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Just another
점심시간이었다. 갤러리 1층에 자리한 카페에 직원 여러 명이 옹기종기 모여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카페 옆을 지나가던 사람들을 무심한 눈으로 훑어보던 배지연이 문득 자리에서 일어섰다. 심심한 농담 따먹기를 하던 나머지 직원들이 배지연을 올려다보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그녀를 따라 일어선다.
그 무리를 발견한 연우 또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는 저를 향해 인사하는 직원들을 향해 마주 인사했다. 곧이어 미련 없이 카페를 지나친 그가 직원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 돌아온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저도 3분 정도 있다 갈까 하고요. 요즘 외로워서 나도 막 이런 데 끼고 싶네요.”
그는 능청스럽게 말하면서 끝자리에 앉았다. 잠시 당황하는 얼굴을 하던 직원들은 곧 침착하게 하고 있던 이야기를 이어 나가려고 애썼다. 서로 눈짓을 하다가 먼저 넉살 좋은 성격인 신대성이 배지연에게 말했다.
“아…… 그, 그래서요? 소개해 주겠다고?”
배지연은 이런 데 끼고 싶다고 할 땐 언제고, 당신네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든 관심 없다는 태도로 다리를 꼬고 앉아 제 손톱이나 물끄러미 구경하고 있는 대표를 흘긋 확인하고는 이내 신대성을 바라보았다.
“네. 그러고 싶어요. 어디까지나 서원이가 괜찮다고 할 때의 얘기긴 하지만요. 근데 아직 그런 거 운도 안 떼 봤어요.”
“어우, 근데 서원이 여자친구 있을 것 같지 않아? 잘생기고, 애가 성격도 의젓하고, 늠름하고, 과묵하고, 좋은 대학 다니고…… 빠지는 데가 없잖아. 누가 가만두겠어?”
배지연의 옆에 있던 여자가 과장되게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그건 그래요. 저번 주에 아팠을 때도 다 죽어가는데 얼마나 침착한지. 진짜 요즘 남자애들 같지가 않아요. 성숙하고 책임감도 강하고…… 외모도 외모인데, 성격이 진짜 진국이에요. ……음, 갑자기 이렇게 말하니까 서원이가 아깝기는 하네, 우리 동생한테.”
배지연은 머쓱하게 웃으며 제 긴 머리를 꼬았다.
“아니 왜, 지연 씨 동생도 예쁘고 착해 보이던데요. 그리고 또 몰라요. 원래 그렇게 잘생긴 애들이 은근히 인기 없어요. 나 봐봐요. 인기 없잖아요.”
신대성이 깝죽거리자 주변에 있던 직원들이 웃음을 터뜨리면서 야유를 보냈다. 그동안 대화를 듣는 둥 마는 둥 등을 의자에 묻은 채 제 손톱만 뚫어져라 보고 있던 연우가 불현듯 벌떡 일어섰다. 얼굴에는 희미하고 신사적인 웃음이 떠오른 채였다.
“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 다음에 커피 마실 때는 저 먼저 불러 주세요. 제가 커피 살게요.”
그는 저보고 인사하는 직원들에게 형식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등을 돌려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카페에 남겨진 직원들의 머릿속에는 대표의 느닷없는 기행에 대한 의문이 남겨졌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는 이는 없었다. 본디 누구에게나 상사는 이상한 존재였고, 그를 이해하고자 시도하는 사람은 드문 까닭이었다.
그들은 그저 조용히 남은 음료를 처리하곤 다시 제각각의 일터로 떠나갔다.
* * *
엘리베이터를 탄 시연우는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누군가가 강서원의 이름을 흘린 것 같아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되돌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하마터면 재밌는 이야기를 놓칠 뻔했다.
강서원을 제 동생에게 소개해 주고 싶다던 직원은 제가 알기로 이번 기획전 때 인력들을 총괄하고 있었다. 시간대 다 합쳐서 일시적으로 고용한 아르바이트가 서른 명이 넘고, 그중 남자가 반, 혹은 반 이상일 텐데 그 여러 명 중 강서원을 콕 집었다는 게 나름대로 이해가 가면서도 웃겼다. 그거야말로 허공에 삽질하는 꼴이 아닌가 싶어서였다.
꽉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연우는 조금 서두르는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왔다. 집무실 문을 여니 둥그런 뒤통수가 보였다. 저를 기다리고 있는 강서원이었다. 그는 아예 누워 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늘 그랬던 것처럼 빳빳이 서 있지도 않았다. 긴장이 조금 풀린 것처럼 비스듬히 등을 기댄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연우는 발걸음 소리를 죽여 소파 앞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서원의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한참 동안 자는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별안간 그는 향기를 맡고 싶다는 이상한 충동에 휩싸였다.
연우는 망설이지 않고 일어서서 소파 등받이에 손을 대고 한쪽 무릎을 소파에 댔다. 무게가 기울자 가죽이 조여드는 소리가 났다. 그 탓인지, 아니면 감은 눈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 탓인지 비로소 감긴 눈이 뜨였다. 잠에서 덜 깨서 멍한 눈이었다. 그 눈이 한 번 깜빡이는 사이, 연우의 코가 서원의 뺨과 귀 언저리에 닿았다.
“……형?”
갑작스러울 터인데도 서원은 피하지 않고 그를 부르기만 했다. 저에게만 들려줄 것 같은 얌전하고, 또 어리숙한 그 목소리에 연우는 알 수 없는 포만감을 느꼈다. 그는 입꼬리만 끌어 올리면서 보송하고 흰 살갗에 코를 바싹 대었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신다. 예상대로 좋은 향기가 났다.
“여기, 깨물어도 돼?”
연우는 제가 향기를 맡았던 살에 살짝, 서원을 애태울 정도로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귀와 가까운 곳에서 말을 한 탓인지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불을 간질이는 것만 같았다. 서원은 움찔 어깨를 움츠렸다.
“…….”
서원은 아무 말도 없이, 하지만 아주 많은 말들이 함축된 눈으로 연우를 올려다보았다. 눈은 허락했지만,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짐작했던 반응이었다. 저번 주 일요일, 휴식실에서의 강서원도 이랬으니까.
대강 알고는 있었지만, 강서원은 예상보다 더 어린아이 같았다. 겁이 많고, 숨을 줄밖에 모르는 어린아이. 키스를 한 뒤에도 역시 그랬다. 녀석은 불안해하면서 눈알을 굴렸고, 저는 결국 녀석을 끌어안은 채로, 또 그 와중에 못된 놈처럼 그 보드라운 살을 살살 매만지면서 차근차근 앞으로 어떻게 할지 알려주었다. 마치, 징검다리를 건너는 아이에게 한 발 한 발 어느 돌에 발을 내디뎌야 하는지 알려주는 것처럼.
‘상처받는 게 무서우면, 상처받지 않을 만큼의 관계로만 있으면 되잖아.’
‘내가 싫어지면, 언제든지 그만둬도 돼. 네가 싫다고 하면 바로 안 할게.’
‘그 전에 내가 먼저 식으면 어떡하냐고? 음…….’
‘내가 눈이 계속 달려 있는 이상, 너랑 부대끼는 게 싫어질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응. 맞아. 사귀는 거 아니야.’
서로, 원하는 만큼만 취하는 관계인 거야.
기어이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야 서원은 안심하는 얼굴로 가만히 그의 품에 안겨 있기를 택했다. 그 얌전한 얼굴이 예뻐서 연우는 다시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그리고 서원을 집에 데려다주었다. 병원은 괜찮다고 하는 얼굴이 훨씬 편안해 보였다.
‘사실 그냥, 적당히 즐기자는 말이었는데.’
그걸 듣고 안심하다니. 웃긴데 어이없네.
연우는 서원의 얼굴을 가만히 구경하면서 생각했다. 그리고 결심한 듯 털썩, 그의 옆에 앉았다. 제 허벅지를 툭툭 치며 “이리 와.” 한다. 무릎 위로 올라오라는 소리였으나 서원은 그러지 못하고 상체를 그의 쪽으로 깊숙이 기울였다. 이번엔 남자의 얼굴 위에 서원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
서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살짝 비켜 조금 전 남자가 입을 맞췄던 뺨 언저리를 남자의 입 앞에 갖다 대었다. 남자는 소리 내어 웃으며 서원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아프지 않게 깨무는 시늉만 하고는 곧바로 뺨 한쪽을 밀어 정면으로 저를 바라보게 한다.
순수한 눈이 저를 응시하고 있다. ‘……이게 의젓하고, 늠름하다고?’ 연우는 생각하다가 곧이어 또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이런 눈을 못 봤을 테니까.
그는 눈을 마주하며 서서히 입술을 맞대었다. 그 속도는 먹이를 독점한 탓에 아직 배가 고프지 않은 동물의 것처럼 여유롭고 느긋했다.
* * *
“나 요즘 친해진 형 있어.”
경찬과 통화를 하다가 그 말을 하게 된 건 필수불가결적이었다.
어제는 뭐 했다, 그저께는 어디서 뭐를 먹었다, 그끄저께는 이래서 전화를 못 받았다, 등의 말을 하다 보니 꺼낼 수밖에 없는 주제였다. 대체 요즘 왜 이리 바쁘냐는 경찬의 말에 기어이 서원은 그렇게 대답했다.
「친해진 형?」
곧이어 흥미로워하는 목소리가 돌아왔다. 서원은 큼,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그에 대해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말은 길었지만 내용은 간단했다. 몇 개월 전 시작한다고 말했던 그 부잣집 과외. 그 과외 학생의 친형. 그 고용주. 어쩌다가 친해진. 그리고 결국은, 친구.
친구.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게 지금 그와 저의 관계에서 가장 가까운 이름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키스와 스킨십을 한다고 그와 제가 사귀는 건 아니었으니까.
「…….」
말을 마치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대충 그러냐면서 납득할 줄 알았던 것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왜 그러지.’ 의아할 찰나였다. 경찬이 말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왜 갑자기 친구가 된 거야?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관심사도 겹치는 게 없는데. 아, 혹시 그 형 게임 해?」
아. 그제야 서원은 경찬의 침묵을 이해했다. 키스를 한다는 등의 말들은 당연히, 일부러 배제하고 말했는데, 그게 경찬으로서는 당위성이 느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녀석이 걸렸던 부분은 ‘어쩌다가 친해진’이었다. 서원은 “아니, 그건 아닌데. 그냥 친해졌어.” 하고, 사실을 얼버무리는 그 말을 태연스레 뱉어냈다. 어차피 중요한 부분도 아니니 녀석이 금방 넘어갈 거라 예상한 까닭이었다.
「…….」
“여보세요? 왜 그래?”
「아니야. 뭐, 그렇구나.」
그리고 제 예상은 정확히 맞았다. 경찬은 금방 납득하는 듯했다. 역시나 중요한 부분이 아닌 모양이었다. 서원이 작게 안심하는 사이, 경찬은 조금 특이한 타이밍으로 다른 말을 꺼내었다.
「…강서원. 나 다음 주에 또 나가는 거 알지.」
“어? 어. 근데 가족들이랑 제주도 간다며.”
「어. 가기 전날 시간 좀 있으니까 그때 볼래?」
“굳이? 너 휴가 저번에도 나와서 봤잖아. 그냥 쉬어.”
「아니야. 어차피 제주도 쉬러 가는 건데 뭐. ……그 형도 나오라 하면 안 돼?.」
“그 형?”
「어. 너랑 친해졌다는 형. 나도 돈 많은 형이랑 친해지고 싶어. 소개해 줘. 밥만 같이 먹자.」
김경찬이 그런 것에 연연했던가. 서원은 의아했지만 뭐 경찬이라면 기분이 나쁜 것도 아니었다. 집에만 있기에는 못내 아쉬운 모양인가 보다 싶었다. 저로서도 조심할 부분만 조심하면 되었다. 어려울 건 없었다.
“아……. 알았어. 말해 볼게.”
그래서 서원은 더한 의문 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이내 경찬은 다음에 전화하겠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끊기 전 목소리가 친해지고 싶다는 녀석치고는 조금 가라앉아 있었지만 딱히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 서원은 전화를 끊은 뒤 폭, 이불 위에 머리를 뉘었다. 편안했다.
* * *
토요일, 과외가 끝난 뒤에 서원을 데려다주던 길이었다. 연우는 카페 드라이브 스루를 통과한 뒤, 한강 둔치에 차를 세웠다.
“시준호, 오늘 진상 떨었지?”
서원은 연우에게 받은 레몬에이드를 가만히 마시면서 한강의 야경을 구경하다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레몬에이드를 컵홀더에 넣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문밖으로 들렸어요?” 묻자 연우는 그렇다고 대답하며 서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약 빤 원숭이처럼 소리 지르던데. 안 놀랐어?”
비유가 웃긴지, 혹은 저를 과보호하는 듯한 질문이 웃긴지, 서원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고개를 가로젓는다. 저 또한 쓸데없는 걱정인 줄 알면서도 공연히 했던 질문인지라 연우는 서원의 반응을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동생이 둘이나 있어서인지, 서원은 소심한 성격과는 다르게 제 동생뻘 되는 아이들에게는 여유로운 태도를 잃지 않았고, 꽤나 대범했다.
준호와 관련한 말을 할 때만 나오는 미소는 여유로우면서도 색달랐다. 연우는 서원의 얼굴을 구경하듯 빤히 바라보았다. 정수리 위에 머물러 있던 손이 슬슬 뒤로 내려가 목 뒤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벌은 주려고.”
“준호요?”
아래로 깔려 있던 눈이 올라 연우를 바라보았다. 준호의 난리를 영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모양이었다. 올려다보는 눈이 의아한 듯 크게 뜨여있다.
“응. 선생님한테 그러면 안 되잖아.”
“여자친구한테 차여서 그렇다던데…….”
그냥 봐주라는 소린가. 연우는 짐작하면서 목 뒤를 쓰다듬던 손을 옮겨 서원의 눈가와 뺨을 연신 매만졌다. 강서원의 눈꼬리는 유독 짙고 길게 파여 있었고, 뺨은 붉었다. ‘진짜 예쁘게 생겼다.’ 그는 생각하며 제 손길이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덩달아 오르는 체온을 세밀하게 느꼈다.
“……안 돼. 못 봐줘.”
입 맞추고 싶다는 충동이 든다. 연우는 조수석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며 서원의 눈가에 키스했다. 그리고 짐짓 단호하고 짓궂은 목소리로 말했다. 체온이 더 높아진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흰 뺨에 제 뺨을 살살, 느린 속도로 비볐다. 연우는 서원의 흰 살갗이 따끈따끈하고 말랑한 호빵 같다고 생각했다.
진짜 맛있는 냄새까지 나는 것 같은데……. 음. 이건 당연히 변태 같은 착각이겠고. 연우는 자조적이고 객관적으로 생각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서원의 귀에 입술을 대고 유혹적으로 속닥거렸다.
“일요일에 단둘이 있으려면, 그 핑계로 딴 데 보내버려야지.”
움찔. 서원은 말없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서 두 눈이 마주쳤다.
“…….”
“…….”
숨소리. 장난기로 일렁거리면서도 저돌적인 눈. 심장이 쿵쾅거리는 게 감당할 수가 없을 정도여서, 서원은 짐짓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몰랐던 습관이었다. 부끄러움이나 설렘을 참지 못하면, 이렇게 눈썹을 찌푸리고, 입에 힘을 꾹 주고, 원망하듯이 그를 쳐다보아야 조금이나마 견딜 수 있었다. 왜 이런 이상한 습관이 생겼는지 스스로도 모르겠는데, 막상 남자는 꼭 그 이유를 아는 것처럼 제가 이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흡족하다는 눈을 하면서 더 세게 제 허리를 끌어안고는 했다.
“아……!”
“미안, 아파?”
연우는 그대로 서원의 허리를 번쩍 들어 제 허벅지 위로 올렸다. 도중에 정강이가 기어에 부딪혔는지 서원이 짧게 신음을 내뱉었다. 연우가 당황하며 서원의 다리를 살피기 위해 고개를 비틀었다. 그때, 서원이 연우의 양 뺨을 감싸고 그대로 고개를 숙여 키스했다.
“으읏, 음……. 하아…….”
차 안은 두 혀가 서로를 정신없이 탐하는 소리로 가득 찼다. 처음 키스를 한 뒤로 매일 빠짐없이, 여러 번 키스를 하다 보니 강서원도 언젠가부터 익숙해진 듯 마냥 굳어 있지 않았다. 어제는 처음으로 쪽, 하는 소리를 내면서 제 아랫입술을 빨았는데, 그게 귀여워서 또 해 보라고 시키다가 결국에는 놀리는 거 아니었다고 그를 달래는 데에 이르렀었다.
연우는 슬쩍 눈을 떴다. 그리고 제 두 뺨을 꼭 쥔 채로 열심히 키스하는 서원의 얼굴을 구경했다. 서원은 무슨 키스할 때 눈을 뜨면 죽는다는 저주라도 받은 양 바들바들 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눈을 꽉 감고, 어설프게 턱을 기울이며 키스를 이어 갔다.
그 모습이 야하고, 사랑스러웠으나 또 못내 버거워 보여서 연우는 기어이 살짝 고개를 뒤로 빼고 숨 쉴 틈을 주었다. 입술 사이로 살짝 헐떡이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평소보다 발갛게 달아오른 두 뺨에, 기진맥진한 것처럼 풀린 눈을 하고선 저를 올려다본다.
그 눈은 금방 닫히는 눈꺼풀 속으로 숨었으나, 마주친 이상 돌연 아래에 피가 몰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시커먼 생각이 모락모락 연우의 머릿속에 피어나기 시작했다.
“으음…….”
‘슬슬 더 진도를 나갔으면 좋겠는데. 언제까지고 뽀뽀만 할 수도 없고…….’
연우는 쾌감보다는 고통으로 신음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서원의 옷을 벗기고 싶었고, 사실 그러지 않으면 더 이상할 분위기기도 했다. 평범한 경우라면 그랬다. 유연하게, 또 그리 알 만하게 다음 단계로 넘어갔을 터다.
하지만 이 녀석이라면 안 될 일이다. 당장 그렇게 한다면 강서원은 화들짝 놀라면서 입술을 떼고, 아주 당황한 눈을 할 게 분명하다. 다른 상대처럼 척 하면 척이 되는 애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이상,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내가 24살 때도 저랬나.’ 불현듯 억울해져서 연우는 자신의 24살을 떠올리다가, 종이를 구겨 쓰레기통에 처박듯 금방 그 생각을 내던졌다.
“……하아, 형…….”
비로소 완전히 얼굴이 떨어졌다. 도톰하고 입술 사이로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맑고 청명하지만, 흐트러진 발음. 호수같이 맑고 젖은 눈. 연우는 체리같이 탐스러운 입술에 쪽, 짧게 입을 맞추면서 “왜?” 했다.
서원은 살짝 상체를 눕혀 조심스레 핸들에 제 등을 기댔다. 방금 전 제가 열심히 했던 키스에 못내 지쳤는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
“생각해 보니까요, 내일…….”
“……응.”
은근하고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연우의 귀에 닿았다. 연우는 꼴깍, 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이미 거무스름한 안개로 자욱해진 머릿속은 한 가지밖에 생각할 줄을 몰랐다.
설마, 강서원도?
……아, 그래. 아무리 유난히 사회성이 부족하다 해도 스물넷인데. 얘도 대학교 가면 선배일 텐데. 그렇지. 그래.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연우는 기대감으로 차오르는 웃음을 꼴깍 얼굴 뒤로 넘기며 공연히 침착한 얼굴을 유지했다. 그러나 서원의 허벅지를 둥글게 매만지는 손은 은근한 조바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내일, 뭐?”
아이가 원래 말이 느린 편이라는 걸 알았으나, 어쩐지 평소보다 더 느리게 느껴져서 말을 종용하고 말았다. 다행인 건 말이 버릇처럼 느긋하게 나왔다는 점이었다. 그 증거로 서원은 놀라지 않았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두 눈이 깜빡인다. 그사이 연우는 또 한 번 서원의 눈꼬리에 입을 맞췄다. 아무래도 이조차 버릇이 될 것만 같다는 예감이 든다.
“내일 낮에, 아빠랑 영화 보기로 해서…….”
“…….”
“저녁에나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형 집이요.”
시발.
연우는 차오르는 죄책감과 허탈감, 그리고 아무도 몰라서 다행일 그 수치스러움에 돌연 입 밖으로 툭 튀어나올 뻔한 욕설을 가까스로 삼켰다.
“…….”
“형?”
서원과 달리 연우는 대답과 반응이 빠른 편이었다. 평소보다 조금 늦은 대답에 서원은 의아하다는 얼굴로 연우의 어깨를 소심하게 매만지며 그를 불렀다. 제가 실수라도 한 건가 초조해져 눈을 빠르게 깜빡거린다.
“응. 알았어.”
연우는 짐짓 부드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같이 흘러나온 목소리는 사심 하나 없었다는 듯 가볍고 담백하다.
“……화나셨어요?”
“아니? 그럴 게 뭐가 있어.”
이 녀석한테 내가 뭘 기대한 걸까. 내가 등신이지. 연우는 자책하면서 서원의 몸을 끌어안았다.
곧이어 두 몸이 틈 없이 바짝 붙었다. 서원은 그의 허벅지에는 몸을, 그의 어깨에는 제 턱을 얹고 한참을 숨을 골랐다. 기분 좋은 안정감. 더, 더 그에게 온전히 기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자꾸만 터져 나와서, 서원은 요즘의 스스로를 조용히 타이르고는 했다.
* * *
시준우에게 전화가 온 건 저녁이 되기 전의 시간이었다. 서재에 앉아 책을 읽던 연우는 발신인을 확인하고 인상을 살짝 찌푸리면서 안경을 벗었다.
“거기 지금 새벽 아니야?”
「맞지.」
“새벽까지 뭐 했어.”
「공부.」
준우는 기다렸다는 듯 쾌활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안에 서린 기대감이 느껴져서 연우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여간, 애다, 애.
“몸 상한다니까.”
연우는 책상을 벗어나 소파에 몸을 기대며 준우가 기대했을 말을 내뱉었다. 걱정 어린 잔소리를 듣자 기분이 좋은 듯 수화기 너머로 웃는 소리가 났다. 「괜찮아. 영양제 다 챙겨 먹는데, 뭐.」 하는 목소리는 차분했다.
“왜 전화했어? 얼른 자야지.”
연우는 시간을 확인하면서 말했다. 30분 후면 서원이 올 시간이다.
「형, 8월에 시준호 미국 온다며.」
“아, 어. 이모네 가서 있겠다던데? 한 달 정도 있으면 영어 좀이라도 늘을까 싶어서 그러라고 했어.”
「으. 싫어.」
“멀어. 어차피 서부 쪽이야.”
참 한결같다고 생각하면서 연우는 조금 웃었다. 그리고 통화를 스피커폰으로 전환시킨 뒤 서원에게 문자를 했다.
[나] 오고 있어?
읽음 표시를 기다리며 채팅창을 빤히 바라보던 중에 핸드폰 스피커를 통해 준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알아. 괜히 그래 봤어. 사실 문제는 9월이야.」
“왜?”
「난 9월에 한국 갈 거거든. 방학에 여행할 건데, 마지막으로 한국 들르려고.」
“그게 왜 문제인데. 준호 때문에?”
「어. 아, 시준호랑 같이 지내는 거 싫어어. 나도 형 집에서 자고 싶은데에.」
대놓고 어리광을 피우는 제 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연우는 습관처럼 그를 달래지 못했다. 아직도 읽지 않았다는 채팅창의 표시가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읽음 표시가 나타났다. 동시에 수화기 너머로 「형?」 하고 저를 부르는 준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강서원] 넵 지금요
[강서원] 40분 정도 걸릴 것 같아요ㅠㅠ 좀 밀려서..
‘40분? 너무 긴데.’ 연우는 생각하면서 “그래도 우리 집에서 자야지, 형도 너 안 본 지 엄청 오래 됐는데.” 했다. 그 목소리는 꼭 전자 피아노처럼 무미건조하게 달래는 음율을 따랐다.
그만큼 준우의 어리광을 받아 주는 일은 연우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둘째라고는 해도 어차피 막내인 준호와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놈이었다. 준호와 달리 반항 하나 할 줄 모르는 탓에 학업 스트레스를 고스란히 받아 왔던 놈은 어릴 적부터 저에게 많이 의지하고, 또 어리광을 부리곤 했다. 그건 대학생이 된 아직까지도 그랬다. 기어이 나쁜 습관이 되어버린 듯하다고 연우는 무심하게 짐작했다.
[나] 내가 데리러 갈 걸 그랬네ㅠㅠ
[강서원] 아니에요!! 금방 가겠습니다!!
발랄한 두 개의 느낌표. 강서원은 아무래도 문자와 현실의 인격이 두 개로 나누어져 있는 것 같았다. ‘귀여워.’ 연우는 생각하면서 ‘그래!!’ 하고 다시 서원의 말투를 따라 했다. 그를 눈치채지 못한 듯 돌아오는 답장은 ‘ㅎㅎ’ 뿐이었다.
시준우는 그로부터 5분 정도를 더 징징대다가 전화를 끊었고, 강서원은 또 그로부터 30분 뒤에 집에 도착했다.
식탁에 마주 앉아 저녁을 먹고, 이를 닦고, 소파에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던 중이었다. 슬금슬금 연우에게로 기울던 서원의 몸이 마침내 톡, 그의 어깨에 닿았다. 짐짓 모니터에 시선을 두고 영화에 집중하는 척하고 있던 연우가 실실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고 서원을 바라보았다.
“안아 줄까?”
강서원은 대답 대신 으레 그랬듯 많은 말들이 모여든 눈을 깜빡이며 저를 올려다보기만 한다. 이젠 이도 익숙해진 참이었다. 연우는 앞머리 사이에 숨겨진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리고 서원의 몸을 끌어당겼다. 순순히 감기는 따뜻한 몸이 기분 좋아서, 그의 머리에 제 뺨을 비비적거리던 중이었다.
“……오늘, 아빠랑 슬픈 영화 봤어요.”
“그랬어? 요즘 나온 거?”
“네. 그냥 예매율 제일 높은 걸로 예매한 건데, 재미없었어요. 하나도 안 슬펐어요. 근데 재원이는 엄청 울더라고요.”
“맞아. 나도 울라고 만든 영화는 안 슬프더라. 억지스러워. 근데 동생은 엄청 울었어?”
“네.”
연우의 코는 서원의 머릿결에 닿았다가, 귓가에 닿았다가, 비로소 마르고 곧은 목덜미까지 내려앉았다. 그는 하나도 흥미롭지 않은 이야기에 열심히 답해 주면서 홀린 듯 서원의 향기를 맡고, 보송한 살갗에 연이어 입을 맞췄다.
“점심은 뭐 먹었어?”
“파스타랑 피자요. 저기, 형, 잠깐만요…….”
“응, 파스타 좋아해? 나중에 형이랑도 그런 데 갈까?”
“……아니요, 태원이가 먹고 싶다 해서 간 거예요. 전 별로 안 좋아해요. 그리고…… 태원이는 막내, ……하아, 형…….”
그렇구나. 연우는 그렇게 속삭이면서 서원의 몸을 더 세게 끌어당겼다. 숨이 잔뜩 섞인 제 목소리는 제가 들어도 욕정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살냄새. 매끈한 질감. 칭얼거리는 것처럼 흘리는 목소리. ‘미치겠네.’ 그는 고이는 침을 삼키면서 자꾸 특정한 곳으로 집중되려는 신경을 분산시키려 노력했다. 아직은 아니다. 강서원은, 조금 더 천천히. 놀라지 않게……. 진정해, 시연우. 변태 아저씨처럼 굴지 말고. 이 미친 새끼야.
“……그, 엄마는 같이 안 나오셨어? 그냥 집에 계셨던 거야?”
아빠. 그리고 동생 둘. 그리고 엄마까지. 자연스러운 의식의 흐름대로 물어본 것이었고, 무엇을 캐내고자 꺼낸 말은 아니었다. 캐낼 게 있을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어차피 형식적으로 대화를 이어 나가기 위한 질문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제가 그 질문을 꺼낸 찰나에 힘없이 풀어져 있던 몸 위로 딱딱한 긴장이 훑고 지나갔음을 느꼈다. 미미하고 순간적인 반응이었으나 몸을 밀착하고 있는 연우에게는 고스란히 느껴졌다.
“네. 엄마는 피곤하다 하셔서요.”
몸의 반응과는 다르게 태연하게 나온 목소리. 다른 거짓말을 할 때와는 다르게 능숙하다. 만약 몸을 밀착하고 있지 않고, 평범하게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면 저마저도 넘어갔을 만큼.
“…….”
“…….”
거짓말. 이성은 곧바로 판단했으나, 연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서원의 머리를 쓰다듬기만 했다. 방금 제가 얼떨결에 밟은 것이 강서원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경계선이라는 것을 깨달은 까닭이었다. 강서원이 가장 숨기고 싶어 하는 것. 강서원의 가장 안쪽. 가장 깊고 심각한 콤플렉스, 혹은 문제, 혹은 응어리, 혹은 그것들 다.
저와는 관련 없는 것들이었고, 제가 신경 쓸 영역이 아니었다. 연우는 냉정하게 저를 타일렀다. 그 때문인지, 어느새 흥분은 차갑게 가라앉은 채였다. 흐물거렸던 이성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거짓말을 눈치채지 못한 척 서원과 눈을 마주하며 웃었다.
“그렇구나.”
경계선에 잠깐 내디뎠던 발은 바로 뒷걸음질을 쳤다. 연우는 직후, 대신 제 영역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아무런 의미도 찾을 필요가 없는, 단순한 욕구에 의한 키스였다.
* * *
“웬일로 네가 날 찾아왔어? 연락도 없이.”
탁. 흰 대리석 테이블 위에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놓였다. 연우는 입에 물고 있던 장초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로 고개를 숙여 커피를 조금 마셨다. “더럽게 맛없네.” 하고 투덜거리는 건 여느 때와 다름없었으나, 평소보다는 조금 힘이 없어 보였다. 박진석은 연우의 건너편에 앉으면서 그를 건성으로 훑어보았다.
“영 상태가 별로네?”
“티 나냐?”
연우는 담뱃재를 종종 재떨이에 털어내면서 말했다. 습관적으로 조금 웃는 표정을 짓더니 곧 손바닥 아래로 제 눈을 비비며 짜증 난다는 얼굴을 한다. “욕구 불만이야.”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심통이 나 있었다. 연우의 입으로는 처음 듣는 단어였다. 위화감이 들었으나 진석은 아닌 척 토를 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더러운 변태 새끼.”
경멸 어린 어조로 중얼거리자 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디서 범죄자 취급이야. 스물넷이 왜, 성인인데. 그리고 따지고 보면 나랑 얼마 차이도 안 나.”
“7살 차이면 솔직히 많이 나는 거지. 암만 걔가 동성이라 해도……. 양심 챙기자, 우리.”
연우는 대답 대신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꼰 다리를 옆으로 돌리고 허벅지 위에 팔꿈치를 댔다. 생각을 하는 것처럼 다른 곳을 멍하니 응시하면서 한동안 뻐끔뻐끔 담배를 피우던 그가 잠시 후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다시 진석을 바라보았다. 큼, 말을 꺼내기 위해 목청을 다듬는 것이 어딘가 조심스럽다.
“형. 나 부탁 하나만.”
“…미쳤나? 이 새끼 뭐래? 뭔 갑자기 형이야?”
답지 않게 나지막하고 얌전한 목소리였다. 진석은 화들짝 놀라며 몸을 뒤로 뺐다. 그렇게 저를 형이라 부르라고 타령을 할 때는 언제고 막상 그렇게 불러 주니 숫제 또라이 취급이다. 꼭 못 들을 것을 들은 사람처럼 진석은 소름 끼친다는 얼굴로 인상을 썼다. 연우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더욱 의자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카페에 강서원, 아르바이트로 써 줘.”
“뭐?”
이건 무슨 느닷없는 화제인가. 진석은 생각하면서 담배를 껐다.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 없다는 듯 연우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월급은 내가 줄게. 그냥 형이 아르바이트 필요한 척 써 주기만 하면 돼.”
“제발… 형이라고 부르지 마.”
“애 싹싹하고 일 잘해.”
“……모르는 애랑 있는 거 불편하고 귀찮아. 알면서 그러냐.”
“그래서 내가 지금 부탁하는 거잖아. 보면 몰라?”
부탁하는 사람치곤 방금 전의 땡깡은 조금 거칠고 막무가내에다 싸가지가 없었다. 허나 그를 지적하면 꼭 들어줄 여지가 있는 것처럼 보일까 봐 진석은 그저 연우의 눈을 피하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너네 갤러리에서 일 시키면 되잖아. 뭔 일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직원이 평소엔 아르바이트 같은 거 없다고 이미 말했대.”
“근데 아르바이트를 꼭 해야 된대? 생각해 보니까 걔 준호 과외도 해준다며.”
물론 저도 박진석과 같은 단계로 생각했다. 실제로 강서원에게 그 단계 그대로 말하기도 했다.
어제의 일이었다. 기획전이 끝나면 방학 때 맥주 행사 아르바이트를 할 예정이라는 서원의 말에 연우는 일순 뒷골이 당겨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말랑한 손을 감싸 쥐고 끊임없이 조물거리면서, 최대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획전 끝나고도 계속 여기서 일하면 되지. 왜 굳이 힘쓰는 걸 하려고 해.’
‘아니? 별로 기분 안 나빠. 나쁠 게 뭐가 있어.’
‘……어, 지연 씨가 그랬어? 알바 원래 없다고? 음…… 맞아. 원래는 없지.’
‘갤러리에서 할 일이야 생각해 보면 있겠지.’
‘그렇게 하는 건 싫어?’
‘아니, 억지로 일자리 만들려는 건 아니고…….’
‘…….’
‘……서원아. 다른 아르바이트 꼭 해야 하는 상황이랬지?’
결국 목표점처럼, 그리고 필연처럼 말이 거기까지 닿고야 말았을 때였다. 서원은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하듯 입을 꾹 다물면서 그의 눈을 피했다.
언제 한 번 지나가듯이 말했던 ‘집안 사정’이라는 단어, 그리고 부모님에 대해 자연스레 거짓말을 했던 일 덕분에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구석이 있기는 했다. 제 영역이 아니니 구태여 파고들지 않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게 자꾸 다른 방면에서 방해물처럼 툭툭 튀어나오곤 하니까 점점 답답해지기는 한다고 연우는 생각했다.
“몰라. 해야 된대.”
잘근잘근 씹는 듯한 발음이 못내 심상치 않아 보였다. 진석은 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연우를 이상하다는 듯 훑어보다가 던지듯 물었다.
“애랑 싸웠어?”
“……싸운 건 아냐.”
연우는 중얼거렸다. 사실이다. 결국 제가 물러서는 것으로 대화는 종료되었으니까. 못내 신경 쓰이는 듯 조마조마한 눈으로 저를 쳐다보기에 짐짓 괜찮은 척 머리를 만져 주기까지 했었다.
‘집요하게 물어보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으니까, 뭐라고 더 물어보지도 못하겠고.’
그는 생각하며 짜증스레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 성급한 동작으로 담배를 꺼냈다.
“…….”
“…….”
담배에 불을 붙이는 동안 입꼬리가 살짝씩 일그러지는 게 꼭 누군가가 심기를 부지깽이로 쑤셔 놓기라도 한 것만 같았다. 저런 모습은 또 처음이어서, 진석은 퍽 흥미로운 얼굴로 연우를 구경했다. 이제 보니 꼰 다리도 조금씩 떨고 있었고, 재수 없게 널따란 어깨는 오늘따라 조금 기운이 없어 보였다.
‘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게 아니라, 대놓고 초조해 보이는 거였네.’ 진석은 생각하면서 “그럼 왜 그러는데?” 물었다.
“기획전 끝나면 무슨 맥주 알바를 한다잖아.”
“맥주 알바? 그게 왜?”
연우는 기다렸다는 듯, 그리고 그게 말이 되느냐는 투로 말했다. 공감을 구하는 것처럼 힘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였으나 당연하게도 박진석은 공감하지 못했다.
“……아니, 야. 그냥 맥주집에서 알바 하는 게 아니라, 페스티벌이나 어디 공연 나부랭이 같은 데 가서 생맥주 따라 주는 거라고.”
네가 뭘 몰라서 그딴 반응인 거라는 듯, 연우는 설득조로 차근차근, 똑똑히 말했다. 사심이 가득 들어간 단어 선정에도 진석은 냉정함을 유지했다. 전혀 이상할 게 없다. 그는 눈을 깜빡이며 곧바로 대답했다.
“그러니까 그게 왜?”
“말을 말자.”
연우는 공감을 못 하는 상대방이 아주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있는 대로 구겼다.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퉁명스럽다. 그는 테라스 쪽을 바라보면서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햇빛을 고스란히 받고 있는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면서 진석은 잠시 생각하는 얼굴을 하였다. 다시 말을 꺼낸 건 한참 뒤였다.
“……너, 왜 그렇게 급하냐?”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감상밖에 들지 않았다.
원래 시연우는 이렇지 않았다. 놈은 ‘욕구 불만’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사람 같았다. 연인과 육체적인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강박도 없었고, 이토록 연인을 구속하려 들지도 않았다. 그저 분위기가 가는 대로, 또 상대가 원하는 대로 단계를 밟는, 마치 시냇물 위에 둥둥 떠서 물결을 따라 흘러가는 나뭇잎 같은 연애를 하곤 했다. 웃는 얼굴로 상대가 저를 원한다는 말이나 제스처를 취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여유작작함이 처음에는 도리어 상대를 애 닳게 만드는 기술인가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모습이 하나도 없었다. 놈은 마치…… 그래, 처음 연애를 하는 풋내기 소년처럼 굴고 있었다.
“뭐가. 그냥 걱정돼서 그러지. 그런 거 하다가 질 나쁜 주정뱅이한테 해코지라도 당할 수도 있잖아.”
연우는 몇 개비째 태우는 것인지도 모를 담배 도막을 재떨이에 지지면서 변명조로 말했다. 제 상태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조차도 놈답지 못하다. 그만큼 여유가 없다는 거다.
“그런 일이 흔하겠어? 24살이 애도 아니고. 잘 처신하겠지.”
“애 맞아.”
“아깐 아니라며.”
“닥쳐.”
방관자는 당사자보다 논리적인 법이었다. 연우는 논리에 욕설로 대응하고서는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하는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는 턱을 괸다. 살짝 튀어나온 입술이 퍽 불퉁하게 보였다. 진석은 소리 없이 웃었다.
시연우가 귀여워 보이기는 생전 처음이었다.
* * *
날이 꽤 더워졌다. 경찬은 티셔츠 위에 걸쳐 입은 남방을 펄럭이며 지하철에 올라탔다.
저번 휴가 때만 해도 뜨거운 공기로 가득 차 있던 지하철 내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에어컨 바람을 내뿜고 있었다. ‘참 줏대도 없다.’ 경찬은 공연히 불평하면서 열리지 않은 문에 몸을 기댔다. 핸드폰을 꺼내어 새까만 액정에 제 얼굴을 비추어 본다. 못내 긴장한 표정을 한 얼굴이 액정에 반사되었다. ‘긴장한 티 내면 안 되는데.’ 그는 생각하면서 근육을 푸는 것처럼 제 얼굴 곳곳을 매만졌다.
약속 장소는 집과 먼 신사동이었다. 서원과 통화를 했을 적부터 이미 예민해졌기 때문인지, 평소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던 약속 장소가 자못 기분이 나빴다. 괜한 감정 소모라는 걸 스스로도 알았으나 선입견이 생긴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선입견. 정확히 말하면 ‘그 형’에 대한 선입견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강서원의 말에 의하면 잘생기고, 키도 크고, 돈도 많고 나이도 저희들보다 훨씬 많은 남자가 한낱 아무것도 없는 대학생과 친구라는 관계로 엮이는 그 자체가 그랬다. 공통적인 관심사가 있는 특수한 경우라면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니라고 했다.
다단계, 사이비, 아니면 사기꾼 중 하나일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강서원이 걱정되었다. 제 앞가림을 혼자 하지 못할 만큼 바보 같은 녀석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걸 당하는 사람들도 바보라서 당하는 게 아니었다. 더군다나 다단계, 사기꾼이면 더 위험했다. 강서원의 취약점은 돈이었다.
경찬은 아주 결연한 얼굴로 약속 장소인 고깃집에 도착했다. 먼저 와 있던 듯 서원이 경찬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여기야.”
경찬은 서원이 앉은 테이블 쪽으로 다가가면서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서원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형은?”
“아, 주차하고 오신대. 먼저 시키고 있으랬어.”
경찬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곤 벽면에 붙은 메뉴판을 훑었다.
“형이 제일 비싼 거 시키래.”
메뉴를 고르는 경찬의 얼굴을 바라보던 서원이 말했다. 경찬은 흘긋 서원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단순히 말을 전하는 듯했지만 분명 그 사람은 허세에 가득 차서 한 말일 것이었다. ‘사기꾼들은 과시욕이 강하잖아. 역시 수상해.’ 그는 생각하면서 가게에서 가장 비싼 부위를 시켰다.
그때였다. 끊임없이 열렸다 닫기를 반복하던 자동문 앞에 어느 남자가 섰다.
워낙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이 많아 문가에는 한 번도 가지 않았던 시선이 저절로 끌려갈 정도로 튀는 외모를 가진 남자였다. 더하여 걸치고 있는 것들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부자일 것 같았다. 그냥 둘러싼 분위기부터가 그랬다. ‘역시 이런 쪽 오면 저런 사람도 볼 수 있구나.’ 경찬은 건조하게 생각하면서 다시 물통으로 시선을 두었다. 어쨌든 별로 관심은 없었다.
컵에 물을 따르는 동안에 시야로 그 남자가 서원과 제가 앉은 테이블 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남자는 신장 탓인지 그 움직임이 더 잘 보였다. 경찬은 남자가 제 양옆 테이블 중 어느 쪽과 일행일 것이라고 여기며 물통을 닫았다.
마침내 남자가 서원의 뒤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서원의 정수리에 제 손을 얹었다. 출입구를 등지고 앉아 있던 서원이 놀라 뒤를 돌아보았고, 경찬도 놀라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
‘저 사람이라고?’
경찬이 생각하는 사이 그 생각에 답해 주듯 서원은 “형.” 하고 그를 불렀다.
“시켰어?”
남자는 서원에게 녹을 것처럼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경찬은 놀란 눈 그대로 엉거주춤 일어섰다.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나자 남자의 시선이 경찬에게로 향했다.
“네! 형, 제 친구.”
“응. 경찬이?”
“……안녕하세요.”
“안녕.”
남자는 웃는 얼굴 그대로 경찬에게 손을 내밀었다. 경찬은 황급히 놀란 표정을 숨기고 남자의 손을 맞잡았다. ‘뭐야? 진짜 이 사람이라고?’ 그렇게 생각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딱히 달라질 건 없었다. 도리어 남자 쪽으로 쌓아 두었던 마음의 벽이 더 높아진 느낌이었다. 하여간 외모만 번지르르한 놈들은 신뢰가 가지 않는 법이니까. 그래. 사기꾼들은 원래 잘생겼다. 사기꾼이 괜히 사기꾼이겠어.
“서원이한테 말 많이 들었어. 아, 반말하는 거 괜찮아? 고민했는데 존댓말 하는 것도 웃길 것 같아서.”
느긋하면서도 논리적인 말투가 참 기품 있어 보인다고 경찬은 생각했으나 그 위로 반박하듯 곧바로 찍찍, 검은 매직이 칠해졌다. 말투는 인성과 상관없다. ……아마도.
“네. 괜찮습니다.”
경찬은 남자에 동화되어 올라가려던 제 입꼬리를 단단히 동여매고는 딱딱하게 대답했다. 이건 제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고 강서원의 현실에 대한 문제라고 그는 줄곧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 나는 사람 잘 보고 냉정하니까 여기 있는 거야. 경찬은 제 자리를 되새기곤 재차 마음속 시험지를 단단하게 붙잡았다. 그 모습은 못내 비장했다.
* * *
테이블 위에 빈 소주병이 한 병, 맥주병이 두 병 있었다. 맥주병은 서원이 다 비운 것이었고, 소주병은 경찬이 비운 것이었다.
“그래서 제가 겁나 당황한 거 숨기면서 말했죠, 전투화 굽이 빠졌습니다. 갈아신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가더라고요.”
목뒤까지 빨개진 경찬은 신나게 군대 얘기를 하고 있었다. 시연우는 사이다를 따라 서원의 앞에 놓아주면서도 경찬과 눈을 마주해 주며 “요령 좋네.” 하고 대답했다. 서원은 컵을 입에 대면서 흘긋, 경찬을 보았다. 들뜬 제 친구의 모습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두 시간 전 단단히 붙들고 있던 시험지는 이미 날려 버린 지 오래였다. 경찬은 확신했다. 강서원, 사람 참 잘 봤다. 이 형은 아주 좋은 사람이다. 좋은 사람이고 정도 많으니까 모든 사람과 친해지는 거다. 저 사람은 지나가는 길고양이와도 친해질 사람이다.
‘사람끼리 친해지는데 뭐가 이유가 필요하겠어. 내가 너무 염세적이었던 거야.’ 기어이 경찬은 그렇게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어깨에 힘을 주고 아주 작정한 사람처럼 남자를 파헤치려고 했던 것치고는 터무니없이 이른 결과기는 했다. 어제 난방을 틀고 오늘 에어컨을 트는 지하철보다, 훨씬 줏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
‘……음. 그래, 너무 이른가?’
기어이 경찬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스친 찰나였다. 쨍. 그 생각을 방해하듯 별안간 비워진 소주잔에 술병 입구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경찬아, 고기 더 시킬래? 아니면 이제 그만 갈까?”
두 번째 술병이 비워졌다. 경찬의 술잔에 나머지 술을 채운 연우야말로 요령 좋게 웃으며 의심의 싹을 손쉽게 잘라냈다. 그때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경찬의 핸드폰이었다.
“어, 재원아.”
경찬은 전화를 받으면서 건너편 서원의 손등을 툭툭 쳤다. 조용히 사이다를 홀짝거리고 있던 서원이 눈을 들어 올렸다.
「형, 혹시 우리 형이랑 같이 있어요? 연락이 안 돼서요. 오늘 형이랑 술 마신다 했는데.」
“어, 서원이 내 앞에 있어. 바꿔 줄까?”
서원은 통화의 내용을 대충 눈치챘는지 제 주머니를 뒤적거려 핸드폰을 확인하다가 경찬이 건넨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응.” 하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남자의 시선이 서원을 쫓았다. 서원은 그를 내려다보며 잠깐 나가서 전화하겠다는 듯 문 쪽을 가리켰다.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원이는 서원이 동생이지?”
서원이 나가는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던 연우가 고개를 돌려 경찬에게 물었다. 경찬은 고기를 하나 집어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재원이가 아닌 척하면서도 서원이 많이 신경 써요. 저한테는 맨날 형한테 미안해 죽겠다고 하는데, 막상 제 형 앞에서는 그렇게 표현을 안 하나 봐요.”
‘……잠깐. 이 정도까지 강서원이 말했을까?’
경찬은 저도 모르게 흘린 말에 흠칫했다. 술김에 입이 방정이 되어버렸다. 아니다. 이 정도면 괜찮다. 그나마 모호하게 말한 게 다행이다. 남자가 서원의 가정사에 대해 모르는 눈치라면 얼버무려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경찬은 흘끔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렇지. 사실 표현을 해야 하는데 말이야. 서원이, 고생 많이 하잖아.”
남자는 마치 공감한다는 듯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턱없이 자연스러운 태도에 경찬은 안심하면서도 놀라웠다. 혹시나 했는데, 강서원이 그에게 제 가정사까지 말했을 줄은 몰랐다.
경찬이 느끼기로, 서원은 그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했다. 그의 유일한 친구인 저조차도 대학생이 되어서야 재원의 입을 통해 알았을 정도였고, 안 뒤에도 그에 대해 서원과 직접적으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그가 제 집안 사정에 대한 주제를 극도로 피한 탓이었다.
그런 녀석이 직접 털어놓기까지 한 건가. 경찬은 제 친구의 발전에 내심 감동하면서 소주잔을 마저 비웠다. 탁. 소주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경쾌했다.
“그래서, 다행이에요. 낯간지럽지만 서원이…… 제가 많이 걱정하거든요. 저 사실 형 얘기 서원이한테 들었을 때, 엄청 걱정했어요. 죄송한 말이지만 형이 이상한 사람은 아닐까 하고요. 다단계… 같은 생각도 했어요. 허허.”
“그랬어?”
남자는 턱을 괴면서 놀랍지 않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다소 기분 나쁠 수도 있는 말에도 그럴 수도 있다는 듯한 관용이 미소 속에 녹아 있었다. 비로소 경찬은 느슨하게나마 묶여 있던 매듭조차도 완전히 풀리는 것 같은 감각을 느끼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네. 서원이가 똑똑하긴 하지만, 아시다시피 잘 휩쓸리는 편이잖아요. 제가 보기에는 사기도 엄청 잘 당할 것 같거든요. 사람 말 은근히 잘 믿고, 또 그냥 사람도 잘 믿고, 하여간 은근히 줏대 없어가지고……. 좀 걱정했어요.”
“…….”
경찬은 민망한 마음에 짐짓 젓가락으로 식은 고기들을 뒤적거렸다.
“……근데, 오늘 형 뵈니까 아닌 거 알겠더라고요. 형 진짜 좋은 분이신 것 같고……. 이런 말 좀 이상하긴 한데, 진짜 다행인 것 같아요.”
“…….”
“형?”
한참을 기다려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이윽고 경찬이 의아하다는 듯 눈을 들어 올리자 침잠되어 있던 눈동자가 빛을 틔웠다.
“응. 그래. 좋게 봐 줘서 고마워.”
제 감정을 토씨 하나 거짓으로 흘리지 않는 게, 참 솔직한 놈이라고 연우는 생각했다. 웃을 기분은 전혀 아니었으나 그는 친절하게 웃었다.
* * *
연거푸 인사하는 경찬을 뒤로하고 차가 출발했다. 서원은 술기운이 다 깬 건지 말똥한 눈으로 창밖 너머의 야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는 항상 차에 타면 야경으로부터 눈을 떼지 못했는데, 그 버릇이 참 사랑스럽고 순수하게 느껴져서 연우는 종종 불빛이 비치는 서원의 눈동자를 훔쳐보고는 했다.
“…….”
하지만 오늘은 그러지 못했다. 연우는 서원의 눈을 바라보지 않고 운전만 했다. 서원이 가끔 어딘가를 가리키며 새로 생긴 가게라는 둥, 저기 조형물이 신기하게 생겼다는 둥 불쑥불쑥 말을 걸 때에만 그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서원을 돌아보고는 했다.
서원의 집 앞에 검은 세단이 멈추어 섰다. 서원이 놓고 간 것은 없나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가만히 정면을 바라보고 있던 연우가 고개를 돌렸다.
“서원아, 내가 생각해 봤는데…….”
“네?”
무언가를 결심한 것처럼 나지막하고 진지한 목소리였다. 서원은 그에 놀라 눈을 크게 뜨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혹시 오늘 내가 실수한 게 있었나.’ 서원은 생각했다.
연우는 침을 삼켰다. 그리고 말을 하기 위해 입을 뗀 순간이었다. 그는 살짝 입술을 벌린 채 그대로 굳었다. 갑자기 제가 뭐라고 하려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은 탓이었다.
“…….”
‘내가 뭐라고 하려 했지?’
그때였다.
별안간 숨기기 급급했던, 응어리진 감정들이 폭발하듯 빠르게 머릿속에서 증폭했다. 깔끔했던 머리 위로 검정색 글자들이 어지러이 박히기 시작한다.
너랑 자고 싶어. 못 참겠어.
맥주 알바 하지 마. 기분 좆같으니까.
신경 쓰인단 말이야.
너에 대한 거, 나한텐 아무것도 알려주기 싫어?
다 그렇게 숨길 거야?
나만 이런 생각하는 거야?
너, 혹시……
혹시.
“…….”
휩쓸린 거야?
“……형?”
미친.
연우는 돌연 치미는 욕을 삼켰다. 하고 싶은 말들이, 다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 한심할 뿐이랴. 죄다 구질구질하고, 촌스럽고, 유치한 잡소리들뿐이다. 그래서 아무것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그는 몹시 당황했다. 이렇게 말문이 턱, 하고 막힌 적은 처음이었다. 그래도 이성은 있는지라 그대로 내뱉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으나, 자괴감은 떨쳐낼 수가 없었다.
‘나 왜 이렇게 등신 같지, 지금?’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따뜻한 손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뺨을 조심스럽게 톡, 건드리더니 이윽고 더듬더듬 매만지기 시작했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눈이 흠칫 놀라며 위로 올랐다. 걱정스러운 듯한 표정의 강서원이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형. 얼굴이 안 좋아 보여요.”
그 대수로울 것도 없는 다갈색 눈동자와 맞닿은 찰나, 연우는 폭력에 가까운 요상한 충동을 느꼈다. 펑, 무엇인가가 터지는 감각. 술을 마신 적도 없는데 취기가 오른 것처럼 후욱, 얼굴에 뜨거운 열이 오른다.
별안간 커다란 손이 서원의 손목을 바싹 쥐었다. 그리고 제 뺨에 닿아 있는 손을 떼어냈다. 마치 겁박하는 것처럼 강하게 조여드는 손가락에 서원은 아, 하고 작게 신음을 내뱉었다. 연우는 연신 침을 삼키면서 문의 잠금을 풀었다. 항상 여유롭던 검은색 눈동자가 이리저리 방황했다. 탈칵, 하는 소리가 차 안을 가득 울렸다.
“……할 말, 까먹었다.”
“…….”
서원이 당황한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며 그를 바라보았으나 연우는 시선을 피하는 것처럼 급기야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잠시 차분하게 후우, 숨을 내쉬더니 이내 천천히 눈을 올려 서원을 바라보았다. 경찬에게 그랬던 것처럼, 웃을 기분은 전혀 아니었으나 친절하게 웃는다.
“미안. 오늘따라 몸 컨디션이 별로였나 봐. ……들어가 봐, 서원아. 아까 동생이 빨리 오라고 전화한 거 아니었어?”
“……아, 네. 형. 오늘 감사했습니다. 쉬세요.”
“응. 잘 자.”
컨디션이 별로라는 그가 걱정되었으나, 왜인지 방금 전 손목을 쥐던 그 힘이 조금 낯설어서 서원은 고개로 한 번 더 꾸벅, 인사하고는 잠자코 차를 벗어났다.
“…….”
곧 서원의 모습이 집 안으로 사라졌다. 연우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핸들에 이마를 콱 박았다.
그는 한참 동안을 그렇게 있었다.
* * *
연우는 계산대 앞에 서서 직원들이 부탁한 음료들을 주문했다. 직원들 중 가장 막내로 보이는 남자가 안절부절못하며 주변을 서성이기에 “아, 케이크도요? 어떤 거요?” 하며 장난을 걸었다. 막내 직원은 그 말에 그런 거 절대 아니라며 후다닥 자리로 돌아갔다.
음료를 가지고 오는 일은 결국 막내 직원에게 맡겼다. 막내 직원은 그제야 제 자리를 찾은 듯한, 아주 편안한 얼굴로 음료가 담긴 트레이를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연우는 제게 잘 마시겠다고 인사하는 직원들에게 웃어 주었다. 저보다 나이가 많은 직원도 꽤나 많았기 때문에,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것은 당연했다.
“아, 시원해.”
연우의 건너편에 앉은 배지연이 제 음료를 한 번 쭉 빨아들이더니 작게 감탄했다. “우리 갤러리 카페 커피 진짜 맛있지 않아요? 주말에도 막 생각나.” 하며 제 옆에 앉은 직원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이어 간다. 연우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제 앞에 놓인 레몬에이드를 빨대로 휘휘 섞으면서 입을 뗐다.
“다음 주면 기획전도 끝이네요.”
배지연이 놀라며 연우를 돌아보았다. 테이블 위에 공공연하게 주제를 꺼내 놓는 게 아니라, 명백히 저를 바라보며 말을 붙여 오는 게 당황스러운 까닭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연우는 별생각 없는 사람처럼 웃는 얼굴을 지어 보였다.
“아, 네. 하하. 막 시원섭섭해요. 대표님도 그러시죠?”
배지연은 사회생활에 능란한 사람답게 금세 당황한 빛을 지워냈다. 그리고 퍽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덜그럭. 덜그럭. 얼음이 섞이는 소리가 요란했다. 연우는 레몬에이드를 더 세게 섞으면서 말을 이었다.
“뭐 그렇죠. 지연 씨는 알바생들이랑 정 좀 들었겠어요.”
“으음……. 좀 그런 것 같아요. 안 그럴 줄 알았는데. 매일 보니까 정이 들긴 합니다.”
화제가 그리로 옮겨 가자 그녀의 옆에 앉아 잠자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직원이 일순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생각난 듯 눈을 크게 키웠다. ‘걸렸다.’ 연우는 그것을 확인하고 아닌 척 막내 직원 쪽으로 고개를 돌려 일은 어떻냐는 등의 시답지 않은 질문을 던졌다.
“그래, 맞다, 맞다. 지연 씨, 서원이는 어떻게 됐어?”
그녀는 배지연에게 조용하면서 수선스럽게 물었다. 배지연이 그녀에게로 몸을 살짝 비틀었다. 그사이, 막내 직원은 갑작스레 제게 꽂힌 질문에 화들짝 놀라면서 최선을 다해 대답했다. 연우는 경청하는 척 고개를 끄덕이며 인자한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그의 귀는 배지연 쪽을 향해 열려 있었다.
“서원이요? 아, 말은 해 봤는데…….”
해봤는데?
“거절하더라고요. 연애를 할 시기가 아닌 것 같다고, 죄송하다고요.”
그래. 그럼 그렇지.
예상했던 바였다. 연우는 그제야 입꼬리를 길게 늘이며 턱을 괴었다. 막내 직원은 제 말에 주의를 기울이는 듯한 대표의 태도에 당황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에이. 여자친구 있는 거지?”
그녀는 김빠진다는 듯 혀를 끌끌 차며 팔짱을 꼈다.
“아뇨. 진짜 없는 것 같았어요. 사실 저도 안 믿겨서 진짜냐고 더 물어보고 싶기는 했는데, 서원이가 너무 미안해하면서 어쩔 줄 몰라 하길래 뭐라고 더 말 붙이기도 그렇더라고요.”
“어? 어쩔 줄 몰라 한다고? 서원이가?”
“그쵸? 아니, 되게 귀엽더라고요. 저도 깜짝 놀랐어요. 되게 어리바리하게 더듬거리면서 진짜 죄송해요,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해요, 누나, 저 진짜 별거 아닌데, 막 이러는데…… 애는 애인가 봐요. 숫기 되게 없어 보이더라고요. 그런 경험이 별로 없나 봐요.”
“와, 상상 안 가. 근데 저번에 대성 씨가 그랬잖아, 잘생긴 애들이 정작 인기 없다고. 서원이도 진짜 그런 타입인가 봐.”
“저도 그 생각했어요. 하…… 그나저나 벌써 제 동생한테 얘기 다 해 놔서 제 동생 완전 기대 중인데, 괜히 설레발쳤네요.”
“다음 주에 알바 애들 데리고 회식하잖아. 그때 한 번 더……, 어, 대표님, 가세요?”
제각각 이야기를 하던 직원들, 그리고 대표에게 자신의 포부를 당차게 늘어놓던 막내 직원이 일제히 하던 말을 멈추고 연우를 올려다보았다. 벌떡 일어난 연우는 당황한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는 막내 직원에게 눈썹을 찌푸리며 난처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미안해요, 다윤 씨. 나중에 이야기 더 들을게요.”
“아, 아…… 네!”
“저 급한 일이 생각나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직원들이 일어나서 그에게 인사했다. 그도 역시 공손하게 인사하면서 테이블을 떠났다. 등을 돌려 카페를 벗어나는 얼굴은 웃음 한 점 남아 있지 않았다.
집무실로 돌아온 연우는 레몬에이드를 소파 앞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역시나 소파에 앉아 잠을 자고 있는 강서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
여전하다. 강서원은 아직도 제 소파 위에서 누워 있지 않는다. 그토록 푹신푹신한데도 기어이 중심을 잃지 않고 앉아 있었다.
기억하기로 배지연은 저와 나이가 같았다. 제가 운이 좋게 태어나서 직급이 높을 뿐, 그녀와 저는 사회생활 경험이 비슷할 것이다. 사람을 다룰 줄 아는 능력도 비슷할 것이고, 인내심이나 사회성도 마찬가지로 비슷할 터다. 어쩌면 융통성은 그녀가 더 앞서갈 수도 있었다. 제가 더 편하게 살았을 테니까.
그러니까, 당연하다. 강서원의 소심한 성격이 저에게만 국한되는 게 아니었다면, 어느 정도 인간관계에 능숙한 연상의 사람들은 쉽게 그의 민낯을 파고들 수 있을 것이다.
강서원의 표면 아래를 볼 수 있는 서른한 살은 저뿐만이 아니다. 그까짓 거, 아주 흔해 빠진 것이었다. 나만 아는 것이라고 착각했던 강서원의 그 얼굴은, 그것은, 그 눈은…….
“…….”
“……형?”
그 순간, 인기척을 느꼈는지 잠에서 깨어난 눈이 깜빡깜빡거리며 천천히 뜨였다. 이윽고 맑은 눈망울이 저를 올려본다. 연우는 말없이 허리를 숙여 서원과 얼굴을 가까이했다. 서원이 무어라 말을 잇기 위해 입을 열었다. 허나 곧 맞대어 오는 입술에 의해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입술을 맞댄 그 속도는, 먹이를 독점하지 않고 있음을 깨달은 동물의 것처럼 조급했다.
* * *
쿵. 쿵. 쿵. 쿵. 나무 바닥을 울리는 발소리가 점점 커졌다. 침대에 누워 여자친구와 문자를 하고 있던 재원이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가슴팍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곧 열릴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예상대로 문이 벌컥 열렸다. 제 형이 까치집 같은 머리를 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이건 어때?”
서원은 재원이 누워 있는 침대로 다가가 털썩 걸터앉고는 재원의 얼굴 앞에 핸드폰 액정을 들이밀었다. 액정 위에는 군청색의 티셔츠가 떠 있었다.
“우리 집에 이런 색 티셔츠 한 세 개 더 있지 않아? 그것도 전부 형 옷장에.”
“으음…….”
이번에도 탈락.
서원은 잔뜩 실망한 얼굴로 핸드폰을 물렀다. 다시 터덜터덜 돌아가려 하기에 재원은 한숨을 쉬며 상체를 일으켰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며 “앉아 봐, 형.” 한다. 그 반응을 내심 바랐는지 서원은 그제야 얼굴에 활기를 띠며 다시 재원의 옆에 앉았다.
“뭐 하는지 알려주면 예쁜 옷 골라 줄게.”
재원은 거래를 하는 것처럼 말했다. 잠시 망설이던 서원은 비로소 민망한 듯 뺨을 긁으며 조금 흐린 발음으로 대답했다.
“……고백할 거야.”
“미친.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안 그래도 옷에 관심이 없는 제 형이 자꾸 방에 들이닥쳐서는 고른 옷이 괜찮은지 묻는 게 영 수상하다 했다. 안 하던 짓을 갑자기 한다. 그건 높은 확률로 연애, 나머지 확률로 누군가에게 관심이 있다는 뜻이었다. 재원은 중지와 엄지를 부딪혀 경쾌한 소리를 내면서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어떤 여자야. 얼굴 보여줘.”
“……사진 없어.”
“SNS 같은 것도 없어?”
“없어.”
“메신저는? 프로필 사진.”
“없어.”
“아, 뭐야아. 대학 동기?”
“……그만 묻고 옷이나 골라 줘.”
시시해. 재미없어. 재원은 투덜거리며 제가 자주 가는 쇼핑몰에 들어갔다. 허구한 날 차분하고 어두운색의 기본적인 옷들만 입고 다니는 제 형이 항상 아쉽던 차였다.
“……나보다 연상이야.”
재원이 죽죽 스크롤을 내리면서 옷을 고르던 중이었다. 옷 고르는 데에 열중하는 옆모습을 흘긋흘긋 훔쳐보며 망설이던 서원이 마침내 참고해 달라는 듯 작게 웅얼거렸다. 재원은 액정을 슥슥 미는 걸 멈추지 않으면서 푸학, 웃음을 터뜨렸다.
“오오올. 연하박력남 강서워언.”
“까분다.”
재원은 제 머리를 옆으로 툭 미는 손에도 장난을 이어 갔다. 키득키득거리는 소리가 잦아들기도 전에 “아, 이거다.” 하며 연노란색 티셔츠를 누른다. 서원은 곤란하다는 얼굴을 했다.
“……노란색? 너무 튀는데.”
“귀여울 것 같은데? 형 얼굴 하얘서 잘 어울릴 것 같고.”
서원은 대답하지 않고 밝은색의 티셔츠를 빤히 바라보았다. 연우 형에게 귀여워 보이면 좋겠지만, 과연 정말 제가 입을 때 귀여울지, 혹은 부담스러울지는 모르는 일이다.
제 형의 고민하는 얼굴을 살피던 재원이 설득하듯 말에 살을 넣었다.
“진짜 어울릴 거라니까. 형. 맨날 음침하게 칙칙한 색 옷만 입잖아. 그러면 여자들이 싫어해. 고백할 거면 이런 건 감수해야지.”
“…….”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다. 애초에 그에게 고백을 하기로 다짐한 것도 그와 같은 맥락이었다.
감수하기로 했다. 상처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압박감, 힘들지도 모른다는 걱정, 다.
‘아, 사귀는 사람 있는 거야?’
‘아니요, 그건 아닌데……. 그냥, 생각이 없어요. 죄송해요.’
딱히 어떤 계기가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깨달았을 뿐이었다. 며칠 전 직원 누나에게 여자를 소개해 주고 싶다는 말을 들었을 때 서원은 본능적으로 남자를 떠올렸고 동시에 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를 갖지 못해도 슬픈 건 똑같았다. 그러니까 차라리, 그를 한 번이라도 가져 보는 게 덜 억울할지도 몰랐다. 어차피 제 욕심이 이렇게 커져 버린 이상 뭘 해도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제 욕심의 몸집이 두려움보다 커져 버린 이상.
“……알았어. 링크 나한테 보내줘.”
생각에 잠겨 있던 서원이 마침내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려움도, 압박감도, 걱정도, 다 감수해야 한다. 이 어색하디 어색한 노란 티셔츠도 마찬가지였다.
* * *
노란색 티셔츠를 입은 서원은 당황했다.
“오늘, 대표님 안 오세요?”
그의 물음에 앞서가던 배지연이 등을 돌려 서원을 바라보았다. 느닷없는 질문을 하는 서원이 의아하다는 얼굴이었다.
“어? 응. 직원들 중에는 나만 올 거야.”
“누나, 뭐 먹어요, 저희?”
“소고기.”
“꺅. 아싸.”
배지연을 졸졸 따라가던 아르바이트생들은 신난다는 얼굴로 방방 뛰었다. 모두 서원과 나이가 같거나 어린 대학생들이었다.
서원은 갤러리 근처에 있는 고깃집을 향하는 무리의 끝에서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어 남자에게 문자를 보내려다가 관두었다. ‘회식’이라는 단어에 당연히 그가 올 줄로 짐작한 자신이 어리숙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이제 보니, 아르바이트생들만을 위한 소소한 회식 자리일 뿐이었다. 그가 올 자리가 아니었고, 흥미를 느낄 자리도, 필요한 자리도 아니었다. 서원은 휴식시간에 그의 집무실에서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했다. 그는 오늘 일 끝나고 회식 갈 거냐고 제게 물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의 태도는 남의 일을 말하는 것처럼 건조했다.
‘아까 좀 더 자세히 말할걸. 형 없으면 나도 안 오는 건데.’ 서원은 생각하면서 힘없이 그들을 따랐다. 적당히 있다가 얼른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차피 아르바이트생 사이에서 자신만 겉돌고 있었다. 그러니까 제가 빠져 봤자 다를 건 없을 것이었다.
“서원아.”
고깃집에 도착한 뒤 아르바이트생들은 친한 사람들끼리 모여 앉기 시작했다. 배지연은 어디에 앉을지 서성거리며 방황하는 서원을 발견하고 큰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서원이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기 앉아.” 하며 제 옆자리를 톡톡 두드리니 서원이 쪼로록 이쪽으로 걸어왔다. ‘아, 짜식. 진짜 귀엽네. 오늘따라 웬 또 저런 색 옷을 입어가지고는.’ 배지연은 생각하면서 희미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 * *
설기는 인터넷 스타였다.
갑자기 생각이 나서 찾아보니 플랫폼이라는 플랫폼에는 다 설기의 계정이 있었다. ‘왠지. 미용이 잘 되어 있더라니.’ 연우는 생각하며 책을 덮었다. 그리고 설기의 SNS를 구경했다. 하얗고 복슬복슬한 털뭉치 사진들을 휙휙 넘기며 보다 보니 어느새 동영상 사이트까지 넘어갔다. 움직이는 설기의 모습 너머로 한강에서 들었던 견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기야, 이리 와. 옳지. 옳지.」
동영상의 배경은 애견 카페였다. 설기는 주인의 부름에 꼬리를 흔들며 폴짝폴짝 달려오다가, 갑자기 주변에 있던 다른 견주에게로 방향을 틀었다. 다른 견주가 간식을 들고 있던 탓이었다. 카메라를 들고 있던 설기의 주인은 유쾌하게 웃으며 제 개를 불렀다. 어디 가느냐고 타박하는 목소리는 즐거워 보였다.
심각한 건, 그 영상을 보고 있는 연우뿐이었다.
“…….”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는다. 자꾸 설기의 모습 위로 오늘따라 노란 옷을 입어 유난히 귀여웠던 강서원이 겹쳐 보인 탓이었다.
연우는 그대로 핸드폰을 덮었다. 시선을 돌려 벽시계를 확인한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딴짓을 한 덕분인지, 시간은 어느새 11시를 넘기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핸드폰을 들어 메신저를 확인했다. 강서원으로부터 온 문자는 없었다. 여태껏 전화도 없었다.
암만 연락이 의무적인 사이가 아니더라도…… 이렇게 연락을 안 한 적이 있었나?
연우는 벌떡 일어섰다. 빙빙, 서재를 두어 바퀴 돌던 그는 마침내 결심한 듯 책상 위에 놓아둔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강서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금방 연결되었다.
「네, 형.」
수화기 너머는 조용했다. 연우는 소파에 풀썩 앉으면서 “응, 뭐 했어?” 했다.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소파 등받이 위로 꺾은 모습은 퍽 심기가 불편해 보였으나 목소리는 능란하리만치 그것을 감춘 채였다.
「공부하고 있었어요.」
되돌아온 목소리는 너무나도 천연했다. 별안간 불쑥 치미는 화에 연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연우는 제 눈썹을 중지로 살살 매만졌다.
“회식은 잘했어?”
「네.」
“집은 어떻게 갔어. 버스 타고 갔어? 나는 너 집까지 데려다주려고 회식 끝나는 거 기다리고 있었는데.”
화를 삭히다 보니 튀어나온 건 타박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연우는 눈썹을 만지던 것을 그만두고 한숨을 삼켰다. ‘왜 이딴 식으로 말했지. 당황할 텐데.’ 생각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내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서원은 연우의 예상처럼 당황하지 않았다.
「아, 지연 누나가 데려다주셨어요.」
도리어 칭찬을 바라는 것처럼 당당한 목소리였다.
지연 누나. 연우는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사이, 서원은 조잘조잘 말을 이어 가기 시작했다.
“…….”
「아, 정확히 말하면 지연 누나 동생분이… 지연 누나는 좀 취하셨거든요.」
“……동생?”
「네. 저랑 다른 알바생 분이랑 뒤에 타서 데려다주셨어요. 몰랐는데 저랑 같은 대학 다니시더라고요.」
“대화를 했어?”
「네. 다른 알바생 분이랑 세 명이서. 지연 누나는 취하셔서 조수석에서 주무셨어요.」
강서원은 그게 웃기다는 듯 작게 웃었다. 술에 좀 취한 건지, 아니면 진짜 재밌었던 건지 목소리가 다른 때보다 조금 더 들떠 있었다.
연우는 웃지 않았다. 더 얘기해 보라는 듯 “응.” 하고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자기가 기타 동아리 회장인데, 기타 동아리 들면 공짜로 기타 배울 수 있다고, 관심 있으면 들어오라고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고민해 본다고 했어요. 저 악기 하나도 못 하는데, 기타 배우는 것도 생각해 보니까 재밌을 것…….」
끊임없이 조잘거리던 말이 멈추었다. 별안간 확, 덮치듯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웃음소리 때문이었다.
연우는 한참을 웃었다. 폭죽처럼 연이어 터지는 웃음소리가 잦아질 즈음이었다. 그가 아주 재미있는 것을 지적하듯 말했다.
“개수작이네.”
목소리에는 아직도 웃음소리가 배어 있었으나 어조만큼은 냉랭했다.
「……네?」
거친 언사에 조금 놀란 서원은 머뭇거리며 되물었다. 혹 제가 잘못 들은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
연우는 눈썹을 매만지던 손을 내려 제 뺨을 슥슥 쓰다듬었다. 눈을 뜨고 고개를 똑바로 든다. 허공을 응시하는 눈이 비딱했다.
“그거 수작질이잖아. 몰랐어?”
온수에 냉수를 퍼부어 아직 채 다 섞이지 않은 물처럼 미묘했다. 어느 부분은 차갑고, 어느 부분은 따뜻하다. 화가 났는지, 아니면 여전히 다정한지 모를 말에 서원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입술이 떨어졌다 붙었다 하는 그 작은 접촉음마저 들려왔으나 연우는 서원의 속도를 기다리지 못하고 한 번 더 제 안에 뭉쳐 있던 생각을 내뱉었다.
“아니면, 알면서 그냥 휩쓸려 주는 거야?”
「…….」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뜻은 같을지 몰라도, 평소라면 음절 하나하나 더 섬세하게 조형해서 나왔을 말이다. 강서원이 기분 나빠 하지 않도록, 오해하지 않도록, 잘 소화할 수 있도록 모난 부분을 둥글게 깎고 다듬었을 의문이 처음으로 툭, 날것 그대로 튀어나와 버렸다. 가시가 오돌토돌 나 있고 모서리가 날카롭게 선 그대로.
「…….」
그리고 당연히, 강서원은 그것들을 소화하지 못했다.
실수했다. 연우의 머리는 늘 그렇듯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허나 문제라면 이미 저질러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는 속으로 욕을 중얼거렸다. 동시에 서둘러 변명을 내뱉으려고 했을 때였다.
점점 불안정해지던 그 숨소리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툭. 전화가 끊기는 소리가 귀에 박힌다.
“……아, 씨발.”
연우는 그대로 소파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는 차 키를 바지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으며 급한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 * *
서원의 집까지 가는 동안 연우는 그에게 쉴 새 없이 전화를 걸었고, 전화는 한 번도 연결되지 않았다.
타이어가 흙바닥에 거칠게 짓눌리는 소리가 났다. 검은 차가 서원의 집 앞에 멈춰 섰다. 마음이 급해져 부랴부랴 집 앞까지는 왔지만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문을 두드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연우는 생각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비로소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던 통화 연결음이 뚝, 끊겼다. 핸드폰 너머로 훌쩍거리는 소리가 미약하게 났다. 다시 전화가 끊길까 봐서, 연우는 급하게 입을 열었다.
“서원아, 미안해. 그런 뜻이 아니었어.”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급기야 미칠 것 같은 조바심이 일렁인다. 연우는 핸들에 팔을 기대어 제 관자놀이를 꾹꾹 손가락 마디로 누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얼른 서원을 달래 줘야겠다는 생각만 내달리고 있었다.
“불안해서, 그랬어.”
「…….」
“너 말고, 내가 불안해서……. 그래서 그랬어. 처음에 너랑 했던 약속, 지키기가 싫어져서……. 더 가까워지고 싶은 욕심이 나는데, 이걸 조절할 수가 없었어. 그러니까 자꾸 불안해지고, 네가 언제든지 다른 사람 만나는 게 이상할 것도 없다 생각하니까, 조급해졌어. 그래서 너한테 실수한 거야. 미안해.”
거기까지 말을 이어 갔을 때였다. 돌연 수화기 너머로 입을 앙다물어 호흡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그에 연우가 무어라고 반응할 새도 없이 전화가 끊겼다.
“…….”
끊은 건가?
가만히 액정을 쳐다보던 연우가 급기야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더 이상은 못 참겠다. 가족들에게는 그냥 아는 형이라고 하면 되는 거고, 차이든 어쩌든 당장 강서원의 얼굴을 보면서 말을 나누고 싶었다. 이런 식으로는 답답해서 안 될 것 같았다. 쾅. 차 문이 닫혔다. 연우는 보폭이 큰 걸음으로 현관문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그대로 문을 두드리려던 순간이었다.
덜컹. 문이 열렸다. 주먹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강서원이었다. 연우가 그것을 인식한 찰나, 그리고 그의 얼굴에 놀라움이 채 번지기도 전, 열렸던 문이 닫혔다. 밖으로 나온 서원은 말 한마디 없이 다짜고짜 제 앞에 선 단단한 어깨를 있는 힘껏 밀었다. 연우는 당황하며 주춤 뒤로 물러섰다.
“서원…….”
“왜, 왜……!”
퍽.
별안간 두 주먹이 다시 가슴팍에 부딪혔다. 이번엔 미는 게 아니라, 때리는 것이었다. 연우가 당황한 이유는 서원이 저를 때려서가 아니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은 엉망진창으로 화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부들부들 떨리는 온몸. 세게 다문 입술. 잔뜩 구겨진 눈썹. 원망으로 가득 찬 눈은 모조리 저를 향한 채다.
연우가 느끼기에는 꼭 콩주머니 같은 주먹이 제 가슴팍과 어깨를 퍽퍽, 여러 번 때렸다. 왜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러냐는 둥, 진짜 나쁘다는 둥, 온갖 원망의 말과 함께 그를 마구잡이로 때리던 서원은 잠시 후 제풀에 지쳤는지 씩씩거리며 팔을 거두었다. 그대로 들어가 버리려는 듯한 동작에 잠자코 서원을 내려다보고만 있던 연우가 급히 손을 뻗었다. 서원의 팔을 붙잡는다.
“잠깐, 서원아, 잠깐만.”
“놔요……!”
서원은 팔을 뿌리치려 했으나 붙잡은 손은 거셌다. 연우는 힘을 주어 그의 팔을 놓지 않으면서 주변을 살폈다. 집에서 누군가가 나오지 않을까 싶은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비이성적인 상대방의 행동 탓인지 삽시간에 머리 위로 찬물이 쏟아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리어 자신이 이성을 되찾기에 이른다.
‘안 되겠다.’ 생각한 그는 그대로 서원의 팔을 쥐고 끌었다. 몇 발자국 끌려가던 서원이 잡힌 팔이 아픈지 작게 신음을 내뱉었다. 그는 결국 서원을 뒤에서 끌어안은 자세로 몸을 옮겼다. 서원은 어깨를 헐떡거리며 숨만 거칠게 내쉴 뿐 몸을 비틀며 반항하지는 않았다. 계속해서 흐르는 눈물을 정리하는 것에 정신이 팔린 모양이었다.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 도착하자 붕 떠 있던 서원의 발이 땅에 닿았다. 서원을 내린 연우는 또 그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곧바로 한쪽 팔을 감싸 쥐었다. 서원은 남자의 눈을 피하며 울기를 멈추지 않았다. 훌쩍이는 소리가 작게 났다. 잠시 그 얼굴을 살피던 연우가 나지막이 물었다.
“……서원아, 내가 한 말이 많이 기분 나빴어? 그래서 이러는 거야?”
“아니요.”
“그럼 왜 그래? 내가 다른 실수한 거 있어?”
“…….”
팔을 쥐던 손이 스멀스멀 내려가 작은 손을 감싸 쥐었다. 달래는 것처럼 끈질기게 쥐락펴락한다.
서원은 어깨를 떨며 훌쩍거렸다. 여름의 밤바람이 그를 진정시키듯 여러 차례 뜨끈해진 뺨을 쓰다듬으며 지나갔을 때, 비로소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던 입이 파르르 떨리며 서서히 열렸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눈은 그대로였으나, 다행히 호흡은 어느 정도 진정되어 있었다.
“……나, 어린애 맞아요.”
“…….”
목소리는 입술처럼 파들파들 떨리고 있으나 자못 선명했다. 서원은 꼴깍 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형이 생각한 대로예요. 갖고 싶은 것보다 잃을 것 먼저 걱정하고, 변화가 있으면 두려워해요. 무언갈 좇는 것보다 숨은 적이 더 많고, 항상 갇혀 있어요. 스물네 살이나 먹고 아직도 이렇게 겁이 많은 거, 이상하다는 것도 알아요. 가끔 내 동생들보다 내가 더 어리숙하게 느껴질 때도 있으니까. 다 안다구요.”
“…….”
“……그래도, 그래도…… 내 감정까지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에요.”
말소리가 다시금 물기를 머금어 흐무러졌다. 서원의 입 모양이 서서히 서러운 모양으로 일그러졌다. 이윽고 그의 눈이 올라 탓하는 것처럼 연우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덜떨어져도, 그래도…… 나도 욕심이라는 건 있어요.”
“…….”
“나도 생각하면서 살아요. 내 감정 정도는 안다고. ……그래서, 그래서 노란 옷도 입은 건데…….”
‘노란 옷?’
연우가 의아함을 품음과 동시에 서원은 말을 흐리며 훌쩍거리더니 꼴깍 침을 삼켰다.
“……고백하려고 했단 말이에요.”
느리지만 선명한 읊조림이었다. 색이 선연한 그 목소리에, 쉼 없이 손을 조물락거리던 움직임이 점점 느려졌다. 연우의 눈이 크게 뜨인 채로 서원을 바라보았다.
결국 결론은 그거였다. 연우는 확신했다.
“…….”
고백하려고 했는데, 강서원도 저와 같은 마음이었던 건데, 자신이 성급하게 다 망쳐버렸던 거다.
그를 깨닫자, 뒤틀렸던 마음 한가운데부터 뜨끈뜨끈한 안도감이 스미기 시작했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던 땅이 서서히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저를 노려보던 시선이 다시 땅으로 툭 떨어지며 눈 마주하기를 거부했으나, 이 이상 불안하지 않았다. 도리어 안도감에 녹은 얼굴이 자꾸 실실 풀어져서 연우는 이를 꾹 깨물기에 이르렀다.
퐁퐁 쉴 새 없이 솟은 눈물은 흰 뺨을 타고 뚝뚝 떨어져 턱밑에 폭포를 만들었다. 연우는 조심스럽게 허리를 숙여 서원의 턱밑을 손등으로 훑어 주었다. 그리고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아래를 바라보는 눈두덩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노란 옷은 느닷없이 왜 나온 단어일까.’ 궁금했으나 물어볼 타이밍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실수한 거네.”
“네.”
그는 대신 용서를 구하듯 정중하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다정한 인정에도 서원은 딱딱한 태도를 일관했다. 쉬이 풀리지 않을 것 같은 그 모습에 연우는 되레 들끓었던 머리가 천천히 식어 가는 것을 느꼈다. 입꼬리가 스멀스멀 오른다.
안 돼. 여기서 웃으면 예의가 아니다. 시연우, 웃지 마. 이 개새끼야. 웃지 말라고. 그는 스스로에게 쉴 새 없이 말하면서 서원을 만지던 손을 천천히 거두었다. 입꼬리를 꾹 붙든 채 주먹을 느리게 쥐었다가 폈다.
“나 어떡할까?”
“…….”
“……오늘은, 그냥 갈까? 내 얼굴 보기 싫어?”
서원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한 번 더 주먹을 그러쥐고 연우의 어깨를 거세게 내리쳤다. 퍽! 감정이 잔뜩 들어간 그 주먹질에 연우는 다시 한번 웃음이 날 뻔했으나 가까스로 참았다. 여기서 웃어버리면 진짜 천하의 개새끼다. ……이미 조금 개새끼지만. 그는 인정했다.
결국 연우는 홀로 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시동을 걸고 엑셀을 밟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제 발을 내려본 순간, 그는 마침내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시발……. 나사 존나 빠졌네.”
얼마나 정신없이 나온 것인지 신발이 짝짝이였다. 왼발은 슬리퍼에, 오른발은 정장 구두다. 무게가 현저히 차이 났을 텐데도 심지어 여태껏 눈치채지 못했다. 자신의 신경이 온통 강서원에게로 쏠려 있었다는 증거였다.
우웅.
이윽고 차가 엔진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주택가를 벗어난 차는 금방 속력을 높였다.
* * *
어제부로 갤러리 일은 끝났고, 오늘은 과외를 하는 요일도 아니었다. 모처럼 집에서 쉬는 날이기는 했으나 마음이 불편한 탓인지 서원은 일찍 일어나고 말았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핸드폰을 확인했다. 형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
“…….”
먼저 든 생각은 ‘대체 내가 왜 그랬지.’였다.
어젯밤에는 불같이 화를 냈으나 오래 쌓여 있던 게 아닌, 순간적인 분노인 만큼 불은 쉽게 타오르다 홀로 꺼졌다. 서원은 그가 떠난 골목길에서 우는 얼굴을 정리하고 조용히 집에 들어와 씻은 뒤, 잠자리에 누워 천장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끝내는 제가 너무 과민 반응을 한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물론 그가 무심했고 저를 무시한 건 맞지만, 또 형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 못내 섭섭하기는 했지만 그렇게까지 화낼 일은 아니었다.
“…….”
대체 왜 그랬어, 강서원. 진짜 미쳤냐고.
서원은 부은 눈으로 아침밥을 먹다가 기어이 인상을 찌푸렸다. 도무지 이토록 자신을 이해할 수 없는 적은 처음이었다. 이성 따위는 증발해버리고 감정에 온몸이 지배당하는 것. 왈칵, 물이 쏟아지는 것처럼 부지불식간에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 버리는 경험. 그 기묘한 경험이 서원을 계속 짓눌렀다.
“……아냐. 침착하자.”
서원은 마침내 수저를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자못 비장한 얼굴로 이를 닦고, 다시 침대에 엎드리고 누운 그는 핸드폰을 들었다. 연우와의 채팅창을 열었다.
“형…… 어제는…… 제가 죄송…… 아니야. 음…… 경, 솔…… 했습니다……?”
손가락은 역시 그의 말을 따라 글자를 썼다. 어느 날과 똑같이 액정을 노려보던 서원이 이윽고 단호하고 빠르게 제가 썼던 글자를 지워버렸다.
서원은 손톱을 물어뜯으며 고민하다가, 잠시 후 다시 핸드폰을 꾹 쥐었다. 손가락을 움직이려고 할 때였다. 돌연 채팅창 안에 새로운 말풍선이 떴다.
[연우 형] 서원아 일어났어? 통화 돼?
상대편의 말풍선이었다. 야멸찰 정도로 순식간에 읽음 표시가 뜨는 것을 망연히 바라보면서 서원은 기시감을 느꼈다. 한참 동안 망설이던 그가 마침내 보낸 답장은 ‘네’ 였다.
남자 역시 서원처럼 채팅창을 바라보고 있었던 듯 금방 수신이 확인되었다. 곧바로 전화가 왔다. 서원은 침대에 똑바로 앉아 천천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목소리는 긴장으로 잔뜩 쪼그라든 채였다.
「응, 서원아, 잘 잤어?」
그러나 저와 다르게, 그의 목소리는 꼭 어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정하고 편안했다. 서원은 급기야 알 수 없는 허탈감을 느끼면서 “……네.” 하고 대답했다.
「오늘 아침에 집까지 찾아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서 지금 하동으로 내려가는 중이거든?」
“네.”
서원은 대답하고 있었으나 사실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좀 혼란스러운 까닭이었다. 그의 태도로는, 결과적으로 그와 저의 관계가 어떻게 된 건지 전혀 유추할 수가 없었다. 어제의 일로 달라진 건 있는 건가, 사귀기 시작하는 건가, 그걸 어떻게 증명하지, 물어볼까, 촌스러워 보이려나, 하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서원의 머릿속을 빼곡하게 채웠다.
남자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하동에 준호 내려 주고 형만 올 거야. 준호는 오늘 여기서 자고 갈 거니까 내일 과외 안 해도 될 거고. ……서원아, 듣고 있어?」
“네.”
대답하는 서원의 목소리에서 하나도 듣고 있지 않았다는 티가 났다. 남자는 괘념치 않는다는 듯 천진하게 말을 이었다.
「음…… 준호 내려 주고…… 조부모님한테 인사드리고, 다시 서울 올라가면…… 저녁 7시쯤 되겠네. ……서원아,」
“네.”
「8시에 올래?」
“네…… 네?”
그는 안 듣고 있는 줄 알았다는 듯 낮게 웃었다. 그리고는 재차 말해 주었다.
「8시에 형 집 오라고. 시준호 없으니까.」
“…….”
「바빠?」
“……아, 아뇨. 네. ……갈게요.”
별것도 아닌 일상적인 말인데도 이상하게 심장이 쿵쿵 뛰었다. 서원은 제 심장 부근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진정시켰다. 가까스로 대답하자 그가 다시금 웃었다.
「그래. 따로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문자 해. 사 둘게.」
서원이 대답하려고 입을 떼었을 때였다. 수화기 너머로 탁, 차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아, 화장실에 사람 대따 많아!」 하며 시끄럽게 밀려드는 목소리는 준호의 것인 듯했다.
「밤에 봐.」
“……네.”
전화가 끊겼다. 잠시 멍하니 꺼진 액정을 바라보던 서원이 이윽고 핸드폰을 침대에 버리듯 내려놓았다. 그리고 후다닥 뒤뜰로 달려갔다. 뒤뜰에는 어젯밤에 세탁한 옷가지들이 정갈하게 널려 있었다. 서원은 그 사이에서 펄럭거리는 노란 티셔츠의 소매를 확인하듯 만져 보았다.
티셔츠는 거의 다 말라 있었다.
* * *
초인종 소리가 났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고 있던 연우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벽시계를 확인하니 시간은 정확히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비죽비죽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집어삼키면서 대문을 열었다.
“왔어?”
서원은 젖은 머리의 그가 조금 놀라운 듯 크게 눈을 뜨며 그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뒤늦게 “네.” 했다. 연우는 몸을 비켜서며 들어오라고 말했다. 오래된 로봇 같은 삐걱거리는 동작으로 들어서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는 한 번 더 웃음을 삼켰다.
“아직도 화났어?”
연우는 소파에 털썩 앉으며 건네듯 물었다. 소파에 앉지도 못하고 어중간한 위치에,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던 서원이 흠칫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미끄럽게 웃는 입술과, 또 직설적인 물음에 홀린 듯 고개를 내젓는다.
“그럼 이리 와 봐.”
남자는 제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서원은 곧장 그에게로 다가갔다. ‘오늘도 노란 옷 입었네.’ 그는 가볍게 생각하면서 자연스레 서원의 몸을 들어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가까운 데서 눈을 마주하려고 했으나 서원은 쉽사리 시선을 붙들지 못했다. 급기야 저 좀 보라고 주장하듯 커다란 손이 허리를 꽉 끌어안아 몸을 더 밀착시켰다.
“…….”
“…….”
검은 눈이 집요하게 서원의 얼굴을 물끄러미 훑었으나, 서원은 더욱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시선의 추격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기어이 남자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왜 갑자기 어리바리해졌어? 어제는 무섭게 혼쭐을 내더니.”
속삭이는 목소리는 기분 나쁜 투가 아니었다. 도리어 가뿐해 보였다.
여전히 달싹거리기만 할 뿐 대답하지 못하는 입술을 슬쩍 내려다보던 눈이 다시 서서히 오른다. 톡. 이마가 맞닿았다. 서원은 뜨거운 시선에 못 이겨 제 얼굴이 새빨개졌을 거라고 짐작했다. 불현듯 참을 수 없는 기분에 슬쩍, 얼굴을 뒤로 물리려는 순간이었다.
그대로 입술이 맞닿았다.
몰아붙이는 것 같은 키스에 서원은 그대로 이끌렸다. 사나운 입술이 힘을 주자 입이 딸려가듯 저절로 벌어진다. 그 틈으로 밀려드는 혀에 정신을 쏙 빼앗기는 듯했다. 츄웁, 춥. 아랫입술을 빨다가 혀를 또 휘감는 감촉이 저릿했다.
서원은 입 안의 점막을 모조리 맛보려는 듯한 키스를 겨우 받아내면서 그의 어깨를 꾹 붙들었다. 닿아 있는데도 더 먹어 치울 것처럼 자꾸 다가오는 입술이 못내 거칠다.
한참 뒤 입술이 떨어졌다. 남자는 흥분에 못 이긴 숨을 거칠게 내쉬면서도 웃는 얼굴을 했다.
“……어제, 이렇게 하고 싶었는데…… 이러면 한 대 더 맞을까 봐 무서워서.”
“하아…… 하…….”
낮은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경직된 뇌로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서원은 그저 숨만 헐떡였다. 남자는 여전히 대답하지 못하는 입술에 쪽, 소리 내어 뽀뽀했다. 그리고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아침에 병원 갔다 왔는데, 어깨 전치 4주래.”
“…….”
“어떡해? 나 수영 좋아하는데, 어깨 다 박살 나서 이제 수영도 못하게 생겼어.”
“……거짓말…….”
서원은 눈치를 보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남자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웃음소리를 듣고 나니, 돌연 어젯밤부터 진지하게 고민했던 모든 것들이 우습게 느껴진다.
그의 장난기와 다정함은 이런 힘이 있었다. 무게감을 쉬이 덜어내고, 이런 건 문제도 아니라는 듯한 그 여유로움과 가벼움. 그게, 모든 걸 복잡하게 생각하는 자신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내가 잘못했어, 정말로.”
연우는 웃음을 그치고 말했다.
“……네……. 저도 때려서 죄송해요.”
서원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러면서 어제 제가 때렸던 그의 어깨를 조심스레 쓰다듬는다. 연우는 실실 웃는 얼굴 그대로 서원의 목에 제 입술과 코를 묻었다. ‘귀여워 죽겠어.’ 생각하며 마른 목덜미 곳곳에 입술을 찍어 내렸다.
“안 미안해해도 돼. 앞으로도 형이 잘못한 거 있으면, 어제처럼 때리고 화내.”
“…….”
“이제 그래도 되는 거잖아.”
이제 그래도 되는 거.
이제 그래도 되는 관계.
심장이 뻐근해졌다. 서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은근슬쩍 서원의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었다. 아까부터 뭐가 그렇게 긴장이 되는지 녀석의 가쁜 숨이 연신 살갗에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결국은 그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정말 한계였다. 하물며 이제는 정말 제가 변태 새끼라는 걸 인정해도 되는 단계였다. 연우는 속 편하게 시인하며 손을 움직였다. 손바닥에 마른 허리만 감겼을 뿐인데도 벌써부터 아래가 묵직해져 왔다. 부드럽고 따듯한 살결이 자꾸 굶주린 개처럼 침을 고이게 만들었다.
……이렇게 목덜미에 코를 박으면 슈크림처럼 달콤한 향기가 난다. 또, 감촉이랑, 따뜻한 것도, 하아…… 그냥, 완전…… 씨발.
“형……! 잠깐만, 잠깐만요…….”
“……응? 어, 왜?”
그때였다. 뱀이 나무에 올라타듯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티셔츠를 들추며 허리를 깊숙이 감싸 오던 팔이 더듬거리는 손에 의해 저지당했다. 연우는 기껏 태연한 척 눈을 둥그렇게 뜨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의 팔을 잡은 서원이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턱을 조금 떨고 있는 게 그제야 보인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 거지?’ 연우는 생각하면서 “왜 그래?” 하고 한 번 더 물었다.
“있잖아요, 형, ……저……, 할 말이 있어요.”
“……으응. 해 봐.”
그는 그걸 꼭 지금 해야 하냐고 묻는 본능의 입을 틀어막으면서 대답했다.
서원은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면서 어딘가 불편한지 엉덩이를 달싹인다. 그 행동에 연우는 치미는 욕을 겨우 삼켰다. 기어이 아래가 아파 올 지경이다. ‘분명 엉덩이에 딱딱한 게 느껴질 텐데 어떻게 저리 아무렇지도 않게 자극할 수가 있지? 시발. 저건 일부러 저러는 거야. 분명해.’ 조금 약이 오른 그가 심술맞게 생각하면서 턱을 꽉 깨물었다.
그런 그의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원은 “음……” 하고 말을 길게 끌면서 그의 어깨를 조물거렸다. 일부러 놀리는 게 아닐까 느껴질 정도로 아이는 한참 동안을 ‘그게’, ‘저기’, ‘그러니까’를 번갈아 말했다.
“…….”
안 되겠다.
이대로면 진짜 인내심이 폭발해서 강서원이 놀랄 행동을 저질러 버릴 것만 같다.
돌연 이성이 휘청이는 게 느껴진다. 곧 있으면 와르르 무너질 것만 같은 불안감에 연우는 저도 모르게 서원의 허리를 꽉 쥐었다. 그 순간, 꼭 누르면 말이 나오는 인형처럼 서원은 급하게 툭, 말을 내뱉었다.
“조, 좋아해요.”
“…….”
다갈색 눈 위로 초조함이 스친다. 한 품에 들어오는 상체가 더 깊숙이 남자의 몸에 파고들었다. 투둑. 한 번 새어 나온 감정은 직후 거세게 폭발하기 시작한다.
쪽. 쪽. 쪽. 쪽.
서원은 빠르게 남자의 얼굴 곳곳, 정확히 말하면 평소에 제가 유달리 시선을 빼앗겼던 그의 눈썹 뼈, 높은 콧대, 서늘하게 생긴 눈꼬리, 시원하게 트인 입술 끝자락에 순서대로 입을 맞추고는 마지막으로 쭈압, 소리가 날 정도로 남자의 입술에 진하게 뽀뽀했다. 그리고 눈을 마주하면서 다시 한번, 선명하고 조금은 커다랗고, 또 많이 떨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해요, 형.”
“…….”
“어제도 말했지만, 제대로 말하고 싶었어요. 그래야 좀 더……, 읏……!”
부끄러움에 도리어 이성을 놓고 폭주한 사람처럼 서원은 새빨개진 얼굴로 말을 이리저리 내뱉었다. 터질 듯이 질주하던 고백은 급기야 연우에 의해 멈춰졌다.
퍼억, 소리가 났다. 동시에 시야가 휙 돌아간다. 등이 푹신하다 싶더니 그대로 소파 위에 눕혀진 듯했다. 서원이 눈을 깜빡이는 사이 차가운 이목구비를 가진 얼굴이 뜨겁게 불타는 눈을 하고 서원을 내려다보았다. 화난 것만 같이 사나운 그 눈빛에 서원은 갑자기 무서워져 꼴깍 침을 삼켰다.
“……그 얘기 하려고 여기 왔어?”
“……네.”
“예쁜 옷도 입고?”
어제 들었던 이야기를 상기하면서 남자는 물었다. 그 얘기는 좀 부끄러워서, 서원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잡아먹을 듯 또다시 서원의 입술을 삼켰다. 한쪽 손은 서원의 뺨은 감쌌고, 다른 한 손은 티셔츠를 비집고 들어섰다.
“하아……, 하…….”
“……안 되겠다.”
남자는 갑자기 키스하던 입술을 떨어뜨리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서원의 엉덩이를 받쳐 든다. 마른 몸을 안아 든 그는 성큼성큼 침실로 들어섰다. 서원은 남자에게 안겨 방에 들어서는 동안 그의 목을 꽉 붙든 채로 헐떡이는 숨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부드러운 손길이 서원을 커다란 침대 위에 눕혔다. 남자는 서원 위에 올라타 마른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거친 숨결이 예민한 살갗을 자꾸만 자극했다. 서원은 남자의 목에 팔을 두르면서 허리를 뒤틀었다.
“서원아, 형은…… 씨발, 형은 말야, 원래 열심히 사는 거 별로 안 좋아하거든? 응?”
추웁, 춥. 입술이 떨어지면서 질척거리는 소리가 났다. 남자는 벌써 울긋불긋해진 목덜미에 더 세게 자국을 남기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정신없이 목덜미를 빨았다가, 입술을 떼고 말을 했다가를 반복했다. 서원은 움칠거리면서도 응, 하고 신음인지 대답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흥분으로 들끓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근데 이상하게……, 너한테는 안 그러기가 힘드네.”
“…….”
그게 무슨 뜻일까. 서원이 해석하려는 찰나 남자는 입술을 떼고 제 호흡을 진정시키면서 서원을 수직으로 내려다보았다. 서원은 마치 수렁같이 까맣고 깊은 눈에 홀린 듯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엉킨 두 숨이 차츰 농도 높고 찐득하게 공기 밑으로 가라앉을 때였다. 남자는 고개를 숙여 입술이 닿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리고 마치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작게 속닥거렸다.
“……집요하게 굴고 싶어.”
“…….”
커다란 손은 범위를 키워 스멀스멀 서원의 흉통과 가슴을 쓸어 만졌다. 서원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면서 그 손길에 이끌리듯 허리를 살짝 띄웠다가 가라앉혔다. 엄지가 유두를 스치자 움찔거리는 반응에 연우는 고인 침을 삼켰다. 공연히 침착하게 말을 잇는다.
“깊은 곳까지 보고 싶고…… 아무도 모르는 것까지 알고 싶고 그래.”
“…….”
쪽. 남자는 서원의 뺨에 키스한 뒤, 다시 서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돼?”
어조만 정중할 뿐 치밀한 욕심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서원은 그를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모를 애매한 표정을 하고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슬쩍 입꼬리를 늘렸다. 그리고 저보다 작은 상체를 안고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다시 서원을 제 허벅지에 앉힌 채로, 그는 노란 티셔츠를 벗길 듯 말 듯 살짝씩 감질나게 움직이며 보송한 허리를 끈질기게 매만지다가 이내 더듬더듬 티셔츠의 밑단을 잡았다. 안 될 걸 하는 것도 아닌데 상대방은 여기까지 와서도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진짜 나쁜 짓이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
‘아.’
마침내 티셔츠가 스멀스멀 배 위까지 올라갔을 때, 서원은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별안간 두근거리는 박동이 귀 아래를 시끄럽게 두드린다. 멀미가 나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서원은 꼴깍꼴깍 침을 삼켰다. 얼마나 크게 삼키는지 고개가 껄떡거릴 정도였다.
서원은 저를 살피는 검은 눈을 피하지 않고 입술만 깨물었다. 티셔츠가 그대로 거두어진다.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는 살갗 위로 오소소 소름이 돋는 듯했다. 서원은 떨지 않으려 무던히 노력하며 그가 제 티셔츠를 벗기는 것에 협조했다. 비로소 노란 티셔츠에 의해 가려있던 희고, 마른 몸이 온전히 드러났다.
그 순간이었다. 끼익. 좀처럼 조용했던 침대 매트리스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 * *
서원은 몹시 긴장했다. 침대 위에 무릎으로 선 남자가 저를 빤히 내려다보며 제 티셔츠를 벗을 때는 정말이지 어디론가 도망이라도 치고 싶을 정도였다.
몸이 좋을 거라는 것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옷을 입고 있는 모습만 봐도 예사롭지 않다는 게 티가 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머리가 떠올릴 수 있는 상상은 평면적이었으며, 한계가 있었다. 짐작하고 있어도 실제로 목격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균형 있게 박혀 있는 섬세한 근육들, 힘줄이 도드라진 살갗, 입체적인 모양의 골격들까지. 그 무엇도 살아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현실이다. 진짜, 그의 몸이 제 앞에 있었다.
그런 생각이 서원의 머리를 스친 찰나, 남자는 살짝 웃더니 티셔츠를 침대 밖으로 던졌다. 그리고 몸을 한껏 숙여 서원을 한 품에 안아 왔다. 그는 서원을 뒤에서 안은 자세로 다리를 펴 침대 헤드에 상체를 기대었다. 형의 무릎 위에 앉은 적은 꽤 있었지만, 이렇게 뒤에서 안긴 적은 없었다. 서원은 맨등에 남자의 근육들이 맞닿는 감촉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또 한 번 침을 삼켰다.
“긴장돼?”
나지막하면서도 풍성한 목소리가 귓바퀴에 미끄러지며 들어왔다. 입술이 귀에 살짝씩 닿아 오는 게 느껴진다. 서원은 몸을 움츠리며 살짝 떨리는 제 손을 꾹 모아 쥐었다. 고개를 작게 끄덕인다. 남자는 낮게 웃는 소리를 내었다.
기분 좋게 서늘한 체온의 손이 서원의 바지춤에 더듬더듬 닿아 왔다. 남자는 서원의 어깨에 턱을 대고, 닿을 수 있는 살갗이면 어디든 입술을 맞추면서 자연스럽게 바지를 벗겨냈다.
남자가 바지를 벗길 수 있게 엉덩이를 들고 무릎을 굽혔다 펴는 동작까지도 경직되어 있던 그 몸은, 이윽고 이어지는 부드러운 손길에 녹는 듯 서서히 풀어졌다.
남자는 거의 한 시간에 가까운 오랜 시간 동안 서원을 뒤에서 안은 채로 그의 몸 여기저기를 만지거나, 주무르기만 했다. 성적인 구석 하나 없이 몸을 만지는 손은 꼭 마사지를 하는 것 같았다. 하나 남아 있는 속옷 근처를 지날 때마다 어김없이 움칠거리던 몸이 어느 순간부터 진정되어 갔다.
“…….”
“…….”
정말 우습게도 어느 순간, 잠이 왔다. 눈을 깜빡거리는 속도가 차츰 느려지면서 몸이 흐물흐물 풀리는 듯했다. 끈질길 정도로 정성스레 살을 매만져 오는 그 적당한 압박감과, 맞닿은 살이 따뜻하게 데워진 느낌이 안온했다. 기어이 서원의 몸이 축 늘어져 남자의 몸에 온전히 기대었다.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쪽, 맨 어깨에 입을 맞추면서 손가락으로 슬쩍 서원의 속옷을 쥐었다. 남색 브리프가 하얗고 마른 허벅지를 따라 느리게 내려가는 걸, 서원은 노곤한 눈빛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애기야.”
몇십 분간 말을 하지 않은 탓에 남자의 목소리는 조금 잠겨 있었다.
“……네…….”
“잠 와?”
속옷이 허벅지 중간까지 내려가서야 손가락이 멈추었다. 속삭이는 목소리에 서원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며 푹,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는 서원의 귀밑에 키스하면서 슬금슬금 서원의 것을 매만졌다.
“흐……!”
그 순간, 노곤함에 푹 절어 있던 눈이 동그랗고 크게 뜨였다. 놀란 고양이가 번쩍 털을 세우는 것처럼 늘어져 있던 몸이 일순간 긴장으로 잔뜩 조여졌다. ‘진짜 예민하네.’ 남자는 감탄하듯 생각하면서 달래는 목소리로 “괜찮아. 아무것도 안 했어.” 했다. 서원은 안절부절못하면서 제 것을 쥔 남자의 손을 건드렸다가, 떼었다가를 반복했다.
“아, 형……, 읏……!”
“혼자 안 해봤어?”
안 해봤을 리는 없겠지만 굳이 물어보니 잔뜩 새빨개진 귀와 목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자는 긴장해서 반쯤 선 성기를 부드럽게 쥐고 위아래로 쓸어내렸다. 서원은 그의 엄지가 귀두를 슬쩍 건드릴 때마다 움찔움찔 떨었다.
“아, 잠깐……. 하아…… 형…….”
“여기 이렇게 해주는 게 좋아?”
“응……. 으읏…….”
고작 조금 주물럭댄 걸로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엄지가 귀두를 꾹꾹 누르듯이 비비기 시작하자 서원은 앓는 소리를 내며 마른 등을 부들부들 떨었다. 성격이 예민하고 스트레스와 자극에 약한 편인 건 알았는데, 몸도 그랬다. 시연우는 침을 삼키며 서서히 젖어드는 손을 더 빠르게 흔들었다. 맞댄 살의 체온이 점점 높아지는 게 느껴진다.
“아, 으……!”
서원은 쭉 뻗고 있던 두 무릎을 세우면서 몸을 살짝 뒤틀었다. 돌연 남자의 손안에 뜨거운 정액이 흩뿌려졌다. 별로 흔들지도 않았는데 왕창 느끼면서 금방 싸버리는 게 귀엽다. 남자는 반대편 손으로 서원의 턱을 쥐어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쪽, 입술에 비스듬히 키스했다.
그는 그대로 팔을 뻗어 침대 옆 협탁을 열어 티슈로 제 손을 닦아내었다. 이내 손바닥 위로 윤활제가 주르륵 흘렀다. 남자는 값비싼 도자기를 다루듯 서원을 안았다. 서원의 등이 침대에 안착했다. 서원은 쿵쿵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는 데에 정신이 없었고, 사정 탓에 몸이 나른해져 있었다. 남자는 서원의 어깨와 목 부근에 얼굴을 묻었다. 느긋하면서도 집요하게 흔적을 만들면서 힘없이 늘어진 가랑이 사이에 손을 집어넣었다.
“흣……!”
검지가 구멍을 둥글게 지분거리다가 이윽고 좁은 입구를 비집었다. 그 얕은 삽입에도 서원은 펄쩍 놀라면서 허리를 튀어 올렸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있던 눈이 한순간 동그랗게 커진다. 하여간 엄청 손이 가는 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반응이 사랑스럽게 느껴져 남자는 발갛게 달아오른 뺨에 키스했다.
손가락은 빠르지 않지만 더디지도 않은 속도로 서원의 속을 파고들고 있었다. 서원은 엄청난 걸 받아내는 것처럼 가슴팍을 연신 들썩거렸다.
“으응, 으……. 형, 잠깐, 잠깐만요…….”
처음 느끼는 이물감이 못내 싫은 모양이었다. 서원은 참지 못하고 남자의 목을 감싸 안으며 칭얼거렸다. 남자는 손가락을 움직이는 걸 멈추지 않으면서 “괜찮아. 많이 이상해?” 하며 달래는 목소릴 냈다. 서원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네, 이상…… 아, 으응…….”
“어쩔 수 없어. 풀어 줘야 형 걸 넣지.”
“안……, 안 넣으면…… 오늘만…….”
서원은 흐린 발음으로 말했다. 무서운데, 무서운 걸 참으려니 눈물이 찔끔찔끔 나기 시작했다. 남자는 달래듯 서원의 뺨에 제 뺨을 슬쩍 비비다가 가까운 곳에 얼굴을 대고 나지막이 물었다.
“……넣지 마?”
“네…….”
진심으로 제안한 거였으니, 그도 진심으로 되묻는 줄로 알고 서원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허나 서원이 대답함과 동시에 남자는 보란 듯 손가락을 하나 더 구멍에 쑤셔 넣었다. 불시의 삽입에 놀란 서원이 어깨를 확 움츠렸다.
“아, 읏……!”
“넣지 말라고?”
여전히 천연한 목소리가 빙글, 귓전을 돌았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콱콱 손가락을 구멍에 잘게 치대기 시작했다. “읏, 으응……!” 서원은 기다란 손가락이 내벽을 쑤시며 넓혀 올 때마다 몸을 움칠움칠 떨었다. 분명히, 저의 얼굴은 겁을 집어먹은 표정일 터인데도 그는 모르는 척을 한다. 서원은 그를 목격하고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형 좆 터지면 어떡하려고?”
“아, 자꾸…… 세게 하지, 으응……!”
“왜 말을 섭섭하게 해.”
“아파, 으, 읏……!”
말만 그렇게 하지 그의 손가락은 섭섭한 사람의 것치고는 활기가 넘쳤다. 점점 세게 구멍을 파고드는 손가락들과 그의 태도가 야속해 서원은 결국 참지 못하고 그의 어깨를 힘주어 밀어버렸다. 어깨는 꿈쩍하지 않았다. 연우는 모르는 척 서원의 입술에 쪽쪽 뽀뽀했다.
곧이어 아래를 넓히던 손가락이 빠졌다. 연우는 서원의 무릎까지 돌돌 말려 내려간 속옷을 마저 다 벗겨냈다. 그리고 급한 손짓으로 제 바지를 벗고 성기를 빼내었다. 한참 동안의 시간 동안 발기했다가, 마치 도 닦는 심정으로 참아내기를 반복하던 성기는 기어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듯 흉흉하게 부풀어 있었다.
그 성기를 보자마자 서원은 머리가 핑 도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심장이 펑펑 튄다. 손가락 세 개도 무서웠는데, 저게 제 몸 안에 들어갈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하아, ……형, 잠깐…….”
“천천히 넣을게. 아래도 부드럽게 풀었어. 괜찮아.”
달래는 투는 상냥하기 그지없었으나 손길만큼은 거칠고 강했다. 곧이어 골반을 고정하는 것처럼 붙드는 두 손이 겁을 한 움큼 더 집어 먹인다. 서원은 반사적으로 상체를 비틀었으나 효과는 없었다.
비로소 성기 끝이 허벅지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서원은 한 번 더 “형…….” 하고 간절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러나 남자는 응, 응, 다정하게 대답만 해줄 뿐이었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귀두가 긴장으로 잔뜩 조여든 구멍 안으로 천천히 들어왔다. 제 말을 듣지 않는 형에 대한 설움과 아래를 쑤셔 올 감각에 대한 공포가 넘실거리는 바닷물처럼 일렁이다가, 돌연 전신을 덮쳐 왔다. 서원은 급기야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으응, 읏, 흑……! 아……, 흣……!”
“응, 거의, ……하아, 거의 다 들어갔어.”
그의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알 수 있는 건 그 두꺼운 굵기 탓에 벌써부터 숨이 턱턱 막혀 온다는 것이었다. 서원은 어떠한 칭얼거림 대신 남자의 맨 어깨를 세게 쥐었다. 하지만 먹혀들지 못했다. 성기는 여전히 비좁은 구멍에 꾸역꾸역 성실한 속도로 들어가고 있었다.
“아, 아파요, ……형, 으, 응……!”
“좀만 참아 봐, 서원아. 응? 괜찮아.”
사실 그가 끈질기게 풀어 준 덕에 참지 못할 정도로 아래가 아프진 않았다. 다만 목 끝까지 차오르는 압박감을 어떻게 표현할지 모르겠어서 서원은 아프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했다. 도리어 제 반응에 무슨 자극이라도 받은 양 내벽을 파고드는 속도가 더 빨라지고 있었다.
서원은 그제야 깨달았다. 형은 절대 제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흐, 으으……! 읏……!”
“……하, 아…….”
울면 무조건 달래 주었던 그가 짐짓 모르는 척하는 게, 지금 다른 무엇보다 제일 서러웠다. 그의 달콤함에 꾸준히 절여진 마음속 깊은 곳의 이기심이 썩은 이처럼 서원의 이성을 툭툭 건드린다. 마음 한구석이 치통을 앓는 것처럼 쿡쿡 쓰렸다. 서글픔이 계속 이성을 건들고 있었다. 기어이 흔들거리던 치아가 확 뽑혔다. 동시에 서원은 펑펑 울기 시작했다.
“아으, 흣, 흑……!”
“응, 괜찮아, 괜찮아.”
“흑, 아프단 말이에요……. 형은 모르면서, 흑, 모르면서……, 아래가, 막, 벌어져서……, 아, 흣……!”
“괜찮아. 안 아파, 이제 조금만, 응?”
하나도 안 듣고 있으면서 괜찮다고만 한다. 어르는 것처럼 뺨에 뽀뽀하는 것조차 야속하게 느껴져서 서원은 입술을 꾹 깨물다가, 다신 세게 때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그의 어깨를 또 힘을 주어 때려버렸다.
“왜 제 말 안 들어요, 못된 사람처럼…….”
“나 못된 사람 같아?”
기어이 서원의 아래를 제 성기로 꽉 채운 연우는 그제야 실실 웃으면서 되물었다. 제 말을 전혀 듣지 않을 것 같은 태도였다. 끝내 괜히 힘을 빼는 것보다는 차라리 가만히 있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원은 그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얼굴을 가렸다. 일렁거렸던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제 두 손목을 쥐고 올리는 손에 의해 저지당했다. 쓰윽 다가온 눈이 서원을 묘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그 아래 버거울 정도로 가득 차 있는 욕심을, 서원이 발견하기도 전이었다.
“아……, 응!”
별안간 성기가 서원의 안쪽을 쳐올렸다. 내장이 출렁이는 듯했다. 관통당하는 듯한 감각에 놀란 서원이 발가락을 움츠리며 눈을 크게 떴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 것처럼 얄팍한 가슴팍이 헐떡거린다.
남자는 비열하게 느껴질 정도로 느긋하게 웃으며 서원의 얼굴에 제 얼굴을 가까이했다.
“서원아.”
“아아, 읏……!”
남자는 성기를 깊숙이 박더니 이윽고 속도를 높였다. 퍽, 퍽, 하는 강한 마찰음이 연이어 났다. 끊임없이 엉덩이를 드나드는 성기에 의해 마른 몸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그는 정신을 못 차리겠다는 듯 미묘하게 일그러진 서원의 얼굴을 짙은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하아…… 씹……, 애기야.”
“응, 으응, 읏…… 하읏……!”
“빨리, 형 혼내 줘야지.”
포기하면 어떡해.
이상한 말이었다. 서원은 당황하면서 그를 쳐다보았으나, 곧 철퍽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박혀 오는 성기에 턱을 세우고 신음을 내뱉었다. 몸을 움직이고 싶었는데 제 손을 꽉 쥐는 힘에 무엇도 할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자극당하는 아래가 점점 민감해지고 있었다. 간질거리고 아래가 당기는 느낌에 서원은 눈을 세게 감았다 떴다. 시야가 아찔하다.
“으으, 읏, 형…… 형아, 으…… 읏! 거기, 흣, 거기 안, 돼……, 읏……!”
“시연우, 혼나야지, 응? 봐봐 서원아,”
“아, 응, 아아, 힉……, 으, 으읏……!”
“내가 지금……, 하아, 서원이 말 안 듣고, 존나, 씹질하고 있잖아.”
남자는 거기 안 된다는 서원의 말에 청개구리처럼 미친 듯이 그 부분만을 쑤셔댔다. 젖은 살덩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크고 빨랐다.
그 소리가 귀에 둥둥 울릴수록 자꾸 이상한 감각이 아래를 자극했다. 소변이 마렵다 못해 이미 나온 것만 같은 착각에 서원은 퍼뜩 놀라 제 아래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감각이 그런 것뿐이었다. 제 아래에 형의 성기가 나왔다가 처박힐 때마다 그 감각은 더 심해졌다.
“힉……! 형아……, 으으, 응, 쌀 것……, 하읏, 아, 아!”
“혼 안 내? 빨리, 서원아, 어?”
“흐응, 만지, 만지지 마아, 안, 안 돼, 으응……!”
“하아, 하…… 존나, 귀여, 워, 씨발…….”
갑자기 성기를 덥썩 감싸 쥐는 손에 서원은 발작하듯 몸을 바르작거렸다. 마침내 풀려난 손은 그대로 남자의 어깨를 밀어내려 애썼으나 남자가 몰아붙이는 힘에 비하면 너무나도 미약했다.
감당 못 할 쾌감이 몰아친다. 그것은 성기를 주무를 때와는 다른 감각이었다. 요도를 자극하는 것처럼 찌릿거리는 감촉이 연달아 아래를 내리쳤다. 서원은 진짜 형의 앞에서 실수라도 할까 봐 덜컥 무서웠다.
“하, 으……!”
별안간 남자의 손이 꾹 귀두를 짓누름과 동시에 한 번 더 서원의 말랑해진 구멍을 콱, 틀어막았다. 그와 동시에 남자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던 마른 허벅지가 뚝, 멈추었다. 이윽고 벌벌 떨리기 시작한다. 투둑, 툭. 그 흰 살갗 위로 두 번째로 쏟아낸 정액이 터져 흘렀다. 남자는 그 뒤로 한참을 더 서원을 붙들고 허릿짓을 한 뒤에야 아이의 배 안에 사정했다.
“……하아, 하아…….”
다행히, 실수하지 않았다.
배 안에 느껴지는 이상한 감각보다는 그런 생각과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은 결국 다시 퐁퐁 눈물을 쏟아냈다. 자꾸, 실수할까 봐서 조마조마한데 제 아래를 미치도록 쑤셔대는 성기도 모자라 제 것까지 주물럭대는 손이 다시 생각해도 너무나 미웠던 탓이었다. 그에 더해 형은 사정해 놓고도, 또 모르는 척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안에 들어찬 성기는 식지 않고 여전히 내장을 압박하고 있었다.
“하아, 읏…… 으으…….”
안에서 사정하여 구멍 밖으로 살짝 새어 나온 정액 탓에 성기가 움직일 때마다 접합부에서 찌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연우는 허리를 부드럽게 움직이면서 축 늘어진 서원의 몸을 제 팔로 단단히 감싸 맸다. 그리고 뭐가 그리 서운한지 찔찔 눈물만 흘리느라 정신이 없는 서원의 얼굴에 키스하면서 “울지 마, 응? 괜찮아.” 하고 작게 속삭였다. 서원은 어깨를 떨면서 울음을 이어 갔다.
“왜 그렇게, 못되게 굴어요…….”
“내가 그랬어? 미안해.”
연우는 모르는 척 말하면서 서원의 떨리는 등을 연신 쓸어내려 주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엉덩이를 토닥이다가 꼬집기도 했다. ‘엉덩이도 귀엽네.’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흥분감이 몰려든다. 나중에 후배위로 섹스하게 되면 이 예쁜 엉덩이 사이에 제 좆이 들락거리는 광경을 봐야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서원을 나긋나긋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말랑하다 못해 녹은 치즈처럼 흐물거리는 몸을 품에 꼭 안아 주었다.
서원은 순순히 안겨들면서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훌쩍였다. 결국 살짝 미간을 찌푸리면서 눈을 감는다. 젖은 속눈썹이 꾹 눈 아래에 눌렸다. 투명한 눈물 한 방울이 똑 떨어져 연우의 어깨를 길게 타고 흘렀다.
2권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