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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가 대뜸 친구를 며칠 간 여기 초대해도 되냐고 물었을 때부터 이안은 이상한 낌새를 알아 차렸다. 노아에 대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노아에게는 친구나 지인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집에 초대할 만한 친구는 고작 네 명 정도였다. 그 네 명 중 둘은 유부남 유부녀고, 하나는 외국에 있으며 하나는… 그 놈의 제임스 프레넷이었다. 하지만 제임스 프레넷일리가 없으니 절대 친구는 아닐 터였다.
하지만 제임스 프레넷과는 전혀 연락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이안이 의심만 하고 있던 날이었다. 노아가 뜬금없이 그런 질문을 하고 난 뒤 이틀 뒤 이안이 업무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난처한 얼굴로 다니엘이 찾아왔다.
“회장님, 현재 드미트리 솔로브요프 씨가 아래층에서 회장님을 뵙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드미트리가 얼마나 성가시게 굴던지 짜증이 다 나려던 참이었다. 물론 자신 같아도 그런 광산에 다른 것까지 빼앗기면 많이 열이 받겠지만… 빼앗긴 건 드미트리지 자신이 아니었다. 이 참에 드미트리를 좀 해결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안이 다니엘에게 말했다.
“그렇게 나를 뵙고 싶어하신다니 어쩔 수 없지. 올려 보내.”
“예, 알겠습니다.”
다니엘이 공손하게 대답하며 물러난 지 얼마 안 되어 곧 드미트리가 안에 들어섰다. 이안이 흘끗 서류에서 시선을 떼어 바라보니 드미트리는 저택에 손님으로 방문하던 날 그토록 멋을 부렸던 것과는 달리 몹시도 흐트러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분노로 거칠게 숨을 쉬면서 드미트리가 이안을 노려 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인지는 자네가 더 잘 알겠지!”
오늘도 빨리 서류를 끝내고 퇴근해야 하기 때문에 이안이 드미트리가 왈왈 짖는 소리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보내며 바쁘게 서류를 작성했다. 자신을 손님 취급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놓고 무시하자 드미트리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러시아의 왕이나 다름없는 대단한 사람의 딸을 건드린 것도, 그 딸에게 말로 꺼내기 힘들만한 짓을 저질러 동영상을 찍어 놓은 것도 다 드미트리의 잘못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미트리는 자신의 약점을 잡아 광산을 빼앗다 못해 다른 것까지 건드린 저 새파란 애송이를 죽여버리고 싶었다.
“저는 바쁩니다, 솔로브요프. 시간을 내드리긴 했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빨리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주먹을 꽉 쥔 드미트리가 이를 악물며 내뱉었다. 메르데프를 돌려주게. 예상치 못한 말에 이안이 의아해 하며 고개를 들어 처음으로 드미트리를 제대로 바라보았다. 드미트리는 굉장히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아 보였다.
“광산도 광산이지만, 메르데프를 데려간 건 매우… 심한 간섭이라는 걸 자네도 잘 알고 있겠지.”
애써 좋은 말로 돌려 말하고 있지만 이안을 바라보는 드미트리의 시선은 매우 살기등등했다. 그건 제 것을 빼앗긴 집착 심한 알파나 지을 법한 표정이기도 했다. 이안은 잠시 메르데프라는 좀 낯익은 이름을 어디서 들었나 떠올렸다. 한참 후에서야 이안은 겨우 드미트리의 몇 번째인지 모를 부인의 이름이 사샤 메르데프라는 걸 겨우 떠올렸다.
“당신 집 나간 부인을 왜 여기서 찾습니까?”
“네 놈이 데려갔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아! 그 저택으로 메르데프가 향했다는 걸 본 사람이 있어!!”
이안의 말에 모른 척 하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드미트리가 불결하게도 침까지 튀겨가며 악을 썼다. 이안은 드미트리가 왜 저렇게 자존심이 상했는지 그제서야 이해했다. 대체 어디서 뭘 오해하고 왔는지는 몰라도 그는 이안이 자신의 부인을 빼돌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당신이 무능해 부인을 잃어버린 걸 왜 내게서 찾는지 모르겠군요.”
이런 헛소리나 들으려고 드미트리를 불러왔나 해서 이안이 냉담하게 말하자 드미트리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겉으로는 태연해도 드미트리가 가까이 다가오자 이안이 즉시 몸을 움직일 수 있도록 근육을 긴장시키는데, 드미트리가 품에서 거칠게 꺼낸 것은 총이나 칼 따위의 무기가 아니라 (물론 애초에 그런 걸 가지고 왔으면 들어오기 전 몸 수색에서 걸렸겠지만) 왠 낡은 종이 쪼가리였다.
팔랑거리면서 책상에 떨어지는 종이를 들어 올린 이안이 눈썹을 찌푸렸다. 노아의 연락처가 종이에 쓰여져 있었던 것이다.
“메르데프의 소지품에 이런 게 들어 있었네. 이젠 내 말을 잘 알아 듣겠지. 만에 하나 자네가 데려간 게 아니라고 한다면, 두 년 놈이 붙어 먹고 있는 게 틀림 없는 거라고!”
두 년 놈이라… 안 그래도 좀 기분이 좋지 않던 이안은, 더 이상 드미트리의 무례함을 참아 넘길 수가 없었다. 이안은 드미트리가 내 놓은 쪽지를 눈 앞에서 찢었다. 드미트리가 눈을 부릅뜨는 가운데 한 번 찢고, 보란 듯이 한 번 더 찢어 바닥에 버렸다. 드미트리의 입에서 빠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더 이상은 못 참아 주겠군요. 저택에 당신 부인이 왔을 때 노아가 연락처를 교환했을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게 제 저택에 누군가 있을 수도 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합니다. 어리석게 여기서 시간을 낭비하기 보다는 러시아에 돌아가 찾아보는 건 어떻습니까?”
이안이 경멸하는 표정을 숨기지도 않고 드러내며 차갑게 말하자 모욕감에 드미트리는 혈압이 걱정될 정도로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푸들푸들 떨었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두고 봐. 음산하게 가당치도 않는 협박을 한 드미트리가 거칠게 문을 열고 나갔다.
“별 쓰레기 같은 것이…”
시간만 버렸다 쯧 혀를 찬 이안이 다시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가 짜증스러운 한숨을 쉬었다. 대체 이런 연락처는 왜 의심스럽게도 종이로 남기는 거야? 핸드폰은 두었다가 어디에 쓰나? 그러나 생각해 보면 드미트리의 부인에 대한 의처증 내지는 집착 수준을 보자 핸드폰을 아예 주지 않았거나 철저히 연락처를 검사할 것 같긴 했다.
이안은 아마도 그 당시 드미트리가 사샤 메르데프를 통해 노아에게 약을 먹이려고 했던 사건 때 노아가 연락처를 주었을 거라고 추측했다. 거기에 사샤 메르데프가 제 저택으로 갔다고 우기던 드미트리에, 연락처, 그리고 근래 갑작스럽게 누군가를 저택으로 초대해도 되냐고 묻던 노아…
이것 봐라, 뭔가 있긴 있구나.
그 날 퇴근하고 돌아와 이안은 하이든에게 은근히 사샤 메르데프에 대해 떠 보며 물어 보았지만 분명 뭔가 아는 게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이든은 아무것도 모른다며 딱 잡아뗐다. 자신에게 대답해 주지 않는 것에 대해 서운함과 동시에 하이든에게 만족감을 느끼며 이안은 대신 다른 고용인들을 심문하다시피 했다. 결국 한 명이 이안의 끈질긴 추궁에 이기지 못해 간접적으로 요즘 저택에 손님이 와 계신 상태라 실토했다.
이미 불러 놓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이거지… 이안은 날을 잡아 노아가 방심할 만한 대낮에 조용히 저택에 돌아와 손님 방을 하나하나 열어보기 시작했다. 그다지 오래 걸리는 일은 아니었다. 처음 연 방에 떡 하니 노아와 사샤 메르데프가 사이 좋게 다과를 하고 있는 게 눈에 보였으니까.
이안이 갑자기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둘은 쩡하니 얼어 붙어 눈을 커다랗게 뜨고 이안을 바라보았다. 마치 주인 몰래 못된 짓을 하다가 들킨 햄스터 두 마리 마냥… 이안이 저벅거리며 다가오자 사샤 메르데프는 눈을 더 크게 뜨다 못해 몸을 떨기 시작했다. 이안이 한숨을 쉬었다.
“노아.”
“네에…”
과연 제 잘못을 알긴 아는지 노아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처음에 이안은 화를 낼까 생각도 해봤지만 사샤와 디저트를 함께하며 이야기를 나누던 노아가 굉장히 신나 보였기에 그럴 마음도 좀 사라지고 말았다. (아주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자신 아니면 저렇게 기분을 낼 수 없는 건가 좀 질투도 나고, 어쨌든 노아가 임신한 몸이니 화를 내기도 좀 그렇고…
“사샤 메르데프 양, 잠시 노아와 이야기를 나눠도 괜찮겠습니까?”
일전에 저택에 손님으로 방문했던 당시 이안이 노아에게 목줄을 매어 식당에 데려왔던 것만 기억한 사샤는 기분 나쁘지만 이안도 드미트리와 비슷한 과라고 생각했던 건지 완전히 겁에 질려 있던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이안이 매우 신사답게 묻자 조금 놀란 것도 같았다. 사샤는 겨우 아주 조그마한 목소리로 잔뜩 겁에 질려 괜찮다고 대답했고, 이안은 노아를 ‘다정하게’ 밖으로 이끌었다.
사샤가 머무르는 손님 방에서 조금 떨어진 곳까지 간 이안이 다시 팔짱을 끼며 한참을 빤히 노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안절부절 못하다가 노아가 알아서 순순히 사샤에 대한 이야기를 줄줄이 실토하고는 이안의 눈치를 보았다.
“왜 사실대로 말 안 했어?”
“그게 이안이 사샤 양을 내쫓아 버릴까 봐…”
노아가 이렇게나 귀엽게 굴지 않고, 또 임신한 몸만 아니었으면… 그리고 사샤와 같이 노닥거리는 모습이 요 근래 우울해 하던 모습 중 가장 보기 좋지만 않았다면 화를 내며 사샤를 쫓아버렸을 게 분명했기에 조금 양심이 찔렸지만 이안이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다.
“믿을 수가 없군. 이제까지 날 그런 못된 놈으로 밖에 보지 않았단 말이야?”
이안의 말에 더욱 노아가 시무룩 풀이 죽었다. 하지만 하이든도 이안이 사샤를 저택에서 내쫓아버릴지 모른다고 해서 그런 건데… 어쨌든 이안에게 말도 하지 않고 마음대로 사샤를 머무르게 한 건 제 잘못이기에 노아의 양심이 뜨끔거리며 찔렸다.
그 모습을 보자 이안은 이번만은 좀 너그럽게 굴자고 결정을 내렸다. 어제 드미트리의 일 때문에서라도 사샤 메르데프를 함부로 밖으로 내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저택에 없다고 해놓고 있는 게 알려져도 뭐, 딱히 상관은 없겠지만 드미트리가 고소 따위의 일이라도 하면 귀찮게 될 테니까. 게다가 드미트리의 되도 않는 추측과는 달리 이안은 사샤 메르데프와 노아가 소위 그 ‘붙어 먹을’ 가능성을 조금도 높게 보지 않았다. 노아의 취향이 뭔지 훤히 알고 있는 덕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이런 너그러움은 노아가 임신하고 있을 때까지만이다… 이안은 이번 일을 잊지 않고 잘 적립해 두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어디 두고 보자고, 노아… 어째선지 소름이 돋아 노아가 몸을 조금 떠는 동안 이안은 다시 노아와 함께 사샤 메르데프가 있는 방으로 돌아갔다.
“아…!”
허둥지둥 짐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제 물건들을 작은 가방에 싸고 있던 사샤가 이안과 함께 돌아온 노아를 보자 얼어 붙었다. 제게 내려질 선고만 기다리고 있는 사샤에게 이안이 여전히 신사다운 태도를 저버리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주인 된 입장에서 손님이 머무르는 줄도 몰랐던 점 사과 드립니다, 사샤 양.”
“아,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사과할 입장이기에 사샤가 이안의 말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이안은 몸이 안 좋다고 들었는데 앉아 있으라며 사샤에게 의자에 앉도록 권하기까지 했다. 사샤가 있는 걸 들켰는데도 이안이 별로 화를 내지 않은데다가 내쫓지 않는 걸 좋아해야 하는데도 노아는 이안이 저렇게 나오자 기분이 굉장히… 이상했다.
그러니까, 썩 별로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기분은 아니었다. 의사가 임신한 기간 동안에는 유독 감정 기복이 심할 거란 말은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좀 심한데.
“노아가 최근 아이를 가진 후로 좀 우울해 하던 차에 사샤 양이 이리 들려 주어 기분을 북돋아주니 저는 감사할 따름입니다.”
“어머나… 축하 드려요!”
이안의 말에 사샤가 겁을 먹은 것도 잠시 잊을 정도로 놀라 노아에게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말을 건넸다. 매번 들을 때마다 뭔가 쑥스러워서 노아가 방싯 웃었다. 그러니 노아를 잘 부탁한다면서 더할 나위 없이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알파 남편처럼 군 이안이 자리를 피했다.
이안이 자리를 뜨자 사샤가 몹시 안도해 분위기가 누그러진 뒤에도, 노아는 왜 이안이 화를 내지 않는데 자신은 느낄 필요가 없는 이상한 서운함을 느끼고 있는 가에 대해 좀 오랫동안 의아해하며 사샤와 남은 다과를 마저 같이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