐이냐고.”

마치 중요한 사실을 재차 확인하는 것처럼 묻는 목소리였다. 다소 음험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긴장감에 사고가 끄트머리부터 조금씩, 하얗게 번졌다. 서원은 얼떨떨한 얼굴로 네, 하고 대답하고 말았다.

남자는 간격 없이 말을 이었다.

“그런 거면, 지금 네 옷 다 찢어버리고 싶은데. 그냥 결혼식 오지 말고 차에 있을래?”

“…….”

겨울에 내리는 비처럼 차갑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남자는 얼굴 아래로 숨기고 있던 감정을 능숙하리만치 자연스럽게 드러내며 말했다. 서원의 코앞까지 닿은 그 감정은 새파랗게 날이 서 있었다.

“…….”

“뭐야. 왜 그렇게 쫄았어. 농담인데.”

남자는 마치 장난이었다는 듯 금방 활짝 웃는 얼굴을 하고는 서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작은 빈정거림 하나에도 견디지 못하고 창백하게 식은 뺨을 정성스럽게 쓰다듬었다. 마치 달래 주는 것처럼 섬세하고 부드러웠다.

“서원아, 많이 놀랐어? 괜히 장난쳤나 봐. 미안.”

다정한 목소리와는 달리, 살을 매만지던 손은 아주 담백하게 떨어져 나갔다.

“…….”

“…….”

마침내 차 안에는 끔찍할 만큼 차가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서원은 얼어 있었고,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운전을 했다. 한참 후, 예식장 주차장 안으로 차가 들어섰다. 차는 유연한 동작으로 주차선에 맞추어 섰다.

연우가 안전벨트를 풀었을 때였다. 정자세로 앉아 있던 서원이 돌연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차 안을 부유하는 먼지처럼 아주 자그마한 목소리였다. 연우는 조수석 시트에 손을 가볍게 대고 그에게로 상체를 살짝 기울였다.

“응? 뭐라고?”

서원은 다시 입술을 벌렸다. 그리고, 고요하지만 선명한 목소리로 제 감정을 밝혔다.

“……그런 장난은,”

“…….”

연한 색의 눈이 조용히 올라 남자와 시선을 마주한다. 잠깐 흔들렸지만 단호한 빛을 품고 있었다.

“……싫어요.”

싫은 소리를 하는 데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심장이 불안한 형태로 헐떡거리는 게 느껴졌다. 서원은 그대로 문을 열어 차에서 도망치듯 벗어났다.

* * *

결혼식장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넓고 복잡했다. 서원에게는 위압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연우는 서원의 손을 잡은 채로 그 넓은 곳 가운데를 걸었다. 그리고 제게 인사해 오는 사람들에게 서원을 소개했다. 차에서 했던 말들은 정말 농담이었다는 것처럼, 또 서원의 지적은 기억도 안 나는 것처럼 못내 태연한 얼굴을 한 채였다.

주차장에서 홀까지 오는 동안 세 무리가 연우에게 말을 걸었고, 전부 그와 연령대가 비슷해 보였다. 그의 친구들은 그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은 여유작작함과 넉넉함이 표정에 녹아 있었다. 서원은 자신이 그들의 흉내도 내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또 그들은 ‘내 애인’이라는 연우의 노골적인 표현에도 별로 놀라워하지 않았다. 그저 재밌다는 듯 웃었고, 서원을 은근히 품평하는 눈으로 훑어보았다. 대화의 끝은 비슷했다. 그들은 시연우 땡잡았다는 둥, 결혼식에 불러 달라는 둥 하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남기곤 떠나갔다.

“진짜 미쳤어.”

“나?”

“그래, 너.”

“하하. 왜?”

“……시연우, 너 하린이한테도 이렇게 깐족대면 나한테 진짜 혼난다. 하린이 보이면 네가 알아서 피해 가. 알았어?”

“뭐야. 왜 걔 얘기를 해, 갑자기.”

하지만 네 번째로 인사해 온 친구는 조금 달랐다. 그녀는 서원을 품평하는 눈으로 보지도 않았고, 재밌다는 듯 웃지도 않았다. 도리어 딱딱하게 굳어 화가 나 보였다. 연우는 분위기를 바꾸려는 것처럼 방싯방싯 웃었으나, 그녀에게는 통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여자는 웃는 얼굴에 침 뱉을 기세로 연우를 째려보다가 서원을 턱짓으로 슬쩍 가리켰다.

“어차피 모를 거 아니야.”

“그래도 매너가 아니지.”

“매너는 얼어 죽을. 너나 먼저 지키고 그런 소릴 해.”

여자는 그렇게 말하곤 홱 등을 돌려 멀어졌다.

거친 언어가 오가지는 않았으나 그녀는 마치 눈빛과 말투로 쌍욕하는 법을 터득한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서원에게까지 보일 정도였는데, 정작 연우는 눈치를 못 챈 사람처럼 “다음에 갤러리 놀러 와.” 하는 태평한 소리를 그녀의 등 뒤에 대고 했다.

이상한 대화였다. 서원이 그에 대해 추측할 틈도 없이 다섯 번째 무리가 연우에게 다가왔다. 어수룩해 보이는 남자 세 명은 연우에게 ‘형’이라고 불렀고, 그가 서원을 소개하자 놀라워하면서 수선을 떨었다. 마지막 인사를 할 때 연우는 그들에게 “끝나고 놀 거지?” 하면서 지갑에서 오만 원 권을 여러 장 뽑아 주었다. 그들은 감사하다고 더 큰 수선을 떨면서 떠나갔다.

“…….”

“…….”

그들이 멀리까지 가버리자, 비로소 사이에 낀 누군가가 없는 시간이 찾아왔다.

둘 사이에 어색하고 미묘한 침묵이 맴돌았다. 서원은 시무룩한 얼굴로 화려한 무늬의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연우는 지갑을 꺼내느라 놓고 있던 작은 손을 다시 잡았다. 그리고 반대 손으로 지갑을 재킷 안에 넣었다. 잠시 후, 고개를 돌려 서원을 바라본다.

“서원아.”

차에서 벗어난 뒤 처음으로 건넨 말이었다. 서원은 번쩍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색하게 눈을 깜빡이며 “네.” 했다.

“목마르지 않아?”

별로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지만 서원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맞잡은 손을 고쳐 잡으면서 걸음을 옮겼다.

서너 가지 종류의 음료들이 놓인 널따란 테이블 앞에서 연우는 서원에게 어떤 것을 마실 거냐고 물었다. 서원은 아무거나 마시겠다고 대답했다. 연우는 과일 슬라이스가 꽂힌 오렌지 주스를 서원에게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서원은 대답하면서 슬그머니 잡힌 손을 뺐다. 그리고 두 손으로 주스를 받았다. 두 엄지가 차가운 유리컵 표면을 머뭇머뭇 매만졌다.

“…….”

“…….”

연우는 서원이 제 눈치를 보며 주스를 홀짝거리는 것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부드럽게 그의 팔을 잡았다. 걸음을 몇 걸음 옮겨 그의 앞에 선다. 서원은 유리컵에 입을 댄 채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서원아.”

“……네.”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서원은 급히 입을 떼며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금 뽀득뽀득 유리잔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연우가 느리게 허리를 굽히자 서원의 얼굴 위로 그늘이 졌다. 눈을 마주치려는 움직임이 느껴졌으나, 서원은 도망치듯 시선을 피했다.

고집스레 아래를 내려다보는 눈꺼풀을 바라보면서, 남자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방금 전 남자애들은, 형 학교 후배들이야.”

“네.”

서원의 팔뚝을 쥔 손에 슬그머니 힘이 들어갔다. 서원이 유리잔을 매만지는 것처럼 남자의 엄지가 서원의 팔을 연이어 쓰다듬었다. 아직도 창백하게 얼어버린 이목구비 사이사이를 훑는 시선이 집요했다.

“……그리고,”

“네.”

“그 전에 어떤 누나가 와서 뭐라고 했잖아. 그 말은 뭐냐면, 음, 그러니까…….”

“시 관장.”

성실하게 이어가던 말을 뚝 잘라낸 건 어느 노인의 목소리였다. 연우는 말을 멈추고 소리가 난 쪽으로 등을 돌렸다. 노인은 그제야 연우의 몸에 가려 있던 서원을 발견하고 “아, 미안해요. 이따가 인사할게요.” 했다.

“아니에요, 작가님, 이 친구는…….”

팔을 쥐고 있던 연우의 손이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그대로 서원의 손목을 잡아 제 옆으로, 그리고 노인의 앞으로 이끌려던 참이었다. 서원이 그 손길을 피하듯 슬며시 제 손을 뒤로 물렀다.

손목이 잡히지 않는다. 연우는 고개를 돌려 서원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형, 저 화장실 갔다 올게요.”

서원은 테이블 위에 몇 모금 마시지도 않은 오렌지 주스를 내려놓으며 슬쩍 뒷걸음질을 쳤다.

“……지금?”

“네. 급해서……. 인사 나누고 계세요.”

돌아오는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서원은 그대로 뒤로 돌아 걸어갔다. 도망치는 것처럼 조급한 걸음으로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던 그는 급기야 홀의 초입까지 되돌아왔을 때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후우…….”

그대로 입구 쪽에 놓인 의자에 쓰러지듯 앉는다. 등을 깊숙이 기대고 한숨을 쉬는 모습은 다소 지쳐 보였다.

화장실에 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다만 머리가 복잡해서 잠시 그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낀 것뿐이었다.

아까부터 차에서 형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자꾸 맴돌았다. 타격이 너무 강해서, 형처럼 천연덕스러운 흉내를 내면서 그를 쳐다보기도 힘들었다. 가볍게 대꾸하기에 너무 무섭고, 또 과격했다. 형은 곧바로 웃으면서 장난이라고 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장난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형의 눈은 자못 사나운 빛을 품고 있었다. 또, 그런 장난은 싫다는 제 말에 대답하지도 않았다. 그저 도망가듯 차를 벗어난 저를 단숨에 따라와서는 제 손을 속박하듯 거세게 움켜잡기만 했다.

말만 장난이었지, 형의 행동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화난 걸까. 그렇다면, 대체 왜?’

서원은 느리게 고개를 떨구었다. 자신감이 사라진 눈이 바닥을 망연히 쳐다보았다. 불현듯 불안함과 답답함이 마구잡이로 섞여 숨을 턱 막는 듯했다. 분명 노력하고 있는데, 형한테 맞추려고 하고 있는데, 자꾸 미끄러지는 것 같았다.

정말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는데.

“…….”

돌연 멀미가 날 것 같이 핑, 눈앞이 돌았다. 바닥의 무늬가 일렁이는 불안감처럼 어지럽게 흔들린다. 서원은 희게 번쩍거릴 정도로 눈을 세게 감았다.

‘아냐. 강서원. 너무 멀리 갔어. 침착해. 괜찮아. 막말로 형이 헤어지자고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래. 형이 오늘 친구들한테 소개도 해 줬잖아.’

서원은 파도에 울렁거리는 작은 배처럼 이리저리 휘둘리는 생각을 다스리기 위해 한참을 애썼다. 비로소 불안이 조금이나마 진정되었을 때, 그는 눈을 떴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눈꺼풀이 서서히 접혔다.

눈을 떴을 때는 낯선 신발이 바닥의 무늬를 가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제 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서원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제 앞에 서 있는 누군가의 얼굴을 확인했다. 꼭, 오물을 보는 것처럼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눈과 시선을 마주한다.

“……하.”

이런 시선은 익숙한 탓에 도리어 담담한 얼굴을 쉬이 덮어쓸 수 있었다. 더하여 마주한 눈 안에 스민 감정도 한 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명백한 혐오, 그게 다였다. 그리고, 자신을 혐오하고 있는, 제 앞에 선 누군가.

그 누군가는,

“……시발, 이 새끼 진짜 와 있네.”

형의 동생, 시준우였다.

* * *

결혼식이 시작된 지 10분이 지난 시간이었다.

시연우는 식장 밖을 여기저기 들쑤시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종종 그를 발견한 누군가가 그에게 호의적으로 말을 걸었으나 그는 그들을 무시하며 지나쳤다. 그런 데에 신경 쓸 정신은 이미 날아가고 없었다.

30분.

자그마치 30분째였다.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는 강서원이 돌아오지 않았다. 노인과 대화를 마친 건 강서원이 떠나간 뒤부터 5분 이내였고, 그 후로 내리 녀석을 찾아다녔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건물 자체가 빌어먹게 넓으니 길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멍청하게도 온갖 화장실을 다 뒤진 뒤였다. 허나 그 추측은 빗나갔다. 끊임없이 부재중 전화와 문자를 남겼지만, 돌아오는 응답은 없었다.

불안한 상황에 없어지기까지 하니 개미가 돌아다니는 것처럼 불쾌한 감각이 온몸을 에워쌌다. 안 그래도 요즘 강서원은, 정말로 사람을 말려 죽일 것같이 굴었다. 더 힘들었던 건 그에 반응하는 자신이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준호 삐지겠다.’

‘그냥, 어차피 밥 먹으러 가는 거니까요.’

녀석이 가볍게 흘리는 말들에 왜 화가 나는지. 왜 불안해서 미칠 것 같은지. 왜.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채로 내달리는 감정은 방향감을 상실한 폭주 기관차와 같았다. 연우는 기차가 어디를 향하는지 모르는 채 흔들렸다.

‘시연우, 너 하린이한테도 이렇게 깐족대면 나한테 진짜 혼난다. 하린이 보이면 네가 알아서 피해 가. 알았어?’

그리고 비로소 하린이의 친구가 강서원의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흘렸을 때, 연우는 폭주하는 기관차의 선로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자신이 무엇 때문에 녀석의 말들에 화를 냈는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불안에 떨었는지. 그 들끓는 뜨거운 감정들을 연료 삼아 움직이는 기차의 종착역은 어딘지, 한눈에 보였다.

‘서원아.’

‘그 전에 어떤 누나가 와서 뭐라고 했잖아. 그 말은 뭐냐면, 음, 그러니까…….’

두려움.

두려움이었다.

자신은 강서원이 떠나는 걸 두려워하고 있었다.

“씨발.”

연우는 건물 밖 정원에 있던 온실 문을 세게 닫았다. 잔뜩 일그러진 입술 새로 욕이 거칠게 터졌다.

언제 방향이 이런 쪽으로 비틀렸는지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조바심에 흔들리는 제 이성이 비로소 벼랑 끝에서 곧 떨어질 것처럼 휘청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위험성을 이제야 깨달았는데 강서원이 사라졌다.

그가 다시 핸드폰을 꺼냈다. 이미 백 번은 걸었을 것 같은 통화를 거듭 시도했다. 기다란 다리가 거침없이 잔디밭을 밟으며 나아갔다. 뚜르르. 뚜르르. 단조로운 기계음이 귀에서 뻐끔거렸다.

‘진짜 죽여버리고 싶다.’ 연우는 어디를 향하는지 모를 격렬한 분노를 느끼면서 입술을 짓씹었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안내 음성이 들린다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힘줄이 도드라진 손은 금방이라도 집어 던질 것처럼 핸드폰을 거세게 쥐었다.

반질거리는 구두가 마찰음을 내며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동시에, 안내 음성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을 때였다. 또각거리던 구둣발 소리가 뚝 멈췄다.

연우는 핸드폰을 귀에 댄 채로 저 멀리, 제가 처음으로 찾아보았던 화장실 옆 귀퉁이에 서 있는 서원을 발견했다. 서원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와 마주 서 있는 사람은 이하린이었다. 거기까지 확인하자, 급기야 명치 가운데서 우글우글거리던 거무죽죽한 감정들이 빠르게 팽창했다. 펑. 커다란 폭발음을 냈다.

“…….”

핸드폰을 재킷 안에 넣는 손의 움직임은 군더더기가 없이 침착했다. 연우는 먼 곳에 서서 팔짱을 낀 채로 벽에 어깨를 기댔다. 그들을 바라보는 가지런한 얼굴은, 마치 폭발 뒤의 폐허처럼 서늘하고 조용했다.

* * *

차 안은 기묘한 정적으로 꽉 차 있었다.

서원은 결혼식이 끝난 뒤에 연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이 바쁠까 봐 다른 데서 결혼식을 봤다는, 전화를 보지 못했다는 성의 없는 변명과 사과에도 연우는 따로 토를 달지 않았다. 그저 “밥, 먹고 갈 거야?” 하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서원은 조용한 얼굴을 가로로 저었다. 그게 끝이었다.

“아까, 결혼식 하는 중에 잠깐 밖으로 나왔어.”

아슬한 정적을 깨부순 건 시연우였다. 서원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

아까부터 태도가 심상치 않다. 연우는 생각했다. 단순히 오전에 제가 실수로 과격한 말을 내뱉은 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녀석의 얼굴은 묘하게 냉기를 품고 있었고, 눈빛도 공허했다. 그리고, 그 태도는 연우로 하여금 서원이 하린에게서 어떤 이야기를 들었음을 확신하게 만들었다.

미칠 것 같다. 연우는 핸들을 조금 세게 쥐면서 침착한 투로 말을 이었다.

“어떤… 여자랑 얘기하고 있던데.”

“……아, 네. 화장실에서 나오다가 부딪혔어요.”

서원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다야?”

“뭐가요?”

다소 불퉁하기도 하다. 날카롭게 세운 물음표가 못내 낯설다.

“부딪힌 게 다냐고.”

“네.”

“무슨 얘기 안 했어?”

“핸드폰 액정이 깨져서, 수리 원하시면 전화하라고 명함 주셨어요.”

서원은 숨길 것 없다는 듯 깔끔하고 대담하게 대답했다.

그에게 해준 말이 전부였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사실을 믿지 못했다. ‘거짓말이다. 그럴 리가 없었다. 이하린과 부딪힌 게 다라면, 저런 표정으로 삐딱하게 굴 리가 없다.’ 연우는 파헤치듯 생각했다.

“…….”

“형.”

그사이, 이번에는 서원이 입을 열었다. 여전히 서원의 얼굴은 꼭 두꺼운 석고 가면을 쓴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남자는 핸들을 비틀면서 “어.” 하고 대답했다.

“……카페, 하신다던데.”

“…….”

“사실이에요?”

제가 직접 말해 주지 않았던 이야기. 동시에 조금 흔들리는 평정심. 왈칵. 컵을 꽉 채운 물처럼 그 위로 넘쳐흐르는 감정 때문에 손끝부터 젖어오기 시작했다.

불안하다 못해 불쾌했다. 돌연 연우의 미간이 와그작 구겨졌다. 그는 고개를 비틀어 서원을 바라보았다.

“누가 그래?”

“……맞아요?”

“어디서 들었냐고. 이하린이 그래?”

목 위로 무엇인가가 울컥 솟았다. 엉겁결에 하린의 이름을 내뱉었으나 강서원은 담담했다. 녀석은 카페를 한다는 사실이 더 중요해 보였다. 그 증거로, 허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진짜인가 보네…….” 하고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는 석고 가면이 조금씩 일그러지면서 흰색의 가루가 파스스 떨어지는 모양과 비슷했다.

너무나 강서원답지 않은 태도들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덜컥, 연우는 겁이 났다. ‘대체 무슨 얘기를 들었길래.’ 평정심이 재차 흔들렸다. 이번에는 지진처럼 멈추지 않고 계속 물컵을 흔들었다. 기어이 조바심이 힘없이 툭, 쓰러져 담고 있던 물을 한 번에 쏟아냈다.

화내지 말자. 연우는 흠뻑 젖어 버린 이성을 다스리려고 애쓰며 낮게 말했다.

“나 지금 세 번째 물어. 누구한테 들었어.”

“……저 여기서 내릴게요. 약속 있어요.”

이대로 가면 사고라도 낼 것 같다. 연우는 짓이기듯 브레이크를 밟았다. 검은 차가 도로 끝에 정차했다. 끼익! 타이어가 바닥을 쓸면서 비명을 질렀다. 앞으로 쏠렸던 등이 다시 자동차 시트에 떨어졌다.

새벽의 공기처럼 차갑고 휑한 느낌이 제 주변을 둘러싸는 듯했다. 추웠다. 서원은 등을 돌려 문을 열려고 했으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운전석에서 어떤 조작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서원은 고개를 비틀어 연우를 원망스레 쳐다보았다.

“문 열어 주세요.”

“자꾸 어딜 가겠다는 거야. 너 내가 허락 안 하면 아무 데도 못 가. 알겠어?”

도망가려는 태도에 돌연 빈정이 상해버린다. 연우는 나지막이 이빨을 드러냈다. 목소리가 못내 음험했다. 서원은 침을 삼켰다. 남자를 보는 눈빛이 겁을 먹어 조금씩 흔들렸다.

후우. 연우는 조용히 눈을 감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아냐. 이러면 안 돼.’ 골백번을 했던 생각을 또 하면서 차분해지기 위해 노력한다. 잠시 후, 그는 눈을 뜨면서 회유하는 것처럼 슬쩍 웃는 표정을 지어냈다. 영 자연스럽지 못한 미소였다.

“서원아, 거짓말만 할 거야? 참아 주는 것도 정도가 있잖아.”

“……난, 지금, 형이랑 있기 싫어요.”

서원은 꼴깍, 침을 삼킨 뒤 혼잣말처럼 차분하고 조용하게 말했다.

윽박지르는 형이 무섭다. 화를 참는 것처럼 한숨을 쉬는 것도 무섭고, 협박하는 것 같은 말들을 쉽게,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는 것처럼 내뱉는 것도 무섭다.

반사적으로 손이 벌벌 떨렸으나 그것을 숨기고 싶었다. 서원은 제 손을 허벅지 아래로 비집어 넣었다. 형형하게 타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눈물이 배어나올 것만 같았으나 필사적으로 참았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민규랑, 경찬이랑 만나기로 했다고 말했었잖아요. ……문, 열어 주세요.”

당장에 이 차 안을 벗어나고 싶다. 서원은 그 생각만 반복적으로 하고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안 서지만, 일단 지금으로서는 그의 얼굴을 보기 싫었다. 그의 얼굴만 봐도 너덜거리는 마음에 흠집이 났다. 지금 상태로는 그랬다. 그나마 침착하게 말할 수 있는 여력이 아직은 남아 있는 게 다행이었다. 시준우와 마주친 뒤, 뒤뜰에서 홀로 앉아 한참 마음을 다스린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넌 지금, 이 상황에서 그 개새끼들을 만난다는 말이 나와?”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비죽거리며 비꼬는 것 같은 말투가 코앞까지 도달했을 때, 서원은 제 인내심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형의 동생이 제게 무례를 범해도 참았던 건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소중한 존재를 존중했다. 그러나 그는 쉽게 제 친구들을 짓뭉갰다. 참을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는 것처럼, 아주 쉽게.

서원은 거듭 깨달았다.

형에게 이 관계는 아주 쉬운 거다.

쉽게 끊고, 쉽게 놓을 수 있는 관계인 거다.

그는 거의 한 시간 전의 대화를 떠올렸다. 아니, 사실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반복적으로 떠올리고 있기는 했다.

‘너 원래 게이 아니라며. 씨발, 그러면 대체 뭐 때문에 우리 집에 붙어 있는데. 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자신은 덤덤한 가면을 뒤집어쓰고 차분하고, 조금은 뻔뻔하게 굴었다. 다짜고짜 욕을 하면서 발광하는 녀석이 화가 났으나 형의 동생이라 참았다.

그러나 시준우는 참지 않았다. 도리어 서원의 태도가 약올라 미치겠는 얼굴을 하고서는, 그의 차림새를 아래서 위까지 죽 훑었다. 그리고 기어이 알아챘다는 듯 웃었다.

‘……아, 씨발. 이제야 알겠네. 야, 너 거지지.’

‘…….’

‘맞다, 아, 아아.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 들었다. 그래. 너 씨발 거지라서 시연우가 너 카페 해준다며? 너 빌붙어 살려고 시연우한테 붙어 있는 거구나?’

카페?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준우의 말을 소음 듣듯 흘려듣던 서원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카페?’

‘모르는 척하지 마, 다 티나, 씨발아.’

‘모르니까 제대로 말해. 대화를 하려면.’

‘아주 지랄을 한다. 시연우가 카페 해주는 걸 너한테 말 안 했을 리가 없잖아. 이 새끼 나한테 새침 떠는 거 보니까 진짜 다 아나 본데, 씨발, 시연우 호구새끼네……. 야, 시연우가 너랑 헤어지면 그냥 카페 주겠다고 한 것도 들었냐? 알고서 이러는 거지? 이 개새끼야.’

헤어지면?

‘그러면 조용히 헤어지고 카페 받든가. 왜 여기까지 와서 시연우를 조져 놔. 눈치가 뒈졌냐? 아니면, 뭐 더 받으려고?’

‘…….’

‘근데 어쩌냐, 나는 너 하나도 못 받게 할 거거든.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첫째가 거지새끼고, 둘째가 호모 새끼야.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아무리 돈이 차고 넘쳐도 우리 집 돈, 너한테는 한 푼도 안 줄 거라고. 알았냐?’

두고 봐라.

시준우는 무슨 대단한 엄포를 놓는 초등학생처럼 씩씩거리며 말하고는, 홱 등을 돌리고 재빨리 멀어졌다.

남겨진 서원은 그 자리에 망연히 앉아 있기만 했다. 시준우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사고가 정지한 탓이었다. 욕설과 모욕적인 말들이 속사포처럼 다다다다 제 머리 위로 쏟아졌으나 그것들은 아무렇지 않았다.

제 가슴에 콱, 고드름처럼 차갑고 아프게 박힌 것은 그중 단 한 가지의 사실이었다.

‘시연우가 너랑 헤어지면 그냥 카페 주겠다고 한 것도 들었냐?’

형은, 나와 헤어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

‘나랑 헤어질 생각하지 말기.’

‘…….’

‘나 버리지 말기. 지겨워하지 말기.’

‘하하하.’

여태껏 내가 형과 헤어지지 않기 위해 애썼던 건, 조바심을 냈던 건, 불안해하고 눈치를 보았던 건, 그 모든 것들은 다 헛짓거리였다. 어차피 형은 끝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와 헤어지지 않고 영원히 함께하고 싶었던, 제 절실한 바람은 그저 뜬구름 같은 것이었다. 자신은 여태까지 유리병에 구름을 비추고는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래. 모든 게 착각이었다.

“……몸이,”

“…….”

“몸이, 안 좋아요.”

기어이 눈물이 차올랐다. 서원은 흘리지 않기 위해 빨갛게 충혈될 정도로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뭐?”

“위가 아파요.”

더 이상 그와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기분이 나빠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무서워서였다. 제가 오늘 들은 것에 대해 추궁하면 그가 쉬이 긍정할까 봐. 헤어짐이 금방 현실이 될까 봐. 그에게 확답을 듣기에는 지금 자신은 상처받을 준비가 하나도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은, 도망가고 싶었다. 오늘만큼은.

“스트레스 받아서, 그런가 봐요.”

서원은 곧 쓰러질 것 같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

많이 아파 보이긴 하는데.

어지럽게 섞여 있던 감정들을 한 번에 일소해버린 건 걱정, 그 단순한 마음 하나뿐이었다. 덜컥 심각해진다. 연우는 인상을 찌푸린 채로 서원의 낯을 이리저리 핥듯이 살폈다. 그 시선이 서원에게는 제 거짓말을 감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서원은 시선을 툭 떨구며 검은 눈동자를 피했다. 그리고 더듬더듬 손을 들어 공연히 배 부근을 만지작거렸다.

“일단 병원부터 가자.”

“혼자 갈게요.”

“너, 대체…….”

“형, 제발. 문 좀 열어 주세요.”

애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우는 기어이 복잡한 얼굴로 서원을 바라보았다. 창백해진 얼굴이 물기를 가득 머금은 채였다.

“…….”

“저 혼자 가고 싶어요.”

“…….”

“너무 아파요.”

이대로는, 아무것도 될 것 같지가 않다. 급기야 연우는 절감했다. 아프다는 애를 강압적으로 병원에 끌고 갈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계속 차 안에 가둬 둘 수도 없었다. 사실 시준호나 시준우였으면, 그렇게 키워 왔기 때문에 고민할 여지도 없이 무식하게 대했을 것이었다. 그게 저에게 더 익숙한 방법이긴 했다.

근데 강서원은 안 될 것 같았다. 아니, 당연히 강서원에게는 안 될 일이다. 그렇게 대하다간 자신이 못 견딜 게 분명하다.

연우가 문의 잠금을 풀었다. 서원은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문을 열었다.

“……서원아.”

차에서 벗어난 서원이 문을 쥔 채로 그를 돌아보았다. 남자는 살짝 인상을 쓴 채로 말했다.

“가다가 너무 아프면 전화해.”

“…….”

“……집 올 때는 전화하고. 데리러 갈게.”

쾅. 대답 없이 문이 닫혔다. 연우는 택시를 잡아타는 서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툭, 핸들에 이마를 처박았다.

“……하아…….”

엉망이다. 왜 이렇게 강서원에게는 화를 못 참는 건지 모르겠다. 점점 자제력을 잃는다. 시준호, ……아니, 그보다 더한 애새끼나 다름없었다.

강서원의 향기가 코끝에서 사라지니 비로소 마비라도 풀린 양 뇌가 유연해졌다. 요즘은 계속 그랬다. 무슨 악랄한 저주에라도 걸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불가항력적이었다.

밤에 집에 오면, 일단 사과 먼저 해야겠다.

연우는 그제서야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오늘로서는 처음이었다.

* * *

머리가 팽글팽글 돈다. 멀미를 견디지 못한 몸이 몇 번이나 휘청거렸다. 먹은 것도 없는데 속이 울렁거렸다. 심장이 위아래로 움직이면서 몸 안의 장기들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곧 있으면 압박을 견디지 못해서 어딘가가 터질 것만 같았다.

“하아, 하…….”

결국 서원은 걷다 말고 건물 외벽에 몸을 기댔다. ‘왜 이러지, 갑자기.’ 그는 당황한 얼굴로 심장 부근을 매만졌다. 침을 꼴깍 삼킨다. 아프다는 건 차를 벗어나기 위한 엄살이었는데, 정말로 어딘가가 아픈 것처럼 숨이 가빴다.

불현듯 손바닥에 저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서원은 몸을 기댄 채로 제 손을 펼쳐 보았다. 시허옇게 뜬 손바닥 위로 혈색이 퍼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긴장이 차츰 풀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꽝꽝 얼어 있던 감정이 푸스스 녹는다. 마침내 서원은 제 상태를 깨달았다.

자신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분명 차 안에서는 괜찮았다. 무섭다고는 생각했으나 이 정도는 아니었다. 형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이 다른 감정보다 더 컸기 때문에 공포를 간과할 수 있었던 게 아니다.

‘너 내가 허락 안 하면 아무 데도 못 가. 알겠어?’

‘참아 주는 것도 정도가 있잖아.’

피를 가시게 할 정도의 공포는 상황 중에 터지지 않았다. 그 감정은 도리어 후유증에 가까워서, 상황이 끝난 후에 더 커다랗게 찾아오곤 했다.

서원에게도 그러했다. 그가 차 문을 닫고, 홀로 길을 걸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낮고 살벌한 목소리. 뻘겋게 타던 눈. 당장이라도 저를 짓누를 것 같았던 형의 고압적인 분위기. 작은 이명. 제 의사와 다르게 열리지 않는 문. 무자비함. 억압하는 말들. 감시자 같은 시선. 그것들이 한꺼번에 저를 조여 왔고, 그 모든 게 처음이었던, 아직 어리숙한 심장은 그 압박에 속절없이 당하고 말았다.

엄마 손을 잡은 꼬마 아이가 서원을 이상하다는 듯 빤히 쳐다보면서 지나갔을 때야 서원은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창백했던 뺨이 조금씩 벌건 기운을 머금기 시작했다. 피가 돈다. 서원은 습관적으로 꾹꾹 제 뺨을 손등으로 누르며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집으로 가는 길이 유독 멀게 느껴졌다.

* * *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6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암막커튼이 쳐진 작은 방 안은 어둡고 조용했다. 얼마나 깊게 잔 건지 모르겠다. 서원은 눈을 빠끔거리며 베개 밑에 손을 집어넣었다. 이내 베개 밑을 벗어난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서원은 머뭇거리다가 잠금을 풀었다. 다섯 개의 문자가 와 있었다. 두 개는 경찬이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형이었다.

형.

순간적으로 손가락이 움찔 떨렸다. 그에 당황한 건 스스로였다. 서원은 몸을 옆으로 눕히고 베개에 볼을 묻었다. 조심스레 문자함을 확인했다.

15:30 [연우 형] 서원아, 병원 갔어? 몸은 괜찮아? 아까 나쁘게 대한 건 미안해. 집 오면 얼굴 보고 제대로 사과할게. 그리고 오해든 뭐든 풀자.

16:01 [연우 형] 자는 거야?

17:32 [경찬] 깡서 어디? 나 김민규가 혼자있대서 건대에서 먼저 만나게ㅋ 너도 일찍 올수잇음 와

17:34 [연우 형] 서원아

17:39 [경찬] 바쁘냐?? 나 민규랑 피씨방 옴ㅋ 7시에 하루비어로 오고 그전에올거면 스페이스피씨방으로 컴온ㅋ

거기까지 읽었을 때였다. 우웅. 돌연 진동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감전된 것처럼 손바닥에 찌르르한 감각이 느껴졌다. 왜인지 깜짝 놀라 들고 있던 핸드폰을 놓을 뻔했다. 툭. 액정을 건드는 손가락이 망설임을 가득 담고 있었다.

17:44 [연우 형] 친구들이랑 노느라 답장 못하고 있는 거지?

17:44 [연우 형] 기다리고 있을게. 밤에는 연락 줘

“…….”

좀 자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여전히 남아 있다. 허탈감도, 공포도 그랬다. 형이 저와의 헤어짐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건 변함 없는 사실이었고, 제가 그런 형을 붙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도 여전했다. 아까의 그 상황도 여전히 기억 속에 있었다. 어떻게든 형과 얼굴을 맞대고 이 상황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자꾸 머뭇거리게 됐다. 미루고 싶었고, 숨고 싶었다. 다시금 그 눈과, 그 목소리와, 그 표정과, 그 압박감을 마주해야 할까 봐 두려웠다. 이미 경험해 보았으니 더 그랬다.

스트레스를 받은 탓인지 정신이 몽롱하다.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것처럼, 자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서원은 축 처지는 상체를 가까스로 일으켰다. 힘이 빠진 눈이 액정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가 경찬에게 전화를 건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 * *

태원은 시간을 확인하면서 급하게 욕실로 들어갔다. 그의 엄마는 예배 시간에 늦겠다며 욕실 문 앞에 서서 그를 닦달했고, 이미 교회 갈 준비를 끝낸 재원은 소파에 눕듯이 앉아 강태원은 저래서 안 된다며 쯧쯧 혀를 찼다. 쾅쾅쾅, 욕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태원은 머리를 감다 말고 소리를 질렀다.

“아, 쫌! 5분이면 다 해!”

“그러게 엄마가 어제 일찍 자랬지!”

태원은 대답하지 못하고 거품이 난 머리만 박박 문질렀다. 폭격 같은 엄마의 잔소리가 짜증은 나는데 반박할 수가 없었다. 어제 늦게 자서 결국 오늘 늦게 일어난 것도 맞고, 그렇다고 쿨한 척 형과 엄마만 저 빼고 교회에 가라고 할 수도 없었다.

새벽 봉사부터 본 예배, 심지어 2시에 있는 청소년 예배까지 할 거라고 엄마와 형에게 말한 건 자신이었다. 그리고 제가 했던 말대로 꼭 참여해야만 했다. 제 짝사랑 상대, 이은혜의 주변에 누군가가 꼬일지도 모른다. 제가 은혜의 주변을 지켜야 했다. 그러니 이은혜가 찬양 밴드로 참여하는 예배와 봉사들은 모조리 참여해야 한다.

이런 제 흑심을 엄마가 아는지, 모르는지는 모르겠다. 아니, 알 것이었다. 일단 둘째 형이 아니까 엄마도 알 터다. 하지만 엄마는 제가 무슨 생각을 하든지 간에 예배에 참여하는 행위 자체에 큰 의의를 두는 듯했다.

“강태원, 2분 남았다. 2분 뒤에 그냥 재원이 형이랑 출발할 거야.”

“재촉하지 마!”

안 그럴 거면서 괜히 그래, 저 아줌마는. 태원은 꿍얼거리며 제 방으로 뛰쳐들어갔다. 옷장을 뒤지는데 오늘따라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이은혜 앞에서 두세 번씩은 입었던 옷이었다. ‘어쩌지.’ 고민하던 태원은 무작정 거실로 나왔다. 그대로 둘째 형의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등 뒤에서 심드렁한 목소리가 꽂혔다.

“야, 내 옷 입으면 죽는다.”

핸드폰에 정신 팔린 줄 알았는데, 다 보고 있었던 듯하다. 고개를 돌려 확인하니 둘째 형이 주먹을 꽉 쥐고 제게로 들어 보였다. 협박의 의미가 다분하다.

“하나만 빌려줘. 티셔츠 하나만.”

“싫어.”

“아, 됐어. 더러워서 안 입어.”

인색함에 약이 오른다. 태원은 꿍얼거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첫째 형의 방으로 향했다. 첫째 형 옷은 마음대로 입어도 상관없었다.

“야, 조심히 들어가. 형 자고 있어.”

“어?”

태원이 문고리를 잡았을 때, 재원이 말했다. 이번엔 의아한 얼굴이 재원을 바라보았다. “큰형 왔어?” 태원이 물었다.

요즘 자신의 첫째 형은 친구네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아르바이트하는 곳과 가까워서라는데, 자세한 사정은 잘 몰랐다.

“어제 집 오니까 자고 있더라고. 쭉 자고 있어.”

“그래?”

재원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들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였다. 저들의 큰형은 휴일에 자는 시간이 생기면 꽤 길게 자는 편이었다. 평소에 피곤한 일들을 많이 해서 그럴 것이라는 합리적인 추측에는 조금의 미안함도 묻어 있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큰형이 문을 닫고 잘 때에는 모두가 방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었다.

벌컥. 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어둡고 조용한 방 안은 꼭 동물이 숨어 사는 굴 같았다. 태원은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천천히 문을 닫았다. 큰형이 죽은 듯 자고 있는 것을 확인한 뒤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 행거를 뒤적거리던 중이었다.

우웅. 우웅. 우웅.

“악, 깜짝이야!”

별안간 들리는 진동소리에 태원은 도둑질을 하려다 들킨 사람답게 몸을 떨었다. 놀라는 바람에 꽤 큰 소리를 냈는데도, 제 첫째 형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헙. 제 입을 막은 태원은 눈을 굴리다가 손을 떼어냈다. 소리가 난 쪽으로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소란의 범인은 형의 머리맡에 놓인 핸드폰이었다.

꽂혀 있는 충전선을 빼기 위해 형의 핸드폰을 들어 올린 태원이 흠칫 놀랐다. 핸드폰은 따뜻하다 못해 불에 달궈진 것처럼 뜨거웠다. ‘왜 이렇게 뜨겁지.’ 그는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핸드폰을 확인했다. 중요한 전화일지도 모른다는 이유였다.

[연우 형]

‘모르는 이름이네. 그냥 친군가? 안 깨워도 되나.’ 태원은 아직도 웅웅 진동하는 핸드폰을 쥔 채로 생각했다. 곧이어 끈질기게 이어지던 전화가 끊겼다. 액정 위로 알림창이 빠르게 떠오른다.

부재중 전화 93통.

“……무, 뭐야, 이게.”

“강태원, 형이랑 엄마 진짜 간다!”

놀랄 새도 없이 방문 너머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띠리릭. 진짜 당장이라도 갈 것처럼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아, 잠깐만!”

태원은 큰형의 핸드폰을 다시 침대 위로 던지듯 내려놓고는 방을 떠나갔다. 쾅. 문이 닫혔다.

* * *

뜨거운 것이 닿은 것처럼 팔 언저리가 화끈거렸다. 그 자그마한 자극이 서원의 머리채를 잡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번쩍. 한순간에 의식이 깨어났다. 일어나자마자 인지한 것은 짓누를 것처럼 뻐근하게 뛰는 심장이었다.

“…….”

몇 시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서원은 잠시 어두운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팔을 뻗어 암막 커튼을 걷어냈다. 바깥이 밝았다. 빛의 자극에 가느다랗게 뜬 채로 밖을 바라보던 눈은 한참이 지나서야 이동했다.

팔 부근에 있던 것은 핸드폰이었다. 뜨겁다 못해 곧 터질 것만 같은 온도에 서원은 조금 의아해했다. 비로소 멍한 정신이 깨어난다. 손가락은 차분하게 핸드폰 잠금을 풀었다. 동시에 해일에 휩쓸려 온 것처럼 모든 것들이 액정 위로 쏟아졌다.

오전 9시. 문자 22통. 부재중 전화 98통.

압박적인 횟수였다. 서원은 당황한 얼굴로 꼴깍 침을 삼켰다. ‘뭐지.’ 부들. 반사적으로 손가락이 떨리자마자 다시 99번째 전화가 왔다. 갑작스러운 상황이 연이어 들이닥친다.

우웅. 우웅. 우웅. 우웅. 우웅.

진동 소리가 이명처럼 귓구멍을 계속해서 쑤셔댔다. 서원은 눈을 깜빡거리며 액정을 밀었다. 불안한 징조를 예감한 양 심장은 아까부터 아프게 뛰고 있었다. 핸드폰을 귀에 대는 손이 머뭇거렸다.

“…….”

마침내 진동 소리가 멎었다. 대신, 핸드폰 너머로 숨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화가 난 것처럼 거친 숨소리였다. 서원은 핸드폰을 부여잡은 채로 입을 뻐끔뻐끔거렸다. 뭐라고 해야 하는데 말이 안 나왔다.

그때였다.

「어디야.」

심해 저 아래로 처박힌 것처럼 낮은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서원이 무어라고 목소리를 내기도 전이었다.

시연우는 조용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알아. 집이지? 경찬이랑 통화했었어. 그래도, 100번은 채워야 할 것 같아서.」

지나치게 건조하고, 땅 아래로 기어 다니는 것처럼 차분하다. 그에게서는 처음 듣는 종류의 것이었다. 마침내 서원은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다.

“……왜, 이렇게 전화를…….”

「서원아.」

돌연 싹둑, 서원의 말허리를 베어낸 칼날은, 스치면 쉽사리 살이 벌어져 벌건 속내를 다 드러나게 할 정도로 날카로웠다.

벌건 속내 사이로 흐르는 피처럼 비릿한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이어졌다.

「얼른 집 와야지. 외박은 안 된다고 했잖아.」

어르는 듯한 말 음절 사이사이에는 살기가 그득그득 도사리고 있었다.

그것이 서원에게는 느껴졌다. 그래서, 당황스러웠다. 형이 미안하다는 문자를 보냈던 게 바로 어제였고, 자신은 딱 하룻밤 연락이 되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연락 두절을 한 것이라면 화날 법도 했지만, 아니었다. 어제 9시, 잠들기 전에 용기를 내어 그에게 문자를 보냈었다. 하루라도 생각을 정리하고 만나고 싶다고. 오늘은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서원이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마침내 입을 떼었다. 제가 잘못한 건 없다는 생각이 그의 등을 떠밀었다.

“제가, 말했잖아요. 하루 동안은…….”

「지금 올 거지?」

“…….”

「서원아.」

제 문자를 보지 않은 것처럼, 꼭 지금 제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처럼 말을 한다. 이상하다. 서원은 막연한 불안함을 느꼈다. 거듭 마른침을 삼킨 찰나였다.

「네 발로 올래, 아니면 내가 데리러 갈까?」

느긋하게 묻는 목소리는 다음 순간, 음산한 빛을 품었다.

“…….”

「근데 후자는, 좋은 꼴 못 볼 수도 있어.」

차분했으나 명백한 의도가 있었다.

그는 제게 협박하고 있었다.

공격성. 그 과격함. 그를 느끼자 돌연 숨통을 움켜잡힌 것처럼 호흡을 할 수가 없었다. 견딜 수가 없다, 라고 생각한 순간 눈앞이 번쩍거렸다. 위협을 당한 마음은 허겁지겁 굴 안으로 튀어버리는 산토끼처럼 번쩍번쩍 빠르게 나아갔다.

무서운 것도 무서운 것이었지만, 무엇보다 서글펐다. 그가 지금 저에게 하는 행동이 그저 집착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시연우가 너랑 헤어지면 그냥 카페 주겠다고 한 것도 들었냐?’

아무런 따스한 감정도 들어 있지 않은,

그저 공허한 소유욕.

“……안 가.”

「…….」

“평생, 안 갈 거예요.”

서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내 얼굴, 볼 생각도 하지 마.”

뚝. 서원이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핸드폰이 침대 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쾅쾅쾅!

어떠한 생각을 할 틈도 없이 현관문을 내리치는 소리가 두개골을 깰 것처럼 거세게 터졌다. 마른 몸이 돌연 뻣뻣하게 굳었다. 서원은 놀란 눈 그대로 침대를 벗어났다. 맨발이 머뭇거리며 방 밖으로 나섰다. 삐걱대는 고개가 기웃, 현관문 쪽을 바라보았다.

“…….”

쾅쾅쾅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한 번 더 고막을 내리쳤다. 전화를 끊은 지 5초도 지나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빨리 올 리가 없다. 서원은 자신을 진정시키듯 생각하면서 더듬더듬 현관으로 향해 걸었다. 잠금을 풀고, 문고리를 돌린 순간이었다.

“어……!”

확, 세찬 힘이 문을 열어젖혔다. 부지불식간의 힘에 문고리를 쥐고 있던 서원이 앞으로 고꾸라지듯 휘청거렸다. 넘어지려는 몸을 붙드는 손이 강했다. 서원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든 건 아니었다.

숨소리만 들어도, 제 팔을 잡아 일으키는 손의 감촉만 느껴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신발 신어.”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

형이었다.

“……어떻, 게…….”

“신어, 얼른.”

“…….”

“나 지금 참고 있어. 더 못 참기 전에 신어.”

마치 덫에 걸리기 전의 사냥감처럼 서원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얼굴이 새하얗게 떴다. 연우는 그런 서원을 가만히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잠시간 탐색전을 하는 것 같은 팽팽한 침묵이 오갔다. 마침내 입술을 떼어낸 건 서원이었다. 서원의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안, 간다고…….”

“…….”

“안 간다고, 했잖아요.”

“…….”

“안 가요. ……형, 집.”

파르르 떨리는 두 살덩이 사이로 반항의 말이 샌다. 하. 연우는 현관문을 고쳐 잡으며 웃었다. 차가운 웃음이었다.

“안 가?”

“어차피……!”

왜 겁을 줘요. 왜 집요하게 굴어요. 왜 집 앞에 있었어요.

어차피 헤어진다면서.

어차피 버릴 거라며.

서원은 그가 이해 가지 않았다. 어차피, 라는 말이 가슴을 저몄다. 그 와중에도 헤어지기가 싫어서 서러운 감정을 느끼는 스스로가 어이가 없었다. ‘미친 새끼. 강서원, 밸도 없는 등신 새끼.’ 자학적으로 생각하는 동시에, ‘그냥 빌까. 이렇게 화내지 말고, 그냥 무작정 빌어버릴까. 좀만 더 사귀어 달라고, 그러면 좋아질 수도 있겠다고. 잘하겠다고. 더 잘해 보겠다고. 말해 볼까.’ 하는 충동이 드는 자신이 말도 안 되게 한심했다.

“…….”

“어차피, 헤어진다면서요.”

그래서 지르듯이 뱉어버렸다. 더 이상한 생각을 하기 전에. 진짜 추해지기 전에.

“…….”

“…….”

다시, 침묵.

돌연 서늘했던 얼굴 위로 놀라움이 떠올랐다. 눈을 한 번 깜빡인 남자는, “……뭐?” 하고 감탄사처럼 작고 짧게 물었다.

바로 대답하면 목소리가 떨릴 것 같았다. 잠시 진정하기 위해 서원이 침묵하는 사이, 그의 말을 생각하는 것처럼 조용하던 연우가 거듭 곱씹듯이 물었다.

“누가, 헤어져?”

“…….”

다른 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헤어진다. 이 말만 들렸다. 강서원의 입에서, 헤어진다라는 말이 나왔다. 그 사실만이 단순하고 직관적인 남자의 머리를 통째로 지배했다.

이성의 끈이 점점 헐거워지고 있는 게 느껴진다. 연우는 슬쩍 상체를 숙여 서원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너랑 내가, 헤어진다고?”

불현듯 고요했던 수면이 파형을 일으키는 것처럼 동요했다.

“……너랑, 내가?”

“형이,”

“너랑 내가 헤어져?”

“형이 그랬잖, ……윽!”

갑자기 다가오는가 싶더니 와락, 손목을 잡아 온다. 힘이 드셌다. 부러뜨릴 것처럼 쥐어오는 손에 서원은 신음을 냈다. 뼈에서 저릿한 느낌이 들었다. 반사적으로 팔을 비틀자 달라붙은 손가락이 더 세게 손목을 조였다.

“아파……!”

“너랑 내가 왜 헤어져.”

“왜, 왜, 그러는, ……형, 형이, 친, 친구한테……,”

“여기서 그딴 말을 함부로 지껄이면 어떡해, 서원아.”

불이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붙잡힌 손목이 잘릴 것처럼 아팠다. 더 물러설 수도 없을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서원은 남자의 눈 속에서 점점 커지는 불덩이를 발견했다. 그 불길에 붙잡혀 옴싹달싹할 수가 없었다.

이상하다. 서원의 본능이 그렇게 뇌를 스친 찰나,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너, 당장 쥐도 새도 모르게 실종시킬 수도 있는데.”

서원을 잡아 둔 눈이 번들거리며 이채를 머금었다.

“…….”

심장이 겁을 먹어 파랗게 질리는 듯했다. ‘형이 그랬잖아요.’ 말을 해야 하는데, 따져 물어야 하는데, 입이 굳었다. 비단 입뿐만 아니라, 다 그랬다. 서원은 눈을 깜빡이는 것도, 숨을 쉬는 것도 잊은 것처럼 가만히 굳어 있었다.

“형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어?”

바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벼락처럼 내리치는 목소리에 눈앞이 아찔하게 터졌다. 남자는 그대로 서원을 끌고 걷기 시작했다. 서원이 파닥거리며 필사적으로 현관문을 쥐었다. 끌려가지 않기 위해 몸에 힘을 주자 남자가 걸음을 멈췄다. 서원을 돌아본다.

“……형, 형이, ……아윽!”

형이 진정하면 갈게요, 라고, 생각을 거듭해 그나마 최선의 말을 하려던 참이었다. 숨을 한꺼번에 들이켜는 사이 몸이 떴고, 시야가 빠르게 돌았다. 뜨겁고 단단한 어깨 근육이 배 부근에 느껴졌다. 연우의 팔이 대롱거리는 다리를 꽉 쥐었다. 서원은 세게 주먹을 쥐고 연우의 등짝을 쉴 새 없이 때렸다. 발버둥을 쳤으나 저를 지고 가는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싫어……!”

거친 반항에도 남자는 조용했다.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는 그저 이성이 흔적도 없이 휘발한 얼굴로 걸음을 옮기기만 했다. 일견 침착해 보이는 눈은 깊숙한 곳에서는 정상이 아니었다. 성큼, 성큼, 보폭이 넓은 발이 순식간에 차 앞으로 닿았다.

“아…… 흣!”

문이 열리고 서원의 몸이 거칠게 자동차 시트에 처박혔다. 부딪힌 등과 엉덩이가 아팠다. 곧바로 조수석 문이 닫혔다. 남자가 보닛을 도는 동안, 서원은 패닉에 젖은 얼굴로 문고리를 헐떡거렸다. 그러나 역시, 문은 열리지 않았다. 트라우마에라도 갇힌 양 숨이 가빠오기 시작한다.

쾅. 운전석이 닫혔다. 남자는 그대로 차를 출발시켰다.

서원은 저릿거리는 손목을 더듬더듬 만지면서 침을 삼켰다. 바들바들 온몸이 떨렸다. 귀가 멍멍하다. 눈가가 겁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내, 내려 주세요.”

“…….”

“……형, 저 무서……,”

“내 좆대로 틀어막기 전에 그만 입 다물어.”

남자의 읊조림을 끝으로, 차 안은 고요해졌다.

연우는 공연히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로 운전했다. 더 이상 녀석의 입과 눈, 손에서 어떤 거부의 의사를 목격한다면, 진짜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기어이 검은 차가 차고 안으로 들어섰다. 끼익. 거칠게 차를 세운 연우가 그대로 문을 열었다. 차고 셔터가 내려가자 금세 빛이 차단되었다. 닫힌 차고 안을 울리는 발걸음 소리가 선연했다.

또각. 또각. 또각. 또각. 또각. 벌컥.

문이 열렸다. 남자는 허리를 숙였다. 그대로 서원을 안아 들기 위해 팔을 벌렸다. 검은 눈이 서원의 얼굴을 향했다.

그 순간,

“…….”

뚝. 얼음장처럼 냉정했던 움직임이 멎었다. 뒷골을 정통으로 후려맞은 듯 별안간 정신이 들었다. 서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눈은, 무서운 거라도 보는 것처럼 크게 뜨여 있었다.

“흐, 으……. 흑…….”

단정했던 얼굴이, 잔뜩 젖어 있다.

생기가 돌던 뺨은 터질 듯 새빨갛게 익어 있었고, 차에 오르기 전만 해도 부릅뜨고 있던 눈은 곧 정신을 잃을 것처럼 아슬아슬한 빛을 품은 채로 아롱거렸다. 도톰한 윗입술과 눈물로 젖은 속눈썹이 겁을 한껏 집어먹어 파들파들 떨렸다. 딱딱하게 굳은, 가냘픈 모양의 턱 아래로 방울진 눈물이 투둑투둑, 쉴 새 없이 떨어졌다.

“……아파, 요…….”

그 모든 게 저를 향하고 있었다. 두려움. 슬픔. 원망. 도망치고 싶은 마음과 공포. 갈색 눈동자 위로 스미듯 고이는 맑은 눈물. 상처. 그 모든 것들이 다.

“…….”

심장이 움찔거린다. 허리를 쥐어 올리려던 손이 머뭇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무서, 읍, 흑…….”

“…….”

“형…… 흐, 읏……, 무서, 무서워요…….”

돌연 연우의 머리 위로, 서원이 처음 제 앞에서 울었던 날이 스쳤다.

‘……이상하잖아요.’

‘뭐가 이상해.’

‘진짜 이상해…….’

버스 정류장에서의 그날. 따분했던 그 봄의 낮. 쇼핑백을 안은 채로 엉엉 울었던 강서원. 그때 자신은, 처음 동생이 생긴 소년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 와중에 예쁘다고 생각했고, 쾌감을 느꼈다. 눈물로 반짝거리는 눈 아래 살갗을 만지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단지 그뿐이었는데,

“…….”

“……으, 흑……나, 무섭단, 말이에요…….”

지금 자신은, 첫사랑을 깨달은 소년처럼 아파하고 있었다.

우는 강서원의 얼굴. 쾌감은커녕 아득한 격통만이 심장 중앙을 꿰뚫었다. 고통은 혈관을 타고 아릿하게 퍼졌다. 사고가 정지한 것 같았다. 분노가 폭발하기도 전, 차가운 물을 쏟아부은 것처럼 들끓던 모든 감정이 미지근하게 식었다.

“흐으, 흑…….”

“……하…….”

마침내 당황한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한숨이 흘렀다. 그는 제압당해 옴짝달싹 못 하는 패배자처럼 압도적인 무력감을 느꼈다. 기어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입술을 짓씹는다.

“……울지 마.”

연우는 조수석 옆에서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당혹감을 이기지 못하고 연신 검은 머리를 쓸어넘겼던 손이 천천히 서원에게로 다가갔다. 손을 조심스레 잡아끌어도 떨리는 감촉은 멎지를 않았다.

손목은 이미 푸르스름해져 있었다. 엉망이었다. ‘미치겠네.’ 연우는 인상을 구긴 채로 얼룩진 흔적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감쌌다. 움찔. 손이 떨렸다.

“미안해.”

“……흑, 흐으, 으…….”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어쩔 줄을 모르겠다. 우는 것, 겁먹는 것, 아파하는 것, 모조리 그만 보고 싶었다. 머리가 바보처럼 하얘지는 것 같았다. 연우는 안절부절못하다가 꼭 미신을 믿는 아이처럼 서원의 손목에 호, 호, 제 입김을 불어넣기에 이르렀다.

부드러운 손길. 그리고 시선이 끈질기게 이어졌다. 서원은 눈물이 엉겨 붙은 속눈썹을 꿈뻑거리면서 남자를 원망스레 쳐다보았다. 질식사를 할 것 같았던 심장이 서서히 심호흡을 한다.

“지가 먼저, 그랬으면서……. 지가 나랑, 나랑 헤어진다고…… 흑……. 네가 먼저 그랬잖아, 나쁜, 나쁜 놈, 나쁜……. 네가 먼저…….”

“미안해. 응? 잘못했어. 서원아.”

일단 심장을 자꾸 저미게 하는 저 울음부터 멈춰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너무 아팠다. 연우는 되는 대로 사과하면서 서원의 손을 주물거리다가, 그의 무릎에 툭, 이마를 맞대다가, 또 손가락 끝에 쪽쪽 키스하다가를 정신없이 반복했다.

미안해. 미안해.

어린아이의 사과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 * *

차 안에 비치해 두었던 티슈가 다 젖어 들었을 때 시연우는 서원을 조심히 안아 들었다. 싫다고 바르작대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우는 데 기운을 다 뺏기기라도 한 모양인지 안아 든 몸은 축 늘어진 채로 남자의 어깨를 적시기만 했다. 훌쩍거리는 소리가 조금씩 샜다.

집으로 들어선 연우는 서원을 거실의 일인용 소파에 내려놓았다. 서원은 푹신한 등받이에 등을 딱 붙이고 두 무릎을 세웠다.

“끅…… 흐으…….”

“…….”

이제는 더 이상 네가 뭐 어쨌다는 둥, 알아들을 수 없는 말도 하지 않는다. 연우는 서원이 울면서 했던 말들을 하나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느 중에는 꽤 명확하게 뭐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그야말로 모양만 귀를 스칠 뿐 모르는 외국어를 듣는 것처럼 뇌가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귀 밖으로 그 말들을 내보냈다. 우는 얼굴에 마음이 저미는 듯 아팠고, 눈물을 멈춰야겠다는 생각에 정신을 송두리째 빼앗긴 탓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웅얼웅얼거리지도 않고 마냥 울기만 한다. 차 안에서는 화를 내는 것 같았는데, 어느새 마치 이별을 선고받은 사람처럼 서럽게 눈살을 찌푸리며 울고 있다.

‘왜 저렇게 울지. 무서운 건 좀 가신 것 같은데.’ 혼란스러운 얼굴로 서원을 내려다보던 연우는 티슈 상자를 집어 들어 그의 무릎 옆에 슬그머니 올려 두었다. 그리고 우는 얼굴에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의자 밑에 앉았다. 뭐라고 말을 할 것처럼 달싹이던 입술이 이윽고 꾹 닫혔다. 거실 안에는 서원의 울음소리만 축축이 내렸다.

“…….”

이상했다. 몸이 굳은 것처럼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녀석을 함부로 건드리기도 어려웠고, 함부로 눈물을 닦아 주기도 어려웠다. 울지 말라고 적극적으로 달래 주기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무력감이 사라지지를 않는다.

“……울지 마, 응?”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 같았던 강서원이, 그 강서원이 어렵다. 마냥 울기만 하는 어린애일 뿐인데도 어렵다. 이토록 사람을 대하는 게 어려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그 와중에 달래 주고는 싶은 마음에 연우는 한참을 망설이던 손을 들어 바지 밑단 아래에 슬쩍 넣었다. 그리고 가느다란 발목을 조심스레 슥슥 매만졌다.

울음소리가 멎은 건 한참 뒤였다. 언젠가부터 서원의 종아리께에 이마를 댄 채로 울지 말라고, 미안하다고 중얼거리기만 하던 연우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발목을 문지르던 손이 멈춘다. 시선이 대각선으로 마주했다.

“…….”

“…….”

눈이 마주치자마자 잡고 있던 발목이 움찔 뒤로 물러가는 게 느껴졌다. 아직도 겁을 먹고 있는 듯했다. 그래도 줄줄 쉴 새 없이 터지던 울음이 멈추니, 안절부절못하던 마음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나마 그랬다. 곧이어 멈추어 있던 톱니바퀴가 서서히 굴러가기 시작했다. 사고가 돌아간다.

연우는 발목을 쥔 손가락에 은근히 힘을 주며 끌어당기면서 서원의 안색을 면밀하게 살폈다. 감정이 많이 가라앉은 듯했다. 헤어지자니 뭐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 기세는 아니다. ‘충동적으로 그런 건가.’ 그는 짐작했다.

“이제…… 괜찮아?”

조심성이 다분한 목소리였다. 서원은 훌쩍거리면서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낸 건 미안해. 형이 진짜 잘못했어.”

“…….”

“……손목에, 약 발라 줄까?”

이번엔 고개를 가로젓는다. 움켜쥐고 있던 곽티슈를 조금 더 세게 쥐면서 떠듬떠듬 입을 연다.

“……일단, 집에 가면…… 안 돼요?”

“…….”

“하루, 하루만 시간 주세요. 저 오늘은, 자세히 이야기할 정신이 안 돼서 그래요. 미안해요, 제가, 정신이 없어서, 아무 생각이 안 나서…….”

헤어지는 걸 하루라도 미루고 싶다.

서원의 의도였다. 그는 어떻게든 변명을 이어 갔다. 울면서 말하기는 했으나, 형이라면 제 말들을 다 들었을 것이라고 당연스레 짐작하고 있던 차였다. 그러니까 제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을 때 형은 화내던 것을 급히 멈출 것일 터다.

미안해, 울지 마, 하며 잔뜩 가라앉은 채로 저를 달래는 형은 처음 보는 모습과 분위기였다. 그 낯선 얼굴이, 그 착잡하다는 듯한 눈빛이 정말 자신의 말을 시인하는 것처럼 보였다. 급기야 ‘헤어지겠다고 했던 건 진짜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고, 자신은 또 한 번 울고 말았다. 무너지는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면서, 여태껏 자신이 그에게 얼마나 의존하고 있었는지 서원은 절실히 깨달았다.

“…….”

남자는 서원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서원을 바라보기만 했다. 조금 냉정해진 시선이었다.

멀쩡하게 대화를 할 상태처럼 보이지 않기는 했다. 그 정도로 폭력적인 상황에 노출된 건 처음인 건지, 강서원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더군다나 회복력도 더딘 녀석이었다. 한꺼번에 집어삼킨, 그 방대한 양의 겁을 벌써 소화시키지는 못했을 터다. 그를 보여주듯 녀석의 눈빛은 겨우겨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

“……형…….”

녀석의 말이 맞다. 차라리, 하루 시간을 더 갖고 나서 조금 이성적인 상태로 대화를 나누는 게 나을 것이었다.

알기는 아는데.

그런데.

“……2층에 빈방 많아. 거기서 좀 잘래?”

아무 데도 보내기가 싫었다.

불현듯 서원은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넓은 거실에 있는데도, 1평도 되지 않는 방에 갇힌 것처럼 답답하다. 그의 시야 안에 갇혔다. 형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으나 결국은 같았다. 놀란 얼굴이 급기야 눈물을 뚝, 떨궜다. 열이 오른 것처럼 붉은 물감을 함빡 머금은 뺨 위로 투명한 길이 얇게 흘렀다.

“……무슨…….”

“올라가서 좀 자자. 너 내려오기 전까지 안 올라갈게.”

서원은 당황한 얼굴로 남자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눈물로 젖은 입술이 말을 잃은 채로 작게 달싹였다. 형이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무 나쁘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끝내 말간 얼굴이 서럽게 일그러졌다.

“……진짜, 왜 그래요…….”

“형 목에 팔 둘러 봐.”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가 울먹이며 책망했으나 연우는 말을 들어 주지 않을 것처럼 서원의 눈을 피했다. 일어나 파들거리는 허리를 가볍게 잡는다.

혼란스러워하는 눈동자가 연우를 올려다보다가, 다시금 툭 눈물을 흘렸다. 서원은 제 뺨을 비비듯 닦았다. 그리고 눈을 꾹 감은 채로 남자의 목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체념했다기보다는, 더 이상 대거리를 할 수가 없었다. 몸이 지쳤다.

서원의 다리가 연우의 허리에 감겼다. 쿵. 쿵. 쿵. 쿵. 붙은 몸을 가볍게 안아 든 연우가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서원은 딱딱한 어깨에 숨는 것처럼 눈을 폭 파묻고 있으면서도 쉭쉭, 가쁜 숨을 뱉어내기 바빴다. 화와 서러움을 이기지 못한 마른 등이 연신 들썩였다. 다시금 고였던 눈물이 기다란 눈꼬리를 타고 흘렀다. 기어이 남자는 한숨을 쉬면서 젖은 뺨에 쪽, 입을 맞췄다.

“그만 울어. 마음 아프게.”

“형이 자꾸 멋대로……, 멋대로 하잖아요……. 집에, 가고 싶다는 데도, 안 보내주고…….”

“……그러니까. 내가 왜 이럴까?”

싫다는데, 보내줘야 하는데, 왜 그게 안 될까.

연우는 방문을 열면서 자조적으로 읊조렸다. 분노는 녀석의 눈물에 의해 휩쓸리듯 사라졌으나 억지스러운 집착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아까 헤어지니 뭐니 말했던 사실은 변하지 않았으니 오늘은 아무래도 그냥 보내줄 수가 없었다. 무언가 확신이 설 때까지는 여기에 둬야 한다. 그는 제 행동을 용서해 달라는 듯이 아이의 뜨끈한 뺨에 두어 번 입을 맞췄다.

“왜 못 가게 해요. 왜 조금도 시간을, 시간을 안 줘요…….”

서원은 남자의 손길을 따라 침대에 등을 붙이면서도 원망의 말을 멈추지 않았다. 집에 가고 싶은데 못 가게 되는 상황보다는, 남자의 억지가 더 화가 났다. 어차피 헤어질 거라고 했으면서 집착하는 모습이 마냥 미웠다. 턱밑으로 덮인 이불이 답답하다 못해 숨을 조여 온다.

“에어컨 틀어 줄까?”

“…….”

하지만 쏟아지는 말들에도 남자는 태연한 얼굴을 일관했다. 그는 잠자코 서원의 뺨을 손가락으로 꼼꼼히 쓸면서 물기를 정리했다.

뺨이 뽀송해지자 침착한 기운의 검은 눈동자가 이동했다. 눈이 마주한다. 연우는 짐짓 다정한 기색을 품었다.

“충분히 자고 일어나. 좀 괜찮아질 거야. 일어나면 밥 먹자.”

“……저리, 가. 싫어…….”

사람을 가둬 놓고 친절한 척 뻔뻔하게 입을 맞추려고 드는 저 태도가 야속하다. 서원은 조곤조곤하게 말한 뒤 제 입술에 내려앉으려는 얼굴을 피하면서 딱딱한 어깨를 살짝 밀어냈다. 희미한 힘이었으나 남자는 그 거부의 몸짓에 쉬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는 멈춘 거리 그대로 잠시 서원을 내려다보다가 담백한 몸짓으로 일어섰다.

슥. 앞머리를 쓸어 넘겨 주는 손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거까지는 거부할 수가 없었다. 서원은 집요하게 닿아 오려는 거무죽죽한 시선을 피하면서 손길을 받아냈다.

“…….”

“…….”

연우는 고집스레 허공을 응시하는 그 말간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침묵하던 입이 떨어진 것은 한참 뒤였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원아.”

“…….”

“형이 이러는 거, 많이 싫어?”

작은 얼굴이 망설임 없이 얕게 까딱였다.

“이대로면…… 형도, 싫어질 것 같아?”

이번엔 조금 망설인다. 이윽고 눈을 슬쩍 내리깐다. 깊숙이 턱을 당겼다가 미는 동작은 느렸고, 못내 소심했다.

연우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강서원의 집에 갈 때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뜨겁게 끓었던 머릿속은 녀석의 눈물을 보자마자 폭발할 새도 없이 미지근하게 식어버렸다. 그리고 미적지근해졌으나, 아직도 억지를 놓지 못하고 있던 이 팽팽함은 제가 싫어질 것 같다는, 조금 감정에 휩쓸린 듯한 그 거짓말에 완벽하게 매듭을 풀었다.

이제야 조금씩 정신이 드는 듯하다. 그와 동시에 연우는 절실하게 깨달았다.

이 무력감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계속 그럴 것이었다.

절대, 나는 강서원을 이기지 못한다.

“……알았어.”

낮은 체념이 섞인 목소리가 한참 뒤에 내려앉았다. 고집을 부리는 듯 허공을 노려보던 눈이 둥그런 모양을 만들어냈다. 곧바로 남자를 바라본다.

연우는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물었다.

“시간, 언제까지 주면 돼?”

협상을 하는 것처럼 자못 이성적이었다. 서원은 놀란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다가 이내 침을 삼키고 말했다.

“내일, 저녁…….”

“시간으로.”

섬세한 요구에 서원은 당황했다.

“……8시.”

“7시는?”

“괜찮아요.”

“알았어. 7시에 집 앞으로 갈게.”

“…….”

“집에 있을 거라고 약속해.”

언젠가 그러했던 것처럼 두 사람은 새끼손가락을 엉켜 약속했다. 연우는 단단한 눈빛으로 서원을 바라보았다.

“약속했어. 안 지키면 내 마음대로 할 거야.”

당치도 않은 으름장이었으나, 그의 마음을 한 치 앞도 모르는 서원은 알겠다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얽혀 있던 손가락이 풀렸다. 연우는 핸드폰을 꺼내 들고 택시를 호출했다.

“택시 곧 올 거야. 그거 타고 가. ……내 차는 싫을 것 같아서.”

싫다기보다는, 아직은 좀 무서운 것이었으나 서원은 구태여 정정하지 않았다.

잠시 후 집 앞에 도착해 있다는 택시 기사의 문자가 왔다. 연우는 서원을 현관 앞까지 배웅했다. 몰랐는데 맨발로 끌고 왔던 모양이었다. 준호의 새 신발을 신겨 주니 사이즈가 얼추 맞았다.

서원이 말없이 현관문을 닫으려 할 때였다.

“서원아.”

가만히 서원이 하는 양을 바라보고만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서원은 문을 잡은 채로 고개를 돌렸다.

연우는 뺨 안을 혀로 굴렸다. 그동안 말 모양을 동그스름하게 다듬고는 말을 잇는다.

“내일 7시까지야. 더 이상은 못 물러. 또 시간 달라고 하면 너 진짜 내가…….”

실패다. 다음에 나올 말은 어떻게 조형해도 녀석을 놀라게 할 것이었다. 연우는 급히 입을 다물다가, 잠시 후 말을 이었다.

“……안 돼. 알았지?”

“……네.”

“서원아.”

“네?”

남자는 눈에 띄게 망설이더니, 곧이어 답지 않게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뽀뽀…….”

“…….”

“해줄 수 있어?”

서원의 태도를 보아 헤어지고자 집에 가기를 고집하는 게 아니라는 건 눈치챘다. 그는 단지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어쩐지 조금 전, 제 뽀뽀를 냉정하게 거부했던 얼굴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유치한 새끼.’ 연우는 스스로를 비난하면서도 기어이 그렇게 요구하고 말았다. 시준호 연애하는 거랑 다를 게 없는 촌스러움이다. 연우는 방금의 자신을 그렇게 평했다. 못내 창피해져서 손가락이 저릿했다.

서원은 잠시 혼란스러운 듯한 얼굴을 하더니, 잠자코 현관 끝에 선 연우의 앞으로 다가가 섰다. 머뭇거리며 연우의 팔을 두 손으로 살짝 쥔다. 까치발을 든 서원이 남자를 향해 턱을 치켜세웠다. 왜인지, 여전히 조금 당황스러운 듯한 얼굴이 연우와 가까워졌다. 곧이어 쪽,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으읏, 흡……!”

그리고 연우는 멀어지는 그 달콤한 것을 쫓아가 단번에 머금었다.

허리가 휘어 잡혔다. 떨어져 있던 서원의 몸이 순식간에 남자의 몸 앞으로 당겨졌다. 두 몸이 바싹 밀착했다. 감싸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음……, 잠깐, 응…….”

쭈웁, 쪽. 서원의 입술을 세게 빨아대던 연우는 기어이 도톰한 입술을 벌려내어 그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정말, 그냥 오늘따라 녀석에게 거부당한 게 많다 보니까 좀 공허해져서 확인차 뽀뽀 한 번 받으려고 한 것뿐이었다. 갑자기 이렇게 몰아붙일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입술이 닿자마자 돌연 허기가 졌고, 며칠 굶은 사람처럼 훼까닥 눈이 돌아갔다.

춥, 춥. 두 혀가 어지럽게 섞이는 소리가 입술 사이로 비어져 나왔다. 평소의 시간보다 긴 키스였다. 서원은 그만하라는 듯 남자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 숨이 모자라기도 했고, 집 앞에서 택시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 탓이었다.

“그만, 형, 저 가봐야…… 읏…….”

하지만 연우는 멈추지 않았다. 뒤로 바짝 물러선 뒤통수를 한 손으로 쥐고 제 쪽으로 밀었다. 서원은 명확한 힘에 휩쓸렸다.

다시 두 입술이 빈틈없이 맞붙었다. 젖은 살덩이는 붉은 점막 안을 다 맛볼 것처럼 여기저기를 들쑤셨다.

“하, 하아…… 하…….”

“…….”

그야말로 몸의 뒤섞임처럼 집요한 키스였다.

그의 입술을 받아내느라 주변도 둘러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입술이 떨어져 나갔을 때가 되어서야 서원은 숨을 몰아쉬면서 제가 서 있는 곳을 인지할 수 있었다. 자신은 어느새 벽과 그의 몸 사이에 껴서 꿈쩍을 못하고 있었다.

쪽. 마무리하듯 가볍게 뽀뽀한 연우가 가깝게 서원의 얼굴에 제 얼굴을 맞댔다. 날카로운 얼굴이 아쉽다는 듯 우울하게 변했다.

“33시간 치 키스로는 모자라네.”

“…….”

“내가 서원이를 너무 좋아하나 봐. 감당을 못하겠다.”

“……무슨…….”

나지막한 목소리가 좁은 틈을 메우며 고백하자, 서원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뽀뽀를 해달라고 했을 때부터 이어졌던 당혹스러운 기색이 더 확연하게 드러났다. 그사이 남자의 말이 이어졌다.

“……근데, 서원아.”

“…….”

“헤어지는 건 안 돼. 너 형이랑 못 헤어져. 너도 홧김에 말한 거겠지만 다신 그런 말 하지 마.”

“…….”

“알았지?”

“…….”

끈적거리는 덫처럼 은근하게 허리를 압박하던 팔의 힘이 조금씩 느슨해졌다. 이제 현관문을 열고 가야 하는데, 서원은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로 남자를 물끄러미 주시하고만 있었다.

“왜 그래?”

“……마음이…… 바뀌었어요?”

느닷없는 이야기였다. 연우는 조금 물러나 서원의 흩어진 머리를 꼼꼼하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정리해 주면서 “……무슨 마음?” 하고 물었다.

서원은 엷게 입술을 일그러뜨리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작게 읊조리는 목소리는 신음처럼 앓는 듯했다.

“나랑, 헤어지려던 거…….”

“뭐?”

“나랑 언젠간 헤어지려고 했잖아요, 형이…….”

“…….”

자신감 없이 바닥을 헤매던 시선이 올라 연우를 보았다.

“마음…… 바뀌었어요?”

흐릿한 목소리. 망설이는 갈색 눈 위로 슬며시 절절함이 스쳤다.

연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개소리냐는 말을 순화한 것이었다.

서원도 덩달아 인상을 찌푸렸다. 둘은 인상을 구긴 채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내가 아까부터 말했잖아요. 형, 형이 나랑……. 혹시 안 들었어요? 아까 차에서, 울면서…….”

“네가 아까 울면서 했던 말, 하나도 못 들었어.”

아니, 굳이 안 들어도 대충은 알겠다. 강서원이 뭔가 오해하고 있었음을, 저도 뭔가 오해하고 있었음을, 이 바보 같은 상황을 연우는 직감했다.

마침내 알쏭달쏭한 정적을 깬 것은 연우였다.

“……일단 택시 보내고 올게. 안에 들어가 있어.”

택시 기사의 화를 풀어 줄 현금 몇 장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면서 그는 급히 현관을 나섰다. 새 신발을 신은 발은 현관 가운데에 망연히 서 있었다.

조금 뒤, 다시 현관이 열리고 남자가 들어섰다. 남자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 아직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듯 얼떨떨하게 서 있는 서원의 신발을 벗겨 주었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아 집 안으로 끌어당겼다. 맨발은 남자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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