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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상을 입은 환자에게 주먹질을 해서는 안 됩니다, 노아.”
몹시 시무룩하니 풀이 죽은 노아에게 밀러 가의 주치의인 조세프가 근엄하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의 입가는 웃음기를 감추지 못하고 씰룩 거리고 있었다.
이안이 죽어가는 척을 한 게 너무나도 화가 나 주먹질을 하였으나 노아도 이안이 총상을 입은 걸 알고 있기에 있는 힘껏 주먹을 날리지는 않았다. …아마도? 조금 멍이 들고 말 수준의 주먹질인데도 이안의 몸이 축 처지더니 곧 정신을 잃은 걸 보았을 때 노아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무리 얄미워도 이왕이면 총상이 나은 뒤에 때려 주세요.”
조세프가 놀리는 말에 겨우 고개를 든 노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안은 괜찮겠죠?”
이안이 정신을 잃은 지 얼마 안 되어 바로 앰뷸런스가 달려왔고, 의료진들은 피범벅이 된 사람을 포함하여 사샤까지 모조리 태우고 병원으로 수송했다. 이안이 정신을 잃을 줄은 몰랐기에 놀라서 얼어 붙어 있던 노아는 응급 구조대가 응급처치를 아주 잘 했다면서 담요를 둘러주었을 때에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이안은 바로 수술실에 들어갔고 뒤늦게 소식을 들은 조세프는 세미나를 듣다 말고 다급히 병원으로 달려와 수술에 합류했다. 현재 이안은 수술을 마치고 회복 실에 들어가 있었는데 수술을 끝내자마자 조세프는 수술 경과도 알려줄 겸, 놀란 노아를 달래주기 위해 병실에 방문한 상황이었다. 노아의 몸에는 아무런 상처가 없었지만 몸 상태가 상태인지라 안정을 위해 일단 입원하기로 결정하였다.
“운이 좋게도 총알이 옆구리를 스치기만 했어요. 중요한 장기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으니 일주일에서 이주일 정도면 퇴원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게 옆구리를 스친 거라고요…?”
“……조금 심하게 스치긴 했죠.”
조금 심하게 스친 정도인데도 그렇게 피가 난다니 진짜 제대로 총을 맞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한 노아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노아가 임신한 상태임을 깨달은 조세프가 아차 싶어서 잘 다독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노아의 응급처치 덕분에 목숨이 위급한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어요. 아마 지혈을 하지 않았으면 위험했을 겁니다.”
수술도 성공적으로 잘 끝났으니 이제 안심하고 푹 쉬세요, 노아. 조세프가 다정하게 말하면서 노아에게 진정제를 놓았다. 진정제를 맞고 나서야 잔뜩 긴장해 있던 노아의 몸이 조금씩 풀어졌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피곤했던 노아가 눈을 비비며 약 기운 때문에 점차 무거워지는 몸을 억지로 뒤척였다.
“이안이 일어나면… 알려 주세요.”
“네, 알려 드릴 테니 좀 자세요.”
조세프가 재차 말했을 때에서야 노아가 눈을 감았다. 좀 자고 나서 이안을 보게 되면 고맙다고 해야지. 그리고, 또… 얼굴을 때려 기절시켜서 미안하다고도… 오직 이안에 대한 생각들만이 점차 실타래처럼 얽히는 가운데 노아가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
“…노아?”
“노아 님이 아니라서 죄송합니다. 몸이 안 좋을 때 죄송하지만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젠장, 제일 처음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게 귀엽게 울먹이고 있는 노아였으면 했는데 다니엘이라니. 이안이 인상을 잔뜩 쓰며 눈을 떴다. 아까 회복 실에서 마취가 풀린 뒤 몸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두어 번 의식을 차리긴 했지만 진통제를 한 가득 쏟아 붓는 바람에 다시 잠들고 말았다. 그리고는 눈을 뜨니 다니엘이 서있는 것이다.
잠시 뒤척이던 이안이 옆구리가 결리는 기분에 눈썹을 찌푸렸다. 진통제 효과가 좋아서 아프진 않았지만 영 불쾌한 기분이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총에 맞은 그대로야.”
지난 번 이안이 총에 맞았던 건 친척 때문이었다. 소송을 걸어 친척들 재산을 모조리 빼앗은 뒤에 갑자기 자신을 사냥에 초대해서 뭘 하려나 궁금해서 갔다가 사냥 총에 다리를 맞았다. 사슴인줄 알았다면서 빡빡 우기는 데 뭔가 할 줄 알고 형사 한 명을 친구인 것처럼 데려가서 다행이었지. 물론 법적으로 정당한 처벌을 받게 만든 뒤에는 이안이 개인적으로 손을 좀 봐주었다.
“현재 솔로브요프는 현장에서 체포 당해 병원에 입원 중입니다. 경비원이 발을 쐈다는 군요.”
“지금 그 자식 병원에 입원한 걸로 날 깨운 거야?”
몸 상태가 안 좋아지자 평소의 배는 인내심이 안 좋아진 이안이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상사가 성질을 부리는 걸 하루 이틀 본 게 아닌데다가 이안이 침대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기에 다니엘이 그저 헛기침을 하고 말았다.
“그게 아니라… 언론에 이번 사건이 알려지고 말았습니다. 그 자가 저택에 침입하면서 경비원 한 명을 죽이고 두 명에게 중상을 입혔다고 하더군요. 기사가 나는 걸 막을까요?”
“……”
이안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제 몸까지 다친 것도 오랜만인데 기사를 제대로 낸다면 회사 이미지는 물론이고 자신에게도 그럭저럭 괜찮을 것 같았다. 게다가 그냥 다친 것도 아니라 노아를 구하다가 다친 게 아닌가. 이런 일은 기록으로 남겨야지. 이안은 의사에게 옆구리의 흉터를 남겨달라고 할까 하는 고민까지 들 정도였다.
“일단 경비원들의 가족들에게 보상 좀 넉넉하게 해줘. 그리고… 기사는 이런 식으로 나면 좋겠군. ‘모 젊은 기업가의 희생적인 사랑, 불한당의 습격에서 배우자를 대신해 중상을 입다’… 뭐, 이런 식으로 괜찮지 않나? 그 외는 네가 알아서 잘 처리하라고.”
“…예, 알겠습니다.”
다친 상태로도 이안이 매우 의기양양해하는 걸 넘어 쾌활하기까지 하자 다니엘이 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노아를 대신해서 총을 맞기까지 하는 행동처럼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기 좋은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희생적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으로 러시아의 구세프라는 사람의 전언입니다.”
다니엘이 정중하게 요즘 시대에 안 맞게도 손으로 써서 보내온 카드를 건넸다. 다친 옆구리의 반대쪽 손으로 받아 조금 둔하게 카드를 열어 읽은 이안이 싱긋 웃었다.
“내 몫은 괜찮으니 그 쪽 마음대로 하라고 전해드려.”
구세프는 참으로 친절하기도 했다. 제 딸 율리아를 그렇게 만든 범인을 혼자서 요리하기도 부족할 텐데 이렇게 카드를 보내와 동참하지 않겠냐고 물어주기까지 하니… 그러나 이안은 노아와 함께 지내기에도 시간이 부족하기에 정중히 거절했다. 아마 드미트리는 어느 날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납치 되어 구세프와 함께 몹시 즐거운 나날을 보내게 되겠지…
용건을 모두 전한 뒤 다니엘은 혹시나 몸이 아프기까지 한 이안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 있을까 봐 회사 일은 자신이 성실하게 잘 처리하겠다면서 부리나케 사라지고 말았다. 꽤 적절한 선택이었다. 진통제 효과가 조금씩 떨어져가고 있었으니까. 간호사를 불러 조금 더 강한 진통제를 요구한 이안이 다시 고통이 가라앉는 걸 느끼며 왼뺨을 문질렀다. 총상 수술만 하고 얼굴은 치료를 안 해주었는지 노아에게 맞은 얼굴이 아직도 제법 얼얼했다.
진통제를 다시 맞자 잠이 쏟아져 이안이 눈을 부릅떴다. 안돼… 본의 아니게도 어쩌다가 깨어나 처음 본 얼굴이 다니엘이 되어버렸지만 두 번째로는 꼭 노아 얼굴을 봐야지. 젠장, 다니엘이 가기 전에 노아에 대해 물어보는 건데. 이안이 미간을 꾹꾹 문지르며 핸드폰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동안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노아인가! 이안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 어르신.”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두 번째로 보는 사람이 테너 프로스트임을 확인한 이안은 매우 실망했다. 테너 프로스트는 조금 어색하게 문병 선물로 보이는 상자를 협탁 위에 올려둔 뒤 헛기침을 했다. 이 커다란 프로스트 말고, 뭔가 노랗고 흰 프로스트를 보고 싶구나… 이안이 생각했다. 그리고 테너 프로스트는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한숨을 쉬며 겨우 입을 열었다.
“자네, 노아를 대신해서 총을 맞았다지.”
“네, 그렇습니다.”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어서 찾아 왔네.”
여전히 자네는 마음에 안 들지만, 그래도 덕분에 노아가 다치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말투는 좀 퉁명스러웠지만 이안은 테너의 목소리에서 진심으로 감사하는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이안은 좀 뜻밖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테너 프로스트와의 관계 개선은 생각도 안 해본 이득이었다. 드미트리의 총구가 노아의 등을 겨누고 있는 걸 보았을 때는 이것저것 따져볼 겨를 없이 노아를 밀치는 게 급했던 것이다.
테너는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나자 머쓱했던지 빨리 나으라는 말도 없이 도로 병실을 나갔다. 테너가 나가고 난 뒤 문병 선물로 뭘 사왔나 궁금해 상자를 들추어 보자 책이 한 권 들어 있었다. 제목은 ‘성격 파탄자들을 위한 대인관계 훈련서’. 아니, 그런데 이 영감이…
이안은 초조하게 노아가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문이 열릴 때마다 노아인가 싶어 반갑게 고개를 돌려도 미안하다면서 펑펑 울면서 들어온 사샤나, 혹은 이안의 건강을 체크하기 위해 찾아오는 의료진들뿐이었다. 심지어 미하일까지 찾아오고 나자 이안은 조금 기가 죽었다. 그 죽은 척… 했다고 노아가 많이 화 났나?
마침내 노아가 찾아온 건 이안이 기다리다 지쳐 조금 졸고 있을 때였다. 탁,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도 체념한 이안은 또 다른 방문객이겠거니 계속 졸았다가 손등을 스치는 감각에 눈을 떴다. 그리고 깜짝 놀라 몸을 벌떡 일으키다가 옆구리가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에 신음했다. 노아도 마찬가지로 놀라 이안을 얼른 잡았다.
“왜 갑자기 움직이고 그래요?”
“넌 왜 환자복을 입고 있는 건데? 어디 다쳤어? 몸 안 좋아?”
“아, 아니… 그게, 조세프가 오늘 많이 놀랐을 테니 혹시 모르니까 검사를 해보라고 우겨서 검사 좀 하고 오느라 늦었어요.”
뭐… 환자복도 잘 어울리니 괜찮네. 이안이 그렇게 생각하면서 노아를 잡아 끌었다. 툭툭 침대에 앉으라고 손으로 치자 노아가 고분고분하게 잘도 앉았다. 그러더니 흘깃 이안 얼굴을 보고는 환자복을 훌렁 들쳐 보았다. 거즈가 덮인 부분을 살살 만지다가 노아가 시무룩하게 입을 열었다.
“기절시켜서 미안해요…”
“음, 저기 노아. 오해하는 게 있어서 말인데… 나 죽은 척 한 거 아니야.”
좋아한다는 말을 듣기 위해 절호의 기회를 이용한 건 사실이지만 그 후에 태연하게 군 건 몸이 괜찮아서가 아니라 있는 힘을 쥐어 짜 태연한 척 한 것 뿐이었다. 노아가 너무 놀란 것 같기에 몸에 안 좋을 것 같아서. 다만 노아가 멱살을 잡고 주먹 따귀를 날릴 정도로 열이 받을 줄은 차마 몰라서 그렇지.
이안의 설명을 들은 노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 하더니만 부끄러웠는지 아니면 더 미안했는지 더 풀이 죽어서 애꿎은 시트를 쥐어 뜯었다. 물론 이안은 노아가 미안해 하는 게 좋았다. 자신을 좋아하는 것도 좋지만, 저렇게 자신에게 미안해 하는 것도 마음에 든다. 그럴수록 노아가 자신을 떠날 생각은 하지도 못할 것 아닌가?
상처를 건드리지 않게 노아를 살살 끌어 안으면서 이안이 미소를 지었다. 총 한 번 맞은 것으로 테너 프로스트와의 관계도 그럭저럭 풀렸고, 사샤 메르데프는 무엇보다 강력한 동맹이 될 것이며 사람들은 자신을 배우자를 열렬히 사랑하는 기업가로 볼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이득보다도 이안은 노아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것이 제일 기뻤다. 노아가 자신을 위해 울어준 게 가장 좋았다.
“노아, 다시 말해줘.”
“…… 뭘 다시 말해줘요?”
혹시라도 이안의 상처를 건드릴까 봐 실사 사이즈 인형이라도 된 마냥 얌전히 안겨 있던 노아가 되물었다. 이안은 환자복이라 훤히 드러나는 노아의 목덜미에 입술을 문질렀다. 노아가 움찔 몸을 떨었다.
“실망이야, 설마 그 때 날 좋아한다고 말했던 건 내가 죽어가니까 한 거짓말이었어?”
“거짓말일 리가 없잖아요!”
노아가 발끈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이안이 윽, 하고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자 놀라 얼어 붙었다. 이렇게 귀엽게 나오면 종종 총상을 입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하면서 이안이 소근거리면서 노아를 놀렸다.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 울지도 않았을 거잖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예전에 이혼하고도 남았다며? 결국 노아가 이기지 못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다 들었지만 신난 이안이 되물었다. 뭐라고, 잘 안 들려. 노아가 한숨을 쉬었다.
"좋아해요. 그러니까 좀… 그만해요."
붉어진 노아의 귀를 보며 이안이 웃었다. 좋아한다는 말로는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것으로 시작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노아는 제 입으로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이 이안을 떠날 수 없게 하는 구속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하지만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사랑해, 노아. 목숨을 걸고 지킬 수 있을 만큼.”
숨이 막힌 듯 노아가 가슴을 크게 부풀리다가 이내 아무런 말이 없어졌다. 몹시 기분이 좋은 이안이 노아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고 이 즐거운 시간을 즐기다가 눈을 깜박였다. 몸 상태가 좋지 않다 보니 자꾸만 잠이 밀려 들어왔다.
“피곤하지 않아? 좀 잘래?”
정말 피곤한 건지 아니면 화제가 바뀐 게 좋았는지 노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여전히 붉은 귀를 한 채 이안의 침대 위로 기어 올라왔다. 이안은 힘겹게 조금 몸을 옆으로 비켰다. 노아가 아주 조심스럽게 가슴 위로 팔을 올리자 이안이 도리어 노아를 꽉 끌어 안았다.
절대로 노아가 빠져 나갈 수 없을 그런 단단한 포옹이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