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2/107)

82

 “이게 얼마만이야.”

 제임스가 활짝 양 팔을 벌리며 반갑게 다가와서는 노아를 있는 힘껏 으스러져라 꽉 끌어 안았다. 제임스는 제법 잘생겨 호감이 가는 얼굴형에 그을려 갈색에 가까운 건강한 피부를 가진 사내였다. 그리고 제임스의 그 행동에 미소 짓고 있던 이안의 입 꼬리가 삐딱한 각도로 좀 기울었다. 제임스를 여기서 보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한 노아가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아니… 어떻게 네가 여기 있는 거야?”

 “응? 음… 내가 좀, 집에 못 들어갈 사정이 있어서. 아저씨께 말씀 드렸더니 흔쾌히 여기서 지내도 된다고 하시더라고.”

 테너에 대해 친근한 호칭을 사용하면서 제임스가 웃었다. 이안은 제임스가 그냥 친구 정도가 아니라 가족 단위로 친한 사이임을 알아 차렸다. 제임스가 매우 스스럼없이 노아에게 다가가는 친밀한 태도는 절대 이안에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분명히 테너가 일부러 저 친구라는 놈을 불러들인 게 틀림 없었다. 테너가 저를 매우 짜증나게 만들려는 목적이었다면 벌써 성공했다.

 “그 쪽은…?”

 뒤늦게 이안을 발견한 얼굴로 제임스가 악수를 청하면서 웃었다. 그 누구에게도 호감을 살 법한 서글서글한 인상이었지만 이안은 무표정하게 제게 내밀어진 손을 빤히 쳐다 봐 제임스를 좀 어색하게 만든 뒤, 미소를 지으며 내밀어진 손을 꽉 잡아 흔들었다.

 “이안 밀러 입니다. 만나서 반갑군요.”

 “아, 저도 반갑습니다. 제임스 프레넷입니다.”

 일부러 아프도록 손을 꽉 잡아 인사한 이안이 보란 듯 노아의 허리를 팔로 감쌌다. 그러자 제임스가 조금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안과 노아를 바라보더니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제 기분 탓인 건지 마치 너, 알파였어? 하는 듯한 의미로 들렸는데 여하간 이안은 기분이 팍 상했다. 그냥 제임스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그럼 이안과 저택 좀 둘러보고 올게요.”

 “그래, 저녁 먹을 때 부르마.”

 굉장히 흐뭇한 얼굴을 한 테너가 너그럽게 말했다. 딱히 이안의 표정에 그리 큰 변화가 있지는 않았지만 테너는 이안의 기분이 매우 나쁠 거란 걸 어렵지 않게 눈치 챘다. 왜 모르겠나. 테너는 경험상 알파에게 제일 열 받는 상황이 어떤 건지 잘 알고 있었다. 이안이 그저 노아를 좋아하지 않고 결혼을 이용했을 뿐인 것이던지, 아니면 정말 진심으로 노아와 결혼한 것이던지 어느 쪽이던 테너에게는 이득이었다. 전자라면 둘의 사이를 갈라 놓기에 적절하고, 후자라면 이안을 엿 먹이기에 적절했으니까…

 아멜리아, 당신은 내가 유치하다고 하겠지. 테너가 속으로 죽은 부인을 향해 중얼거렸다. 하지만 저 애송이가 내 뒤통수를 후려친 상황에서도 감히 저 혼자만 좋아 시시덕거리는 꼴은 눈에 흙이 들어가도 못 봐줘! 이안이 노아와 함께 방으로 올라가는 걸 보며 테너가 이를 박박 갈았다. 

 ***

 “여기가 제 방이에요.”

 노아가 문을 열며 이안에게 보여줬다. 노아도 참으로 오랜만에 방문하는 방은 이제는 주인이 없었지만 이전과 같이 깨끗하게 잘 유지되어 있었다. 다만 침대가 전 보다 훨씬 크기가 커졌다는 것만이 다른 점이긴 했다. 방을 둘러본 이안이 코트를 벗으며 노아에게 따졌다.

 “도대체 저 친구란 놈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제임스 네 가족이 저희 집안이랑 굉장히 친하거든요.”

 마찬가지로 코트를 벗은 노아가 뭐가 신경 쓰이는 건지 방 어딘가를 힐긋거리면서 설명했다. 

 “제임스가 어디 여행만 가지 않으면 사실 거의 매해를 파티란 파티는 거의 같이 참석해서 보내곤 했으니까...”

 “그런데 하필 내가 너네 집에 오는 날 바로 전 주에 귀국해서 굳이 너네 집에서 신년 파티를 보내겠다 왔다 이거지? 아주 우연히도?”

 “어… 거기에 아버지의 심술도 조금…”

 “조금? 조금 수준이 아니던데. 그리고 아까부터 저기는 왜 자꾸 쳐다 봐?”

 이안이 눈썹을 치켜 올리며 아까부터 노아가 자꾸 힐끔거리면서 시선을 보내던 곳으로 걸어갔다. 노아가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동안 이안은 액자도 들춰 보며 그저 평범하기만 한 벽을 이리저리 살펴 보다가 설마 하는 얼굴로 나무 장식장를 통통 두들겨 보았다. 안이 꽉 찬 소리가 났다.

 “여기에 숨겨 놨어?”

 “다른 사람 눈에 보이면 안 되니까요.”

 노아가 다가와 장식장,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버튼을 누르자 문이 열렸다. 안에는 Tear에서 제작한 게 틀림 없는 커다란 상자가 안을 빽빽하게 메우고 있었는데 클럽을 다니던 초창기부터 모아온 것인지 상자마다 색이 달랐다. 위 아래로 훑어보던 이안이 제일 윗 칸에 있던 상자를 들어 내려 놓고는 뚜껑을 열자… 그 곳에는…

 “이건 Tear에서 안 파는 건데.”

 이안이 아무리 봐도 영락없는 뱀장어로 밖에 보이지 않는 물건을 집어 들며 중얼거렸다. 유일하게 뱀장어 같지 않은 부분은 꼬리에 미세하게 가 있는 실금 밖에 없었다. 대답을 요하는 얼굴로 노아를 바라보자 노아가 시선을 피했다. 오호라, 다른 가게 물건을 Tear 상자 안에 넣어뒀다 이거지.

 “꽤 아끼는 물건들 같은데 왜 결혼할 때 안 들고 왔어?”

 “그게 결혼 할 때는 머지 않아 곧 이혼할 줄 알았거든요…”

 “오, 그래?”

 이안이 대답하는 뉘앙스에서 불길함을 감지한 노아가 헉 하고는 달려 들었지만 이미 뱀장어를 쥐고 있던 이안의 손에는 힘이 들어간 후였다. 똑 하고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에 노아가 안 돼! 하면서 90도 각도로 꺾인 뱀장어를 안타깝게 손에 쥐었다. 

 “이거 한정판이라 다시는 안 파는 건데…”

 이안이 들은 척도 하지 않자 노아가 성격 진짜 나빠… 하면서 울먹거렸다. 안녕, 뱀장어야… 노아가 슬프게 한 때 저를 즐겁게 해주었던 뱀장어를 맨 아래 상자로 옮겨 고이 넣었다. 그 다음으로 이안이 손에 든 건 영 이상하게 생긴 물건이었다. 좀 굵은 돌기 형 고무 딜도 같이 생겼는데 투명해서 안이 조금 비어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손가락을 밀어 넣어보자 탄력 있게 늘어져 손 까지도 쉽게 들어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작동을 하는 모양인지 버튼이 달린 전선이 늘어져 있었다.

 “너 이거 어떻게 쓰는 물건인지는 알고 사온 거야? 혼자서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닌데.”

 방금 제 소중한 보물 1호를 떠나 보내고 실의에 빠져 있던 노아가 시무룩한 얼굴로 이안이 든 걸 바라 보았다.

 “혼자 사용하는 물건이 아니라고요?”

 “그래. 꽤 취향 타는 물건인데… 사용법 가르쳐줄까?”

 노아의 턱을 잡아 간질이며 말 하는 뉘앙스가 오늘 밤의 즐거운 시간을 의미하고 있었기에 시무룩했던 것도 잠시 노아가 눈을 반짝거렸다. 응, 사용법… 알고 싶어! 그러나 노아의 끄덕임에도 이안이 어깨를 으쓱하며 손에 들고 있던 걸 도로 내려 놓았다.

 “하지만 난 성격이 나빠서 사용법 같은 건 못 가르쳐 줄 텐데.”

 치사하게도 아까 노아가 잠시 성격 나쁘다고 한 걸 걸고 넘어졌지만 노아는 눈 앞의 유혹에 홀랑 제 자존심을 팔아 넘기고 말았다. 

 “누가 그랬어요? 이안 성격이 얼마나 좋은데요.”

 노아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이안을 빤히 바라보는 모습이 만약 꼬리가 있었다면 엉덩이에서 몹시 세차게 흔들리고만 있을 것 같았다. 피식 웃은 이안이 턱을 만지던 손을 옮겨 엄지 손가락으로 꾹 한 번 혀 끝을 짓눌렀다. 노아가 목 울대를 울리며 그 행동에 설레어 할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저녁을 알리는 고용인이었다.

***

 제임스 프레넷은 생각보다도 아주 많이 이안에게 거슬리는 존재였다. 그 것도 테너와 쌍으로 묶이자 그 두 배로 더 짜증이 났다.

 “물론 기억나죠, 아저씨. 그 때 정말 얼마나 즐거웠는지. 노아 너도 기억나지? 프랑스 니스 해변에서 그 여자.”

 그러니까 보통 이런 걸 소외감이라고 부르는 건가, 하고 이안이 생각했다. 물론 이안에게 있어서는 소외감이라기 보다는 짜증에 가까웠을 뿐이었다. 무언가 이안은 모르는 이야기로 떠드는 가족들 사이에서 이안이 연신 웃어대며 친근하게 제임스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노아를 보고는 미소를 유지하며 생각했다. 노아… 노아, …오늘 밤 어디 보자고. 

 “그러고 보니 이안과는 잘 지내고 있느냐?”

 테너가 굉장히 관대하게도 제 사위에게 크게 신경을 써주는 척 하면서 물었다. 그것도 이안이 아닌 노아에게 묻는 것이었다. 노아는 그 때서야 뒤늦게 이안이 활짝 웃는 얼굴을 보고는 오늘 밤 플레이에 대한 불안함이 들었는지 이안의 편을 들어주었다. 물론 아주 늦은 감이 있는 편들기였다. 

 “그럼요, 사흘 전만 해도 같이 저녁 먹고 영화관 가서 데이트… 하기로 했는걸요.”

 데이트라는 말을 내뱉을 일이 거의 없었기에 노아가 조금 민망해 하면서 말했다. 그리고는 눈을 조금 굴리다가 덧붙일 필요성을 느꼈다. 

 “그런데 아쉽게도 전날 이안 회사에 일이 생겨서, 좀 나중에 같이 가려고요. 이제 일도 제법 마무리 되었으니까…”

 왠지 데이트라는 말을 할 때 노아가 드물게도 부끄러움을 타는 것 같아 무언가 느낌이 온 이안이 잠시 말끄러미 쳐다보는데 테너가 그 분위기에 크게 웃으면서 이안에게 있어서는 매우 좋지 않은 것을 투척했다.

 “그럼 신년 파티니까 오랜만에 가족끼리 다 같이 영화를 보는 건 어떠니?”

 “네?”

 “저택에 상영관도 있으니까 영화사에서 필름만 받아오면 될 거다.”

 “나 영화 좋아요!”

 평소에 교육 때문에 영화나 애니메이션, 혹은 텔레비전 방송 따위는 거의 보지 못하는 조카가 잔뜩 들떠서 소리쳤다. 어… 이게 아닌데… 노아는 이안이 어린 조카 아이, 그리고 가족들… 제임스와 함께하는 영화 상영을 요만큼도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데 아까 그 장식장에 있던 제 소중한 상자들을 모두 걸 수도 있었다.

 "영화 보니까 좋겠네, 멜로디."

 "나 멜로디 아닌데..."

 "아, 미안. 아만다? 엘리스?"

 활짝 웃으며 제 조카에게 말을 건넸다가 이름을 틀려 제임스가 쩔쩔맸다. 예전부터 제임스는 주변 사람들 이름이나 신상을 외우는데 퍽 어려움을 겪곤 했다. 특히 여자 친구의 경우에는 하필 전 여자 친구와 신상 정보를 헷갈리는 바람에 뺨을 맞은 적도 여러 번이었다. 노아가 웃으면서 제임스에게 속삭여 알려 주었다.

 "릴리야, 릴리. 왜 우리 릴리 이름은 헷갈리고 그래?"

 "오, 릴리. 미안, 삼촌이 잠시 착각했어."

 벌써 불퉁스러운 조카애를 달래고는 제임스가 몰래 알려 줘서 고맙다면서 친근하게 노아의 어깨를 감쌌다. 아무 생각 없이 그 행동에 이름 좀 잘 외우라며 웃던 노아는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뜨거운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가 흠칫 놀랬다. 이안이 노아에게 씩 웃어 보이고는 우아하게 와인을 마셨는데, 노아는 어쩐지 그 웃음에서 지난 번 모든 진실이 들켰던 그 날 밤의 이안의 미소를 보는 것만 같았다...

***

 "아으으..."

 조금 피곤한 얼굴로 거울 앞에 선 노아가 제 목덜미며 어깨를 뒤덮은 얼룩덜룩한 자국을 보면서 눈을 비볐다. 이안은 처음으로 노아의 저택에서 밤을 보내는 건데 그저 평범하게 보낼 수 없지는 않냐며, 아주 잊을 수 없는 밤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고... 그건 여러가지 의미로 정말이지 잊을 수 없는 밤이었다.

 아직도 허리 아래가 노골노골 녹아 내리는 것 같아 노아가 조금 울상을 했다. 그거 제대로 된 사용법을 알려주겠다고 해서 내가 어젯밤을 얼마나 기대를 했는데... 제대로 된 사용법은 무슨 어제 이안은 단 한 번도 도구를 쓰지 않았다. 노아에게는 몹시 불행하게도 이안이 제대로 사용한 것은 오로지 이안의 입과 손가락과 훌륭한 물건 밖에 없었고, 그 것만으로도 노아에게는 충분히 괴로워 우는 밤이 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앞으로는 특히나 저녁 시간 대에 이안을 질투하게 만들면 안 되겠다는 아주 중요한 교훈을 얻은 노아가 마저 샤워를 마치고 비칠거리며 나왔더니 이안은 벌써 옷을 전부 깔끔하게 갈아 입은 상태였다. 아직도 다리가 후들거려 조금 비틀거리는 노아에게 다가온 이안이 몹시 만족스러운 얼굴로 친절히 입을 옷을 건네 주었다.

 "생각해 보니까 네가 결혼한 알파 앞에서 네 친구와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아뇨, 아주... 나쁜 것 같은데요. 노아가 중얼거리면서 옷을 입었다. 그나마 오늘은 외출할 일이 없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오늘은 가족들도 다 같이 보니까 아예 제임스 근처에도 앉지를 말자. 릴리나 아니면 올리비아나, 벤자민 옆에 앉는 거야. 노아가 다짐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저택이 유별나게도 조용했다. 벌써 모두 상영관에 가있는 건가 의아해 하며 노아가 이안과 함께 내려오니, 1층 홀에 제임스가 서성거리며 서 있었다. 이안의 눈썹이 치켜 올려졌다. 제임스가 노아를 보자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아, 노아. 잘 되었다. 언제 너네가 내려오나 싶어서."

 "무슨 일이야? 아버지나 다른 가족들은?"

 노아가 어리둥절해 하면서 묻자 제임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노아는 제임스의 모습에서 왠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리고 항상 그런 불길한 예감은 비껴나간 적이 없었다.

 "이상하게도 다들 일이 생겨서 영화를 못 보겠다네. 대신 아저씨께서 미안하다고 우리끼리 보라고 영화를 예매해 주셨거든. 오랜만에 외출 할래?"

 더 없이 환히 웃은 제임스가 이안과 노아 앞에서 영화 티켓 세 장을 흔들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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