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Another (3/8)

3. Another

퇴근이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서원은 가게 의자에 걸터앉아 쉬고 있었다. 평소라면 멍하니 앉아 가게 통유리 창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겠지만, 요즘은 좀 달랐다.

[준호 형님] 오늘 알바 10시에 끝나는 날?

[나] 네

[준호 형님] 그때 데리러 갈게요

[나] 오늘요?

[준호 형님] 네

[준호 형님] 끝나고 뭐 먹을지 생각하고 있어요

[나] 앗넵

요즘의 그는 조금이라도 틈이 나면 핸드폰을 보았다. 지금이 아닌, 무려 네 시간 전 주고받은 메시지기는 했으나 계속 읽게 되었다. 읽어도 읽어도 신기한 까닭이었다. 누군가에게 장난을 당하는 것처럼 현실성이 없었다.

‘내가 서원 씨한테 관심이 있어서라구요.’

저번 주 일요일, 카페에서 남자에게 관심이 있다는 말을 들었던 순간에는 더욱 그랬다.

관심이요? 라고 되물은 건, 일말의 경우를 간과할 수 없어서였다. 제가 뉘앙스를 잘 못 알아들은 경우도 놓칠 수 없었다. 그 정도로, 믿기지가 않았다. 남자는 그런 저를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태연했다. 그는 제 앞에 놓여 있던 음료를 한 모금 마시며 ‘네, 관심이요.’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당부하듯 말했다.

‘그러니까, 더 이상 나 실망시키지 말아야겠다느니 그런 생각은 하지 말아요. 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뿐이니까.’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조금 지나서는 ‘내가 무슨 대답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그가 제 오해를 풀고자 그런 말을 꺼냈다 한들 알아버린 이상 부담감을 안 가질 수는 없었다. 그 다음 날인 월요일부터는 그 부담감이 조금 더 선연해졌는데, 남자가 저를 찾아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저녁을 같이 먹자고 했다. 뻣뻣이 굳어 저녁을 먹는 동안 서원은 머리를 수도 없이 굴렸지만 제가 느끼는 부담감을 정중한 말로 표현할 길을 찾지 못해서 결국 입을 다물었다. 화요일에도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과외가 끝나고 난 뒤 서원을 집에 데려다주었고, 심지어 드라이브 스루를 들렀다.

그러던 중 수요일 저녁, 또 밥을 먹자는 남자의 말에 서원은 결국 온갖 핑계를 대면서 혼자 귀가하겠다고 했다. 꽁꽁 긴장된 상태로 꺼낸 그 거절의 말에 남자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요.’ 했다. 그리고 무엇인가 생각난 듯 ‘아, 맞다.’ 하더니 말했다.

‘내일 과외, 10분 늦게 와도 돼요. 준호 학교 보충 있는 날이라.’

그게 끝이었다. 남자는 더 이상의 용건도, 미련도 없는 담백한 얼굴로 등을 돌렸다. 도리어 당황한 건 서원이었다. 서원은 가게를 나서는 남자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이 바보였다.

너무 진지했다.

남자는 제게 뭘 원할 정도의 관심이 있는 게 아니었다.

깨닫고 나니 허탈감보다는 기뻤다. 마음의 짐을 한껏 덜어낸 것 같았다. 자신은 남자의 그 얕은 관심을 아무런 부담 없이 받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아니, 도리어 내키는 일이었다. 남자와 있는 시간은 즐거운 쪽에 가까웠고, 그는 재밌고, 편했고, 또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오늘은 금요일이었다. 어제 남자가 저에게 심야 영화 보는 걸 좋아하느냐고 물었으니, 오늘은 영화를 볼지도 모른다. 서원은 짐작하면서 핸드폰을 연신 매만졌다. 그때였다. 누군가 서원의 등을 툭 쳤다. 가게 사장이었다.

“요즘 연애하냐? 계속 핸드폰만 보네.”

“그런 거 아니에요.”

서원은 황급히 핸드폰을 앞치마 주머니에 넣으면서 사장의 뒤를 확인했다. 요즘 저보란 듯 사장 뒤를 졸졸 쫓아다니던 유헌이 없었다. 담배라도 피우러 간 모양이었다.

사장은 “아니긴.” 하면서 의자를 끌어 서원의 옆에 앉았다. 순간 서원은 사장과 이렇게 둘이서 말을 섞은 적이 얼마 만인지 생각했다. 예전에는 꽤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는데, 요즘은 유헌 때문인지, 혹은 사장의 말처럼 제가 핸드폰에 정신이 팔린 탓인지 나란히 앉아 있던 적이 없었다.

“야, 서원아.”

“네?”

잠시 고민하는 얼굴을 하던 사장이 허벅지에 팔꿈치를 대고 몸을 서원 쪽으로 기울였다.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진지했다. 분위기를 감지한 서원이 살짝 허리를 세우며 대답했다. 사장은 쓰읍, 하는 소리를 내며 제 머리를 긁었다. 다시 서원을 바라본다.

“형이 진짜 너 아끼는 거 알지.”

“네.”

“인마, 진짜 알아, 몰라.”

“알아요.”

사장님과 정을 쌓을 만한 일이 특별히 있던 건 아니었으나 그는 여태까지 겪어 본 고용주들 중에서 양호한 편이기는 했다. 서원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진짜 너 아끼는 마음으로 말해 주는 거니까, 기분 나빠하지 말고 들어.”

“네.”

“사람한테 열등감 느끼는 거, 되게 피곤한 일이야. 너한테도 안 좋고.”

느닷없는 주제. 서원은 아무런 대답도, 표정도 없이 사장을 응시했다. 왜 이런 이야기를 갑자기 제게 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요즘 매일 사장 옆에 붙어서 쑥덕거리던 최유헌, 또 과장되게 제게 친절한 척하던 최유헌이 순차적으로 떠오르는 건 마냥 비약이 아닐 터다.

사장은 잠시 서원의 표정을 살피다가 말을 이었다.

“너 중학교 때, 친구 없었다는 거 유헌이한테 들었어. ……새끼야, 그런 거 다 별거 아니야. 지금은 어? 번듯하게 잘살고 있잖냐. 좋은 대학 들어갔고, 알바도 이렇게 성실하게 잘하고, 뭐가 문제야. 너 꿀릴 거 없어.”

“……알아요. 꿀릴 거 없는 거.”

서원은 간격 없이 받아쳤다. 최유헌이 사장에게 무슨 말을 했을지 뻔히 눈에 보였다. 그래. ‘찐따’였던 동창에게 친한 척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으니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을까. 콧대를 뭉개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 그러니까 이제 유헌이한테 괜히…….”

“괜히 어떤 거요? 최유헌 질투하지 말라고요?”

불현듯 뾰족해진 말투에 사장은 당황했다. 서원이가 제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던가. 하물며 진상 손님이 와도 침착하던 녀석이었다.

서원은 사장이 어떻게 반응하든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며칠 전부터 최유헌이 사장에게 달라붙어서 친한 척을 할 때부터 예상했던 일이긴 했다. 그러나 막상 들이닥치니 기분이 영 좋지는 않았다. 아니, 많이 안 좋았다.

“……유헌이 말 맞아요. 저 왕따 당했었고, 성격 좀 찌질해요. 근데, 최유헌이 형한테 했던 말처럼 저 그렇게 유치하고 치졸하지는 않습니다.”

“서원아.”

“저 오랫동안 봤잖아요, 형. 제가 그런 애로 보였어요?”

최유헌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 제게 이런 얼토당토않는 충고를 하고 있는 사장에게 실망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표정 변화는 거의 없었으나 목소리는 조금 격앙되었고, 말소리는 빨랐다. 더하여 뺨까지 불그스름하게 상기되었다. 그렇게 발끈하는 모습이 당위성을 부여한 것인지 사장은 타이르듯이 서원을 불렀다. 서원은 그것조차 싫었다. 이제 사장은 제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이미 그는 자신을 따돌림당한 경험이 있는 열등감과 심술덩어리로 낙인찍어 놓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말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지 나는 그 낙인에 맞춰 해석당하겠지.

서원은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거칠게 끌리는 소리가 났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유치하고 치졸한 건 최유헌이에요.”

“서원아, 너 진짜…….”

“뒤 타임 알바 왔으니까 저 갈게요.”

기어이 사장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 눈 안에는 비뚤어진 피해자를 보는 듯한 측은함도 섞여 있었다. 이미 해석당하고 있는 것이다. 서원은 그대로 등을 돌려 스태프 룸으로 갔다. 문고리를 잡았다가 놓는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 뒷문으로 나갔다.

어제부터 유헌은 뒷문에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최대한 음식물 쓰레기통과 멀리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유헌이 움찔 어깨를 떨면서 고개를 돌렸다.

서원은 유헌의 앞에 섰다. 단정한 얼굴이 서늘하게 굳어 있었다.

“최유헌.”

“뭐야? 갑자기.”

유헌은 공연히 불량스럽게 서원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담배 연기를 비껴 뱉었다. 서원은 열이 올라 차오르는 숨을 꾹 짓누르고는 말했다.

“너 중학교 때 나한테는 친절하게 굴어 놓고 내 뒤에서는 나 조롱했잖아. 그거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지?”

정말 모를 거라 생각했는지 유헌은 놀란 듯 눈을 키우다가 이윽고 조소를 내뱉었다. 이제야 알겠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너 그래서, 나한테 삐딱하게 군 거냐?”

“아니. 상처받은 건 사실이지만, 널 싫어하지는 않았어. 어릴 때는 무슨 짓을 해서든 무리에 속하는 거, 찐따 같이 안 보이는 거, 그런 게 중요하잖아. 너도 그랬겠지. 공감하기는 힘들지만 어쨌든 이해했어.”

이렇게 막힘없이 말을 줄줄 내뱉을 줄은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기야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자신은 자라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그 상처에 대해 파고들었고, 또 생각하곤 했다. 그 시절의 잔인했던 최유헌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제 상처를 직면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막상 최유헌은 스스로를 한 번도 이해하지 않은 듯했다. 시도조차 없었다는 게 티가 났다. 그러니까 중학교 때나 지금이나 하는 짓이 달라진 게 없겠지. 그게 얼마나 우스운지, 웃음이 날 정도였다. 서원은 입가에 비뚤어진 웃음을 걸친 채로 말을 이었다.

“근데 유헌아. 이제 너 중학생 아니고, 스물네 살이야.”

“……뭔 개소리야. 나 스물네 살인 거 누가 몰라?”

“그래. 그러니까 나잇값 좀 하라는 뜻이야. 하는 짓만 보면 너 아직도 중학생 같아. 유치해 돌아버리겠다고.”

유헌은 서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서원은 더 말할 것도 없이 등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야, 강서원!” 하고 등 뒤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그가 이해하든 안 하든 그건 자신이 관여할 바가 아니었다. 애초에 이해를 바라고 말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저 오랫동안 묵혀 두고 있던 과제를 당사자에게 제출한 것뿐이다.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낸 기분이 든다.

서원은 그대로 스태프 룸으로 들어갔다. 얼른 옷을 갈아입고 나온 그는 사장의 앞에 다시 섰다. 눈빛이 다소 차분하게 변한 채였다. 그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사장은 “서원아.” 하고 낮게 저를 불렀다. 서원은 대답 대신 제 할 말을 했다.

“……과민 반응해서 죄송해요. 형한테 화낼 건 아니었는데.”

“괜찮아.”

서원이 비로소 열등감을 인정하고 제게 털어놓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지, 사장은 비뚤어진 어린애를 대하듯 서원의 손을 쥐고 토닥였다. 서원은 거듭 줄줄 흐르려는 감정을 삼켰다. 더 이상 힘쓰고 싶지 않았다. 최유헌이 정말 친화력은 대단하다 싶었다. 그렇다 한들 부럽지도 않았고, 상관도 없었다.

“저 가볼게요, 형.”

“후우…… 그래. 주말에 연락해, 서원아.”

“네.”

서원은 미련 없이 가게를 나섰다. 가게 앞에는 예상대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차체 옆에 비스듬히 서 있었다. 서원은 평소보다 더 보폭을 크게 해 그에게로 걸어갔다.

* * *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강서원의 감정이 이번 주 내내 기승전결을 거쳤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이유가 자신이라는 것까지도 연우는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강서원은 감정의 폭이 넓지 않았지만, 대신 생각의 흐름이 빤한 편이었다.

강서원이 저녁을 거절했던 수요일은 기승전결 중 ‘전’이었고, 어제, 목요일은 ‘결’이었다. 어제, 마침내 혼자서 그 작은 머리로 드디어 무언가 결론을 낸 듯한 강서원의 얼굴은 해피엔딩을 맞이한 것처럼 산뜻해 보였다. 그런 의미로 오늘 강서원의 기분이 꽤 좋을 것을 예상하고는 있었다.

그랬는데, 지금 제 앞의 강서원은 제 예상보다 조금 더 들떠 있었다. 영화를 좋아하는 것일까 짐작해 보았지만 딱히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무슨 다른 일이 있나.’ 생각하던 연우가 이내 자연스레 묻자 서원은 남은 팝콘을 먹다 말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 네.”

“뭐가 그렇게 좋아요? 입이 귀에 걸렸네.”

서원은 팝콘을 씹다 말고 확인하듯 제 입가를 더듬었다. 그렇게 웃는 얼굴은 아닌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순순히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사실, 그렇게 좋은 일은 아닌데.”

“아닌데?”

“친구한테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을 했어요. 그게… 시원해서요.”

여전히 최유헌을 뭐라고 지칭해야 할지 모호해서 서원은 그리 말했다. 남자는 적당히 식은 얼그레이 티를 마시면서 소리 없이 웃었다. 천천히 머그컵을 내려놓고 말한다.

“아, 그, 같이 일하는 친구?”

“……네. 어떻게 아셨어요?”

“오늘 하루 종일 일했잖아요. 만날 친구는 걔밖에 없었겠지.”

그렇구나. 서원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팝콘을 하나 집었다. 입 안으로 가져가다가 말고, 캐러멜이 굳은 표면을 둥글둥글 손가락으로 굴렸다. 입술에 울퉁불퉁한 감각이 느껴졌다. 잠시 생각하는 얼굴을 하던 서원이 이내 작게 말했다.

“……그래서 좋긴 한데, 가게 일은 계속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왜요, 싸우기라도 했어요?”

“음… 네.”

진짜일 줄은 몰랐다. 가게 앞에서 술집을 가자느니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을 엿들었을 때, 강서원이 그 친구라는 녀석을 불편해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강서원은 얼떨결에, 아니면 마지못해 녀석의 말을 들어 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만약에 술집에 간다고 해도 휩쓸리듯 갔을 것이었다.

“그럼 그만두면 되지, 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싸우기까지 했지.’ 얕은 호기심이 일었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쨌든 강서원이 일을 그만둘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더 중요했다. 연우는 얄팍한 의문을 던져두고는 이내 별거 아니라는 듯 그리 말했다.

“음…….”

서원은 생각하는 얼굴을 하면서 팝콘을 툭, 다시 무더기 위에 내려놓았다. 어차피 팝콘은 여태껏 저 혼자만 먹고 있는 셈이었으니 괜찮았다. 남자는 몇 시간 전부터 팝콘에는 시선도 두지 않았고, 실제로 팝콘을 샀을 때도 제게 팝콘 박스를 넘겨주며 ‘서원 씨 다 먹어요.’ 라고도 했었다.

잠시 목소리를 끌던 서원이 말을 이었다.

“그만두면 저야 좋지만…….”

“알바를 굳이 많이 해야 하는 상황이에요?”

망설임의 의미를 알았는지 연우는 말꼬리를 자르고 물었다. 그리고 머그컵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들어 서원이 들었다 놓았던 캐러멜 팝콘을 집었다. 캐러멜 팝콘이 남자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서원은 당황한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제 행동을 의식하지 못한 듯 무심한 표정이었다.

“……네. 집안 사정 때문에요.”

조금 전 느꼈던 울퉁불퉁한 캐러멜 표면의 감각이 다시 입술에 느껴지는 듯했다. 간지러웠다. 서원은 공연히 입술 끝을 손가락으로 긁적이다가 말했다. 남자가 고개를 들어 서원을 보았다.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던 시선이 도망갔다. 왜인지는 몰랐다. 서원은 공연히 손가락을 쥐었다가 폈다.

남자가 말했다.

“그러면, 나 일하는 데서 알바 할래요?”

“네?”

“갤러리에서 기획전 하는데 규모가 좀 커요. 그래서 질서 맞춰 주는 스태프 구하고 있거든요. 월급, 얼마 더 필요한데요?”

“어…….”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다. 서원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제 목 뒤를 어루만졌다.

연우는 짐짓 별것 아니라는 얼굴을 일관했다. 정말 별게 아닌 건 아니었다. 그러나 강서원은 상대방이 별것 아닌 척을 하면 그대로 받아들였고, 반대로 심각한 척을 하면 또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 예로 남이 먹으려던 팝콘을 집어 먹는 변태 같은 짓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하면 강서원은 아무렇지 않으려고 애쓴다. 하여간 귀여웠다. 연우는 그 깨달음이 즐거워 마구 이용하고 있었다.

“……가게에서는, 한 달에 60 받았습니다.”

한참 뒤에 서원이 작게 말했다.

“그럼 그 정도 줄게요.”

연우는 바로 답했다. 너무 파격적인 조건을 내세운다면 속셈이 다 보일 터였다. 그는 태연한 얼굴로 설탕 냄새를 폴폴 풍기는 법을 잘 알았다.

명쾌하게 떨어진 대답에도 서원은 고민하는 얼굴을 했다. 아마도 자신이 민폐일지 아닐지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연우는 재촉하지 않고 머그컵을 들었다. 그가 얼그레이 티를 두 차례 정도 마셨을 때, 비로소 서원의 입이 떨어졌다.

“……형님만 괜찮으시다면…….”

“나야 아는 사람이 일해 주면 좋죠.”

그제야 서원은 편안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럼… 하고 싶습니다. 정말 제가 필요하신 거면요.”

“안 필요한데 돈 주고 일하라고 하겠어요, 내가? 나 되게 구두쇠인데.”

“……그러기에는, 제가 신세를 너무 많이 져서…….”

“신세요?”

연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서원이 팝콘 박스의 모서리를 매만지면서 “맨날 맛있는 거 사 주시고, 오늘처럼 영화도 좋은 데서 보여주시는 거요.” 했다. 일주일간 뭘 먹고 계산을 할 적마다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더니 그에 대해 굉장히 신경 쓰고 있던 모양이었다. 하여간 그 섬세한 건지 소심한 건지 모를 생각의 흐름마저도 강서원답기는 했다. 연우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 “아.” 짧게 호응하다가 웃었다.

“정 찝찝하면 나중에 다 갚아요. 그럼 되지.”

“네. 나중에라도…… 갚겠습니다.”

터무니없는 다짐이었지만 나름대로 진심인 듯한 표정이었다. 연우는 거듭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삼켰다. 그리고 팝콘을 하나 더 집어 입에 넣었다. 캐러멜 맛은 별로였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 * *

일요일 오전이었다. 잠을 깨운 건 사장에게서 온 전화였다. 서원은 가능한 시일 내로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다. 사장은 눈에 띄게 당황해하며 서원을 붙잡았다. 서원이 그만두는 이유가 지난번의 저 탓이라고 짐작하는 모양이었다. 일부긴 하여도 전적인 건 아니어서, 서원은 연거푸 형 때문이 아니라고 말했으나 사장은 믿지 않았다.

「서원아. 형한테 많이 화난 거면…… 아니, 인력 때문이 아니라 형이 너무 찝찝해서 그래. 미안하잖아. 쌓아 온 정도 있는데.」

“진짜 그런 거 아니에요, 형. 그게 아니라…… 아는 형님이 일자리를 주셨어요. 그래서 그래요.”

그에게 죄책감을 떠안기기는 싫었다. 잘 휘둘리기는 해도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실제로 잘 챙겨 주기도 했던 그와 감정적으로 끝을 내기는 싫어서 서원은 그런 식으로 변명했다. 사장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눈치로 「진짜야?」하고 되물었다.

“네. 형한테 미안해서 제대로 말 못 했어요. 아는 형님이 갤러리를 하시는데, 거기서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가능한 대로 나가기로 했어요. 형 때문에 그만두는 거 아니라니까요, 정말요. 형. 죄송해요.”

「……아니야, 아니야. 그런 거라면……. 미안할 게 뭐 있어. 더 좋은 거 있음 그거 해야지. 그래. 알았어. 아는 형님은, 그……, 그때 가게 오셨던 그분이야? 갤러리 대표라고 했잖아.」

그가 가게에 왔을 때 자연스레 그런 이야기가 오고 갔던 게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서원은 회상하면서 맞다고 답했다.

「많이 친한가 보네?」

“그렇게 됐어요.”

「그래. 잘 됐다. 서원아, 형이 진짜 미안하고, 다음 주부터 안 나와도 돼. 어차피 형 동생이 내일부터 서울 올라오기로 해서 좀 도와달라고 하면 될 것 같거든?」

“아…… 네.”

「수고했어, 서원아. 가게 종종 놀러 와. 형이 서비스 팍팍 줄게. 콘 치즈도 많이 해주고. 어?」

“네. 놀러 갈게요, 형. 감사합니다.”

갑자기 통화 분위기는 어색한 방향으로 흘렀다. 사장과 서원은 조형된 훈훈한 분위기 속에 덕담 섞인 인사를 몇 번 더 했다. 전화를 끊은 서원은 별안간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 들어 핸드폰을 내려놓고 침대에 풀썩 누웠다. 한참 천장을 응시하던 그는 문득 결심한 듯 다시 핸드폰을 들고 엎드렸다.

기세 좋게 핸드폰을 든 것과 다르게 메신저 앱은 망설이는 것처럼 몇 번 꺼졌다가 켜졌다. 서원은 제 눈썹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가게 알바 끝냈습니다……. 마무리했습니다……. 다음 주부터 출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야. 출근, 가능…….”

남자에게 보낼 문자를 고민하는 것이었다. 그는 손톱을 습관적으로 물어뜯다가 결심한 듯 꾸욱 남자와의 채팅창을 눌렀다. 손가락이 머뭇거리면서도 조급하게 움직였다.

“가게 알바…… 그만…… 뒀, 아니, 두었…… 두었이 낫겠다. 두었…… 습니다.”

중얼거림을 따라 글자가 빠르게 액정 안에 박혔다. “……아니야. 너무 통보 같아.” 잠시 액정을 노려보던 서원이 단호하게 글자를 지웠다.

서원은 다시 손톱을 물어뜯으며 고민했다. 문자를 입력하기 시작한 건 조금 뒤였다.

“다음 주, 부터…….”

그때였다.

갑자기 채팅창 안에서 새로운 말풍선이 떴다. 서원이 올린 것이 아니었다.

[연우 형] 바빠?

상대편의 말풍선이었다. 야멸찰 정도로 순식간에 읽음 표시가 떴다. “엇.” 서원이 짧게 소리를 냈다. 동시에 반사적으로 움찔거린 손가락이 액정을 살짝 건드렸다. ‘다음 주 붙’까지 쓰여 있던 문자가 그대로 채팅창으로 올라갔다. 서원의 말풍선 옆에도 역시 읽음 표시가 떴다.

“……헉.”

순식간에 서원의 머리가 당혹감과 수치심으로 팽팽 돌았다. 들끓듯 얼굴에 열이 몰렸다.

[연우 형] 다음주 뭐?

남자의 되물음은 빨랐다. 서원은 핸드폰 윗부분을 이마에 콩 박으면서 골똘히 생각하다가 벌떡 일어섰다. 양반다리로 앉아 핸드폰을 다시 바라본 순간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남자의 성격은 여간 급한 게 아니었다. 서원은 꼴깍 침을 삼키고 전화를 받았다.

“……네.”

남자는 뭔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대답하지 않았다. 서원은 머뭇거리다가 “……연우 형.” 했다.

그 순간 이틀 전처럼 무릎 뒤가 간지러웠다. 그를 그렇게 부르기로 했을 때다. 그의 갤러리에서 일을 하기로 말이 오갔던 금요일 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가만히 운전을 하던 그가 느닷없이 말을 꺼내왔다.

‘그럼 이제 나도 형이라고 불러요.’

‘네?’

서울의 야경을 구경하고 있던 서원이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천연덕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는 운전에 집중하면서도 ‘가게 사장한테는 형이라고 하잖아요.’라는 말을 덧붙였다.

‘아…….’

맞는 말이었다. 더하여 남자가 내세운 근거가 억지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어딘가 낯간지러워서 서원은 쉬이 알겠다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남자보다 가게 사장의 나이가 더 많을 텐데도, 남자에게 살가운 호칭을 붙이는 게 어쩐지 더 어색하게 느껴졌다.

‘같은 사장인데, 그 사람은 형이고 왜 나는 형님, 형님, 그래요? 무슨 조폭도 아니고.’

남자는 생각해 보니 진짜 불만스럽다는 듯 말했다.

사거리 앞에서 차가 정차했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서원을 바라보았다. 그가 한 번 더 종용한다면 도리어 그 말을 꺼내기가 더 어렵고 어색해질 것 같아서, 서원은 남자와 눈을 마주하자마자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형.’

그러나 고집을 부리는 것처럼 완고한 눈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내 이름 몰라요?’

‘네?’

‘연우 형.’

‘……아…….’

‘연우 형.’

‘……연우 형.’

어찌나 집요한지 꼭 생일 선물을 고집하는 어린애 같았다. 서원은 특이한 부분에서 집요한 그를 원망하는 대신 무릎 뒤가 간질거리는 감각을 견뎌내는 데에 정신을 집중했다.

기어이 제가 원하는 답을 받아내자 남자는 특유의 소년 같은 웃음을 얼굴 위에 함빡 담았다. 그리고 서원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응, 서원아.’

그 순간, 느껴지던 심장박동이 너무나도 낯설었다. 누군가가 저를 그런 식으로 호명한 게 처음인 탓이라고 서원은 여겼다.

「응, 서원아.」

“…….”

그런데, 무슨 일인지 두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나지막한 대답에 심장이 이틀 전처럼 반응한다. 그때와 똑같은 어조, 똑같은 말인데도 아직 적응을 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냥 좀, 어색한 거겠지.’ 서원은 생각하며 무릎을 세워 앉았다. 무릎뼈 위에 제 이마를 묻는다. 몸을 웅크리고 있자니 팔딱거리는 감각이 더 선연히 느껴졌다.

「메시지가 늦어서 전화했어.」

“……누워서 문자하느라 쓰는 게 느렸습니다.”

「할 말이 뭔데?」

“아, 다음 주부터…… 갤러리 출근 가능할 것 같다고 말하려고요.”

남자는 작게 웃었다.

「그럼 만나자.」

“네?”

갑작스러운 말에 서원이 당황하면서 되물었다. 남자는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일부터 나오려면 오늘 만나서 대강 설명해 주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시간 안 돼?」

아. 그런 이야기였구나. 어쩐지 머쓱해져서 서원은 공연히 제 무릎을 꾹꾹 눌렀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럼 30분 뒤에 집 앞으로 나와.」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 뒤로 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쾅. 이어서 문이 닫힌다. 서원은 허리를 세웠다. “지금… 오세요?” 하는 목소리가 조금 급해졌다.

「응. 먹고 싶은 거 생각하고 있어.」

일 때문에 만나는 거라면서, 남자는 전화를 끊기 전 그렇게 말했다. 서원은 핸드폰을 침대에 버리듯이 내려놓고 급히 욕실 안으로 들어섰다.

* * *

남자와 점심을 먹고, 카페에 눌러앉아 일 얘기 십 퍼센트, 쓸데없는 이야기 구십 퍼센트로 구성된 대화를 나누고, 저녁을 먹고, 드라이브까지 하고 오니 10시가 넘은 시간이 되었다. 일 얘기는 별거 없어서 딱히 만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서원은 구태여 그를 지적하지도, 그에 대해 파고들 듯 생각하지도 않았다.

남자는 내일 보자는 말과 함께 서원을 집 앞에 내려 주었다. 서원은 자연스레 “네.” 하며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집 현관문으로 걷는 중에 문득 멈춰 서서 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상하게 자꾸 가슴이 풍선처럼 부푸는 느낌이 드는 까닭이었다.

집으로 들어서니 TV 소리가 들렸다. 서원은 방으로 들어가다 말고 슬쩍 거실에 있을 누군가를 확인했다. 일요일에 엄마는 밤늦게까지 교회에 있으니 재원, 태원 중 한 명일 것이었다.

TV를 보고 있는 뒤통수는 재원이었다. 서원은 인사 대신 그대로 방으로 들어갔다. 재원과는 그날 싸운 뒤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재원이 제 눈치를 보고, 저는 그런 재원을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서원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거실로 나왔다. 소파에 앉자 TV에 정신 팔려 있던 재원이 흘긋 저를 확인하고는 놀란 듯 황급히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원은 태연한 얼굴 그대로 TV를 응시했다.

“…….”

“…….”

거실 안은 TV 소리만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재원은 웃긴 장면이 나와도 웃지 못하고 계속 흘끔흘끔 서원을 훔쳐보았다. 그가 입을 연 것은 한참 뒤였다.

“……요즘, 늦네.”

“…….”

“주말에도 나가고.”

서원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무덤덤한 눈동자 위로 TV 화면만 반사되고 있다. 그것이 의중을 알 수 없게 느껴져서 재원은 또 한참을 머뭇거렸다.

“……일이 바빠?”

“왜?”

기어이 서원은 얼굴을 돌려 재원과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 굳이 왜 그런 걸 물어보냐는 듯 냉정한 얼굴 그대로 짐짓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마조마해하던 눈 위로 별안간 당혹감이 물든다. 그게 꼭 사고 쳐 놓고 허둥지둥하는 새끼강아지 같았다.

재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서원은 냉랭한 얼굴 그대로 다시 TV를 바라보았다.

“…….”

“…….”

침묵이 아까보다 훨씬 무거웠다. TV 소리는 여전히 시끄러웠으나 다른 차원의 소리처럼 멀어 공간의 무게를 덜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툭, 재원이 고개를 떨어뜨리는 게 시야로 보였다. 그러나 서원은 녀석을 달랠 생각이 없었다. 물론 녀석의 심성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안다. 재원은, 단지 어린 것뿐이다. 어려서 욕심이 많고, 제가 가장 중요하다. 그러다가 한순간 사리분별을 못했던 것이라는 걸, 서원은 잘 알았다. 자신도 그랬기 때문이다.

자신도 그렇게 욕심이 많고, 제가 가장 중요해서 엄마에게 못된 말만 내뱉었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미안해, 형.”

우는 듯 떨리는 목소리가 와르르 웃어재끼는 시청자들의 웃음소리 사이에 섞였다. 귀 기울이면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흐렸으나 서원도 TV를 보고 있던 건 아니었던 터라 그 목소리가 잘 들렸다.

가만히 재원을 바라보던 서원이 이내 결심한 듯 팔을 뻗어 리모컨을 집었다. 그리고 TV를 껐다. 순식간에 거실이 조용해졌다. 훌쩍거리는 소리만 거실 안을 메운다.

“……요즘따라…… 너무 억울해서 그랬어. 마음이 급했어……. 아빠가, 아빠가 이제 나 스무 살 됐으니까, 자꾸, 자꾸…… 용돈 안 줘도 되지, 라는 식으로 말하니까 마음이 조급해서…….”

재원은 토로하듯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서러워하는지 훌쩍거릴 때마다 어깨가 움찔움찔 떨렸으나 서원은 어떠한 행동도, 말도 하지 않았다.

“…….”

“나도 형처럼, 아르바이트,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드는데, ……그냥 내 친구들은 다 용돈 받는데 나만 일하는 게, 억울해서…….”

울음과 감정에 매몰된 문장은 두서가 없었다. 하지만 서원은 되묻거나 자세한 설명을 요구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자신이, 재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리 없었다. 재원이 시달리고 있는 감정들은 자신 또한 겪었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자신도 딱 스무 살 때 저랬다. 아직 저는 어린데, 할 줄 아는 거라곤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것뿐인데 성인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갑자기 어제와 달라진 기대치와 시선들이 저를 짓누르곤 했다. 미성년자라는 이름 뒤에서 책임지지 않았던 것들을 갑자기 책임져야만 하는 상황이 올 때 밀려오는 그 서러움. 억울함. 그리고 조급함.

“……형이, 형이 고생하는, 흑, 고생하는 거 알아. 애초에, 빚도 다 우리가 커 가면서 쓴 돈이잖아. 우리…… 흑, 우리 돈이잖아. 머리론 아는데, 너무 억울한 거야.”

“…….”

“다른 애들은, 엄마, 아빠가 적금까지 해준다는, 데……. 난 왜…… 우리 집은 왜 이러나 싶고…….”

“그런 말 하지 마.”

“알아. 나도 나쁜 마음인 거. 엄마한테도 미안하고…….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재원은 엉엉 울면서 제 머리를 감싸 안았다. 우는 모습을 보니 덩치만 컸지 아직도 애기다. 서원은 눈물로 범벅된 재원의 얼굴을 보다 이윽고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리고 티슈를 뽑아 녀석에게 건넸다.

“적어도 엄마가 우리를 책임져 준 거는 감사해야 해. 그걸로 엄마는 할 일을 다 한 거야. 알았어?”

“……알아.”

재원은 티슈로 연신 눈을 닦아내며 금세 맹맹해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서원은 재원의 코끝을 콱 꼬집었다.

“부담 갖지 마.”

“…….”

“형 혼자 괜찮아. 넌 공부나 열심히 해. 아빠한테는 졸업할 때까지만 도와달라고 잘 말해 보고. 아빠는 그래도 너한테 약하니까.”

“……형, 미안해.”

서원은 소파에서 일어나면서 녀석의 머리를 대충 쓰다듬어 주었다. 스물넷. 이제는 어른인 척이 조금 익숙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갤러리 안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크고 고급스러웠고, 또 제게 주어진 일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쉬웠다.

가만히 서 있는 탓에 다리가 조금 아팠지만 가게 일에 비해서는 식은 죽 먹기였다. 모르긴 몰라도 꽤 유명한 전시인 모양이었다. 커다란 갤러리 안이 사람들로 붐볐다. 그러나 그 누구도 저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직원의 설명에 따르면 뛰는 사람을 저지하거나 전시를 역방향으로 보는 사람에게 다가가 안내를 해주면 된다고 했는데, 뛰는 사람은 아예 없었고 역방향으로 보는 사람은 그 많은 사람들 중 2시간 동안 한 사람밖에 없었다. 차라리 제게 화장실이 어디인지 묻는 사람이 더 많았다. 그마저도 네 명이다.

서원은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보통 때에는 손목시계를 하고 다니지 않았고,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는 편이었으나 어제 남자는 저에게 손목시계를 하고 출근하는 게 좋을 거라고 귀띔했다. 서원은 오늘 아침에 그 말을 기억하고 재원의 옷장을 뒤졌다. 그리고 그나마 약이 남아 있는, 촌스러운 갈색이 눈에 띄는 인조 가죽 시계를 훔쳐 맸다.

20분 후면 휴식시간이었다. ‘드디어.’ 서원은 생각했다. 도리어 일이 없으니 더 시간이 더딘 듯했다. 출근할 적부터 저를 안내해 주었던 직원은 휴식시간이 되면 제가 다시 올 것이니 핸드폰만은 절대 만지지 말라고 했다. 서원은 그 말을 착실히 지키면서 어제 남자의 귀띔을 이해하고 있었다.

‘조금 지루하긴 해도 편하긴 하네. 거기다가 휴식시간까지 있다니. 하는 것도 없는데.’

‘……진짜 필요한 건가?’ 생각이 흐르고 흘러 마침내 거기까지 닿던 찰나였다. 돌연 누군가 제게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저 멀리에 보이는, 존재감이 뚜렷한 금색의 조형물을 멍하니 구경하고 있던 서원이 발걸음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직원이 20분 빠르게 올 리가 없으니 화장실을 물어보는 사람일 터였다.

“와. 강서원, 너 여기서 알바 하냐?”

하지만 제게 다가온 건 화장실 따위를 물어보는 관람객이 아니었다.

“…….”

서원은 조용히 인상을 구겼다. 뻔뻔하게 놀라는 척하는 낯짝을 보니 우연이 아니라는 확신이 든 까닭이었다. 가게 사장 형이 알았으니, 최유헌도 제가 여기 일하게 되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굳이 나를 찾아올 이유가 있나?’ 서원은 의아했다. 놈의 저의를 짐작해 보았으나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유헌은 짝다리를 짚으며 서원을 아래서 위로 훑어보았다. 말을 더한다.

“너 편해 보인다? 꿀 빠네?”

“왜 왔어?”

“왜긴 왜야. 나 미대생인 거 몰라? 전시 보러 왔지.”

“…….”

“근데, 너 왜 그렇게 나대나 했더니, 그 형 때문이었구나? 어쩐지…… 답지 않게 존나 깝친다 했어.”

어떻게 해서 이 일을 하게 되었는지까지 아는 모양이다. 서원은 경계하는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전시 보러 왔으면 전시나 보고 가.”

“싫어. 사실 너 보러 온 거거든. 아니, 계속 생각해 봤는데, 기분 존나 더럽잖아. 강서원 그 새끼가 뭔데 나한테 그딴 소리를 하지? 그런 생각 때문에 잠이 안 오더라고.”

유헌은 지금 의도적으로 불량한 언사를 내뱉고 있었다. 시비를 거는 것이다.

누군가가 이렇게 대놓고 싸움을 걸어 온 적은 처음이었다. 손가락 끝이 차가워진다. 정신이 지진 난 것처럼 무너져 내려 혼란스러웠으나, 서원은 짐짓 무표정을 일관했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꺼져.”

잠시 망설이던 서원이 공연히 거칠게 말했다. 입술 끝이 떨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목소리는 떨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뭐? 꺼져?”

유헌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고작 네까짓 게 내게 욕을 하느냐는 태도였다.

그제야 서원은 깨달았다. 최유헌은 무언가 목적이 있어 온 게 아니었다. 굳이 찾자면, ‘찐따’ 주제에 제게 모욕을 줬던 게 괘씸해서, 기어이 제가 겁먹은 모습이라도 봐야 자존심이라도 회복될 것 같고, 분노가 좀 풀릴 것 같아서 정도인 듯했다.

그 유치한 속내가 너무 훤히 보여서 도리어 그대로 해주고 싶지가 않다. 서원은 생각하면서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벌벌 떨리는 입술 끝을 진정시키려고 애를 쓴다. 곧이어 응수하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였다.

“할 얘기 되게 많나 봐요.”

익숙하지만 언제 들어도 낯설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위에서 들렸다. 동시에 커다랗고 서늘한 손이 제 어깨를 감싸 온다. 서원은 눈에 띄게 어깨를 움찔거리면서 번뜩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친절하게 웃는 얼굴로 제 뒤에 서서 최유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안녕하세요.”

짝다리를 짚던 다리가 재빠르게 공손한 자세로 선다. 유헌은 활짝 웃으면서 남자에게 인사했다. 남자는 유헌에게 인사하는 대신 눈동자를 내려 서원을 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직선으로 내리는 조명 탓인지 남자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어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근무 시간에 이러면 안 되지, 서원아.”

“……아, 죄송합니다.”

친절한 어조에 어울리지 않는 차가운 목소리였다. ‘착각이 아니구나.’ 서원은 생각하며 애써 사무적으로 말했다. 친해진 이후, 남자에게 이렇게 지적을 당한 건 처음인 탓인지 일순 심장이 관통하는 것처럼 지끈거리고 아팠다.

“일해.”

“네.”

남자는 제 손목시계를 확인한 뒤 서원에게 말했다. 그는 서원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고개를 들어 다시 유헌을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서원이 친구입니다.”

“…….”

“제가 서원이한테 말 걸었어요. 반가워서……. 죄송합니다.”

유헌은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한 번 더 인사하고는 그렇게 말했다. 남자는 형식적으로, 그렇지만 아주 친절하게 인사에 응했다.

유헌은 남자와 서원을 번갈아 보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남자는 그의 모습이 조금 떨어지고 나서야 서원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서원의 앞에 섰다. 슬쩍 등을 숙여 서원과 눈을 맞춘다.

“휴식 시간에 나 일하는 데로 와. 놀게.”

“…….”

“이 얘기 하려고 왔어. 혼내려고 온 게 아니라.”

그는 서원에게 말했다. 서원은 여전히 기죽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는 목소리가 작았다. 잠시 서원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남자가 서원의 머리를 슥 스치듯 만지고 걸어갔다.

* * *

「어디야, 최유허언.」

“나 아직 전시 보는 중.”

유헌은 과제에 첨부할 인증 사진을 확인 삼아 다시 훑어보며 전화에 응하고 있었다. 전화 상대방은 「빨리 와. 우리 이미 놀고 있어.」 하며 주변에 있는 놈들과 낄낄거렸다. 유헌은 “너네 정확히 어딘데?” 하며 전시장 출구 근처에서 파는 도록을 샀다. 굳이 작품들을 꼼꼼히 보지 않아도 도록을 참고하면 리포트 정도는 금방 쓸 수 있었다.

「홍대 어스 아일랜드. 얼른 와.」

“알았어, 지금 출발해. 여기 강남 쪽이라 좀 걸려.”

유헌은 전화를 끊고선 도록을 가방 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갤러리 밖을 나가려다 멈춰 섰다. 전시장 안쪽을 돌아본다.

“……시발. 생각할수록 기분 나쁘네.”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과제를 핑계로 기고만장했던 찐따 새끼에게 사과나 받을까 싶어 온 거였는데, 본전도 못 찾은 기분이 든다. ‘아아, 몰라. 다신 안 볼 거니까.’ 유헌은 생각하면서 홱, 고개를 돌렸다. 교통편을 생각하며 밖으로 나가려던 참이었다.

“2시간짜리 전시를 20분 만에 보네?”

누군가가 제게로 다가와 불쑥 말을 걸었다. 갑자기 드리워진 그늘에 놀란 유헌이 흠칫 놀라며 얼굴을 들었다. 제게 말을 건 사람은 ‘그’ 잘생긴 형이었다.

“어, 안녕하세요.”

“전시가 재미없나 봐.”

남자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유헌은 황급히 두 손을 들어 내저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다.

“아니에요. 아, 그러니까, 시간이 없어서…….”

“방금 서원이랑 싸우는 거 같던데, 맞아?”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오는 목소리는 따지는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도리어 평온하리만치 느긋했다. 그 탓에 유헌은 그가 일부러 거침없이 물어 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당황한 얼굴 그대로 “아…….” 하고 말을 질질 끌 뿐이었다.

“……네. 사실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아서요.”

유헌은 곤란한 내색을 비추면서도 순순히 인정했다. 그는 눈치가 빠르고 시야가 넓은 편이었다. 상대방에게 어디까지 거짓말을 해도 되는지, 또 제게 부정적인 사실일지라도 그냥 인정하는 게 나을지, 아니면 계속 부인하는 게 나을지 정도는 상대방의 태도를 보고 대충 저울질할 수 있었다.

“그렇구나.”

남자는 짐작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다시 유헌을 보며 물었다.

“그러면, 친구도 아니고?”

“중학교 때는 친구였는데…….”

“지금 묻는 거잖아.”

“아, 아니에요.”

“그래. 이제 연락도 안 할 거고?”

“……그건 왜 물어보세요?”

별안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유헌이 위화감에 슬며시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친하게 지내는 아는 형치고는 너무 끈질긴 물음인 데다가 범위가 넓은 참견이라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남자는 유헌의 기색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얼굴로 “대답이나 해.” 했다. 웃는 낯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게 영 기분을 어색하게 만들어서 유헌은 조금 더 강하게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다. 갑자기 이 기묘한 대화를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든다.

“네. 안 해요.”

“그래, 그 말 지켜. 안 그러면 너 진짜 혼나.”

남자는 유치원생에게 으름장을 놓는 선생님처럼 온화하고 짓궂게 말했다. 전혀 무섭게 느껴지지 않는 협박이라 유헌은 남자가 멀끔한 얼굴과는 달리 사람을 당혹스럽게 하는 괴짜일 것이라고 짐작하기에 이르렀다. 생각해 보니, 그러니까 강서원 같은 놈과 친한 사이일지도 모른다.

‘역시 끼리끼리야.’

유헌은 제 ‘쿨한’ 친구들과, 형들과, 여자친구가 저를 기다리고 있을 곳으로 향하며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니 강서원에게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미련과 짜증 나는 부러움조차 사라지는 듯하다. 후련했다. 역시, 강서원은 그대로다. 변한 게 없다. 그런 이상한 형과 어울리는 걸 보니, 분명히.

* * *

요즘의 강서원은 구태여 말을 걸지 않아도 됐다. 입 간지럽단 얼굴을 하다가 조심스레 ‘형, 있잖아요….’ 하며 먼저 이것저것 쓸데없는 말들을 늘어놓고는 했으니까. 더욱이 오늘은 첫 출근 날이니 더 많이 조잘거릴 거라고, 시연우는 예상하며 즐겁게 퇴근했다.

“…….”

“…….”

하지만 제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간 듯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지금 차 안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고, 제 옆에 앉아 있는 강서원은 가만히 앉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연우는 흘긋 룸미러를 통해 서원의 얼굴을 확인했다. 생각이 복잡하게 얽힌 표정이다.

“무슨 일 있어?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

차가 잠시 멈추었을 때, 연우는 고개를 돌려 직설적으로 물었다. 강서원은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아니라고 작게 대답했다. 무슨 일이 있었음이 다분하다는 반응이다. 더하여, 자신과 관련한.

잠깐 내려와 혼낸 것 때문인가 싶었지만 녀석은 그런 걸로 꽁할 스타일이 아니었다. 생각하던 연우는 이내 모르는 척 다시 차를 출발시키며 말을 이었다.

“휴식시간에 왜 안 왔어? 같이 놀자고 했잖아.”

“아…… 잊었어요. 죄송합니다.”

“나 심심했는데.”

“…….”

서원은 대답 대신 제 목 뒤를 주물렀다. 할 말이 없을 때 하는 버릇이었다.

잠깐의 침묵 뒤, 연우는 “저녁 뭐 먹을까?” 하고 물었다. 서원은 입을 달싹이다가 작게 말했다.

“오늘은 별로 배가…….”

“뭐 먹고 싶어?”

편안한 말투와 달리 영 고집이 센 사람이었다. 서원은 그가 자신을 형이라고 부르라던 그때를 기억하면서 한 발 물러서기를 택했다.

“……형이 먹고 싶은 거요.”

“그 말은 진짜 지겹지도 않나.”

연우는 웃으며 손을 뻗었다. 툴툴 서원의 머리를 매만진다. 서원은 “생각나는 게 없어서…….” 하며 어물거렸다. 그리고 불편한 감정에 허우적거리면서도 그가 조금 더 머리를 매만지기 쉽도록 운전석 쪽으로 살짝 머리를 기울이는 자신이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그의 손은 크고 시원해서, 그가 머리를 매만져 주면 기분이 좋아졌다. 마치 파블로프의 개라도 된 듯이 반사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음, 오늘은 술 마실까?”

남자의 손은 머리에서 흐르듯 내려가 서원의 뺨까지 꼬집고 나서야 떨어졌다. 그리고 그 뒤로 나온 말 또한 물결을 타듯 아주 자연스럽고 담백하게 흘렀다. 가끔 고집을 부리기도 하지만, 대부분 남자의 제안은 이런 식이었다. 그러면 좋고 아니어도 상관없다는, 상대방에게 넉넉한 공간을 가진 선택지를 주는 듯한 어조.

“술이요?”

“응. 술 잘 못 마셔?”

“……아니요. 못 마시지는 않아요.”

“그래, 그럼. 술 마시러 가자.”

남자는 고민 없이 핸들을 돌렸다.

여유로운 제안은 사실 겉포장만 그러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 서원도 마찬가지였다.

* * *

남자가 서원을 데리고 간 곳은 왁자지껄한 분위기의 고깃집이었다. 서원은 시끄러운 게 싫다며 매번 비싸 보이는 음식점만 고집하던 남자를 기억하면서 의아해했으나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저 그는 입을 꾹 다문 채로 삼겹살이 익어 가는 걸 보고만 있었다. 가게 직원은 고기를 뒤집고 자르면서 이베리코니 뭐니 성실하게 설명했지만 그것을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잠시 후, 직원이 익은 고기들을 불판 한쪽으로 밀어 두고 떠나갔다. 그와 동시에 연우는 말을 꺼냈다.

“아까 네 친구랑 이야기 좀 했어.”

그 말에 서원은 눈에 띄게 어깨를 움칠거렸다. 그러더니 괜스레 젓가락을 들어 기름장을 둥글게 휘젓기 시작했다.

“……봤어요.”

눈에 띄게 의기소침해진 걸 보고 예상하고 있던 터였다. 연우는 천연덕스러운 목소리로 “어디서?” 하고 물었다. 기름장을 섞던 젓가락의 움직임이 서서히 느려졌다.

“그냥…… 어느 노인분 화장실 데려다 드리면서요.”

“아, 그래?”

“…….”

“너 걔랑 친하다고 했나?”

툭. 젓가락이 힘없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서원은 고민하는 얼굴을 하다가 “그냥…….” 했다.

‘왜 숨기려 들지?’ 연우는 궁금했다. 언젠가 강서원이 제게 긍정적인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다고 털어놓았던 걸 기억하지만 이건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강서원은 최유헌 자체를 제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

“고, 고기가 맛있어 보여요. 이베리코랬나……. 그게 뭘까요.”

기어이 화제를 전환시키려는 태도가 신경을 건드린다. 그 녀석과 가까운 관계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으나, 그와 별개로 지금 저에게 무엇을 숨기려 드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걔랑 언제 한번 같이 밥 먹을까? 친하면.”

“……뭐, 그냥…….”

연우는 한 번 더 시험 삼아 최유헌을 끌어들였다. 서원은 눈알을 도록도록 굴리더니 돌연 큰 소리로 말했다.

“저, 저는 맥주 마실게요. 시켜도 되나요?”

“……시켜.”

연우는 서원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서원은 저를 응시하는 눈을 애써 피하면서 맥주를 시켰다.

테이블에는 다시 차 안에서처럼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연우는 소주만 조금씩 들이켰고, 서원은 맥주와 고기를 번갈아 먹고 있었다. 열심히 먹고 있었으나 사실 고기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으로 그의 머리는 지금 몹시 복잡했다. 생각과 추측들이 마구잡이로 솟아나 엉켜 있었다.

“…….”

“…….”

최유헌은 남자와 친해지고 싶다고 했고, 저와 다르게 말도 잘하고 재미있는 놈이다. 둘이서 말을 하고 있었을 때 최유헌의 표정은 보지 못했지만 형은 웃고 있었고, 친절해 보였다. 꽤 길게 이야기를 하던데……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번호를 주었을까. 형은 유헌이가 마음에 드는 걸까. 그러니까 계속 물어보는 거겠지.

‘나보다 더 친해지면 어쩌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서원은 울컥, 목 아래로 쑤셔 넣은 고기가 다시 역류하는 감각을 느꼈다.

싫었다. 너무 싫어서, 자꾸 그가 최유헌에 관한 주제를 올리는 것이 불안할 정도였다. 애써 주제를 피해 보려고 하는데도 자연스럽게 잘 안 됐다. 또 형이 최유헌에 관해 물어본다면 참지 못하고 못난 심술이라도 부릴 것 같았다. 지금 억지를 부리는 건 자신이다. 연우 형을 영유할 수 있는 스물네 살은 자신뿐이어야 한다는 법도, 이유도 없다. 애초에 왜 이렇게 싫은지조차 알 수 없었다. 단순히 최유헌이라서?……. 그렇다면 가게 형과 녀석이 친해지는 것도 싫어해야 했을 텐데, 그건 아니었다. 가게 형과 최유헌이 친해졌을 때는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았다.

그럼 왜?

“…….”

“서원아.”

팽팽 돌아가는 머릿속을 티내지 않기 위해 기계적으로 쌈을 만들어 입에 억지로 쑤셔 넣던 중이었다. 저를 부르는 음성에 서원은 쌈을 열심히 씹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남자는 턱을 괴고 서원을 빤히, 관찰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남자가 입만 작게 열어 말을 이었다.

“형한테 말하고 싶은 거 없어?”

“…….”

서원은 다시 고개를 숙이며 천천히 가로로 내저었다. 하고 싶은 말이라곤, 최유헌과 형이 친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뿐이었으나 제가 그럴 말을 할 처지가 아니라는 건 알았다. 아니, 그런 말을 하면 분명 형이 싫어할 거라고 서원은 확신했다.

그 순간 서원의 턱 아래에 손이 놓였다. 가볍게 서원의 얼굴을 들어 올려 다시금 눈을 마주치게 한 남자가 아래턱의 살갗을 가볍게 매만지며 달래는 투로 말했다.

“진짜 없어? 아무거나 말해도 돼.”

“…….”

“……나는 너랑 요즘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야?”

“…….”

남자가 제게 친절하게 대할수록, 괜한 조급함에 울컥울컥 뭔가가 치솟기만 했다. 서원은 입을 사리물면서 붙잡힌 얼굴 대신 시선을 내리깔았다. 곱게 자리한 속눈썹을 빤히 내려다보던 연우는 손가락을 옮겨 입 끝을 살살 둥글게 매만지기 시작했다. 입꼬리가 파르르 떨고 있는 게 느껴진다.

“친구끼리는 뭐든 말해도 되는데.”

“……말할 게, 없어요.”

그토록 분한 듯이 떨면서도 고집스러운 표정을 일관한다. 연우는 감정 없는 얼굴로 서원의 얼굴에 붙이고 있던 손을 떼어냈다.

“그래, 그럼.”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건지 궁금했다. 이렇게 고집을 피우는 건 처음이어서 더 그랬다. 아무래도 ‘최유헌’이라는 주제가 녀석에게는 민감한 듯했다. 그리고 연우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둘이 말을 주고받았던 그 기류를 보아서는 학창 시절에 최유헌이 괴롭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제가 추측하기로 만약 그랬다면 강서원은 제게 그 사실을 털어놓았을 것이었다. 이렇게 마냥 억지 부리듯 숨기려고 하지는 않을 거다. 근데 지금의 강서원은, 최유헌을 숨기고 있다. 최유헌에 대한 제 감정보다 제게서 최유헌을 숨기는 것이 더 중요해 보였다.

“…….”

“갈까? 늦었는데.”

머릿속이 의문으로 가득 찼지만 혼자 궁리해 봤자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강서원에게 물어 봤자 얻는 것도 없을 것이었다. 판단한 연우는 짐짓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축 처진 눈이 연우를 올려다보았다. 서원은 천천히 일어섰다. 끼르륵. 바닥에 끌리는 의자 소리가 우울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가게 앞을 나섰다. 연우는 가게를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서원을 태웠다. 서원은 망설이다가 택시에 탔다.

“조심히 가, 서원아. 내일 보자.”

“……네. 형도, 조심히 가세요.”

연우는 택시 기사에게 오만 원권 두 장을 쥐여 주고는 서원에게 말했다. 뒷자리에 기대어 앉은 서원이 커다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작게 대답했다.

이윽고 택시가 떠났다. 연우는 택시 뒤꽁무니를 한참 바라보다가 등을 돌렸다.

* * *

경찬은 제법 군인 티가 났다.

경찬과 서원은 강남역에서 만났다. 인파에 치이는 걸 싫어했으면서, 그동안 북적거리는 분위기가 그리웠던 것인지 누군가가 제 어깨를 치고 가도 녀석은 기분 나쁜 내색을 하지 않았다. 도리어 적응 안 된다는 표정을 짓는 건 서원이었다. 그새 남자의 차로 편하게 나다녔던 게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야, 엄청 느끼한 거 먹자. 엄, 청.”

“햄버거 같은 거?”

“어. 거기다가 두꺼운 감자튀김 먹고 싶어.”

“알았어.”

서원은 사람이 다니지 않는 가장자리에 서서 ‘강남 햄버거 맛집’을 검색했다. 그동안 경찬은 대학 동기들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는 대학교 동기들과 마음이 잘 맞는 듯했다. 서원은 모르는 그들과 친해지고 나서는 성격 또한 조금 활달하게 변했다.

“여기 가자.”

서원은 적당한 곳을 골라 경찬에게 액정을 보여주었다. 경찬은 통화를 끊지 않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원은 지도 앱을 켜서 햄버거 가게로 향했다.

햄버거 가게로 향하는 내내 경찬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킥킥 웃어 가며 통화를 이어 갔다. 서원은 상관하지 않고 햄버거 가게를 찾는 데에 집중하였다.

“맛있다.”

“그러게. 줄 선 보람이 있네.”

서원은 건조하게 대꾸하고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것을 씹어 삼킬 동안 무슨 생각을 하는 것처럼 눈알을 굴리던 그는 이내 꿀꺽, 햄버거를 삼키고 말했다.

“경찬아.”

“어?”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경찬이 고개를 들어 대답했다.

“나 얼마 전에 알바하다가 최유헌 만났다.”

“뭐? 중학교 때 그 새끼?”

“응.”

“어떻게?”

“나 일하는 데 새 알바로 들어왔어. 우리 대학 편입했대.”

“너 있는 거 알고?”

“아니. 자기도 놀란 것 같던데.”

“……세상 좁은 거 둘째 치고 망했다. 거기 곧 정치판 되겠네.”

생각만 해도 싫은지 경찬은 콜라를 쥔 채로 치를 떨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서원이 시선을 내려 감자튀김을 집었다. 그리고 툭툭, 공연히 감자튀김에 묻은 소금을 털어내다가 말했다.

“……너, 내가 최유헌이랑 친해지면 어떨 것 같아?”

“뭐?”

감자튀김을 한꺼번에 대여섯 개씩 밀어 넣던 경찬이 입을 벌리면서 경악했다. 곧이어 “미쳤어? 너 돌았냐?”라는 말이 비비탄처럼 툭툭 튀어나왔다. 서원은 경찬의 턱 아래에 손을 대어 입을 닫아 주면서 말했다.

“진짜 그런다는 게 아니라, 가정이야. 가정.”

“그런 가정을 왜 하는데 대체?”

“…그래. 나는 아무래도 과거가 있으니까 다르게 물어볼게, 그럼. 네 대학 동기랑 최유헌.”

“그거나 그거나 개싫지, 당연히! 그냥 최유헌 성격이 싫은 건데.”

그걸 말해야 아느냐고 따지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냥 최유헌이 싫은 거다. 서원은 그 말을 곱씹었다.

“…….”

그래. 자신도 그래서 싫은 것일 터였다. 그냥, 최유헌이 남자에게 해를 끼칠까 봐. 그게 걱정돼서. 놈이 어떤 놈인지 자신은 잘 아니까. 최유헌의 성격을 잘 아니까.

“그런 걸 대체 왜 물어보는데? 어? 뭔 일 있냐?”

생각에 잠긴 서원이 영 불안했는지 경찬은 서원의 팔을 쿡쿡 찌르면서 물었다. 눈썹이 와작 구겨진 채였다. 서원이 멍하니 생각하던 얼굴을 들어 경찬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금 전보다는 훨씬 안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물어본 거야. …갑자기 걔가 친한 척했거든.”

“뭐? 와, 진짜 개 또라이 새끼네. 그래서, 넌 어떻게 했는데?”

“…어쩌긴. 얼마 안 돼서 일 그만뒀어.”

그것까진 의외였던 듯 경찬이 “오, 진짜?” 하며 눈을 키웠다. 서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중간중간 생략한 말들은 많았지만 어찌 되었든 사실이기는 했다.

“강단 있네, 강써워이.”

경찬이 느물거리며 장난치는 모습은 녀석과 친한 사람들만 볼 수 있는 특권이었다. 서원은 끝내 푸스스 웃었다. 그리고 남은 감자튀김 하나를 경찬의 입에 쏙 넣어 주며 “빨리 먹기나 해. 너 저녁에 약속 있다며.” 했다. 경찬은 행복한 얼굴로 감자튀김을 오물오물 씹었다. 아무래도 휴가 중이라 모든 게 행복한 듯했다.

“밀크 쉐이크도 하나 시키자.”

“그러든가.”

이윽고 쟁반을 깨끗이 비운 경찬이 말했다. 서원은 또 한 번 웃었다.

* * *

서원은 대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 요즘에는 제가 오는 시간에 맞춰 대문이 열려 있었는데, 오늘은 아니어서 의아하긴 했으나 대수로울 건 아니었다.

초인종을 누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문이 열렸다. 서원은 넓은 마당을 가로질러 집 안으로 들어섰다. 현관 앞에서 저를 반기고 있는 건 준호였다.

“쌤 하이요.”

“……아. 어, 안녕.”

서원은 당혹감을 숨기지 못한 얼굴로 어색하게 인사했다. 준호의 과외를 하러 왔으니, 준호가 저를 맞아 주는 것은 이상한 게 아니었다. 허나 당황할 만도 한 게, 요즘에는 과외를 하러 오면 집에 연우 형이 있었고 대부분 그가 자신을 맞아 주곤 했다. 선술집에서 일했던 저번 주까지는 직접 가게에서 여기까지 데려다주기도 했다. 과외를 하러 왔는데 집에 그가 없는 건 오랜만이었다.

‘어디 방에 있나.’ 서원은 생각하며 바쁘게 집안 곳곳을 둘러보았다. 준호는 그를 힐긋 보더니 앞서 방 쪽으로 걸어가면서 말했다.

“쌤 연우 형 찾아요? 형 아직 퇴근 안 했어요.”

“아, 그래? 그렇구나.”

서원은 공연히 머쓱해져 무심한 척 대답하면서 잠자코 준호를 따랐다. 그가 없는 집. 오랜만이긴 했으나 그렇다고 이상하게 생각할 것까지는 아니었다. 과외를 처음 시작할 때는 대부분 이랬다. ‘형도 일이 있으니까.’ 서원은 생각하면서 준호를 따라 방에 들어갔다.

“……이게 왜 2번이냐면…….”

“…….”

제 모습이 이상한 건 아니다. 아까 경찬이와 말한 대로, 그냥, 최유헌을 아니까 싫은 것뿐이다. 그러나 형도 일이 있으니까, 라는 결론을 내렸으니 깔끔하게 생각을 그만두면 좋았을 터인데, 그게 좀처럼 마음대로 되지를 않았다.

과외를 하는 내내, 생각의 줄기는 도리어 양분을 담뿍 받은 식물처럼 쑥쑥 자라났다. 양분은 불행하게도 어제의 일이었다. 어제, 최유헌과 그가 대화를 나누었던 것. 그리고 최유헌에 대해 물어보던 형. 그것들이 자꾸 서원의 생각을 자라나게 했다. 마침내 쉼 없이 뻗어 가던 가지가 ‘형이 혹시 지금 최유헌과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도달한 순간, 샤프심이 뚝 부러졌다. 서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야.”

“네? 뭐가요?”

서원의 설명을 듣지 않고 대놓고 핸드폰을 하던 준호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서원은 어색하게 고개를 내저으면서 시간을 확인했다. 머리로는 그에 관해 생각하면서 입으로는 설명을 떠벌리기에 바쁘다 보니 정신이 없던 모양이었다. 11시를 넘어선 것도 몰랐다.

서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문제집을 닫았다.

“……아니야.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서둘러 짐을 챙겼다. 과외 시간뿐만 아니라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자신은 연우 형과 최유헌에 대한 생각에만 몰두하고 있었다는 걸 돌연 깨달은 탓이었다.

“쌤 빠이.”

“목요일에는 숙제 꼭 해.”

“한가하면 할게요.”

침대에 벌러덩 누워 장난스럽게 웃는 준호의 얼굴을 끝으로 문이 닫혔다. 서원은 멍한 표정으로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이내 일 층에 서서 진득한 미련이 묻은 눈으로 텅 빈 집안을 훑어본다. 이대로 집에 간다면, 하루 종일 그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않은 게 며칠 만이다. 이상하게 그게 허전하게 느껴졌다. 서원은 헐렁한 신발을 느리게 꿰어신었다.

그때였다.

띠리릭, 하고 잠금이 풀리는 기계음이 들렸다. 쭈그려 앉아 느릿느릿 굼뜨게 오른쪽 신발을 신던 서원이 번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집 안으로 들어서려던 누군가와 눈이 바로 마주친다.

“어? 과외 지금 끝났어?”

그리고 예상대로, 당연히, 문을 잡고 선 사람은 연우 형이었다.

그의 몸을 둘러싸고 있는 밤의 바람 냄새가 느껴졌다. 그게 불안이 먼지처럼 쌓여 있던 머리를 환기하는 듯했다. 서원은 벌떡 일어서서 “아, 네.” 했다. 발꿈치로 대충 뒤축을 짓이겨 신발을 신는다.

“오래 했네. 11시 12분인데.”

잠시간 서원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그는 이윽고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시계를 확인했다. “네.” 서원이 답하는 동안 서원을 지나쳐 집 안으로 들어선다. 서원의 시선이 쪼르르 그를 따랐다. 남자는 현관에 멍하니 서서 저를 보고 있는 서원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정수리를 쓰다듬으면서 아주 태연한 목소리로 말한다.

“수고했어. 조심히 가.”

“…….”

냉랭한 목소리도 아니었고, 적당히 따뜻한 목소리에 적당히 친절한 말이었다. 그런데도 서원은 막연히 밀려오는 답답함을 막을 수가 없었다. 제가 조금 더 대담했다면 ‘왜 그러세요?’ 하고 물어봤을 정도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먹먹하고 뻐덕뻐덕한 감정이 목 위까지 차올랐다.

남자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서원은 저도 모르게 재빨리 손을 뻗어 그의 옷소매를 쥐었다. 남자가 멈춰 섰다. 고개를 돌려 서원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본다.

“왜 그래?”

“……저, 집까지 데려다주시면 안 될까요?”

“…….”

“일교차가 심해서……. 추워서요.”

볼멘 목소리는 침착하게 부탁하는 것 같지 않았다. 도리어 논리가 없는 어리광에 가까웠다.

잠시 정적이 머물렀다. 갑자기 연우는 표정을 가리려는 것처럼 제 입을 쓱, 손으로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잠자코 신발을 신었다. 손이 떨어졌을 때, 그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연우는 “그래, 그럼.” 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서원은 그의 뒤를 따랐다.

차가 집으로 향하는 동안 서원은 가라앉은 얼굴로 정면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손끝으로 애꿎은 청바지만 갉작거리던 그는 차가 동네까지 들어설 즈음 작게 입을 열었다.

“……저 오늘은, 군대 간 친구 만났어요. 걔가 휴가 나와서요.”

“아, 그래?”

“네. 같이 저녁 먹었어요. 햄버거 먹었는데…… 맛있었어요.”

“오.”

말을 내뱉고 나니, 이렇게 일상을 보고하는 것도 새삼스럽다는 걸 서원은 깨달았다. 요즘에는 굳이 일상을 말할 필요도 없이 매일매일 그에게 문자가 오곤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는 저에게 한 번도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

“……형은요?”

“응?”

“형은 뭐 하셨어요?”

서원은 스스로도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얼굴을 필사적으로 숨기기 위해 급기야 차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묻는 목소리는 다행히도 감정 없이 나지막했다.

“…….”

“…….”

연우는 정면을 바라보던 눈을 힐긋 옮겨 서원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그저 뒤통수일 뿐인데도 축 처진 기운이 느껴지는 듯하다. 귀엽다. 그는 끝내 웃고 말았다.

오늘 강서원에게 연락하지 않고, 늦게 귀가한 이유는 갤러리 일이 바빠서였다. 단순히 그뿐이었고, 집에 도착하면 강서원에게 전화나 할까 생각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 신발장에서 저를 올려다보던 눈을 맞닥뜨리자마자 그는 문득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다.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그 눈은 저를 보며 반가움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묘한 섭섭함까지 섞여 있었는데, 늘 그렇듯 강서원은 말로만 침착했다.

“그건 왜?”

아니, 정정한다. 오늘은 말로도 침착하지 못했다. 일부러 모르는 척 집 안으로 들어서자 대놓고 집에 데려다 달라고 요구를 하지 않나, 오늘 뭐 했느냐고 의뭉스럽게 물어오지를 않나. 하여간 오늘의 강서원은 좀 이상하다. 어제 술자리에서는 그렇게 숨기고 싶어 안달 내던 녀석이 오늘은 뭔가를 표현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대체 뭘까. 연우는 흥미롭게 짐작하면서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되물었다. 서원은 잠시간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유헌이랑, 있으셨나 해서…….”

뭐?

연우는 순간적으로 튀어나오려는 되물음을 가까스로 집어삼켰다. 잠시 골몰히 생각하던 그는 이윽고 느리게 입을 열었다.

“……유헌이랑? 음…….”

“…….”

“그건 왜?”

일부러 어중간하게 대답을 흘린다. 강서원의 얼굴이라도 보고 있으면 도대체 무슨 대단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라도 할 터인데 고집스러운 얼굴은 도무지 보여줄 생각이 없는 듯하다.

서원은 다시 말이 없었다. 대답을 종용한다면 도리어 더 말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연우는 이성적으로 생각하면서 성질을 긁는 답답함을 감내했다. 차 안은 오랫동안 침묵뿐이었고, 두 사람의 생각들만이 어지러이 그 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유헌이.”

“…….”

비로소 서원이 말을 꺼낸 건, 연우가 일부러 그를 집에 내려 주지 않고 지나쳐 동네를 두 바퀴나 돌고 나서였다. 목소리는 작았고, 답지 않게 어딘가 뾰족한 면이 있었다.

“나쁜…… 애예요.”

생각지도 않은 말. 연우는 다시 고개를 돌려 조수석 쪽을 바라보았다. 표정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으나, 심술 맞게 꾸욱, 힘을 주고 있는 턱은 이제서야 눈에 보였다.

“무슨 말이야, 갑자기?”

“못됐어요. 진짜, 저, 중학교 때도 못된 짓 했고…….”

“…….”

“그러니까…… 막, 여우 같고, 진짜로…… 가식적이고…….”

떠듬떠듬 말하는데 문장을 완성시키지를 못한다. 머릿속이 어지럽게 엉켜 있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대개, 머릿속이 저렇게 엉켜 있는 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강서원이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은…….

“…….”

“그냥…… 말만 잘하고, 또…….”

질투다.

연우는 깨달았다. 동시에 그렇게 야속하게 느껴지던, 절대 저를 쳐다보지 않고 있는 강서원의 얼굴이 고맙게 느껴졌다. 지금 제가 활짝 웃고 만 걸 들키지 않은 게 다행이었으니까. 그는 소리 없이 웃다가 다시 손을 올려 제 턱을 쓰다듬었다. 입매를 가까스로 다듬는다.

이제야 이해가 갔다. 고깃집에서 강서원이 취했던 태도도. 감정도. 의도도. 애당초 강서원은 저에게서 최유헌을 숨기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최유헌에게서, 저를 숨기고 싶었던 거다.

“……그래? 난 잘 모르겠던데.”

“…….”

모르겠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말하자 횡설수설 흉을 보려던 말들이 뚝, 멎는다. 기어이 뭔가가 차오르는지 마른 어깨가 작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보였다.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들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거기까지 확인한 연우는 다시 흐물흐물 녹아내리려는 입매를 황급히 가렸다. 이제 알아냈는데, 쉽게 들킬 수야 없었다. 조금 더 생각하고 행동해야 했다.

“……서원아?”

“……네. 죄송해요.”

능청스러운 부름이었다. 그에 서원은 꼴깍꼴깍 침을 힘겹게 삼키면서 자꾸 기분 나쁜 리듬으로 뛰는 심장과 차오르는 열을 진정하려 애쓰며 답했다.

동네를 빙빙 돌던 차가 서원의 집 앞에 멈춰 섰다. 서원은 도망치듯 그대로 문을 열었다.

“내일 보자.”

연우는 조금 전의 대화가 아무 일도 아니라는 것처럼 다정하게 눈을 맞추려고 들었으나, 서원은 끝내 그의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서원은 바닥을 바라보면서 “네.”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곧 쾅, 문이 닫혔다. 서원의 동네를 떠나고 나서야 연우는 웃었다. 웃음은 아주 오랫동안 이어졌다.

* * *

종종 삼 형제는 늦은 밤중에 모여 시리얼을 말아 먹곤 했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맨 먼저 앉아 있던 재원은 시리얼을 잔뜩 부은 그릇에 우유를 넣으면서 흘긋 제 앞에 앉는 형의 얼굴을 확인했다. 제 형은 표정이 많은 편이 아니었으나, 그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금방 감정을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눈빛과 태도의 변화가 뚜렷했다.

‘분명 저번 주에는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

재원은 생각하면서 스윽, 조심스럽게 우유를 앞쪽으로 밀었다. 제 형은 조용히 우유를 그릇에 부었다.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다.

“……형.”

머뭇거리던 재원이 급기야 그를 불렀을 때였다. 방에서 게임을 하던 태원이 부엌으로 나오면서 자기도 시리얼을 먹겠다며 수선을 떨었다. 곧이어 빈 그릇과 수저를 가지고 식탁에 앉은 녀석이 초코 시리얼 박스를 들고 흔들었다.

“뭐야. 초코 다 먹었어? 아, 나 곡물 맛 싫은데.”

그렇게 말하면서 제 둘째 형과 첫째 형의 그릇을 번갈아 본다. 재원과 서원의 그릇에는 나란히 초코 시리얼이 담겨 있었다. 서원은 그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다 제 그릇을 태원 쪽으로 밀었다.

“네가 이거 먹어. 줘, 빈 그릇.”

“됐어. 받아 주지 마. 야, 새끼야. 네가 애냐? 제일 늦게 왔으면 군소리 말고 곡물 맛 먹어라.”

재원은 서원의 손을 저지하면서 태원의 이마를 쥐어박았다. 태원은 “아, 그러려고 했어!” 하며 제 이마를 감쌌다. 뭐라고 꿍얼거리면서 곡물 맛 시리얼 박스를 든다. 서원은 그런 소란에도 반응하지 않고 가만히 수저를 들기만 했다. 잠시 그릇을 바라보던 그가 다시금 그릇을 태원 쪽으로 밀었다. 탁. 수저가 식탁에 놓였다.

“……강태원, 그냥 너 먹어. 나 속이 안 좋아서 안 먹으려고.”

“헉, 왜? 형 어디 아파?”

태원은 막내답게 귀염성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재원이 놀란 눈으로 서원을 바라보았다.

“좀.”

“어디 아픈데?”

재원이 물었다. 서원이 눈을 들어 재원을 바라보았다. 엄한 시선이었다.

“시험 기간이라 그렇겠지. ……너도 시험 기간 아니야?”

무심한 대꾸가 재원을 위축시켰다. “……맞아…….” 재원은 웅얼거리면서 눅눅해진 시리얼을 한 술 떴다. 어제도 늦게까지 놀다 들어왔으니, 괜한 꾸중은 아니었다.

“공부 안 해?”

며칠 전 했던 대화를 염두에 둔 지적이었다. 재원의 어깨가 더 쪼그라들었다.

“하, 할 거야. 어차피 교양 시험이 먼저라서…….”

“…….”

“……알았어어. 이제 안 놀러 다닐게. 미안.”

재원은 대화에 끼어든 제가 미친놈이라고 생각하면서 결국 잘못을 시인했다.

서원이 일어섰다.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려던 그는 식탁에 놓인 제 핸드폰을 떠올리고 다시 뒤돌아 식탁으로 향했다. 그사이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새로운 메시지였다. 서원은 식탁 옆에 서서 메시지를 확인했다.

[최유헌] 야 사장형이 잃어버렸던 니 이어폰 가게에서 찾았다고 시간날때 찾으러오래

[최유헌] 사장형 핸드폰 고장나서 내가 전해줌ㅇㅇ

[최유헌] 글고 나 근무시간 아닐때와라 ㅋ 마주치기 싫으니까

서원은 답장하지 않고 메시지 앱을 닫았다. 조금 가라앉은 듯한 그 얼굴을 살피던 재원이 조심스레 물었다.

“……뭐야?”

“뭐가?”

서원의 눈이 재원을 향했다.

“왜 그런 표정이야?”

서원은 그 물음이 무엇에 기반해 있는지 알고 있었다. 재원은 어렸을 적 제 형이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는 걸 자라면서 자연스레 깨우치게 된 듯했다. 그게 영 마음에 걸리는지 그는 제 형의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조금 예민하게 굴었고, 지금까지도 관여하려고 들곤 했다. 실제로 경찬과는 종종 연락도 하는 모양이었다.

“별거 아냐. 알바 했던 사장님이 뭐 찾으러 오래서.”

어린 구석이 있어도 어쨌든 심성이 착한 놈이다. 공연히 재원을 걱정시켰다는 생각이 들어 서원은 엷게 웃으면서 재원의 머리를 툭 쳤다.

“과에서 괴롭히는 놈들 있음 말해.”

“무슨 우리가 중고딩이냐.”

기어이 웃음이 터져버렸다. 그렇게 말하고 나니 재원은 아직 고등학생에 가깝긴 했다. 한창 교수님께 실수로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강의 도중에 화장실 갔다 와도 되냐고 물어볼 시기. 서원은 다시 한번 재원의 머리를 건드렸다. 재원은 “아, 하지 마. 진지하게 하는 말이거든.” 하고 꿍얼거렸다.

“그리고 뭐, 우리 과 보니까 일진 놀이하는 새끼들 존나 많더만.”

“나 화석이라 이제 그런 거에도 안 껴 줘, 애들이. 내 존재도 몰라.”

재원은 갑자기 민망했는지 시리얼을 우적우적 씹기만 했다. 서원은 푸스스 웃으면서 건드렸던 부분을 매만져 주고는 식탁을 벗어났다. 곧바로 방 안으로 들어간다.

탁. 문이 닫히자마자 얼굴에 피어 있던 웃음이 사라졌다. 서원은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침대 위에 앉았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연우와의 채팅창을 켰다. 고민하는 것처럼 눈동자가 이리저리 방황했다. 이내 액정을 똑바로 응시한다.

[형, 오늘 제가 했던 말은 잊어주ㅅ]

“…….”

느리게 움직이던 손가락이 돌연 멈춘다. 서원은 액정을 가만히 노려보다가 빠르게 글자를 지워버렸다. 굳이 잊어 달라고 할 이유는 또 뭔가, 싶은 생각이 든 탓이었다.

툭, 서원은 결국 핸드폰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대로 침대 위에 엎어졌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부글부글 끓는 감정을 진정하려 애쓴다.

“…….”

어찌나 잠이 오지 않는지, 화가 날 정도로 긴 밤이었다.

* * *

오늘 있었던 전공 시험을 망쳤다. 어제 그런 식으로 밤을 꼴딱 새고 말았으니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 예상보다 더 안 좋았다. 아는 문제가 거의 없었다.

내가 너무 집착하고 있는 것 같아.

결국 그런 생각까지 이르렀다. 간밤 내내 화르륵 타던 불은 새벽빛이 떠오름과 함께 소화되었고, 현재 서원의 머릿속은 고요한 잔해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어쩌면 다시 타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서원은 일부러 그에 관한 생각의 실마리들을 외면하고 있었다. 계속 생각하고 있기에는 감정 소모가 너무 컸다. 어젯밤은 너무 힘들었다.

서원은 갤러리에 가기 전, 선술집으로 가는 버스에 탔다. 이 시간이면 최유헌이 있을 시간이었으나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자신이 일하는 시간을 피하라는 말을 굳이 들어줄 필요는 없다고 서원은 생각했다.

선술집 앞이었다. 서원은 자동문 버튼을 누르려던 손을 멈추었다. 시끄러운 목소리들이 문밖으로 새어 나왔다. ‘무슨 일이지.’ 서원은 생각하며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직 손님이 없을 시간의 가게 안은 서원의 예상대로 한산했다. 그러나 제가 있을 때와 달리 왁자지껄했다. 제가 나간 뒤로 아르바이트를 구한 것인지 사장과 최유헌, 그리고 처음 보는 남자애가 카운터 주변에 모여 앉아 떠들고 있었다. 얼마나 크게 소리를 치면서 이야기를 하는지 사장의 목소리가 문밖까지 쩌렁쩌렁 들릴 정도였고, 또 얼마나 재밌는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유리문 너머로 누군가가 저들을 보고 있다는 걸 셋 중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

놈이 사회성이 좋고 누구에게든 호감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근데 새삼, 자신과 최유헌의 차이가 와닿았다. 사장님과 웃으면서 장난치고 있는 최유헌. 누구와도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최유헌이 아니라, 하나뿐인 친구가 다시 군대에 가면 누구와도 만날 사람이 없고, 동생조차 걱정하게 만드는 자신이 진짜 이상한 사람인 것 같았다.

그러니까, 어쩌면, 정말 어쩌면, 제 생각이 틀린 걸 수도.

아무도, 최유헌을 글러 먹은 사람이라고 느끼지 않을 수도.

어쩌면 최유헌은 그냥, 보통의 사람일 수도.

“…….”

어쩌면, 형과 유헌이는 그냥…….

서원은 생각을 거두고 말없이 등을 돌렸다. 최유헌과 말을 섞을 자신이 없어진 까닭이었다.

[연우 형] 서원아

[연우 형] 휴식시간에 형 일하는 곳으로 와

[연우 형] 5층이야

[연우 형] 할 말 있으니까 오늘은 잊지 말고 와

갤러리로 가는 버스 안에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서원은 어젯밤 잠을 잘 이루지 못한 탓에 빳빳하게 굳은 제 목과 어깨를 주무르며 ‘네’ 하고 답장했다.

* * *

“……안녕하세요.”

휴식시간에 그의 집무실로 갔을 때 서원은 작정하고 무덤덤한 얼굴을 한 채로 그를 불렀다. 소파에 누워 있던 남자가 벌떡 상체를 일으켜 문 쪽을 쳐다보았다. 서원과 눈을 마주하자 권태롭던 눈 위로 싱글, 생기가 돈다. 남자는 예의 그 친절한 웃음을 지으며 서원에게 손짓했다.

“들어와.”

서원은 천천히 문을 닫고 들어갔다. 그리고 주춤주춤 그의 소파 주변에 섰다. “여기 앉아.” 연우는 웃는 낯 그대로 제 옆자리를 툭툭 쳤다.

“할 말 있다고 하셔서…….”

“뭘 새삼. 할 말도 있고, 놀기도 할 거고. 빨리 앉아.”

그의 독촉에 서원은 잠자코 앉았다. 그리고 저를 빤히 쳐다보는 그의 눈을 필사적으로 피하면서 허공을 응시했다. 저를 위해서도, 그에게 몰두하지 않기로 다짐한 게 고작 몇 시간 전이다. 그래. 이성적으로 생각해도 그게 맞는 일이다. 굳이 자신이 그에게 집착할 이유가 없다. 서원은 스스로를 재차 다그치면서 허리를 빳빳이 세웠다. 소파가 어찌나 물컹거리는지 연신 흔들거리는 균형을 가까스로 잃지 않던 중이었다.

“할 말이 뭐게.”

“……모르겠어요.”

커다란 손이 균형을 무너뜨리려 작정한 사람처럼 불쑥 서원의 손을 쥐어 제게로 당겼다. 놀란 서원이 눈을 키우고 남자를 바라보았으나 그는 태연한 얼굴로 빠져나가려는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뭔가 이상하다. 서원은 직감했다.

“서원아. 진짜 솔직하게 말할게. 알았지?”

“……네.”

남자가 차근차근 설명하는 초등학교 선생님처럼 상냥하고 진중하게 말을 꺼냈다. 그 태도에 공연히 긴장이 되어 서원은 침을 꼴깍 삼키며 다시 허리에 힘을 주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대체 뭐길래 저렇게 진지할까.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막을 새도 없이 기분 나쁜 짐작들이 뭉게뭉게 피어난다. 그렇게 애를 썼던 것 무색하게 다시 점화되려는 듯 가슴께에 자꾸 부싯돌이 부딪혔다.

진정해. 이렇게 신경 쓸 일 아니야. 뭐라 하든 긴장하지 마. 네가 긴장할 이유 없어.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려던 찰나였다. 무어라고 알 수 없는 서론을 펼쳐 놓던 남자가 습관처럼 서원의 턱을 들어 저와 눈을 마주하게 했다.

“……그래서…… 서원아. 듣고 있어?”

“……네.”

사실 하나도 못 들었으나 서원은 그렇게 말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곤 그대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유헌이는…….”

속삭이는 것처럼 낮고 감미롭게 흐르던 목소리가 그 이름을 담은, 그 순간이었다. 화르륵, 대형 화재가 일었다.

서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제 손을 감싸고 있는 온기를 힘껏 뿌리치면서 벌떡 일어섰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오늘, 세 번째. 이 이상은 안 될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유헌이’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도무지 참을 수가 없어졌다. 별안간 마찰열이 일었고, 불이 커졌다. 서원은 목과 얼굴 위로 타오르는 열을 주체할 방도를 몰랐다. 이 감정의 이름을 잘 몰랐는데, 아무래도 분노인 것 같다.

서원은 씨근덕거리며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마른 몸이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고 쉼 없이 오르락내리락했다. 남자는 잠시 상황을 파악하는 듯 가만히 서원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곧이어 느긋하던 얼굴 위로 황당함이 떠오른다.

“뭐 하는 거야?”

그가 물었다. 서원은 낮게 대답했다.

“……별로 안 궁금해요.”

“뭐가?”

나지막한 목소리 그대로 묻는다. 서원은 벅차오르는 숨을 한껏 삼키고 답했다.

“형이랑 최유헌이 어떻든, 저는 별로 안 궁금하다구요.”

“……내가 별로 안 궁금한 얘기를 해서 화가 난 거야?”

조곤조곤 물어 오는 말이 쏟아졌다. 목소리의 온도는 미지근했지만 서원은 찬물을 맞은 사람처럼 바르르 떨었다. 제가 너무 뜨거운 탓이었다.

“……네.”

“별로 안 궁금해도, 그냥 들을 수 있잖아. 그렇게 화날 정도야?”

그의 말이 예리한 고드름처럼 콱 가슴팍에 박혀 왔다. 이윽고 이성이 목덜미를 서늘하게 감쌌다. 차츰 열이 식는다. 맞다. 오히려 이게 더 이상했다. 별로 궁금하지 않은 얘기라도 그냥 듣고 넘기면 되었는데, 너무 과민하게 반응했다. 서원은 빠르게 후회했다. 애써 침착하려고 하다 보니 도리어 역효과가 난 것 같았다. 자신은 지나치게 긴장하고 있었다.

어중간한 거리에 서서 금세 파랗게 질린 서원을 빤히 바라보던 연우가 그를 따라 일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

“왜 그렇게 화가 난 건데. 내가 유헌이에 대해 말하는 게 싫어서?”

서원은 꿈쩍하지 않았다. 가기 싫어서 가지 않는다기보다는 몸이 얼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었다. 저에게로 다가오는 걸음은 느렸지만 멈출 기미는 없었다. 급기야 굳어 있던 서원의 발이 주춤 뒤로 물러섰지만 다가오는 걸음이 훨씬 빨랐다.

“그러면, 왜 내가 유헌이에 대해 말하는 게 싫은데?”

“…….”

서원의 정수리 위에 그늘이 졌다. 비상계단에서 그랬던 것처럼 익숙한 향기가 났다. 동시에 심장이 달싹거렸다. 서원은 침을 삼켰다. 가까운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남자의 얼굴을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왜인지는 몰랐다.

“단순히 유헌이가 싫어서야?”

“…….”

말없이 서 있기만 하는 서원을 가만히 바라보던 남자가 다시 입을 연 것은 별로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난 뒤였다. 그가 입을 열어 말했다.

“아니면, 내가 좋아서?”

“……!”

망설임 없이 흘러나온 말이 별안간 콱 심장을 조인다. 벼락을 맞은 것처럼 서원이 떨었다. 서원은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계속 서원을 보고 있었던 듯했다. 그의 얼굴은 어느 감정으로도 뒤덮여 있지 않았다. 평범했다. 그리고 그 미지근한 온도가 서원으로서는 더 당황스러웠다. 다시 얼굴에 열이 올랐다. 가슴에 박힌 고드름이 빠르게 녹았다. 동상에 걸렸던 것처럼 온몸 전체가 저렸다.

“…….”

좋아서라고?

그가, 좋아서?

말이 안 된다.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자신은 그저, 최유헌이 싫기 때문이다. 남자가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다. 놀란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던 서원이 급기야 입을 앙다물었다. 그리고 비상계단에서처럼 남자의 어깨를 밀어내는 대신, 거듭 눈을 들어 남자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어찌나 눈에 힘을 주었는지 눈에 물기가 그렁그렁했다. 서원이 딱딱하게 굳은 턱을 벌려 말했다.

“……형님이 절 좋아한다고, 저도 형님을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

“…….”

“착각하지 마세요.”

한 글자 한 글자 곱씹듯 나온 말이었다. 서원은 곧바로 남자를 비켜 갔다. 그리고 도망치듯 집무실을 나섰다. 쿵쾅쿵쾅. 엘리베이터 옆 비상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컸다. 서원은 비상계단을 내려가면서도 계속해서 심호흡을 했다.

* * *

갤러리에 출근하지 않은 지 이틀째였다. 날씨는 화창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파랗고 높았고, 지나가는 바람은 시원했다.

“설기야, 이제 가자. ……어? 참나, 얘가 왜 이런대.”

“이름이 설기예요?”

“네! 백설기예요.”

“설기가 제가 좋은가 봐요. 설기야, 형 좋아?”

“여자예요.”

“……오빠 좋아?”

잠잠한 말투에 곁들여진 능청스러운 언사가 퍽 웃긴지 견주는 결국 입을 가리고 웃고 말았다. 그녀를 웃기고자 한 건 아니어서, 연우는 덤덤한 얼굴을 일관한 채로 설기의 통통한 배를 슥삭슥삭 만져 주기만 했다.

그는 오늘도 절대 출근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투영된, 대놓고 편안한 차림을 하고 한강 주변을 유유자적 걷고 있었다. 평일 낮임에도 불구하고 날씨 때문인지 꽤 많은 사람과 개들이 한강을 끼고 뛰거나 걷고 있었는데, 개들은 꼭 저를 보고선 몸을 다리에 비비고 갔다. 방금 저를 떠나간 설기라는 개는 살짝 등을 만져 주니 헥헥거리며 배까지 까뒤집기에 조금 자신감이 생긴 참이었다.

“나도 개나 키울까.”

설기가 떠난 자리에서 가만히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있던 연우는 바람이 머리를 엉망으로 만들고 지나갈 때가 되어서야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작게 혼잣말을 하다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자신은 개보다는 사람을 훨씬 좋아했다. 더군다나 강서원이라면 더 그랬다. 자신이 예뻐해 주고 싶은 건 설기가 아니라 강서원이었다.

‘……형님이 절 좋아한다고, 저도 형님을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

‘착각하지 마세요.’

마침내 연우는 제게 이를 드러냈던 강서원을 회상하면서 벤치에 털썩 앉았다. 넉넉한 품의 연하늘색 맨투맨과 검은 생머리가 강바람에 휘날렸다. 강을 바라보는 얼굴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수요일부터 쭉 이 상태였다. 애당초 그리 욕심이 있던 것도 아니니까, 녀석이 겁을 내면서 뒤로 물러선다면 더 이상 다가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자신은 그저 강서원을 마음껏 예뻐하고 싶었을 뿐이지 어떤 관계를 맺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 자꾸 그러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만져도 되는, 그러니까 설기 같은 강아지가 있다면, 겁이 많아 만지면 안 되는 강아지도 있는 것뿐인데. 강서원이 그런 것뿐인데. 그걸 이해하고 넘어가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됐다. 그냥 방어적으로 저를 보는 그 눈망울만 떠올랐다.

청바지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핸드폰이 진동을 냈다. 연우는 흘긋 시선을 내려 핸드폰을 확인했다. 발신인은 갤러리 실장이었다.

“……네에, 실장님.”

연우는 짐짓 경쾌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등받이에 비스듬히 상체를 기댄다. 실장은 제게 왜 출근을 안 하시는지, 혹시 어디 아프신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 전화를 했다고 정중하게 말했다. 연우는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팠어요. 월요일부터 다시 출근할게요. 죄송해요. 일 많이 밀렸어요?”

분명 수화기 너머로 세찬 바람 소리가 들렸을 터인데도 실장은 기꺼이 연우의 뻔히 보이는 거짓말에 넘어가 주었다. ‘하긴, 안 넘어가 주면 어쩌겠어.’ 연우는 생각하면서 몸조리 잘하시라는 실장의 말에 월요일에 뵙겠다고 살갑게 대답했다.

형식적인 전화는 금방 끝이 났다. 연우는 미지근해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걸었다.

“…….”

강아지 또 만지고 싶다.

아까 보았던 설기 생각이 난다. 그는 공연히 간질거리는 손바닥을 주머니에 넣으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청첩장을 받는 얼굴은 시큰둥했다. 종이의 접힌 부분을 의미 없이 쓸어 넘기던 손가락이 멈췄다. 툭, 테이블 위에 청첩장을 버리듯 내려놓은 놈이 한참 만에 하는 말이라곤 고작 “이거 주려고 부른 거야?” 였다.

“……야, 요즘 같은 시대에 청첩장을 직접 전해 주는 게 얼마나 큰 의미인데. 새끼야. 반응이 그게 다냐?”

“너랑 나랑 무슨 큰 의미가 있다고.”

심드렁한 대꾸가 돌아온다. ‘저 싸가지 없는 새끼.’ 진석은 생각하면서도 잠자코 아메리카노만 한 모금 들이켰다. 오늘따라 유독 놈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던 탓이었다. 원래 삐딱선이 일상인 놈이긴 했으나 그것도 실실 웃는 낯으로 그랬지, 저렇게 콱 인상을 구긴 채는 아니었다.

“너 뭔 일 있냐?”

“뭔 일은.”

“왜? 외가 쪽에서 갤러리 더 맡아 달래? 준우 졸업해도?”

시연우가 제 잘난 낯짝을 굳힐 일은 그런 것뿐이었다. 그 밖의 일에는 뭐든 가벼운 놈이라는 걸 진석은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사람 관계, 그러니까 이성 관계나 친구 관계는 얇은 얼음판처럼 얄팍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은 놈이 누군가를 버리고 또 누군가에게 버려지는 일에 타격을 받는 꼴을 좀처럼 본 적이 없었다. 작년 여름, 꽤 오래 사귀었던 애인과 헤어진 다음 날에도 멀쩡하게 저를 만나 그 애인의 이름을 입에 올리던 놈이다.

‘맞아. 하린이도 종이 빨대 흐물거린다고 엄청 싫어하더라.’

그렇게 말하는 얼굴은 꼭 아직도 교제하고 있는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산뜻했다. 순간 진석은 어젯밤 제가 하린에게 받았던 연락이 서로 싸우던 중 홧김에 온, 젊은 커플의 민폐스럽고 치기 어린 소동일 뿐이었나 생각했다. 그러나 연우도 하린도 제가 아는 한 그런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긴가민가하다. 그는 웃던 얼굴을 어색하게 굳혔다. 그리고 연우에게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너…… 하린이랑, 안 헤어졌어?’

‘헤어졌는데? 하린이한테 못 들었어?’

딱 떨어지는 태연한 목소리는 시연우에게 꽤 관대한 편인 저마저도 정이 떨어질 정도였다. 진석은 결국 참지 못하고 연우의 등판을 연신 세게 내려치면서 넌 대체 언제 정신 차릴래, 언제 철들래, 라는 등의 오지랖 넓은 아저씨 같은 대사까지 내뱉고 말았다.

사실 그때의 충격은 아직도 가시지 않은 상태다. 사람을 가볍게 여기는 놈의 정신머리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건 아니고.”

연우는 빨대를 휘적휘적 저으면서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지런한 얼굴이 감정에 의해 미묘하게 균열이 가 있다. ‘일 때문이 아니라니.’ 진석의 눈썹이 흥미롭다는 듯 휙 올랐다.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상체를 기울인다.

“그럼?”

“너는 남 얘기가 그렇게 좋냐? 진짜 할 일도 없다.”

“이제 알았냐. 난 내 평탄한 인생이 심심해.”

진석은 능청스레 대꾸했다. 연우는 더 핀잔을 주지 못하고 빨대를 퍽퍽 치대기만 했다. 그 모양을 가만히 보던 진석이 “……혹시.” 하면서 불분명한 어투로 운을 뗐다. 요즘 시연우의 관심사는, 제가 아는 한 하나밖에 없었다.

“네가 꼬시던 그 대학생 때문에 그래?”

“대충은.”

연우의 대답에 진석이 눈을 번뜩 떴다. 눈이 흥미로움으로 반짝거렸다. “왜? 안 넘어와? 아니면 벌써 사귀었다가 헤어졌어?” 물어보는 것이 흡사 승냥이 같았다. 연우는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말했다.

“됐어. 별거 아니야. 이미 끝났어.”

“에이. 벌써 끝난 일이면 네가 이럴 리가 없는데.”

“내가 초딩도 아니고 다음 날 바로 속없이 히히거리겠냐?”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초딩 맞아.”

진석은 이제 알았느냐는 투로 간격 없이 답했다. 돌연 연우가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 벌떡 일어섰다. 청첩장을 거칠게 낚아챈다.

“나간다.”

“삐졌냐?”

“닥쳐, 좀.”

“뭐? 닥쳐? 보자 보자 하니까 이 새끼는 형한테…… 야, 진짜 가?”

“일하러 가야지. 내가 너냐?”

“아, 그럼 그렇다고 곱게 말하면…….”

까지 진석이 말을 했을 때는, ‘이 새끼’는 이미 큰 보폭으로 카페를 나선 뒤였다.

‘……그래도 청첩장을 챙겨 간 게 어디냐.’ 진석은 남은 정까지 떨쳐내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자신을 달랬다.

* * *

월요일은 늘 일주일 중 가장 힘이 없는 날이긴 했으나, 오늘은 특히 더했다. 어제 속이 별로 좋지 않아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은 탓일지도 모른다. 밤에는 교회에서 돌아온 엄마가 교회에서 파는 시루떡이라며 먹어 보라기에 억지로 몇 조각 먹었는데, 그게 좀 얹힌 것 같기도 했다. 여하간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무슨 정신으로 갤러리까지 도착했는지 모르겠다. 서원은 3층 사무실로 올라가 담당 직원에게 인사했다. 직원은 “어, 서원이 왔어.” 하며 그에게 목걸이 명찰을 내밀다가, 그의 얼굴을 보고서는 유령을 본 듯이 화들짝 놀랐다.

“너 얼굴이 왜 그래? 어디 아파?”

“네. 조금…….”

“괜찮겠어?”

“네.”

“많이 아프면 참지 말고 전화해. 알았지?”

“네.”

서원은 얼빠진 얼굴로 대답하면서도 성실한 동작으로 명찰을 목에 걸었다. 그리고 갤러리에 오기 전 산 이온 음료를 마셨다. 이거라도 마셔야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몸이 약한 편은 아니어서 쓰러질 리는 없겠으나 꼼짝없이 서 있을 터이니 되도록 컨디션을 회복하고 내려가는 게 나았다.

1층으로 내려가 로비를 가로지를 때였다. 입구 쪽에서 눈에 띌 정도로 키가 큰 사람이 안으로 들어서고 있는 게 보였다. 익숙한 인영이다. 서원은 주춤, 발을 멈추고 멀리서 걸어오는 남자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남자는 서서히 서원 쪽으로 가까워졌다. 이윽고 눈이 마주했다. 남자는 서원을 보지 못했던 듯 놀란 얼굴을 했다.

“어, 서원아.”

“……안녕하세요.”

서원은 살짝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 어색한 인사를 끝으로 잠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남자는 서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서원은 눈을 내리깔았다. 집요한 시선에 한심한 심장은 덜컹거리고 말았다.

그가 입을 연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서원의 얼굴을 훑던 눈동자가 마침내 서원과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오랜만이네?”

“……네.”

“그래. 일하고 가.”

“…….”

끝.

그걸로 끝이었다. 남자는 서원의 어깨를 격려하듯 툭툭 치고서는 그를 지나쳐 갔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한 담백한 태도였다. 서원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빠르게 멀어져 가는 매끈한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을 뿐인데 왈칵 속이 뒤틀렸다. 위가 요동친다. 서원은 몸을 웅크렸다.

“…….”

힘없는 걸음이 그대로 전시장을 향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한 시간을 채 버티지 못하고 다시 담당 직원을 찾았다.

“누나, 저 좀만 쉬고 싶어요.”

「알았어. 금방 내려갈게.」

서원이 저를 찾을 것을 예상했는지 직원은 침착한 목소리로 응답했다. 서원은 전화를 끊고 제 명치 부근을 매만졌다. 쿡쿡 쑤시는 감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과격해졌다. 표정 관리가 잘 안 됐다. 누워 있고 싶었다. 좀처럼 서 있을 힘이 나질 않는다. 서원은 결국 팔을 뻗어 벽에 손을 짚은 채로 직원을 기다렸다.

“어머, 서원아. 괜찮아?”

직원은 5분도 지나지 않아 전시장에 도착했다. 아까보다 더 창백해진 서원의 낯을 본 그녀는 수선을 떨면서 그에게 다가갔다. 두 손이 축 처진 어깨를 붙잡았다.

“……네. 근데 좀…… 아파요.”

“야, 너 좀이 아닌데. 안 되겠다.”

그녀는 서원을 부축한 채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누군가 저를 붙잡아 주고 있다는 것에 긴장이 조금 풀리자, 기다렸다는 듯 고통이 더 크게 밀려오기 시작했다. 서원은 몸을 한껏 웅크린 채로 느리게 그녀를 따랐다.

다다른 곳은 4층 복도 끝에 있는 직원 휴식실이었다. 지문 인식으로 문을 연 그녀는 서원을 가장자리에 놓인 침대에 눕혔다. 서원은 눈을 굴리며 “저 여기 있어도 괜찮아요?” 하고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일하는 시간이라 아무도 안 와. 여기 야근하는 사람들 자고 가라고 만든 데라서.”

직원은 이불을 정돈해 주면서 말했다.

“……죄송해요.”

“뭐가 죄송해, 아픈데. 오늘은 쉬었다가 가. 저기 문 옆에 버튼 누르면 문 열린다?”

“네. 감사합니다, 누나.”

그녀는 그 와중에도 꼬박꼬박 예의를 차리는 서원이 못내 귀여운지 픽 웃었다. 그리고 서원의 머리를 한 번 툭 치고는 휴식실을 나섰다.

서원은 문이 닫히자마자 모로 누워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고통을 죽이기 위해 숨을 고르게 내쉬려고 애썼다. 눈이 살짝 찌푸려진 채로 감겼다. 땀으로 젖은 이마 위에 앞머리가 흐트러진 채로 흘렀다.

“…….”

잠깐 잔 것 같았다. 들쑤셨던 통증이 차츰 가라앉고 있었다. 고통을 생으로 받아내던 몸에 긴장이 서서히 풀렸다. 서원은 느리게 눈을 떴다. 눈이 깜빡이는 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휴식실 안은 조용했다.

서원은 몸을 쭉 폈다. 그리고 바로 누워 어두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가지런한 손을 제 얼굴 위로 올렸다. 그는 손가락을 하나씩 꼽기 시작했다.

그에게 착각하지 말라고 했던 말이 저번 주 수요일이고, 오늘은 월요일……. 그러면,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나흘.

“하아…….”

나흘. 자그마치 나흘이나 지난 뒤에 만난 그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서원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단정한 손은 손가락을 네 개 접은 채로 다시 이불 위에 툭, 힘없이 떨어졌다.

예상은 했었다. 아니, 처음에는 오히려 언젠간 이렇게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마음의 짐을 덜어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남자는 저를 그렇게까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렇게까지 욕심이 있지는 않다는 걸 알았으니까.

다만 제가 염두에 두지 못했던 건, 자신이 남자를 좋아하게 될 경우였다.

“멍청해…….”

저도 몰랐던 제 마음을 남자에게 꿰뚫리고 난 후, 또 기어이 저 또한 많고 많은 생각 끝에 인정하고 난 후, 서원을 찾아온 건 설렘이 아닌 두려움이었다. 마냥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저에게는 생각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고통이 머물고 간 자리에 울적한 먹구름이 찾아왔다. ‘어쩌다가 좋아하게 된 거지.’ 슬픈 미래를 예보하듯, 다시금 먹구름 사이로 내리치는 천둥처럼 통증이 일었다. 더 아파지기 전에 이제 슬슬 일어나서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서원은 생각했다.

그때였다. 어두운 벽 사이로 빛줄기가 새었다. 누군가가 들어온 듯했다. ‘직원 누나인가.’ 서원은 생각하면서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일순 우울함이 그득했던 커다란 눈망울 위로 탁, 햇빛이 드리웠다. 서원은 당황함을 숨기지 못하고 눈을 부산스레 깜빡였다.

“……어…….”

형이다.

“누워 있어.”

남자는 차분한 얼굴로 문을 닫았다. 어중간하게 팔꿈치를 세워 몸을 일으키던 서원은 그의 말에 얌전히 다시 상체를 눕혔다. 그는 문간에 서서 잠시 잠금장치를 조작했다. 잠시 후, 그가 돌아섰을 때는 희미하게 빛나던 잠금장치의 빛이 사라졌다. 아예 장치의 전원을 꺼버린 모양이었다.

그는 큰 보폭으로 다가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서원은 아무 말 없이 그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얼굴을 가까이서 보자, 그새 역치가 낮아진 심장은 발광을 하는 것처럼 뛰었다. 그때였다.

“아프다며.”

“……네.”

“어디가 아파?”

낮고 편안한 목소리가 어두운 방 안에 퍼졌다. 커다랗고 서늘한 손이 뜨끈한 이마를 스쳐 머리를 매만져 주었다. 기분 좋은 온도에 서원은 숨을 느리게 내쉬면서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당겼다. 아늑한 감각이 온몸을 감싼다.

“명치가…….”

“위?”

“그런 것 같아요.”

“왜 위가 아플까.”

서원은 우물쭈물하던 입을 꾹 다물었다. 급기야 남자의 시선을 피하면서 눈을 내리깔았다.

“…….”

“뭐 잘못 먹었어?”

“…….”

“응?”

다정한 말투가 무력감을 느끼게 했다. 서원은 급기야 제 마음을 인정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제게는 그에게 냉정하게 굴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강한 척해 봤자 힘들어지는 것은 저뿐이었다.

비로소 서원은 어설프고 우울한 생각들을 뱉어내기 위해 입술을 뻐끔거렸다.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형을…….”

“응.”

“형을, 좋아하는 건 맞아요.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고 싶지 않아요. ……무서워요. 그래서 부정했던 거예요. 저는, 전… 상처받을 여력도 없고, 버림받을 여력도 없어요. 이런 걸 시작하면, 언젠가는…… 언젠가는, 상처받을 텐데…… 그걸 감당할 수가 없어요. 지금도 충분히 힘든데. 충분히…….”

“서원아, 형 봐봐.”

마치 처음 언어를 배운 사람의 것처럼 더듬거리는 말들을 잘라낸 건,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서원이 입을 다물었다. 아래를 바라보던 다갈색 눈이 망설이다가 이윽고 천천히 올라간다. 커다란 눈망울이 연우를 수직으로 올려다보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했던 호수 같은 눈. 그리고, 관심을 보채는 조용한 아이 같은 눈.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입과 달리, 눈은 뚜렷하고 선연했다.

좋아해.

그 욕심에 끌려가듯, 연우는 허리를 숙였다. 서원의 얼굴 위에 더 짙은 그림자가 드리운다.

“…….”

“…….”

예상보다 훨씬 바싹 다가온 얼굴에 놀란 서원이 숨을 삼킨 순간이었다. 커다란 손바닥이 한쪽 뺨을 가벼이 감싼다.

입술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그리고 미련 없이 떨어져 나갔다. 남자를 올려다보는 눈이 더욱 크게 뜨였다. 눈이 바쁘게 깜빡거린다. 떠듬떠듬 어깨를 쥐고 슬쩍 미는 손은 당혹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방금, 뭐지?

“제, 제가 방금 한 말은, 이런 뜻이…….”

입술이 닿은 것 같다. 서원은 그를 깨달은 순간 황급히 입을 열었다. 혹시 그가 방금 전 제 말의 요지를 잘못 이해했나 싶어서였다. 저는 그를 좋아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와 어떤 관계든 시작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를 알리기 위해 재차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알아. 네가 무슨 말 한 건지.”

남자는 엷게 웃으며 서원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리고 예의 장난기가 다분한 얼굴로 웃었다. 그게 너무나도 태연해 보여서, 서원은 도리어 말을 잃고 말았다.

남자의 말이 이어졌다.

“근데, 서원아.”

“……네?”

“무서워서든, 뭐든, 결과적으로 나를 밀어내고 싶었던 거면…….”

“…….”

낮은 목소리가 말꼬리를 느긋하게 끈다. 남자는 천천히 손을 들어 엄지로 서원의 눈 밑을 쓸었다. 약간의 정적. 보송한 살갗이 마찰하는 소리와, 자그마한 숨소리만이 둘의 좁다란 틈을 메운다.

눈가를 매만지는 살결이 뜨거워서, 서원은 어떠한 말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그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꼴깍. 침을 넘기고 눈을 깜빡인 찰나, 남자가 작게 입을 열었다.

“이런 눈으로 쳐다보지를 말아야지.”

애 닳아 죽겠다는 눈을 하고 있으면서.

서원이 그 말을 이해하기도 전이었다. 책망하듯 속삭인 입술이 살짝 벌어진 서원의 입술 위로 다시금 내려앉았다. 이번엔 가벼운 입맞춤이 아니었다.

“아, 흡…….”

숨이 막힐 만큼 저돌적이고 열렬한 키스였다.

베개에 뒤통수가 무겁게 눌린다. 놀란 서원이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남자의 어깨를 꾹 쥐었다. 남자는 깊숙이 상체를 기울이면서 서원의 입 안 점막과 혀를 쉴 새 없이 감쌌다. 남자의 움직임에 맞춰 베개가 파도처럼 연신 부드럽게 요동쳤다.

숨을 쉴 수 있도록 몇 번씩 틈을 주고 있는데도 아이는 전혀 숨을 쉬지 못했다. 그 서투른 모습이 귀여웠다. 연우는 달콤한 감각에 정신이 녹아 나가는 동안에도 웃었다.

큼지막한 손이 이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한꺼번에 허리를 감싸 쥐고는 느리게 살결을 쓰다듬는다.

“아…….”

맨살을 조금 만졌을 뿐인데 도톰한 입술 사이로 약한 신음이 흘렀다. 연우는 입술을 살짝 떼어내고 서원의 얼굴을 살폈다. 서원은 조금 젖어있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게 예뻐서 그는 쪽, 소리 내어 눈가에 키스했다. 어깨를 쥐고 있던 손은 어느새 제 목을 꼭 안고 있었다.

“형이 먼저, 끝내고 싶어 하면요…….”

강서원은 헐떡거리면서도 그리 물었다. 결과적으로 제 두려움에 대한 대답은 하나도 없는 것이 영 불안한 듯했다. 대답이야 언제든 해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제 충동이 더 중요했다. 그래서 연우는 대답 대신, 달콤한 입술을 다시금 입 안에 잔뜩 머금었다.

추웁. 춥. 입술이 맞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연이어 났다. 뜨거워진 손이 우악스럽게 서원의 허리를 쥐어 제게로 바싹 끌어당겼다. 살결을 감싸는 손바닥의 감각이 선연했다. 밀려드는 온갖 감각 안에서, 서원은 오랫동안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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