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화 (93/107)

93

 “사샤?”

 믿을 수가 없어 노아가 경악했다. 사샤는 지난 번 드미트리와 저택 손님으로 방문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수척하고 초라한 모습이었다. 코트를 입고 있긴 하지만 이런 추운 날씨에 잔뜩 젖은 코트는 거의 보온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아 입술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사샤가 기운 없이 노아… 하고 소리를 내었다.

 “죄, 죄….송…”

 온 몸이 얼어붙었던지 사샤는 제대로 말도 하지 못했다. 간신히 죄송해요 라고 말한 사샤가 심하게 떨자 노아가 서둘러 제가 하고 있던 목도리를 사샤에게 둘러 주었다. 상황을 파악한 고용인은 서둘러 사샤를 부축했고, 리무진에 탑승하기 전 아예 사샤에게서 완전히 젖은 코트는 벗겨내었다.

 리무진 안에 올라타자 몹시 차갑게 굳은 몸이 따뜻한 시트에 닿자 사샤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저택에 도착해 안에 들어서 사샤는 따뜻한 옷가지와 차, 그리고 담요와 온풍을 제공 받은 뒤에도 한참을 추위로 떨다가 겨우 색이 돌아온 입술로 입을 열었다.

 “정, 정말 죄송해요, 노아… 연락을 드리려고 했는데, 그 때 주신 연락처를 아무리 찾아도 없어서…”

 눈물을 글썽이며 찻잔을 꼭 쥐는 사샤의 모습은 어지간히 고생을 한 것 같았다. 눈가에는 감출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한 멍이 들어있고, 이마는 찢어져 딱지가 얹어 있어 제대로 치료조차 받지 못한 모습이었다. 아직도 떠는 사샤에게 담요를 한 장 더 덮어 주면서 노아는 목덜미에도 얼룩덜룩한 멍을 보았다. 아무리 봐도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은 흔적이다. 노아의 몸에 자주 남곤 하는 멍과는 종류가 다른 것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노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사샤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자 사샤가 그 커다란 눈에서 와르르 눈물을 쏟아냈다. 한참 만에 사샤는 겨우 자신이 여기까지 걸어와 노아를 찾아올 만큼 절박했던 사정을 털어 놓았다.

 이 곳 저택에 손님으로써 방문했다가 이안에게 크나큰 타격을 받고 난 뒤, 드미트리는 러시아로 바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 곳에 있던 별장에 계속 남아 이안에게 빼앗긴 광산을 되찾으려고 애를 썼다는 것이다. 드미트리가 돌아가지 않으니 사샤도 어쩔 수 없이 이 곳에 남을 수 밖에 없었는데, 광산을 되찾기는커녕 점점 손해만 입자 화가 난 드미트리는 스트레스를 풀 대상으로 가장 가까이 있는 사샤를 선택했다.

 “도저히 무서워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별장을 나온 날에는 정말 이렇게 맞다가는 죽을 것만 같아서…”

 사샤가 드미트리에게서 도망친 건 일주일 전이었다. 그 날도 이안에게 비웃음과 무시만 잔뜩 당하자 돌아온 드미트리는 아주 오랫동안 별장 안에서 갇혀 살다시피 하던 사샤를 두들겨 팼다. 남편이 이렇게 힘든데 뭘 하고 있는 거냐고 네 년이 숨기고 있는 비상금이라도 내 놓으라며 몇 시간인지도 모를 시간 동안 맞고 범해진 끝에 정신을 잃고 깨어난 사샤는 더 이상은 여기 있으면 안 되겠다는 걸 깨달았다. 이러다가는 드미트리에게 맞아 죽고 말 터였다.

 몹시 아픈 몸에다 비참한 기분으로 깨어난 사샤는 드미트리가 제 소지품을 다 뒤집어 엎어 놓은 걸 발견했다. 사샤가 가지고 있던 현금과 귀금속은 죄다 사라져 남은 건 정말 얼마 안 되는 돈과 옷뿐이었다. 이 곳을 나가자고 생각하니 막막하고 두려울 때 사샤는 노아가 연락하면 도와준다는 것을 겨우 생각해냈다. 그러나 드미트리가 뒤집어 엎어 놓으면서 어떻게 된 건지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던, 노아가 준 연락처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쩔 수 없이 조금의 돈이나마 가지고 나와 처음에는 어떻게든 모텔을 전전하며 살았지만 드미트리가 자주 부리는 사람들이 제가 머무르던 모텔 근처를 서성거리는 걸 우연히 목격했을 때는 숨이 막히는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결국 사샤는 돈도 떨어진데다가 안전한 곳으로 어떻게든 피하고 싶어 겨우 남아 있는 돈을 모두 털어 가능한 저택에 가까운 곳까지 차를 타고 온 뒤 기억을 더듬어 가며 몇 시간을 걸은 끝에 겨우 당도한 것이었다.

 그런데 저택에 오고 보니 노아는 외출한 상태였고 저택에서는 신원이 불분명한 사샤를 절대 들여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사샤는 무작정 추운 날씨, 길가 위에 쪼그려 앉아 노아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염치 없는 건 잘 알지만 며칠 만 여기서 지낼 수는 없을까요. 없는 듯 있을게요, 제발…”

 몹시 겁에 질린 사샤가 흐느끼며 노아에게 부탁했다. 이 모든 건 엄연히 따지자면 인간 말종이나 다름 없는 인성을 가진 드미트리의 잘못이었지만 노아는 사샤가 이런 상황이 된 것에 어느 정도 책임감을 느꼈다. 노아는 이안이 드미트리를 완전히 깔아 뭉개며 드미트리가 그 자신은 인간 취급도 하지 않는 두 오메가 앞에서 된통 당한 걸 떠올렸다. 아마 드미트리에게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으리라.

 지금 생각해 보니 이안이 드미트리를 그토록 모욕한 건, 제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어느 정도는 드미트리가 자신을 원했기 때문도 있는 것 같았다. 그 모욕감과 분노를 사샤가 온전히 감당했다고 생각하면 노아는 사샤를 그냥 매정하게 내쫓아버릴 수가 없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며칠 정도쯤이야 머무는 건 아무 문제도 없어요. 편히 쉬도록 하세요. 이안에게는 어떻게 제가 잘 말해둘게요.”

 “아, 아니에요! 아니에요… 마, 말 안 하셔도 괜찮아요.”

 드미트리에게 오랫동안 학대당했기 때문인지 사샤는 이안에게 말한다고 하자 얼굴이 하얗게 질려 고개를 저었다. 무작정 노아에게 찾아오긴 했지만 그건 노아가 오메가였기 때문이지, 태도를 보아하니 알파를 몹시 무서워하는 게 눈에 보였다. 아니면 이안이 드미트리에게 말하기라도 할까 염려하는 건지… 둘 다인 건지. 사샤가 두려워하며 조심스럽게 이안이 언제 돌아오느냐고 물어 노아가 잠시 고민했다.

 노아야 사샤를 며칠 정도 집에서 지내게 하는 건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문제는 여기가 노아만사는 곳이 아니라는 점이다. 엄연히 이안도 이 집의 주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이안에게 솔직히 털어놓고 사샤가 머물러도 되냐고 묻는 게 좋은데… 노아는 이안이 과연 사샤를 받아들여 줄지를 알 수가 없었다.

 가브리엘 사건 이후로는 이안은 베타는 물론이고 오메가까지 노아에게 접근하는 걸 질색했다. 아니, 그냥 아무 사람이나 노아에게 접하는 걸 싫어할 정도로 예상 밖으로 질투가 심했으니 사샤에게는 과연 어떨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사샤를 밖에서 지내게 하자니, 드미트리가 제 수하를 시켜 찾고 있다고 하고… 만약 사샤가 다시 드미트리에게 끌려 들어가게 된다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을 터.

 잠시 고민하다가 노아는 일단 몹시 지친 사샤를 손님 방으로 안내했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배까지 채운 사샤는 침대 위에 누운 지 얼마 안 되어 곧장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사람에게 이런 말을 써서는 안 되겠지만 마치 상처 입은 작은 짐승을 주워 돌보는 듯한 기분으로 사샤를 돌본 뒤 노아는 하이든을 불렀다.

 “아무래도 말씀 드리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게 좋긴 하겠지만, 이안이 사샤를 내쫓지는 않을까요?”

 노아가 논의를 하자 하이든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그럴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겠군요, 하는 대답을 내놓았다. 하이든은 상대가 여자건 노약자건 간에 이안이 다른 사람에게 매우 가차 없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 말에 잠시 고민한 노아가 하이든에게 자신이 말할 테니 일단 당분간은 이안에게는 사샤에 대해 말해주지 말라고 부탁했다. 이안과 결혼한 이상 노아와 이안은 똑같이 동급으로 모셔야 할 주인 내외였기에 하이든은 순순히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일단 노아는 이안을 떠본 뒤 대답이 긍정적이면 사샤에 대해 털어 놓고, 부정적이면 사샤가 원하는 대로 안전한 국외로 떠나 보낼 때까지의 며칠 동안만 비밀로 할 생각이었다. 뭐… 일단 지내고 가버렸다는데 이안이 어찌할 방법은 없겠지… 아마 노아 자신에게는 좀 괴로운 밤이 되겠지만. 

 ***

 “안 돼.”

 밤 늦게 돌아온 이안이 딱 잘라 말했다. 하루 종일 바쁘게 일한 게 분명했는데도 얼마나 체력이 좋은 건지 이안은 딱히 피곤한 기색도 없었다. 편한 옷으로 갈아 입으면서 이안이 우물쭈물 서있는 노아를 보고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건 절대 내가 질투가 나서 그런 게 아니고…”

 질투가 나서 그런 게 아니라는데 노아는 이상하게도 이안이 유독 강조해서 말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지금은 뭐든 조심해야 할 시기 아냐. 괜히 요즘 저택에 다른 사람 출입을 금하는 건 줄 알아? 고용인 한 명 고용할 때도 아주 심혈을 기울여서 고용한다고.”

 물론 자신이 아니라 하이든이 아주 심혈을 기울이는 것이었지만 이안은 원래 자신에게 불리하게는 절대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노아가 좀 시무룩해진 걸 보자 이안은 가슴 한 켠이 근질근질해졌다. 아, 이상하기도 하지… 최근 들어 이안은 노아를 볼 때마다 괴롭히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제 뒤로 빼돌리거나 해 제 품에서 보호하고 싶은 모순적인 충동을 느꼈다.

 “진짜 괜찮은 사람이에요.”

 “두 달 뒤에는 초대해도 좋아. 하지만 지금은 안 돼.”

 으음… 어떻게 하지. 하이든의 말대로 이안은 가차없이 사샤를 내쫓아버릴 것만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노아는 일단 최대한 빨리 사샤를 안전한 국외로 떠나 보낼 비행기나 구해보자고 다짐했다. 그런데 이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노아에게 다가왔다.

 “낌새가 이상한데…”

 노아는 뜨끔하였지만 이제까지 이안을 감쪽같이 속아 넘겼던 순진한 연기를 120% 발휘해 최대한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무슨 낌새요?”

 최대한 순진무구하게 되물었지만 이안은 넥타이를 푸르다 말고 빤히 노아를 쳐다볼 뿐이었다. 점차 식은땀이 흘러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킬 뻔 한 순간, 그저 스킨쉽이 하고 싶었을 뿐인지 다가온 이안이 노아를 끌어 당겨 키스를 했다. 얌전하게 이안의 키스에 응하면서 노아가 속으로 안도했다. 그리고 동시에 생각했다. 빨리 사샤를 저택에서 내보내야겠다…

 그러나 노아의 예상보다도 비행기 표를 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신년 때에는 너도나도 휴가를 떠나기 때문에 빈 좌석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도 어려웠던 것이다. 이안에게 말하면 그깟 비행기 표, 구하기는 쉬울 테지만 노아는 이안과는 달리 돈은 있어도 권력 같은 건 없었다. 게다가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게, 저택에 당도한 이후 사샤가 갑자기 높은 열에 시달리며 앓아 누워 몸을 운신할 수 없는 상태가 된 이유도 있었다.

 이틀을 꼬박 몸살을 앓고 난 뒤에서야 사샤는 겨우 기력을 되찾았고, 노아가 그간 자주 들려 기운 내라고 위로를 해준 탓인지 사샤는 노아에게 깊은 호감을 표시했다. 노아는 사샤에게서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한 수 십 번은 들은 것만 같았다.

 “저택에 머무르게 해주신 것도 감사한데, 이렇게 신경 써주시다니 정말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저택에 머무른 지 사흘 째, 오후 느지막이 겨우 완전히 기운을 회복한 사샤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 인사를 건넸다. 정말 평생토록 갚아야 할 빚을 졌다면서 사샤가 눈물을 글썽였다. 노아는 러시아에 있는 그녀의 아버지보다도 더한 다정함을 사샤에게 보였다. 아직 노아보다도 훨씬 어린 나이었기에 사샤는 이런 친절함과 다정함 자체가 낯설었다.

 “별거 아니에요. 그저 하이든과 나머지 분들이 당신을 돌본 것뿐인걸요.”

 “노아…”

 사샤가 결국 눈물을 떨구면서 조금 울었다. 노아는 이제 익숙하게 사샤를 달래면서 요리사의 특제 디저트가 한 가득 담겨 차려진 테이블로 사샤를 안내했다. 이제 고작 19밖에 안 된 어린 나이의 사샤는 눈부시게 반짝이는 디저트들을 보자 그만 눈물도 그쳐버릴 정도로 놀라 뺨이 붉어지고 말았다.

 “세상에, 너무 멋져요.”

 “한번 먹어봐요. 굉장히 맛있어요.”

 사샤는 굉장히 조심스럽게 노아가 건넨 밀푀유를 한입 베어 먹고는 눈을 빛냈다. 정말 맛있어요! 요리사의 그냥 요리라면 모를까, 디저트에 대해서는 저 말고는 딱히 다른 사람들이 이렇다 저렇다 의견을 표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샤의 반응에 노아가 신이 나서 마치 제 컬렉션을 자랑하는 사람마냥 이것저것 권했다.

 그리고 사샤가 머무르고 있던 손님 방이 갑자기 벌컥 열린 것은 둘이 제법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사샤는 깜짝 놀라 창백해진 얼굴로 티 스푼을 떨어트리고 말았고, 노아는 이 저택에서 저렇게 벌컥 벌컥 문을 열고 다니는 사람이 단 한 명 밖에 없음을 잘 알았기에… 목 울대를 울리며 뒤를 돌아 보았다. 이안이 문가에서 팔짱을 끼고 사이 좋게 시간을 보내던 둘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