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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잠시 동안 멍하니 바닥에 떨어지는 피를 보고 난 뒤에서야 노아는 이안이 총에 맞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리를 적시는 이안의 피에 속이 울렁이며 메슥거려왔다. 이안이 몸을 경련에 가까운 정도로 들썩이며 신음 소리를 냈을 때서야 정신을 차린 노아가 떨리는 손으로 이안의 어깨를 잡아 눕혔다.
“세상에, 세상에…”
드미트리가 경비들에게 제압 당하고 난 뒤 이안과 노아를 뒤돌아 본 사샤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내뱉었다. 제 남편이 갑자기 이 저택에 총을 들고 나타나 사람을 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에 사샤의 얼굴은 죄책감과 두려움에 질식이라도 할 것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어디 봐봐요…”
피가 흐르는 건 보았지만 어딜 얼마나 다쳤는지는 가늠이 되지 않아 노아가 충격에 자꾸만 멍해지려는 정신을 추스르며 코트를 조심스럽게 들추었다. 이안이 끔찍한 고통에 이를 악물었고, 노아는 상처 입은 곳을 보고는 헉 하고 숨을 집어 삼켰다. 오른쪽 옆구리에서 셔츠를 축축하게 적시고도 모자라 흘러내려 바지까지 검붉게 적실 정도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젠장, 윽…!”
총을 맞은 상태에서도 성질은 여전해서 이안이 드미트리가 있는 쪽을 노려 보다가 다시 신음하며 숨을 거칠게 헐떡였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피가 흐르는 걸 보고 잠시 패닉에 빠진 노아가 몸을 떨었다. 드미트리를 완전히 제압한 경비원들 중 한 명이 황급히 이 쪽으로 달려 왔다. 고용인이 처한 상태에 경비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실례하겠습니다.”
말을 함과 동시에 경비원이 사샤가 두르고 있던 스카프를 풀어낸 뒤 이안의 상처에 둘러 꽉 감고는 피가 흐르는 곳을 눌러 지혈하려고 애를 썼다. 이안의 상처를 보는 경비원의 표정은 몹시 좋지 않았는데 노아에게는 그 표정 만큼이나 이안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처럼 보였다. 노아가 무의식 중에 도움을 구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병원까지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더라?
“노아…”
이안이 작은 목소리로 노아를 불렀다. 어쩔 줄 몰라 굳어만 있던 노아가 이안의 부름에 더듬거리며 이안의 손을 쥐었다. 그 손은 몹시도 차가웠다. 사람이 죽어가면 몸이 차갑게 식는다는데, 따위의 생각이나 들자 노아의 마음이 덜컹거렸다.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 정도로 이안의 얼굴은 굉장히 창백했다. 노아는 이렇게나 다친 사람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심지어 그 사람이 이안이라니… 자꾸만 아까 이안이 저를 밀치자 마자 총을 맞은 일이 떠올랐다.
“이, 이안… 괜, 괜찮아요?”
멍청한 질문을 하고 난 뒤 노아가 심하게 몸을 떨었다. 이안이 설마 죽는 건 아니겠지? 이안이 이렇게,… 이렇게 죽으면… 아니, 죽을 리가… 경비원이 스카프를 둘러 압박했는데도 불구하고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모습은 굉장히 끔찍했다. 패닉에 빠져 거의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던 노아가 이안의 손만 꽉 쥐고 있자 숨을 헐떡이며 그런 노아의 모습을 바라보던 이안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내가…”
“네?”
이안이 뭐라고 말하려고 하기에 노아가 울먹이면서 귀를 기울였다.
“..그래도, 내가… 고양이보단 낫네… 네가 우는 걸 보니…”
이안의 말에 노아는 그제서야 제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노아가 겁에 질려 입술을 떨었다. 갑자기 무슨 고양이 이야기야, 대체… 어떻게 해… 출혈이 너무 심한가 봐. 이안이 헛소리를 하잖아…
불안하고 초조해 죽을 것 같아 몸을 덜덜 떨면서도, 경비원이 병원에 연락하면서 한 편으로는 상처를 지혈하려는 모습을 보자니 문득 노아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마치 누군가 정신차리라고 머리에 급작스럽게 머리에 던져 넣은 것 같은 기억에 노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이안의 상처가 심해 그 누구도 그런 노아를 신경 쓰지 않았다. 유일하게 노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던 이안이 힘겹게 노아, 하고 이름을 불렀을 뿐이었다.
노아는 조금 비틀거리면서도 최대한 빠른 속도로 저택에 뛰어 들어갔다. 워낙 급작스러웠던 일이라 아직 밖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고용인이 노아의 몸에 묻은 피에 짤막하게 소리를 질렀다. 노아 님! 비명과도 같은 그 부름을 무시하며 노아가 곧장 침실로 달려 들어가서는 서랍을 거칠게 열었다. 안을 뒤져 피부 재생 연고를 찾아낸 노아가 더듬거리며 제가 찾으려던 물건을 손에 집어 들어 방을 뛰어 나갔다. 최대한 빨리 뛴다고 뛰었는데도 오늘따라 몹시도 발이 무겁고 이안에게 향하는 길이 한없이 길게만 느껴졌다.
“잠시만요, 잠시만…!”
갑자기 저택에 들어갔다 돌아온 노아가 자신을 밀어내자 무슨 일인지 몰라 당황하던 경비원이 손에 들린 물건을 보고는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노아는 심하게 떨리는 손으로 다시 스카프를 풀어 내고는 이안이 셔츠 단추를 황급히 풀었다. 피가 잔뜩 젖어 질척이는 셔츠자락을 들추고 난 뒤 피가 줄줄 흘러나오는 검붉은 상처를 보자 심장이 쿵 가라앉았다.
“노아…? 뭘 하려는 거야?”
이안이 고통에 빠득 소리가 나도록 어금니를 악물면서 물었다. 거친 숨소리가 불안하게 들렸다. 바닥에 흘린 피가 너무나도 많은 것 같아 노아가 다시 손을 떨다가 이내 아무 말 없이 손에 든 재생 연고의 뚜껑을 열었다. 한 눈에 봐도 이안이 흘린 피의 양은 심상치 않은 수준이었다. 노아는 의사가 아니라 어느 정도가 위험 수준인지는 잘 몰랐지만 이렇게 계속 피가 흘러 나오게 둔다면 과다출혈로 위험해진다는 것쯤은 알았다.
연고를 손에 쥐긴 했으나 다른 사람의 상처에 뭔가를 쑤셔 박는다는 게 무서워 머뭇거리고 있다가 이안과 눈을 마주친 노아가 마음을 굳혔다. 평소에 아주 선명하던 이안의 눈이 점차 흐려지다 못해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으니까. 노아가 떨리는 손을 꽉 쥐며 천천히 이안의 상처에 연고 끄트머리를 밀어 넣었다.
천천히 밀어 넣었는데도 이안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직이자 경비원이 이안을 잡아 눌렀다. 노아는 겨우 손가락 한 마디 정도만 넣었는데도 벌써 손에 땀이 흥건했다. 그대로 연고를 꽉 눌러 짜내자 상처 위로 흰 연고가 뭉글뭉글 번졌다.
“악, 젠장, …흐윽, 빌어먹을!”
어지간히 아팠는지 이안이 욕설을 내뱉었다. 하지만 노아가 연고를 최대한 다 짜내자 고통에 지쳤는지 이안의 몸부림이 잦아 들었고, 흰색이 분홍색이 되도록 피가 연고를 적시긴 했지만 적어도 더 이상 흥건해질 정도로 흘러나오지는 않았다. 어쨌든 지혈은 된 것이다. 경비원이 조금 놀란 시선을 보냈다.
“이 방법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하하…”
지혈이 된다는 사실 자체에 지나치게 안도한 노아가 힘 없는 웃음 소리만을 흘렸다. 피부 재생 연고가 지혈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건 Tear에서 본 적이 있어 잘 알았다. 룸 안에서 대체 무슨 짓들을 하는 건지 Tear에서는 종종 몸에서 피를 줄줄 흘려대며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럴 때면 Tear의 직원이 얼른 달려와 피가 나는 곳에 피부 재생 연고를 들이 밀곤 했다.
상처에 연고를 바르고 나면 상대방은 종종 고통에 거의 어린애처럼 엉엉 울 정도로 괴로워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에 비례해 지혈은 확실히 되었던 걸 노아는 몇 번 봤다. 그 고통을 주려고 가끔 일부러 피가 나도록 스팽킹을 가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원래 피부 재생 연고 자체가 멍 따위를 없애는 미용을 위한 ‘피부 재생’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물건이 아니다. 본래는 전쟁터에서나 급한 환자에게 쓰는 약을 다시 미용 목적으로 개발해서 낸 것이었다.
“이안, …이안?”
출혈은 멈췄다지만 이안이 말이 없자 노아가 덜컥 겁이나 조심스럽게 이안의 팔을 흔들었다.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는 모습에 떨리는 손을 뻗어 뺨을 잡자 완전히 창백해진 얼굴로 이안이 눈을 떴다. 지혈이 제대로 안 되었나…? 어쩔 줄 몰라 하며 시선을 돌리자 아까처럼은 아니지만 상처에서 피가 한 두 방울 주륵 흘러 내리는 게 보였다.
“다른 약을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지혈이 완벽히 되지 않은 걸 확인한 경비원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달려갔다. 서랍에 연고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노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이안이 제 손을 잡고 놔주지를 않자 차마 일어설 수가 없었다.
“사샤, 부부침실에서 서랍에 혹시 이런 재생 연고가 있으면 가져와 주겠어요?”
“아… 네, 네!”
그 때까지 넋을 놓고 노아가 이안을 지혈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사샤가 황급히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고 달려 나온 하이든이 피투성이인 이안과 노아의 모습을 보고는 오, 맙소사…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나 노아는 지금 하이든을 신경 써 줄 수가 없었다.
“노아, 노아…”
금방이라도 죽을 사람처럼 이안이 희미하게 노아를 불렀다. 네에, 하고 대답을 하면서도 노아는 누가 제 머릿속을 흰색으로 칠을 해 놓은 마냥 대답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피를 많이 흘리면 어떻게 죽더라? 쇼크 때문이던가, 아니면 심장마비? 이미 출혈은 거의 멈췄는데도 이안이 도통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노아의 숨도 거칠어졌다.
“…노아, 나… 날 좋아해?”
“왜 그런, 그런… 질문을 해요?”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등장인물들이 많이들 죽기 직전에 누군가에게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고들 말했지만 노아는 지금이 절대 그런 상황이 아니길 바랬다. 이안은 고통을 참기 위해 눈을 질끈 감으며 헉, 숨을 쉬고는 간헐적으로 헐떡였다. 그리고 어디서 나온 힘인지 노아의 손목을 꽉 쥐며 물었다.
“나, 좋아하냐고… 조금이라도 좋아하냔 말이야…”
지금이 아니면 못 들을 사람처럼 이안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에 집착하자 불안해진 노아가 이안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안은 얼굴은 몹시 창백한 채로도 노아의 대답을 기다리며 강렬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결국 노아는 이안의 그 시선을 견디지 못했다.
“좋아해요, 좋아한다고요! 내가 이안을 좋아하지 않으면 이렇게… 이렇게 하고 있겠어요?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예전에 이혼하고도 남았어요. 그러니까 그런 질문은… 좀…”
목이 메이는지 노아의 목소리가 잠겨 들었다. 이안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했었을 때에도 노아는 이안의 말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안이 이렇게 저 대신 총을 맞아 누워 있는 모습을 보면 그 누구도 차마 이안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안이 이렇게 거의 죽어가는 걸 보는 제 마음이 이렇게나 고통스러운데 어떻게 자신이 이안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그 순간에서야 노아는 동시에 어렴풋이 깨달았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는 하등 중요하지 않은 것이지만, 제가 지난 번 이안이 사샤에게 잘해 준 걸 보았을 때 기분이 좋지 않았던 건 질투를 했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질투란 누군가를 좋아해야 가능한 것이었다. 노아 프로스트는 이안을 좋아했다. 희미하게나마 알고 있던 것이 이제는 낙인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노아의 대답에 이안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거면… 됐어.”
그 말에 소스라치게 놀란 노아가 이안의 손을 쥐며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마치 그 말이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으니 이제는 만족했다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거면 됐다고 말한 이안이 낮게 숨을 쉬며 눈을 감는데 그 모습이 마치, 마치…
가슴이 내려 앉는 정도가 아니라 심장이 멎는 것 같아 정신을 잃지 말라는 말을 하며 눈물을 와르르 쏟아낸 노아가 다시 몸을 흔들려는데 창백한 얼굴로 잠자듯이 느리게 눈을 감았던 이안이 도로 눈을 떴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키는 게 아닌가. 노아가 눈을 크게 떴다.
“윽, 총을 처음 맞아본 건 아니지만… 여전히 되게 아프군. 아니,… 이번이 더 아픈 것 같은데.”
“어… 어…”
언제 죽어갔냐는 듯 이안이 몸을 번쩍 일으키자 흘리던 눈물도 뚝 멎을 정도로 노아가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적어도 이안은 아까와는 달리 죽어가는 것처럼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안은 쯧 혀를 차면서 진정하라는 듯 노아의 등 낮은 언저리를 쓰다듬어 주기까지 했다.
“너무… 놀라지 마, 몸에 안 좋아.”
“안… 아파요? 상처가…”
“총을 맞았는데… 당연히… 아프지.”
그렇게 말한 이안이 연고 효과가 굉장히 좋으니 어쩌니 하면서 지껄였다. 노아는 멍하니 지난 번 다리를 맞았을 때보다 더 아프다며 이안이 떠드는 걸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들었는데, 조금씩 시간이 지나자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방금 죽어간 척 한 거, 연기한 거였어요?”
“무슨 소리야, …연기한 거라니. 그 연고는 정말 빌어먹게 아팠다고...”
“나를 좋아하느니 어쨌느니… 이상한 질문에다가 그런 얼굴을 해서는…”
누가 봐도 방금 이안은 다 죽어가는 사람처럼 보였었다. 눈을 감았을 때 노아는 이안의 숨이 멈춘 줄로만 알 정도였다. 하이든조차 이안이 노아에게 자신을 좋아하느니 어쨌느니 하는 질문을 할 때에는 휘청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지 않았나. 노아가 주먹을 말아 쥐며 몸을 부들부들 떨자 이안이 태연하게 지껄일 때는 언제고 노아? 하고 좀 불안하면서도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노아는 이안의 말이 전혀 귀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화가 난 상태였다.
“할 게 없어서 죽는 척을 해? 이 나쁜 자식아!”
아무 생각도 못할 정도로 몹시 겁에 질리고 두려워서 울었던 만큼이나 아무것도 눈에 뵈지 않을 만큼 순간적으로 머리 끝까지 화가 난 노아가 멱살을 잡고 이안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