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6/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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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너가 이안과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누겠다며 다른 가족들을 모두 쫓아낸 뒤, 노아는 제 방으로 가지 않고 문 밖에서 서성거렸다. 귀를 기울여 봐도 딱히 대화가 들리거나 하진 않았기에 제발 둘이 좋게 좋게 대화가 진행되기를 바라며 노아가 식당으로 향했다. 테이블에 앉은 노아가 손수 차를 우려 내고는 조심스럽게 쇼핑백 안에서 오는 길에 사온 디저트를 꺼내 들었다.

 혹시 안에서 고성이 오가지는 않나 귀를 기울이면서도 노아는 황홀하도록 어여쁘고 반짝반짝 빛이 나는 디저트를 고심하며 바라보았다. 뭘 먼저 먹을까? 케이크? 크림 브륄레? 젤라또? 크림도 괜찮을 것 같고, 아니면 시럽을 얹은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뭐가 더 나을까… 에라, 둘 다 먹지 뭐.

 제가 먹을 디저트 두 개를 빼 놓던 노아의 손이 타르트에서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 번에 이안이 타르트를 제법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는데. 이안이 치사하게도 디저트로 자신을 잔뜩 약 올리던 날을 떠올리며 노아가 타르트를 하나 미리 빼두고 나머지는 냉장고에 넣었다. 

 “맛있겠다.”

 투명한 포장지를 뜯는데 딸기가 한 가득 얹어진 케이크를 보자 입 안에 침이 고였다. 달달한 생크림과 푹신한 빵, 그리고 새콤달콤한 딸기까지 포크로 가지런히 베어 입 안에 밀어 넣은 노아가 행복한 신음소리를 냈다. 부드럽게 씹히는 딸기나 녹아 내리는 생크림의 조화가 얼마나 훌륭하던지… 

 순식간에 디저트 하나를 모두 해치운 노아가 도로 냉장고에서 디저트가 든 쇼핑백을 꺼내와 안을 뒤적였다. 아까 보니까 딸기가 얹어진 게 하나 더 있었던 것 같은데… 딸기가 듬뿍 얹어진 디저트를 하나 더 꺼낸 노아가 꼴깍꼴깍 마른 침을 삼키며 다른 하나를 열었다. 막 포크로 먹기 좋게 한 입 베어 드는 때였다.

 “아, 내 것도 하나만.”

 아직 영화 끝날 시간은 멀었건만 벌써 돌아온 제임스가 테이블에 털썩 앉으며 타르트에 손을 댔다. 그거 주인 있어, 하고 말하면서 노아가 다른 것을 내주었다. 크게 가리는 것 없던 제임스는 아무 생각 없이 노아가 바꿔 준 것을 받았다.

 “왜 벌써 왔어? 영화 끝나려면 멀었잖아. 영화 재미 없었어?”

 “아니, 재미는 있는데… 영화에서 사슴을 쏴 죽이잖아.”

 “아…”

 제임스는 입맛 만큼이나 영화도 딱히 가리는 것이 없었지만 유독 영화 내에서 동물들이 학대당하거나 사냥 당하는 것을 보질 못했다. 하긴 괜히 밀림 오지로 날아가 자처해서 동물들을 구조하고 보호하며 살겠는가. 우물거리며 한 입 크게 디저트를 베어 물은 제임스가 단 것도 정말 오랜 만이네, 하고 만족한 한숨을 쉬면서 또 한 입 먹고는 노아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몸은 좀 괜찮은 거야? 얼마나 많이 아프길래 영화도 못보고 와?”

 “어, 그게…”

 스스로가 생각해도 전혀 아픈 모양새가 아니었기에 잠시 망설이다가 노아가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대강 영화관에서 이안과 이런 저런 걸 하다 보니 집에 가게 되었다 말하자 제임스가 오, 하는 소리를 냈다. 혼자 영화를 보게 내버려 두고 둘이 먼저 갔다는 데도 딱히 화가 난 얼굴은 아니었다. 주위에 무관심한 만큼 제임스가 화를 내는 기준은 다락 같이 높았다.

 “그러고 보니 너 그런 취향이 있었지.”

 흠… 하면서 제임스가 생각에 잠겼다. 노아가 제임스에게 제 취향을 들키게 된 것은 아주 오래 전 일이다. 이제 막 제 취향을 깨달은 노아는 그 무렵 혼자서 이런저런 실험을 해 보고 있었다. 스스로 도구를 찾아 엉덩이를 때려 본다던가, 아니면 학용품 중 뒤로 넣을 만한 것을 찾아 본다던가…

 제임스에게 들킨 날은 하필이면 그날 따라 문을 잠그는 것을 까먹은 날이었다. 그 날 노아는 무릎을 꿇고 앉아 제 허벅지에 회초리를 내리쳐 보다가 나중에는 조심스럽게 커터 칼을 손에 든 참이었다. 아무리 내가 아픈 걸 좋아한다지만 이런 것도 좋아하는 걸까? 게다가 맞는 것과는 달리 이런 건 흉터가 남을 것 같은데… 좋아, 아주 살짝만 긁어 보는 거야….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으로 노아가 무릎 살짝 위를 콕 찔러 보았다. 따끔했다. 음, 잘 모르겠네. 하긴 바늘에 찔리는 정도로는 흉터가 안 남잖아. 근데 이거 좀 별로인 거 같기도 해… 다시 한 번 노아가 살살 긁어 보는데 노아! 하면서 벌컥 문이 열렸다. 깜짝 놀란 노아가 쿡 제 허벅지를 찔러 버리고는 악 소리를 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제 친구가 커터 칼을 들고 자해하는 장면을 본 제임스 만큼 놀란 사람은 없었다.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노아!”

 하는 소리와 함께 노아는 뭐라 변명할 기회도 없이 어버버하다가 왜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냐며 화가 난 제임스에게 뺨을 철썩 한대 맞았고 (그 와중에 노아는 뺨을 맞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제임스에게 사정을 설명할 수 있었다. 조금… 아니 많이 부끄러운 시간들이었다. 

 커터 칼은 제임스에게 압수 당했지만 어차피 그 쪽은 취향이 아니라서 노아는 고분고분 제임스의 조치를 받아 들였고, 자신이 우울증 따위가 있어 자해를 한 게 아니라 취향이 그렇다는 걸 고이 숨겨왔던 제 취향의 여러 야한 동영상들을 증거로 보여주고 나서야 제임스를 납득시킬 수 있었다. 제임스가 입이 무거운 사람인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심지어 제임스는 노아에게 이 근처에서 제일 안전한 클럽이라면서 Tear의 존재를 제가 성인이 되는 날 알려 주기까지 했다.

 “그건 그렇고 저 쪽은 왜 이렇게 시끄러워?”

 “응?”

 제임스의 말에 노아가 귀를 기울여 보니 어렴풋하게 고성이 오가는 것이, 아니… 테너가 소리소리 지르는 것이 들렸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구나. 나중에 테너의 기분이나 좀 풀어주러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노아가 고개를 돌리자 제 걸 다 먹은 제임스가 다시 이안의 타르트에 손을 뻗고 있었다. 그새 주인이 있다고 한 걸 까먹은 게 틀림 없었다.

 “이거 이안 거야.”

 대신 노아가 다른 것을 쥐어 주었는데 제임스가 어째 좀 묘한 얼굴로 노아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묵묵히 디저트를 먹다가 마침내 스푼을 쥐어 흔들며 입을 열었다.

 “있잖아… 너 당사자의 허락이 있는 외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뭐?”

 “왜, 뭐라 그러지. 스와핑이라고 하던가? 아니다, 정부라고 하나…”

 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건지 뜬금없이 제임스가 이상한 소리를 하자 노아가 조금 입을 벌리며 제임스를 바라보았다. 스와핑 하니 드미트리가 생각이 나네. 물론 제임스는 드미트리에 비하자면 한 백 배는 더 나은 사람이었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부부 양 당사자의 동의가 있으면 외도를 하거나 정부를 두는 것도 괜찮은 지 묻고 있는 거야.”

 “그야… 본인들이 좋다면 괜찮겠지.”

 아직도 제임스가 왜 이런 걸 묻는지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해 하면서 노아가 대답했다. 노아의 대답에 제임스는 또 한참 생각에 잠겨 들었다. 그러는 동안 더 먹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저녁 배를 위해 입가심으로 쌉싸름한 차를 마시던 노아가 제임스의 질문에 고개를 돌렸다.

 “…그럼 노아, 너 그 이안 밀러란 사람과 진지한 사이야?”

 이안과 진지한 사이냐고? 노아가 잠시 고민했다. 이안은 자신을 좋아한다. 사랑한다고 까지 말했지만, 솔직히 노아는 이안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하는 말 전부를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게다가 어디부터가 대체 진지한 사이인지도 잘 감이 안 잡혔기에… 진지한 사이란 건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고, 또… 울면서 사랑 싸움도 하고 그래야 진지한 거 아닌가? 제가 자주 보던 드라마에서 커플들이 하던 걸 떠올리며 노아가 그렇게 확신하지는 않은 어투로 말했다.

 “아니, 그렇게 진지한 사이는 아닌데…”

 그렇게 말하고는 이상하게 가슴 언저리가 불편하고 조금 목이 타는 듯 하여 노아가 차를 꼴깍 마셨다가 이어진 제임스의 말에 줄줄 차를 흘리고 말았다.

 “그렇게 진지한 사이가 아니라면, 노아… 그럼 나와 결혼해 주지 않을래?”

 겨우 사레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대신 지저분하게 옷에 차를 줄줄 흘리고 만 노아가 입을 딱 벌리고 제임스를 바라보았다. 지금 제임스가 내게 청혼을 한 거야? 그 제임스가? 내가 꿈을 꿨나, 아니면 누가 차에 약을 탔나… 한참 만에서야 정신을 차린 노아가 겨우 되물을 수 있었다. 

 “…뭐라고?”

 “내가 최대한 잘해 줄게. 그냥 나랑 결혼만 해주면 돼. 너 원하는 대로 그 Tear라는 클럽에 다녀도 되고, 아니면 애인을 사귀거나… 아예 집 안에 디저트 가게를 차려 놔도 되고…”

 그렇게 말하는 제임스의 얼굴에는 한 치도 장난하는 기색이 없었다. 노아가 심각하게 고민했다. 대체 언제부터 제임스가 그런 식으로 나를 좋아한 거지? 단 한 번도 제임스가 자신을 그런 식으로 좋아하리라고는, 노아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사실 지금도 딱히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결혼 중에 외도 비슷한 것도 하기 싫으면 내가 네 취향에 맞추도록 노력할 수도 있어.”

 제임스의 말에 노아는 또다시 뭐라고? 하면서 똑같이 되묻고 말았다. 정신이 조금 혼미한 것도 같았다. 저녁을 위해 배는 조금 비워두자고 다짐 했건만 어느새 노아의 손은 더듬거리며 단 것을 찾고 있었다.

 “엉덩이 때려주는 것 쯤이야, 뭐…”

 그렇게 말하는 것부터가 제임스가 이 쪽에 대해 얼마나 아는 것이 없는 가를 알려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엉덩이 때려주는 것은,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스팽킹은 때리는 사람이나 맞는 사람이나 체력 소모가 제법 컸다. 팔이 아픈 건 기본이고 맞는 상대방이 고통에 몸부림을 쳐 자칫 위험한 곳을 맞지 않게 잘 제어도 해야 하는데다가 분위기도 잘 잡아야 했으니까. 

 대답을 기다리는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제임스에 한참 만에서야 노아는 겨우 입을 열어 제대로 말할 수 있었다.

 “피 멍이 들 정도로 엉덩이를 때릴 수 있다고?”

 “뭐? 피 멍…? 그건 좀 심한데.”

 “아니면 전기 충격을 좀 준다던가… 목을 좀 졸라준다던가…”

 제임스가 인상을 썼다. 그건 고문하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노아는 그 대답에서 제임스가 하루 아침에 갑자기 취향이 바뀐 건 아님을 확신했다. 그럼 대체 뭐지… 하여간 제임스가 제법 진지하게 청혼을 한 것 같았기에 노아는 상처 같은 걸 입히지 않고 최대한 돌려 말하려고 애를 썼다.

 “있잖아… 일단 난 이혼 할 생각이 없어.”

 “응? 이혼 같은 거 안 해도 되는데.”

 “나와 결혼하자면서?”

 “그래, 나와 결혼하고 나서 이혼 할 필요가 없다고.”

 노아는 제임스와 자신 사이에 무언가 엇갈리는 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임스. 혹시 나 이미 결혼한 거… 몰라?”

 노아의 말에 제임스는 스푼을 쨍그랑 떨어트리면서 눈을 커다랗게 뜨는 것으로 전혀 노아의 결혼을 몰랐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입을 잠시 벙긋거리다가 제임스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부터 결혼했는데?!”

 “한 네 달 전?”

 “누구랑?? 아, 아니지. 그러니까… 그 이안이란 사람과?”

 “응…”

 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임스는 그렇구나… 하고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말했는데 그건 단지 제 친한 친구가 어느새 결혼했다는 사실에 놀란 것뿐이지 딱히 실연의 상처를 받은 얼굴은 아닌 것 같았다. 

 “늦었지만 결혼 축하해. 결혼식 초대해 줬으면 당장 날아왔을 텐데.”

 “너한테 연락을 할 수 있었어야지.”

 "그건 그래.”

 간단하게 수긍한 제임스가 돌연 진지하게 노아에게 사과를 했다.

 “미안해, 노아. 결혼한 사람에게 청혼을 해서. 많이 당황했겠다.”

 음… 아주 많이 당황했지, 정말. 그 동안 종종 결혼하자는 소리를 제법 들어왔지만 노아는 단 한 번도 제임스에게 받은 청혼만큼 놀란 적은 없었다. 서로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 가운데 제임스가 투덜거렸다.

 “아니, 분명 나한테는 진지한 사이가 아니라면서? 그래서 사귀는 사이가 아닌 줄 알았잖아.”

 “그야… 뭐…”

 상대방이 결혼한 걸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진지하냐는 질문을 들으니 노아로서는 뭔가 다른 의도가 있는 질문이 아닌가 고민하게 되었을 뿐이었다. 물론, 지금 생각해보니 자신이 왜 그랬나 싶기도 하고. 결혼이면 충분히 진지한 사이라고 말할 수 있는 관계였으니까.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야? 갑자기 귀국까지 한데다가 우리 집에 와있고, 게다가 청혼은 왜 한 거야?”

 노아의 말에 제임스가 땅이 꺼져라 아주 깊은 한숨을 쉬면서 테이블에 앉더니 노아가 마시던 차를 빼앗아 단숨에 모조리 마셨다. 노아는 잠자코 제임스에게 물을 따라 내주었다. 

 “어머니가 약혼하라고 성화셔.”

 “너네 어머니께서?”

 제임스의 어머니는 여자 알파로 테너와 마찬가지로 알파 우월주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어머니도 알파지, 아버지도 알파에… 보통은 자식들도 알파일 확률이 높지만 제임스만이 집안에서 유일하게 베타였다. 그래서 제임스가 더욱 집에 잘 붙어있지 못하는 것이었고, 두 부모도 쉬이 제임스 대신 동생을 가문의 후계자로 삼을 수 있었다.

 “전부터 이야기가 나왔지만 계속 거절했더니 이번에는 아예 사람을 보내셨더라고. 등잔 밑이 어둡다고, 너네 집으로 도망오긴 했는데 얼마나 갈지 모르겠다.”

 노아가 눈썹을 찌푸렸다. 부드럽고 얌전한 태도로 부탁을 하면 성미가 누그러져서 한 발 물러나 주는 테너와는 달리 제임스의 어머니는 절대 물러나는 일이 없는 고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한 번 약혼을 결심했으면 끝까지 밀어 붙이는 성미였으니 제임스가 여기로 도망 온 것이 좀 이해가 되었다.

 “너네 아버지께서는 별 말이 없으셨지만 두 분 친하시니 들키는 건 시간 문제겠지. 아니… 상대가 좀 평범하면 나도 따르기라도 하겠어. 어쨌든 나도 언젠가 결혼은 해야 할 테니까. 그런데 이건 좀 심하잖아.”

 “대체 상대가 누구길래 그래?”

 “아직 성인도 되지 못한 애야, 애! 이제 고작 14살짜리라고.”

 제임스가 괴로워하며 머리카락을 쥐어 뜯었다. 만사 태평하기만 한 제임스라도 어머니의 횡포(?)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물론, 노아도 상대가 14살짜리라는 말에는 매우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걔가 성인이 되면 당장 결혼시키실 기세던데, 내가 그런 어린애를 데리고 결혼할 마음이 생기겠어?”

 노아는 저런, 저런… 하고 진심으로 측은해 하는 마음으로 제임스의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그래서 너에게 청혼을 한 거라고 말하면서 제임스가 어머니의 독재가 매우 부당하다며 하소연 하는 걸 듣던 노아의 머리에 누군가가 반짝 하고 떠올랐다.

 “저기, 아니면… 다른 사람과 약혼한 척 하는 건 어때?”

 “하지만 난 너 말고 딱히 아는 사람이 없는데.”

 제임스가 고개를 저었다. 전부터 부평초마냥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여행을 했기 때문에 제임스는 친한 동물들은 여럿 있어도, 친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노아가 혹시 모르니 연락해 보라며 핸드폰에 적어준 이름과 연락처를 본 제임스가 소리 내어 읽었다.

 “이름이 헤더라고?”

 “응, 아마… 내가 알기로는 의뢰만 하면 뭐든지 연기해줄 거야. 직접 경험해 봤는데 악녀 연기도 되게 잘하더라고.”

 그런 사람도 있냐며 반신반의 하면서도 제임스는 몹시 솔깃한 얼굴을 했다. 마음 써 줘서 고맙다고 말한 제임스가 당장 전화해볼 생각인지 핸드폰을 들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아마 헤더라면 제임스의 어머니에게 충분히 맞서고도 남을 것이다. 

 “그럼 나도 이제 올라가 볼까.”

 노아가 이안을 위해 남겨 두었던 타르트와 포크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나가다 흘깃 보니 테너는 소파에 축 늘어져 주치의의 진찰을 받고 있었다. 테너가 이를 바득바득 가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이안이 테너에게 이긴 모양이다. 그럼 이안 기분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겠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타르트를 들고 노아가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것은 팔짱을 끼고 자신을 무시무시하게 노려보고 있는 이안의 모습이었다. 머뭇거리며 자리에서 멈춘 사이 이안은 노아를 잡아 침대 위에 던지다시피 하고는 겨우 타르트를 소중하게 품에 안고 있는 노아에게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결혼한다고 대답한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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