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89/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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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초기에는 삽입을 동반한 관계는 가지시면 안 됩니다.”

 그 말을 들은 노아의 표정이 얼마나 솔직했던지 의사가 말을 덧붙였다.

 “이제까지는 몰랐으니 어쩔 수 없지만, 지금부터는 태아의 안전을 위해서는 삼가시는 게 좋아요. 다만 3개월쯤이 되었을 때와 마지막 한 달에만 주의해 주시면 됩니다.”

 그 외에는 관계를 가져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노아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어디 이안과 저가 언제 평범한 관계를 가졌던가. 의사가 말하는 관계에 뭐 한꺼번에 두 개 삽입하기나 뒤에 뭔가 넣은 채로 엉덩이 맞기 따위의 관계는 속하지도 않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결론은 10달 내내 자신은 욕구 불만이 될 거란 이야기였다.

 “아, 하지만 임신한 동안에는 기간에 상관없이 노팅은 절대 하면 안 되는 것 아시죠.”

 이번에는 이안이 움찔했다. 의사는 그런 이안의 표정도 잘 새겨두면서 말을 이었다.

 “젊은 알파 분들이 노팅을 선호하는 건 알지만 아기를 위해 참아주세요. 한번에 일정 수준 이상의 알파 페로몬에 노출 되는 건 좋지 않습니다.”

 보통 알파들이 노팅을 하는 것은 단순히 쾌감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소유권 주장을 위해서라는 게 맞았고, 의사는 그런 알파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막 결혼한 게 눈에 훤히 보이는 이런 신혼 초기의 부부들에게는 아주 콱 못을 박아 놔야 했다. 이런저런 말들을 듣다가 이안이 입을 열었다.

 “듣자 하니 나중에는 제 알파 페로몬도 역겨워 한다는데, 무슨 방법은… 없습니까?”

 “임신 중인 오메가가 알파 페로몬을 꺼려하는 것은 태아를 보호하기 위한 당연한 본능이지만, 초기에 가능한 오래 옆에서 지내면서 익숙해지게 하면 아주 심하지는 않을 거에요.”

 그러니까 익숙해질 순 있어도 지금처럼 페로몬을 매력적으로 여긴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의사의 그 말을 듣자 노아의 머릿속에서는 이안이 아무래도 제가 아이를 가진 걸 싫어할 거란 생각만 점점 더 늘어났다. 그런 생각이 들자 가슴이 콕콕 쑤시는 것도 같기도 했고, 아니면 속이 메슥거리는 것도 같았다. 아직은 이안 알파 페로몬이 딱히 역겹게 느껴지진 않는데…

 의사에게 주의해야 할 사항에 대해 산더미처럼 듣고 덤으로 이런저런 책자까지 받아 나온 노아와 이안은 차에 올라탄 뒤에도 한 동안 말이 없었다. 노아는 예상치 못한 일에다가 이안이 아이를 가지는 것을 싫어할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고, 이안은… 핸들만 꽉 잡고 있었다. 먼저 제대로 정신을 차린 노아가 이안을 빤히 바라봤다.

 “저기, 이안… 출발 안 해요?”

 “…아, 출발해야지.”

 아까부터 반 박자씩 느리게 반응하는 이안이 핸들을 돌리며 페달을 밟다가 그제서야 자신이 시동도 걸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키를 꺼내 들었다. 노아는 눈 앞에서 이안이 드물게도 차 키를 잠시 버벅거리며 제대로 꽂지 못하는 모습을 지켜 보면서… 어쩐지 이안이 자신보다도 더 이 일에 충격을 받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 정확히는 충격을 받았다기 보다는…

 그런데 차가 출발했는데 속도가 평소와 달리 느릿느릿 거북이가 기어가는 듯 했고, 이안의 정신은 영 다른 곳에 팔려 있었다. 임신했다는 게 그렇게 충격이었나 봐… 어째선지 조금 시무룩해진 노아가 자신들이 탄 차를 쌩하니 추월하는 다른 차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차가 중간에 멈추었다. 어리둥절해서 바라보니 디저트 가게였다.

 “어제 이미 많이 샀…”

 무의식적으로 거기까지 말한 다음 노아가 합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부터 딸기가 얹어진 디저트들이 무진장 당겼었는데… 이제서야 이유를 알겠네. 사준다는데 굳이 거절할 필요가 없어서 조금 신나서 노아가 차에서 내렸다. 

 디저트 가게에 들린 노아는 눈을 반짝이며 딸기나 마멀레이드 같은 새콤달콤한 과일들이 잔뜩 올려진 디저트를 골랐다.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고… 요건 오늘, 이건 내일 먹으면 되겠지… 잠시 뒤에 노아는 매우 행복한 기분으로 디저트가 한 가득 빵빵하게 담긴 쇼핑 백을 안고 나왔다.

 차를 타고 가는 와중에 참을 수 없어 하나를 꺼내 먹고 있는데 시선이 느껴져 노아가 고개를 돌렸더니 이안이 매우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노아가 헤 하고 입을 벌리고 바라보자 자신이 그런 표정을 지은 것도 인지 못하는 얼굴로 이안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왜?”

“어… 타르트 남겨 줄까요?”

“남을 것 같진 않지만 만에 하나 남으면 남겨 주던가.”

이안이 그 사이 노아가 벌써 두 개를 먹어 없앤 빈 포장지를 바라보면서 웃었는데,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린 노아가 가슴 속이 간질거려 발을 들썩거렸다. 처음 만났을 때도 생각했지만 이안은 굉장히 잘 생겼다. 그런데 잘 웃지 않아서 그런지 웃는 얼굴이 더 매력적인 것 같긴 해. 그런 생각을 하며 노아가 이안을 위한 타르트는 한 쪽에 밀어 두었다.

 두 사람이 저택에 돌아오자 모든 가족이 둘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노아가 확실히 임신이란 걸 전해 주었을 때 테너의 표정은 대단했다. 기뻐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화도 못 내는 표정으로 일어났다가 다시 앉은 테너가 마침내 누구를 향해서인지 모를 주먹을 휘둘러 보이며 (물론 이 자리의 모두는 저 주먹이 누구를 향하고 싶은지는 알고 있었다) 부르짖었다.

 “아직 넌 너무 어리단 말이다!”

 “아버지, 노아도 벌써 25살인데요. 게다가 어머니는 윌을 22살에 낳으셨잖아요.”

 “넌! 앞으로 내가 말할 때는 입도 벙긋 하지 마!”

 테너가 험악하게 윽박질렀으나 벤자민이 그에 굴하지 않고 소리 없이 입을 투덜거리는 모양새를 했다. 그 결과 벤자민은 잠시 뒤에는 테너에게 찰싹 얻어 맞아 시뻘겋게 부은 입을 문지르고 있어야만 했다.

 “축하해요, 노아. 두 사람 아이라면 딸도 아들도 정말 사랑스러울 거에요.”

 올리비아가 매우 다정한 눈길을 보내며 축하 인사를 보냈다. 다들 돌아가며 두 사람에게 덕담을 하는 가운데 테너만 얼굴이 잔뜩 부어서 마치 커다란 불독처럼 소파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마침내 윌리엄이 헛기침을 하자 그제서야 테너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축하한다, 노아. …그 동안 얼마나 힘들었니.”

 “저… 아직 안 낳았는데요.”

 그 동안 전혀 힘들지도 않았고… 그러나 테너는 굉장히 안쓰러운 눈으로 노아를 보고는, 제 막내 아들에게 보낸 것과는 완전 다른 무시무시한 얼굴로 이안을 향해 눈을 부라려 보았다. 그러나 이안은 그 험악한 시선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노아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상태였다. 

 “그래, 아예 아이를 낳을 때까지 여기서 지내는 건 어떠냐? 아예 낳은 뒤에도 1년 정도 푹 쉬면서 지내는 것도 괜찮겠는데.”

 이제는 테너가 아주 막 나가자 윌리엄이 다시 헛기침을 했다. 그러나 테너는 윌리엄이 노아 피곤할 테니 이만 들여 보내는 게 어떠냐는 말을 하고 나서야 겨우 막무가내를 멈추고 축 처진 어깨로 터덜터덜 방으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당장은 손자가 생긴다는 기쁨보다는 이안에 대한 분노나 좌절감이 더 큰 것 같았다.

 테너의 그런 기분은 신년 파티를 지내면서 점차 귀엽고 애틋한 제 막내 아들의 마찬가지로 귀여울 손자에 대한 생각으로 점차 상승되었고, 나중에는 벌써부터 손자가 무얼 할지에 대한 애정 충만한 덕담이 술술 나오는 정도로 이어졌다.

 신년 파티에 테너의 제안으로 다들 샴페인이 찰랑이는 잔을 (노아는 과일 주스가 담긴 잔을) 마주치며 새해를 축복할 때, 노아는 테너가 아이가 이안을 꼭 닮은 남자 알파일 경우에 대해서는 일부러 피해 말하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지만 곧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에이, 뭐… 그래도 손자인 걸. 예뻐해 주시겠지.

 ***

 다니엘은 최근 들어 거의 천국을 노니는 것 같은 나날을 누리고 있었다. 전에는 그토록 까다로워 거의 가시밭 길을 걸어 다니는 것 같은 회사 생활이 요즘에는 구름 위를 노니는 듯 했다. 예전과 달리 제 상사의 심기를 맞추는 게 매우 쉬워졌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얼마나 들어왔어?”

 발랄하게 외치면서 다니엘이 비서실에 들어서자 비서실 한 쪽 산더미처럼 쌓인 선물들이 보였다. 대부분 파스텔 톤의 사랑스러운 색깔을 띄고 있는… 유아용품들이나 건강 식품 따위였다. 다니엘은 세심하게 선물들을 살펴 다섯 개 정도 간추렸다. 약간 힘들지만 다른 비서들의 도움을 받아 품에 차곡차곡 쌓아 올린 뒤 다니엘이 회장실로 향했다. 똑똑 노크를 하고 들어가자 이안이 심각한 얼굴로 모니터를 들여다 보고 있다 고개를 들었다.

 “오늘 들어온 선물들 중 일부입니다.”

 공손히 말하며 다니엘이 책상 위에 선물들을 올려 놓았다. 지금으로부터 3주 전, 이안이 제법 긴 휴가를 내어 수석 비서로써 대신 몹시 바쁘지만 대신 다니엘은 스트레스 없는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갑작스럽게 신년 휴가를 낸 상사가 돌아오는 날 다시 바짝 긴장하며 이안을 맞이한 다니엘은 난생 처음으로 마치 봄날 훈풍 같은 제 상사를 볼 수 있었다.

 평소와 표정은 다르지만 부드럽게 풀린 분위기를 하고 들어온 이안은 자리에 앉자마자 전 직원에게 보너스를 내렸다. 갑작스러운 보너스에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인간이 대체 뭘 먹고 이런 좋은 짓을 하나, 걱정하던 다니엘의 귀에 믿을 수 없는 명령이 들려왔다.

 “…네?”

 평소 같았으면 다니엘이 제대로 듣지 못하고 묻는 걸 싫어해 귀는 대체 어디 달고 다니냐는 둥의 독설을 퍼부었을 이안이 관대하게도 다시 말해 주었다. 노아가 임신했다는 소문을 내라고. 다니엘이 입을 떡 벌리고 있는 동안 이안이 덧붙였다.

 “너무 노골적으로 내진 말고.”

 “아,…알겠습니다.”

 얼떨떨해 대답한 뒤 다니엘이 기분이 매우 좋아 보이는 이안의 눈치를 본 뒤 재깍 알아차렸다. 이건 단순히 뭔가 꿍꿍이가 있어서 소문을 내라는 게 아니라, 사실이니까 소문을 내라는 거구나! 다니엘이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늦었지만 축하 드립니다.”

 설마 내가 잘못 눈치챈 건 아니겠지… 하고 조마조마해 하는 가운데 다니엘은 분명히 보았다. 이안이 거의 히죽 웃는 것에 가까운 미소를 짓는 것을… 그 날 다니엘은 제 통장에 다른 비서와 달리 유독 많이 들어온 보너스를 보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 후로는 이렇듯 밀려 들어오는 공물(?)들을 추려 이안에게 바치면 이안은 매우 섬세하고 까다롭게 선물을 하나 선정해 집으로 가져갔다. 선물은 주로 정말로 금가루가 뿌려진 비싼 수제 디저트 세트나 산부와 태아에게 좋은 건강 식품 따위였다. 선물을 올려 놓으면서 다니엘은 힐끔 이안이 진지하게 보던 모니터에… 육아용품 샵 페이지가 떠있는 것을 보았다. 손바닥만한 아기 신발 한 켤레의 가격에 0이 대체 몇 개가 붙었는지 모를 정도로 억 소리 나게 비싼 제품이었다.

 다니엘이 선물을 올려놓자 그제야 이안이 모니터에서 완전히 시선을 떼며 다니엘이 갖고 온 서류보다도 선물을 먼저 추리기 시작했다. 매우 꼼꼼히 살피던 이안의 손이 문득 멈추었다. 오늘은 저건가 보다. 이안의 손에 들린 것은 일본의 500년 전통 화과점에서 직접 구매한 화과자가 들어 있는 디저트였다. 그러나 이안은 싹 굳은 얼굴로 사정없이 화과자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말았다.

 상자 곽이 찌그러지다 못해 뚜껑이 날아가 화려한 화과자가 바닥을 굴러다니는 걸 보며 다니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오랜만에 보는 상사의 성깔은 전혀 반갑지 않은 것이었다. 

 “지금 이걸 먹으라고 가져온 거야? 눈이 대체 어디에 달렸어?”

 “죄송합니다!”

 일단 사과하고 보며 다니엘이 주섬주섬 화과자를 주워 들었다. 그리고 뭐가 문제인가 싶어 치우는 척 하며 상자를 들여다보자 아까는 보지 못했던 아담한 카드가 붙어 있었는데, 카드를 읽은 다니엘이 뭐가 문제인지를 깨달았다. 카드에 드미트리라는 이름이 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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