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Complex
금요일 낮의 백화점은 한산하고 시원했다.
박진석은 로봇 청소기처럼 매장을 빠짐없이 돌더니 결국은 모르겠다는 듯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시연우를 돌아보았다. 애매한 거리를 유지한 채 서 있던 연우는 제게로 닿는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피웠다.
“……연우야.”
“아무거나 사.”
그는 진석이 무슨 이야기를 꺼낼지 아는 눈치였다. 급기야 진석은 연우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간절한 모양새로 손가락을 하나 펴 보인다.
“하나만 골라 주라.”
“아무거나 사라고, 그냥.”
“너도 골라 주려고 온 거 아니야?”
연우는 대답 대신 들고 있던 쇼핑백을 들어 올렸다. 제 용건 보러 온 것뿐이라는 뜻이었다. ‘저건 대체 언제 샀대.’ 진석은 생각하면서도 손가락을 거두지 않고 “딱 하나만. 어?” 했다.
선물 하나 사는데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으면서도 웬만해서는 시연우의 도움을 받는 편이 낫겠다는 게 진석의 판단이었다. 생전 저에게 도움 하나 안 될 것 같은 시연우는, 이럴 때 상당히 유용했다. 녀석은 안목이 좋았다. 옷을 입거나, 선물을 하나 사는 데에도 센스가 있어서 여자친구와 교제할 때마다 퍽 사랑받는 애인 노릇을 톡톡히 해내곤 했다.
그리고 내일, 저는 사랑 받는 사위가 되어야 했다. 결혼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인 데다가 그 까탈스럽고 바라는 것 많으면서도 티는 안 내는, 아주 골치 아픈 장인어른의 생신이었다. 뒷말 듣지 않으려면 제대로 된 선물을 준비하는 게 최선이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당장 내일인 걸 어제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말해 준 여자친구 탓을 할 수는 없었다. 네가 부담 갖는 게 싫어서 그랬다는 그 착한 얼굴에 대고 뭐라고 말을 하겠는가.
“내가 왜? 너 내 부탁은 개무시했잖아.”
연우는 짝다리를 짚으며 다소 비꼬듯 말했다. 요즘 사귀고 있는 대학생 애인을 아르바이트로 써 달라 했던 걸 말하는 듯했다. 진석은 곧바로 대답했다.
“그래. 쓸게. 내일부터 카페 나오라 해.”
“늦었어. 오늘 아침에 양평에 내려 주고 왔어.”
그 말인즉슨 오늘 맥주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는 말이었다. 그런 것치고 놈의 표정은 꽤 멀쩡해 보였다. 진석은 어떻게든 꾀어내려던 걸 멈추고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욕구 불만 운운하며 잔뜩 불만족스러워하고 조급해하던 그때와는 확연히 다른 얼굴이다.
“아르바이트해도, 맥주 따라 주고 그런 건 안 한대.”
연우는 진석의 의문점을 구태여 듣지 않아도 안다는 듯 말했다. ‘그럼 맥주통 나를 텐데. 그런 건 또 괜찮은 건가?’ 진석이 당최 이해할 수 없는 놈의 사고회로를 되짚고 있을 때였다. 연우가 브랜드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매장 안에 들어간 연우는 무심한 눈으로 물건을 훑었다. 뒤따라온 진석이 연우에게 붙어 음흉하게 웃었다. 툭툭.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친다.
“새끼……. 너 걔는 진짜 좋은가 보다?”
“왜 이래, 징그럽게.”
연우는 안경다리 끝에 브랜드의 시그니쳐 색으로 포인트가 들어간 선글라스를 들어 휙휙 이곳저곳을 살펴보면서 피식 웃었다. 불퉁했지만 놀리는 게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어떡하냐? 준호가 제 과외 선생이랑 형이랑 정분난 거 알면 난리가 날 텐데.”
“뭐래. 그런 가정을 왜 해. 그럴 일도 없을 텐데.”
웃는 목소리는 여전했지만 어쩐지 듣는 데 조금 걸리적거리는 구석이 있었다. ‘그럴 일은 없다’라고 말하는 놈의 확실하고 깔끔한 어조가 그랬다. 진석이 의아한 얼굴로 연우를 돌아보았다. 동시에 연우가 그에게 선글라스를 내밀었다.
“이거 선물해드려.”
“…어? 어, 그래. 고맙다.”
“연수 누나 아버지 낚시 좋아하셔. 이걸로 모자라면 낚시용품 사 드리든가. 근데 쓰던 것만 쓰셔서 그런 건 안 반기실 거야. 네가 잘 차려입고 가는 게 중요해. 그 새파란 정장, 그거 입지 마.”
자연스러운 화제 전환이었다. 진석은 고개를 주억이다가, 곧이어 눈을 가늘게 뜨고 연우를 바라보았다. 심상치 않은 시선에 오른쪽 눈썹이 슬쩍 올라간다.
“……왜 그렇게 봐?”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놈의 말이 딱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애당초 미래를 생각할 단계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상대방은 동성이었다. 사랑에 미친 등장인물이 나오는 드라마 속의 이야기가 아닌 이상 누구나 언젠가 끝날 것이라고 생각할 관계다. 갑자기 시연우가 느닷없이 그 대학생과 결혼을 하고야 말 거라면서 결연한 의지를 불태운다면 더 이상할 것이었다. 그건 저도 말릴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 말은 틀리기는커녕 합리적인 쪽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걸 다 알고 있다고 해도, 그걸 말하는 당사자의 태도가 심하게 깔끔했다. 어찌 되었든 지금 사랑하고 있는 사람과의 끝을 말하면서도 태연하다. 예의는 개나 준 초딩식 실용주의 그 자체였다.
그게 영 시연우답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래도…….
“…….”
“왜 그러는데.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제 얼굴을 손바닥으로 더듬는 연우를 빤히 바라보면서, 진석은 입만 열어 말했다.
“……그래도, 철이 이렇게 없을 수가 있냐?”
“뭐?”
“으이구! 이 녀석아.”
기어이 빳빳이 펴진 손바닥이 널따란 등짝을 내리쳤다.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정말로, 시연우는 철이 없었다. 박진석은 괜히, 조금은 주책맞게 속상해져서 그의 등짝을 두어 번 더 내리쳤다. 그런 제 친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우는 그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진석의 손을 막아내기만 했다.
“아! 왜 이래, 미쳤어?”
흔들리는 건 그의 손목에 걸린 크림색 쇼핑백뿐이었다.
* * *
맥주 아르바이트는 서원이 스무 살 이후, 여름마다 꾸준히 했던 일이었다. 대형 페스티벌은 대부분 초여름부터 늦여름에 몰려 있는데, 그 시기가 여름방학과 겹쳐서 시간 조정이 자유로웠다. 하고 싶은 페스티벌은 참여하겠다고 의사를 밝히고, 하고 싶지 않다면 하지 않으면 된다. 게다가 스트레스 받는 손님 응대도 필요 없었다. 먹을 것도 잘 줬다. 2, 3일간 숙소에서 지내면서 일하면 30만 원은 거뜬히 받을 수 있으니 금액도 나쁘지 않았다.
이점이 많은 아르바이트였다. 다만 한 가지 단점은 육체적인 피로가 심했다. 그 증거로 서원과 같은 부스에 배정받은 20살 남자애는 맥주통을 다 나르자마자 앓는 소리를 냈다. 허리 디스크가 다시 터진 것 같다며 난리였다.
“야, 택배 상하차 알바 해 봤냐.”
캡모자를 쓴 남자애가 맥주통에 몸을 살짝 걸치며 스무 살 남자애에게 장난조로 말을 걸었다. 서원은 마지막 맥주통을 자리에 굴리며 흘긋 그들을 번갈아 보았다. 둘은 금세 말을 튼 눈치였다.
“안 해 봤죠. 왜요? 해 보셨어요?”
“어, 야. 죽어, 죽어. 이건 그냥 소꿉장난이야.”
“헐. 미쳤다.”
서원은 잠자코 멀리 떨어진 맥주통으로 가 앉았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손등으로 닦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연우 형’님이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연우 형’님이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메시지 내용은 아직 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연우 형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저절로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다. 서원은 뻐근한 다리를 쭉 펴면서 메시지를 확인했다.
[연우 형] 오늘 양평 최고온도 34도래
[연우 형] 안 더워? 못하겠으면 때려치우고 나와 알았지?
이름만으로도 달콤한데 내용까지 달다. 서원은 소리 없이 웃었다.
아침에도 그렇게 걱정을 했다. 양평까지 데려다주겠다며 아침부터 집으로 찾아온 그는, 양평 근처까지 다 와서야 네가 걱정된다며 운을 띄웠다. 서원은 그 따뜻한 목소리를 상기하며 액정을 문질렀다.
‘워낙 그런 데는 술 많이 마시고 행패 부리는 사람들이 하나씩은 꼭 있잖아. 어느 정신 나간 놈이 서원이한테 해코지할까 봐… 걱정돼.’
그래서 형이 처음에 그렇게 탐탁지 않아 했던 걸까. 아침의 서원은 그렇게 짐작하면서 두 손을 적극적으로 내저었다.
‘아니에요. 저 여태껏 그런 적 한 번도 없었어요. 괜찮아요.’
‘모르는 일이잖아.’
‘저는 뒤에서 일만 해서 손님들이랑 말 섞지도 않아요.’
‘……어떤 일? 힘든 거 해?’
그는 맥주 아르바이트는커녕 아르바이트 경험도 없을 터이니 뭘 하는지 정확히 모르는 눈치였다. 중노동을 한다고 하면 고민도 없이 핸들을 꺾을 것이 분명했다. 서원은 공연히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려 딴청을 피웠다.
‘그냥, 청소요. 맥주컵 꺼내고…….’
‘덥겠다.’
그는 의외로 쉽게 서원의 말을 믿었다. 허나 그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투였다. 서원은 사실대로 말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 손님 없어서 선풍기 쐬고 있어요 ㅎㅎ
준호는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미국으로 여행을 간다고 했다. 3주간이면 거의 한 달 분 과외비가 날아가는 셈이었다. 그는 미리 말하지 못한 제 잘못이니 월급을 똑같이 주겠다고 했지만, 제가 거절했다. 혹시 그냥 입금해버릴까 봐 ‘진짜. 진짜 주지 마세요. 그런 건… 정말 싫어요.’ 하고 짐짓 강하게 말하기까지 했다. 그는 좀 마음에 안 드는 듯한 얼굴을 하다가 이내 알겠다고 했다.
그에게는 별것 아닐 수도 있는 일이지만, 제게는 중요했다. 자신이 그에 비해 경제적으로 한참 뒤처진 것은 숨길 것도 없는 사실이었다. 이미 데이트 비용은 거의 그가 내고 있었고, 더욱이 그가 자신이 부담스러워하지 않을 수준에 맞춰 음식점을 고르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불편하고 미안한데 다른 것까지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제가 감당할 수 있는 건 몰래 감당하고 싶었다. 제 한 달 생활비 정도는 저 혼자 메꾸고 싶었다. 아무리 그에게는 보잘것없는 모래성이라 할지라도. 그래도, 지켜야 할 건 지켜야 한다.
“안녕하세요.”
메시지 옆에 읽음 표시가 올라옴과 동시에 서원의 정수리 위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원은 핸드폰을 청바지에 넣으면서 고개를 들었다. 캡모자를 쓴 남자애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뒤이어 부스를 배정받은 여자애 세 명이 있었고, 스무 살 남자애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맥주 알바 처음이세요?”
남자애는 그렇게 물으면서 서원의 옆에 앉았다. 소극적인 서원의 태도가 그리 보였던 모양이었다. 서원은 “아, 아니요.” 했다. 짤막한 대답에 당황한 듯 캡모자를 쓴 남자애는 제 관자놀이를 긁적거렸다.
“그러시구나. 전 작년부터 했어요.”
“아… 네.”
작년에 본 기억이 없으나 어찌 보면 당연했다. 맥주 아르바이트는 서로 스케줄을 조정하지 않는 이상 매번 멤버가 바뀌기도 했고 설사 또 만난다 하여도 자신은 그 누구와 친분을 이어 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매번 묵묵히 일만 하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몇 살이세요? 3일 동안 같이하는 건데 친하게 지내요, 이왕이면.”
“아, 저, 스물넷이요.”
“오. 저돈데. 반말해도 돼요?”
남자애는 친화력이 좋아 보였다. 맥주 아르바이트를 하는 애들은 거의 다 그랬다. 페스티벌을 좋아하는 활발한 대학생들이 대부분인 까닭이었다. “네.” 서원이 대답하자마자 남자애가 말꼬리를 잇듯 물어왔다.
“이름이 뭐야?”
“강서원.”
“난 이민규. 쟤는 20살이래. 황철운.”
여자애들과 대화를 하면서도 이곳을 힐끗힐끗 보던 철운이 기다렸다는 듯 활짝 웃으며 “안녕하세요!” 했다. 서원은 어색하게 맞인사를 했다.
잠시 정적이 둘 사이를 맴돌았다. 그동안 시간을 확인하다가, 주류 회사 직원들이 나누어 준 음료수를 만지작거리기를 반복하던 민규가 다시 한번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너, 되게 말 없는 스타일이구나.”
“아…… 응.”
그때 손에 꼭 쥐고 있던 핸드폰이 부르르 떨었다. 서원은 곧바로 방황하던 눈동자를 내려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형이었다.
[연우 형] 걱정돼 죽겠어
그 여섯 글자만으로도 손가락이 저릿저릿했다. 비단 형을 좋아하는 제 탓만은 아니었다.
형은 사귀게 된 이후로 어떻게 더 바랄 수도 없을 정도로 제게 다정했다. 얼마나 말 하나, 행동 하나가 달콤한지 늪같이 진득한 꿀에 서서히 빠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연애란 다 이런 걸까, 하는 생각을 날마다 하고 있던 참이었다. 절여져 눅눅해진 뇌는 답을 내놓지 못했으나 하여간 형과의 연애는 그러했다.
“너 여친 있구나.”
행복감에 살랑살랑 웃는 옆얼굴을 말없이 바라보던 민규가 말했다. 서원이 놀라 제 옆에 앉은 민규를 바라보았다.
“어?”
“따악, 연애 초기네.”
“……그게 티가 나?”
단지 문자를 주고받는 모습만 보았을 뿐인데, 그런 것까지 알아낸 게 신기했다. 서원이 크게 뜬 눈 그대로 물어보자 민규가 웃으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여친도 같이 알바 해? 내 여친은 여기 있어. 알바 같이 지원했거든. 근데 부스는 떨어짐. 대리님이 커플들이 붙어 있으면 일 안 하고 연애질이나 한다고 일부러 떨어뜨렸대. 서브 스테이지 쪽에 있다는데 이따 시간 되면 한번 볼래?”
“아…… 그래.”
“네 여친은?”
“나는 혼자 왔어. 내가 사귀는 사람은 연상이야.”
“헉. 진짜? 몇 살? 몇 살 연상이야?”
서원은 잠시 손가락을 굽혀가며 셈하다가 말했다.
“……7살.”
“와, 진짜야?”
민규는 길게 쭉 찢어진 눈을 나름대로 크게 치뜨며 서원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서원은 얼굴을 뒤로 무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와우. 대애박. 얌전한 고양이 뭐시기 생각난다.”
민규는 껄껄 웃으면서도 신기하다는 눈으로 서원을 물끄러미, 관찰하듯 바라보았다. 서원은 핸드폰을 내려다보면서 구름 사이의 햇빛처럼 희미하고 보드랍게 미소를 지었다.
* * *
몸이 물미역처럼 늘어지고 축축했다. 숙소는 페스티벌이 열렸던 체육공원 옆 민박집이었다. 그 좁고 허름한 곳에 남자애들 열 명과 함께 쑤셔박힐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 오는 것 같았다. 메인 스테이지 쪽에 부스가 있던 탓인지 종일 EDM 음악을 강제적으로 주입 당한 귀도 먹먹했다.
서원은 졸린 눈을 꿈뻑거리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시간은 11시 12분이었고, 문자 알림창은 조용했다. 형은 10시 20분부터 답장이 없었다. ‘바쁜가. 벌써 자나.’ 서원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면서도 전화는 걸지 못했다. 만약 잔다면, 휴식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서원, 나 지금 알바들이랑 술 마시러 갈 건데 갈래? 아, 혹시 여친이 그런 거 싫어해? 여자애들도 좀 있긴 해. 나도 모르는 여자애들도 좀 있고.”
옆에서 걸음을 맞추면서 핸드폰을 하던 민규가 문득 말을 걸어 왔다. 서원은 번뜩 고개를 올려 그를 보았다.
“난 괜찮아. 그리고 좀 피곤해서.”
“오케이, 오케이.”
그냥 말이나 해본 건지 민규는 미련 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핸드폰을 정신없이 두드렸다. “새벽에 보자. 아니면 내일.” 하며 다른 쪽으로 걸어간다. 얼마나 핸드폰을 많이 하는 건지 타이핑 속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홀로 남겨진 서원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본 공연은 끝이 났지만 아직 흥이 덜 풀린 무리들은 공원 주변에 모여서 꼬장을 피우거나 웃거나 수작을 부리고 있었다. 젊은이들만 없었으면 평화로웠을 양평의 공원 주변은 술 냄새와 취기로 가득했다. 간격이 넓은 가로등은 거리를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고, 자신은 그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경직된 존재였다.
‘집에 가고 싶다.’
서원은 지나가는 가로등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낯선 것들에 둘러싸이는 시간이 오래되면 별안간 검은 우울감이 밀려들 때가 있었다. 지금이 딱 그런 순간이었다. 제가 사는 곳과 양평은 차로 한 시간이면 충분한 거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의 끝과 끝에 서 있는 것처럼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숨 막히는 이질감이었다. 음악. 춤. 시끄러운 것들. 낯선 사람들. 혈기. 젊음. 술. 흥분……. 모두 저와 어울리지 않았다.
제게 익숙한 건, 정적이었다. 정적과 아늑함. 다정함. 가족. 침대. 온기. 고요. 느리게 걸어가는 것. 또, 그리고…….
“…….”
“……어?”
신기한 일이었다.
불현듯 들린 목소리에 서원이 턱을 내려 정면을 바라보았을 때였다. 마지막으로 떠올리려던, 아니, 사실 처음부터 떠올리고 있던 사람이, 제 눈앞에 있었다. 서원은 걸음을 우뚝 멈췄다. 얼떨떨한 표정 그대로 눈만 깜빡거렸다.
형이, 검은 세단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서 있었다.
“타이밍 딱 맞췄다. 그치?”
그는 서원과 눈을 마주하자마자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 신기루를 보는 것처럼 멍한 얼굴 위로 서서히 감정이 퍼진다. ‘진짜 형이다.’ 그를 깨닫자 서원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대로 달려가 냉큼, 목에 매달렸다.
“……어떻게 왔어요?”
한동안 가만히 연우에게 매달려 안겨 있던 서원이 물었다. 웅얼거리는 목소리는 조금 눅눅했다. 연우는 서원의 뒷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차 타고 왔지.”
“숙소… 어떻게 알았어요?”
“아까 너 내려 주고 직원들로 보이는 사람들 찾아서 물어봤어.”
다정한 사람. 섬세한 배려. 다, 너무 좋았다. 나만 이렇게 좋아도 되는 걸까. 서원은 생각하면서 그를 안은 팔에 더 강하게 힘을 주었다. 이제는 익숙한 남자의 향기가 느껴졌다. 까마득했던 저 끝의 우주가 다가와 금세 저를 뜨끈한 공기로 에워쌌다. 내내 긴장하고 있던 마음이 흐물흐물 그 밑으로 느리게 녹아내린다.
“서원아.”
“……응.”
“형 와서 좋아?”
연우는 서원의 허리를 감싸며 물었다.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는 움직임이 뺨으로 느껴지자 느긋하게 웃는다.
“얼마나?”
“……많이 좋아요.”
“이런 데서 애를 재우려고 하다니. 진짜 정신 나간 놈들이네. 우리 애기는 예민해서 이런 데서 못 자는데.”
매번 맥주 아르바이트를 할 때마다 이런 민박집, 혹은 더 열악한 곳에서도 잠을 잤지만 별달리 이상은 없었다. 그렇지만 그의 말에 반박하고 싶지는 않아 서원은 잠자코 숨을 색색 내쉬며 그의 향기를 맡는 데에 열중했다.
서원의 침묵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쪽, 연우는 고개를 살짝 돌려 붉게 달아오른 뺨에 키스했다. 그리고 귓가에 속삭였다.
“깨끗하고 넓은 데 가서 자자. 예약해 놨어.”
그 말. 그 제안. 그 공기. 그 상황. 그 밤. 그 다정함. 그 모든 게 충분했다. 서원의 모래성을 조금씩 무너뜨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혹은 차고 넘치게 달고 안온했다. 설탕을 버무린 형형색색의 젤리를 한 움큼 손에 쥔 서원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 * *
“……졸려?”
“조금요…….”
라벤더 향이 호텔 욕실 안을 뭉게뭉게 메웠다. 연보라색과 파란색이 섞인 거품이 분홍색 물 위에 둥둥 떠 있었다. 물의 온도가 따뜻해서인지, 은은한 조명 탓인지, 아니면 기대고 있는 품이 편안해서인지 서원은 정신을 못 차리고 졸았다.
고작 며칠 전만 해도 같이 목욕하자는 말에 펄쩍 뛰어 놓고, 이제는 결국 못 이긴 척 넘어온다. ‘귀여워.’ 연우는 소리 없이 웃으면서 연두부처럼 뽀얗고 촉촉한 뺨에 입을 맞췄다.
“나가서 잘래?”
담백한 목소리로 물었으나 사실은 진짜 이대로 잘까 싶어서, 아쉬운 마음에 내뱉어 본 소리였다. 진짜 씻기고 재우기만 하려고 손수 입욕제를 고르고 사 온 건 아니었다. 몸을 노곤하게 풀어 놓고 욕조에서 섹스나 실컷 해 볼 요량이었는데 이렇게 흐느적거리면서 잠에 빠질 줄은 몰랐다.
“……네, 나가요.”
잠시 아무 말이 없던 서원이 흐릿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은 그렇게 해 놓고 몸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일이 많이 힘든가?’ 연우는 어리둥절하게 생각했으나 좀체 가늠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아르바이트는커녕 대학에서 잡일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서원이 힘들지 않다고 했으니 곧이곧대로 믿을 뿐이었다.
안겨 있던 몸이 안식처를 찾는 것처럼 더 깊이 파고들어 왔다. 축 늘어진 몸이 품 안에 꼭 맞게 기대오는 게 느껴졌다.
“…….”
젖은 머리가 어깨에 부비적거렸다. 또 이렇게 어리광을 피우는 걸 보면, 모르는 척 제 욕심이나 채우기가 참 뭐해진다. 잠에 빠진 서원의 머리를 미련스레 만지작거리던 연우는 한참 뒤에야 남아 있던 일말의 아쉬움을 접었다. 그가 서원을 깨운 건 물이 식기 시작할 때였다.
겨우겨우 몸을 헹구고 욕실에서 나온 서원은 목욕 가운을 입은 채로 파우더 룸에 섰다. 성의 없는 손짓으로 드라이기를 쥐었을 때, 곧 그를 뒤따라 나온 연우가 부드럽게 드라이기를 빼앗아 갔다. “앉아. 말려 줄게.” 하는 다정한 목소리가 귓전에 들렸다.
서원은 잠자코 스툴에 앉으며 잠에 눌린 눈을 꿈뻑거렸다. 무심코 거울을 올려다보자 그 안에는 두 남자가 있었다. 나란히, 같은 가운을 입고 있는 두 남자가.
“…….”
‘진짜, 커플 같아.’
문득 그런 생각이 튀어나와, 졸린 와중에도 벼락처럼 심장을 세게 내리쳤다. 불현듯 귀가 뜨겁게 불탔다. 분명 귓바퀴가 새빨갛게 물들었을 터였다. 서원은 그가 눈치채지 않기를 빌면서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드라이기 소리가 났다. 뒷머리를 가볍게 흩뜨리는 커다란 손바닥의 감촉이 느껴졌다. 시야를 차단해도 두근거리는 감각은 도무지 나아지지 않았다.
머리가 다 말라 갈 때쯤, 서원은 다시 졸기 시작했다. 그의 목덜미를 바라보며 머리를 말려 주던 연우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드라이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스툴을 제 쪽으로 돌렸다. 서원은 잠깐 움찔하며 눈을 뜨더니, 제 앞에 선 연우를 확인하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연우는 스킨을 손에 털었다. 그리고 꾸벅꾸벅 흔들리는 얼굴을 가볍게 쥐어 올렸다. 묽은 액체가 뽀송한 얼굴 위에 꼼꼼히 발렸다. 눈 밑을 엄지로 쓸어 주니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감상하듯 그 말간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로션을 코와 양 뺨에 생크림처럼 찍어 올렸다. 이어 펴 바르려던 손가락이 멈췄다.
그는 화장대 위에 올려 두었던 제 핸드폰을 꺼내어 흰 로션이 올라간 서원의 얼굴을 액정 안에 담았다. 생크림이 터진 베이비 슈 같다고 생각했다.
찰칵거리는 소리가 나자 서원이 눈을 떴다.
“귀여워서.”
연우는 서원과 눈이 마주치자 웃는 얼굴을 했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서원의 이마에 쪽, 입을 맞추었다.
그 웃음 때문인지, 귀엽다는 말 때문인지, 혹은 사진을 찍는 행위가 지극히 연인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서원은 결국 두근거림을 견디지 못하고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연우는 자연스레 그의 몸을 화장대 위에 올렸다. 대롱거리는 다리 사이에 남자의 몸이 바짝 다가섰다.
“으음……. 응…….”
깊은 키스가 오갔다. 남자는 정말 생크림을 한 줌에 쥐어 핥는 것처럼 서원의 입 안을 탐했다.
한참 뒤에 얼굴이 떨어졌다. 가까이서 마주 본 남자의 얼굴에는 저에게 묻어 있었을 흰 로션이 우스꽝스럽게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어쩌다 턱까지 옮겨 갔는지 모르겠다. 서원은 그의 얼굴을 붙잡은 채로 웃음을 터뜨렸다. 분홍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연보라색 거품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코끝에 라벤더 향이 감돌았다.
* * *
“내일 아침에는 룸서비스 시키지 말아야겠다.”
그 말에 서원이 번뜩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오늘 밤에도…… 오실 거예요?”
“응. 음식 좀 별로였지?”
당연하다는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 간다. 가죽 시계를 찬 손이 매끄럽게 핸들을 움직였다. 서원은 그 모습을 황망히 바라보면서 고민했다. 올 필요 없다고 말을 해야 할까. 사실 제 마음이 편하려면 그게 맞았는데,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요즘 들어 형이 제가 무엇을 거부할 때마다 섭섭하다며 조금씩 표현하기 시작한 까닭이었다.
애교스러웠고 장난스러운 태도였지만 진심이 아예 섞여 있지 않은 건 아니었다. 오늘 아침 룸서비스를 시켰을 때도 그랬다. 괜찮다는 제 말에 형은 ‘난 이런 것도 못 사 주는 거야?’ 하며 훌쩍거리는 시늉을 했고, 결국 진 것은 자신이었다.
“…….”
“……왜? 오지 말까? 애들이랑 놀고 싶어?”
서원의 그 망설임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문득 남자가 물어 왔다. 네가 원하면 그렇게 하겠다는 가벼운 목소리였다.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서원은 제 어깨를 주무르면서 말을 더듬거렸다.
“……아니요. 그냥 전, 형이 불편할까 봐…….”
“안 불편해. 뽀뽀.”
제 고민을 갈무리하는 목소리는 가차 없었다. 남자는 정지 신호에 차가 정차하자마자 서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서원은 생각이 많은 얼굴을 하면서도 그의 입술에 뽀뽀했다.
잠시 후 차가 체육공원 앞에 멈춰 섰다. 연우는 차에서 내려 서원을 배웅했다. 페스티벌 스태프들과 각종 아르바이트생들이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 출근하고 있었다. 한산한 도로에 떡하니 선 검은 차는 존재감이 강했다.
“무리하지 말고.”
“네.”
“아, 선물도 사 왔는데 잊고 있었다. 집에 뒀다가 다음 주에 과외 끝나고 줄게.”
연우는 그렇게 말하면서 흘긋 뒷좌석을 바라보았다. 서원의 시선도 덩달아 그의 어깨 너머를 향했다. 짙게 선팅된 창문 너머로 쇼핑백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보였다.
“…….”
싫은 게 아니었다. 다만 궁금했다. 언제, 그렇게 다 준비하는 걸까. 사소한 이벤트들, 선물들, 가까스로 지키고 있는 제 안의 모래성을 자꾸 건드리는 다정함들이 다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서원은 문득 궁금해졌다.
호텔도 그랬고, 입욕제도 그랬다. 어젯밤 적절한 타이밍에 찾아왔던 것도 그러했다. 또, 이 멋있는 웃음과 여유로운 말투도, 어른스러움도, 깔끔한 옷차림과 자연스럽게 넘긴 검은 머리도, 나긋함도, 지금 쏟아지고 있는 어리고 떠들썩한 시선들에 신경조차 쓰지 않는 저 의연함도, 형과 어울리는 검은 차, 그리고, 지금 형의 얼굴 위로 쏟아지는 오전의 햇살조차도.
돈과 외모 때문만이 아니었다. 막말로 형과 허름한 민박집에서 자도 호텔처럼 안온할 것이었다. 저를 정신 못 차리게 만드는 그의 여유로움과 다정함은 꾸며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저, 형은 원래부터 근사한 사람이었다. 혼자 서 있어도,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아도 스스로 멋있는 사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불쑥 가지런한 손이 다가왔다. 연우는 멍하니 저를 올려다보는 서원의 코끝을 약하게 꼬집었다. 서원의 눈에 다시 초점이 생겼다. 정신을 차린 서원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하려는 순간이었다.
“서원!”
누군가의 목소리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서원은 고개를 돌려 저를 부른 쪽을 바라보았다. 캡모자를 쓴 민규가 저와 똑같은 티셔츠를 입고 다가오고 있었다. 맥주 브랜드 로고가 새겨진 흰색 티셔츠였다.
“안녕하세요!”
누구인지 모를 텐데도, 민규는 넉살 좋은 성격답게 연우에게 깍듯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곧장 서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빨리 가자. 5분 전이야.”
“어, 벌써요?”
민규는 서원을 당장 끌고 갈 것처럼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서원은 연우를 올려다보았다.
“형, 저 가볼게요.”
“응. 가 봐. 연락할게.”
남자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민규는 서원의 어깨에 얹은 팔에 힘을 주며 “얼른 가자.” 했다. 서원은 민규에게 끌려가다시피 걸어갔다. 걸음걸이가 유난히 빨랐다.
“5분 남았으면 천천히 가도 되는데….”
“안 돼. 빨리 가야 돼. 아침 새솥 도시락인데 제육 반 참치마요 반이래. 선착순이야. 얼른 가서 제육 챙겨야지.”
“아… 너 여자친구는?”
“여자애들은 11시까지 출근이잖아.”
“맞다.”
“근데 저 형은 누구셔?”
서원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친한 형.”
“간지 쩐다. 양평 사셔?”
“응.”
어차피 이번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연락할 사이도 아니니 이 정도 가벼운 거짓말은 괜찮았다. 서원의 대답에 민규는 양평 간지, 양평 스웩이라는 등 실없는 소리들을 내뱉기 시작했다. 어제 하루 종일 시달린 탓에 민규의 영양가 없는 말들은 어느 정도 면역력이 생긴 참이었다. 본인도 생각 없이 내뱉는 말들일 것이다.
서원은 그 말들을 듣는 둥 마는 둥 흘려보내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의 머릿속에는 얼른 다시, 밤이 되어서 형을 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 * *
준호는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영 더워서 죽을 맛이었다. 에어컨을 아무리 세게 틀어도 마찬가지였다. 더위를 많이 타는, 저주받은 체질을 탓하고 있는 사이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온 것은 당연히 과외 선생이었다. 들어온 선생은 방이 추운 것인지 곧바로 어깨를 움츠리며 팔을 감쌌다.
“쌤 추워요?”
준호는 제 팔을 문지르며 의자에 앉는 서원을 이상하다는 얼굴로 보면서도 그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리모컨을 조작했다. 곧이어 에어컨이 꺼졌다. 탁. 리모컨을 책상 위에 내려놓은 준호가 다시 뺨을 책상 위에 붙이고 엎드렸다. 아, 더워 죽겠다.
“일어나. 수업해야지.”
제 과외 선생은 다 좋은데 쓸데없이 열정이 넘쳤다. 열정이 넘치는 것인지 아니면 끈질긴 건지 모르겠다. 준호는 손만 겨우 들어 설레설레 내저으며 “아, 기운 없어요.” 했다. 짐짓 옹알옹알 힘없는 목소리로 말하자 “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잘 걸려들었다. 조금이라도 농땡이 피울 기회다.
“덥잖아요. 여름 진짜 존나 싫어. 좆같지 않아요, 진심?”
말하다 보니 갑자기 진심으로 짜증이 솟구쳐서 준호는 어깨를 푸드덕거리며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서원은 그런가, 하며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준호는 그런 서원이 익숙한지 아랑곳하지 않고 투덜거림을 이어 갔다.
“여름방학이 이래서 싫어. 아니, 학교 안 가는 건 좋은데. 아무튼 여름 싫어.”
“그래도 곧 있으면 미국 가잖아. 신나지 않아?”
“아! 개소리하지 말아요. 가고 싶어서 가는 거 아니거든요? 놀러 가는 거면 몰라. 영어 때문에 갔다 오는 거잖아요. 다들 한국어 할 수 있으면서 괜히 영어 써서 난 말도 안 통하고, 비행기도 답답하고, 이모랑 사촌 동생들도 싫다고요.”
“네가 먼저 가겠다고 했다던데?”
“안 그러면 이모네도 아니고 아예 모르는 데 보내니까.”
“그럼 아무 데도 안 간다고 하지 그랬어.”
“쌤 바보예요? 그게 됐음 그렇게 했죠.”
준호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도 체념조로 말했다.
확실히 있는 집 자식 티가 이런 데서 났다. 온전히 그것 때문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겠지만, 서원은 준호의 덜 자란 듯한 성격도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준호는 자유로워 보였으나 실상은 전혀 자유롭지 못했다. 아마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녀석은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고, 정해진 시간에 일어났다. 주말에 조부네 내려가라 하면 내려가야 했고, 과외도 하라면 결국 해야 했고, 미국도 가라면 가야 하는 모양이었다. 거친 말씨와 다르게 정돈된 손톱이나 머리칼도 그의 구속된 생활을 증명했다. 녀석은 철저히 관리받는 존재처럼 보였다.
‘형도 그렇게 자랐을까.’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가죽 시계를 매만지면서 생각하던 중이었다. 하우스 키퍼가 챙겨 준 과일 간식을 우적우적 먹던 준호가 볼록해진 뺨 그대로 말했다.
“연우 형이요? 형도 그렇게 자랐죠, 당연히.”
서원은 놀라서 번쩍 고개를 올려 준호를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게 생각을 밖으로 내뱉은 모양이었다. 준호는 제 과외 선생과 형이 친해진 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표정을 하고 있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그럼 연우 형도…… 너처럼 할아버지 무서워해?”
다행히 아무런 의심 없이 넘어갔으니 이쯤에서 그만하면 될 텐데, 형 한정으로 솟구치는 호기심은 당최 사그라들지가 않았다. 서원은 준호가 무언갈 눈치채지 않을까 조마조마하면서도 그렇게 물었다. 준호는 사과 조각을 하나 더 입에 쏘옥 넣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건 아닌데, 좀 뭐랄까……. 발끈한다고 할까? 그런 건 좀 있어요.”
발끈한다고? 그게 무슨 뜻일까. 궁금했지만 정말 더 이상은 물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준호가 왜 그렇게 궁금해하냐고 수상하게 여길 것 같았다. 서원은 애써 태연한 척 “그래?” 하고 건조하게 되물었다. 그리고 책을 폈다. 그때였다.
“되게 웃겨요. 아니 우리 할아부지가 진짜 사람 잘 갖고 논다니까. 연우 형이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거든요? 근데 할아버지한테는 엄청 감정적이라니까요? 완전 바보 같아.”
생각해 보니 새삼 웃겼는지, 아니면 공부 시간을 미뤄 보려는 전략인지 준호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말을 더했다. 휘릭. 서원이 펜을 한 바퀴 돌렸다. 우물쭈물 입을 달싹이다가 조심스레 묻는다.
“어떻게… 바보 같은데?”
“그니까 결국, 할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해요. 할아버지가 도발하면 다 넘어가. 형이 한국 와서 나랑 살게 된 것도 할아버지가 너 같은 놈은 절대 장남 노릇 못 할 거라고, 평생 미국에서 연구나 하면서 썩으라고 도발해서 그런 거예요.”
“연구?”
“네. 몰랐어요? 형 원래 물리학과인가? 그거예요. 미국에서 대학 나오고 뭔 연구소 다녔는데 재작년에…….”
재작년에?
더 듣고 싶었는데, 별안간 말을 흐리던 준호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망설인다기보다는 갑작스러운 감정변화였다. 놈은 갑자기 침착해진 얼굴로 “…뭐, 아무튼 그래서, 한국 왔어요.” 했다. 그 모습이 놈답지 않게 못내 우울해 보여서, 서원은 잠시 당황했다. 더 물어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서원은 다시 한번 입을 달싹거리다가 “그렇구나.” 하고 말았다. 펄럭. 한참 닫혀 있던 책장이 그제야 넘어갔다.
* * *
시연우는 과외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귀가했다. 그는 잠시 후 서원에게 선물할, 여러 가지 색의 티셔츠들이 든 쇼핑백이 뒷좌석에 그대로 있는지 확인한 뒤 집으로 들어섰다.
아직 과외는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거실이 한산했다. 잠시 집을 둘러본 연우는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가죽 시계를 확인하다가, 공연히 머리를 쓸어올리기를 반복하며 몇 분의 시간을 죽이던 그는 비로소 위층에서 들리는 방문 소리에 귀를 세웠다.
“쌤 빠이.” 하고 껄렁거리는 시준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톡. 톡. 톡. 톡. 계단을 내려오는 귀여운 발소리까지 들렸다.
잠시 후 서원의 모습이 드러났다. 남자를 발견하자마자 하얀 얼굴이 발그스름해졌다. 그는 가까이 다가와 소파 앞에 머뭇거리며 섰다. 그동안 연우는 조금 묘한 눈으로 서원의 손목 부근을 바라보았다. 서원이 그 눈빛을 눈치채기 전, 그는 능청스러운 얼굴로 얼굴을 들고 일어섰다.
“과외 잘했어?”
“네.”
“데려다줄게. 가자.”
서원은 제 손에 두른 가죽 시계를 매만지며 연우를 따랐다.
“준호는, 미국 가기 싫대요.”
드라이브를 하던 중이었다.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던 서원이 문득 말을 꺼냈다. 연우는 대수로울 것 없다는 목소리로 “그렇겠지?” 했다. 퍽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가지 말라고 하면 안 돼요?”
이상한 말이었다. ‘왜 갑자기 시준호 생각을 하지.’ 연우는 조금 불퉁한 얼굴로 흘긋 조수석을 바라보았다. 뒷모습은 고집스럽게 창만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냥…….”
말끝이 안개처럼 흐려진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한참 뒤, 서원이 창을 보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옆모습은 조금 긴장한 듯 보였다. 서원은 꼴깍 침을 삼키더니 이내 미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준호 과외 없으면, 형을 자주 못 보잖아요.”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시연우는 가벼이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후, 한강 둔치에 차를 세운 그가 조수석 쪽으로 살짝 몸을 돌렸다. 부드럽게 서원의 손목을 잡아 제게로 당긴다. 절 따라 산 건 좋은데, 헐렁하게 맨 모양새가 아까부터 거슬렸다. 잘못하면 손에 쓸려 생채기가 날 것이었다.
“과외 없어도 오면 되지.”
“…….”
“형 보고 싶으면 집 와도 돼.”
연우는 제가 매고 다니는 가죽 시계와 흡사하지만 퀄리티가 현저히 떨어지는 서원의 새 가죽 시계를 단단히 매 주면서 말했다.
“……저 오늘, 준호한테 재미있는 거 들었어요.”
뻣뻣한 시계 끈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머리 위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우는 마침내 시계가 단단하게 매인 손목을 쓰다듬은 뒤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서원을 바라보며 “뭐?” 하고 물었다.
“형 원래 직업.”
“내 직업?”
“네.”
내 직업. 연우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생각하다가 “연구했던 거?” 했다. 서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기 많은 눈은 제가 이런 것을 알아버린 것에 대해 상대방이 불쾌해하지는 않은지 열심히 살피고 있었다. 연우는 제 눈치를 보는 서원을 알아채고 짐짓 흔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원래는 그랬지.”
“미국, 또 갈 거예요?”
“아니. 이미 퇴소했는데, 뭐.”
“…….”
녀석은 거듭 고민하는 얼굴을 했다. 왜 저러지. 연우는 생각하다가 툭, 서원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면서 “왜? 내가 미국 갔으면 좋겠어?” 하고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녀석이 걱정할 건 그거밖에 없다고 판단한 까닭이었는데, 의외로 서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렇다기보다는… 형 꿈이었으니까.”
꿈.
전혀 염두에 두지도 않았던 주제였다. 연우는 푸스스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꿈이라니. 여태껏 자신은 제 꿈이나 어떤 자아실현 때문에 골머리를 앓거나 애 닳아 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제 꿈은, 구태여 말하자면, 그 어떤 것에도 구속당하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뿐이었다.
“……그만둔 거 아니야.”
그러나 그는 제가 생각하는 것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제 ‘꿈’에 대해 생각하는 눈이 너무나도 깊고 맑았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거짓말도 아니었다. 아예 그만둔 건 아니다. 아예 연구직을 그만두는 것이었다면 일단 조부부터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었다. 자신을 다시 한국으로 오게 한 건 조부였지만, 제 커리어에 가장 관심 있는 것도 조부였다. 자신이 그와 전공이 같았기 때문에 더 그랬다. 실제로 다음 주에도 세미나 참석이 예정되어 있었다.
‘가서 영감님 따까리 노릇이나 하겠지만.’ 연우는 냉소적으로 생각하면서도 다정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냥 연구소만 그만둔 거지. …형 둘째 동생이 있거든? 지금 미국에서 대학 다니는데, 걔 졸업하면 걔가 갤러리 맡을 거야. 그러면 나는 다시 하던 일 해야지.”
안심하라는 듯 말하니 남의 꿈을 제 꿈처럼 진지하게 염려하고 있던 그 말간 눈동자가 금방 안정을 되찾았다. 서원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눈을 올려 연우를 바라보았다.
“…갤러리 일은 왜 맡게 됐는지, 물어봐도 돼요?”
연우는 웃었다. 남이었으면 귀찮았을 저에 대한 관심이 못내 사랑스럽게 느껴진 까닭이었다. 그는 보드라운 뺨을 손가락으로 슥 쓰다듬으며 순순히 대답했다.
“원래 어머니 거였는데, 어머니가 나한테 맡기고 돌아가셨어. 재작년에.”
일순 작은 접촉에도 기분 좋은 듯 팔락거리던 속눈썹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부드럽게 풀려 있던 얼굴에 당혹감이 번졌다. 아차 싶었다. 연우는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거두면서 서원의 얼굴을 살폈다. 샅샅이 훑는 눈동자가 다정하면서도 끈질겼다.
“…….”
“놀랐어? 말 안 하는 게 나았나?”
나지막하게 물으니 잠시 초점을 잃었던 눈이 그제야 올라 연우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맞닿은 그 순간이었다. 와락. 강한 힘이 연우의 목을 껴안았다. 놀란 연우가 평소처럼 서원의 허리를 안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였다. 자석처럼 연우의 목에 착 달라붙은 얼굴이 고개를 내저었다. 살에 닿은 입술이 느리게 비비적거렸다.
“……말 안 했으면, 형 나한테 왕창 혼났어요.”
서원은 그렇게 말했다. 하하. 연우는 웃었다. 그리고 그는 오랫동안 서원의 품에 안겨 있었다.
* * *
마이크 앞에 선 노인이 길고 긴 축사를 마치자 박수 소리가 잔잔한 음악처럼 흘렀다. 팔짱을 낀 채로 가만히 서 있던 시연우도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저 노인네 노안 때문에 사진도 제대로 못 볼 텐데, 사진전 축사가 말이 되냐?”
박진석은 진지한 얼굴을 일관한 채로 연우에게 몸을 기울여 작게 속닥거렸다. 연우는 입꼬리를 끌어 미미하게 웃기만 했다. 박진석이 말하는 ‘노인네’는 사진작가의 은사이자, 박진석의 외조부였다.
잠시 후 개막식이 끝났다. 미술관 직원의 신호를 받은 피아니스트가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연우는 손목시계를 확인하면서 자연스럽게 진석의 옆에 섰다. 둘은 나란히 벽에 걸린 사진 앞에 섰다.
“개막식에 출장 연주 부르는 거 존나 촌스러워.”
이번에는 연우가 진석에게 속닥거렸다. 그도 역시 진지한 낯이었다. 진석은 참지 못하고 키득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주변 사람에게 들킬까 황급히 입을 가린다. 잠시 후, 다시 정적인 얼굴을 되찾은 그는 연우에게 낮게 물었다.
“끝나고 뭐 해. 당구 칠래? 아니면 스크린 골프?”
“오늘 바빠. 행사 두 개 더 있어. 하나는 파주야.”
“파주? 미쳤네. 다 끝나면 몇 신데?”
“빠르면 10시.”
“명복을 빈다. 근데 이거 언제까지 봐야 돼?”
“지금이 넘어갈 타이밍이야.”
연우는 느긋하게 걸어 다음 사진 앞에 섰다. 그를 따라 옆에 선 진석이 낮게 물었다.
“사진전 다섯 개 보기, 황 교수 논문 대필해 주기. 둘 중 골라 봐.”
“후자.”
대답은 망설임 없이, 또 간결하게 튀어나왔다. 또 한 번 불청객 같은 웃음이 터져 나오기 직전이었다. 그들에게로 다가온 누군가가 연우의 어깨를 톡톡 쳤다. 연우는 집중하는 척하던 얼굴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연우, 오랜만이네?”
새하얀 얼굴에 깔끔한 숏컷 머리. 양 교수님이었다. 몇 개월 전, 과외를 소개받은 뒤로 처음 뵈는 것이었다. 연우는 그녀에게로 몸을 완전히 돌렸다.
“어, 교수님.”
커다란 손이 주름진 손을 가볍게 감쌌다. 중년 여성은 연우를 올려다보며 인자하게 웃었다. “무슨 교수님이야, 교수님은. 징그럽게.” 하는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연우는 마주 눈을 접어 웃으면서 반대편 손으로는 진석을 다른 쪽으로 밀었다. 대화가 오래갈 것 같은 예감이 든 탓이었다. 밀린 몸은 그녀에게 한 번 정중하게 인사한 뒤에 순순히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많이 바빴어? 연락도 통 없고.”
그녀는 마주 잡고 있는 연우의 손을 조물조물 매만지며 말했다. 섭섭하다는 듯이 덧붙인 말에 연우는 쓰게 웃었다. 그녀로서는 그럴 만도 했다. 어머니의 친한 친구였던 양 교수, 아니, 양 여사님은 저에게는 거의 가족과도 같은 존재였다.
어렸을 적부터 자주 보았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그녀는 살뜰히 저를 챙겨 주곤 했다. 서원이 준호의 과외 선생이 된 것도 제가 준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을 알고 그녀가 먼저 자신의 제자를 준호의 과외 선생으로 추천해 준 것이었다. 연우는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대답했다.
“그런 건 아닌데… 연락할 생각을 못 했어요. 죄송해요.”
“됐어. 그냥 한 말이야. 무소식이 희소식이지 뭐. 잘 지냈어?”
“네. 여사님 덕분에요. 준호도 이제 말썽 안 피우고 편해요. 아, 과외도 계속하고 있고요.”
“과외는 알아. 너 서원이한테 갤러리 알바도 시켰다며.”
서원이. 다른 사람에게서 듣는 그 이름이 좀 낯설게 느껴지는 것 둘째치고, 너무나도 상세한 근황에 연우는 놀란 얼굴을 했다. “어떻게 아셨어요?” 묻자 양 교수가 웃으면서 연우의 볼을 꼬집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고, 얼뜬 얼굴이 귀엽게 느껴져서였다. 그녀가 말했다.
“너만 서원이 보니? 준호 과외 선생이기 전에 내 학생인데?”
“…그건 아는데, 서원…, 그, 선생님이랑 그런 얘기까지 나누실 줄은 몰랐죠.”
“종강 전에 좀 불렀어. 할 얘기가 있어서.”
할 얘기? 연우의 눈이 깜빡였다. 별것 아닌 이야기일 확률이 많았지만 강서원에 대해서는 제가 모르는 틈이 생기는 게 싫었다. 연우는 짐짓 아무 생각 없이 되묻는 것처럼 가벼운 얼굴로 “무슨 얘기요?” 하고 물었다. 양 교수는 잠시 기억을 더듬는 듯하더니 말했다.
“내년에 해외 인턴십 하는 게 어떻겠냐고. 만약에 할 거면 지금부터 준비해도 빠듯하거든. 서원이 같은 경우에는 내년에 졸업반인데, 그중에서 유일하게 해외 대외 활동 경험이 없어서 좀 걱정이라.”
“……서원 씨는 뭐래요?”
“글쎄. 생각해 본다고는 했는데, 안 할 것 같아. 시큰둥하더라고.”
그렇겠지. 그러니까 내게 말 안 한 거겠지. 연우는 짐작하면서 입 안을 혀로 훑었다. 어쩐지 기분이 까끌해졌지만, 별것도 아닌 것에 지나치게 신경 쓰고 있다는 생각에 이내 그 불편함을 지워내었다. ‘피곤해서 그런가. 괜히 예민하네.’ 그는 제 상태를 대강 가늠했다. 그리고 제 손에 들어 있는 작고 곧은 손가락을 애교스럽게 쥐었다 펴면서 거듭 웃었다. “그렇구나.” 하는 목소리가 일견 무던했다.
* * *
오늘은 유독 스케줄이 많았다. 사진전부터 시작해서 각종 행사에 불려 갔다. ‘언제까지 이런 짓을 해야 하는 거지.’ 시연우는 짜증스레 얼굴을 구기면서 시간을 확인했다. 스케줄은 끝났으나 이미 늦은 시간이었고, 심지어 지금 제 차가 가로지르며 달리고 있는 곳은 파주 출판단지였다. 강서원이 맥주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곳은 가평 부근 섬이었다.
[나] 서원아 오늘 형 좀 늦을 수도 있어. ㅠㅠ
[강서원] 괜찮아요 ㅎㅎ 저 뒷정리 하면 12시 정도 돼요!!
지금은 10시 10분이었다.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던 연우는 뒤에서 울리는 클랙슨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초록불이었다. 그는 핸드폰을 조수석에 내던졌다. 이윽고 구둣발이 거세게 엑셀을 밟았다.
호텔은 예약해 놓았고, 시준호는 오늘 아침에 미국으로 떠났으니 3주간은 강서원을 끼고 살 수 있었다. 늦을 것 같으면 오늘 하루 정도는 건너뛰어도 된다. 그러나 만에 하나가 자꾸 걸렸다. 연우는 저번 주의 어느 밤을 떠올렸다.
제 집 사정을 녀석에게 말했던 날. 차 안에서 잔뜩 노닥거리고 잔뜩 입을 맞춘 뒤 서원을 집에 데려다주고 있었다. 청담대교에 진입했을 때 서원의 핸드폰이 부르르 진동하기 시작했다. 전화인 것 같았는데 녀석은 핸드폰을 꾹 쥐어 진동 소리를 누를 뿐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연우는 짐짓 정면을 바라보며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전화 오는데?’
‘안 받아도 괜찮아요.’
목소리가 자연스러운 것을 보아 무엇을 숨기는 것 같지는 않았다. 비로소 청담대교를 빠져나왔을 때 그는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누군데? 경찬이 아니야?’
‘아뇨. 맥주 알바에서 만난 친구인데, 노는 걸 좋아해서…… 자꾸 나오라고 해요.’
연우는 반사적으로 양평에서 보았던, 날라리 같은 면상을 기억하면서 ‘그렇구나.’ 하고 답했다.
서원은 시곗줄을 만지작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말하다 알았는데, 경찬이랑 같은 대학인 데다가 같은 동아리래요. 그리고 저랑 같은 전공이에요. 영문과.’
‘아, 정말?’
‘네. 그래서 말도 잘 통하고, 재밌어요. 도와주는 것도 많고.’
그 뒤로 서원은 조잘조잘 계속 말을 이어 갔다. 하여간 요는 계속 그 날라리와 맥주 아르바이트를 할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잘은 모르나 그 아르바이트는 행사를 골라 갈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이번 아르바이트도 같이 갔을 터였다. 제가 가평으로 내려가지 않는다면, 착하고 순한 강서원은 그럼 제 친구를 데리고 같이 호텔을 가도 되겠느냐고 물어볼 수도 있었다. 이게 만에 하나의 경우였다.
사실 허락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남자고, 친구다. 여자친구도 있다 했다. 허락해 달라고 하면 할 수 있다. 근데, 그 날라리는 싫었다. 그냥 싫다.
연우는 다시 한번 시간을 확인했다. 엔진 소리가 서서히 커졌다.
* * *
“서원! 애들이랑 주변에 곱창집 갈 건데 갈래? 오늘은 남자애들만 있어. 아, 여자애 하나. 다영이.”
퇴근 확인을 받기 위해 주류 회사 직원들이 모여 있는 메인부스로 가는 길이었다. 제 여자친구인 다영과 농을 치던 민규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서원에게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
맥주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이래로 한 번도 제안을 받아들인 적이 없었는데, 민규는 참 꾸준했다. 저에게만 그러는 게 아니었다. 민규는 마주치는 사람마다 인사처럼 같이 놀지 않겠느냐고 물어보면서 다녔다. 거절이 돌아오면 가볍게 “응!” 이나, “알았어!” 하고 만다. 퍽 친화력이 좋았다. 그를 보고 있자면 경찬이 대학교 들어가서 활발해진 것도 납득이 간다고 서원은 생각하면서, 자연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아, 나는 괜찮아.”
“그래? 너 오늘도 다른 데서 자?”
“응.”
“어디서 자는 거야? 맨날 궁금했어.”
문득 다영이 고개를 쭉 뒤로 빼고 서원을 바라봤다. 서원은 머리를 긁으며 “그냥, 혼자 다른 데서 자.” 하며 머뭇거렸다.
“음, 왜? 혹시 결벽증 같은 거 있어?”
“좀……?”
다영은 서원의 얼굴을 잠시 동안 바라보더니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이 많네. 숙박비로 일당 다 쓰는 거 아니야? 돈 아까워.”
서원은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직원들에게 퇴근 확인을 받은 뒤, 민규와 다영은 서로 부둥켜안은 채로 서원에게 인사했다. 서원은 공연장 초입 가로등 아래에 덩그러니 선 채로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들은 시끄럽게 웃으면서 멀어졌다.
“……후우…….”
멀어지던 뒷모습들이 마침내 시골 밤거리의 어둠에 가려 사라졌다. 서원은 느리게 한숨을 내쉬며 무너지듯 쪼그려 앉았다. 뻐근한 팔을 주물주물 만지다가,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손목에 그를 따라 산 가죽 시계가 있었으나 아직 이용하는 습관을 들이지는 못했다.
열 시 반이었다. 형을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아 12시에 일이 끝난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니까, 꼼짝없이 공연장 주변에서 형을 기다려야 할 터였다. 주변에는 편의점도 없었고, 카페도 없었다. 퇴근 끝물이라 사람들도 별로 없었다.
서원은 풀벌레 소리와 희미한 가로등, 두 개비의 담배, 그리고 여름밤의 축축하고 서늘한 공기와 함께 12시를 기다렸다. 11시 40분이 되었을 때 핸드폰 알람 소리가 났다. 서원은 재빨리 핸드폰을 확인했다. 형에게서 온 문자였다.
[연우 형] 서원아 일하고 있어?
[나] 네!
[연우 형] 지금 가고 있는데 사고가 났는지 엄청 막히네. 네비게이션 찍어봤는데 새벽에 도착한대
괜찮아요, 라고 쓰던 손가락이 멈췄다. 곧바로 전화가 온 탓이었다. 서원은 목을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네, 형.”
「응, 서원아. 답장이 늦길래. 바빠?」
“아니요, 괜찮아요.”
서원은 공연히 손을 쥐락펴락하면서 말을 덧붙였다.
“피곤하시잖아요. 안 오셔도 돼요.”
「……그러면, 혼자 가서 잘 거야?」
“네.”
「그래. 그럼 일 끝나는 시간 맞춰서 택시 불러 줄게. 끝나면 거기 공연장 정문에 서 있어. 씨로열 호텔이고, 프론트 가서 시연우 이름 대면 키 줄 거야. 형이 전화해 놓을게.」
서원은 10분 뒤에 끝날 것 같다고 대답했고, 택시는 전화를 끊고 7분 후 도착했다.
호텔 방은 굉장히 컸다. 샤워를 마친 서원은 가운을 입은 채로 말없이 침대에 엎어졌다. 흰 침구에 얼굴을 박고 죽은 듯 누워 있던 뒤통수가 느리게 슥, 움직였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널따란 창 너머로 탁 트인 야경이 보였다.
“…….”
이렇게, 하루만 못 봐도 외로워서 어떡하지.
막연한 욕심들이 줄을 이었다. 끝이 없을 것만 같은 줄의 마지막에는 무력감이 오도카니 자리했다. 조용히 누워 눈만 깜빡이던 서원이 문득 협탁으로 손을 뻗었다. 그를 따라 산 가죽 시계를 꼭 쥐고, 얼굴에 가까이 갖다 댄다. 케이스의 차가운 유리 감촉이 뜨끈한 뺨에 닿았다. 서원은 눈을 감았다. 작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싸구려 시계의 초침 소리는 너무나도 시끄러웠다. 서원은 늦은 밤이 되도록 잠에 들지 못했다.
* * *
햇살의 온도가 간지럽게 잠을 깨우고 있었다. 얼굴에 닿는 무엇인가에 조금 더 깊숙이 파고들던 서원은 일순 위화감을 느꼈다. 이불, 혹은 베개라고 치기에는 제가 뺨을 비비고 있는 어떤 것은 다소 딱딱했다. ‘이상하다.’ 생각한 순간, 스치는 향기가 의식을 자극했다. 감겨 있던 눈이 번뜩 뜨였다.
“……형?”
“일어났어?”
맞았다. 자신이 안고 있는 것은 이불이 아니라, 형이었다. 잠에 푹 절어 있던 의식이 단번에 깨어났다. 언제부터 자고 있는 걸 본 건지, 아니, 그 전에 언제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어젯밤에 자신은 혼자였다.
“언제… 왔어요?”
서원은 얼뜬 목소리로 물었다. 갑작스러운 상황 때문인지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새벽 세 시?”
“안 온다고 했잖아요.”
“간다고 하면 안 자고 기다릴까 봐 그랬지.”
남자는 “놀랐어?” 하며 키득거렸다. 잠시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서원이 별안간 그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적거리자 낮게 웃는 울림이 느껴졌다.
“…….”
얼마나 더 좋아질 수 있을까. 서원은 은근한 두려움마저 느꼈다. 보잘것없는 자신의 인생에서, 이렇게 근사한 사람은 또 찾아올 수 없을 것이다. 이기적이라는 건 알지만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그를 붙잡고 싶었다. 그 생각뿐이었다.
“엄청 잠꼬대하더라, 너.”
“…….”
서원은 대답하지 않고 그를 꼭 안고 있기만 했다. 콩콩 뛰는 심장이 밀착된 살을 통해 느껴졌다. 연우는 비죽 미소 지으며 서원의 등을 토닥였다.
“연우 형 보고 싶어요, 제가 잘할게요, 하면서 잉잉거리던데?”
“……거짓말.”
놀림이 이어지자 마침내 서원이 얼굴을 떼어내며 말했다. 눈물이 조금 묻어나는 눈으로 그를 흘긴다.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 쪽, 쪽. 두 뺨에 키스하는 입술이 따뜻했다. 이윽고 폭격처럼 얼굴 위로 뽀뽀가 쏟아졌다. 서원은 가만히 입술을 받아내다가, 남자의 양 뺨을 감싸 멀어지는 얼굴을 붙잡았다. 두 이마가 맞닿았다.
“서원아.”
“네.”
“형 오니까 좋아?”
얼마 전 했었던 질문이었다. 그때보다 조금 더 비밀스럽고, 훨씬 더 자그마한 속삭임이 심장을 시끄럽게 간지럽힌다. 서원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운 거리 탓에 두 입술 끝이 스쳤다.
“얼마만큼?”
그는, 또 같은 질문을 속닥거렸다.
그저 이마를 맞대고 누워서 새가 지저귀는 것처럼 작게 얘기를 나누는 것뿐인데도 몽롱한 느낌이 온몸을 감쌌다. 서원은 두어 번 눈을 깜빡이다가, 한숨을 토해내듯 숨을 잔뜩 섞어 말했다.
“……또, 떨어지기 싫을 만큼.”
엉겁결에 어린 진심을 내뱉어버렸다. 햇살 때문에, 형의 눈빛 때문에, 속삭임 때문에, 말랑말랑해진 마음 때문에. 서원은 공연히 다른 것을 탓하면서도 결국은 스스로를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그딴 식으로 말하면 어떡해. 형이 부담스러워할 텐데. 그러면 안 되는데. 불현듯 조급해져 낯이 화끈거렸다. 서원이 수습하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을 때였다. 물끄러미 그 얼굴을 바라보던 연우가 빙그레 웃었다. 입을 연다.
“나도인데.”
“…….”
“애기야, 우리 결혼할까?”
서원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게 분명한 태도였다. 비약적인 말. 휘파람처럼 여유로운 목소리.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 그 입꼬리. 그 가벼움. 모든 게 그랬다.
“…….”
‘다행이다.’라고 서원은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해야만 했다. 그런데도, 마주 웃어지지가 않았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 * *
행사장 앞에 검은 차가 섰다. 서원은 안전벨트를 풀면서 감사하다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가방을 챙겨 차 문을 열었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연우가 별안간 서원의 팔을 잡아챘다. 툭. 다시 문이 닫혔다. 놀란 얼굴이 남자를 돌아보았다.
“형한테 인사 안 해주고 가?”
“감사해요, 형.”
그가 못 들었나 싶어서, 서원은 다시 한번 말했다.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거 말고.”
제 입술을 툭툭 친다. 서원은 상체를 밀어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갖다 댔다. 잠깐 입술을 비비고 물러서려는 찰나, 큼지막한 손이 서원의 뺨을 붙들었다. 입이 끌려가듯 벌어졌다. 질척한 혀가 입 속에 밀려 들어왔다. 서원은 그의 키스를 얌전히 받아내기만 했다.
잠시 후, 입술이 떨어졌다. 남자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서원아.”
“네.”
“무슨 일 있어? 기분이 안 좋아 보여.”
“…….”
아차 싶었다. 눈치가 빠르고 예리한 형 앞에서 표정 관리를 너무 못했다. 서원은 공연히 손을 쥐었다 펴면서 꼴깍 침을 삼켰다.
“응?”
“아니요. 그냥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래요. 기분은 괜찮아요.”
서원은 눈을 내리깔면서 말했다. 거짓말을 할 때 시선을 피하는 버릇은, 당사자는 모르고 남자만 알았다.
연우는 그의 얼굴을 놔주었다. 얼굴이 떨어지자마자 서원은 참았던 한숨을 조용히 내뱉었다.
“가볼게요, 형. 저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알았어, 가 봐. 몸조심하면서 일하고.”
그는 친절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매일. 늘 그랬다. 다정하고, 친절하게 웃어 주고, 알아주고, 베푸는 건 형의 몫이었다. 그러니까, 이 근사한 선물에 만족할 줄도 모르고 섭섭함을 느끼는 건 말이 안 되는 짓이다. 자신이 못된 거고, 욕심이 많은 거고, 한심한 거다. 서원은 검은 차가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약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 * *
케이크를 자르던 포크가 덜그럭 소리를 내면서 접시 위로 떨어졌다. 진석은 크게 뜬 눈 그대로 연우를 바라보았다. 연우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다시, 말해 봐.”
“나도 카페 하려고.”
빵 조각이 귓구멍에 처박히지 않은 이상 자신이 두 번이나 잘못 들을 리가 없었다. 진석은 그제야 제가 제대로 들었음을 인정했다. 질문은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사업하게? 갤러리 준우한테 넘기면 연구, 다시 할 거 아니었어?”
“사업? 미쳤냐. 돈 벌려고 하는 거 아니야.”
“그럼?”
연우는 무슨 뻔한 걸 묻냐는 듯 눈썹을 추켜 올렸다. 케이크를 씹으며 곰곰이 생각하던 진석은 이내 경악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야, 씨, 너 설마.” 했다.
연우가 말했다.
“가평에서 올라오는 길에 우리 집 근처 둘러보고 왔거든. 한적하고 좋은 데 매매 나왔더라. 일단 사 놓긴 했어.”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 없다는 듯 연우는 간격 없이 부연했다. 진석이 놀랄 것이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다. 암만 자본이 탄탄하다고 해도 갑자기 사업을 벌이는 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그러나 무를 생각은 없었다. 어제, 확실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강서원이 어디서 편하게 일을 하든, 그걸 제가 알든, 모르든, 그런 건 다 상관없었다. 강서원의 생활 전반에 제가 침투하고 있지 않은 게 싫었다. 녀석이 하는 모든 일에 제가 간섭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래야 만족할 것 같았다.
“……그러다 헤어지면 어쩌려고?”
기어이 진석은 인상을 구기며 낮게 물었다. 다른 누군가에게 던졌으면 몹시 무례한 질문이었겠지만, 연우에게는 아니라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하물며 전에 백화점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를 생각하면 더 그랬다. 그 증거로, 연우는 “글쎄.” 하며 지극히 태평한 얼굴로 커피를 홀짝거렸다.
“그냥 주지, 뭐.”
“…….”
탁. 간결하게 대답하며 컵을 내려놓는다.
그나마 고민하는 듯싶더니 고작 한다는 소리가 그거다. ‘이 새끼, 진짜 미친놈인가.’ 진석은 생각했다. 시연우가 열네 살일 때부터 봐 온 세 살 형이자 친구로서, 자신이 그를 잘못 키웠다는 죄책감마저 들기 시작했다. 아직 결혼도 안 한 자신이 왜 이런 아버지 같은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지 모르겠으나, 하여간 그랬다.
“아, 그리고, 형 결혼식에 서원이 데리고 갈 거야. 애 면전에 대고 누구냐고 묻지 마. 얼굴 기억하지?”
“……야아, 그래. 잘 됐다. 만나면 네가 했던 말 다 불어버려야지.”
다소 진심이 묻어나는 장난스러운 협박에도 연우는 웃으며 “그러시던가.” 했다. 그리고 손목을 살짝 비틀어 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다시 가평으로 내려갈 시간이었다.
“나 간다.”
“연우야.”
손목을 거두는 사이 이름이 불렸다. 연우는 대답 대신 고개를 들어 진석을 보았다. 쓸데없이 오지랖 넓은 얼굴은 금세 진지하게 굳어 있었다. 잠시 고민하는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진석이 이내 당부하듯 말했다.
“너무 갖고 놀지 마, 어리잖아.”
뭐래. 연우는 헛웃음을 지었다. 어이없다는 태도는 진심으로 보였다.
“누가 누굴 갖고 놀아? 그런 거 아닌데.”
그는 일어서면서 말했다. 가볍게 툭 던진 그 말은 빈정거리는 것 같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짜증을 내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그저 장난을 치는 것 같기도 했다. 어떤 게 진심인지 파악이 잘 되지 않았다. 진석은 멀어지는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카페 밖으로 나온 연우는 주차된 차를 향해 걸었다. 그가 차 문을 열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운전석에 앉으면서 핸드폰을 확인했다. 쾅. 차 문이 닫혔다.
문자 발신인은 강서원이었다. 연우는 핸들에 팔을 걸치면서 액정을 톡톡 두드렸다.
[강서원] 형 오늘 안 데려오셔도 될것같아요. 오늘 끝나고 민규랑 민규 여자친구랑 술 마시려고요!
[강서원] 안전한데서 마실거고, 조금 마실게요. 그리고 서울 올때는 친구들이랑 더치페이해서 택시로 올게요. 12시 전에는 꼭 갈게요. 형먼저 주무시고 계셔도돼요.
[강서원] 걱정마세요. ㅎㅎ
[강서원] (이모티콘)
연우는 조용히 액정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버석하게 웃었다. 비틀린 입술 사이로 바람이 빠져나가는 소리가 났다.
* * *
서원은 휘청이며 대문 앞에 섰다. 술을 많이 마신 것도 아니고, 술이 그렇게 약한 편도 아닌데 오늘따라 취기가 돌았다. 아무래도 얼른 술자리를 끝내고 와야겠단 생각에 빈속에 빨리 마셔버려서 그런 것 같다.
참 우스웠다. 그에게 이 이상 집착하지 않기 위해 민규와 술을 마셔 놓고, 술자리를 얼른 끝내버리려고 애쓴 자신이 그랬다. 하지만 이런 시간이 필요하기는 했다고, 서원은 스스로를 위로하듯 생각했다. 별거 아닌 일에 섭섭해하고, 별거 아닌 말에 절망스러워하는 요즘의 제 모습은 확실히 이상했다. 게임 중독자들이 가끔씩 나가 바람을 쐬는 것처럼 저도 환기가 필요했다.
‘그게 잘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서원은 자조적인 생각을 삼키며 초인종을 눌렀다.
“왔어?”
잠시 후, 대문이 열렸다. 그 사이로 편안한 차림의 시연우가 나타났다. 연우는 친절하게 웃으며 서원의 손을 잡았다. 서원을 안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부드러웠다. 그는 느긋한 걸음으로 정원을 가로질렀다.
분명 안에서 자동으로 열 수 있었는데도, 형은 제가 올 때마다 직접 문을 열어 주었다. 그게 갑자기 좋아서, 서원은 그를 따라가면서 맥락 없이 웃고 말았다. 픽 웃는 소리가 들렸는지 앞서 걸어가던 남자가 고개를 돌려 서원을 보았다.
“왜 웃어?”
“그냥요.”
서원은 웃는 얼굴 그대로 얼버무렸다. 잠시 상기된 얼굴을 살피던 남자는 더 묻지 않고 다시 고개를 돌려 현관문을 열었다.
남자를 따라 들어선 서원이 느릿느릿 신발을 벗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서려는 순간이었다.
“아…! 읍……!”
별안간 허리를 갈고리처럼 확 끌어당기는 힘에 서원은 휘청였다. 넘어지려는 몸을 붙든 건 팔이었다. 그의 품에 안겼다고 인지할 새도 없이 입술이 먹혔다. ‘술 냄새날 텐데.’ 알딸딸한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 들어 서원은 힘껏 남자의 어깨를 밀었다.
그러나 남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도리어 더 세게 힘을 주어 서원을 안아 들었다. 그대로 소파로 걸어갔다. 서원의 몸이 부드럽게 소파 위에 눕혀졌다. 연우는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그 위에 올라탔다.
“씻고, 침대 가서……!”
“왜? 준호도 없는데.”
그는 능청맞은 목소리로 말하면서 서원의 얼굴에 제 입술을 댔다.
“아무 데서나 섹스하는 게 신혼의 묘미 아니야? 나는 서원이 구멍에 아무 때나 박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자면서도 박고, 밥 먹으면서 박고, 영화 보다가 박고.
나지막한 목소리 끝에 은근한 웃음이 매달렸다. 쪽쪽, 여린 살결을 빨아대는 입술이 허겁지겁 옷 속을 헤집었다. 티셔츠 안에 들어간 손이 여기저기를 주물럭거렸다. 너무 이상한 말이라, 도리어 뇌가 소화를 하지 못한 모양인지 서원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몸을 약하게 비틀면서 남자의 팔을 잡는 게 서원이 한 전부였다.
“안 씻은 상태로, 하기 싫어요…….”
“씻는 것보다 형 달래 주는 게 우선이어야지.”
목덜미를 빨던 입술이 춥, 소리를 내면서 떨어지더니 젖은 살결에 대고 속삭였다. 서원은 놀란 얼굴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남자의 얼굴은 그다지 화나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느물거리는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서원이 재차 그의 얼굴을 살피는 사이, 능구렁이 같은 손이 민첩하게 움직였다. 티셔츠를 빠져나와 바지 버클을 내린다. 브리프 안으로 커다란 손이 쑥 들어갔다. 서원의 몸이 크게 움칠거렸다.
“읏!”
“이래 뵈도 첫날밤인데, 형 두고 술이나 마시러 가고.”
“아, 으, 형……, 읏……!”
“취해서 볼 붉히고, 비실비실 웃고, 귀엽고. 예쁘고. 나 삐지게.”
서원은 성기를 주물럭거리는 손에 완전히 감각을 휘둘렸다. 무자비한 움직임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비로소 언제 거칠게 대했냐는 듯 스윽, 기다란 손가락이 딱딱해진 기둥을 가볍게 훑으며 떨어졌다. 서원이 가슴팍을 들썩거리며 연우를 올려다보았다. 커다란 눈망울은 어느새 아래처럼 젖어 있었다. 죄송해요, 하고 읊조리고 마는 목소리는 물에 잠긴 식빵처럼 흐물거렸다.
* * *
남자는 다 벗은 몸을 안고 있었다. 제 허벅지 위에 앉아서, 제 목을 생명줄처럼 꼭 안고 있는 서원은 낮고 작게 신음을 흘릴 뿐 주체적으로 움직이지를 못했다. 아파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부끄러운 것 같았다.
“서원아.”
“네…….”
부름에 서원은 신음을 꾹꾹 눌러 참으면서 대답했다. 연우는 허리를 가볍게 쥐고 있던 손을 내려 엉덩이 한쪽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놀란 몸이 살짝 떠는 게 느껴졌다.
“얼굴 안 보여줄 거야? 이렇게 꼭 붙어 있으면 어떻게 움직여, 형이.”
사실 못 움직이기는커녕 꽉 붙들고 있으면 섹스하기가 더 편하기는 했다. 하지만 꼭 얼굴을 마주하면 저주에 걸리기라도 할 것처럼 죽어도 얼굴을 안 보여주는 게 귀여워서, 그렇게 말해 보았다. 첫 번째 섹스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왜 갑자기 이렇게 심하게 부끄러워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응? 빨리 보여줘.”
“아, 형……, 흣……!”
달래는 목소리를 내면서 콩콩콩 감질나게 허리를 쳐올리니 밀착된 허벅지가 부들부들 떨리는 게 느껴졌다. 급한 목소리는 절박하기까지 했다. 연우는 모르는 척 한 번 더 퍽, 세게 성기를 쳐올렸다. 서원이 느끼는 부분은 이제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아, 아아……!”
정통으로 쑤셔 박혔는지 서원이 얼굴을 뒤로 젖히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목을 안았던 손이 풀리고 단단한 어깨를 붙잡듯 더듬는다. 어쩐지 반응이 오늘따라 유독 예민했다. 첫 번째로 섹스한 뒤로 서너 번 더 섹스를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연우는 몸을 살짝 떼내고 서원의 얼굴을 면밀하게 살폈다. 마주한 얼굴은 발갛게 열이 올라 있었다. 아직 제대로 움직이기도 전인데 벌써부터 눈이 함빡 젖은 채다.
“어디 아파?”
“그게, 그게 아니라…….”
“…….”
“……모르겠어요.”
술 때문이구나. 뭉개진 발음을 듣고 나서야 남자는 깨달았다. 동시에 조금 괘씸해져서 그는 그대로 서원의 몸을 들어 소파에 눕혔다. 목을 안을 수 없게 상체를 세우자 서원은 잠시 팔을 허우적거렸다.
“형 안을래요.”
“안 돼.”
놀랄까 봐 여태껏 서원을 무릎 위에 앉히고 박는 자세에서 벗어나게 한 적이 없었다. 서원도 그것에 익숙해졌는지, 자세가 바뀐 게 이상하다는 듯 아이처럼 울상을 지었다. 다소 단호한 목소리가 떨어지자 티 나게 당황한다.
연우는 서원의 무릎 뒤에 손을 대고 다리를 들췄다. 살짝 벌어진 다리 사이에 더 깊숙이 자리를 잡자 서원은 놀라 몸을 푸드득거렸다.
“괜찮아.”
연우는 서원의 종아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큰 눈망울 위로 안심이 스친 찰나, 퍽! 세게 성기를 처박았다.
“아, 읏!”
얼마나 깊이 쑤셨는지 얕은 뱃가죽 위로 성기가 요동치는 게 보였다. 서원의 몸이 내리친 쾌감으로 발갛게 달아올랐다. 곧이어 남자는 허리를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뚝. 연우의 땀이 턱을 타고 내려 흰 허벅지 위에 떨어졌다.
“하아, 하, 윽…….”
“응, 으응, 흐…! 흐으, 으읏……!”
“서원아, 막, 후우……, 막, 쌀 것 같아?”
“그런 거 아니, 응……! 잠깐, 형, 잠, 아, 흣!”
“여기 쉬 싸면, 형이 소문, 다 낼 거야.”
놀리는 목소리가 눈물샘을 들쑤신다. 두 번째로 섹스했을 때, 소변이 나올 것 같은 간질거림을 형에게 고백한 적이 있지만 그건 봐달라는 의미였다. 이렇게 놀림을 당할 줄 몰라서 좀 서러웠다. 서원은 흐물거리는 입을 꾹 붙들어 매면서도 신음을 참지 못하고 펑펑 터뜨렸다. 진짜, 가끔은 형이 너무 못됐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안, 그래, 히익, 흐……! 그런, 그런 말 하지……! 흐, 윽!”
서원이 야속함을 참지 못하고 그렇게 말하자, 연우는 소리 내어 웃었다. 만족스러운 듯했다.
거실의 소파가 성난 파도처럼 거세게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퍽, 퍽, 퍽. 젤에 젖은 엉덩이가 허벅지에 부딪히는 소리가 드셌다. 잡히지 않은 한쪽 다리가 힘없이 휘청거렸다. 남자는 쿠션을 아무거나 집어 서원의 허리 아래에 받쳐 주었다. 쿠션 위에 고정된 상체 탓인지, 서원의 발기된 성기가 그의 움직임에 맞춰 흔들거렸다. 적나라했다.
“아, 학, 흐으……! 응, 안, 안 돼……. 응…!”
“왜 안 돼, 귀여……, 읏……, 귀여워. 괜찮아.”
형이 만져 주지도 않았는데 추하게 흔들거리면서 선액을 흩뿌리는 모습을 보이는 게 수치스러웠다. 서원은 제 아래를 감추려고 손을 내렸으나 남자는 곧바로 서원의 두 손목을 한 손으로 움켜쥐어 저지했다. 더 해 보라는 것처럼 피스톤 속도가 급하게 빨라졌다. 다른 손이 쑥 뻗어와 성기만큼이나 뻣뻣이 선 유두를 둥글게 만지며 짓눌렀다. 서원이 자지러지듯 턱을 치켜들고 발을 꼿꼿이 세웠다. 바들바들 경련한다. 눅눅한 신음성이 소리를 키웠다.
“아, 응, 응! 아, 흣…, 으읏! 아!”
“어떻게, 이렇, 게, 예쁘지? 응?”
“형, 으, 으응, 읏! 형, 아……! 시러, 아, 응……!”
“우리 애기, 침 흘려, 응, 그렇게 좋아?”
그래도, 형이 섹스할 때마다 말을 못되게 하는 건 이제 좀 익숙해진 것 같았다. 다만, 빠르게 휘젓는 성기는 좀체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쾌감도 마찬가지였고, 묘하게 웃음을 흘리면서도 인상을 찌푸리는 그의 얼굴 표정도 그랬다. 익숙해질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고 또 천박하리만치 노골적이었다.
오늘은 더 심했다. 자꾸 아래에 열이 몰리고 아랫배가 감전된 것처럼 찌릿찌릿했다. 형이 그렇게 몰아가는 건지, 제 몸이 이상해진 건지 서원은 헷갈렸다.
영원히 가까워지지 않을 것 같던 얼굴이 서서히 가까워졌다. 연우는 추삽질을 멈추지 않으면서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서원의 입꼬리에 혀를 뭉개면서 서원이 흘린 침을 꼼꼼하게 핥아냈다. 살짝 벌어진 입 안에 혀를 집어넣어 마구잡이로 헤집는다.
단단한 복근에 성기가 짓눌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쌀 것 같아.’ 서원이 생각한 순간이었다. 그를 어떻게 알았는지 검붉은 성기가 벌어진 구멍을 거세게 틀어막았다. 서원은 두 번째로 사정했고, 연우는 처음 사정했다.
“하아, 하아, 흐…….”
내장과 구멍이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새어 나온 남자의 정액과 자신의 정액이 섞여 허벅지가 미끌거렸다.
서원은 밀려오는 사정감과 뱃속에 퍼지는 뜨끈한 감각을 동시에 느끼며 제 입 안을 게걸스레 핥아먹는 혀를 얌전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크고 단단하고 뜨거운 몸을 꽉, 껴안았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서원은 최선을 다해 팔에 힘을 주었다.
* * *
서원은 잠에서 깨자마자 온몸의 뼈와 근육이 뿔뿔이 흩어진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커튼을 통과하는 햇빛의 농도로 보아 아침은 훨씬 지난 것 같았다. 그는 옆으로 누워 눈만 끔뻑거리면서 시간을 가늠했다. 빨라야 11시, 늦으면 두세 시는 되었을 것이다.
몇 시든지, 이제는 일어나야 했다. 눈을 뜬 지 오 분은 지난 것 같은데 여기저기 쑤시는 탓에 손 하나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하루 종일 침대에 붙어 있을 수는 없었다.
끙, 서원은 기어이 앓는 소리를 내면서 팔로 몸을 지탱했다. 그대로 천천히 허리를 펴니 혹사당한 근육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경련했다.
“후우…….”
서원은 신음을 삼켰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던 몸 상태였다. 어제 같은 섹스는 처음이었던 까닭이다. 섹스를 할 때의 형은, 좀 끈질긴 면이 있긴 했다. 그러나 어제처럼 거친 건 아니었다. 더군다나 어제의 섹스는 시간이 갈수록 더 거칠었다.
마지막에는 펑펑 울면서 형에게 원망하는 소리를 낸 것 같기도 하다. 서원은 상체를 완전히 일으키면서 생각했다. 수치스러움을 참지 못하고 머리를 짚던 그는 이윽고 더듬더듬 손을 내려 눈가를 확인했다. 팽팽한 감촉이 느껴졌다. 역시나, 엄청 부은 것 같다.
‘욕실 가서 확인해야겠다.’ 서원은 생각하며 다리를 느리게 옮겨 발을 내렸다. 그때였다.
“어디 가?”
불현듯 단단한 팔뚝이 뒤에서 뻗어 나와 허리를 잡아챘다. 엇, 하는 소리와 함께 서원의 엉덩이가 다시 침대에 내려앉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곧이어 벗은 등 아래에서부터 쪽, 쪽, 느릿하게 입을 맞추는 감각이 느껴졌다. 서원은 짐짓 침착한 목소리로 “씻으러…….” 까지 말하다 침을 삼켰다. 천천히 척추를 따라 오르던 입술이 목 뒤까지 닿았다.
“가지 마.”
낮게 잠긴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고, 짧은 말조차 건성으로 발음했다. 정말 방금 전 잠에서 깬 모양이었다. 이내 남자가 몸을 일으키며 팔에 힘을 주었다. 서원의 몸이 끌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 뜨겁고 견고한 몸이 맨등에 착 달라붙었다. 서원은 쿵쿵거리는 박동을 느끼며 제 손만 내려다보았다.
연우는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제 코와 뺨을 마른 목덜미에 비비적거렸다. “좀 더 자자.”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졸음이 잔뜩 묻은 채로 서원의 귓가를 맴돌았다.
“……너무 많이 자서 잠이 안 와요.”
“난 더 자고 싶은데. 3시간밖에 안 자서 졸려.”
그는 침대맡 시계를 흘긋 보고는 말했다. 허리를 안은 팔은 놓아줄 생각이 없는 것처럼 단단하게 허리를 두르고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서원이 물었다.
“늦게 잤어요?”
“응.”
남자는 서원의 몸에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순서나 경로도 없이 입에 닿는 곳은 전부 도장을 찍을 것처럼 쪽쪽, 입술을 문대고 살을 빨아들였다.
“……왜요?”
“네 얼굴 보느라.”
“……형, 어제.”
“응.”
남자는 쭉쭉 살을 빨다가 살짝 입술을 떼고 대답했다. 서원은 제 손가락을 어지럽게 얽었다.
“질투…… 한 거예요?”
문득 목덜미 부근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터졌다. “그런 걸로 보였어?” 하고 묻는 목소리는 다정했다. 왜인지 입 안이 바싹 마른다. 서원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
“……좀?”
고민하던 남자는 의식적으로 가볍게 말했다. 찐득한 마음은 아직 남아 있었으나, 구태여 녀석에게 책임을 돌리고 싶지는 않은 까닭이었다.
연우는 점심시간이 훨씬 지난 시간에 집을 나섰다. 서원은 대문까지 그를 배웅했다. 문은 쉬이 닫히지 않았고, 쪽쪽, 뽀뽀를 여덟 번 정도 하고 나서야 그는 등을 돌렸다. ‘일찍 올게.’ 하며 서원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는 얼굴은 미련을 가득 담고 있었다. 서원이 보기에 그는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였고, 조금은 참을성이 없어 보였다.
그를 떠나보낸 뒤, 서원은 식탁에 앉아 영어 서적을 열었다. 서원은 샤프를 쥔 채 두툼한 책 위로 이마를 떨어트렸다. 쿵, 하는 소리가 났다. 여전히 몸 여기저기는 뻐근했고, 형이 키스마크를 남겼던 뒷덜미 부근은 아릿했다.
* * *
“안 해.”
시연우는 단호하게 잘라 말하면서 소파에 앉은 장혜수의 앞에 자몽 에이드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의 옆 소파에 앉아 몸을 기대었다.
“아니, 굳이 안 하는 이유가 뭐야? 나쁠 게 하나도 없는데. 잡지 인터뷰 아무나 하는 거 아니야. 게다가 우리 잡지사는 더. 이거 영광으로 알아야 되는 거야, 너.”
“싫어. 얼굴 팔리잖아.”
“이미 팔 대로 팔아 놓고서는. 그런 거 신경도 안 쓰면서?”
혜수는 코웃음을 치면서 팔짱을 꼈다. 그녀가 어떻게 말하든 연우는 할 말 끝났다는 태도로 다리를 꼬았다. 자신이 손수 냉장고에서 가져온 자몽 에이드를 턱으로 가리킨다.
“그거나 마시고 가. 커피 안 마시는 게 누나지?”
“됐네요, 인터뷰 안 할 거면 아무것도 안 마시렵니다.”
장난스러운 투정에 연우는 엷게 웃었다. 그녀는 “나 요즘 물도 안 마셔.” 하고 말을 덧붙였다. 이도 역시 장난 같기는 한데, 어느 정도 사실은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의아하다는 얼굴을 했다.
“관리해?”
“결혼식이 목전이라.”
“이상하네. 관리는 박진석이 더 시급해 보이는데. 걘 다이어트 안 한대?”
연우의 퍽 말이 마음에 든 모양인지 혜수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입에 밴 친절이라는 건 알았으나 놈이 하는 것들은 나름대로 나쁘지 않았다. 그녀가 웃는 동안, 연우는 소파 팔걸이에 팔을 올려 두면서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5년 내로 갤러리 준우가 맡을 거야. 내가 지금 그런 거 해 봤자라고. 그리고, 어차피 나 예술에 조예 없는 거 사람들 다 아는 판국에 굳이 인터뷰를 왜 해? 할 말도 없는데.”
“조예, 그거 뭐 별거 있어? 감각은 없다 쳐도 많이 알잖아. 너 온갖 예술지 줄줄이 꿰고 있는 거 다 알아. 진석이가 말해 줬어, 너 공부했다고.”
그녀는 준우가 갤러리를 맡을 것이라는 사실도 박진석을 통해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연인 사이니까, 다 말하겠지.’ 연우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싫어, 아무튼.”
“하여간 미워 죽겠어. 으유. 저 똥고집, 진짜.”
“웬일로 찾아와서는 일 얘기만 하고. 난 얼마나 상처받았을지는 생각 안 해?”
혜수는 또 한 번 웃었다. 손을 뻗어 연우의 머리를 흩뜨린다. 고등학생일 적부터 했던 스킨십이라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연우는 기꺼이 머리를 내어주면서 덩달아 웃었다. 검은 눈이 살갑게 휘었다.
가늘고 고운 손이 떨어져 나갔다. 동시에 혜수가 입을 열었다.
“……근데, 준우한테 갤러리 맡길 수 있겠어?”
“똑똑한 놈이니까 알아서 잘하겠지. 걔 과도 경영 쪽인데 뭐.”
연우는 대충 둘러댔으나, 사실 준우가 갤러리 일을 잘하든 말아먹든 제 알 바가 아니라는 것이 본심이었다. 자신이 대표로 있을 때는 그 소임을 해내면 되는 것뿐이고, 제 손으로부터 떨어지면 그때부터는 끝이었다.
하지만 혜수는 그와 의견이 영 다른 모양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씁, 하고 짧게 찝찝함을 삼켰다.
“내 사촌 동생이 준우랑 같은 하이스쿨 나왔잖아. 말 들어 봤는데, 준우…… 정신 차려야 돼.”
적당히 에둘러 말하고 있었으나, 그녀는 준우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이 큰 갤러리를 바로 맡기에는 부족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근거 없는 비난은 아니었다. 하나 혼내자면 끝도 없어서 모르는 척하고 있을 뿐이지, 제 뒤에서 준우가 얼마나 망나니처럼 날뛰고 다니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가. ……나도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정신 못 차렸는데, 뭐. 걔도 정신 차리겠지.”
연우는 공연히 아무것도 모르는 척, 천진한 투로 말했다. 준우의 비뚤어진 성격과 저를 향한 의존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 녀석이 자라면서 스스로 타개해야 할 것들이지, 제 테두리 안의 일은 아니라고 그는 다소 무심하게 생각했다.
“……그래. 뭐. 아무튼, 생각 바뀌면 말해.”
잠시 그를 빤히 바라보던 혜수가 별안간 벌떡 일어났다. 더 이상 용건 없다는 양 어깨를 으쓱거린다. 연우는 그녀를 따라 일어났다. “가게?” 가볍게 묻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식 날 보자.”
혜수는 문을 열다가 등을 돌려 말했다. “응.” 연우는 팔짱을 끼던 것을 풀고 건성으로 손을 흔들었다.
문이 닫혔다. 연우는 포장을 뜯지도 않은 자몽 에이드를 들어 다시 냉장고 안에 넣었다. 그때였다. 책상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이 진동음을 냈다. 느긋한 걸음이 빨라졌다. 책상 앞으로 다가온 그는 엄지로 익숙한 부분을 대고 밀면서 핸드폰을 귀에 댔다. 발신인은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업무용이 아닌 핸드폰으로 이 시간에 전화를 할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응, 서원아.”
수화기 너머는 조용했다. 잠시 대답을 기다리던 연우가 이윽고 다시 그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이었다.
「……형. 어디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강서원의 것은 아니었다. ‘아, 맞다. 먼저 문자한 적은 있어도 먼저 전화한 적은 없구나, 강서원이.’ 저로서는 별로 의미 없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연우는 뒤늦게 액정을 확인했다. 다시 핸드폰을 귀에 붙이는 얼굴은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왜 한국 번호로 뜨지? 너 한국이야? 9월에 온다며.”
「응. 한국. 어쩌다 보니 일찍 왔어.」
연우는 귀찮게 됐다는 듯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호텔이나 잡아 줘야겠다.’ 라고 생각하는 사이에 상대방은 「근데 형.」 하고 말을 붙여 왔다. 연우는 의자에 앉으면서 “왜.” 했다.
시준우는 조금의 간격을 두고 말했다.
「집에, 내가 모르는 사람이 있는데?」
조금은 냉랭한 목소리였다.
* * *
자신은 어릴 적부터 제 것에 대한 집착이 없었다.
늘 동생들에게 양보하는 입장이다 보니 그렇게 된 건지, 온전한 제 것을 가져 본 적이 별로 없었던 탓인지, 아니면 선천적으로 그런 성격인지는 모르겠다. 여하튼 저는 그랬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재원이 제 콘 치즈를 날름 먹었던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었다. 녀석은 욕심을 부린 게 아니라, 제 성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별로 화를 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증거로 저의 눈물에 녀석은 ‘형이 그렇게 먹고 싶어 하는지 몰랐어’라며 안절부절못했다. 심지어는 제 콘 치즈까지 내어주려고 했다. 전혀 의도한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저 늘 그랬으니까 그런 거다. 큰형은 늘, 동생들에게 뺏기는 사람이니까.
맞다. 자신은 늘 뺏기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서원은, 지금 눈앞에 닥친 이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
“근데 형, 집에 내가 모르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역할은 처음이었다.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전화를 하고 있는 사람. 그리고 어설픈 불청객처럼 손만 쥐락펴락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 꼭, 스스로가 타인의 영역을 빼앗아버린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곧이어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준우는 전화가 끊긴 핸드폰을 든 채 서원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형이 없는 집에 홀로 있는 남자. 앳된 얼굴. 반바지에 큼지막한 티셔츠는 후줄근함이 과해서 조금은 외설적으로까지 보이기까지 했다. 머리는 덜 말라 있다. 티셔츠가 채 가리지 못한 목 주변에는 키스마크가 있었다. 더하여, 반바지 밑단으로 아슬하게 가려진 윗허벅지에는 잇자국까지 있다.
“…….”
틈을 주려고 해도 빼도 박도 못할 상황과 모습이었다. ‘혐오스럽다.’ 준우는 곧바로 느껴지는 감정에 살짝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침묵이 이어진 끝에, 준우는 떨쳐내듯 시선을 떼고 거실 소파로 돌아가 앉았다. 서원은 엉거주춤 일어선 채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형의 집. 형의 동생. 자신의 존재. 대관절 침착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뭔가를 알아챈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의 동생에게 인사를 하는 것도 이상했고, 그렇다고 하던 공부를 계속하는 것도 이상했다. 서원은 딱딱하게 굳은 몸 그대로 침만 꼴깍 삼키다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저기,”
“토할 것 같으니까, 말 걸지 마세요.”
상처를 주려고 한다기보다는, 제 감정을 가감 없이 내비치고 있는 것 같았다.
일순 심장이 쿵쿵쿵쿵 세게 내장을 찧었다. 명치가 아플 정도로 방아질을 한다. 지금 자신은, 멸시받고 있다. 서원은 곧바로 알아챘다. 입이 꾹 다물렸다.
“저기요.”
한참 뒤에, 남자가 정작 자신이 못 견디겠다는 목소리로 서원을 불렀다. 서원이 고개를 들었다.
“……네?”
“연우 형도, 옮은 거예요? 그, 호모 같은 거.”
준우는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채로 말했다.
일순간 손가락이 부들 떨리는 게 느껴졌다. 서원은 떨림을 멈추기 위해 주먹을 쥐었다. 형과 자신의 연애가, 누군가에게는 혐오감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아예 안 하고 있는 건 아니었으나 이런 상황을 상상해 본 적은 없었다.
“…….”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기분이 나쁜 게 아니었다. 기분이 나쁘지 않은 스스로가 이상할 정도로, 오히려 제 감정은 아무렇지 않았다. 다만 제 앞에 서 있는 남자의 눈치가 보였다. 저 남자는 어쨌든, 저보다 형과 가까운 사이였다.
서원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준우는 핸드폰 액정을 두드리던 걸 멈추고 흘긋 먼발치에서 어중간하게 앉아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시발, 징그러워.’ 준우는 반사적으로 생각했다. 미국에서 게이를 많이 봤지만 그런 놈들과는 아예 상종을 하지 않았다. 많이 봤어서 더 구역질이 나는 걸 수도 있다.
준우는 잠시 혐오감을 삭히고는 입을 열었다.
“……우리 형, 원래 호모 아니에요, 아시죠?”
그는 서원을 설득하듯이 나지막하게, 그리고 꼭꼭 발음을 씹으며 말했다. 우리 형은 원래 그런 사람 아닙니다, 원래는 정상입니다, 라고 변호, 혹은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걸로 모자라다. 준우는 무엇을 서원에게 확신시켜 주고 싶었다. 기어이 그는 핸드폰을 옆에 내려놓고는 더 뚜렷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여자 잘 사귀어요. 되게 오래 사귄 여자친구도 있었고요, 아니, 여자친구 많았어요. 되게 정상이었는데.”
“……저도, 처음부터 게이는 아니었습니다.”
가만히 그의 말을 듣던 서원이 말했다. 왜 그런 변명을 자처해서 하고 있는지 저도 몰랐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호모병’을 옮겼다는 그의 오해를 풀고 싶었다. 지금 저에게는 그 말이 무례하다는 것보다 그게 더 중요했다. 그러나 그런 서원의 노력은 통하지 않은 듯했다. 준우의 얼굴이 콱 구겨졌다.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는 눈을 한다.
“그래요? 여자한테 선다고? 그럼 왜 남자랑 사귀어요, 굳이? ……혹시, 돈 때문인가?”
그때였다. 불현듯 현관문에서 전자음이 들렸다. 준우가 불만스레 떠벌리던 입을 다물었다.
문이 열렸다. 급하게 왔는지 연우의 머리는 바람을 잔뜩 맞은 것처럼 엉켜 있었다.
“형.”
준우는 벌떡 일어나 연우에게로 다가갔고, 서원은 다가가지 못했다. 연우는 멀리에 앉아 있는 서원을 확인한 뒤, 준우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준우의 손 부근이었다.
“너 짐은?”
캐리어가 어디 있는지 살피던 눈이 올라 준우에게 물었다. 준우는 “어? 내 방에.” 했다.
이 집에는 딱히 준우의 방이랄 게 없었다. 비어 있는 방 중 어딘가에 넣어 둔 모양이었다. 연우는 담백하리만치 깔끔하게 등을 돌려 다시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다시 챙겨서 나와. 호텔 데려다줄게.”
“호텔? 왜?”
“그럼 길바닥에서 자게?”
“뭐야. 내가 한국 오면 형 집에서 지낼 거라고 했잖아.”
“그건 네가 9월에 올 때의 얘기지. 지금은 아니야.”
“…….”
구두를 신으면서 무심한 어조로 말하던 연우가 고개를 돌려 준우를 바라보았다.
“뭐 해? 빨리 챙겨서 나와. 나 일하던 중에 나온 거야.”
그는 재촉하듯 손목시계를 톡톡 두드렸다. 저런 태도는 오래 겪어 봐서 안다. 절대 굽히지 않을 것이다. 준우는 홱 거칠게 등을 돌려 2층으로 올라갔다.
준우가 방으로 들어가 짐을 챙기는 사이, 연우는 신발장 끝에 바짝 서서 작은 목소리로 서원을 불렀다. 깨작깨작 종이에 연필을 긁던 서원이 고개를 휙 들고서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주춤주춤 그에게 다가갔다.
“쟤랑 인사했어?”
연우는 속닥거리면서 서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서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에 사는 내 동생이야. 한국에 온다고 하긴 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올지 몰랐어. 저번에 전화할 때는 9월에 온다고 했었거든. ……많이 놀랐지. 미안해.”
“아니에요. ……형, 저 지금 짐 쌀까요?”
서원은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두 형제의 대화를 듣는 내내 그 말을 하고 싶었다. 끼어들 타이밍을 재지 못해서 안절부절못했을 뿐이었다.
연우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가락이 슥, 귓바퀴를 훑었다. 서원의 목이 살짝 움츠러들었다.
“여기 있어.”
그는 서원을 일직선으로 바라보면서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제 동생에게 짐 챙겨서 나오라고 했던 것과 비슷한 목소리였다.
“…….”
“……이따가, 밤에 형 오면 지문 데이터 다 지워버리자. 비밀번호도 다시 설정하고. 아무도 함부로 여기 못 들어오게, 알았지?”
이내 부드럽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서원을 달랬다. 마치 재미있는 놀이를 예고하는 것처럼 느물거렸다.
서원이 삐걱거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연우의 손이 톡톡, 흰 뺨을 두드리곤 떨어져 나갔다. 곧이어 2층에서 누군가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서원은 황급히 식탁으로 되돌아갔다.
* * *
식탁에 망연히 앉아 있던 서원은 도어락 소리가 나자마자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달려갔다. 연우는 현관 앞에 서 있는 서원을 보고 엷게 웃으면서 “기다렸어?” 했다. 못내 평온한 태도였다.
“……동생 분은요?”
“아까 낮에 호텔에 내려 줬지.”
왜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듯한 목소리였다.
서원은 거실을 가로지르는 연우를 졸졸 따랐다. 연우는 식탁 위에 펼쳐진 영어 서적을 흘긋 보고는 “아직까지 공부하고 있었어?” 했다. 서원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리 와. 같이 씻자.”
연우는 가죽 시계를 풀어 내려놓고 서원에게 말했다. 서원이 다가가자 그의 티셔츠 밑단을 잡는다. 서원은 제 옷을 벗기는 손길에 맞춰 몸을 움직이면서도 고민하는 얼굴을 했다.
마침내 몸을 씻고, 같이 침대에 들어갈 때가 되어서야 서원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동생 분이, 형한테 뭐라고 안 했어요?”
이 걱정 하나 때문에 그가 돌아올 때까지,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손에 무엇도 잡히지가 않았다. 영어 서적이 이 늦은 시간까지 식탁 위에 펼쳐진 채로 놓여 있던 것도 그 이유였다.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제가 뭘 잘못한 건 아니었다. 연우 형을 억지로 붙잡아 두었다거나 협박을 하지도 않았고, 형과 저의 관계는 일방향이 아니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그런데도, 도둑질을 하다 걸린 사람처럼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형의 동생이 알아버렸다. 그런데, 반응은 최악이었다. 형이 게이라서 충격을 받은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동성애 자체를 부정하는 부류였다. 저에게 말했던 것처럼 형에게 왜 굳이 남자를 사귀느냐며 사랑을 병처럼 진단할 수도 있었다. 형은 그것에 충격을 받을 수도 있었고, 정말로 환상에서 깨어날 수도 있었다. 저에게 끌렸던 게 착각이었다고 생각하고는 집으로 돌아와서 이성적인 얼굴로 제게 갑자기 헤어짐을 고할 수도 있다.
다소 비약적인 그 생각은 서원이 집에 혼자 있는 내내 그의 머릿속을 엄습했고, 구체적인 상상이 되어 눈앞을 어지럽혔다.
“누구? 시준우가?”
서원을 뒤에서 안고 있던 연우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갈비뼈를 매만지던 손가락이 멈추었다. ‘막내는 준호, 둘째는 준우구나.’ 서원은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침을 꼴깍 삼킨다.
“……네.”
“아니? 아무 말도 안 했어. 집에 안 재워 준다고 삐지기는 하더라.”
서원은 우물쭈물 고민하다가 작게 말을 꺼냈다.
“……형이랑 제 관계는…….”
픽 웃는 소리가 귀 너머로 들려왔다.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어.”
“…….”
“근데 상관없잖아. 걔가 어떻게 생각하든 뭐가 중요해.”
덧붙이는 목소리는 역시나 문제 될 것은 하나도 없다는 듯했다.
문득, 서원은 괴리감을 느꼈다. 파리하게 말라 갔던 제 불안감과는 전혀 다른, 샛노랗고 활기찬 여유로움. 그 가벼움의 출처가 궁금해진다.
그게 상관이 없다고? 어떻게 상관이 없지?
무거운 돌덩이처럼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의문 덩어리가 쿵, 내려앉는다. 출처를 찾지 못한 그 이유는 좋지 않은 추측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형 동생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왜 안 중요해?
뻗어나간 줄기는 순식간에 허탈함을 주렁주렁 매달았다. 그와 자신의 무게는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 그 사실에 줄곧 조여져 있던 긴장감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 틈새로 새까만 실망감이 투둑투둑 떨어졌다. 그것은 물감처럼 원형으로 번져 서원의 마음을 물들였다.
어떻게 형은 그게 안 중요해요?
텁텁하고, 섭섭하고, 서운하고, 공연히 형에게 화를 내곤 했던 그 터무니없는 감정과 행동의 원동력.
그것은, 원망이었다.
“…….”
원망?
내가 형을 원망한다고?
흠칫, 별안간 서원의 몸이 굳었다. 서원은 수면등만이 은은하게 밝히고 있는 방의 공기를 바라보면서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몹시 당황스러웠다. 내가, 형을 원망하고 있었다니. 이러려던 게 아닌데. 이러려고 괜한 고집을 부리면서까지 형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 했던 게 아닌데, 이러려고 외로움을 참았던 게 아닌데.
이상하다. 이게, 아닌데.
“……서원아?”
“…….”
“자?”
멍청한 짓을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내려쳤다.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도, 서원은 공연히 자는 척을 했다. 몸을 약하게 움츠리자 뜨거운 팔이 따라붙었다.
고민해야 한다.
서원은 생각하면서 제 몸에 붙은 팔 위에 손을 얹었다.
* * *
아침에 일어나면 대부분 제 발로 걸어가기보다는 그의 품에 안겨 욕실까지 이동했다. 오늘도 역시 그랬고, 서원은 욕실까지 가는 내내 남자의 뺨에 쪽쪽, 연달아 키스했다. 연우는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귀엽냐며 웃었다.
나란히 서서 양치를 한 뒤에는 또 그의 품에 안겨 건식 욕실 한편에 놓인 서랍장에 올라갔다. 서원을 서랍장 위에 올린 남자는 대롱거리는 다리 사이에 서서 살짝 허리를 굽힌 채로 얌전히 서원이 해주는 면도를 받곤 했다. 이 또한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갤러리 출근하지 말고 서원이 알바 따라갈까?”
연우는 면도에 열중하는 서원을 지긋이 쳐다보다가 문득 말했다. 그의 턱 부근을 바라보던 동그란 눈동자가 올라갔다. 두 눈이 마주했다.
“……왜요?”
“오늘 맥주 알바, 골프 대회에서 하는 거라며. 나도 참관객으로 가면 되지. 친구랑 가면 돼. 형 친구 골프 좋아해.”
그가 자신이 일하는 모습을 보면 안 된다. 서원은 자신이 했던 거짓말을 떠올리면서 황급히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최대한 태연한 얼굴을 하고 말하자 서원의 몸을 사이에 두고 있던 손이 슬금슬금 몸을 타고 올라 허리를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서원을 파헤치는 것처럼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왜? 형 가는 거 싫어?” 했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그럼, 끝나고 또 민규랑 술 마시려고.”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허리를 살짝씩 매만지던 손이 과감해진다.
“아니에요. 형 위험해요. 허리는, 이따가…….”
서원이 허리를 살짝 비틀며 그가 다칠세라 황급히 팔을 뻗어 면도기를 멀리 떼어냈다. 남자가 다시 손을 내려 서랍장 모서리를 잡자 그제야 면도기를 그의 턱에 댄다.
“그게 아니라…… 형 피곤할까 봐 그래요.”
변명이 이어졌다. 서걱거리는 소리가 잔잔하게 욕실 안을 울렸다. 서원은 조심히 그의 턱을 면도해 주면서 조곤조곤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토요일에 결혼식 끝나면요.”
“응.”
“그날 경찬이 휴가예요. 그리고 민규도 그날 시간 된대서… 셋이 저녁에 만나려고요.”
“안 된다고 하면 너무 유치해?”
연우는 그렇게 말하면서 면도기를 쥔 쪽의 손목을 살짝 옆으로 치웠다. 그리고 서원의 입에 뽀뽀했다. 얼굴을 떼어내자 쉐이빙 크림이 서원의 턱에 옮겨 묻었다. 연우는 반사적으로 크림빵을 떠올렸다. 왜 강서원만 보면 그런 류가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군침이 돌아서 그런가.’ 그는 생각하면서 약하게 웃었다. 동시에 재차 묻는다.
“응? 유치해?”
“…….”
그래. 이거다.
어젯밤에 했던 생각의 연장선이었다. 자신도 형처럼 연애해야 한다. 자신은 여태껏 잘못하고 있었다. 서원은 반성하듯 생각했다.
이유야 어떻든, 섭섭함을 숨긴다고 아예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혼자 삭히는 감정은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 결국 곪아 어떤 모양으로든 상대방을 향해 터져버리고 만다. 자신이 여태껏 그랬다. 형에게 미움받기 싫다는 이유로 자꾸 마음을 숨겼고, 그래서 저도 모르게 형을 원망하고 있었다.
연애를 해 본 적이 없어서, 형처럼 적당량을 잘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조금 삐걱대는 한이 있더라도 변하는 노력을 해야 했다.
혼자만의 방식에 갇혀 있으면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는다. 그것이, 서원이 어젯밤 내내 하던 고민의 결과였다.
“……형, 있잖아요.”
“응?”
면도를 마치자마자 서원은 면도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퍽 비장한 얼굴로 반질반질해진 그의 턱을 슬쩍 매만지면서 말했다. 긴장이 시작됨을 알리는 것처럼 예민한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다.
“……서로 소원 세 가지 들어주기, 해요.”
“소원 세 가지?”
연우에게는 느닷없는 말이었다. 그것이 자못 엉뚱하게 들렸는지 그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서늘한 손이 끈질기게 올라와 허리를 매만진다. “갑자기 왜?” 하고 빙글거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그러나 서원에게는 갑작스러운 게 아니었다. 형에게 어떻게 제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까, 너무 어리광부리지 않고, 아슬아슬한 모래성도 다 쏟아버리지 않고, 형이 부담스러워하지 않을, 그런 가장 좋은 방법이 뭘까, 하며 그 나름대로 밤새 머리를 굴리고 굴려 고안한 것이었다. 그 증거로 서원은 웃지 않았다. 진지한 얼굴 그대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냥요.”
“……뭐, 그래, 그럼. 나 먼저 해도 돼?”
고민 없이 시원하게 떨어지는 대답과 질문에 서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는 서원의 티셔츠 안을 거침없이 매만지고, 아프지 않게 꼬집으면서 “음.” 하고 고민하는 시늉을 했다. 커다란 손이 흰 티셔츠 안을 서슴없이 돌아다녔으나 서원은 꿈쩍을 않고 그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왜 저렇게 진지해. 귀엽게.’ 연우는 생각하면서 입을 떼었다.
“외박하지 않기. 술 많이 마시지 않기. 그리고 하나는… 보류.”
“보류요?”
“응. 나중에 말해 줄게.”
연우는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인 카페를 떠올리면서 대답했다. 대략적인 준비만 끝나면 서원에게 아르바이트를 부탁할 요량이었는데, 안 그래도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그는 서원이 고집을 부린다면 훗날 오늘의 대화를 들먹이기로 했다.
“너는?”
연우는 손가락 끝으로 살짝 서원의 겨드랑이를 건드리며 말했다. 그 장난기 어린 손길에도 서원은 긴장이 역력한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지.’ 그는 생각하며 그 대단한 소원을 기다렸다.
한참 후, 도톰한 입술이 서서히 떨어졌다. 입술 끝이 긴장으로 파들파들 떨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
“나랑 헤어질 생각하지 말기.”
한 번 톡, 터진 마음은 주체할 새도 없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나 버리지 말기. 지겨워하지 말기.”
“하하하.”
으레 짓는 그 웃음이 아니었다. 서원의 말이 끝나자마자, 연우는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시원하게 벌어진 입이 경쾌한 웃음소리를 연신 쏟아냈다. 서원은 웃느라 제게서 조금 멀어진 몸을 쥐고 슬쩍 다시 제 다리 사이로 끌어당겼다.
“셋 다 똑같은 거 아니야?”
간신히 웃음을 그쳤으나 묻는 목소리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가득했다. 서원은 고집스러운 얼굴로 “그냥, 그거면 돼요.” 하고 중얼거렸다.
“진짜 그거면 돼?”
“……네. 약속해요. 서로 말한 거 지키기로.”
서원이 약속을 걸듯 손을 내밀었으나 남자는 그에 대고 손가락을 깨무는 장난을 쳤다. 약지가 아프지 않게 깨물린다. 서원이 살짝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괜스레 조바심이 난다.
“장난치지 말고…….”
“맛있어 보여서 깨물어 본 건데.”
서원이 깨물린 손으로 남자의 뺨을 조심스럽게 밀었다. 힘이 약해서 문지르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형은, 왜 맨날 장난만 쳐요…….”
“알았어, 알았어.”
남자는 서원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는 손가락을 걸었다. 그리고는 또 한참을 웃었다.
‘성공이다.’
서원은 생각했다. 다 괜찮았다. 장난치지 말라며 형에게 정색한 것도, 제 제안도, 제 소원도. 형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서원은 그가 웃는 동안 제 긴장을 다스리면서 생각했다. 한숨 놓았다. 다행이다.
이윽고 웃음을 가까스로 멈춘 남자는 여전히 유쾌해 보이는 표정 그대로 서원의 허리를 꽉 붙들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 곳곳에 쏟아붓듯 키스를 했다. 코끝을 맞댄 채로 서원을 바라본다. 서원의 얼굴 위로 짙게 그림자가 드리웠다.
“서원아.”
그는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터질 듯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고개를 끄덕인다.
“형이 장난치는 거 싫어? 하지 말까?”
“그런 거 아니…….”
갑자기 목이 메서 서원은 말하다 말고 침을 삼켰다. 연우는 달콤함을 머금은 눈으로 쪽, 다시 한번 턱을 밀어 서원의 입술에 소리 나게 키스했다.
“서원아.”
“네.”
“……준우가, 너한테 뭐라고 했어?”
평소처럼 굴지 않는 게 이가 바득바득 갈릴 정도로 귀엽긴 했다. 그러나 강서원이 갑자기 이런 짓을 하는 건 분명 이유가 있을 거다. 연우는 확신하면서 살살 구슬리듯 서원의 머리를 쓸어 넘겨 주었다.
“…….”
“응?”
그의 동생이 제게 모욕을 주었던 건, 순간적으로 화가 나기는 했지만 그다지 마음에 담아 두지는 않았다. 서원은 잠시 망설이다가 “아니요.” 했다.
“……거짓말을 하네?”
목소리가 조금 서늘해졌다. 서원은 추궁에서 도망치듯이 남자의 목을 끌어당기고 열심히 입술을 빨았다.
연우는 미동 없이 가만히 서원을 내려다보았다. ‘요즘 진짜 이상하네.’ 그는 생각했으나, 곧 그의 주의를 무너뜨리려는 것처럼 서원이 매달려 왔다. 가느다란 팔이 목을 꼭 안는다. 진짜 기묘할 정도로 군침 도는 향기가 금세 코끝에 맴돈다.
연우는 결국 항복했다는 듯 눈을 감으며 서원의 입술을 한 번에 머금었다. 수상한 건 나중에 파헤치면 될 일이다. 그는 생각했다.
“응…….”
두 입이 마주한 채로 벌어졌다. 혀가 진하게 섞인다. 서원이 다리를 그의 허리에 감았다. 응답하듯 몸을 번쩍 안아 드는 힘이 느껴졌다.
키스는 길게 이어졌다. 느리고 깊숙이 제 안을 헤집는 혀를 정성껏 받아들이던 서원은 이내 엉덩이에 닿는 그 욕망 어린 감촉을 느꼈다. 그것이, 오늘따라 기분 좋았다. 추웁. 서원은 혀를 빨면서 그것에 슬쩍 제 엉덩이를 비볐다.
곧바로 입술이 떨어졌다. 조금 놀란 얼굴이 서원을 쳐다보았으나, 서원은 모르는 척 그를 바라보면서 그의 입술을 할짝 핥았다.
“……왜 이러는데.”
“…….”
“왜 이렇게 야하게 굴어.”
그가 약하게 인상을 찌푸리다가, 위협하는 것처럼 거칠게 말했다. 힘이 잔뜩 들어간 손이 엉덩이를 터뜨릴 듯 쥐었다. 저음의 목소리가 뜨겁게 들끓는다.
급기야 이상한 포만감이 들었다. 풍선처럼 무엇인가가 뱃속에서 부푸는 느낌이었다. 고양된 기분이 선천적인 소심함을 미치도록 들쑤셨다. 서원은 과부하가 걸린 기계처럼 핑 도는 감각을 느끼면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더 느끼고 싶었다. 제게로 향하는 욕망을, 한껏 즐기고 싶었다. 형을 휘두르고 싶었다.
내가 형에게 휘둘리는 것만큼, 형도 나에게.
“……형 거,”
“…….”
서원은 차오르는 숨을 헐떡이면서 말했다. 동그란 눈이 젖은 채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안에 넣고 싶어요.”
고작 아홉 음절의 말. 단지 그 하나에 무너지는 이성도, 강해지는 손의 힘도, 벗기는 손길도, 다, 너무 좋았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서원은 팔딱거리는 제 심장을 느꼈다. 너무 빠르고 거세게 뛰어서 무서울 정도였다. 과부하에 걸리다 못해 펑, 소리를 내며 터질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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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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