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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아직 말도 안 꺼냈는,”
“안 된다고, 안 돼, 절대.”
노아는 정말이지 이안에게 꼭 묻고 싶었다. 대체 어떻게 그렇게 소리 없이 제 근처에 가까이 올 수 있는지를. 아니면 내가 그렇게 둔한 건가… 게다가 귀도 밝지, 핸드폰 건너편에서 상대방이 말하는 목소리도 이안이 다 들은 모양이다. 이안이 저리 강하게 반대를 하니 노아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제임스가 제 이름을 불러댔다.
-노아? 왜 대답이 없어.
“음… 내가 나중에 다시 연락 줄게.”
제 친구가 지금은 통화가 곤란하다는 걸 눈치 챈 제임스가 그래, 그럼… 하고 선선히 통화를 끊었다. 노아가 핸드폰을 내려 두고 제 앞에 팔짱을 끼고 선 이안을 올려다 보며 눈을 굴렸다. 이안이 저렇게 반대하는 이유가… 그러니까, 혹시 그건가. 질투… 라던가...
노아는 예전에 클럽에서 친하게 지내던 오메가가 투덜거리는 걸 몇 차례 들은 적이 있었다. 내 섭(Sub)은 알파라서 그런지 정말 질투가 심하다니까. 아니, 친구를 도통 못 만나게 하는 거 있지. 결국 한 번 된통 혼내주고 난 뒤에 같이 친구를 만나러 가기로 겨우 합의했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 오메가의 목소리에는 제 애인을 자랑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제 애인이 질투하는 만큼 저를 사랑하는 거나 다름 없다고도 했던가……
이안이 제임스에게 질투를 한다고 생각하니 노아는 되게 기분이 이상했다. 결혼하기 전까진 한 번도 제대로 애인을 사귀어 본적이 없어서 저 때문에 질투를 한다는 상황 자체를 겪어 본적이 없어 생소하기도 했다. 노아는 나름 이안이 제임스가 베타인 걸 모르기 때문에 저렇게 질투를 한다고 판단을 했다.
“이안, 제임스는 알파가 아니라 베타에요.”
“알파건 베타건 무슨 상관이야. 지난 번에 그 가브리엘인가 하는 가정교사는 오메가였잖아.”
어… 그건 그래… 보통은 테너처럼 오메가와 오메가가 만날 때 딱히 경각심을 가지진 않지만, 확실히 저번 사건이 있으니 노아는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몹시 불만스러운 얼굴로 미간이 구깃구깃한 이안을 바라보다가 노아가 좋은 수를 떠올렸다. 뭐, 딱히 좋은 수 까지는 아니고 그 때 그 애인을 자랑하던 오메가의 방법을 따른 것이었지만.
“그럼, 친구 만나러 갈 때 이안도 같이 갈래요?”
제임스는 노아의 결혼식 때 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지 않은 것이라기 보다는 연락이 안 된 것인데, 워낙 연락이 안 되는 때가 많은 친구라 노아도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보아하니 그 동안 외국에 나가 있었을 때라서 연락이 안 된 모양인데… 노아의 말에 이안이 눈을 조금 가늘게 떴다.
“같이 만나러 가자고?”
“네에… 제가 혼자 가는 게 싫은 거라면…”
확실히 노아의 말을 듣자 이안의 불만이 상당히 풀렸는지 어느새 그가 끼고 있던 팔짱도 풀려졌다. 노아는 왠지 이안이 조금 귀여운 것 같다고 생각했다.
“뭐, 정 같이 가고 싶다면… 일이 없을 때 말할 테니 그 때로 약속을 잡도록 해.”
“그럴게요.”
이안에게 대답해 주면서 노아가 조금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이상한데, 이안의 대답을 들으니 기시감이 드는 게… 이안이 바쁘지 않을 때 전해주겠노라고 누군가에게 따로 또 약속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러나 때마침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다니엘이 바쁜 와중에서도 짬을 내어 노아를 위한 간식을 들고 와 노아는 그 생각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노아가 마침내 그 기시감이 무엇인지 떠올린 것은 다시 핸드폰에 전화가 왔기 때문이었다. 다니엘에게 내 입은 입도 아니냐고 구박하여 기어이 저를 위한 간단한 요기거리를 뜯어낸 이안이 다시 업무에 한참 집중하고 있을 때로, 진동 소리를 듣자마자 이안이 노아에게 시선을 던졌다.
“또 그 녀석이야? 나중에 연락하겠다고 한 거 아니었어?”
언제 보았다고 벌써 호칭이 그 녀석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안은 원래 거의 모든 사람에게 호칭이 정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아가 핸드폰을 힐끔 내려다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세요.”
아버지라는 말에 이안이 도로 심드렁하게 시선을 돌렸다. 반응을 보아하니 여기서 받아도 딱히 상관 없을 것 같아 노아가 전화를 받았다. 아까도 전화 통화에 방해 받지 않는다고 본인 입으로 말하기도 했고. 테너는 노아의 목소리를 듣자 반가워 하며 잘 지내냐고 묻고는 이내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 집에는 언제쯤 올 생각이더냐? 영 연락이 없어서 내가 먼저 전화했다.
“아…”
그제서야 노아는 지난 번, 이안에게 모든 진실이 밝혀지기 전 테너와 전화통화를 하면서 이안과 같이 집에 방문하겠다며 날짜가 정해지면 연락하기로 한 것을 떠올렸다. 그 후에 좀 정신 없는 밤을 보내느라 이안에게 묻는다는 게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그런데 어차피 지금은 같이 갈 수가 없는데. 그 때 테너가 근엄하게 말해왔다.
-어차피 밀러는 회사 일 때문에 당분간 바쁠 예정이지 않니. 너라도 먼저 오는 게 낫지 않겠느냐.
“물론... 이안이 바쁘긴 하지만요,”
제임스와 통화할 때는 딴 판으로 제게 신경조차 쓰지 않는 이안을 보면서 노아가 말 끝을 흐렸다. 제 이름이 언급되자 이안이 의아한 시선을 한 번 보내왔다. 테너는 조카들도 너를 기다리고 있다며 한번 더 먼저 올 것을 권유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무슨 일이야?”
“그게, 저번에 말한다는 걸 잊어 버린 게 있거든요.”
노아가 테너가 집에 좀 오라고 말한 것과 이안과 함께 간다고 대답했던 것 등, 방금 전의 통화 내용까지 말하자 갑작스럽게 이안의 입가에 그린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노아는 이안의 미소를 이해 할 수 없어 어리둥절해 했다. 테너를 만나는 게 이안에게 딱히 좋을 일은 아닐 텐데.
“아하, 어쩐지 그게 왜 그렇게 되었나 했더니.”
이상하게도 일이 급하게 터졌다 했어. 착각인지 이안이 이를 가는 듯한 소리를 냈다. 그 말로는 일이 어찌된 건지 알 수가 없어 노아가 눈을 깜박이자 이안이 친절하게도 설명을 해주었다.
“요약하자면 지금 내 회사에 갑자기 일이 터진 게 네 아버지 때문이란 이야기야.”
“아버지가… 일부러 그러셨다고요?”
지난 번 테너에게 거의 들킬 뻔한 일로 이안에 대한 테너의 감정이 좀 상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이안의 회사에 타격을 줄 정도로 싫어하게 된 줄은, 노아는 꿈에도 몰랐다. 아니면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지난 번 크리스탈 자선 파티 때 알리샤가 말했던 그 F&N 어쩌고 매각 사건 때문이었던가? 안 그래도 이안이 이렇게 손해를 입을까 염려스러웠던 게 이혼을 하기로 다짐했던 이유 중 하나였기에 노아가 근심스러운 얼굴을 하자 이안이 우쭐거리는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겨대며 말했다.
“너와 이혼을 해서 네 아버지를 열 받게 하는 건 물 건너 갔으니 조금 다른 쪽을 건드려 주었거든. 아마 그 건으로 손해 좀 입으셨을 걸.”
그 말에 노아가 조금 뜨악한 얼굴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혹시 그… F&N 회사 매각… 때문이에요?”
“오, 알고 있었네. 그거랑 뭐 몇 가지 좀… 일이 있었지.”
이제까지 내가 한 건 전혀 쓸데 없는 걱정이었구나. 노아가 생각했다. 그는 이제 자신 때문에 이안의 회사가 손해를 입는 다는 생각은 치워 버리기로 했다. 그냥 이안은… 스스로 적을 만드는 타입인데다가, 아무리 노아를 좋아한다고는 해도 테너에게 가진 악감정(?)을 두고 그냥 넘어갈 정도로 성격이 좋지 않을 뿐인 것이다.
그래, 원래 세간에 알파와 알파… 아니면 오메가와 오메가의 사위, 며느리 혹은 장인, 장모 등등의 조합이 그다지 좋지 않다고 알려져 있는 것처럼 이 역시 그냥 지고는 못 사는 두 강력한 알파의 충돌이기도 했다. 노아는 잠시 주변 사람들이 시댁 혹은 처가와의 갈등으로 불평 불만을 토로하던 걸 떠올려 보았다.
…그럼 이런 것도 결혼 생활에 따라오는 당연한 갈등인 건가…? 뭔가 좀 아닌 것도 같은데.
“어쨌든 잘 알겠어. 사흘 후에 나와 같이 찾아 뵙겠다고 전해드려.”
“사흘 후요?”
노아는 다니엘이 아까 한 일주일은 꼼짝없이 야근을 해야겠다며 한탄하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안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사흘이면 된다면서 도로 서류에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노아는 슬슬 테너와 이안이 만났을 때가 걱정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
그 날 밤 10시쯤이 되어도 이안의 일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기에 노아는 먼저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자정이 거의 다 되어가는 시간이 되도록 이안은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노아는 이안이 한 때 소위 가출…을 한 이래로 오랜만에 혼자 잠자리에 들었다.
대체 언제 돌아온 건지 몰라도 노아가 아침에 일어나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이안이 저를 끌어안고 자고 있는 상태였는데 평소와는 달리 노아가 빠져나가려고 몸을 꿈틀거려도 깨기는커녕 눈썹 한 번을 들썩이지도 않았다. 조금 시간이 흐르자 깨어나긴 했지만 어쨌든 평소보다 이안이 피곤한 건 확실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뒤로는 아침에만 살짝 얼굴을 비추기를 반복하며 3일 째… 마침내 사흘이 되는 날 이안은 장담한 것처럼 모든 회사 일을 끝내고야 말았다. 노아 같으면 벌써 피곤해서 뻗었을 것 같았지만 이안은 눈이 조금 충혈된 것 빼고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안 피곤해요?”
회사 일이 끝나자마자 프로스트 가로 가는 길, 노아가 진심으로 궁금해져 물어보았다. 가는 길에 전자 패드를 들여다보고 있던 이안이 좀 거만하게 눈썹을 까딱거렸다.
“내가 막 처음 회사를 돌려 받았을 때에 비하면 그렇게 힘든 것도 아냐.”
제 부모의 회사를 조각조각 갈라 나눠가졌던 친척들이 얼마나 회사를 망쳐 두었던지 이안은 모든 회사와 재산을 회수한 뒤에도 한참을 고생해야 했다. 그 때에 비하자면 하루에 서너 시간이라도 잘 수 있던 요 사흘은 이안에게 딱히 힘든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이안이 이런 말을 할 때마다 노아는 제가 굉장히 평온하게 자라왔다는 걸 깨닫곤 했다.
“언제까지 머무를 수 있어요?”
지금 이안과 노아가 프로스트 가로 향하는 것은, 결혼 한지 세 달이 지나도록 노아가 한 번도 집에 들린 적이 없으니 답답했던 테너가 불러 들이는 이유도 이유였지만 곧 있을 신년 파티를 위해 가는 까닭도 있었다. 그리고 보통 신년 파티는 좀 오래 한다. 노아의 질문에 이안이 매끄러운 미소를 떠올렸다.
“글쎄, 네 아버지가 못 견디고 우리를 내쫓아버릴 때까지?”
아무래도 이안은 단단히 테너의 약을 올리기 위해 가는 모양이었다. 어쩐지 지나치게 순순히 가겠다고 하더라. 노아는 테너의 고혈압이 좀 걱정 되었다. 그래도 집에는 항상 주치의가 상주해 있으니까…
마침내 리무진이 프로스트 가에 도착하자 노아는 좀 오랜만에 보는 프로스트 가의 풍경에 기분이 좀 묘해졌다. 그것도 이안과 함께 들어서니 더더욱 좀 요상했다. 차에서 내린 이안이 무심한 눈길로 한 번 정원을 휙 둘러 보는 동안 저택 정문이 열리며 테너와 다른 가족들이 둘의 마중을 나왔다. 윌리엄은 없었지만 둘째 형 벤자민과 어린 조카를 품에 안고 있는 형수 올리비아와 제 엄마 뒤에 숨어 있는 다섯 살짜리 조카가 눈에 보였다.
“노아, 정말로 오랜만이구나.”
테너가 매우 반가워 하면서 노아를 꽉 끌어 안았다. 제 형들에게는 잘 하지 않는 애정 표현이기도 했다. 노아는 벤자민과 올리비아, 그리고 어린 조카들에게도 인사를 한 뒤 벌써부터 테너와 강렬한 시선을 교환하고 있는 이안을 슬그머니 툭툭 건드렸다. 테너를 제외한다면 결혼식 이후로는 다들 이안을 처음 보는 것이었기에 사실상 이번이 정식적인 첫 만남이나 진배 없었다.
“어서 오세요, 이안. 모쪼록 편히 지내다 가시길 바래요.”
올리비아가 상냥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었다. 제 엄마가 인사를 하라고 해도 어린 조카는 자꾸만 올리비아의 뒤에 숨어서 수줍음을 타느라 바빴다. 이안은 올리비아와 벤자민과 그럭저럭 평범한 인사를 잘 나눈 뒤에 테너의 앞에 웃는 얼굴로 섰다. 테너는… 아예 대놓고 좀 불퉁스러운 얼굴을 했다.
“아니, 회사 일도 바쁠 텐데 뭐 하러 왔나.”
노아는 저 말에서 ‘회사 일도 바쁠 텐데’ 라는 부분을 뺀 게 테너의 진심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테너의 직접적인 공격에도 이안은 태연했다.
“그다지 별 것도 아닌 일이라 신년 파티를 위한 여유 시간을 내기에는 충분했습니다. 걱정해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장인 어른.”
얼굴을 보아하니 노아는 테너의 혈압이 오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심상치 않은 테너와 이안의 분위기를 감지한 건 노아 뿐만이 아니었던 지라, 노아와 마찬가지로 사업 경영을 배우긴 했으나 결혼 이후로는 거의 손을 떼 무슨 일인지 사정을 모르는 벤자민과 올리비아는 왜 둘이 저렇게 분위기가 좋지 않나 의아해 하는 얼굴이었다.
노아는 테너가 좀 성질을 낼 것이라 생각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테너는 금새 그 분노를 가라 앉혔다. 웬일이시지,… 성질 좀 죽이라는 주치의의 말에 드디어 아버지께서 들으신 건가? 심지어 테너는 이럴 게 아니고 들어오라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기까지 했다.
“참, 이번 신년 파티 기간 동안 당분간 손님이 한 명 더 머물게 되었단다, 노아.”
“손님…이요?”
테너의 의미심장한 말투에 노아가 조금 불안한 기분으로 되물었다. 그리고 저택 안으로 들어섰을 때에서야 노아는 테너가 왜 그렇게 이것 보라는 듯한 표정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제 막 씻고 나왔는지 간단한 옷차림에 어깨에는 수건을 걸친 남자가 노아를 보고는 어? 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노아도 남자를 보고는 놀랬다.
“제임스?”
아니, 제임스가 대체 우리 집에는 왜 있는 거야…? 노아가 어리둥절해 하는 동안 환하게 웃으며 제임스가 노아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고, 이제까지 내내 태연함을 유지하던 이안의 미소에 처음으로 조금 금이 갔다.