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Below the surface (2/8)

2. Below the surface

답답한 애.

서원은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쭉 달고 다녔던 꼬리표였다. 나아가 그는 한 가지 더 알고 있었는데, 자신의 진지한 성격은 선천적이어서, 어떻게 하든 바꿀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문제는 제 성격이 어린 시절에는 그저 ‘재미없는 놈’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서원은 요령 같은 것은 피울 줄 몰랐고, 더해서 수위 높은 장난이나 농담들을 가벼이 주고받을 성격도 되지 못했다.

그 때문인지 슬슬 심술이 많아지는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부터는 저를 유독 우습게 보는 녀석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게 화가 나지는 않았다. 다만 좀 씁쓸했다. 말수가 적고 진지하다고 외로움을 타지 않는 건 아니었으니까.

저를 우습게 보는 녀석들의 말을 빌려, 이른바 ‘찐따’ 생활은 중학교를 입학하고 나서도 계속되었다. 그때의 서원은 방과 후에 꼭 동생들을 돌봐 주곤 했는데, 동네 놀이터에서 서원이 제 동생들과 노는 광경을 목격한 또래들은 비로소 그를 경멸하기 시작했다. 초딩들과 ‘진심으로 재미있게’ 노는 중학생. 얼마나 유치하고 허접한지. 중학생의 수치였다. 친동생들이라 한들 용서가 되지 않았다. 그 시기에 동생 따위는 모르는 척해야 마땅했다.

그러던 중 2학년이 되었다. 서원의 반에 전학생이 왔다. 이름은 최유헌이었고, 키가 조금 작았으나 얼굴은 반질반질했다. 놈은 반 애들에게 미술학원에서 그렸던 애니메이션 모작을 꺼내 보였고 전학 온 지 하루 만에 반 애들과 친해졌다.

「너 넥타이 삐뚤어졌다.」

놈이 이사 떡을 돌리듯 하루 종일 틈틈이 한 명 한 명에게 돌아가며 말을 붙이는 것을 곁눈질로 보면서도 서원은 저에게까지 그 차례가 올 줄은 몰랐다. 반 애들은 제게 무슨 바이러스가 있는 것처럼 저를 피했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라 생각한 까닭이었다.

「……어, 어. 고마워.」

느닷없는 관심에 당황한 서원은 더듬거리며 가까스로 대답했다. 그리고 넥타이를 고치는 동안, 습관적으로 자신을 자책했다. 별것도 아닌 말에 잔뜩 어색해하는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니, 이렇게 해야지.」

비웃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유헌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다가와서 서원의 넥타이를 바로 매 주며 아주 친절하게 웃어 주기만 할 뿐이었다. 서원은 당황한 얼굴로 눈을 끔뻑거리며 유헌을 바라보았다.

그 이후로 유헌은 서원에게 이따금씩 관심을 보였다. 적극적으로 저와 같이 다니기를 권한 적은 없지만 가끔씩 말을 걸어 주거나 서원을 무시하는 반 아이들에게 ‘야, 서원이 것도 챙겨 줘.’ 하며 그의 존재를 친구들에게 상기시켜 주기도 했다. 그때는 조금 민망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그는 친절했다. 무엇보다 말이 느린 서원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기다려주기도 했다.

어쩌면, 그래, 시간이 조금 더 지난다면 친한 친구가 될지도 몰라. 서원은 그런 기대를 갖기 시작했다. 사탕이나 오락기만 있으면 저와 어울려 주는 어린 친구들이 아닌, 나이가 같은 친구는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어서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래서, 어쩌면 이게 ‘친구가 되는 과정’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그것을 깨닫게 된 건 여름이 되기 직전의 날이었다.

제가 아직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교실 안에서, 유헌은 대걸레 자루를 겨드랑이에 낀 채로 자신의 흉내를 내고 있었다. 바보 흉내를 내는 희극인처럼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말을 과장되게 더듬으면서 제가 했던 말들을 똑같이 말했다. 한두 번이 아닌 일이었는지 그의 주변을 둘러싼 친구들은 그 모습을 보며 ‘이 새끼 또 그런다’는 둥, ‘존나 웃기다’는 둥 제 이름과 욕설을 섞어가며 낄낄댔다.

자신은 누군가와 친구가 되어 가는 과정을 지나던 게 아니었다. 자신은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해도 괜찮을 정도의, 그러니까 ‘찐따’ 이상의 존재가 되어 가는 과정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제 모습이 들키지 않게 무작정 도망치면서 서원은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크게 상처받았다. 울지는 않았지만 손이 벌벌 떨리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때의 상처가 아물기 시작한 건 중학교 3학년, 경찬을 만나게 된 이후부터였다. 겪어 보니 친구가 되는 과정은 제 생각보다 그리 거창하고 대단한 게 아니었다. 아주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것이었다.

‘원래 세상에는 비겁하게 사는 게 제대로 사는 건 줄 아는 바보들이 더 많아. 남들이 바보 같다고 무시하면, 그게 제대로 사는 거야.’

몸 안에 노인이 들었다며 선생님들조차 고개를 가로저을 정도로 제 주장이 확고한 경찬은 공부를 아주 잘했으며 저와 달리 매사에 당당했다. 생전 처음으로 친구와 PC방에 가서 라면을 먹었던 날이었다. 서원은 경찬에게 제 이야기를 했고 경찬은 애늙은이답게 대답했다. 위로가 목적인 건 아니었을 텐데도, 서원은 그 말에 큰 위로를 받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서원은 더 이상 제 성격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자신이 지루한 사람처럼 보일까 봐 걱정하지도 않았다. 그들과 자신은 다른 것뿐이지, 이상한 게 아니니까. 그냥 바르게 살고 있는 것뿐이니까.

‘내가 잘할 테니까, 오래 해달라고요, 과외. 그 말 하고 싶었어요. 처음 봤을 때도 한 말이긴 한데, 이번엔 조금 더 진심입니다.’

그래서 서원은, 어젯밤 남자가 제게 했던 그 말이 아직도 의문스러웠다.

남자가 저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의식적으로 그에 대해 평가한 건 아니었지만, 본능적으로, 또 무의식중으로 그는 저와 정반대의 사람이라고 서원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도 저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남자의 눈치를 본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 같은 유형은, 당연히 자신을 싫어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

근데 그게 다, 내 착각이었다면.

「……서원, 강서원! 내 말 듣고 있냐?」

그때였다. 귀에 대고 있던 핸드폰 너머로 선명한 목소리가 파도처럼 의식 위를 덮쳐 왔다. 생각에 잠겨 있던 서원이 번뜩 눈을 크게 떴다. “아…… 응. 듣고 있어.” 뒤늦게 대답하자 경찬은 수상하다는 듯 쓰읍, 숨을 들이마셨다.

「뭐야. 뭔 일 있냐, 요즘?」

“뭔 일은. 없어.”

거짓말은 아니었다. 구태여 말하자면 자신이 혼자 들뜬 것뿐이지 별다를 건 없었다. 서원이 단호하게 대답하자 경찬은 이번엔 흐음, 하고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뭐, 일단은 알았어. 야, 나 다다음 주 월요일에 휴가다.」

“서울 올라올 거야?”

「그래야지. 3박 4일이야.」

“알았어.”

서원은 캘린더 어플을 켜서 경찬의 휴가 날을 체크해 두었다.

통화를 마친 뒤 서원은 여전히 뜨끈뜨끈한 이마를 매만졌다. 이어폰을 빼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본다. 몸은 아픈데도 기분은 어쩐지 나쁘지 않았다.

* * *

감기는 금방 나았다. 서원은 가벼워진 몸으로 가게를 가고 있었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이번 주 일요일에 아빠를 만날 거니까 시간 비워 놓으라는 재원이의 문자뿐이었다. 서원은 대충 답장을 보내며 가게 앞에 섰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사장은 카운터 앞에 앉아 있었다. 서원은 그에게 인사하면서 스태프 룸을 향해 걸어갔다. 핸드폰 게임을 하던 사장이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 “어, 서원이 왔냐.” 했다. 그리고 저를 지나쳐 스태프 룸으로 향하는 그의 그림자를 발견하고선 “어어…….” 하며 뒤늦게 게임을 정지했다. 그때 서원은 이미 스태프 룸의 문고리를 잡고 있었다.

“서원아, 잠깐만. 안에,”

사장이 엉거주춤 일어나 서원에게 손을 뻗었다. 서원은 대뜸 저를 부르는 사장을 의아한 눈으로 돌아보면서 벌컥 문을 열었다.

“안에 새로 알바 하는 친구가…….”

그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서원이 반사적으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1평 남짓한 스태프 룸 안에는 누군가가 피케 셔츠 형식의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아, 아. 죄송합니다.”

서원은 당황한 얼굴로 시선을 비끼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재빨리 문을 닫으려는 순간이었다. 누군가는 유니폼 밑단을 마저 내리면서 닫히는 문을 잡았다.

“다 입었어요.”

“아, 네.”

남자끼리 민망할 상황은 아니지만 첫 대면이 이런 식인 것은 서원으로서는 당황스러웠다. 서원은 조금 경직된 얼굴로 제 앞에 서 있는 알바생을 바라보았다. 죄송하다고, 거듭 제대로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어?”

“…….”

하지만 서원은 말을 하지 못했다. 그저 굳은 얼굴 그대로 알바생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상대방도 서원의 얼굴을 보고 잠시 당황하더니 이내 왈칵 웃음을 터뜨렸다. 옛날처럼, 아주 친절한 웃음이었다.

“뭐야. 야, 너 강서원 아니야?”

“어? 둘이 아는 사이야?”

사장이 놀란 얼굴로 알바생과 서원을 번갈아 짚으며 물었다. 알바생은 말했다.

“아는 사이 맞아요. 와, 신기하네.”

“…….”

“중학교 동창이에요. 그치? 강서원, 나 기억나?”

알바생은 동의를 구하듯, 서원을 툭 치며 흘끗 바라보았다. 서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시선을 알바생에게로 옮겼다. 담담한 시선을 일관하며 대답한다. 전혀 당황하지 않는 목소리로. 아주 잠잠하고, 무미건조하게.

“……기억나지. 오랜만이다, 유헌아.”

* * *

불행인지 다행인지 점심시간부터 가게는 숨 돌릴 틈 없이 바빴다. 서원은 ‘저 테이블은 지금 치워야 한다.’, ‘물통은 수시로 채워야 한다.’는 둥, 유헌에게 일에 필요한 말들만 했고, 유헌은 잠자코 따랐다. 그러나 테이블을 닦거나 물통에 물을 받을 때의 표정은 사뭇 굳어 있었다.

오래 일을 한 사람이 초보자에게 일을 가르치거나 조언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르바이트를 처음 하는 것도 아니니 저도 그걸 모르지는 않았다. 다만 그 일을 ‘그’ 강서원에게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묘하게 짜증 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화요일은 바쁜 날이었다. 8시쯤 선술집 아르바이트 일을 끝내면 바로 과외를 하러 가야 했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자 서원은 스태프 룸에 들어갔다. 카운터 의자에 앉아 멀거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유헌이 사장을 돌아보았다.

“서원이 어디 가요?”

“아, 퇴근.”

“풀타임 아니었어요?”

“쟤가 알바를 좀 이것저것 해서 시간이 뒤죽박죽이야.”

“그렇구나.”

스태프 룸이 열렸다. 옷을 갈아입고, 백팩을 메고 나온 서원이 사장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유헌에게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유헌이 앞치마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일어섰다.

“사장님, 저 오늘 담배 한 번도 안 피웠는데 좀 피우고 와도 돼요?”

“10분 안에 와라.”

사장은 8시에 출근하는 아르바이트 직원이 가게에 들어서는 걸 보면서 대충 손을 저었다. 유헌이 서원의 어깨를 툭 치며 “나가자.” 했다. 서원은 잠자코 가게 문을 나섰다. 유헌이 담뱃갑을 꺼내면서 서원의 뒤를 따랐다.

“담배 피우냐?”

“어.”

“같이 피울래?”

“아니. 나 갈게. 내일 보자.”

반갑기라도 한 건지, 은근히 살가운 태도였다. 하지만 서원은 유헌의 살가움을 눈치채지 못한 척 그렇게 말했다. 담담한 목소리였다. 서원이 가게 앞에 서 있는 유헌을 뒤로하고 버스 정류장으로 몸을 돌렸다. 유헌이 손을 뻗어 서원의 팔을 잡았다.

“너도 한서대 다니는 거야?”

서원은 고개를 돌려 유헌을 보았다. 유헌이 손을 떼어내며 “여기 우리 동네랑 멀잖아. 자취하나 해서.” 했다.

“응. 한서대 다녀. 자취는 안 하고……. 그냥 사장님도 잘해 주시고 시간도 유동적으로 바꿀 수 있어서 여기서 일하는 거야.”

유헌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가 그렇게 공부를 잘했나? 무슨 과야?”

“영문과. ……고등학교 때는 열심히 했어.”

“오. 난 이번에 편입했어. 시각디자인과.”

딱히 답할 말이 없어서 서원은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유헌은 그 잠잠한 반응이 당황스러워서 서원을 바라보았다.

“…….”

비로소 그는 인정하기 시작했다. 강서원은 조금 바뀌어 있었다. 머리 스타일도 예전과는 다르게 단정하니 세련됐고, 옷 스타일은 심심하지만 찌질하지는 않았다. 더 이상 무시 받는 게 당연한 사람처럼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지도 않았고, 저에게 깔끔하게 명령도 할 줄 알았고, ……심지어 한서대를 다닌다. 제가 편입 전 다녔던 그 대학교의 질 낮고 촌스러운 동기들보다는 훨씬 나았다.

유헌이 한 발자국 서원에게로 다가섰다.

“여기 주변에 청춘주점 있잖아. 거기 가봤어? 유명하잖아. 원진여대 애들도 많이 온다며.”

서원은 청춘주점이 뭔지도 몰랐고, 유헌이 왜 제게 이런 말을 꺼내는지도 알 수가 없었으나 어리둥절한 표정은 보이기 싫어서 그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퍽 자연스럽게 보였는지 유헌은 한층 높아진 톤으로 말을 이었다.

“내일 퇴근하고 같이 갈래? 아 나 진짜 가고 싶은데 과 애들은 아직 안 친해서…….”

그때였다. 유헌의 말허리를 끊어버리듯 클랙슨 소리가 짧고 강하게 울렸다. 서원이 고개를 돌렸다. 서원을 바라보고 있던 유헌도 시선을 옮겨 도보 옆에 정차해 있는 차를 보았다. 반쯤 열려 있던 차창이 완전히 열렸다.

“어, 안녕하세요.”

서원이 놀란 목소리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는 동안, 운전석에 앉아 있는 남자는 유헌을 한 번 흘긋 보고는 다시 눈을 돌렸다.

“지금 우리 집 가는 거죠?”

“아, 네.”

“타요.”

짧은 말에 침착하던 기색은 별안간 증발했다. 서원은 “아…….” 하고 어중간한 표정으로 허둥지둥 몸을 돌렸다가 발을 떼어내다가 마침내 고개를 돌려 유헌에게 말했다.

“갈게. 내일 보자.”

그 사이에 차창은 닫혀 있었다. 서원이 빠르게 차에 올라탔다. 쾅. 문이 닫히자마자 잘 빠진 검은 세단이 유헌을 스치고 지나갔다.

* * *

차는 서원이 생각하는 목적지와는 다른 곳으로 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지름길로 가는 중이라 여겼던 서원은 점점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짐짓 긴장하며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평온한 표정으로 운전하고 있었다.

“저기…….”

서원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을 때였다.

“누구예요?”

“지금, 댁으로 향하는 길이 맞나요?”

남자가 말했고, 동시에 서원도 말을 이었다. 남자의 물음에 반응하여 정확히 누굴 가리키는지 물어봐야 하나, 아니면 제 물음에 대한 남자의 대답을 기다려야 하나 서원은 고민했다. 그사이 남자가 핸들을 꺾으며 재차 입을 열었다.

“친구?”

‘최유헌을 물어보는 건가.’ 서원은 생각했다. 왜요? 하고 되묻고 싶은 것을 억누르고 그가 잠잠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요. 그냥 같이 일하는 사이입니다. 친구는 아니에요.”

그를 듣고 나서야 남자는 제게 떨어진 물음에 대해 대답했다.

“준호 지금 집에 없어요.”

“지금요?”

느닷없는 이야기에 서원은 제 핸드폰을 확인했다. 준호에게 따로 문자가 온 것은 없었다. 요즘의 준호는 수업을 빠질 일이 생겼다면 제게 문자를 보냈을 것이었다. ‘무슨 일이지.’ 서원은 생각했다. 남자가 부연했다.

“잡으러 가야 돼요.”

“……혼내셨나요?”

기어이 가출이라도 했나 싶었다. 서원이 머뭇거리며 묻자 남자는 대답 대신 웃음을 터뜨렸다.

“요즘 준호, 이상한 점 없었어요?”

“달라진 점이라면…….”

서원은 눈을 한 바퀴 굴리며 요즘의 준호를 떠올렸다. 과외가 아주 편하게 느껴질 정도로 준호는 얌전했다. 과외 시간도 잘 지켰고 심지어는 대답도 잘했다. 숙제는 안 하는 건 변함없었으나 그렇다고 예전처럼 서원을 얕잡아 보지는 않았다. 고분고분하다 못해…….

“많이 순해졌습니다. 근데 그건 형님께서…….”

연우는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서원의 말을 끊었다.

“내가 겁준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순해지지는 않아요. 학습 능력 떨어지는 애인 거 아시잖아요.”

서원은 그 말에 공감했으나 아무리 그래도 가족 앞에서 적극적으로 긍정할 수는 없었다. 대신 그는 고갯짓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가 신호등 앞에서 멈추었다. 연우는 고개를 돌려 서원을 가만히 훑어보았다. 좀 걱정이 되었다. 얌전한 얼굴에 빳빳한 자세, 고상한 표정. 강서원은 지금 가고 있는 곳을 낯설어할 것 같았다. 굳이 따지자면, 제가 운영하고 있는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는 아주 따분하고 추상적인 그림들을 좋아할 것만 같은 분위기다.

‘……그래도 어디를 가고 있는지 미리 말해 주는 게 더 낫겠지.’ 마침내 연우는 생각했다. 느리게 입을 연다.

“PC방 가본 적 있어요?”

그곳을 갈 것이라고 귀띔을 해주는 거였지, 정말 물어본 건 아니었다. 시끄럽고 욕설이 난무하는 PC방 가운데에서 키보드를 연타하며 모니터에 열중하는 강서원은 좀처럼 상상이 잘 가지 않았으니까.

신호가 바뀌었다. 다시 차가 움직였다. 서원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태연한 자세로 대답했다.

“시간 날 때마다 갑니다.”

* * *

시간 날 때마다 간다는 말은 거짓말이나 과장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강서원은 물 만난 고기처럼 미친 듯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모니터에 꽂힌 눈이 광적인 집중력을 보이고 있었다. 좀처럼 상상이 잘 가지 않는다고 여겼던 그 광경이 쉽게 현실이 되어 눈앞에 보이는 셈이었다.

“왼쪽, 왼쪽에 누가 기방타고 있어요. 조심. 화장실 문 옆이요. 제가 그냥 죽일게요. 칼로 돼요.”

“…….”

“됐다. 죽였어요.”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건 처음 보기도 했고,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것도 신기했다. 작고 잠잠한 목소리는 똑같았으나 그는 어딘가 흥분하고 있었다. 그게 귀엽게 느껴져서 연우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받친 채로 얼굴을 비틀어 서원을 구경하다가, 그의 모니터를 구경하기를 반복했다. 문외한인 탓인지, 모르긴 몰라도 녀석이 프로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뚝배기가 뭐예요? 요리 게임도 아닌데 그런 말이 왜 나오지?”

공연히 끼어들고 싶어서 궁금하지도 않은 걸 물었다. ‘뚝배기’는 조금 전 누군가 서원에게 했던 말 중 주워들은 단어였다. 서원은 모니터에 집중하던 눈을 굴려 연우를 보았다. 이렇게 빤히 저를 보고 있을 줄은 몰랐는지 동그란 눈이 살짝 커졌다.

“아, 그러니까 헬멧인데 뚝배기라고 하는 건데요. ……아…….”

서원은 말하다가 다시 마우스를 쥐고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그 사이에 캐릭터가 죽어 있었다. “어, 사람이 안 보였는데.” 연우는 놀랍다는 듯 말했다.

“이게, 다른 사람이 절 죽인 게 아니고, 그러니까 자기장이라는 게 있는데…….”

서원은 조곤조곤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얼굴을 괸 채로 저를 바라보는 남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러나 듣고 있는 눈치는 아니었다. 문득 서원은 제 본분을 깨닫고서는 흠칫 말을 멈추었다. 머리를 긁적인다.

“……죄송합니다. 지금 게임 하고 있을 때가 아닌데…….”

“아니에요. 아직 준호도 안 왔는데요, 뭘.”

서원의 짐작과는 달리 연우는 괘념치 않는다는 듯 가벼운 목소리로 말하면서 제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준호의 위치를 확인했다. 놈은 이 건물로 오고 있는 게 맞고, 10분 뒤면 도착할 것 같았다. 곧이어 그는 다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말했다.

“의외긴 하네요. 서원 씨 생김새로 보면, 뭔가… 전시회나 시집 같은 게 오락거리일 것 같이 생겼는데.”

제게 붙은 전시회와 시집이라는 단어가 낯선지 서원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전시회는…….” 했다. 어떻게든 가보았던 전시회를 떠올리려고 하는 눈치였다. 잠시 후, 그는 살짝 허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가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연우는 소리 내어 웃었다.

“제가 너무 편협한 생각을 한 것 같네요. 미안해요.”

“아닙니다. 아, 컴퓨터를 좋아하는 건 어렸을 때 둘째랑 컴퓨터 하나 가지고 싸운 적이 있어서요. 치열하게 자리다툼하고 그랬거든요. 게임 중독이나 그런 건 아닙니다.”

놀란 듯 두 손을 빠르게 내저으며 토끼 눈을 뜨고 말하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연우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나도 게임 가르쳐 줄래요? 좀 쉬운 걸로. 서원 씨가 지금 하고 있는 건 너무 어려워 보여서요.”

게임을 가르쳐 달라니. 서원은 그의 말이 이해 가지 않는 듯한 얼굴을 하다가, 뒤늦게 “아, 네.” 했다. 딸깍. 마우스 커서 소리와 함께 게임이 꺼졌다.

* * *

“……저 사람 지금 나한테 욕하는 거죠?”

서원은 지금 남자와 같이 하고 있는 이 게임이 최상의 선택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타격감이 좋았고, 색감도 화려했으며 캐릭터도 귀여워서 초보자들이 좋아할 만한 게임이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남자는 영 게임이 적성에 맞지 않는 듯 보였다. 게임의 한 가지 단점이라면 연령층이 낮다는 것이었는데, 그 탓인지 그에게 욕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왜 우리 부모님 안부를 묻는 거예요? 기분 나쁜데. …목소리 초등학생 맞죠? 난 어떻게 말할 수 있어요? 아아. 거기 들려요?”

남자가 툴툴대며 서원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그동안 남자의 캐릭터는 또 한 번 죽음을 맞이했다. 서원은 핑핑 돌아가는 정신을 바로잡으면서 엉망진창으로 치닫는 게임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이 게임을 승리로 이끌면 유독 남자에게 욕하는 같은 팀 남자 초등학생이 입을 다물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냥 헤드셋 벗으시고…….”

“어, 잠깐만요.”

돌연 키보드 옆에 놓여 있던 핸드폰의 액정이 켜졌다. 알림이 온 것이었다. 남자는 다시 키보드에 얹으려던 손을 거두었다. 헤드셋을 빼고 핸드폰을 든다. 일단 남자가 헤드셋을 뺐다는 사실에 서원은 마음 깊이 안도했다. 캐릭터가 멈춰 서자 남자 초등학생이 더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서원 씨, 저 잠시 통화 좀 하고 올게요.”

의자에 기대어 핸드폰을 확인하던 남자가 이내 서원의 귀에 가까이 말하면서 일어섰다. 느긋한 목소리였다. 게임을 승리로 이끌어 가기에 여념이 없는 서원은 “아, 네. 다녀오세요.” 하면서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아 씨바, 진짜 내 캐리로 이겼다. 형님들 인정? 빨리 나한테 추천 박아요.」

그로부터 15분이 더 지났다. 끝내 서원의 팀이 승리를 거머쥐자 마이크에 대고 쉴 새 없이 떠들던 남자 초등학생이 뿌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원은 추천 대신 녀석의 아이디를 신고했다. 초등학생 이용가의 게임이 아니었으니까 제 신고는 합당했다.

“……하아.”

오랜만에 열중한 탓인지 맥이 쑥 빠졌다. 잠시 의자에 푹 기대에 앉아서 숨을 고르던 서원이 돌연 번뜩 상체를 바로 세웠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라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잔여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서원은 제 가방을 챙긴 뒤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PC방 내부를 둘러보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남자는 없었고, 준호도 없었다. PC방을 나와 건물 층을 전부 둘러보아도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서원은 의아한 얼굴로 핸드폰을 확인해 보았다. 따로 어딜 간다는 문자는 없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확인할 셈으로 비상계단 문을 열었다. 무거운 철문이 덜커덩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엇.”

남자가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뜻밖에도 그가 있었다. 그는 핸드폰을 귀에 대지 않고 천장을 향해 든 채로 벽에 기대어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남자가 시선을 옮겨 서원을 보았다. 서원이 문을 닫았다.

“여기서…….”

뭐 하시냐고 물어보려던 서원은 일순 입을 꾹 다물었다. 남자가 서원의 팔을 쥐어 벽 쪽으로 끌어당기면서 검지를 입술 가운데에 댄 탓이었다.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였다. 서원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남자가 기대고 있었던 벽에 그대로 등을 딱 붙였다.

남자는 손가락을 내리면서 흘끗 위쪽을 바라보았다. 서원의 바로 앞에 팽팽해진 셔츠가 보였다. 남자의 어깨였다. 개방형의 계단은 조금만 살펴도 위나 아래에 누가 서 있는지 볼 수 있었다. 남자는 제가 계단에 있다는 것을 누군가로부터 숨기고 있는 듯했다.

“뭐야?”

“뭐긴 뭐야.”

별안간 남자의 목소리도, 제 목소리도 아닌 두 개의 목소리가 위에서 들려왔다. 첫 번째로 들린 목소리는 낯선 여자애의 목소리였고, 두 번째로 들린 목소리는 익숙했다. ‘시준호다.’ 서원은 그 사실을 깨닫고 본능적으로 숨을 죽였다. 왜인지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남자는 잘했다는 듯 서원을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제 핸드폰 액정을 서원에게 보여주었다. 음성 녹음 중이었다. 서원은 더욱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들어 봐요.

그는 자신의 귀 아래를 톡톡 건드리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들키지 않으려는 듯 바짝 다가오는 몸 탓에 향수 내음이 깊숙이 느껴졌다. 남자의 차에 타거나 아주 조금이라도 다가가게 되면 어김없이 코끝을 감돌던 그 향기였다. 무게감이 있으면서도 시원한, 남자의 이미지를 닮은 향기.

그 향기가 지나가는 찰나였다. 위에서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거듭 들려왔다.

“무슨 소리 들렸잖아. 밑에 네 친구들 있는 거 아니야?”

“하, 무슨 내 친구들이야. 괜히 말 돌리지 마, 이혜연.”

준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더 낮았다. 멋있는 목소리를 내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장난스러운 빛이 더 짙어진 남자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면서 서원은 지금 상황을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어찌나 즐거워하는지, 남자는 꼭 동생 놀려 먹는 재미로 사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뭘 말을 돌려. 야, 구질구질하게 좀 굴지 마.”

“뭐? 내가 구질구질해?”

“어. 구질구질해.”

“……하, 시발. 그래. 구질구질한 놈 되자. 상관없어. 그러니까 SNS 켜 보라고. 난 다 보여줬잖아.”

저들 나름대로는 아주 진지한 대화였다. ‘준호가 요즘 밝아 보였던 이유가 여자친구 때문이었구나.’ 서원은 생각했다. 어쩐지 웃음이 새어 나올 것만 같아서 황급히 남자를 바라보며 입을 가렸다. 남자는 벽에 손을 짚으면서 키득거렸다. 그리고 재밌지 않느냐고 동의를 얻는 것처럼 슬쩍 얼굴을 숙여 왔다.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우는 순간이었다. 돌연 서원은 이상한 느낌에 휩싸였다. 산들바람이 얼굴을 시원하게 스치는 순간처럼 아주 산뜻하고 들뜨는 기분이었다. 경직되었던 근육들이 사르르, 풀리는 기분. 그냥, 아무 걱정 없이 온전히 감정을 누릴 수 있는 순간.

즐거웠다. 마침내 서원은 입을 가리던 손을 내리면서 살짝 고개를 숙였다. 풍성한 속눈썹이 아래로 내리깔렸다. 봄의 기운을 가득 담은 웃음이, 그의 얼굴 위로 미열처럼 은은하게 감돌았다.

“미쳤어? 네가 무슨 내 아빠야? 내가 왜 너한테 DM을 보여줘야 되는데.”

“야, 이혜연. 지금 전교에 소문 쫙 났어. 너랑 권영호 그 새끼랑 나 몰래 썸 탄다고.”

“아, 좀 그만해!”

사랑싸움은 치열하리만치 계속되었다. 서원은 뭔가가 터진 사람처럼 기어이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웃음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그때였다.

“……!”

턱밑으로 서늘한 촉감이 느껴졌다. 놀란 어깨가 부들 떨렸다. 그대로 턱을 들어 올리는 가벼운 힘이 느껴졌다. 고개가 들렸다. 서원은 눈을 크게 뜨고 가까운 곳에 자리한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제 얼굴을 들어 올린 건 남자였다.

“…….”

“…….”

좁다란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연우가 얼굴을 쥐고 올린 보람이 없게도, 서원은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아니, 웃는 얼굴로 굳었다는 표현이 더 맞았다. 그는 그대로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잠시 상황을 파악한다. 남자가 제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제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 정갈한 이목구비 속에서 또 느닷없는 다정함을 발견한 순간, 서원은 무언가가 쿵, 배 아래까지 떨어지는 감각을 느꼈다.

심장이었다. 그러니까, 심장이 ‘쿵’하고 뛰었다.

…내가?

왜?

그런 이유였다. 남자의 행동보다는 자신의 반응이 놀라워서, 당황스러워서, 서원은 그대로 더듬거리며 남자의 몸을 밀쳤다. 그리고 문을 열어 황급히 비상계단을 벗어났다. 남자가 저를 따라올 수 없게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뒤 닫힘 버튼을 연타했다.

은색 문이 닫히려던 순간 널따란 손이 그 틈 사이에 들어갔다. 툭. 손을 건드린 문이 다시 아귀를 벌렸다. 문이 열렸다.

“서원 씨.”

“…….”

남자는 곧바로 저를 따라왔는지 이제야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천천히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선다. 남자의 등 뒤로 문이 닫혔다. 그는 서원에게로 다가가면서 말을 이었다. 그 역시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다.

“미안해요. 놀랐어요? 내가 동생들 때문에 스킨십이 손에 배서…. 불쾌했으면 미안해요.”

이번에는 더, 더, 다정한 목소리였다. 제 얼굴을 살피는 눈빛이 느껴졌다. 급기야 서원의 인상이 미약하게 구겨졌다. 서원은 엘리베이터 모서리에 등을 딱 붙인 채로 남자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심장을 달래듯 숨을 의식적으로 쉬었다.

“……아닙니다.”

“…….”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제가, 과민하게 행동한 것 같습니다.”

어쨌든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이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마침내 도톰한 입술 사이로 자그마한 목소리가 흘렀다. 동시에 저를 보는 까만 눈이 조금 다른 빛을 띤 것 같았지만, 자세히 보지는 못했다. 서원은 다시 눈을 돌려 남자의 어깨 너머의 허공을 바라보며, 또 금속 벽에 운동화 뒤축을 공연히 문질거리며 말을 이었다.

“저, 오늘은 먼저 가도 될까요? 시간도 많이 지났으니……. 나중에 시간 맞춰서 보강하겠습니다.”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은 느껴졌으나 마주 보고 있지를 않으니 그 시선의 온도는 알 수가 없었다. 급기야 서원이 의아함을 느끼고 남자의 온도를 확인하려고 하는 그 찰나였다. 진득하리만치 길었던 시선이 거두어졌다. 남자가 한 발자국 물러서면서 말했다.

“……그래요.”

“…….”

“조심히 가요, 그럼.”

그게 끝이었다. 여전히 친절한, 그러나 조금 전보다는 약간 거리가 느껴지는 어투로 남자는 말했다. 그리고 등을 돌렸다.

공간을 나서는 걸음 소리 끝에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그리고 그제야, 벽에 붙어 있던 등이 주르륵 아래로 흘러내렸다.

* * *

연우는 눈을 떴다. 사무실 천장이었다. 그는 그대로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2시 52분. 알람 8분 전에 일어난 셈이었다. 보통 이러는 법이 거의 없었다. ‘언제 그랬더라.’ 공연히 경험을 세어 보다 그만둔다. 쓸데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천천히 일어선 그는 허전할 정도로 널찍한 대표실 안을 빙빙 돌았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2시 40분부터 3시까지 낮잠을 잔 뒤에 책상에 앉아 밀린 서적을 보는 것이었는데 계획이 틀어졌다. 도저히 유유자적하게 공부나 하고 있을 기분이 못 되었다.

“…….”

신경이 쓰였다. 연우는 다시 푹신한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팔짱을 끼고, 목을 젖혀 천장을 바라본다. 얼굴은 살짝 구겨져 있었다. 그는 어제를 기억했다.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제가, 과민하게 행동한 것 같습니다.’

비상계단 안. 저를 뿌리치고 가던 녀석을 쫓아가자 녀석은 그렇게 말했었다. 필사적으로 눈을 피하는 모습은 누가 봐도 태연해 보이지가 않았다. 비단 당황해서 그런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조금….

‘저, 오늘은 먼저 가도 될까요?’

기분이 나빠 보였다.

“…….”

그게 그렇게까지 큰 실수인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가 녀석에게 갖고 있는 것만큼 녀석이 제게 흥미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쯤은 알았다. 그 사실이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저도 그저, 녀석이 귀여워서 조금은 친근하게 대해 주고자 한 것뿐이니까. 그렇지만 이건 경우가 달랐다.

녀석은 제게 흥미를 갖고 있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저를, 싫어하는 것 같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기어이 연우의 눈썹이 조금 더 강하게 구겨졌다. ‘괜히 짜증 나네.’ 생각할 때였다.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이 진동했다. 연우는 천장을 바라보던 얼굴을 바로 하고 액정을 확인했다. 발신인은 박진석이었다. 그는 작은 한숨과 함께 핸드폰을 들었다.

“어. 왜.”

「뭐 해. 심심한데 스크린 골프나 칠래?」

이 말을 할 줄 알았다. 연우는 곧바로 “싫어.” 했다. 박진석이 혀를 찼다.

「뭐만 하면 다 싫대, 나쁜 새끼. 지 필요할 때만 알랑거리고.」

이 말도 역시 할 줄 알았다. 연우는 지난주, 이자카야에 가기 위해 진석에게 연락했던 자신을 기억했다. 준호의 과외 선생을 본의 아니게 혼냈는데, 좀 달래 줘야 할 것 같다고. 간만에 마음에 드는 선생이라 그만두면 내가 곤란해진다고 주저리주저리 말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비굴하게 빌빌거리지는 않았다. 연우는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뭘 또 알랑거리기까지 했다고.”

「진짜 시연우는, 나라서 받아 주지. 그 선생도 참 불쌍하다. 너 같은 고용주 둬서.」

“야,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끊어.”

문득 지겨워져 연우는 그렇게 말하곤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정말 놀리려던 게 목적이었던 양 박진석은 약 20초 뒤에 [형이라고 부르랬다]라는 문자만 남겼을 뿐, 다시 전화를 걸어 오지는 않았다.

잠시 생각하는 얼굴을 하던 시연우는 이내 벌떡 일어서서 책상으로 갔다. 두꺼운 책과 태블릿 PC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그는 의자에 앉아 스탠드를 켰다. 삑. 켜진 스탠드 조명이 거슬리도록 밝았다.

* * *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손님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으나 무엇을 시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서원은 간이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꼈다 켜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어제 그에게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한 것만 같아 온종일 마음이 무거웠다. 그는 사과를 했고, 목요일에 보자는 말로 다음을 기약했지만 그 애매해진 분위기가 싫었다. 그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빠른 시일 내로 무슨 접촉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

“뭐 해?”

핸드폰 위로 그림자가 진다 싶더니 곧이어 끼익,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렸다. 서원이 고개를 들었다. 유헌이 의자를 끌어 제 옆에 앉고 있었다. 넉살 좋게 웃는 얼굴이 못내 흥미롭다는 듯 저를 보고 있었다.

“아, 그냥.”

서원은 핸드폰을 앞치마 주머니에 넣으면서 말했다. 그 모양을 빤히 보고 있던 유헌이 의자를 서원에게로 조금 더 가까이 끌었다. “야, 서원아.” 하며 운을 뗀다. 조금 긴장한 기색이었으나 서원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의 주의가 유헌에게 조금도 기울어지지 않고 있는 탓이었다. 그는 그저 머릿속으로 ‘연락할까. 하는 게 좋겠지. 뭐라고 해야 하는 걸까. 어제 죄송했다고?……. 아니, 정확히 죄송할 건 없는데. 그럼 뭐라고 해야 하지…….’ 하는 등의 고민만 줄줄이 늘어놓고 있었다.

“어제 내가 청춘주점 가자고 했잖아. 기억하지? 오늘 너도 11시에 끝나는 거 맞지?”

“…….”

그러려던 게 아니었다고. 내 턱을 만진 건 상관없었다고?……. 그렇게 말하면 꼭 만져서 좋았다는 것 같잖아. 아니, 싫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서원아, 나 궁금한 게 있는데,”

“…….”

얼굴이 너무 가까워서, 갑자기 심장이 뛰어서 그랬다고?……. 미쳤어. 머리가 다치지 않은 이상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불쾌해할 거야. ……아, 좀 생각해 봐. 강서원. 멍청아. 머리 좀 굴려 보라고.

“그, 혹시, 어제 너 데리러 왔던 형 있잖아.”

“…….”

돌연 생각의 줄기가 뚝 끊겼다.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서원이 서서히 고개를 돌려 유헌을 바라보았다. 유헌은 처음 보는 얼굴로 자신을 대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바라는 얼굴. 약간의 기대감이 서려 있는 눈. 유헌에게서는 처음 보았으나, 얼굴에 담긴 건 낯설지 않은 감정이다.

유헌은 답지 않게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랑 친해? 아는 형이야?”

“…….”

“어떻게 알게 됐…….”

“왜?”

서원은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작게 입만 벌려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유헌은 “어?” 하고 되묻다가 이내 그의 질문을 파악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왜 그러냐고? 아니 그냥. 나도 어지간히 돈 많은 형들 꽤 많이 알고 있긴 한데, 그렇게 돈 많아 보이는 형 처음이라서. 얼굴도 존나 잘생기셨던데, 친해지고 싶어. 페스티벌이나 EDM 그런 거 좋아하시면 테이블에 나도 낄 자리 하나 얻으면 안 되나? 여친 있으셔? 어제 같이 어디 갔어? 클럽 갔어?”

뒤에 이어지는 말들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중 딱 하나 제 귀에 박힌 게 있었다. 최유헌은 그 사람과 친해지고 싶다고 했다. 그 순간, 서원은 몹시 지저분한 감정을 느꼈다.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다스릴 수가 없었다. 돌연 욱, 하고 튀어나온 것이었기도 했고 서원으로서는 처음 겪어 보는 감정인 탓이었다.

“……그 형은 친해지기 어려워.”

서원은 짐짓 꼭 자신은 가까운 사이여서 모든 걸 안다는 투로, 단정 지어 말했다. 그리고 앞치마 주머니에 든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왜? 어떠신데? 넌 어떻게 알게 됐는데? 여친 있으시지? 존나 이쁠 것 같은데.”

“그냥, 어쩌다가 알게 됐어.”

공연히 과외 때문에 알게 되었다고 말하기가 싫어서 서원은 대충 둘러댔다. 유헌은 실실 웃는 낯 그대로 말을 이었다.

“오늘도 가게 오시냐? 나 소개 좀 해 주라. 나 진짜 형들한테 싹싹하게 잘해.”

“…….”

싫어. 내가 왜?

라고 말하고 싶은 걸 참아야 했다. 서원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짜증이 점점 크게 일었다.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그 이유가 정확히 최유헌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남자이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 야, 서원아.”

“어려울 것 같은데. ……성격이 많이 까다로우셔.”

서원이 고려하는 것처럼 보였는지 유헌이 그의 팔을 잡고 또 한 번 졸랐다. 유헌은 눈을 마주치려고 했으나, 그는 시선을 피하면서 겨우 변명거리를 꺼내어 중얼거렸다. 그렇게 절박한 건 아닌 모양인지 유헌은 쉽게 나가떨어졌다.

“그래? 좀 그래 보이긴 했어. 아쉽다. 오늘 청춘이나 같이 가자. 갈 거지?”

“아니, 난 별로…….”

돌연 손에 쥔 핸드폰이 요란스럽게 몸을 떨었다. 서원이 말하던 걸 멈추고 번뜩 액정을 내려다보았다. 커다란 액정에 걸맞게 커다란 글씨가 발신인을 알렸다. 「준호 형님」. 준호의 형님이라는 뜻이었으나 유헌은 다르게 해석한 모양인지 갑자기 법석을 떨었다.

“준호 형님? 어제 그 형님이야?”

“…….”

자리를 피해서 받고 싶었으나 관심이 제 핸드폰에 잔뜩 쏠려 있는 유헌 탓에 그럴 수가 없었다. 부자연스러울 게 분명했다. 서원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가만히 액정을 바라보다가 이내 천천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디에요?」

서원의 말이 끝나자마자 남자가 꼬리를 채 가듯 물었다. 미묘하게 신경질적인 목소리였다. 서원은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을 애써 모르는 척하면서 차분하게 대답했다.

“알바 하고 있습니다.”

「오늘 끝나고 뭐 해요? 그냥, 일 없으면 집에 데려다줄까 하고.」

“아…….”

“왜? 형님 가게 오신대?”

핸드폰 너머로 남자가 하는 말을 들었는지, 아니면 눈치껏 말한 것인지 유헌이 얼굴을 더 가까이 들이대며 물어 왔다. ‘왜 하필 지금.’ 기어이 그런 생각이 스쳤다.

놈의 붙임성은 중학교 때 잘 봐서 알았다. 형님, 형님, 하면서 남자에게 무엇이든 뜯어 가려고 할 게 분명했다. 남자의 재력이든, 인기든, 위치든, 뭐든. 최유헌은 인간관계를 명품 시계처럼 생각하는 인물이니까. 서원은 어제 비상계단에서 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그 눈을 떠올렸다.

「……서원 씨, 내 말 들었어요?」

어조는 전보다 다정해졌고, 목소리는 전보다 온도가 낮았다.

“……약속이, 있습니다.”

서원이 말했다. 목이 울렁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그는 최대한 다스리려고 애썼다.

「아, 그래요?」

“야, 괜찮아. 형님이랑 같이 놀자. 나도 껴서. 어?”

「어제 그 친구랑 노는 거예요?」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핸드폰을 대고 있는 귀와 그 반대편 귀에서 연이어 서원을 쏘아붙였다. 남자의 입에서 ‘그 친구’라는 말이 나온 찰나에 서원은 몸을 움찔거렸다. 그도 최유헌을 의식하고 있는 걸까. 기어이 보이지 않는 화살표가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저를 뚫고 맞닿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찔했다.

싫어.

“네. 저 일이 바빠서 먼저 끊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화살표 두 개가 맞닿기 전에 끊어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원은 황급히 그렇게 말하고 종료 버튼을 눌렀다. 심장이 기분 나쁜 리듬으로 쿵쾅거렸다. 얼굴이 화끈화끈해서 피부가 따가울 정도였다. 유헌은 재미없다는 듯 “에이, 뭐야.” 하며 기울였던 상체를 뒤로 뺐다.

“그래, 그럼. 청춘이나 가자.”

유헌이 일어서며 서원의 어깨를 툭툭 쳤다. 벽시계를 확인한다. 곧 퇴근할 시간이었다. ‘담배 한 대 피우고 퇴근할 준비 해야지.’ 유헌은 생각하며 의자를 제자리에 두었다.

그때였다. 별안간 서원이 낚아채듯 유헌의 어깨를 쥐어 돌렸다. 유헌은 깜짝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안 가.”

서원이 말했다. 무표정하고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방금 전까지 이상할 정도로 횡설수설하며 안절부절하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였다. ‘얘 왜 이래?’ 유헌은 생각했다. 그리고 이상하다는 듯 서원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뭐?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안 간다고, 너랑.”

서원은 침을 꼴깍 삼키고 간격 없이 말을 이었다.

“술집이든, 어디든 너랑 갈 생각 없어. 너랑 나랑 그렇게 친하지도 않았잖아.”

그러니까 친한 척하지 마.

나지막하게 말하는 목소리는 화내는 것치곤 박력이 부족했고, 그 탓에 상대방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토록 누군가에게 경멸을 드러내 본 적이 없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잠시 벙찐 얼굴로 서원을 바라보던 유헌은 마침내 상황을 파악했는지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했다. 입을 벌리며 허공을 쳐다본다. 그리고 하, 하고 짧게 웃었다. 서원은 도망치듯 그를 지나쳐 스태프 룸으로 들어갔다.

“…….”

이토록 화낼 일인가. 애초에 화낼 문제인가.

스태프 룸으로 들어간 서원은 새하얗게 질린 손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이성적으로 질문했다. 대답은 쉬웠다. 절대 아니다. 비합리적인 분노다. 그로 인해 누군가에게 미움받을 것을 빤히 알았다. 아는데도, 전혀 찝찝하지 않았다. 후회라곤 전혀 들지 않는다.

“……하아.”

오히려, 후련했다.

* * *

다음날. 유헌은 태연한 얼굴로 일을 했다. 물론 서원과는 한마디도 섞지 않았고 무엇을 건넬 때마다 테이블 위로 툭툭 내던지곤 했으나 이 정도면 꽤 양호한 반응이라고 서원은 생각했다. 하긴, 최유헌은 대놓고 적을 만드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보단 뒤에서 교묘하게 사람을 엿 먹이는 타입에 가까웠다. 예전도,

“서원이가 너무 불편해요.”

그리고 지금도.

“…….”

서원은 쭈그리고 앉아 말없이 담배만 피웠다. 유헌이 사장에게 신나게 늘어놓고 있는 말들은 주방에 설치된 환풍구를 통해 가게 뒤편까지 흘러나왔다. 한 번도 음식물 쓰레기를 버린 적이 없으니 가게 뒤편에서 주방 소리가 들린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친구이긴 한데, 아, 뭐라 그래야 하지, 좀 텃세를 부린다고 해야 하나……. 어려운 일만 저 시키고, 좀……. 아니 힘든 일 하는 건 상관없어요. 근데 절 싫어하는 것 같으니까. 좀, 그래요.”

“그래? 서원이가 그런 성격이었나?”

“글쎄요. 중학교 동창이긴 하지만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어서. ……서원이가 중학교 때는 친구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그때도 제가 가끔 말 걸어 주고 그랬는데, 어느 날부터 절 무시하더라고요. 약간 질투하나 싶기도 하고. 흐음, 안 그래도 되는데.”

“어, 그래? 친구가 없었어? 안 그래 보이는데. 조용해서 그러나.”

사장의 물음에 유헌은 의미심장하게 웃고 말았다. 꼭 비단 그것만은 아니라는 듯한 투의 웃음이었다. 서원은 담배를 끄고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대화가 대충 마무리되어 갈 즈음에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퇴근 시간 10분 전에 뒤 타임 아르바이트생이 가게에 들어섰다. 서원은 테이블을 닦던 걸 정리하고 손을 닦았다. 그리고 스태프 룸 안에 들어갔다 나올 때까지도 유헌은 서원에게 시선 하나 주지 않고 사장과 떠들기 바빴다. 친화력은 예나 지금이나 좋은 놈이었다.

서원은 사장에게 다가가 뒤 타임 알바생이 왔으니 10분 일찍 퇴근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사장은 상관없다는 듯 가보라고 대답했다. 서원은 사장에게 꾸벅 인사한 뒤 가게 뒤편으로 나갔다.

오늘도 남자가 자신의 퇴근 시간에 맞추어 찾아올지도 몰랐다. 서원은 그 전에 남자가 찾아오지 않는 가게 뒤편에서 담배를 한 대 피우고, 깨끗이 냄새 정돈을 한 뒤 앞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바깥은 컴컴했다. 이 시간의 가게 뒤편은 사람이 별로 돌아다니지 않았다. 다문다문 설치된 가로등 불빛만이 어슴푸레하게 골목길을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가게 빌딩 자체는 도시의 중심지에 자리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편의 골목길은 앞면의 시끌벅적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듯 아주 조용하고 어두웠다. 같은 빌딩의 앞과 뒤, 아주 작은 차이일 뿐인데도 이렇게 차이가 났다.

서원은 쭈그려 앉아 가방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그리고 한 개비만 꺼내어 다시 담뱃갑을 가방 안에 넣었다. 줄줄이 피우지 않기 위한 나름의 요령이었다. 그는 한 개비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로 라이터를 찾았다. ‘아까 주머니에 넣었던 것 같은데.’하며 청바지 주머니를 더듬고 있을 때였다.

“서원 씨?”

남자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왔다.

서원은 깜짝 놀라 어깨를 떨면서도 허겁지겁 주머니 안에 담배 한 개비를 쑤셔 넣었다. 워낙 골목길이 어둡고 그는 저 멀리서 빌딩을 돌아오고 있었으니 못 봤을 터였다. 서원은 놀라 붉어진 제 얼굴을 애써 정돈하며 무릎을 펴 일어섰다.

“안녕하세요.”

“여기 왜 있어요? 퇴근했어요?”

“아, 네. 퇴근했습니다. 그냥 바람 좀 쐬려고…….”

“아아.”

남자는 알겠다는 듯 예의상 웃는 얼굴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엄지로 뒤편을 가리키고 “나는 옆에 카페에 있었어요.”한다.

“아, 옆 카페요?”

“네. 저번에 본 사람 있죠? 그 사람이 저기 카페 사장이거든요. 맛없으니까 서원 씨는 가지 말아요. 나도 지인이라 그나마 값이라도 깎아 주니까 가는 거예요.”

서원은 알바 초창기에 옆 카페에 한 번 커피를 마시러 갔다가 가격에 기함해 돌아섰던 걸 기억했다. 아메리카노 한 잔에 9천 원이었다.

“얼마나 깎아 주시나요?”

“음, 2천 원?”

7천 원. 그래도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서원은 잠자코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나 남자는 서원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 옅게 웃었다.

남자는 썩 기분이 괜찮아 보였다. 어제, 제가 급히 전화를 끊어 버린 것을 불손하다고 느꼈을 거라 짐작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던 모양이다. 서원은 남자의 얼굴을 살피며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때였다.

“어제는 잘 놀았어요?”

문득 남자가 작게 흩뜨리던 웃음을 멈추고 물어 왔다. 서원은 순간적으로 ‘어제, 무슨 말을 했더라.’ 되짚어 보았다. 어제는 그저 최유헌과 남자가 더 이상 맞닥뜨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되는대로 말을 한 뒤 전화를 끊었던 기억밖에 나지 않은 까닭이었다.

“아, 네. 잘 놀았습니다.”

“그 친구랑?”

“네.”

“뭐 하고 놀았어요? 그냥, 요즘 대학생들은 뭐 하고 노나 궁금해서.”

남자는 대수롭지 않은 질문이라는 듯 가볍게 뒷말을 덧붙였다. 서원은 유헌이 그토록 타령을 하던 ‘청춘 주점’이란 이름을 기억했다. 놈의 말로 추측하건대 그렇게 건전한 곳은 아닐 것이었다.

“PC방 갔습니다.”

생각을 마친 서원은 눈을 깜빡이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 그 시간에?”

남자가 곧바로 되물었다.

흡연, 그리고 술집에 가는 것. 성인이라면 당당하게 누려도 되는 것들이라는 건 서원도 알고 있었다. 실제로 자신이 흡연자라는 게 부끄럽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왜인지 남자에게만은 숨기고 싶었다. 남자가 제게 갖고 있는 이미지에 부응하고 싶은 것일까, 서원은 스스로 추측했다. 자신이 흡연을 한다거나, 술집에 가는 이미지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으니까.

“……네.”

그래서 서원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도 꿋꿋이 그렇게 대답했다. 그는 자신이 이렇게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요즘 들어 깨닫고 있는 중이었다.

남자는 잠시 대답하지 않고 서원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웃고 있었으나 얼굴 위로 위태로이 감돌고 있던 유쾌한 감정은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왜 그러시지.’ 서원이 위화감을 느끼려는 찰나였다. 남자는 짐짓 친절한 낯빛을 띠고 다시금 입을 열었다.

“서원 씨는, 담배 안 피운다고 했죠?”

서원은 비 오는 날, 제 앞에서 담배를 피우기 전에 제게 그렇게 물었던 남자를 기억했다. ‘지금 피우려고 하나.’ 서원은 짐작하면서 짧게 그렇다고 답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남자가 표정 변화 없이 불쑥 손을 뻗어 왔다. 너무나 급작스런 행동에 서원은 움찔하며 한 발 뒤로 물러섰으나 이미 남자의 손은 서원에게 닿아 있었다.

남자의 손이 향한 곳은 서원의 바지였다. 정확히는 주머니 위로 삐쭉 솟은 담배 한 개비였다. 줄곧 그것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듯 남자는 군더더기 없는 손짓으로 그것을 쏙 꺼내 들었다.

“…….”

“……그렇게 안 봤는데, 서원 씨.”

건조한 손가락이 서원의 아랫입술을 살짝 눌러 입술 사이에 담배를 끼웠다. 놀란 서원은 입에 물린 담배를 뺄 생각도 못 하고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았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빼 입술에 가볍게 물리는 행동은 아주 찰나였고,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그 탓에 남자의 돌발 행동보다는 거짓말을 들켰다는 사실이 서원의 심장을 무겁게 짓눌렀다. 잠시 서원의 입술에 머물던 남자의 시선이 올라 눈을 맞춰 왔다. 여전히 웃고 있는 얼굴이었으나 미묘하게 싸늘했다.

“…….”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하네요.”

그 말은 비단 담배에 관한 이야기만 담은 게 아닌 것 같았다. 그것을 직감한 순간 서원은 얼음이 닿은 듯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을 느꼈다. 동시에 얼마 전, 남자가 즐겁게 웃으며 비슷한 어조로 말을 했던 걸 기억했다.

그렇게 안 봤는데…….

되게 재밌는 사람이네요, 서원 씨.

그때에 남자가 쌓아 두었던 저를 향한 어떠한 기대감을 제 손으로 무너뜨린 것 같았다. 당혹감. 조바심. 억울함. 그리고 조금의 원망. 자책. 너무나도 복합적인 감정들이 저를 빙빙 에워싸고선 비난하고 있었다.

“…….”

“그거 좀 고쳐야겠어요.”

남자는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을 일관하고 있었다. 그는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그러더니 입술에 물려 있는 담배를 다시 빼 휙 제 뒤로 던졌다. 천연하게 말을 잇는다.

“지금 출발해야겠네요. 담배는 나중에 피우고, 가요.”

그는 그대로 골목길을 벗어났다. 서원은 어두컴컴한 골목길 안에 잠시 서 있다가, 천천히 그를 따랐다.

* * *

갤러리 내부는 작가 기획전 준비로 한창 바빴다. 시연우는 자신이 나서 봤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여실히 알고 있으면서도 최선을 다해 갤러리 안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최근 몇 주간 빠른 퇴근을 일삼던 대표가 그제와 어제는 갑작스레 야근을 했고, 오늘은 갤러리를 휘젓고 다니면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일을 도우려는 이유에 대해 직원들은 갖가지 추측을 했다. 하지만 이렇다 하고 유력하게 내세울 것은 없었다. 대표의 사생활에 대해 적게라도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4층으로 이어지는 전시는 규모가 꽤나 컸다. 연우는 점검하는 것처럼 1층부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설치된 조형물들과 그림, 알록달록한 조명, 아직도 무슨 예술적인 기능을 하는지 모르겠는 분수, 추상적이고 지루한 영상을 반복적으로 재생하고 있는 프로젝터 빔, 최면술을 시도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기괴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는, 또 쓸데없이 음질은 좋은 대형 스피커까지 무심하게 훑어보던 그는 마침내 4층 끝에 섰다. 그리고 문득 오늘이 무슨 요일인가 헤아렸다.

“…….”

‘일요일이네.’

전시 시작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생각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오늘이 과외를 하는 날인지, 아닌지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 주 목요일, 알 수 없는 짜증에 이끌려 공연히 강서원에게 담배를 피우니 마니 들추고야 말았던 자신을 상기한 연우는 이윽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아무렇지 않은 양 지적했고, 강서원은 무덤덤한 성격이니 금방 넘길 것 같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자신이 유치했다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뭐 마음에 안 드는 거 있으세요? 아, 질서 관련해서는 아르바이트를 고용할 예정이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흘러나온 한숨 소리에 그의 옆에 서 있던 실장이 끝내 나지막하게 물어 왔다. ‘이거 설마…….’ 까지 생각하던 연우는 서둘러 친절하게 웃으며 “아, 아니에요. 좋네요. 수고하셨어요, 실장님.” 했다. 실장은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마주 웃어 보였다.

“저 오늘은 일찍 퇴근할게요. 주말이니 대충 하고 가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대표가 일찍 퇴근한다는 말에 더 활짝 웃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사무적인 일 처리는 깔끔했으나 예술적인 감각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대표는 실무에서는 필요하지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현장에 그가 남아 있는 것 자체가 불편했다. 그가 따로 지적을 한다거나 상황을 불편하게 만드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깔끔한 처사에 깍듯한 예의도 갖추고 있었다. 허나 상사라는 것은 존재 자체가 불편한 법이지 않는가.

“내일 뵙겠습니다.”

“네, 수고하세요.”

연우는 제게 인사하는 여자에게 웃어 주고는 갤러리 밖으로 나섰다.

집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시간이 꽤 긴 신호등 앞에서 차가 멈추었다. 그 바람에 아무런 생각 없이 주변을 바라보던 연우가 어느 순간 한 곳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의 시선이 머문 곳은 신호등 앞 버스 정류장이었다. 강서원을 닮은 몸의 누군가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앉아 있었다. 연우는 다음 블록에서 유턴을 하고, 또 유턴을 해서 강서원을 닮은 누군가가 앉아 있는 버스정류장 앞에 섰다. 고개를 떨구고 있는 바람에 여전히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가까이서 보니 강서원이 확실했다. 그는 차창을 내렸다.

“서원 씨?”

제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가 들린다. 서원은 연우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바로 앞에 차를 세웠는데도, 다른 생각을 하느라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큼지막한 눈이 깜빡이며 연우를 바라보다가 “……왜 여기에…….” 했다. 연우는 작게 웃었다.

“여기 우리 동네인데.”

“……아…….”

강서원은 목 뒤를 긁으며 말을 끌었다. 그 순간 연우는 위화감을 느꼈다. 강서원은 어딘가, 조금 불편해 보였다. 표정이 부자연스럽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고, 턱과 얼굴 근육 곳곳이 경직되어 있었다. 연우는 그의 얼굴을 관찰하다가 말했다.

“집 가는 거예요?”

“아, 네.”

대답하는 목소리도 조금 이상했다. 연우는 의문을 품은 얼굴로 강서원을 멀거니 바라보다 “그래요. 잘 가요.” 하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차가 망설임 없이 나아갔다. 잠시 후, 그는 백미러를 흘긋 쳐다보았다. 강서원은 미동 없이 꼿꼿한 자세로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었다.

“…….”

조금 많이 이상하다고, 연우는 생각했다.

* * *

일요일은 화창했다.

서원은 축 늘어진 기분을 느꼈다.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았다. 그저 집에 틀어박혀 잠이나 자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몇 주 전부터 동생들과 약속한 일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아버지와의 약속이었다.

아버지와는 가끔씩 만나곤 했다. 하지만 삼형제가 통째로 만나는 일은 드물었다. 왜냐하면 한꺼번에 나갔다 들어오는 꼴이 엄마에게 의심을 사기에 충분한 탓이었다. 가끔 막내인 태원은 속없게 ‘그냥 아빠 만나러 갔다 온다고 말하면 되잖아.’라는 말을 했지만 엄마가 얼마나 그에 대해 상처를 받는지, 또 아빠와 만남을 갖는 걸 들킨다면 저희를 얼마나 원망하곤 하는지 잘 아는 재원과 서원은 한사코 안 된다고만 했다.

그리고 물론 오늘도 그랬다. 태원은 친구와 PC방에 간다고 했고, 재원은 여자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했으며, 서원은 단기 알바를 하러 간다는 핑계로 삼 형제는 나란히 집을 나섰다. 그들의 엄마는 그러려니 하는 얼굴로 그들을 배웅했다.

“……아빠 진짜 뭐 하고 사는 거야?”

“뭘 하긴. 돈 많이 벌지.”

서원은 몇 달 만에 보는 아빠가 묘하게 낯설게 느껴졌다. 워낙 만나는 간격이 넓어서 만날 때마다 새롭기는 했으나 이번에는 조금 더했다. 마치 새사람으로 거듭난 것처럼 표정은 위풍당당했고, 두른 옷들은 비싼 티가 났으며, 재원이 전에 일러 준 대로 차는 고급에, 삼 형제에게 쓰는 돈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마치 로또를 맞은 사람처럼 망설임 없이 카드를 긁었고, 그에 신이 난 태원과 재원은 닥치는 대로 운동화와 후드티, 백팩 같은 것들을 골랐다.

“강서원 너도 뭐 하나 골라. 아빠가 사 줄게.”

“됐어.”

서원은 벌써부터 저것들을 들고 집에 간다면 엄마가 눈치챌 거라는 걱정밖에 들지 않았다. 팔짱을 낀 채로 작게 손을 젓는 서원을 가만히 보던 서원의 친부가 갑자기 직원에게 명품 지갑을 물었다. 직원은 친절한 얼굴로 그를 안내했다. 그는 직원을 따라가며 서원의 팔을 쥐어 끌었다.

“아빠, 됐다니까.”

서원은 계속해서 거절했으나, 그 모습에 더욱 오기라도 생긴 것인지 서원의 친부는 기어코 그에게 명품 지갑이 든 쇼핑백을 안겼다. 서원은 물건과 낯을 가리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쇼핑백을 어정쩡하게 들면서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아빠가 사 주는 거니까 잠자코 받아. 별로 안 비싸더만.”

“……엄마가 어디서 났냐고 물어보니까 그렇지.”

“뭐가 문제야, 그게? 그냥 아빠가 사 줬다고 하면 되지.”

아빠의 목소리가 불쑥 커졌다. 발끈하는 것이었다. 서원은 제 아빠의 눈을 마주치지 않고 중얼거렸다.

“엄마는 싫어해.”

“왜? 아이고, 참나. 걔도 어이가 없네.”

엄마가 조금 예민한 것 같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자신은 그녀의 편에 가까웠다.

애초에 집을 나갔던 건 아빠였다. 지금에서야 돈을 벌기 시작하니까, 또 슬슬 가족이 없는 게 외롭게 느껴지니까 2년 전부터 재원이나 태원이나 자신을 찾기 시작한 거지 먼저 가족을 버린 건 아빠고, 책임을 떠맡고 혼자 고군분투했던 건 엄마다. 그러니 그녀에게는 이제 와서 전 남편이 제 자식들에게 접촉하려 하는 걸 싫어할 권리가 있다.

“……엄마는 우리랑 아빠랑 만나는 것도 싫어해.”

그리고, 아빠가 버린 금전적 책임을 떠맡고 있는 자신에게도 권리가 있다고 서원은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런 심술 정도는 부릴 수 있는 권리가.

서원은 고집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 말이 서원의 아빠의 안에 있던 어떠한 약점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서원의 아빠는 급기야 터질 듯 붉어진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인정하기 싫을 때 더 화를 내는 습관이 있었다.

“걔도 참 웃긴다. 강서원, 그래서 너 오늘 아빠랑 만나는 것도 엄마한테 비밀로 했냐? 그래서, 아빠가 집까지 데리러 가겠다는 거 말린 거였어? 아들들이랑 아빠랑 만나는 게 뭐가 잘못인데? 내가 그년 눈치라도 봐야 하냐? 어?”

삽시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진다. 서원은 대답하지 않고 다른 곳만 바라보았다. 그 반응이 더 화가 났는지 그의 아빠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야, 나도 집 나가서 고생 많이 했어. 너네는 집이라도 있었지 나는 차에서 살았다고! 그런 아빠 생각은 안 해?”

백화점 한가운데서 큰 소리를 낸 탓인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서원과 그의 아빠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며 지나갔다. 저 멀리서 보안요원이, 그 반대편에서는 이상을 눈치챈 재원과 태원이 쇼핑백을 바리바리 들고 달려오고 있었다. 서원은 사색이 되어 달려오는 재원을 보았다. 그리고 짐짓 냉정한 투를 유지하며 제 아빠에게 말했다.

“그래도 우릴 책임진 건 엄마야. 아빠는 도망친 거고. ……그러는 아빠는 우리 셋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도 못 하지? 태원이는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아빠가 출장 간 걸로 알고 있었어.”

결국은 또 이런 루트였다. 누가 더 힘들었는지, 누가 더 잘못했는지. 쓸데없는 저울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매번 이런 식으로 골만 깊어진다. 친부의 눈이 더 벌겋게 충혈되었다.

‘저만 잘난 새끼.’ 그는 이를 갈았다. 그리고 뭐라고 한 마디 하려고 하는 순간, 태원이 그의 팔을 붙들어 맸다.

“아빠, 그만해. 형. 하지 마. 사람들 보잖아.”

태원은 왜 또 그러냐는 식으로 서원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서원은 그대로 뒤를 돌아 에스컬레이터로 걸어갔다. 그 뒤를 재원이 따랐다. 아래층까지 서원을 따라온 재원은 거칠게 그의 팔을 잡았다. 서원이 몸이 맥없이 돌아갔다.

“형은 대체 왜 그렇게 만날 삐딱 선을 타? 그냥 좀 아빠한테 맞춰 주면 안 돼?”

“맞춰 준다고 여기 나온 거잖아.”

“그런 거면 제대로 하든가. ……그래, 아빠 우리 두고 집 나갔어. 잘못한 거 누가 몰라? 그걸 만날 들쑤셔야겠어? 왜 말을 그딴 식으로밖에 못하냐고. 근데 아빠도 이제 우리랑 연락하면 된 거 아니야? 용돈도 주는데, 뭐가 문젠데!”

못내 답답한지 재원은 발을 동동 구르며 크게 소리를 냈다. ‘돈? 돈을 많이 준다고?’ 서원은 진심으로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쳤다.

아빠와 재회했던 날, 제가 감당하는 빚을 털어놓자 모르는 척 ‘서원이가 고생이 많네. 고생 더 해야겠다.’라고 말했던 사람이다. 커다란 짐은 지고 싶지 않지만 외로움은 털어내지 못해 애들에게 값싼 사탕이나 흔들며 꾀어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강재원은 그 사탕을 좋다고 받는 어린애고.

왜 그걸 모르지. 왜. 우리 집 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서원은 기어이 위태로이 커지고 있던 것이 물풍선처럼 한꺼번에 펑, 하고 터지는 것을 느꼈다.

“몇 번 만나서 뭐 사 주면 다야? 너한테 한 달에 용돈 육십, 태원이한테 이십 주면 다냐고. 강재원, 너 우리 집 빚 이자랑 전기세 수도세 누가 내는지 몰라?”

그 말에 재원이 짜증 난다는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형은 그걸로 생색내면 다 된다고 생각하지?”

“…….”

“뭐만 하면 이자 내가 낸다, 생활비 내가 낸다.”

지금 재원이가 하는 말들이 감정에 휩쓸린 탓이라는 걸 안다. 그리고 그에게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인 집의 빚보다는 손에 떨어지는 제 용돈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어차피, 집 빚은 형이 감당하는 거니까. 형은 장남이니까. 하고 당연하게 여길 수도 있다.

또 자신이 항상 생활비와 빚 이자를 내는 것을 명목으로 그들에게서 권위를 찾으려고 했던 게 동생들로서는 답답했을 수도 있고, 그래서 지금 역효과가 나는 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상처를 받는 건 별개였다.

“…….”

서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재원을 바라보았다. 할 말이 없다기보단 할 말이 너무 많아서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는 탓이었다. 재원은 제 형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든 말든 관심 없다는 태도로 고요하게 말을 이었다.

“형이 우리랑 엄마 때문에 만날 알바하면서 고생하는 건 알겠는데, 나도 아빠 용돈 없으면 살기 힘들어. 그래서 형한테 아빠 비위 좀 맞춰 달라고 부탁한 거야. ……형은, 그게 그렇게 힘들어?”

“…….”

“난 궁상맞게 살기 싫다고.”

재원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성큼성큼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서원은 멍하니 뒷모습을 바라보다 침을 삼켰다. 멍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백짓장이 된 것만 같았다.

“…….”

그는 천천히 걸어서 백화점 앞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버스 정류장 옆에 커다란 쓰레기통이 있었다. 홧김에 쇼핑백을 버려버릴까 생각하다가,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나쁘게 느껴져 서원은 작게 한숨만 내쉬며 생각을 거두었다.

서원은 기다란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천천히 무릎 위에 내려놓은 쇼핑백을 끌어안았다.

지금 이 쇼핑백이나, 가족들이나 다 그런 감정을 갖게 했다. 너무 싫고, 그래서 또 그대로 내쳐버리자니 마음이 아픈, 그런 아이러니하고 힘든 감정을.

“…….”

“서원 씨?”

일순 홧홧해진 피부 위에 찬물이 쏟아진 것만 같았다. 한껏 얼굴을 숙이고 있던 서원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익숙하지는 않지만 잊기는 힘든 목소리. 역시나 그 남자였다.

남자는 버스 정류장에 차를 세운 채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원은 당황하여 눈을 깜빡이다가 “……왜 여기에…….” 하며 떠듬거렸다.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여기 우리 동네인데.”

“……아…….”

생각해 보니 그랬다. 서원이 머쓱한 얼굴을 하며 뒷목을 긁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남자가 물었다.

“집 가는 거예요?”

“아, 네.”

“그래요. 잘 가요.”

서원은 고개를 까딱였다. 검은 차가 미련 없이 떠났다. 과외를 하는 날이 아니니 당연한 일이었다.

차 뒤꽁무니를 쳐다보던 서원은 그제야 버스 정류장에 설치된 안내판을 보았다. 마을버스가 배차된 정류장까지 가는 버스는 두세 가지가 있었는데, 모두 20분 뒤 도착 예정이었다. 어차피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는 쇼핑백을 안은 채로 주머니를 뒤져 이어폰을 꺼냈다. 그리고 엉킨 이어폰 줄을 천천히 풀기 시작했다.

“…….”

그러던 중이었다. 문득 손 위로 알 수 없는 물방울이 떨어졌다. 서원은 손을 멈추고 살갗 위로 떨어지는 것들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시야가 흐려졌다가 선명해지기를 반복한다. 그는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더듬었다.

자신은 울고 있었다.

그를 깨닫자마자 갑자기 서러움이 북받쳤다. 이유가 명확한 건 아니었다. 굳이 찾자면 그냥,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마음이 쓰리고 뻥 뚫린 것처럼 공허했다. 예나 지금이나 다른 게 없었다. 자신은 늘 외롭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엔 허사였다. 무슨 빌어먹을 저주에라도 걸린 것 같았다.

어떻게 이렇게, 항상 결말이 비슷할까. 결국 나는 왜 항상 혼자일까. 왜 사람들은 나를 다 싫어하게 되거나, 내게 실망하게 되는 걸까.

모든 사람들이 나와 달라서 그런 것이라면, 대체 나와 같은 사람은 어디 있는 걸까. 어딘가에 있기는 한 걸까. 아무도 정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왜.

“하…….”

서원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계속 울었다.

그로부터 얼마나 울었을까.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은 것도 같았다. 문득, 커다랗고 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제게로 다가오는 듯했다. 서원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얼굴을 한 채로 천천히 손을 내렸다. 제 앞에 누군가 숨을 몰아쉬며 서 있었다.

“왜…….”

남자였다. 건너편에 차가 정차되어 있는 게 보였다. 남자는 횡단보도를 건너온 모양이었다.

서원은 놀란 얼굴 그대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깜빡이자 또다시 눈물이 툭 떨어졌다. 그는 답지 않게 못내 당황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왜…….” 하고 말을 꺼냈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가, 결국 또 입을 열었다.

“……왜 울어요?”

그 물음을 듣자마자, 서원은 기어이 소리 내어 울고 말았다. 들었던 고개가 떨어졌다. 얼마나 서럽게 우는지 어깨가 들썩거릴 정도였다.

“……흑, 끄윽…… 으…….”

“왜 그래요, 서원 씨? 왜, 왜 울어요.”

연우는 한참 어린 동생이 두 명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꼭 처음 동생이 생긴 소년처럼 서원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엉거주춤 서원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리고 우는 얼굴을 계속 살피면서 젖은 볼을 감싸려다가 금방 손을 거두었다. 갈팡질팡하던 손은 결국 서원의 무릎을 조심히 감쌌다. 그리고 둥글게 어루만졌다. 달래는 것처럼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저는, ……저는 잘하려고 했는, 데……. 왜, 흐…… 윽…….”

“근데요. 응? 누가 못한다고 했어요?”

“……동생, 동생들은 자꾸…… 흑…… 흐으…….”

“……동생들?”

서원은 더 이상 말하기가 힘들었는지 고개를 내저으며 눈 아래를 비비적거리기만 했다. 여린 살결이 벌써 발갛게 부어 있었다. ‘쓰라릴 것 같은데.’ 연우는 그런 생각이 들어 서원의 손목을 가볍게 잡아 비켜 놓았다. 그리고 제 손가락으로 살살 눈 아래를 쓸며 눈물을 닦아 주었다. 서원은 잠자코 그 손길을 받아내면서도 울기를 멈추지 못했다.

“동생들이 왜. 동생들이 형은 잘 못한대요? 서원 씨 욕했어요? 아니면 반항해요? 때렸어? 뭔데, 말을 해 봐요.”

서원은 입술을 꾹 깨문 채로 연신 고개만 가로저었다. 계속해서 묻던 연우는 기어이 속상하다는 듯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강서원이 왜 우는지 추측할 만한 정보가, 제게는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답답했다.

“그럼 왜 우는데. 동생들이 또, 뭐, 서원 씨 콘 치즈라도 뺏어 먹었어요?”

“……흑, 그런 거 아니, 에요…….”

기어이 연우가 한숨을 내쉬며 그리 말하자, 서원은 그 말에 당황한 듯 기어이 목소리를 냈다. 울음이 잔뜩 섞인 목소리였으나 대답을 받아 냈다는 게 그나마 안심이 되어 연우는 주저 없이 말을 이었다.

“아니면, PC방 갈래요? 동생 놈들이랑 컴퓨터 자리로 만날 싸운다면서.”

“……어떻게, 어떻게 그걸…….”

“응?”

콘 치즈 때문에 울었던 사춘기 시절. 동생들과 컴퓨터 자리로 싸웠다는 것.

남자에게는 아주 가벼이 지나갔을 타인의 사사로운 정보들이었다. 그런데, 그걸 남자가 다 기억하고 있다는 게 이상했다. 제 별것 아닌 이야기들이 남자의 머릿속에 계속 남아 있던 거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별안간 심장을 누군가 깃털로 간질이는 것처럼 그 근처가 근질근질했다. 서원은 훌쩍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걸 어떻게, 기억하세요…….”

“왜요? 기억하면 안 되나.”

남자는 능청스럽게 말하면서도 얼굴을 쭉 빼고 서원의 표정을 살폈다. 그 움직임을 느끼자 근질거림은 점점 심해졌다. 기어이 참을 수가 없어, 서원은 우는 얼굴 그대로 픽 웃고 말았다. 또 눈을 비비적거리자 남자가 가벼이 저지했다.

“……이상하잖아요.”

“뭐가 이상해.”

“진짜 이상해…….”

눈을 깜빡이자 눈물이 또 한 방울 떨어졌지만 다시 커다란 눈망울 위로 눈물이 고이지는 않았다. 남자는 그것까지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훑어낸 다음 서원의 눈을 바라보았다. 걱정하는 것처럼 왼쪽, 오른쪽 눈을 번갈아서 깊이 관찰한다. 이윽고 남자는 다정하게 말했다.

“가요. 어디든.”

* * *

어딘가로 가는 차 안은 조용했다.

서원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애꿎은 안전벨트만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진정되고 나니 그런 모습을 남자에게 보여 버린 자신이 당황스러운 탓이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그는 연신 고민했으나 명쾌한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엎질러진 물.

비로소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다. 사실 외면하고 있었을 뿐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서원도 알고 있었다. 절망감마저 느껴져서 그는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남자를 바라본다.

가지런한 옆얼굴은 운전에 집중하고 있는 탓인지 감정이 스며 있지 않았다.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걸려 있는 것 같기도 했으나, 그는 평소에도 거의 입꼬리를 올려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 웃음은 습관적인 표정일지도 모른다.

“저…….”

기어이 서원이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남자가 흘낏 그를 돌아보았다가, 다시 정면을 보았다. 남자는 조금 전 서원이 울었다는 걸 잊은 사람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왜요?” 했다.

서원은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며 눈을 굴리다가,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 모습을 보여서, 죄송합니다.”

“무슨 모습이요?”

남자가 곧바로 되물어 왔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한 속도였다. 서원은 당황한 듯 음, 하고 작게 간격을 끌다가 말했다.

“우는 모습이요.”

돌연 웃던 입꼬리가 딱딱하게 굳어 서늘한 각도로 기울어졌다. 남자는 의문스럽다는 듯 고개를 살짝 비뚤였다. 핸들에 걸친 손가락이 불규칙적으로 가죽을 툭툭 건드렸다.

“나한테 거짓말한 건 안 죄송해요?”

“네? 아, 죄송합니다.”

“아니, 진짜 사과를 바라는 건 아니고.”

남자는 건성으로 웃으며 말했다. 유쾌한 웃음은 아니었다.

일순 공기가 뒤틀렸다. 서원은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자신의 어떤 행동이 잘못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죄송하단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그는 입을 여러 번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입을 꾹 다물었다.

차는 서울 외곽으로 가는 고속도로의 입구에 잠시 멈춰 섰다. 차가 몰리는 구간이었다. 앞차가 고속도로에 합류하면서 멀어질 때까지 고민하는 얼굴을 하던 남자가 마침내 말했다.

“……서원 씨, 내가 진짜 모르겠어서 물어보는 건데요. 내 행동 어디가 서원 씨를 불편하게 하는지, 알려줄 수 있어요?”

“……네?”

“계속 시답지 않은 거짓말 하는 것도, 이런 사사로운 걸로 사과하는 것도, 서원 씨가 날 불편하게 여겨서 그러는 것 같아서요. …내가 돈 주는 사람이니까 어느 정도 불편할 수는 있다고 생각하긴 하는데, 어쩐지 이번 주부터는 좀 더 심해진 것 같아서. 혹시 내가 뭐 실수라도 한 거라면 말해 줘요. 아무리 생각해도 난 당최 모르겠어요.”

남자의 말은 점점 빨라졌고,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다.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차라리 기분이 나빠 보였으면 덜 당황했을 텐데, 남자는 어딘지 조금, 섭섭한 것처럼 보였다.

대체 왜지. 영문을 알 수 없는 흐름에 급기야 서원은 벼랑 끝에 몰린 듯한 기분을 느꼈다. ‘생각을 하고 말하자.’ 이성은 그렇게 타일렀으나 조바심이 정점에 달한 감정은 콱, 하고 가속장치를 밟았다. 돌연 말이 입 밖으로 툭 튀어나간다.

“형님을, 불편하게 여긴 적은 없습니다.”

“…….”

“……제게 실수를 하신 적도 없고요.”

사실이었다. 그를 불편하게 여기거나 그의 행동에 기분이 상한 적은 없었다. 그는 제게 점점 더 다정했다. 그리고, 도리어 그게 그런 행동을 한 이유였다. 거짓말을 했던 것도, 우는 일로 사과한 것도.

그가 제게 다정했으니까. 제 무의식중의 예상과 다르게, 저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으니까. 제 미련함을 싫어하지 않았으니까. 그런 사람에게, 조금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제 나름대로 노력했던 것뿐이었다.

“그냥……. 누구에게나 가족사는 다 있는 건데, 애처럼 울었던 게 너무 꼴사납고 성숙하지 못한 것 같아서요. 그래서 사과했습니다.”

고속도로에 진입한 차는 빠르게 달렸다. 서원은 제 목 뒤를 어루만지면서 말을 이어 갔다. 목소리는 어설프고 작았다. 그는 제가 횡설수설하고 있다는 걸 느꼈지만, 그래도 최대한 차분히 말을 전하려고 노력했다. 입 안이 바싹 마르는 바람에 말을 멈추고, 침을 느리게 삼키는 동안에도 남자는 참을성 있게 서원의 뒷말을 기다렸다. 남자의 표정을 확인할 자신이 서지 않아서, 서원은 고개를 숙인 채로 제 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을 맺었다.

“…담배 피우는 모습도, 아무리 성인이라 해도 좋은 모습은 아닌 것 같아서 보여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뿐입니다.”

서원은 그 말을 끝으로 마치 형량을 받을 죄인처럼 조용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자꾸 입 안이 바싹 말라 귀가 작게 움직일 정도로 침을 크게 삼키기를 여러 번이었다.

“왜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요? 내가 불편한 건 아니라면서요.”

“아…… 그건…….”

잠시 서원의 말을 곱씹던 남자는 조곤조곤하게 오류를 지적했다. 아까보다는 감정을 조금 덜어 낸 목소리지만 아직도 딱딱하다.

서원은 대답을 망설였다. 왜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가. 남자가 거기까지 캐물을 것 같다는 불안한 예감은 아주 보기 좋게 들어맞았다. 털어놓다 보니 결국 까뒤집어 밑바닥까지 보여야 하는 상황까지 이른 것이다. 이래서 거짓말은 꼬리를 물고, 꼬리가 잡힌 거짓말은 물린 자국을 따라 모든 게 드러난다 했던가. 서원은 입술에 힘을 주었다.

이런 모습을 누군가에게 직접적으로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실망시킬 것 같아서요.”

이렇게 되었다.

덜컥 긴장이 되었다. 손가락에 힘이 꾹 들어갔다.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린다. 서원은 주먹을 꽉 쥔 채로 말을 이었다.

“형님께서 최근 저에게 잘해 주셨던 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형님께서 저를 좋게 봐 주시는 이유가 제가 과외 일을 착실히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그래서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를 좋게 봐 주시는 게 기뻐서……. 네, 그에 부응하려고 하다 보니까 자꾸 말들이, 일들이 꼬였던 것 같습니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는가. 그 위에 물 한 병 더 쏟아낸다고 달라질 건 없다. 급기야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마침내 차가 멈춰 섰다. 서원은 번뜩 고개를 들었다. 어찌나 힘을 주고 있었는지 들어 올린 뒷목이 뻐근했다. 차가 주차된 곳은 호수 옆의 일식집 주차장이었다.

“밥 먹었어요?”

남자는 안전벨트를 풀면서 느닷없이 물어 왔다. 꼭 서원의 말은 듣고 있지 않았다는 듯한, 아주 새삼스러운 태도였다. 서원이 어리둥절한 채로 “네.” 하자 남자는 망설임 없이 다시 안전벨트를 맸다.

차는 호수를 끼고 조금 더 달려서 고즈넉한 분위기의 카페 앞에 섰다. 남자는 망설임 없이 차에서 내려 카페를 향해 걸었다. 서원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로 남자를 뒤쫓았다.

카운터 앞에 선 남자는 저를 뒤따라온 서원에게 “편한 데 앉아 있어요.” 했다. 혹시 제가 남자에게 했던 말들이 남자에게는 들리지 않았던 건가, 싶어질 만큼 태연한 태도에 무심한 목소리였다. 서원은 당황스러워하면서도 남자의 말을 따라 편한 데 앉았다. 카운터에서 주문을 한 남자는 잠시 후 서원의 앞에 앉았다.

남자는 의자에 앉자마자 입을 열었다.

“대화를 이어 가면 운전에 집중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요. …궁금한 게 있는데, 서원 씨는 그러니까, 그래서 나한테 담배 안 피운다고 거짓말한 거라는 거죠? 우는 얼굴 보여줬다고 사과한 거고.”

남자의 표정은 잠잠했으나 가지런한 이목구비 틈틈이 알 수 없는 초조함이 배어 있었다. 말소리도 그답지 않게 빨랐다. 남자는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려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마치 취조라도 당하는 듯한 느낌에 서원은 당황스러워하면서도 솔직히 답했다.

“……네.”

서원이 대답하자마자 남자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서는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얼굴을 감싼 손은 멈추지 않고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떨어져 나갔다. 뒤로 넘어간 앞머리가 자연스럽게 내려와 다시 남자의 이마를 애매하게 가렸다. 급기야 그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제 미간을 문지르며 짧게 웃는다.

“너 진짜 웃긴다.”

“……네?”

남자가 감탄사처럼 중얼거렸다. 혹시 제가 잘못 들었나 싶어 서원이 되물었을 때였다. 점원이 다가와 그들의 테이블 위에 음료 두 잔을 두었다. 그 사이 남자는 재차 나사 빠진 사람처럼, 혹은 실컷 사기당하고 난 뒤 넋이 나가버린 사람처럼 힘없이 웃었다.

점원이 “맛있게 드세요.” 하며 테이블을 떠나갔다. 그와 동시에 남자는 의자에 기대고 있던 몸을 서원 쪽으로 기울였다. 툭툭,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려 상대방을 제게로 집중시키며 “저기요, 서원 씨.” 한다.

무언가를 지적할 것처럼 단호한 목소리였다. 서원은 저절로 어깨를 움츠리며 더듬더듬 제 앞에 놓인 음료가 무엇인지 살필 정신도 없이 빨대를 쥐어 잡았다. 그냥 뭐라도 닿아 있어야 이 정신없이 돌아가는 상황을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네.”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서원 씨가 과외를 잘하든 말든 그런 거에 관심 없어요. 딱히 의식해서 서원 씨한테 잘해 준 적도 없고요.”

느닷없는 말에 당황한 듯 녀석이 눈을 꿈뻑였다. 가지런하고 흰 손가락이 더듬더듬 제 앞에 놓인 음료 잔을 감싸고 빨대를 쥐어 잡았다. 관찰하듯 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저 경직된 시선에 달리 부정적인 감정이 있는 게 아니라면, 이제 거칠 것도 없었다. 여태까지 강서원이 답답했던 이유는, 녀석의 태도가 일관되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분명 저를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은데 거리를 두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근데 그게 제 오해였다면 말이 달라졌다.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니었다면.

그냥, 경계를 허무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자그마한 동물이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것뿐이었다면.

생각하던 연우가 비로소 작게 웃었다. 그리고 느긋한 간격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게임을 했던 것도, 그냥 나는 서원 씨가 좋아하는 걸 같이 해 보고 싶었던 거였어요.”

“……?”

빨대의 움직임이 멈췄다. 유리컵 속에 생긴 작은 소용돌이를 따라 얼음과 레몬이 느리게 돌았다. 강서원의 눈이 크게 뜨인 채로 저를 바라본다. 연우는 테이블 위에 두 팔을 기대고 조금 더 깊숙이 얼굴을 앞으로 기울이면서 서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장난스럽게 군 것도, 서원 씨 웃는 모습을 계속 보고 싶었던 것뿐이고…….”

연우는 서원의 얼굴을 꼼꼼하게 살피면서 말을 이었다. 이마에서 턱 끝까지 훑어 내려간 시선이 다시 서원의 눈과 마주했다. 연우는 멀리까지 흘러간 의식의 흐름을 구태여 바로잡지 않았다. 그리고 무심코 “우는 걸 달래 준 건…….”까지 말하다가 멈추었다.

‘……우는 강서원?’

그는 별안간 버스 정류장에서 뚝뚝 눈물을 흘리던 얼굴을 떠올렸다. 울다가 픽 웃고 말았을 때 살짝 휘었던 눈가와 발그스름했던 피부가 눈에 선했다. 끝내 젖은 속눈썹까지 떠올리던 그는 다시 입을 열어 말을 이었다.

“그건, 조금 더 볼 걸 그랬네요.”

“…….”

“아무튼, 난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했을 뿐이에요. 서원 씨가 고용인으로서 마음에 들어서, 잘해 주고자 한 게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나열되었다. 그래서, 남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르겠다.

서원은 남자의 말을 수차례 곱씹다가 끝내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고 솔직하게 말했다. 말하는 목소리가 작았다. 좀체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손은 빨대 위쪽을 아무렇게나 접으면서 매끈한 플라스틱 위에 조잡한 자국을 만들었다.

선명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번뜩 서원의 고개가 들렸다. 장난을 꾸미는 소년처럼 은밀하고 천진난만하게 웃는 얼굴이 정면에 보였다. 유연한 모양을 그리고 있는 기다란 입술이 “내가 어렵게 말했나.” 하고 중얼거렸다.

“내가 굳이 취미에도 없는 게임을 했던 이유. 장난치면서 웃고, 서원 씨 웃는 얼굴 더 보고 싶어 했던 이유. 우는 것도 달래 주고, 나 불편하게 여기는 것 같아서 신경 쓰는 이유 말이에요.”

“…….”

이윽고 남자는 서원과 눈을 마주하면서 소곤거렸다. 서원이 눈을 깜빡였다. 조금 더 뚜렷한 목소리가 흐른 건 직후였다.

“내가 서원 씨한테 관심이 있어서라구요.”

“……?”

띵. 돌연 커다란 종소리가 머릿속에 크게 퍼지듯 진동이 울렸다. 단번에 빨대를 괴롭히던 서원의 손장난이 멈추었다. 눈이 튀어 오르는 것처럼 번뜩, 크게 뜨인다. 목줄기에 빠짝 힘이 들어갔다.

“…….”

눈에 끈끈이가 붙은 것처럼 마주친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대신 서원은 슬쩍 상체를 뒤로 물렸다.

등을 꼿꼿이 세우자 얼굴이 그늘로부터 벗어나고, 유리창 너머의 오후의 강한 햇빛이 시야에 번졌다. 속눈썹 위로 주황색 햇빛이 내려앉았다. 눈앞에 자그마한 먼지가 우주의 부유물처럼 동동 떠다닌다. 별안간, 다른 세계에 뛰어든 양 현실로부터 아득하게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꿈인가. 갑작스레 멀어진 현실감에 서원은 공연히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떠 보았다. 당연히도, 역시나, 과연, 같았다. 제 앞에 앉아 저를 보며 장난스러운 웃음을 입에 걸고 있는 남자. 강렬한 햇빛. 카페 소음. 저 멀리 앉아 있는 누군가의 오렌지색 머리. 큰 창. 돌아다니는 직원. 원두가 갈리는 소리. 커피 향기. 유리잔의 차가운 감촉.

다 같다. 꿈이 아니다. 현실이 맞다. 그 당연한 사실을 새삼스레 되새긴 순간 손바닥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관심, 이요?”

더하여 지금 자신이 할 말은 그뿐이라고, 서원은 고심 끝에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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