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화 (97/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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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서 노아는 오늘 사샤가 무엇을 했는지 궁금했다. 요 며칠 내내 ‘사샤, 카페, 이안’ 이렇게 세 개만 내내 생각하고 있으니 안 궁금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제가 오해를 했다는 것이 부끄러워 노아가 머뭇거리고 있는 동안 기어코 노아에게 다시 식기를 쥐어준 이안이 노아의 대답도 듣지 않고 오늘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드미트리가 갑자기 회사에 방문했던 일 이후로 사샤 메르데프가 제 저택에서 머무르고 있었다는 걸 안 날, 이안은 드미트리에 대해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메르데프에 대한 드미트리의 집착이나 회사에서 드미트리가 제게 보여줬던 악의는 대수롭지 않게 넘길 만한 것이 아니었다.

 비록 이안이 드미트리의 생사를 결정 할 수 있을 정도로 치명적인 약점을 쥐고 있다 하여도, 궁지에 몰린 드미트리가 배째라는 식으로 나오면 꽤 골치 아픈 일이 될 것이다. 이안이 왜 드미트리에게 숨쉴 여지를 주었겠는가. 고작 광산과 자금을 조금 더 빼앗고 만 것은 쥐도 구석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법을 알기 때문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지금의 이안은 완전히 잡아 먹기 전에 쥐를 가지고 노는 것 뿐이었지만… 이제는 놀이는 끝낼 때가 되었다.

 “저, …저와 대화하고 싶은 게 있으시다고요.”

 서재 문을 노크한 뒤 사샤가 서재로 들어왔다. 들어 오세요, 사샤 양. 이안이 보고 있던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어 친절하게 권했다. 사샤는 몹시 긴장한 얼굴로 쭈뼛쭈뼛 걸어와 이안이 권한 소파에 앉았다. 하이든이 들어와 테이블에 차를 따라 놓고는 도로 조용히 나갔다. 자리에서 일어나 사샤 맞은 편에 앉은 이안이 입을 열었다.

 “굳이 돌려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얼마 전, 솔로브요프가 제 회사로 찾아와 당신을 내놓으라 하더군요.”

 이안의 말에 사샤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렸다. 

 “당시에는 정말로 제 저택에 손님이 와 계신지 몰라 모르는 일이라고 했습니다만, …진정하세요. 아마 노아가 메르데프 양을 데려온 것을 알았어도 그 자에 대한 제 대답은 똑같았을 겁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신사적인 이안의 태도와 말에 사샤가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죄송해요, 하고 말하긴 했지만 적어도 그렇게 몹시 두려워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이안도 사샤 메르데프가 그렇게 겁에 질리는 걸 바라지 않았다.

 이제까지 이안이 사샤에게 제 성격과 맞지 않게도 친절하게 대한 것에는 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노아가 사샤에게 큰 호감을 품고 있는 것도 이유였지만 드미트리 때문에 알파에게 일종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사샤가 이안 자신을 경계하게 되면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사샤 메르데프는 앞으로 이안의 좋은 아군이 될 수 있는 여자였으니 최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둘 필요가 있었다.

 “당신도 그 자와 살아봐서 알겠지만, 솔로브요프는 위험하고 끈질긴 인간이죠. 게다가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 남편은 러시아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에게 원한을 샀습니다. 메르데프 양이 프랑스로 출국한다 한들 완전히 안전해지는 게 아닙니다. …러시아 마피아들의 복수대상에는 아무런 죄도 없는 가족들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쯤은 아실 테죠.”

 이안의 말에 사샤는 거의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 사람이… 마피아에게 원한을 샀다고요? 가엾게도 바들바들 떨리는 사샤의 목소리에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단지 사샤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사실을 말한 것이다.

 지금이야 러시아의 권력자 구세프의 딸 율리아를 건든 증거인 동영상을 이안이 가지고 있긴 했지만, 사실 구세프가 앞으로 드미트리가 제 딸을 윤간하여 미치게 만든 죽일 놈이 드미트리임을 알게 되는 건 시간 문제였다. 트라우마로 정신이 나간 사람이 언제 제정신으로 돌아올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고, 제가 돈을 주고 율리아의 동영상을 샀으니 다른 사람도 그러지 못하라는 법도 없었다. 아주 멍청한 짓을 저질렀지, 이안이 속으로 드미트리를 비웃었다.

 이안의 말을 들은 사샤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절망적인 미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흐느꼈다. 이안은 잠시 사샤가 조금 우는 것을 듣다가 너무 그녀가 지나치게 감정적인 상태가 되기 전에 제지하며 입을 열었다. 

 “…메르데프 양, 당신은 당신 남편을 조금이라도 좋아합니까?”

 “그,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 사람은 제 인생을 지옥으로 만든 악마라고요.”

 “그렇다면 얼마나 그를 증오합니까? 당신 남편이 죽어도 상관 없을 정도 입니까?”

 이안의 나지막한 말에 흐느끼던 사샤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 때문인지 이상하게 반짝이는 눈으로 한동안 이안을 바라보던 사샤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인이 되자마자 드미트리에게 팔려오듯 결혼한 지 거의 1년에 가까운 시간, 사샤는 매일매일을 드미트리를 혐오하고 증오하였으며, 또 단 하루도 두려워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 자에게서 영원히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하시겠습니까?”

 “…무…슨 방법인가요? 뭐든지 하겠어요.”

 몸을 떨면서도 사샤가 단호하게 말했다. 사샤는 얼마든지 자신의 손으로 드미트리를 파멸의 구덩이로 밀어 넣을 결심이 되어 있었다. 혹은, 그보다 더한 것이라도. 드미트리와 함께 살면서 그녀는 단 하루도 인간답게 산 적이 없었다. 드미트리는 언제나 사샤를 짐승보다도 못한 취급을 했었다.

 이안이 내심 속으로 웃었다. 누군가는 복수에는 남는 것이 없다고들 하지만 그건 다 헛소리에 불과했다.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인생을 망치다 못해 갈기갈기 찢어 놓았는데도 그걸 인내하고 용서하기만 하는 것은 머저리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남들은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이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번 주 토요일, 3시. 14번가 거리에 있는 카페 그랑프리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솔로브요프가 나타날 겁니다.”

 이안이 사샤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샤는 심호흡을 하면서 이안의 설명을 귀담아 들었다.

 “그 카페에는 제가 미리 불러 놓은 기자와 나중에 증인이 되어줄 몇몇 사람들이 있을 텐데, 그 곳에서 당신이 할 일이 …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일인가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솔로브요프에게 맞아 주십시오.”

 사샤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이안은 침착하고 담담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당신은 최대한 그 자를 나쁘게 보이도록 만들기만 하면 됩니다. 드미트리의 이름을 한 번 이상 언급 하시고, 그를 화나게 만들어 당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다른 사람 앞에서 보여야 합니다. 가능하면 눈에 보이는 곳을 맞는 게 좋겠군요. …할 수 있겠습니까, 메르데프 양? 많이 어렵다 싶으면 굳이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안은 솔직히 사샤가 못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폭력이란 것은 맞아본 사람만이 그 두려움을 아는 법이다. 그가 사샤에게 이런 연극을 하도록 ‘부탁’하는 것은 많이 성가시지만 그래도 일을 좀더 수월하게 만들고 싶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사샤 메르데프의 목숨을 보다 안전하게 만드는 방법이기도 했고… 메르데프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노아의 마음도 편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나 사샤는 굳게 다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떨리는 목소리로 사샤가 태연한 것 처럼 말했다.

 “그 남자를 영원히 제 인생에서 사라지게 만들 수 만 있다면 좀 맞는 것 쯤이야 문제 없어요. …오히려 이 기회에 못했던 욕이나 실컷 해주죠. …그럼, 그 것만 하면 되는 건가요?”

 “거기까지 하고 나면 남은 단계가 하나 있습니다. 아주 중요하면서 간단한 일이기도 합니다.”

 사샤가 무엇이냐는 듯 잔뜩 긴장한 얼굴로 바라봤다. 이안이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으로 당신이 다음 날 비행기를 타고 러시아에 가면 영원히 그 남자에게서 벗어 날 수 있습니다.”

 “러시아… 말인가요?”

 만약 이안이 율리아 구세프에 대한 동영상을 그냥 구세프에게 보내 버리면 귀찮은 남자가 하나 사라지긴 해도 이안에게 있어 별 다른 이득은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사샤 메르데프가 증인은 물론이고 기자까지 있는 카페에서 남편에게 폭행 당하는 모습을 목격 당하고 나면 이야기는 좀 달라지게 된다.

 카페에 있는 기자는 당연히 드미트리 솔로브요프라는 러시아의 한 부자가 스무 살이나 차이 나는 어린 아내를 폭행한 것을 기사로 낼 터였다. 1면까지는 아니어도 2면이나 3면 정도에 실릴 정도의 비중으로 솔로브요프가 전에 몇 명의 아내를 두었는지, 그리고 그 아내들이 하나 같이 얼마나 심각하게 폭행을 당해왔는지 언급하겠지. 아마 이안이 부탁한 대로 사샤 메르데프란 피해자의 불쌍한 인생을 부각해서 기사를 써낼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시간에 맞추어 경찰이 달려와 드미트리를 제지하면 사샤 메르데프는 피해자 보호를 위해 잠시 친구인 노아 프로스트의 저택에 들렸다가 다음 날 러시아로 출발해 구세프에게 바로 향할 예정이었다. 그 뒤에는 구세프의 딸 율리아와 비슷한 나이대의 사샤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어려 보이는 복장과 모습으로 가엾게도 드미트리에게 맞은 멍이 채 가시지도 못한 채 러시아의 왕족이나 다름 없는 권력자이자 러시아 마피아의 수장과 의형제를 맺은 자인 구세프에게 만나기를 청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샤가 율리아 구세프의 동영상을 구세프에게 전달하면 모든 게 끝이었다. 모든 건 다만 사샤가 연기만 잘해 주면 되는 일이다. 구세프에게 동영상을 주면서, 드미트리 솔로브요프의 저택에서 발견했다고… 차마 끔찍해 처음만 보고 말았지만 같은 피해자로써 부모인 당신에게 알릴 수 밖에 없었노라고 말하면 된다. 자신의 딸처럼 드미트리에게 불쌍하도록 당한 사샤 메르데프가 직접 증거를 들고 찾아와 범인을 알려주기 까지 했으니 구세프가 동정을 품으면 품었지 원한을 품을 리는 없었다. 그럼 자연히 사샤가 러시아 마피아에 처리되는 일도 사라진다.

 자연스럽게 드미트리는 구세프에 의해 처리될 것이고 드미트리가 사라지면 그의 아내인 사샤는 자연히 첫 번째 상속자로서 드미트리건 마피아건 간에 아무런 위협 없이 모든 재산을 물려 받게 된다.

 이안이 광산을 빼앗았어도 여전히 드미트리의 재산은 많았다. 그럼 이안에게는 사샤 메르데프라는 썩 괜찮은 동맹이 생기는 셈이었다. 안 그래도 러시아로 진출하려는 계획이 있었으니… 이안의 설명을 듣고 사샤 메르데프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부터는 노아가 들은 데로, 아주 오해만 살만한 이야기가 오고 갔던 것이었다.

 “아… 이야기가 그렇게 된 거군요.”

 “그래. 데이트 신청 같은 게 아니었다고.”

 결혼 초기, 저택에 드미트리 솔로브요프가 손님으로 왔을 당시 노아는 내내 율리아 구세프의 동영상이 무엇인지 궁금해 왔는데… 딱히 듣기에 즐거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래서 이안이 노아에게는 이야기를 삼간 것이었고. 임신한 사람이 들어서 좋을 일은 없었으니까.

 “오늘 듣자 하니 아주 연기를 잘 해준 모양이야. 아마 내일 신문 기사는 볼만 할 걸.”

 “그럼 사샤 양은 지금 러시아에 가 있는 건가요?”

 “응. 하루 이틀 정도만 머물러 있다가 구세프에게서 안전을 약속 받으면 돌아올 거야.”

 이 모든 일을 계획한 대신 사샤에게서 솔로브요프의 재산 중 일부를 받기로 한 것에 대해서는 쏙 감춰 버리며 이안이 의기양양하게 말하고는 노아가 자신의 유능함에 대해 뭐라 칭찬이라도 하길 바라며 빤히 바라보았다.

 이 일을 진행하는데 있어서 단지 노아 프로스트가 사샤의 친구 관계라는 것 외에 자신이 개입했다는 증거를 없애는 게 얼마나 성가셨는지 모른다. 제가 동영상을 구입한 드미트리의 심부름 꾼들에게 또 돈을 주어 입을 맞추도록 해야 했고, 기자도 하나 불러다가 카페에 얹어 놔야 한 데다가 사샤가 최대한 가련한 피해자로 보이도록 코디네이터도 부르도록… 다니엘에게 일일이 지시해야 했으니까!

 이안의 기대대로 와아… 하면서 노아가 입을 조금 벌렸다.

 “이안, 되게… 악당 같아요…”

 “뭐?”

 그 말에 이안이 미간을 구겼지만 노아는 그러거나 말거나 진심으로 감탄하는 얼굴을 했다. 지난 번에 드미트리 솔로브요프를 가차없이 뭉개버릴 때도 생각한 거지만 정말 이안은 성격 한 번 참 아름다웠다. 그게, 드미트리 같이 짐승만도 못하다는 의미에서 못 되었다는 게 아니라 무슨 히어로 영화에서 나오는 매력적인 빌런 같은 느낌으로… 아, 그게 그건가? 그럼 좋게 봐줘서 안티 히어로쯤? (*안티 히어로 : 정의를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신념을 위해 법과 도덕을 어기는 영웅)

 “난 사업가라고. 이득이 나오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단 말이야.”

 어쨌든 이안은 악당 같다는 말에는 부정하진 않았다. 사실은 노아가 제 성격이 좋지 않다고 말하건 말건 이안은 몹시 기분이 좋았다. 분명 자신이 보건 데 노아는 사샤에게 질투를 한 게 틀림 없었으니까… 그리고 질투란 것은 좋아하는 마음이 있어야 가능한 감정이 아닌가. 어쨌든 노아가 자신을 최소한 자신을 좋아하기는 한다는 걸 간접적으로 확인한 것뿐인데도 이안은 몹시 만족스러웠고 또 기뻤다.

 안 그래도 내심 그 동안… 테너 프로스트가 한 말이 마음에 걸렸던 차다. 애정을 잘 안 준다는 둥, 14년이나 키워온 고양이가 죽어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렸다는 둥… 그래서 이안은 당분간은 노아도 자신을 좋아하는 건 거의 체념한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고양이가 14년이면 그럼 난… 10년쯤이면 되려나,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던 터라 체면 상 겨우 활짝 웃진 않았어도 굉장히 기분 좋은 얼굴을 한 이안이 권했다.

 “연어 파피요트 내오라고 할까?”

 대놓고 성격 안 좋다 하였는데도 이안이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걸까 의아해하면서도 노아가 약간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오해한 걸 이안이 놀리지 않으니 부끄러움도 좀 가셨다. 자꾸만 마음 속에서 어떤 생각이 고개를 쳐 들었지만 연어 파피요트가 곧 나와 노아는 곧 그에 대한 생각은 사라지고 말았다.

***

 이안의 말대로 다음 날에는 신문에 ‘가정 폭력, 과연 이래도 되는 것인가?’ 라는 타이틀로 D모 러시아 남성이 대낮에 카페에서 아주 어린 아내를 폭행한 일에 대해 기사가 떴고, 이틀 뒤에는 사샤가 러시아에서 돌아왔다. 얼굴에 아직 멍 자국이 남아 있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얼굴이 제법 밝았다. 구세프를 찾아간 일이 잘 풀린 모양이다.

 “정말 감사 드려요. 두 분이 아니었으면 전 아마 어떻게든 죽은 목숨이었을 거에요. 이 은혜 평생 잊지 않을게요.”

 이제는 정말 드미트리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쁨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사샤가 연신 감사를 표했다. 확실히 언론에서도 드미트리의 소행이 알려졌고, 이제는 구세프까지 율리아를 그렇게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으니 드미트리를 영영 보지 못할 날은 머지 않은 듯 했다. 사샤는 러시아로 돌아가도 괜찮겠지만, 그 곳에서 안 좋은 기억이 너무 많아 원래대로 프랑스로 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정말 그 사람을 다신 볼 수 없게 되는 걸까요?”

 “글쎄, 내가 알기로는 구세프가 그 사건 때문에 굉장히 열이 받아 있었으니…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며칠 내로는 곧 그렇게 될 겁니다.”

 적어도 드미트리는 아직 구세프가 율리아의 동영상에 대해서 안다는 걸 모르니 도망칠 기회도 없을 것이었다. 사샤가 그 말에 눈물 어린 얼굴로도 활짝 웃었다. 그 누구도 드미트리가 곧 맞이할 불행한 운명에 대해 불쌍해 하는 사람은 없었다.

 외가에서 하루 빨리 손녀 딸을 보고 싶어 했기 때문에 사샤는 점심 만찬만을 함께 한 뒤 공항으로 가기로 했다. 제법 화기애애하고 즐거운 점심 시간에 후식까지 완벽하게 마무리 한 뒤 노아와 이안은 저택에 가장 오래 머무르다 간 손님을 마중하러 나왔다. 리무진이 미리 공항으로 떠나는 사샤를 대기하고 있었다. 

 “다음에 또 뵐게요.”

 “사샤가 있는 동안 정말 즐거웠어요.”

 노아가 진심 어린 말을 하며 사샤를 다정하게 한 번 폭 안아 주었다. 1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그 모진 학대를 받으면서도 이렇게 씩씩한 걸 보니 사샤는 앞으로도 퍽 잘 지낼 것 같았다. 약간 훌쩍거리면서 노아를 꼭 끌어안은 사샤가 이안과는 정중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조금도 그 어떤 흠모나 애정의 기색도 없는 예의 바른 인사였다. 노아가 또다시 지난 번 오해했던 자신을 떠올리며 조금 귀를 붉혔다.

 “프랑스에는 거의 놀러 간 적이 없는데, 다음에는 프랑스에서 만나면 좋겠네요.”

 “얼마든지 환영이랍니다.”

 활짝 웃으며 사샤가 말했고, 노아가 프랑스에 가는 건 어떠냐고 이안을 바라보았더니… 이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노아가 조금 움찔했다. 나 혼자 놀러 간다는 게 아니라 이안과 같이 간다는 이야기였는데, 별로인가? 그런데 어지간히도 별로인 모양이었다. 이안이 갑자기 노아를 거칠게 밀어 넘어트려 노아는 세차게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넘어지고 말았다.

 이안이 제게 한 짓에 노아가 놀라 휘둥그렇게 눈을 뜨고 올려다 보는데 바로 후에 탕, 하고 허공을 울리는 총 소리가 울렸다. 노아가 깜짝 놀라 퍼득 몸을 떨었다.

 “이 개 자식들! 죽일 년 놈들!! 내가 다 짜고 치는 걸 몰랐을 줄 알아?! 더러운 종자들 같으니라고…!”

 순간 멍한 노아가 몸을 움츠리며 들려오는 욕설에 뒤를 돌아보자 드미트리가 총을 이쪽으로 겨누며 침을 튀기면서 악을 쓰고 있었다. 눈이 시뻘겋게 충혈 되어 옷 차림은 마구 흐트러진 게 마치 미친 사람과도 같았다. 노아는 멍하니 드미트리가 제게 총을 겨누는 것을 바라보았다. 

 “안 돼!”

 사샤가 비명을 지르며 뛰어 들어 가로막자 놀랍게도 드미트리가 잠시 멈칫거렸다. 그 사이 다행히도 총 소리를 듣고 달려온 경비가 드미트리의 팔을 쏴서 맞추고, 테이저 건을 발사해 제압했고, 사샤가 비틀거리며 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 모든 상황을 눈만 깜박이며 바라보던 노아가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다리 위가 뜨끈한 액체로 젖어 들어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리니 이안이 비틀거리며 제 위로 쓰러지고 있었다. 노아가 이안? 하고 작게 부르자마자 바닥 위로 붉은 피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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